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NK 스페셜리포트] ④ 남북 AI 협력의 중장기 추세와 한국의 전략: 공생격립과 예비적 관여
편집자 주
최인호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남북 협력이 단절된 현 상황에서 북한의 인공지능(AI) 전략이 안고 있는 통제와 역량의 모순을 분석합니다. 저자는 북한의 AI 기술 격차가 누적됨에 따라 향후 체제 내부에 협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압력과 변곡점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최 박사는 이러한 결단의 순간에 대비하여, 적대가 아닌 신뢰를 쌓는 공생격립의 관계를 유지하며 다자적 협력 채널과 역량을 미리 축적해 두는 예비적 관여 전략을 한국의 대응 방안으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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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협력이 불가능한 시기의 전략: 예비적 관여와 공생격립
2026년 2월 25일 조선로동당 제9차대회가 폐막하였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3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회의는 헌법을 개정하여 평화통일 조항을 삭제하고,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령토"를 규정한 영토조항을 신설하였으며, 국무위원장의 핵무력 지휘권을 명문화하였다 (이상숙 2026). 2023년 말 적대적 두 국가론이 천명된 지 2년 3개월 만에, 분단의 항구화가 선언의 수준을 넘어 헌법과 제도의 수준에서 뒷받침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 관영매체가 한국을 "우리에 대한 대결정책을 국책으로 정한 철저한 적대국"이라고 부르는 어법은 이미 2025년 여름에 일상화되어 있었다 (조선중앙통신 2025.8.27).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의 부재는 5년을 넘겼고, 직접적 남북 협력의 경로는 사실상 닫혀 있다.
이러한 시기에 남북 AI 협력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북 전략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정반대의 시간 감각을 요청한다. "대북정책은 북한이 당장 협력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협력을 거부하는 시기에 더욱 정교하게 준비되어야 한다"(전재성 2026.5). 협력이 차단된 시기야말로 협력을 준비하는 시기라는 이 역설이 본 원고의 출발점이다. 본 원고는 한국의 대북 AI 전략이 나아가야 할 길을 두 개념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전략의 이름은 예비적 관여이며, 그 전략이 준비기에 빚어야 할 남북관계의 형태는 공생격립이다.
첫째 개념은 예비적 관여(anticipatory engagement)이다. 직접 협력의 경로가 적대적 두 국가론과 그 밖의 구조적 요인으로 막혀 있는 동안, 미래의 협력을 미리 준비하여 관여의 태세를 갖추는 전략을 가리킨다. 신흥 기술이 아직 관리 가능할 때 그 관리 역량을 미리 구축한다는 예견적 거버넌스 (anticipatory governance)의 발상을 대북 전략에 옮긴 것으로(Guston 2014),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와 축적의 능동성을 담는다. 역대 대북정책의 이름이 남긴 교훈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 햇볕정책은 외투를 벗긴다는 은유가 시혜의 배역 구조를 내장한 탓에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미국의 전략적 인내는 기다림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보이지 않아 전략적 방치로 재규정되었으며, 담대한 구상은 일방향의 거래 구조가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는 즉각적 기각(김여정 담화 2022.8.19)을 불렀다. 예비적 관여라는 이름은 시간의 논리를 별도의 수사에 기대지 않고 "예비적"이라는 말 안에 담으며, 협력의 방향을 가리키되 시혜의 배역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비적 관여는 세 갈래의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는 전략이다. 북한이 부분적 협력을 결심하도록 유인을 설계하는 작업, 협력이 차단된 시기에도 북한과 연결된 다자 채널 안에 한국의 자리를 만들고 제재 레짐 안에 이미 열려 있는 합법 통로를 실제로 통과해 보는 사전 정지작업, 그리고 그 결심의 순간에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한국 자신의 AI 국제협력 역량을 길러 두는 작업이 그것이다. 세 갈래는 각각 북한과 국제 환경과 한국 자신을 향하며, 단계가 아니라 병행이다. 효과가 나타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세 갈래의 구체적 내용은 4장에서 다룬다.
둘째 개념은 이 준비기에 남북관계가 빚어야 할 관계의 형태에 관한 것이다. 본 원고는 그것을 공생격립(共生隔立)이라 부른다. 이는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거품 구조의 세포들이 막벽을 공유한 채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역설적 상태를 가리켜 쓴 공-격리(co-isolation) 개념을, 대북 전략의 맥락으로 전유한 표현이다(Sloterdijk 2016). 역설처럼 들리지만, 적대적 두 국가론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서로 일정한 격리를 유지한 채 각자가 똑바로 설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편이 장기적 공생의 조건이 된다. 여기서의 격리는 북한이 내세우는 적대적 단절과 같은 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펴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의도적인 격리를 통해 심어 주는, 신뢰 형성기의 관계 형태이다. 격리를 자연스러운 적대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막벽을 차단이 아니라 접합부로 다루어 안정적 공존의 신뢰를 쌓는 데 그 목적이 있다.
AI 시대에 이 공생격립은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한편으로 한국은 북한의 사이버 공격과 침투에 대한 철저한 방어와 억지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은 AI와 사이버 공간의 연결을 통해 북한의 정치사상이나 정권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한 격리의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하며, 동시에 통일을 위한 노력이나 대화의 시도를 섣불리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 통일은 미래의 숙제로 남겨 두고 안정적 공존을 1차적 목표로 삼는 편이 이 시기에는 더 현실적이다. 다만 이러한 절제가 모든 비판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위협이 지역과 세계의 보편적 규범을 침해하는 지점에 대해서까지 비판적 입장을 거둘 필요는 없다. 방어와 억지가 격리의 한 면이라면, 체제를 겨냥하지 않겠다는 절제는 그 격리가 적대가 아님을 증명하는 다른 한 면이다. 두 면이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격리는 적대적 단절이 아니라 신뢰를 쌓는 공생격립이 된다.
이하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은 정치, 외교, 기술, 경제 네 분야에서 남북 AI 협력을 가로막는 구조와 북한 AI 전략의 내적 모순을 분석한다. 3장은 그 관찰을 중장기 추세선 위에 놓아, 모순의 누적이 어떻게 북한 내부의 위기로 이어지는지를 다룬다. 4장은 예비적 관여의 세 갈래 준비를 구체화한다. 과연 북한의 AI 전략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한국은 그 길목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2. 단기, 협력을 가로막는 구조와 북한 AI 전략의 내적 모순
2.1 협력 불가의 삼중 구조
첫째, 정치적 봉쇄이다. 제9차 당대회와 뒤이은 헌법 개정은 두 층위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흐름은 사회주의 정상국가의 외양을 갖추려는 시도이지만, 실질에서는 권력의 1인 집중과 남북관계의 제도적 단절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핵보유국 지위는 사실상 되돌릴 수 없는 국가적 현실로 고착되었고, 통일 관련 조항의 삭제와 영토조항의 신설은 한국과의 협력을 정당화할 내부 담론의 통로 자체를 좁혀 놓았다. 협력의 부재가 정책 선택의 결과를 넘어 제도의 결과가 된 상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북중러 기술협력의 심화이다. 2024년 6월 체결되어 12월 발효된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조약은 제10조에서 인공지능과 정보기술을 협력 분야로 명문화하였다(북러 조약 2024). 김일성종합대학 정보과학부 인공지능연구소 소장은 2025년 7월 재일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를 포함한 국가들에 교환학생과 인턴, 연구자를 파견하고 있다고 밝혔다(NK News 2025.7.22). 북중 국경에서는 AI 기반 감시 설비의 협력이 진행 중이다(NK Insider 2025.5). 국제 학술 협력의 지형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북한 연구자가 참여한 국제 AI 공저 논문은 161편으로 세계 160개국 가운데 145위에 그쳤는데, 그 가운데 약 70편, 약 43퍼센트가 중국과의 공저였고 협력 기관은 동북 3성의 대학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같은 기간 한국, 미국과의 공저는 각 1편에 불과하다(Kim 2024). 북한의 기술 협력선이 중국과 러시아로 좁게 정렬되어 있는 만큼, 당장 북한이 남쪽을 필요로 할 이유는 크지 않아 보인다.
