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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NK 스페셜리포트] ① 한반도 개체화 전략 시론: 북한의 안보-정당성 딜레마 폐기와 한국의 중장기 대북전략

분류
스페셜리포트
발행일
2026년 8월 10일
관련 프로젝트
북한 바로 읽기(Global NK Zoom & Connect)

편집자 주

오인환 EAI 수석연구원(서울대 강사)은 북한이 과거 해결하고자 했던 '안보-정당성 딜레마' 논리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폐기되었음을 지적하며, 한반도를 미완의 긴장이 존재하는 '불완전 주권’또는 ‘전-개체들’의 장'으로 새롭게 규정합니다. 오 박사는 단일한 통일을 설정하고 하나의 형상을 강제하는 대신, 전-개체 상태의 긍정적 잠재성에 주목하면서 복합적인 시나리오 속에서 한국에 유리한 개체화(분기) 조건을 미리 조성하는 '한반도 개체화 전략'을 중장기 대북전략으로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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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obal NK Zoom&Connect 원문으로 바로가기

들어가며: 기본 전제의 붕괴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대북정책은 두 개의 암묵적 전제를 공유해 왔다. 첫째는 북한이 궁극적으로는 북미관계의 정상화 경로 안에 있다는 전제인데, 이는 북한이 적절한 안전보장과 경제적 유인이 제공되면 북한은 북미관계의 정상화와 장기적인 비핵화 경로를 향해 움직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둘째는 한반도 문제가 비핵화–경제연계–체제보장의 단일 패키지를 통한 통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전제이다. 흡수통일이든 합의통일이든 연방제이든, 종착점에는 하나의 통일된 한반도라는 단일한 상(像)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이 두 전제는 모두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22년 9월 핵무력을 법제화하며 핵 보유를 "불가역적"으로 선언했고, 2023년 말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공식화하며 한반도 안에서의 통일 지향성을 폐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매개로 한 북·러 협력은 대중(對中) 의존의 완충재를 제공하고 있고, 최근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나듯 중국은 러시아 방향으로 나아간 북한에 대해 자신의 상대적 영향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종래 한국과 미국이 운용해 온 비핵화-인센티브 교환 모델의 지렛대는 구조적으로 무력화되었고, 한국은 단기적으로 북한의 정치적 관계의 정상화를 기본 시나리오로 가정할 수 없는 환경에 진입했다.

동시에 한반도는 미·중 전략경쟁, 아시아-태평양 안보 질서의 재편, 글로벌 공급망· AI기술 분기라는 더 큰 구조 변동 속에서 자기 위치를 다시 규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북한의 전략적 단절과 역내 질서의 분기라는 이 두 압력에 동시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 프레임이 요구되고 있으며, 본고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한반도 개체화 전략 시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1부. 진단: 안보-정당성 딜레마와 그 폐기

1.1 출발점 — 한반도라는 "불완전 주권"의 장(場)

전재성은 동북아 역내국가들이 "겉으로는 결격사유가 없는 국가들이지만, 실은 온전한 주권국가의 꿈을 가진 불완전 주권국가"라고 규정한다(전재성 2020). 남·북한은 1991년 9월 UN에 동시 가입하여 국제법적으로 두 주권국가로 승인받았지만, 분단으로 영토·국민·정부가 양분된 주권의 결손(缺損) 상태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동북아 역내국가들 간의 조직원리가 안정된 무정부상태(anarchy)가 아니라 "무정부상태 이전(pre-anarchy)" 이라는 해석이다. 주권게임이 아직 진행 중이며, 서로를 온전한 주권국가로 승인해 무정부상태적 사회를 조성하는 과정 자체가 미완(未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재성은 분단국가에게 통일은 단순한 국력 증진의 문제가 아니라 "흡수통일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이며, 따라서 주권게임은 "단지 물리적 안보뿐 아니라 존재론적 정체성의 안보(ontological security)에 관련"된다 (전재성 2020).

동북아시아에 대한 "주권 완성을 향한 게임이 진행 중인 미완결 상태" 혹은 “무정부 상태 이전” 라는 전재성의 규정은, 시몽동이 말하는 전(前)개체적(pre-individual) 상태—아직 개체화가 일어나지 않은, 양립 불가능한 차원들의 긴장으로 가득 찬 준안정적(metastable) 장—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띤다. 남·북한은 각자 완결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주권 주장이 중첩·충돌하는 하나의 긴장의 장 안에 함께 놓인 두 단위 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 전개체적 긴장이 어떻게 해소(개체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대북정책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에 앞서 전반부는 1994년부터 2019년까지 북한이 이 긴장을 어떻게 다루어 왔으며, 하노이 회담의 실패 이후 2019년부터 2026년까지 그 처리 방식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뀌었는지를 추적한다.

1.2 안보-정당성 딜레마: 1994–2019년의 작동 논리

북한의 핵 양보를 결정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북한 정권은 대체로 두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때 핵 양보를 결정해왔다. 첫째, 누적된 국내 정치-경제적 압력이 정권의 실질적 정당성(legitimacy)을 잠식하여 정상화의 장기적 기회비용을 낮추는 구조적 조건과 둘째, 미국의 정상화(normalization) 공약 신뢰성이 정상화 경로를 활성화하는 직접적 조건이 모두 충족될 때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두 조건이 비대칭적 시간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국내 압력은 수년에 걸쳐 누적되며 정권의 장기 계산을 정상화 쪽으로 서서히 기울이는 구조적 기저 조건이며, 이에 대한 정책결정자 혹은 엘리트들의 계산에 의해 영향력을 가진다. 이 조건은 북한의 "수용 의지(willingness)"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행동(action)"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행동을 촉발하는 것은 미국 공약의 신뢰성이라는 더 직접적인 조건이다. 반대로 그 신뢰성이 무너지면, 안보 위협은 즉각적·실존적인 반면 경제 압박은 정권 안보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점진적·관리 가능하기 때문에, 정권은 국내 경제가 악화되더라도 핵 활동으로 회귀할 수 있다.

