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 구상] ① AI시대 전략환경의 변화와 미래 한반도 구상
편집자 주
전재성 EAI 원장(서울대 교수)은 AI가 한반도 안보구조와 남북관계에 미치는 이중적 영향을 분석하며 AI 시대의 신한반도 구상의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AI가 군사적 위기 불안정성과 북한의 중국 기술 생태계 의존을 동시에 심화시켜 안보 딜레마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한편, 인간안보 분야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남북협력을 모색할 여지도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아가 전 원장은 통일을 정치적 합의가 아닌 장기적 통합 과정으로 재정의하며, 위험관리형 협력전략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 구상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한반도 안보와 남북관계, 그리고 장기적으로 한반도 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구상」 워킹페이퍼 시리즈를 발간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대북정책은 비핵화와 남북교류협력, 평화체제 구축, 통일을 서로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해 왔으나,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와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의 남북관계 재규정, 미중 전략경쟁의 구조화로 인하여 이러한 구상이 전제해 온 조건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기술발전 경로를 살펴보는 한편,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검토함으로써 AI 시대에 걸맞은 신(新)한반도구상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북한은 고성능 반도체와 컴퓨팅 인프라의 제약으로 프런티어 AI를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무인기와 사이버작전, 감시체계 등 특정 목적에 필요한 AI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선택은 남북 간 군사적 위기불안정성과 기술·지식격차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한국에도 새로운 대응 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AI 기반 감시정찰과 정보분석, 위기관리 능력을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한 대북 협력의 가능성을 위험관리의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습니다. 특히, AI의 민군 겸용성을 고려할 때 대북 협력이 북한의 군사능력이나 사회감시 능력의 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억제와 방어를 지속하면서도 조건이 허용되는 영역에서 협력을 준비하는 이중적 접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본 워킹페이퍼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로부터 출발하여 북한의 AI 발전경로와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대북 AI 협력 방향과 신한반도구상의 함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통해 AI 시대의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학술적·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의 전략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 구상 발간 목록] ① AI시대 전략환경의 변화와 미래 한반도 구상, 전재성 [워킹페이퍼 읽기] ② AI를 둘러싼 일반적 동향, 백서인 [워킹페이퍼 읽기] |
Ⅰ. 연구의 배경과 목적[1]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북정책은 비핵화와 남북교류협력, 평화체제 구축, 장기적 통일을 서로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해 왔다. 북한 핵문제는 협상과 보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고, 남북교류의 확대는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며, 북미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발전이 함께 이루어질 경우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그 바탕에 있었다. 보수와 진보 정부가 비핵화의 방법이나 남북협력의 속도, 평화체제와 동맹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설정하기는 했지만, 비핵화와 평화, 협력, 통일을 장기적으로 연결된 과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공통성을 유지하였다.
2020년대 중반의 한반도는 이러한 구상이 형성되었던 조건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 북한은 핵무력정책법 제정과 전술핵 운용의 제도화, ICBM과 SLBM을 포함한 핵투발 능력의 고도화를 통해 핵무기를 협상을 위한 일시적 수단보다 국가전략과 체제안보를 구성하는 지속적인 요소로 정착시키고 있다.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인식도 변하였다. 한국을 장기적인 통일의 상대이자 민족 내부관계의 한쪽으로 규정하던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재규정하고 있다는 점은 대남정책의 조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국가 정체성과 통일 인식, 대남 인식, 대외전략이 함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북러 전략연계의 강화, 미중 전략경쟁의 구조화, 중국의 한반도 현상유지 전략, 미국 대북정책의 현상유지 경향이 중첩되면서 협상과 관여를 통해 비핵화와 관계개선을 단계적으로 달성한다는 기존 구상의 국제적 조건도 약화되고 있다.