셋째, 제재 레짐의 골조이다. 안보리 결의 2321호(2016)는 북한과의 과학기술 협력을 원칙적으로 중단시켰고, 결의 2397호(2017) 7항은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포함하는 국제통일상품분류(HS) 84류와 85류의 대북 수출을 전면 금지하였으며, 결의 2270호(2016) 17항은 첨단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관련 컴퓨터 과학 분야의 교육과 훈련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의 AI 연구 책임자가 스스로 정보기술과 인공지능 분야의 국제협력이 대북 제재로 크게 제약된다고 인정할 정도로(NK News 2025.7.22), 이 골조는 북한 내부에서도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우선순위는 뒤로 밀려 있고, 대북제재의 이행을 감시해 온 안보리 전문가패널이 2024년 3월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임기를 연장받지 못하고 종료된 이후 제재 레짐의 감시와 신규 지정 기능이 마비 상태에 들어가 있어, 제재의 조정이나 완화를 매개로 한 협력 공간이 단기에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2.2 기술통제와 AI역량의 모순
이 삼중 구조 아래에서 북한은 AI를 체제 의제의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제9차 당대회에 관한 조선중앙통신과 로동신문의 보도는 "특히 먼 장래가 아닌 현실적문제로 부상하고있는 새 에네르기산업, 우주산업, 인공지능산업과 같은 새로운 산업분야, 첨단기술산업을 개척하고 운영하는데서 나서는 핵심기술들을 연구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적시하였다 (로동신문 2026.2.26). 김일성종합대학은 2025년 7월 정보과학부를 인공지능학부로 개편하여 산하에 7개 연구소를 두었고(경향신문 2026.4.1), 군사 부문에서는 "각이한 인공지능무인공격종합체들"이 국방발전계획의 우선순위에 올랐다(로동신문 2026.2.26). AI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과제라는 인식, 즉 인지의 수준에서 북한 지도부는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고 있다.
문제는 인지와 구현 사이의 괴리이다. AI 시대의 지식 생산은 개방된 연구 네트워크, 국경을 넘는 인재 이동, 대규모 데이터, 반도체와 클라우드 인프라, 민간 생태계라는 조건 위에서 작동한다. 북한의 폐쇄 체제는 이 조건들과 하나하나 어긋난다.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은 북한 AI 연구의 실태를 "低 계산집약 연구가 주류"이며 대규모 언어모델(LLM)에 기반한 "확산형 생성 모델 등 최신 고성능 기술의 본격 활용 징후는 미포착"이라고 진단하고, 그 원인의 일부를 "하드웨어 접근 제한, 해외 협업 제한, 기술 정보 차단 등의 구조적 요인"에서 찾았다(김민정 2025). 가시적 성과로 꼽히는 룡마 1.0도 심층학습을 이용한 다국어 번역 프로그램이며, 향후 등장할 북한판 챗GPT 역시 "내부 인트라넷에서 작동하거나 특정 분야에 한정된 형태"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KISTI 2025).
괴리의 뿌리에는 데이터 문제가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보에 실린 조선어 생성형 AI 연구는 조선어 본문 5만 건 규모의 자료로 실험을 수행하면서 참조문헌에 OpenAI의 GPT-4 기술보고서를 명시하였다(NK경제 2026.5.4). 세계의 대규모 언어모델이 수조 단위의 토큰, 즉 학습에 쓰이는 텍스트 단위로 훈련되는 것과 견주면 수만분의 일에 못 미치는 자료로, 적성국의 공개 문헌에 기대어 생성형 AI를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다. 더 상징적인 사례도 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미세먼지 예측 논문은 평양이 아니라 베이징의 대기 데이터를 사용하였다(Pak 외 2024). 자국 데이터를 외부에 드러낼 수 없는 체제가 자국 문제의 모델조차 남의 데이터로 학습시키는, 자기검열 데이터 환경의 압축적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제의 법제는 이 데이터 환경을 더욱 조이고 있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 청년교양보장법(2021)에 이어 제정된 평양문화어보호법(2023)은 제58조에서 괴뢰말투로 된 통보문과 전자우편을 주고받는 행위에 6년 이상의 노동교화형부터 사형까지를 규정하였고, 스마트폰 운영체제 수준에서 남측 어휘를 실시간으로 치환하는 기술적 집행 장치까지 확인되고 있다(SPN 2023; Fortune 2025.6). 언어 데이터의 사용 자체를 처벌하는 법체계와, 방대한 언어 데이터를 요구하는 생성형 AI의 기술적 수요는 양립하기 어렵다. AI를 통제의 도구로 사용하는 체제 운용이 AI를 역량의 기반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토양을 잠식하는 모순적인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 공식 담론이 이 모순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로동신문은 수자경제, 곧 북한식 표현으로 디지털 경제의 하부구조를 논하면서 "방대한 량의 지식자원의 이동을 제한없이 신속정확히 보장"하는 것이 그 특성이라고 예찬하지만, 자국의 폐쇄망이 바로 그 제한 없는 이동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로동신문 2026.5.13). 김정은이 간부들의 디지털 무능을 "현대화에 대한 지향도 표상도 없는 가슴아픈 실태"라고 공개 질타한 보도(로동신문 2026.5.7)나, "인간이 바라는 모든것을 인공지능을 통해 실현하게 될것"이라는 낙관(로동신문 2026.5.11)과, 중요대학의 AI 학과가 아직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 단계라는 현실(로동신문 2026.5.14b)이 같은 시기의 지면들에 병존한다. 모순은 부인되기보다 침묵과 봉합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이는 모순이 해소되지 않은 채 누적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폐쇄적 독재체제가 군사 목적의 제한된 AI 활용이나 사이버 역량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어도 국가경제 전체를 혁신하는 수준의 AI 전환에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는 진단 (전재성 2026.5)은 이 구조를 그대로 짚고 있다.