이 틀에서 정상화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당근(carrot)"이라기 보다는 핵 억지를 대신할 수 있는 대체재이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는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형태로 정권의 실존적 취약성을 해소하는 안보 자산이자, 동시에 경제적 고립을 풀어 정당성을 회복시키는 정치-경제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1990년대 초 경수로(LWR)를 화력발전소 대신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로렌스(Lawrence 2020)가 제시하듯, 경수로는 서방의 지속적 기술 지원 없이는 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을 북한과의 장기적 정상화 관계에 물리적으로 결박하고자 했던 북한의 의도가 반영된 북미외교의 제도적 구현물이었다. 북한이 단순한 당근으로서의 에너지 공급원을 원했다면 값싸고 효율적이며, 외부 세계의 기술지원이 필요 없는 화석연료 발전소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북한은 고집스럽게 화석연료 발전소가 아닌 경수로를 요구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대부분의 북미 협상에 참여한 전직 국무부 분석관 로버트 칼린과 존 루이스(Robert Carlin and John W. Lewis)는 북한의 궁극적 목표가 "미국과의 장기적·전략적 관계"였으며, 실제로 북한은 다른 양보가 이루어지자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철회하고 협상 과정에서 무기한의 미군 주둔에도 묵인했다고 지적한다(Carlin and Lewis 2007). 냉전 종식으로 후견 동맹과 사회주의 교역권을 동시에 상실한 김일성에게 미국과의 정상화는 단순한 경제적 유인이 아니라 안보·정당성 양 차원을 동시에 다루는 전략적 목표였던 것이다. 이 논리에 비추어 1994–2019년의 다섯 번의 합의를 보면, 북한의 핵 양보의 변동이 정권 유형이라는 상수가 아니라 두 변수, 즉 국내적인 실질적 정당성 압력과 미국 공약 신뢰성의 변동으로 설명된다.

에피소드국내적 압력미국 공약 신뢰성안보 환경결과
제네바 합의 (1994)높음높음 (KEDO·경수로라는 물리적 공약)첨예하나 외교로 관리동결 (양보)
KEDO 붕괴
(1998–2002)
매우 높음 (고난의 행군)약화 (지연·"악의 축")격화회귀
6자회담·9·19 공동성명
(2003–2007)
지속중간 (공동성명) —
Banco Delta Asia제재로
다시 훼손
변동부분적·불안정 양보 후 정체
2·29 합의 (2012)중간 (승계기)매우 낮음
("전략적 인내")
중간즉각 붕괴
싱가포르–하노이 (2018–2019)중간–높음 (최대 압박)정상외교, 무제도적첨예 후 완화초기 관여 →
하노이 결렬

특히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의해 설립된 KEDO 붕괴기(1998–2002)는 이 틀의 시간성 명제를 검증하는 결정적 사례다. 만약 경제적 압력만으로 핵 양보가 유지된다면, 북한 경제가 고난의 행군으로 파국에 이른 바로 그 시기에 동결이 가장 견고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이 시기 북한의 경제적 곤경은 정권 역사상 최악이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후견국의 상실로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990–1999년 연평균 약 −3.3%로 추락했고, 이는 종래의 성장세가 외연적 성장의 한계에 봉착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의미한다(표학길·조태형·김민정 2020; 조태형·김민정 2021). 1994–1998년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 공공 배급제(PDS)가 붕괴하며 수십만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아사자가 발생했고(Haggard and Noland 2007), 1990–1998년 누적 30% 이상의 역성장으로 북한 경제는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채 2000년대 초까지 안정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이종민 2026). 정권은 기본 생존을 보장함으로써 지탱해 온 경제적 정당성의 토대가 침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기저의 경제적 조건보다는 미국의 즉각적인 공약 신뢰성의 변동에 더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경제적 압력이 심화되었음에도, KEDO 지연과 "악의 축" 지정으로 미국 공약 신뢰성이 무너지자 북한은 2003년 NPT를 탈퇴하고 영변을 재가동했다. 북한은 경제 침체로 인한 실질적 정당성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북미 관계의 정치적 정상화를 보장받지 못하는 핵 양보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6자 회담의 틀내에서 잠시간 북미간의 합의가 있었으나 이후 바로 뱅코 델타 아시아(Banco Delta Asia)에 대한 제재가 부과되면서 합의에 대한 이행은 지속되지 못했다.

2005년 9월의 9·19 공동성명은 제네바 합의 이래 가장 강력한 정상화 문언—상호 주권 존중, 평화공존, 관계 정상화 조치—을 담았으나(이수혁 2008), 같은 달 미 재무부가 뱅코 델타 아시아를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해 약 2,500만 달러의 북한 자산을 동결하면서 그 공약은 즉시 훼손되었다. 한 손으로는 정상화 문언을 내밀고 다른 손으로는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이 모순된 신호 속에서, 북한은 2006년 7월 탄도미사일 시험과 10월 첫 핵실험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2007년 2월 합의와 영변 불능화라는 반쪽짜리 양보로 돌아섰다. 이는 중간 수준의 공약 신뢰성이 부분적·불안정한 양보를 산출한다는 본고 분석틀의 전망과 부합한다. 결국 검증 절차는 확립되지 못했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남북 관여 채널마저 닫히자 부분적 양보를 지탱하던 다자 틀은 급속히 무너졌다(송민순 2016).