이 변화가 곧 기존 대북정책의 모든 전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핵화와 평화, 교류협력과 통일은 여전히 한국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이며, 평화공존 역시 현재의 남북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문제는 이 목표들을 연결해 왔던 인과관계가 이전처럼 작동한다고 전제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북한 핵능력이 장기간 지속되고 적대적 두 국가 관계가 제도화되는 가운데 남북교류와 정치적 대화마저 단절될 경우,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정된 평화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추세가 장기간 지속된다면 북한 핵은 사실상의 상수로 정착되고 남북의 상호 적대성이 제도화되며, 통일은 현실정책과 점차 분리된 헌법적·규범적 목표로 남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향후 20~30년의 대북전략은 기존 목표를 반복하기보다 변화한 조건에서 평화공존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장기적인 통합 가능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까지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이와 같은 한반도 구조 변화에 새롭게 결합하고 있는 변수이다. AI를 하나의 첨단산업이나 특정한 기술 분야로 한정해서 보기 어려운 것은 정보의 수집과 분류, 분석과 예측, 콘텐츠 생성, 판단 보조, 자동화와 시뮬레이션, 의사소통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조직의 정보처리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거대언어모델과 멀티모달 모델, 생성형 AI와 자율 에이전트는 로봇공학, 센서 네트워크, 클라우드 인프라, 첨단 반도체와 결합하면서 기업의 생산방식뿐 아니라 국가의 행정과 지식생산, 군사조직의 작전방식과 사회의 정보환경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AI의 전략적 중요성은 개별 기술의 성능보다는 국가와 사회가 정보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미래의 선택지를 비교하는 능력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AI가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이러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반도체와 첨단컴퓨팅뿐 아니라 데이터와 클라우드, 인재, 알고리즘, 표준과 군사응용을 포괄하는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국가는 생산과 금융, 공급망, 연구개발, 교육과 의료, 에너지 전환에서 새로운 우위를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기술과 인프라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국가는 발전격차와 기술종속에 직면할 수 있다. 국가가 시민과 정보를 관리하고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 역시 AI의 영향을 받으며, 감시정찰과 표적화, 무인체계, 사이버작전, 전자전, 지휘통제 등에 AI가 결합하면서 군사력의 구성과 전쟁 수행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 국제질서에서 나타나는 여러 변화도 AI 발전과 서로 분리되어 진행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약화와 미중 전략경쟁, 기술 공급망의 진영화, 반도체와 데이터의 안보자산화, 군사 AI 경쟁, 디지털 권위주의의 확산, 글로벌 사우스의 기술격차가 서로 결합하고 있으며, AI는 이 변화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속도를 높이는 변수로 작용한다. 개방적 세계화 아래에서 효율성을 기준으로 구축되었던 기술과 생산의 연결망은 점차 안보와 주권,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의 논리에 따라 재조정되고 있다. 기술블록화와 전략적 디커플링, 통제된 상호의존, 데이터 주권과 표준경쟁이 함께 진행되는 국제환경에서 AI는 강대국 경쟁의 한 분야에 그치지 않고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주요 영역이 되고 있다.
한반도는 이미 군사적 대치와 핵문제, 체제경쟁, 동맹정치, 강대국 경쟁이 중첩되어 있는 공간이며, AI의 발전은 여기에 새로운 차원의 경쟁과 의존을 추가한다. 북한은 고성능 반도체와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데이터와 상업적 기술생태계의 제약 때문에 프런티어 AI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가 북한을 AI 발전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아니다. 공개된 모델과 자체 인력, 사이버 역량을 이용하여 특정 목적에 필요한 AI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중국의 오픈소스 모델과 기술생태계에 부분적으로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 대러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강화 역시 드론과 전자전, 인지전 등 북한의 비대칭 군사능력에 새로운 기술적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 한국도 AI 기반 감시정찰과 정보분석, 정밀타격, 위기관리 능력을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에, 남북 양측에서 진행되는 AI의 군사적 활용은 기존의 안보 딜레마를 더 빠르고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군사적 경쟁보다 장기적으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이 어떤 AI 생태계에 편입되는가에 있을 수 있다. 북한이 독자적인 기술발전에 한계를 느끼면서 중국의 플랫폼과 하드웨어, 데이터 처리방식, 기술표준과 디지털 통치방식에 지속적으로 의존한다면 북한의 AI 발전은 단순한 기술도입을 넘어 특정 기술질서에 대한 구조적 의존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북한의 데이터 주권과 기술발전 방향이 중국식 생태계에 고착되고, 감시기술과 사회관리 모델까지 결합할 경우 북한의 디지털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군사·사이버 AI가 중국 기술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면 한반도 안보 역시 남북 사이의 문제만으로 다루기 어려워지고 미중 기술·군사경쟁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남북의 장기적 관계에 미칠 영향은 기술격차의 확대보다 넓게 볼 필요가 있다. AI 시대의 지식생산과 경제발전은 데이터와 연구 네트워크, 국제표준과 기술생태계에 대한 연결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남북 사이의 협력이 장기간 단절된 가운데 북한의 기술적 고립과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이 누적되면 경제적 생산성뿐 아니라 지식체계와 거버넌스의 차이도 확대될 수 있다. 이산가족과 언어, 문화처럼 기존의 민족공동체를 유지해 온 사회적 자원도 시간이 흐르면서 약화될 수 있다. 정치적 통일의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할 경우 이러한 장기적 변화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통합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기술과 지식, 제도와 사회적 연결성이 약화될수록 미래 통합의 비용 역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와 반대되는 가능성도 제공한다.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으면서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에 직접 기여하는 감염병, 재난, 기후, 식량, 산림, 수자원, 보건 등의 분야에서는 기존 남북협력과 다른 형태의 기술협력을 검토할 수 있다. 이산가족 자료의 정리와 연결, 남북 언어와 교육 자료의 축적, 문화유산의 보존과 인도주의 정보분석도 장기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한국은 디지털 개발협력과 소버린 AI 분야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언어와 지리, 기후와 개발조건에 적합한 협력모델을 모색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이 단일한 외부 기술생태계에 의존하는 것과 다른 선택지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협력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AI는 민군 겸용성이 강한 기술이며, 데이터 분석이나 영상인식처럼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는 기술도 군사·사이버·감시 목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 대북 AI 협력은 북한의 군사능력이나 사회감시 능력을 강화하지 않아야 하며, 협력의 목적과 데이터의 범위, 기술의 사용주체, 검증방식과 사후감시 체계를 함께 설계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된다는 이유만으로 기술이전을 확대하는 방식보다 협력이 가능한 영역과 제한해야 할 영역을 구분하고, 인간안보에 기여하면서 전용 위험이 낮은 분야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위험관리형 협력이 보다 현실적이다.