2.3 경제, 디지털 전환의 토대와 상한
경제 분야의 관찰도 같은 추세선 위에 있다. 한편으로 북한 경제의 디지털 토대는 분명히 넓어졌다. 이동통신 가입 회선은 약 635만에 이르고 2023년 가을에는 4세대 통신망 서비스가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며(Williams 2026), 시장화의 진전과 맞물려 전자결제와 정보기기 사용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수자경제 담론이 당 기관지의 지면을 차지하는 것 자체가, 디지털 전환을 경제 재건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전환의 상한은 낮다. 우선 물리적 토대가 얇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북한의 발전전력량은 2021년 기준 255억 킬로와트시로 남한(5,768억 킬로와트시)의 4.4퍼센트에 그치는데 (통계청 2022), 이는 대규모 연산은커녕 안정적 전산 인프라의 운용에도 빠듯한 규모이다. 다음으로 통제 비용이 경제 효율을 잠식한다. 정보기기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검열해야 할 대상도 함께 늘어나는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수준의 상시 감시 장치가 확인될 만큼(Daily NK 2025.7) 북한은 통제의 기술화로 대응하고 있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경제의 부담이 된다. 광명망 안에서 설계되는 원격교육과 먼거리의료의 AI 봉사 역시 폐쇄망이라는 조건 때문에 외부 지식과 단절된 채 운영될 수밖에 없다(KISTI 2025).
2.4 봉합책으로서의 북중러 의존과 그 한계
북한이 이 모순을 봉합하는 일차적 방책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이다. 그러나 그 의존이 실제로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들여다보면 한계가 뚜렷하다.
러시아부터 보면, 우크라이나전 파병의 대가로 확인된 기술 이전은 방공, 전자전, 무인기, 정찰위성 관련 기술 지원에 국한되며 AI는 목록에 없다(국가정보원 2025.4). 한국 국책기관의 조사도 북러 AI 공동연구에 대해 "알려지지 않음"이라고 자체 평가하였다(KISTI 2025). 러시아 자체가 AI 후발국이고 첨단 칩의 상당 부분을 중국 경유로 조달하는 처지임을 감안하면, 러시아와의 밀착은 북한을 군사화된 생존 국가로 더 깊이 밀어 넣을 뿐 발전 국가로의 전환을 가져다주기는 어렵다는 진단(전재성 2026.5)이 설득력을 갖는다.
중국의 경우는 AI를 활용한 통제기술의 원조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AI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근본적인 기술적 협력은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2025년 봄 북중 국경 전 구간에 배치된 AI 경보 시스템은 양국이 국경의 이상 동향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체계로(NK Insider 2025.5), 이 협력은 북한의 AI 역량을 키워 주는 이전이기보다 북한의 폐쇄를 유지해 주는 기술 지원에 가깝다. 반면 AI 역량의 토대가 되는 연산과 모델의 통로는 막혀 있거나 좁다. 연산의 토대인 AI 반도체(GPU)는 제재 품목이어서 공식 통로가 없고, 중국 중개를 경유한 밀수가 거론되는 정도이다(IISS 2026.3). 공급선이 비공식 조달뿐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경로의 한계를 말해 준다. 모델의 경우 북한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오픈소스, 곧 설계도가 공개되어 누구나 내려받아 쓸 수 있는 형태의 공개 모델뿐인데, 중국의 오픈소스 생태계는 그 자체가 이미 검열을 거친 생태계이다. 그것을 다시 내부 검열로 걸러 수용하는 북한은 결국 검열된 지식의 재검열된 부분집합을 받는 이중 여과의 구조에 놓인다. 실제로 중국의 공개 모델 딥시크(DeepSeek)는 북한 관련 질의에 북한을 도발자로 규정하고 북핵을 비판하는 응답을 내놓는 것으로 분석되어(NK News 2025.7.7), 북한으로서는 가장 손쉬운 공급선의 지식조차 자기 서사와 충돌하여 그대로 들여오기 어렵다. 요컨대 중국 경로는 통제의 역량을 더해 줄 뿐 발전의 역량을 주지 않으며, 봉합책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지식종속의 심화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결국 북중러 협력이 북한에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통제 기술, 인력 파견의 출구, 오픈소스의 제한된 무임승차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AI 역량이 실재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은 공격적 사이버 부문이다. 정찰총국 산하에 AI 기반 정보 절취를 전담하는 조직이 신설되었다는 보도(Daily NK 2025.3), 상용 AI 서비스를 악용한 위장 취업 사례의 적발(Anthropic 2025.8), 그리고 앞서 본 절취 규모를 함께 놓고 보면, AI가 역량의 인프라이기보다 통제와 절취의 도구로 전용되는 구조가 제도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통제와 역량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의 한 표현에 가깝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은 오히려 다양한 스택의 AI 네트워크에서 북한을 더욱 고립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봉합책은 북한 자신의 AI 발전에 관한 서사와도 충돌한다. 자력갱생 담론의 어법을 보면, 로동신문은 "생산장성의 예비를 남의 도움이나 국가적지원에서 찾는 부문과 단위, 지역은 언제 가도 뒤자리밖에 차지할수 없다"고 외부 원조의 프레임을 즉각 거부하면서도, 같은 기사에서 "과학기술에 철저히 의거하여야 항상 세계와 견주며 부단히 높은 목표를 내세울수 있고"라고 쓰고, 부문과 단위, 지역들 사이의 따라앞서기, 따라배우기, 경험교환운동을 독려한다(로동신문 2026.5.14a). 경쟁의 잣대는 세계에 두면서도 배움의 회로는 내부 모범 단위 간의 운동으로 닫아 두는 어법이다. 즉 자력갱생은 고립을 명하는 어법이기보다 세계와 견주어 이기기를 명하는 경쟁의 어법이다. 외부 기술의 도입 자체를 금하는 것도 아니어서, 같은 기사는 "선진기술의 개발과 도입이 대중자신의 사업으로 진행되고있다"고 자랑한다. 한정되는 것은 물자의 출처가 아니라 성취의 귀속이다. 들여오는 것은 허용하되, 그것이 남의 도움이 아니라 내부 주체의 성취로 서사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담론이 약속하는 것과 봉합책이 실제로 가져오는 것 사이의 거리이다. 담론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세계 수준에 도달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앞서 본 대로 북중러 경로가 가져다주는 것은 세계 수준과의 격차 확대와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의 심화이다. 같은 구조의 딜레마는 외교 담론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북한의 다극화 담론은 자주를 지키는 방패이자 강대국 의존을 정당화하는 도구라는 구조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전재성 2026.2). 자력갱생 어법에서 확인되는 긴장은 바로 이 딜레마가 AI 개발의 영역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를 가장 큰 목소리로 강조하는 시기에 중러 의존은 깊어지고 세계와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3. 중기, 모순의 누적과 'AI 시대의 새로운 실패국가'
3.1 자기강화적 격차의 추세선
2장에서 본 모순과 봉합책의 한계는 정태적 조건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는 추세이다. 바깥 세계의 시계부터 보면, 2025년 미국의 AI 민간투자는 2,859억 달러로 중국의 124억 달러와 약 23배의 격차를 보였고, 다만 같은 보고서는 중국 정부 유도기금이 집계에 빠져 있다는 단서와 함께 미중 최상위 모델의 성능 격차가 2026년 3월 챗봇아레나(LMArena) 순위 기준 2.7퍼센트까지 좁혀졌다는 관찰을 병기하고 있다(Stanford HAI 2026). 미중이 이만한 자원을 쏟아부으며 경쟁하는 동안 진입의 문턱은 후발 주자에게 비대칭적으로 높아진다. 더구나 최신 AI는 모델이 모델의 개선을 돕는 자기개선의 동학을 보이기 시작했고, AI 역량의 국가 간 분포가 새로운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축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와 있다(UNDP 2025). 격차는 한 번 벌어지면 따라잡기 비용이 더 커지고, 비용이 커질수록 폐쇄 체제의 회피 유혹이 강해지는 자기강화의 고리를 그리며 움직인다.