2012년 2월의 윤일(閏日) 합의는 이 분석틀의 한계 사례(limiting case)를 잘 보여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승계는 안보-정당성 딜레마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새 정권은 국내적으로 권위를 확립하고 국제적으로 연속성 혹은 변화를 신호해야 했으며, 이 취약한 이행기는 외부적 정당성에 대한 욕구를 낳았다. 영변에서의 핵·미사일 시험과 우라늄 농축 활동의 중지(moratorium)를 미국의 식량 원조와 교환한 윤일 합의는, 이러한 승계기의 취약성을 외부 관여로 완화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는 정상화 전망이나 공약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합의는 협소하고 거래적이었으며, 보다 넓은 정상화 틀에 배태되어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교란 속에서도 합의를 지탱할 제도적 메커니즘—KEDO에 상응하는 장치—이 부재했다.

그 결과 북한이 2012년 3월 위성 발사를 발표하자 합의는 즉각 붕괴했다. 제도적 깊이나 물리적 공약을 결여한 합의 구조는 회복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윤일 합의는 국내 압력이 어느 정도의 관여 의지를 만들어내더라도(승계기는 취약성과 외부적 정당성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낳았다), 신뢰할 만한 정상화 공약과 양측을 지속적인 정치적 관계에 묶어두는 제도적 메커니즘이 부재하면 그 합의는 본질적으로 취약하며, 어느 쪽에서 발생하는 교란이든 회귀를 촉발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이 25년간 북한이 반복적으로, 실제로 장기적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제네바 합의의 다년간 동결, 2007년 영변 무능화, 2018년 핵·미사일 시험 모라토리엄은 안보-정상화 딜레마 속에서 선택된 양보였다. 만약 안보-정상화 딜레마를 장기적인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통해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면 전술한 북한의 선택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제네바합의, 은 설명되지 않는다. 김정은 집권 이후 2013년에 나타난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은 이 안보-정상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북한의 동시 추구의 한 단면이다. 논리적으로는 핵 또는 경제 둘 중 한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맞겠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안보-정당성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인 병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 이후 정면돌파전의 채택 이전까지, 2018년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의 발표와 이어진 북미, 대남외교 또한 같은 이 딜레마에 대한 북한의 대응을 나타낸다.

북미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기본적인 상황에서 북한은 핵무기와 정상화를 부분적 대체재(substitutes)로 가정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공약이 후퇴할 때를 대비한 헤징(hedging)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핵 억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 판단할 때 핵 문제에 대해서 부분적이나마 양보했고, 그 관계가 신뢰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핵으로 회귀했다. 일부에서 반복하여 주장하는 "북한은 애초에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고 외교는 시간벌기였다"는 해석은 가장 편리한 사후적 해석이나, 만약 북한의 선호가 고정되어 있었다면 이러한 변동 자체가 관측되지 않았을 것이다.

1.3 하노이라는 임계점: 누적된 신뢰성 위기

이 같은 맥락에서 하노이 회담(2019년 2월)의 결렬은 25년간 누적된 미국 공약 신뢰성 붕괴를 의미하는 임계점(tipping point) 이었다. 하노이로 이어진 2017–2019년의 국면 전체는 안보-정당성 딜레마의 압축판이었다. 2017년 북한은 공약 신뢰성이 바닥에 떨어진 조건에서 안보 항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월 화성-12형을 시작으로 그 해에만 십수 차례의 탄도미사일 시험이 이어졌고, 7월에는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화성-14형 ICBM을, 11월에는 화성-15형을 시험 발사했다. 9월 3일의 6차 핵실험은 수소탄급 위력을 표방하며 핵능력의 질적 도약을 과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라는 수사와 함께 항공모함 전개, 전략폭격기 출격, 유엔 안보리의 연쇄 제재 결의로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기조를 밀어붙였고, 양측의 상호 위협은 한반도를 군사적 충돌 직전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김정은이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 직후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은, 이 위기 고조가 무제한의 긴장 추구가 아니라 협상 레버리지의 확보를 겨냥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핵무력 완성이라는 자기 선언은 곧 협상 국면으로의 전환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2018년 한반도 정세가 급격히 변하면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재개되었고, 4월 판문점 선언과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었다. 북한은 2018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병진노선의 종결과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선언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비핵화 협상에 대한 전향적 자세로 읽혔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포괄적으로 담았으나, 비핵화의 정의·순서·검증을 둘러싼 구체적 이행 로드맵은 부재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9월 평양공동선언과 군사분야 합의서는 북한이 미국의 상응 조치를 전제로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 용의를 명시함으로써, 부분적·단계적 비핵화와 부분적 상응 조치를 맞교환하려는 북한의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접근과 미국이 요구한 일괄타결(big deal) 방식 사이의 간극이,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후 북미간의 세 차례의 정상회담, 친서 교환, DMZ에서의 극적 회동은 외교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료적 지원, 의회의 동의, 다자적 틀, KEDO에 상응하는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회담은 결국 북한의 부분적 비핵화(영변 폐기) 대(對) 부분적 제재 완화 제안과, 포괄적 비핵화를 선결 요구한 미국의 입장 사이의 간극으로 결렬되었다. 사실 북한의 관점에서 하노이의 조건은 1990년대 KEDO 붕괴가 입증했던 바로 그 취약성 — 제도적 장치가 없는 정치적 공약을 믿고 핵을 양보하는 위험 — 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결렬이 북한에 남긴 충격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2019년 8월 5일자 친서(현재까지 양국 정상 간 마지막 친서)에 응축되어 있다. 김정은은 한미연합훈련을 겨냥해 "전쟁 준비 연습의 주요 타깃은 우리의 군대"라며, "저는 한국을 공격하거나 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없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진정 없습니다"라고 적었다(이정철 2025에서 재인용). 이 문장들의 긴장 — 방어를 거듭 강조하면서도 한미 군사동맹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 자체가, 하노이 결렬이 정권에 상당한 충격으로 내면화되었음을 시사한다.