이 연구가 제안하는 신통일구상은 이러한 양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통일을 단일한 정치적 합의나 제도통합의 순간으로만 이해할 경우 AI가 장기적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포착하기 어렵다. 정치적 관계가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더라도 행정과 경제, 보건과 교육, 지식과 데이터, 사회적 신뢰를 실제로 연결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통일을 기술과 데이터, 지식과 거버넌스, 인간안보를 포함한 장기적인 통합과정으로 볼 경우 현재의 협력과 위험관리가 미래 통합의 조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분석할 수 있다.
대북정책의 구도 역시 압박과 관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만으로 설정하기 어렵다. AI는 억제와 방어에 활용되어야 하는 동시에 위기관리와 인간안보 협력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사·사이버 AI 발전을 억제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정책과, 조건이 허용되는 영역에서 협력의 가능성을 준비하는 정책은 서로 배타적인 선택이 아니다. 장기적인 통일구상도 남북 내부의 관계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미중 AI 경쟁과 국제질서의 진영화, 글로벌 사우스의 기술격차, 국제 AI 규범과 기술표준의 형성 속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AI가 통일을 촉진한다는 기술결정론에 의존해서 분석을 진행하기는 어렵다. 북한이 AI를 군사력과 사회통제에 활용하고 중국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며 남북 간 지식·기술격차가 확대된다면, AI는 오히려 분단을 더욱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고 미래 통합비용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AI를 통일정책과 분리된 산업·기술정책으로만 남겨두기도 어렵다. 한국은 변화의 방향을 선제적으로 분석하면서 군사적·사회적 위험을 관리하고, 정치적 조건이 허용될 때 활용할 수 있는 제한적 협력의 가능성도 함께 준비할 필요가 있다. 신통일구상은 불확실한 AI 발전을 통일의 자동적인 동력으로 전제하기보다, AI가 만들어낼 여러 경로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와 장기적 통합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을 모색하려는 구상이다.