3.2 위기의 발현 경로와 단기의 역류
자기강화적인 AI 격차는 AI 시대의 새로운 실패국가의 위기에 북한이 봉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실패는 급속한 체제붕괴는 아니지만, AI 격차가 누적되면서 농업, 의료, 교육 등 사회 거버넌스의 기초 기능이 선택적으로 잠식되어 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즉 국가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민에게 제공해야 할 기능이 영역별로 무너져 갈 수 있다는 것이다.
AI는 특정 산업의 기술이기보다 노동시장과 산업 전반에 침투하는 범용기술이며(Eloundou 외 2024), 행정과 통계, 생산과 물류, 재난 대응과 사회 서비스 전반의 운영을 떠받치는 기반 기술의 성격을 갖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공공서비스 전달과 사법, 재정 관리 등 11개 핵심 정부 기능에 걸쳐 200개의 AI 활용 사례를 집계할 만큼(OECD 2025), 국가 운영 그 자체가 이 기술의 적용 영역이 되었다. 범용기술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성패를 가르는 것이 최초의 혁신이 아니라 기술을 경제와 제도 전반에 퍼뜨리는 확산의 역량이라는 점이며, 확산에 실패한 강대국이 경쟁에서 밀려난 사례는 산업혁명 이래 반복되어 왔다(Ding 2024). 세계가 이 기반 기술로 국가 운영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동안 그 활용에 실패하는 체제는 행정의 정확성에서 경제의 생산성, 위기 대응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국정 전반에서 동시에 뒤처지게 되고, 실측 지표들도 선발국과 후발국의 AI 사용 격차가 좁혀지기보다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Microsoft 2026.1). 더구나 2장에서 본 대로 북한의 활용 실패는 우연한 지체가 아니라 통제와 역량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구조적 결과이므로, 격차는 한 번의 손실로 끝나지 않고 누적된다. 세계가 움직이는 동안 제자리에 머무는 것은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북한의 현재 위치는 이미 이 명제의 실측 사례이다. 유엔 전자정부 조사에서 북한의 전자정부발전지수는 2012년 131위에서 2024년 193개국 중 184위로 떨어졌고, 순위만이 아니라 절대 점수 자체가 하락하였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세계 4위이다(UN DESA 2024). 정부 AI 준비도 지수는 2024년판에서 자료 부족으로 북한을 산정 대상에서 제외했다가 2025년판에서 처음 산정하면서 195개국 중 167위, 정책 부문 0점을 매겼고(Oxford Insights 2026), IMF의 AI 준비도 지수는 자료 부재로 북한을 아예 평가 대상에 넣지 못하고 있다(IMF 2024). 뒤처짐이 측정되거나, 측정조차 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격차의 기록이다.
이 누적되는 후퇴가 가장 먼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날 곳은 기저선이 이미 취약한 보건과 교육이다. 영유아 디티피(DTP) 3차 접종률은 2020년 97퍼센트에서 국경봉쇄기에 급락하여 한때 사실상 0퍼센트 수준으로 추계되었고(WHO·UNICEF 공동 추계 WUENIC), 2024년 백신 반입과 누락 코호트의 지각접종으로 회복 국면에 들어섰지만 보건 인프라의 취약성은 여전하다. 발육부진 아동의 비율은 장기 개선 추세에도 2024년 추정 16.6퍼센트, 여전히 6명 중 1명꼴이다(UNICEF ·WHO·세계은행 JME 2026). AI 미활용이 어떻게 구체적 손실로 번역되는지는 결핵이 잘 보여준다. 북한은 오랜 결핵 고부담국이면서도 발생률 추정치가 세계보건기구의 2025년 보고에서 "검토 중"으로 분류되어, 자국에 결핵 환자가 몇 명인지조차 집계하지 못하는 상태이다(WHO 2025). 전 세계적으로도 2024년 기준 결핵 환자 약 240만 명, 곧 5명 중 1명꼴이 진단되지 않은 채 누락되는데, 저자원 환경에서 그 일차적 병목은 흉부 엑스선을 판독할 전문 인력의 부족이다. 세계보건기구가 결핵 검진에 권고하는 컴퓨터 보조 판독(CAD) AI는 바로 이 병목을 메우는 도구로, 전문의에 준하는 판독을 노트북 한 대와 휴대형 엑스선만으로, 인터넷 연결 없이 수행한다(WHO 2021).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인구 대비 의사와 병상 수가 세계 최상위권이어서, 부족한 것은 의료 인력의 머릿수가 아니라 진단 역량과 전력이며, 이는 정확히 AI가 대체할 수 있는 지점이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오프라인 AI로 미발견 환자를 찾아내는 동안 그 도구를 들이지 못하는 체제에서는 누락된 5명 중 1명이 계속 누락되고, 치료받지 못한 결핵은 전파와 약제내성으로 번지며 손실을 키운다. 모성·영유아 진단이나 감염병 감시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교육에서는 AI 학과가 이제 준비 단계이고, 농업에서는 과학농사 구호와 현장 사이의 간극이 크다. 기초가 얇은 영역일수록 AI 활용의 격차는 사람의 생존과 역량에 직결되는 손실로 번역된다. 군사 우선 노선이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안보의 약화를 불러오는 자기모순"이며 "총체적인 국내 역량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지적(하영선 2021)은 8차 당대회 평가에서 나온 것이지만, AI 변수가 더해진 지금 더욱 무게를 갖는다.