1.4 질적 단절: 딜레마 논리의 폐기

하노이 이후의 변화는 안보-정당성 딜레마 내부의 또 다른 진동(oscillation)가 아니라 딜레마 논리 자체의 폐기이며 이는 세 가지 지표에서 확인된다. 첫번째는 정상화 추구의 포기인데, 김정은의 2020년 1월 당 중앙위원회 연설은 모라토리엄을 "일방적 양보"로 재규정하고 자기 구속에서의 해제를 선언했다. KEDO 붕괴 후, 6자회담 정체 후에도 다시 협상으로 복귀하던 종래의 패턴—회귀 후 재관여—이 사라졌다.

두번째는 핵 지위의 항구화이다. 2022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는 핵 지위를 법제화했다. 동 법령은 북한의 핵무력을 "국가의 주권과 령토 완정, 근본 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방지하며 세계의 전략적 안정을 보장하는 위력한 수단"으로 규정한다(조선신보 2022). 더 이상 핵능력을 정치적 관계와 교환 가능한 자산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는 핵을 정상화의 대체재에서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격상시킨 전환이다.

이 전환은 법제화 이전부터 담론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김정은은 202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서 "핵무력의 제2 사명"을 언급하며, "우리 핵무력의 기본 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에까지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자주시보 2022). 핵무력의 목적이 '억제'를 넘어 '공세적 사용'의 가능성으로 확장된 것이다.

세번째는 북한의 동맹 구조의 재편과 대남 인식의 전환이다. 2023년 12월 3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는 적대적 두 국가론에 본격적 동력을 부여했다. 김정은은 이 회의 보고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는 한편,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반제자주적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켜 국제적 규모의 반제 공동행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로동신문 2023). 2024년 6월 북·러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반제자주"를 이념적 기초로 재확인한 것은, 종래 북·중 관계에 부여되던 이념적 정초를 북·러 관계로도 확장한 것이다.

대남 인식의 전환은 더 노골적이다. 김정은은 전원회의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 제도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로선과 극명하게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수 없다"고 선언했다. 2024년 1월 시정연설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최대의 적국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 병존하고있는 특수한 환경"을 거론하며 위기 서사를 강화했다(조선신보 2024)

전재성(2020)은 남·북한이 "UN에서 두 주권국가의 지위로 개별 가입했지만 남·북한 간 특수관계를 유지하여 장차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보았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바로 이 특수관계 자체를 부정한다. 통일을 열어둔 "사실상의 두 국가"에서, 통일 가능성이 폐기된 "적대적 두 국가"로의 전환이다. 전재성이 진단한 "소멸의 딜레마"의 한 축 — 통일이라는 주권게임의 최종 목적 — 이 적어도 북한 측에서는 명시적으로 철회된 것이다. 이는 안보-정당성 딜레마가 안보 추구로 귀결되었으며, 한반도라는 전개체적 장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1.6 1부의 결론: 새 관점의 필요성

1994–2019년 북한은 안보-정당성 딜레마 안에서 작동했다 — 경제적 압력이 실질적 정당성을 잠식하는 가운데 미국의 공약 신뢰성이 제시되면 정상화를 추구하고, 미국 공약 신뢰성이 무너지면 핵으로 회귀하는 진동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 진동은 누적된 미국 공약 신뢰성의 실패로 하노이에서 임계점에 도달해 폐기되었다. 한국은 두 가지 무너진 전제—북한이 정상화 경로 안에 있다는 전제, 그리고 단일 통일 패키지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위에 더 이상 정책을 세울 수 없다면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전재성이 진단한 "불완전 주권"의 장, 시몽동이 말한 전개체적 긴장의 장으로서의 한반도를 상정하면서 본고는 이 물음에 한반도 개체화 전략으로 답하고자 한다.