Ⅱ. 연구의 주요 문제의식과 범위
이 연구가 AI를 한반도 통일구상에 포함시키는 첫 번째 이유는 군사안보 환경의 변화에 있다. 기존의 한반도 안보 딜레마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과 한국 및 미국의 억제태세, 재래식 군사력과 군사훈련, 동맹정치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어 왔다. AI가 군사체계에 결합하면 이러한 딜레마의 기본구조는 유지되면서도 정보처리와 작전의 속도, 상대의 능력에 대한 인식, 공격과 방어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AI 기반 감시정찰은 상대의 군사활동을 더 정확하게 탐지하는 데 기여하지만, 상대는 이를 선제공격 능력의 향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미사일방어와 표적식별 능력의 발전도 방어 측에는 억제력의 강화이지만 북한에는 핵전력의 생존성을 약화시키는 변화로 인식될 수 있으며, 자동화된 사이버 대응은 공격 주체에 대한 판단 오류가 발생할 경우 확전 위험을 높일 수 있다. 지리적 종심이 짧고 핵무기가 개입되어 있는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결정 속도의 증가와 위기불안정성이 다른 지역보다 더 큰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북한 AI의 발전경로이다. 북한에는 고성능 반도체와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충분한 데이터,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상업적 AI 생태계와 개방적인 학술교류가 부족하고 제재 역시 기술발전을 제약한다. 북한이 미국이나 중국, 유럽의 프런티어 기업에 상응하는 범용 AI 역량을 자체적으로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자체개발의 한계가 제한된 AI의 활용 가능성까지 제거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무인기와 영상분석, 사이버작전, 감시정찰 같은 군사영역과 생산·물류관리 등의 경제영역, 교육과 선전, 사회감시를 포함한 지식·거버넌스 영역에서 목적형 AI를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AI 생태계에 대한 의존이 확대될 경우 북한의 기술발전은 단순한 능력 보완과 함께 데이터 주권과 기술표준, 디지털 통치방식의 종속이라는 문제도 안게 된다. 북한의 AI 문제를 자체 기술수준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어떤 외부 기술생태계와 결합하는지를 함께 분석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 문제의식은 남북협력의 형식이 AI 시대에 달라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과거 남북협력은 대규모 경제협력과 인프라 연결, 인도주의 지원, 사회문화 교류, 군사적 긴장완화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남북 연락채널의 단절, 제재체제와 북미관계의 불확실성, 국제질서의 진영화가 지속되는 현재에는 과거 협력방식을 그대로 복원하기 어렵다. AI를 활용한 협력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서 기술적 목적을 명확히 하고,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와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재난과 보건, 식량과 산림 같은 분야가 이에 해당하지만 AI의 민군 겸용성과 감시통치로의 전용 가능성을 고려하면 협력 자체가 항상 긍정적 효과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협력의 필요성과 위험을 동시에 평가하고 기술이전의 범위와 검증, 사용목적을 사전에 구분하는 것이 AI 시대 남북협력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네 번째 문제는 미래 통합에 대한 준비이다. 정치적 통일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행정과 법, 재정과 보건, 교육과 산업, 인프라와 복지, 토지와 주민등록, 지역개발과 사회심리적 통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분단과 발전격차가 지속될수록 실제 통합에 필요한 정보와 제도, 전문인력과 사회적 비용의 규모도 커질 수 있다. AI는 북한 지역의 인프라와 보건·영양 취약성, 교육격차와 산업전환, 환경복원과 도시계획, 에너지망과 인구이동, 재정수요 등을 데이터에 기초해 사전에 분석하고 다양한 통합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활용에서도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데이터의 활용은 개인정보 보호와 인간의 존엄을 고려해야 하고, 행정통합의 효율성과 사회적 신뢰의 형성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 네 가지 문제의식을 따라 연구의 범위도 설정한다. 먼저 AI 발전의 세계적 동향과 AI를 둘러싼 국제질서 변화를 검토하고, 이어 북한이 AI를 어떠한 조건에서 개발하고 활용하고 있는지를 군사, 경제, 지식·거버넌스의 영역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각 영역에서는 북한 AI의 위험만을 평가하지 않고 남북관계에 제공할 수 있는 제한적 기회도 함께 살펴본다. 북한의 미래 AI 경로는 자체개발과 대중협력, 남북협력의 가능성을 비교하면서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한국이 준비해야 할 대북 AI 협력과 위험관리의 방향, 장기적인 통일구상에 대한 함의를 제시한다. 이 연구는 AI의 세부 공학적 특성이나 개별 모델의 성능을 평가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며, 기술 변화가 한반도의 안보와 경제, 지식과 거버넌스, 장기적 통합의 조건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전략적 수준에서 분석한다.
Ⅲ. 연구의 구성과 분석의 틀
연구의 구성은 AI가 형성하는 국제적 환경에서 출발하여 북한의 선택과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뒤 한국의 대응으로 나아간다.
제2장은 AI의 세계적 발전과 국제질서 변화를 다룬다. 군사와 경제, 지식·거버넌스 영역에서 AI가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미중 AI 경쟁, 반도체 공급망, 데이터 주권과 디지털 권위주의, AI 거버넌스 논쟁을 함께 검토한다. 기술 공급망의 진영화와 전략적 디커플링이 진행되는 국제환경을 먼저 분석하는 것은 북한의 AI 발전 역시 북한 내부의 기술정책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3장은 북한의 AI 정책과 기술발전, 교육 및 연구 기반을 분석하고 군사와 경제, 지식·거버넌스 부문에서 AI가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북한이 제한된 자원 속에서 자체적인 AI 역량을 어느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지와 함께 중국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이 확대될 가능성을 살펴본다. 이후 세 장은 이 문제를 영역별로 나누어 분석한다.