물론 위기의 누적은 붕괴의 임박을 뜻하지 않는다. 북한은 핵무기와 군사 도발, 내부 통제, 대외 균형의 결합에 기대어 상당 기간 버틸 수 있다는 진단이 있으며, 북한이 곧 붕괴하거나 외부 압박만으로 전략을 바꾸리라는 기대와 대화와 협력의 의지만으로 과거의 남북관계 틀로 되돌아오리라는 기대, 이 두 가지 착각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전재성 2026.5). 본 원고가 말하는 위기는 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부분적 협력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내부 압력의 누적이며, 그 시간 지평은 단기가 아니라 중기 이후이다. 더욱이 단기에는 오히려 역류가 나타날 수 있다. AI 격차의 심화가 단기적으로는 더 강한 통제와 군사적 의존으로 체제를 몰아갈 수 있다는 관찰(전재성 2026.5)대로, 정보통제 법제의 강화와 사이버 부문에의 집중은 그 역류의 징후로 읽힌다. 이 역류는 협력 불가기가 길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한국의 준비 또한 긴 호흡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3.3 변곡점 가설, 그리고 경합하는 시나리오
폐쇄 체제가 기술 격차의 위기에서 선택적 개방으로 전환한 사례들은 변곡점의 조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재와 고립 속에서 기술 역량을 추구해 온 사회주의·권위주의 국가들을 가로질러 보면, 전환의 방아쇠는 세 가지 조건이 함께 갖추어질 때 당겨졌다. 엘리트의 격차 인식, 위기의 누적, 그리고 외부 적대의 완화가 그것이다. 소련은 1970년대 정보기술 격차를 지도부가 제때 인식하지 못해 전환이 지연되었다. 베트남은 외교관들의 비밀 연구를 통해 소련 진영이 서방에 10년 이상 뒤처졌다는 충격적 진단을 얻고도, 초인플레이션과 양면 전쟁이라는 위기의 누적과 대미 관계 정상화라는 적대 완화가 함께 갖추어진 1986년에 이르러서야 개혁개방 노선인 도이머이로 나아갔다(Path 2020). 세 조건 가운데 외부 적대의 완화가 빠지면 격차를 인식하고도 개방이 지연되거나 좌초했다는 것이, 비교사가 일관되게 일러 주는 교훈이다.
전환의 방식에서도 공통의 문법이 발견된다. 어느 사례에서도 자력갱생이나 이념적 우위의 담론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력갱생을 "개방을 통한 자력"으로 고쳐 세계 선진 기술의 도입을 오히려 자력의 출발점으로 정당화하였다. 이란은 제재가 강화되는 시기에 국제 공동연구만은 오히려 늘렸고(Kokabisaghi 외 2019), 그 과학 굴기를 하메네이가 2014년 과학기술 정책 코뮈니케에서 천명한 "과학 지하드(scientific jihad)"라는 종교·민족주의의 언어로 포장하였다(Bazoobandi 2024). 쿠바는 봉쇄 속의 의료·바이오 집중을 "의료 국제주의"로 서사화하였다. 폐쇄 체제는 개방을 기존 정당화 서사의 단절이 아니라 연장으로 포장할 때 비로소 정치적 비용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쿠바는 세계보건기구와 범미보건기구의 인증을 국제화의 통로로 삼아 제재 아래에서도 자체 백신을 30개국 이상에 공급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Pentón-Arias 외 2021), 이는 다자기구의 매개가 폐쇄 체제의 체면과 실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경로임을 보여준다.
북한 자신의 전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김책공업종합대학과 시라큐스대학의 협력(2001년 개시, 2012년경까지 교류 지속)(Thorson 2012),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운영, 2000년대 남북 IT 협력의 경험은 북한이 비정치 기술 분야에서, 다자 또는 제3국의 매개 아래, 실리가 분명하고 우리 식의 포장이 가능하며 인적 접촉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부분 협력을 수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가장 선명한 비교는 백신이다. 북한은 2021년 국제 모니터링 요원의 입국을 요구하는 국제 백신 공동구매 기구 COVAX의 백신을 거부하였으나(NK News 2021.9), 2024년에는 국제직원의 상주 없이 보건성이 집행하는 방식으로 유엔 기구 합동의 백신 약 420만 도즈를 받아들였다(UNICEF 2024.7). 같은 시기 남측 적십자의 수해지원 제안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결심을 가르는 변수가 협력 자체가 아니라 모니터링의 수위와 경로의 정치적 색채임을 보여주는 대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변곡점 가설에는 경합하는 시나리오가 있음을 명시해 둔다. 두 국가론은 국제질서가 변하면 또다시 바뀔 가능성이 있으나 그 방향이 공세적 통일 노선의 재개일 수 있다는 관찰(전재성 2025.9)이 있고, 미얀마의 사례는 부분 개방이 체제의 약함이 아니라 통제에 대한 자신감의 산물이었음을 시사한다(Jones 2014). 전환은 협력의 방향으로만 열려 있지 않다. 이 단서는 그러나 준비 무용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개방이 통제 자신감을 전제로 한다면, 한국이 준비해야 할 협력의 형태는 북한이 통제 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설계, 즉 감시 수위의 조절이 가능하고 가역적이며 소규모로 시작하는 설계여야 한다는 실천적 함의가 도출된다.
4. 한국의 전략, 격립의 토대와 세 갈래의 준비
이상의 추세 진단 위에서 한국의 전략은 두 층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준비기에 남북관계가 빚어야 할 관계의 형태, 곧 공생격립을 AI와 사이버 영역의 구체적 정책으로 떠받치는 일이다(4.1). 다른 하나는 그 토대 위에서 미래의 협력을 예비하는 세 갈래의 준비, 곧 유인 제공, 사전 정지작업, 역량 제고이다(4.2~4.4). 세 갈래는 각기 다른 대상을 향한다. 유인 제공은 북한의 결심을, 사전 정지작업은 제재 레짐과 다자 체계라는 국제 환경을, 역량 제고는 한국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 세 갈래는 단계가 아니라 병행이며, 효과가 나타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4.1 격립을 통한 공생과 신뢰
공생격립은 추상적 관계론에 머물지 않고 AI와 사이버 영역의 구체적 정책으로 번역된다. 서론에서 밝힌 대로 이 시기의 격리는 두 면을 동시에 요구한다. 한 면은 북한의 공격과 침투를 막아 내는 단단한 방어와 억지이고, 다른 한 면은 한국이 AI와 사이버 공간의 연결을 통해 북한의 정권이나 정치사상을 흔들지 않는다는 절제이다. 앞의 면이 격리가 허술하지 않음을 보인다면, 뒤의 면은 그 격리가 적대가 아님을 보인다. 두 면이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격리는 신뢰의 토대가 된다.
방어와 억지의 필요는 추상이 아니라 진행 중인 위협이다. 국가정보원은 2026년 「국가정보보호백서」에서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 기조 아래 사이버 공격 역량을 대폭 강화하여, 정보보호 소프트웨어와 사무용 프로그램의 취약점을 악용한 공급망 공격으로 방위산업과 에너지 인프라, 첨단기술 기업의 기밀을 절취하고 있다고 진단하였고(국가정보원 2026), 북한 연계 조직 김수키는 2025년 생성형 AI로 한국군 신분증 위조 이미지를 만들어 국방 관련 기관을 표적으로 삼았다(Genians 2025). 북한이 2025년 한 해에만 약 20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절취해 누적 67억 달러를 넘긴 정황(Chainalysis 2025)과, 정찰총국 산하에 AI 기반 정보 절취를 전담하는 조직이 신설되었다는 보도(Daily NK 2025.3)는, AI 위협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제도화된 항구적 과제임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에 대응할 제도적 두께를 갖추어 가고 있다. 2024년 국가안보실이 발표한 국가사이버안보전략과 그 기본계획은 공세적 방어와 핵심 인프라 복원력을 핵심 과제로 세웠고(국가안보실 2024), 국방의 사이버작전사령부, 공공 부문의 국가사이버안보센터, 민간의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 한미동맹은 2023년 전략적 사이버안보 협력 프레임워크를 채택해 위협정보 공유와 적대세력 억지의 공동 기반을 마련하였고(외교부 2023), 2024년 출범한 인공지능안전연구소와 2026년 정부가 내건 AI 기반 사이버 방어로의 전환은 격리의 막벽을 AI 시대에 맞게 두껍게 하는 작업이다.