2부: 한반도 개체화 전략

2.1 왜 "개체화"인가 — 불완전 주권의 장(場)을 다시 기술하기

기존의 통일 패러다임 — 흡수통일, 합의통일, 연방제 — 은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인식론적 전제를 공유한다. 고전적인 형상-질료설과 같이 종착점에 단일한 통일 형상(form) 이 미리 주어져 있고, 정책이란 그 형상을 향해 현실을 밀어붙이는 작업이라는 전제다. 이는 정치적 단위를 이미 완성된 실체로 간주하고, 변화를 그 실체들 사이의 외재적 관계 조정으로 보는 실체주의적(substantialist) 존재론에 기반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적대적 두 국가론 환경에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역효과를 낳는다. 단일 형상을 직접 추구할수록, 북한은 그것을 체제 소멸 기획으로 받아들여 더 깊이 결박된 준안정 상태로 후퇴하기 때문이다.[1]

전술하였듯이 전재성은 남·북한을 온전한 주권국가가 아니라 불완전 주권국가 — 분단으로 영토·국민·정부가 양분되어 "주권의 결손(缺損)"을 안은 두 단위 — 로 규정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주권 완성을 향한 게임이 아직 진행 중인" 미완(未完)의 상태로 본다. 여기서 그가 동북아 역내 조직원리를 안정된 무정부상태(anarchy)가 아니라 "무정부상태 이전(pre-anarchy)" 으로 명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은 각자 완결된 주권적 개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주권 주장이 중첩·충돌하는 미완의 장(場) 안에 함께 놓인 두 단위라는 것이다. 본고는 바로 이 "불완전 주권의 장"을 다시 기술하기 위해 시몽동의 개체화(individuation) 개념을 발견적 틀(heuristic)로 도입한다.

본고는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이 한반도 정치의 인과 메커니즘을 예측·검증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주장은 자연철학의 개념을 사회과학적 인과 모델로 무리하게 전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본고의 주장은 개체화 개념이 기존 통일 패러다임이 보지 못하게 만든 문제 공간, 즉 전재성이 "미완의 주권게임"으로 포착한 그 공간을 다시 기술(redescribe) 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발견적 틀의 정당성은 예측력이 아니라 재기술이 산출하는 새로운 정책 함의에 있다.[2]

전재성의 진단과 시몽동의 개념이 구조적으로 맞물리는 지점은 양자 모두 실체에서 과정으로 분석의 초점을 옮긴다는 데 있다. 전통 철학이 "이미 개체화된 개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과 달리, 시몽동은 개체가 아니라 개체화 과정 자체(ontogenèse; ontogenesis; 개체 발생)를 일차적 실재로 본다. 그는 구성된 개체에 존재론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사유를 뒤집어, "개체로부터 개체화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개체화를 통해서 개체를 알려고 할 것"(시몽동 1958, 2017, 40–41)을 제안한다. 분석의 출발점은 결과물인 개체가 아니라 그것을 산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이 발상은, 한반도를 두 개의 완성된 주권국가의 합이 아니라 아직 개체화되지 않은 하나의 발생적 장으로 읽으려는 본고의 시도에 직접 대응한다. 이 전환은 그가 비판한 두 고전적 도식—개체를 자기충족적 실체로 보는 실체주의(substantialisme)와, 수동적 질료에 외부의 형상이 부과된다고 보는 질료형상론 (hylémorphisme)—을 동시에 겨냥한다. 시몽동에게 개체에 선행하는 전(前)개체적 상태는 결여가 아니라 "단일성보다 더 많고 동일성보다 더 많은(plus qu'unité, plus qu'identité; more than unity, more than identity)" 잠재성의 영역이며, 양립 불가능한 차원들의 공존이 곧 잠재 에너지가 된다.[3]

한편으로 전재성의 "불완전 주권"은 곧 시몽동의 "전개체성"이 한반도에 적용될 때 대응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시몽동의 개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불완전 주권은 완성되어야할 주권을 지향하도록 개념화 되어있는 반면,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은 주권의 결손을 메워야 할 결여가 아니라, 아직 어느 방향으로도 결정(結晶)되지 않은 잠재성의 저장고로 해석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개체화(l'individuation; individuation)는 이 긴장이—안정도 불안정도 아닌 준안정(metastable) 상태에서—해소되며 새로운 구조가 발생하는 사건이며, 전재성이 말한 "무정부상태 이전"은 바로 이 준안정 상태에 해당한다. 시몽동이 즐겨 든 개체화의 비유는 물리과학에서의 결정화(crystallization)인데, 과포화 용액은 겉보기에 안정적이지만 실제로는 퍼텐셜 에너지로 충전된 준안정 상태이며, 작은 결정 씨앗(germe)이 도입되면 그 긴장이 구조화된 결정으로 해소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씨앗이 형상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씨앗은 결정 구조를 외부에서 주조하는 거푸집이 아니라, 용액 자체에 내재한 분자적 잠재성이 구조화되도록 촉발하는 특이점(singularité)일 뿐이다. 시몽동의 용어로, 씨앗이 하는 일은 형상의 각인이 아니라 정보(information) 의 도입이다—여기서 정보란 미리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양립 불가능했던 것들 사이에서 소통(communication)이 성립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결정의 최종 형태는 씨앗이 아니라 용액의 조건에서 나온다. 이 비대칭—촉발하되 부과하지 않음—이 한반도 개체화 전략의 전략적 핵심이 될 수 있다.

2.2 두 층위의 개체화: 주권게임과 개체화의 만남

한반도 개체화 전략은 서로 구별되는 두 층위에서 작동한다. 시몽동의 개념 위계— 개체화(individuation)와 초개체화(transindividual)—에 각각 대응하며, 동시에 전재성이 구별한 두 게임—주권게임(역내국가들이 주권 완성을 다투는 게임)과 국제정치게임(역내·역외국가가 함께 벌이는 세력·이익의 게임)—에 포개진다. 두 층위의 구별은 단순한 분석적 편의가 아니라, 한반도 문제가 내적 차원(남·북 관계)과 외적 차원(역내 질서 속 한반도의 위치)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서로를 규정한다는 구조적 사실을 반영한다.

