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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치가 경제 해결 못할 때, 극단 세력이 틈새 파고든다

분류
논평이슈브리핑
발행일
2026년 8월 10일

편집자 주

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고정애 기자

강원택 교수님 중앙선데이 기고문 썸네일.jpg
강원택 교수님 중앙선데이 기고문 썸네일.jpg

1934년 6월 이탈리아에서 사열하는 히틀러(앞줄 왼쪽)와 무솔리니(가운데). 대공황과 정치 양극화는 두 전체주의 독재자를 낳았다. [중앙포토]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명장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만에 독일 민주주의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기본권을 정지하는 긴급명령이 발동됐고, 수권법으로 의회의 동의 없이 헌법을 바꾸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이 히틀러에게 주어졌다. 정당이 폐쇄되고 정적이 체포되며, 무장한 준군사조직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에서 독일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종말을 예감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쓴 소설 『베를린이여 안녕』에 그런 상황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결코 정치를 논하지 않는다.… 어느날 아침, 운터덴린덴으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우리는 서로 잡담을 하며 인도 전체를 가로막고 있는, 자부심 넘치는 나치  돌격대원들을 지나치게 됐다. 행인들은 길옆 도랑으로 걸어가야만 했다. N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서글프게 말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별 괴이한 풍경을 다 봐요.’ 그것이 그의 유일한 논평이었다.”

1930년대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1차 대전 이후 유럽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등장했지만 불과 20여 년 만에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독재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스페인은 프랑코 체제로 넘어갔다. 오스트리아·포르투갈·헝가리·루마니아 역시 민주주의를 유지하지 못했다.

1930년대 민주주의 붕괴는 경제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1929년 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뜨렸다. 독일에서 실업자는 600만 명을 넘었고 중산층은 삶의 기반을 잃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매우 민주적이었지만, 연정의 잦은 붕괴가 보여주듯 정치는 매우 불안정했고,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정치체제에 대한 신뢰는 사라져 갔다. 히틀러는 기존 정치인과 정당을 위기를 초래한 무능하고 부패한 세력으로 공격했다.

중도 설 자리 잃고 좌우 양극단 대립

경제위기 못지않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였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도정당은 약화된 반면, 공산당과 나치당과 같은 좌우 양극단 세력에 대한 지지가 커져 갔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첫 선거에서 사민당·중앙당·민주당 등 온건세력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1932년 7월 총선에서는 나치당이 230석으로 제1당이 되었고 공산당은 89석으로 원내 제3당이 되었다. 두 정당이 차지한 의석은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는 갈등과 이견을 해소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감과 대립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수록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실망감은 커져 갔고, 현 질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게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민주주의의 붕괴가 대공황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1차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지만 기대했던 영토와 보상을 충분히 얻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실업, 재정 악화가 겹쳤다. 이른바 ‘붉은 2년’(1919~20) 동안 거세진 노동운동·농민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과 혼란 속에 중산층의 공산혁명에 대한 공포도 커졌다. 하지만 분열된 의회와 잦은 정부 교체로 기존 정치권은 혼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가운데 보수층과 중산층은 질서 회복을 약속하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세력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1922년 ‘로마 진군’은 파시스트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국가를 장악한 것이기보다, 기존 정치 엘리트와 국왕이 무솔리니를 끌어들인 결과였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임명된 히틀러처럼, 무솔리니 역시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총리로 임명됐다. 총리 취임 후 무솔리니는 선거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의회를 장악했다. 1924년 총선에서 파시스트 세력은 폭력과 협박을 통해 압승했고, 무솔리니는 1925년부터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해 갔다.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 1930년대와 달리 거리에 탱크도,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준군사조직도 보이지 않는다. 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되고, 의회도 정상적으로 열리며, 헌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다시 민주주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현상이 나타났고, 유럽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독일·프랑스, 영국 등 각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다시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나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현상은 놀랄 만큼 1930년대와 유사하다. 1930년대 민주주의를 흔든 것이 대공황과 중산층의 붕괴였다면, 오늘날에는 세계화·탈산업화·정보화로 인해 산업구조와 고용 환경이 변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촘촘히 연계된 경제 구조 속에 좌파든 우파든 기존 정당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과 쇠퇴하는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은 기존 정당의 무능을 비판하며 그 빈틈을 파고들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 해결 능력이 이처럼 약화된 까닭은, 경제적 요인보다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하는 체제이지만, 양극화된 정치에서 상대방은 대화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해야 할 적으로 인식된다. 이 때문에 타협은 야합으로, 협치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는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고 효과적인 문제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가 단순히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체제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어려움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하면서 기존 체제를 불신하게 되고, 제도권 밖에서 기존 정치를 거세게 비판해 온 극단주의 세력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193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타협을 야합이라 우기면 정치는 퇴행

지난달 11일(현지시간)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린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 주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 [AFP=연합뉴스]

극단주의 세력이라고 해서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역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불안을 특정 집단의 책임으로 돌린다.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적’이나 ‘적폐’의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히틀러는 경제적 어려움의 책임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자유주의 정치인,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한 이른바 ‘11월의 범죄자들’에게 돌렸다. 무솔리니 역시 이탈리아의 혼란을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 무능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책임으로 규정했다. 오늘날의 포퓰리즘 정치 역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부패한 정치 엘리트, 기득권 관료, 주류 언론, 그리고 EU와 같은 국제기구, 그리고 이민자, 외국인의 탓으로 돌린다.

이처럼 193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1930년대와 오늘날은 분명 다르다. 오늘날의 포퓰리즘이 곧바로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과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 정치 전반에 대한 냉소, 정파적 양극화, 적을 만들어내는 정치,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기대라는 위험 신호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민주주의 위기의 한 요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의 경험에서 보듯이, 기존 체제가 문제 해결 능력을 잃으면서 정치와 정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시민들은 기존 정치권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현 질서를 뒤엎으려는 선동가와 극단 세력을 통해 그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표출하고자 한다. 극단 세력의 부상은 민주주의 밖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민주정치가 대표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잃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가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정치가 건강함을 되찾아야 한다. 특히 정당이 극단에 치우친 강경파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30년대의 비극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시민의 신뢰를 유지하는 정치의 역량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ㆍ나치즘과 파시즘=국가나 지도자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체제로, 전체의 목표를 위해 개인을 수단화하는 독재 형태. 나치즘이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했으며 히틀러가 ‘총통(Fuhrer)’으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한 데 비해 파시즘은 인종주의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국가지상주의가 핵심이며 무솔리니가 왕실·군부·가톨릭교회 등 기득권 세력과 어느 정도 공존하며 권력을 운용했다.

ㆍ민주주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선거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 제도적 견제 장치를 무력화하고 언론·사법부를 통제하여, 외형은 유지한 채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점진적으로 형해화하는 현상이다. 오르반(헝가리)·에르도안(터키)·트럼프(미국) 집권 현상에 주목하며 2016년 이후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됐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이자 국가미래전략원 원장. 서울대 출신이며 런던정치경제대학(LSE) 박사. 숭실대를 거쳐 2010년부터 서울대 한국의 정치·정당·선거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제5공화국』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국가의 탄생』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출처:중앙일보, 고정애 기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5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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