다른 한 면은 더 어렵고, 아직은 권고의 영역에 가깝다. 한국이 AI와 사이버 역량을 북한의 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데 쓰지 않는다는 절제를 분명한 모습으로 보여줄 때, 격리는 비로소 적대가 아닌 신뢰가 된다. 이 절제에는 선례가 있다. 현 정부는 2025년 6월 전방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스스로 중단하고 민간의 대북 전단 살포 중단을 요청하였으며(통일부 2025), 이는 적대행위와 심리전 수단의 상호 중지를 명문화한 2018년 판문점선언과 군사분야 합의의 정신을 잇는 것이다. 남은 일은 같은 절제의 원리를 AI와 사이버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곧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인공지능 허위정보나 딥페이크를 영향공작의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고, 방어적 능동성과 체제를 겨냥한 공세 작전을 분명히 구별하는 일이다. 한국이 참여해 합의한 국제 사이버 규범이 타국 핵심 인프라에 대한 공격과 내정 간섭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UN GGE 2015)은 이 절제가 고립된 양보가 아니라 보편 규범의 연장임을 뒷받침한다. 다만 AI를 이용한 정권 겨냥 공작을 직접 규율하는 구속적 국제 규범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영역에서 한국의 절제는 규범을 앞서 보이는 자발적 선택의 성격을 띤다.
절제가 비판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체제의 정당성을 겨냥한 정치적 공격과, 보편 규범에 근거한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이 거두어야 할 것은 앞의 것이고, 거두지 않아야 할 것은 뒤의 것이다. 이 구별이 가장 또렷하게 성립하는 영역이 바로 AI와 사이버이다. 국제사회는 2015년 이래 유엔 정부전문가그룹을 통해 책임 있는 국가 행동의 사이버 규범에 합의해 왔으며, 그 핵심은 타국의 핵심 인프라를 손상시키는 사이버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국 영토가 국제 위법 행위에 쓰이도록 고의로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UN GGE 2015). 국제법과 유엔헌장이 사이버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므로, 이 규범은 합의에 참여하지 않은 북한에도 보편적으로 미친다.
북한은 이 규범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를 체계적으로 거듭해 왔다. 2017년 워너크라이 공격은 영국 국민보건서비스의 병원 수십 곳을 마비시켜 타국의 핵심 인프라를 무차별로 가격하였고(U.S. White House 2017), 정찰총국 산하 조직은 한국과 동맹국의 방위·항공우주·핵·공학 분야를 표적으로 기밀과 자금을 빼내 정권의 군사·핵 계획에 투입해 왔다(CISA·국가정보원 2024). 2025년 한 해에만 약 20억 달러에 이른 암호화폐 절취는 사이버 규범과 비확산 규범을 동시에 침해하고(Chainalysis 2025), AI로 위조한 신분과 페르소나를 동원한 위장 취업과 사기는 생성형 AI를 기만의 도구로 전용한다(MSMT 2025.10). 이러한 행위를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의 보고나 한미 공동 사이버 주의보 같은 채널을 통해 비판하는 일은 정권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규범의 위반을 명시하는 것이다. 북한이 지도부와 체제에 대한 비판 자체를 범죄로 다루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절제는 침묵이 아니라 비판의 표적을 정권의 성격에서 막벽을 넘어오는 규범 위반으로 옮기는 선택이다. 막벽 안의 체제는 겨냥하지 않되 막벽을 넘어오는 공격은 규범의 언어로 단호히 비판한다는 이 구별이 분명할수록, 격리가 적대가 아니라는 신호도 분명해진다.
이처럼 단단한 방어와 절제된 비공격이 함께 갖추어질 때, 남북의 격리는 적대적 단절이 아니라 각자가 똑바로 선 채 공존의 신뢰를 쌓는 공생격립이 된다. 이 관계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미래의 협력을 예비하는 세 갈래의 준비가 의미를 갖는다.
4.2 유인 제공, 자력갱생에서 공력공생으로
첫째 갈래는 북한의 결심에 작용할 유인의 설계이다. 유인은 두 방향에서 온다. 하나는 협력하지 않을 때 치르게 될 비용을 드러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협력할 때 얻을 것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제시하는 일이다. 미는 힘과 끄는 힘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유인이 된다.
먼저 비용의 방향이다. 폐쇄 체제가 AI 시대에 치르게 될 비대칭적 비용을 한국의 정부, 연구기관, 시민사회가 일관되게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 3장에서 본 대로 그 비용은 전자정부 지수의 하락이나 결핵 발생률의 미집계처럼 이미 실측의 형태로 드러나 있고, 격차의 자기강화적 성격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북한 스스로 핵선군정치가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오래된 통찰(하영선 2010)은 AI 영역에서 새로운 적실성을 갖는다. 다만 이 가시화는 체제를 겨냥한 공격이 아니라 격차의 사실을 기록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표적이 정권의 성격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격차라는 점에서, 이 작업은 4.1에서 말한 절제와 어긋나지 않는다.
다음은 이득의 방향이다. 여기에는 북한 식 담론과 개념에 개입할 수 있는 개념설정이 필요하다. 북한의 자력갱생 어법은 원조와 지원의 프레임을 즉각 거부하지만, 경쟁과 따라배우기, 경험교환은 내부 단위들 사이의 운동 방법으로 이미 제도화된 어법이라는 점을 2.4에서 확인하였다. 따라서 협력의 유인은 시혜적 지원이 아니라 경쟁하는 대등자 사이의 공동 창조, 곧 내부용으로 닫혀 있는 경험 교환의 회로를 국제 차원으로 여는 확장의 프레임으로 제시될 때 담론의 접속면이 넓어진다. 이 방향의 담론을 자력갱생의 수정과 확장으로서 공력공생(共力共生)이라고 새롭게 개념화하여 북한에게 제시해볼 필요가 있다. AI 시대의 자주는 외부와의 단절이 아니라 다자적 결합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이며, 자주 담론을 폐기하지 않고 재정의하면서 개방을 정당화했던 비교사의 정상 경로와 같은 결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장에서 본 대로 자주의 담론과 중러 의존의 현실은 이미 어긋나 있고, 비교사의 사례들이 보여주듯 이 긴장은 자주 담론의 폐기가 아니라 재정의로 풀려 온 것이 정상 경로였다. 다자 분산의 협력은 바로 그 재정의에 단일 종속의 대안이라는 정치적 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저자원 환경에서 검증된 AI 적용 사례군을 적극 찾아 개발하고 북한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가나의 수학 학습 보조 Rori(Henkel 외 2024), 나이지리아 에도주의 AI 활용 교육 실험(World Bank 2025), 세계보건기구가 결핵 검진에 권고한 한국 기업의 영상판독 AI(WHO 2021),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수십만 농민에게 보급된 농업 자문 챗봇 등은 전력과 연결성이 제약된 환경에서도 교육과 보건과 농업의 격차를 좁힐 수 있음을 보여주며, 글로벌 사우스에서 검증된 모델의 한반도 적응이라는 경로를 구체화한다. 설계의 원칙은 3.3에서 비교사와 백신 사례로부터 도출한 발견을 따른다. 모니터링 수위를 조절할 수 있고, 가역적이며, 단계별로 동시 교환되는 소규모 시범사업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네 번째 원칙을 더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AI를 감시와 절취에 전용해 온 이력을 감안하면, 협력의 대상은 민수 분야로 한정하고 모델과 연산 자원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며 감시 전용의 가능성을 사전에 평가하는 이중용도 차단의 기준이 설계에 내장되어야 한다. 이 기준은 협력 회의론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제재 결의와의 정합성을 지키는 안전판이기도 하다.