2.2.1 거시 층위 — 한반도를 역내 국제정치의 단위로 개체화하기

적대적 두 국가론이 고착되는 시나리오에서도, 한반도는 미·중 관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질서 안에서 독자적 분석·전략 단위로 다뤄져야 한다. 이는 "한반도 문제"라는 의제를 단지 유지하자는 차원을 넘어선다. 시몽동적 의미에서, 한반도를 그 결합환경(milieu associé) — 한미동맹, 한·미·일 협력, 한·중·일 네트워크, 북·중·러 연계, ASEAN·태평양 도서국 안보 질서, 글로벌 기술·통상 네트워크, AI라는 범용기술의 전파 — 과 함께 발생하는 하나의 관계적 개체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는 뜻이다. 시몽동에게 개체는 결코 환경과 분리되어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듯 "개체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개체만이 아니라 개체-환경의 쌍이기도 하다"(시몽동 2017, 41–42). 개체는 자신이 그 안에서 개체로서 존재하지도, 개체화의 원리로서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존재의 상태로부터 나오며, 개체화는 그 체계에 내포된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해결로 나타난다. 한반도를 그 결합환경과 떼어내 "먼저 완성된 단위"로 상정하는 순간 분석은 시몽동이 경계한 바로 그 오류—결과를 원인의 자리에 놓는 도착—에 빠진다. 개체화는 개체와 그 결합환경을 동시에 산출하며, 개체의 경계는 환경과 교섭하는 표면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전재성의 이론도 이 거시층위가 왜 불가피한지를 설명한다. 그는 동북아에서 역내국가들의 주권게임이 미국·러시아 같은 역외 강대국의 국제정치게임과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역내국가의 주권 완성이 역외 강대국의 지역 전략과 직접 연동된다고 본다. 한반도의 주권 문제는 결코 남·북 양자에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몽동에게 초개체화(transindividual)는, 개체가 자기 안의 미해소 긴장을 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그 해결이 오직 집단적 차원에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두 통찰은 같은 곳을 가리킨다. 한반도의 내적 긴장(남·북 disparation)이 양자 간에 당장 해소될 수 없는 지금, 한국의 행위자성은 역내 관계망 속에서 초개체적으로—즉 주권게임과 국제정치게임이 만나는 결절점에서—구성될 필요가 있다.[4]

이 재규정이 갖는 정책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한국이 한미동맹의 부속이나 미·중 경쟁의 종속변수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과 미·중 경쟁을 감안하되 자기 milieu와 함께 작동하는 준안정적 개체로서 외교적 행위자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통일부를 실질적인 한반도 전략부로서 놓고 북중러 연계와 미중관계의 연동 속에서의 대북정책과 한반도 전략을 장기적으로 구상하는 역할을 부여하여 운용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통일부가 북중관계와 북러관계에 대한 관여와 대응, 그리고 대미, 대일 로비 업무를 확대해 담당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북한이 통일전선부를 외무성 산하의 10국으로 축소시키고 미래지향적인 한반도 단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없는 상황—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통일 지향성을 폐기한 상황—에서, 역으로 한국의 대북전략은 한반도 단위의 역내 상호작용 자체를 분석·전략의 단위로 설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비핵화 의제가 단기적으로 진전이 어렵더라도, 한반도 자체의 역내 가시성·연결성·매개 능력은 별도 다자 트랙(G7·G20·ASEAN+3·NATO-IP4·MIKTA등)에서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이 단기적인 비핵화의 정체와 장기적인 한반도 행위자성의 강화를 분리(decoupling) 하는 전략적 이점이다.

2.2.2 미시 층위 — 남·북을 전개체적 긴장 상태로 재기술하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법상 두 UN 회원국이지만, 전재성(2020)의 불완전 주권 이론이 보이듯 국제정치적으로는 완전한 개체가 아닌 전개체적 상태의 두 단위다. 전재성의 진단을 따르면, 양국 모두 한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로 상정하는 헌법적 주권 주장이 중첩되며(혹은 적대적 두 국가론이라는 부정적 형태로만 분리되어 있고), 자기 안보·정체성을 외부 강대국과의 동맹·후견 없이는 완성할 수 없으며, 평화협정이 부재한 정전체제는 본질적으로 준안정 상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권의 결손"이 단위 차원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여기에 시몽동이 말하는 괴리(disparation)—양립 불가능한 두 차원의 공존—이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목할 것은, 전재성이 분단국가의 주권게임을 일반 주권국가의 국제정치게임과 구별하며 그것이 "단지 물리적 안보뿐 아니라 존재론적 정체성의 안보(ontological security)에 관련" 된다고 본 점이다. 아래 표의 각 행은 단순한 정책 차이가 아니라, 두 단위가 각자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걸고 벌이는 주권게임의 전선(戰線)들이다.