제4장은 군사 AI와 한반도의 위기불안정, 전략적 안정성의 문제를 다루고 북한의 AI 군사화에 대응하는 관리된 군사경쟁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제5장은 북한 경제에서 AI가 활용될 수 있는 영역과 남북 경제협력의 기회와 제약을 분석하면서 대중협력과 남북협력의 서로 다른 경로를 비교한다.
제6장은 AI가 북한의 통치와 감시, 사회관리와 교육, 지식생산에 미칠 영향을 살펴보고 장기적으로 공유 가능한 지식과 데이터 자원을 축적하는 한반도 AI 커먼스의 가능성과 한계를 검토한다.
제7장은 앞의 부문별 논의를 토대로 한국의 대북 AI 협력 방향과 장기적인 통일구상의 함의를 종합한다.
제8장 결론에서는 북한의 미래를 대중 종속, 자체개발, 한국과의 협력 모색이라는 서로 다른 경로로 설정하고 각 경로에서 군사와 경제, 지식·정치 영역이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비교한다. 시나리오별 분석은 어느 하나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한국의 정책이 어떠한 위험을 우선적으로 관리하고 어떠한 협력 가능성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구성을 관통하는 첫 번째 분석 축은 기술과 안보, 평화의 관계이다. AI의 정치적 효과는 기술 자체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동일한 영상분석과 정보처리 기술도 감시정찰과 선제타격에 결합될 경우 상대의 위협인식을 높일 수 있고, 조기경보와 위기관리, 휴전감시에 활용될 경우 군사적 안정성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AI가 어떠한 목적에 사용되는 지뿐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떠한 군사적·정치적 관계 안에 위치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기술발전이 한반도 평화에 미치는 효과를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 분석 축은 위험과 기회의 동시성이다. 북한의 AI 발전은 군사력과 사이버능력, 주민감시와 사회통제를 강화할 위험을 갖지만, 재난과 보건, 식량과 인간안보 분야에서는 새로운 협력 수단을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이 발전시키는 AI 기반 군사능력 역시 북한에 대한 억제력을 높이는 효과와 위기불안정을 심화시키는 효과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AI를 평화에 기여하는 기술 또는 분단을 심화시키는 기술 가운데 하나로 미리 규정하기보다, 부문과 사용목적, 국제적·제도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분석 축은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의 비교이다. 자체개발은 북한이 가장 높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경로이지만 필요한 컴퓨팅 인프라와 데이터, 연구 생태계의 제약이 크다. 중국과의 협력은 이러한 제약을 일부 보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인 동시에 장기적인 기술종속과 디지털 권위주의의 심화 가능성을 수반한다. 남북협력은 인간안보와 경제발전, 장기적인 통합역량의 형성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으나 군사전용과 감시통치, 제재와 기술안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현실화되기 어렵다. 세 경로의 비교를 통해 북한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보다, 각각의 경로가 한반도 안보와 북한의 발전, 장기적 남북관계에 어떠한 비용과 가능성을 가져오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연구가 경로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규범적 기준도 이에 맞추어 설정한다. AI의 활용은 우선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성을 훼손하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협력은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 개선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남북 사이의 신뢰와 장기적 통합역량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효과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군사전용과 주민감시, 인권침해와 사이버위협을 증가시키는 기술협력은 장기적인 평화와 통합에 기여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고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 역시 평가의 일부가 된다.
AI 시대의 신통일구상은 통일을 먼 미래에 발생할 단일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통일의 시점이 불확실할수록 어떤 능력과 제도, 지식과 연결성을 유지하고 축적할 것인지가 오히려 장기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다. 남북교류가 사실상 중단되고 적대적 두 국가 관계가 강화되며 국제질서의 진영화가 진행되는 조건에서는 단기간에 협력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의 정책은 억제와 방어를 지속하면서도 AI가 가져올 군사적·사회적 위험을 관리하고, 정치적 환경이 달라질 때 활용할 수 있는 인간안보 협력과 지식·제도적 연결의 가능성을 준비해야 한다.
AI는 한반도의 기존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할 기술이 아니며 이미 형성된 분단구조에 단순히 추가되는 하나의 변수도 아니다. 기술의 발전방향과 북한의 선택, 미중 경쟁의 전개, 남북관계의 정치적 조건이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따라 AI는 적대와 종속을 더욱 안정적으로 재생산할 수도 있고 제한적인 협력과 장기적 통합을 준비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이후의 분석은 이러한 서로 다른 가능성이 어떠한 조건에서 현실화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
[1]본 워킹페이퍼는 “2025년도 통일과나눔재단 연구지원사업(통일학·북한학·남북통합정책 분야)”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저자: 전재성_EAI 원장,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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