동시에 유인의 한계도 분명히 적어 둘 필요가 있다. 북중러의 공급선이 유지되는 한 북한이 외부의 유인을 사활적 변수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전재성 2025.5). 유인의 효과는 그 공급선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 즉 군사화된 생존이 아닌 발전의 경로가 분명해질수록, 그리고 2장에서 본 봉합책의 한계가 누적될수록 비로소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 유인 제공은 단기 성과의 경로이기보다 변곡점의 순간에 북한 내부의 온건한 선택지를 두텁게 만들어 두는 경로라고 보아야 한다.
4.3 다자 AI 협력공간의 탐색
둘째 갈래는 북한이 AI 협력에 나서기로 했을 때, 실제 활용가능성이 있는 다자 통로에 관한 것이다. 특히 제재의 제약 속에서, 제재 레짐 안에 이미 열려 있는 다자협력의 통로를 명확히 파악해 놓을 필요가 있다.
흔히 제재 레짐은 전면 마비 상태로 인식되지만,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1718위원회)의 인도주의 면제 트랙은 여전히 정상 작동하고 있어, 2026년 2월에도 6일부터 16일 사이에 8건이 승인되었다(1718위원회 면제 목록 2026.3). 면제의 관행은 이미 디지털 영역에 들어와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농업에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는 사업(2024.10)과 사업에 쓸 정보기술 기기를 들여보내는 건(2026.2)에 대해 제재위원회의 면제를 받아냈다. 디지털·정보기술 관련 물자도 면제를 거치면 합법적으로 북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2019)과 경기도(2024)가 직접 면제를 신청한 적이 있다. 이 통로가 한국의 민간과 지방정부에도 실제로 열려 있었다는 뜻이며, 제재 결의의 원문 안에는 합법 통로의 위계도 내장되어 있다.
의료 교류는 결의 2321호 11항에 따라 예외이고, 그 밖의 과학기술 협력은 당사국 판단과 위원회 사전 통보의 경로가 있으며(영국의 백두산 화산 공동연구가 실제 작동 선례이다), 물자 반입은 면제 절차가, 상설 합작기구는 사전 승인 절차가 각각 규정되어 있다. 유의할 점은 교육과 훈련의 형식이 결의 2270호 17항의 명시 금지에 저촉될 위험이 가장 크다는 사실로, 향후 협력은 공동연구와 의료 교류의 형식으로 설계하는 것이 안전하다. 인도주의 면제가 제재 레짐 안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이해가 그나마 수렴하는 지점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한국 주도의 대북 AI 접근을 견제할 유인을 갖는 만큼, 진입은 중국도 반대 명분을 찾기 어려운 보건, 재난, 통계 영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러한 제도적 통로가 한낱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 까닭은, 북한 자신이 이 제재 레짐을 풀려 한 전례에서 드러난다.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2016~2017년에 채택된 다섯 개 안보리 결의(2270·2321·2371·2375·2397)의 해제를 요구하였다(리용호 2019). 북한은 이를 인민의 민생을 옥죄는 조항의 해제로 내세웠으나, 그 다섯 결의야말로 앞서 2장에서 짚은 과학기술 협력 중단(2321호)과 컴퓨터·전자기기 수출 금지(2397호 7항), 컴퓨터 과학 교육 금지(2270호 17항)를 담은 결의들이다. 북한이 핵을 카드로 풀고자 한 제재의 한복판에 과학기술과 컴퓨터 영역이 놓여 있었던 셈이며, AI를 체제 의제의 최상위에 올려놓은 지금 이 영역에서 합법적 이득을 취할 유인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자 채널을 경유한 과학기술· 컴퓨터 부문의 협력 가능성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북한의 드러난 선호 위에 설 수 있다. 다만 과학기술 제재 레짐을 푸는 일이 일방적 시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북한의 협조, 특히 지구적 AI·사이버 거버넌스에 대한 협력을 조건으로 삼아야 하며, 가장 분명한 출발점은 북한이 타국의 핵심 인프라를 겨냥한 사이버 공격과 암호화폐 절취를 중단하는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제재 완화가 보편 규범을 침해해 온 행위의 중단과 맞물릴 때, 그것은 폐쇄 체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규범 준수를 유도하는 교환이 되며, 이는 1장에서 밝힌 공생격립의 절제와도 맞물린다.
제재 레짐 내의 다자 협력의 가능성을 찾는 일과 더불어 북한과 맞닿아 있는 다자기구의 채널을 넓혀 두어야 한다. 2026년 5월 방콕에서 유엔 상주조정관과 북한 중앙통계국이 5년여 만에 대면한 것은 통계와 데이터 협력이 재개의 첫 번째 후보임을 시사하는데(UN DPRK 2026.5), 데이터 협력은 곧 AI 협력의 전 단계이다. 다자 깃발 아래 남측 인력 수백 명이 북한 영토에 수년간 상주했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전례는, 다자 경유가 확보해 줄 수 있는 공간의 상한을 보여준다. "AI 기반의 위기예측, 군사충돌 방지, 재난 대응, 보건의료 지원, 농업 생산성 개선, 환경 감시, 접경지역 관리, 인도적 지원체계는 향후 남북협력의 새로운 영역이 될 수 있다. 북한 정권이 당장 이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미래 협력을 위한 기술적, 제도적, 외교적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전재성 2026.5)는 제언은 이 갈래의 과제를 요약한다.
▲ 2026년 5월 방콕에서 유엔 상주조정관과 북한 중앙통계국 대표단이 5년여 만에 대면하였다
(FAO·AIT 통계역량강화 프로그램 계기). 출처: UN DPRK.