이 disparation을 국제정치적으로 읽을 때 네 가지 원칙이 도출되며, 이는 전략 전체의 인식론적 토대를 이룬다. 첫째, 남북간의 괴리(disparation)은 갈등이 아니라 차원의 문제다. 남·북, 북·미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disparation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입장 차이"나 "이익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두 정치질서가 같은 한반도라는 지리적·역사적 단위 안에 공존하는 상태로 본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비핵화-글로벌 통상의 차원과 핵무력-권위주의-우회 통상의 차원은 협상 테이블에서 양보·타협으로 좁힐 수 있는 동일 차원 위의 거리가 아니라, 번역되지 않는 두 차원의 공존이다. 이 구별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동일 차원 위의 거리라면 협상으로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이 합당하지만, 현재 시점에서의 괴리가 서로 다른 차원의 공존이라면 좁히려는 시도 자체가 범주 오류이며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차원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비핵화·확장억제핵무력 법제화·증강
정치체제자유주의-민주주의권위주의·세습
경제 구조글로벌 통상·기술·AI 생태계폐쇄경제·제재
회피·중러 연계
동맹한미북·중 (+북·러)
정체성 서사자유주의·민주주의·인권·국제규범주체·자력갱생·반제

둘째, 해소는 새 차원의 발생이다. 괴리(disparation)의 해소는 두 차원의 평균이나 한쪽의 흡수가 아니다. 시몽동에게 그것은 두 차원이 통합되되 새로운 차원으로 변형되어 출현하는 사건이다. 한반도에 적용하면, 통일(어느 한쪽으로의 흡수)도 영구 분단(두 차원의 영구 분리)도 괴리(disparation)의 진정한 해소가 아니며, 진정한 해소는 두 차원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차원—예컨대 분기적 공존 안의 매력 경쟁, 또는 단계적 비확산-평화체제—으로 변환되는 사건이다.

셋째, 괴리(disparation)은 잠재 에너지다. 시몽동의 핵심 통찰은 이 양립 불가능성이 결함이 아니라 잠재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전재성의 언어로 옮기면, 주권의 결손과 미완의 주권게임은 메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비록 존재론적 안보가 걸려 타협이 본질적으로 어렵지만—아직 어느 방향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잠재성의 장이다. 양립 불가능성을 결함으로 보는 시각은 그것을 "정상화의 미달 상태"로 진단하고 단일 결정론적 통일 모델을 처방하지만, 잠재 에너지로 보는 시각은 동일한 양립 불가능성을 복수의 변환 경로를 가능케 하는 발생적 토대로 재해석한다.

넷째, 결정 씨앗으로서의 정책이다. 과포화 용액이 씨앗 없이는 결정화하지 않듯, 괴리(disparation)는 자체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의 해소를 유발하는 결정 씨앗이 필요하다. 한반도 개체화 전략에서 한국의 정책적 개입 —매개자 역할, 작은 안정점, 기술 다양성 측면의 자기증명—이 바로 이 씨앗 기능을 한다. 한국은 괴리(disparation)를 직접 해소할 수 없지만, 어떤 방향으로 해소될지를 변형시키는 씨앗을 형성환경(milieu)에 심을 수 있다. 이것이 시몽동이 제시한 변환(transduction)을 한반도에 적용한 정치적 의미이다.

2.3 전략의 핵심 동학: 준안정 · 씨앗 · 변환 · 재결정화

한반도 개체화 전략의 독창성은 정태적 시나리오 분류가 아니라 동학(動學) 에 있다. 그 동학은 결정화의 네 국면에 대응하며, 각 국면은 시몽동의 개념을 한반도 정책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첫째, 준안정성의 인정, 혹은 현 상태의 재규정, 이 필요하다.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고착된 현 한반도는 "실패한 통일"이 아니라 준안정 상태다. 겉으로 정적이지만 잠재성이 충전된 긴장의 장이다. 이 재규정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책의 시간 지평을 바꾼다. 현 상태를 "비정상·실패"로 규정하면 정책은 그것을 즉각 해소하려는 단기적 압박으로 기울지만, "준안정"으로 규정하면 정책은 긴장을 관리하면서 결정화의 조건을 조성하는 중장기 작업으로 재설정된다. 전략의 출발점은 이 상태를 성급히 해소하려는 충동을 절제하고, 그것이 관리 가능한 긴장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

둘째, 결정 씨앗 심기 (시나리오-독립적 상시 작업) 가 요구하다. 한국은 단일 통일을 직접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형성환경(milieu) 곳곳에 작은 안정점(결정씨앗) 을 심는다. 여기에는 북중 및 북러 관계에 대한 관여, 대미, 대일 로비,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농업 및 인도적 협력, AI 기술 지원, 보건·감염병 공동대응, 기후, 이산가족, 재난 관리, 군사적 신뢰구축의 최소 기제, 우발 충돌 방지 채널 등이 포함된다. 이 씨앗들은 그 자체로 통일과 같은 한반도라는 단일한 상을 만들지 않는다. 시몽동의 씨앗처럼, 이들은 특정 형상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긴장이 해소될 때 결정화가 시작될 수 있는 핵(核)을 미리 배치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씨앗 심기가 특정 시나리오에 종속된 하위 과제가 아니라 어느 시나리오가 실현되든 분기 확률을 한국에 유리하게 휘게 만드는, 시나리오-독립적(scenario-invariant) 상시 작업이라는 점이다. 통상의 정책 기획이 "어떤 미래가 올지 예측하고 그에 맞춰 대비"하는 구조라면, 씨앗 전략은 어떤 미래가 오든 그 미래의 결정화 방향을 한국 쪽으로 편향시키는 구조다. 결정화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씨앗이 미리 심겨 있는가 아닌가는 결정화의 방향을 좌우한다. 이 점에서 씨앗 전략은 예측의 정확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바로 그렇기에 고도의 불확실성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

셋째, 충격과 변환 (transduction)의 가능성이다. 시몽동의 변환(transduction)은 한 영역에서 발생한 구조화가 인접 영역으로 전파되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과 매개를 창출하는 자기-증폭적 작동이다. 결정에서 이미 형성된 한 층(層)이 다음 층 형성의 조건이 되듯, 변환에서는 각 구조화된 영역이 인접 영역 구조화의 원리가 된다. 한반도에서 충격—북한 엘리트 내부의 동학 변화, 미·중 관계 변동, 북·러 협력의 결정적 한계 노출, 지도부 변수, AI 기술발전의 구조적 압력 등— 이 왔을 때, 미리 심긴 씨앗이 있다면 그 충격은 무질서한 붕괴가 아니라 구조화된 전파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영역(예: 인도적 협력)에서 형성된 신뢰가 인접 영역(예: 경제·보건·안보)의 구조화 조건이 되는 층상 전파다. 충격 자체는 통제할 수 없으나, 충격이 전파되는 경로는 사전에 배치된 씨앗에 의해 일정하게 편향될 수 있다는 것이 변환 동학의 핵심 함의다.