4.4 역량 제고, 결단의 순간을 위한 준비
셋째 갈래는 한국 자신의 준비이다. 북한이 부분 협력을 결심하는 순간, 기술과 자금은 한국이 공급하고 북한 내 배치는 다자기구가 담당하는 분업 모델이 즉시 가동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급할 자산과 그 자산을 실어 나를 절차 역량이 그전에 한국의 손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AI 거버넌스 자산을 쌓아 왔다. 문제는 그 자산이 아직 AI 시대의 한반도 평화공존을 향해 조준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자원의 기반은 갖추어져 가고 있다. 한국은 상용 AI 사용에서 총 사용량 기준 세계 상위 5개국에 들고 (Anthropic 2026.1), 인구 대비 사용 강도에서도 세계 5위로 평가된다(Anthropic 2025.9).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APEC AI 이니셔티브(2026~2030)는 한국이 단독 재원으로 운영하는 아시아태평양 AI센터의 설립을 명시하였고(APEC 2025), AI 기본법은 제22조에 국제협력의 지원을 규정한 채 2026년 1월 시행에 들어갔으며, 2026년 정부 AI 예산은 정부안 기준 10조 1,398억 원, 국회 확정 기준 9조 9,334억 원으로 전년의 세 배 수준에 이르렀다(기획재정부 2025.11). AI 서울 정상회의의 서울선언(2024.5), 군사 분야의 책임 있는 AI에 관한 REAIM 블루프린트, AI안전연구소의 국제 네트워크 참여는 규범 차원의 자산이고, KOICA의 공적개발원조(ODA) 디지털 사업과 한·아세안 디지털혁신기금은 개발협력 차원의 자산이다. 2026년 5월에는 유엔개발계획 총재의 방한을 계기로 9개 유엔 기구가 참여하는 서울 글로벌 AI 허브 구상이 공개되어(The Korea Times 2026.5), 다자기구와 한국이 맞물리는 지점이 한층 넓어졌다.
그러나 자산의 목록이 곧 역량은 아니다. 4.3에서 본 합법 통로들은 그것을 실제로 다루어 본 조직과 사람이 있을 때에만 통로가 된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경기도의 면제 신청 경험은 개별 주체의 기억으로 흩어져 있을 뿐 국가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있지 않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면제 신청과 사업 승인의 요건과 소요 기간, 반려 사유를 사례별로 정리한 절차 매뉴얼이다. 둘째, 그 절차를 상시로 다루는 전담 실무 역량으로, 통일부와 외교부, 개발협력 기관에 흩어져 있는 기능을 대북 AI·디지털 협력이라는 하나의 창구로 묶어 두는 일이다. 셋째, 저자원 환경에서 작동하는 기술 스택의 사전 확보이다. 4.2에서 본 오프라인 판독 AI나 경량 학습 보조 도구처럼 전력과 연결성이 제약된 조건에서 검증된 구성을 미리 갖추어 두면, 협력이 열리는 순간 개발이 아니라 적용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북한의 태도와 무관하게 지금 착수할 수 있는 작업이며, 그 점에서 가장 확실한 준비이기도 하다.
남은 것은 이 자산들을 대북 협력의 가능성과 연결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한미동맹 차원의 의제화로, 한미동맹을 AI와 반도체, 에너지 등 첨단 산업 분야의 기여를 결합한 포괄적 동맹으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전재성 2026.1)의 흐름 안에 대북 AI 거버넌스의 분담안을 포함시키는 일이다. 미국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거버넌스 영역의 한 축으로서 대북 AI 거버넌스 문제를 한국이 맡는 분업의 제안은 동맹 재구성 논의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넓히는 의제가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위에 열거한 채널들 각각에 대북 적용의 시나리오를 미리 설계해 두는 일이다. 아시아태평양 AI센터의 저자원 환경 프로그램, 글로벌 AI 허브의 인도적 AI 트랙, KOICA 디지털 ODA의 한반도 확장 옵션처럼, 이미 보유한 채널 안에 대북 협력이 들어설 자리를 하나씩 마련해 두는 작업이 그것이다.
덧붙이면 세 갈래가 축적하는 자산들은 면제 절차의 매뉴얼, 다자 채널 안의 좌석, 동맹의 분업 의제처럼 정권의 색채가 옅은 관료적, 제도적 자산이어서 정권 교체에 따른 단절에 상대적으로 강하다. 역대 대북정책이 정권 단위로 폐기되어 온 역사를 감안하면, 바로 이 점이 세 갈래 전략의 지속가능성을 받치는 토대가 된다.
5. 맺음말
본 원고의 진단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AI 전략은 통제와 역량의 모순 위에 서 있고, 그 모순은 단기적으로 더 강한 통제와 군사적 의존이라는 역류를 낳을 수 있지만, 중기적으로는 부분적 협력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내부 압력으로 누적될 가능성이 크다. 그 변곡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단정할 수는 없으며, 협력이 아닌 방향의 전환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러나 비교사가 보여주듯 변곡점의 비용을 낮추는 것은 그 전에 닦아 둔 통로와 길러 둔 역량이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명확하다. 협력이 불가능한 지금, 원조가 아니라 공동 창조의 프레임으로 공력공생의 유인을 발신하고, 다자 채널 안의 실질적 자리와 제재 면제 절차의 매뉴얼을 닦아 두는 정지작업을 진행하며, 한미동맹의 분업적 재구성과 다자 AI 거버넌스의 자산 축적으로 결단의 순간에 대비해야 한다. 이 세 갈래의 병행이 곧 예비적 관여이다. 그리고 이 준비기에 남북관계가 빚어야 할 형태가 공생격립, 곧 적대가 아닌 의도적 격리를 통해 각자가 똑바로 선 채 공존의 신뢰를 쌓는 관계이다. 협력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위해 그 전에 통로를 닦고 역량을 길러 두는 이 전략은, 한국이 "질서의 소비자에서 질서의 설계자로"(전재성 2026.6) 이동하는 경로의 한반도 판이기도 하다. 새로운 대북 전략의 핵심이 "장기적 자신감"(전재성 2026.5)이라면, AI 영역에서 그 자신감의 근거는 한국이 이미 보유한 기술과 제도와 네트워크, 그리고 협력을 거부하는 시기에 더욱 정교하게 준비한 전략에서 나온다. 준비는 거두는 날을 기약할 수 없을 때에도 미룰 수 없는 일이며, 지금이 바로 그 준비의 시간이다.
끝으로 본 보고서가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과제 하나를 제언으로 남긴다. 핵무장 폐쇄국가의 AI 격차는 한반도 내부의 사안에 그치지 않는다.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행위자의 통치 기반이 흔들리면 동북아 안보와 비확산은 물론 국경을 넘는 보건과 환경의 거버넌스에도 비대칭적 위험이 더해지며, AI 격차의 방치는 그 자체로 지구적 거버넌스의 비용으로 환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용을 관리할 주체는 뚜렷하지 않다.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북한 문제는 밀려나 있고, 중국은 현 상태의 북한을 자국 곁에 묶어 두는 편을 택하고 있다(NPR 2026.6). 어느 한 국가도 21세기의 복합 공공재를 단독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조건에서, 핵무장 폐쇄국가의 AI 격차는 복수의 행위자가 사안별로 책임을 나누는 분업 질서가 요구되는 전형적 의제이며(전재성 2026.6), 한국이 그 분업의 한 자리를 맡는 일은 지위 추구를 넘어 변화하는 거버넌스 환경에 부합하는 위치 설정이 될 수 있다. 다만 북한 AI 문제를 글로벌 거버넌스의 의제로 본격화하는 작업은 본 보고서의 범위를 넘어서므로, 별도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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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호_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대 강사.
■ 담당 및 편집: 이상준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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