넷째, 개체와 결합환경의 동시 재결정화, 혹은 동시 개체화, 를 추구해야 한다. 결정화가 진행되면 개체(남·북)와 결합환경(역내 질서)이 동시에 변형된다. 한반도의 개체화는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전재성이 역내국가의 주권게임과 역외 강대국의 국제정치게임이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고 본 그대로, 한반도의 재결정화는 미·중·일·러를 포함한 역내 질서의 재편과 함께 발생한다. 남·북의 주권게임이 어느 방향으로 결정화되든, 그것은 곧바로 결합환경의 국제정치게임을 변형시키고, 역으로 그 국제정치게임의 변동이 다시 남·북 주권게임의 결정 조건을 바꾼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은 한반도 내부만이 아니라 결합환경 전체를 동시에 겨냥해야 한다—거시 층위와 미시 층위가 하나의 작업으로 통합되는 지점이다.

2.4 개체화 시나리오 매트릭스: 네 축과 AI라는 변형 계수

각 시나리오는 네 축의 분기로부터 도출된다: (i) 북한 정책의 지속 대 변화(지도자 및 국내 요인), (ii) 미·중 관계 향배, (iii) 북·중·북·러 연계 강도, 그리고 (iv) AI 기술 혁신의 전 지구적 진전이 야기하는 외부 압력이 그것이다. 첫번째 분석의 인과 메커니즘인 국내 압력의 누적과 외부 공약 신뢰성의 변동—은 이 매트릭스 안에서도 작동하지만, 이제 적대적 두 국가론을 기본값으로 가정한 환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네 번째 축은 앞의 세 축과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추가 변수가 아니라 형성환경(milieu) 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키는 외생적 충격이며, 다른 세 축에 곱해지는 변형 계수(transformation coefficient)로 작동한다. AI·반도체·자율무기·합성생물학의 동시 진전은 세 경로로 한반도의 결정화 조건을 바꾼다. 첫째, 글로벌 기술 시스템과 권위주의-자력갱생 모델 사이의 격차를 가속적으로 확대하여 북한 체제의 기술-경제적 정당성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 (1부의 안보-정당성 딜레마에서 "국내 압력" 항을 증폭). 둘째, AI 경쟁과 AI의 군사화를 통해 안보 딜레마를 재구성하며, 셋째, 글로벌 공급망·기술 표준의 분기를 가속화한다. 이처럼AI 축은 별도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네 시나리오 모두에 횡단적으로 적용되는 변형 계수라는 점에서, 시나리오 분석의 새로운 차원을 구성한다.[5]

다만 여기서 "기술-경제적 정당성 위기"는 단기적 경제 붕괴가 아니라 구조적·장기적 격차로 이해되어야 한다. 북한 경제는 2017–2022년 대북제재 강화와 코로나19의 여파로 연평균 약 −2.0%의 계단식 역성장을 겪은 뒤, 2023년 3.1%, 2024년 3.7% 성장하며 무역 재개와 북·러 협력에 힘입어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 (이종민 2026). 2024년 실질 GDP는 제재 이전인 2016년의 약 95% 수준까지 회복되었으나, 1인당 소득은 남한과 약 20배(구매력 평가 기준)의 격차를 보이며 여전히 1990년대 경제위기 이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즉 AI 변형 계수가 증폭하는 것은 즉각적 체제 붕괴 압력이 아니라, 회복 국면에서도 좁혀지지 않는—오히려 첨단기술 분기로 더 벌어지는—남북 간 기술-생산성 격차이며, 이것이 장기적으로 권위주의-자력갱생 모델의 정당성 토대를 잠식한다.

시나리오 A는 동결된 준안정 (frozen metastability) 상태로 현재 상태의 지속에 가깝다. 이는 북한 적대적 두 국가론 지속, 미·중 전략경쟁 고착, 북·중·러 연계 강화, AI 군비경쟁 격화가 모두 결합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역서는 두 개체가 각자의 형성환경(milieu)에 깊이 결합된 채 장기 준안정 상태에 머문다. 한국의 과제는 역내 행위자성(외교적 응집, 기술·통상 허브화, 확장억제 신뢰성)을 강화하고, 위기관리 인프라(우발 충돌 방지 채널)를 복원 또는 대체 구축하는 것이다.

시나리오 B는 점진적 변환 (gradual transduction)이다. 북한 내부 변화(엘리트 분화·세대교체·경제 압박 누적), 미·중 전략적 안정화, 북·중 관계 균열 또는 북·러 협력의 한계 노출, 대중 무역 의존의 취약성 발견, 그리고 AI 격차로 인한 북한 기술-경제 위기 심화가 조합되는 경우인데, 여기서는 첫번째 분석의 안보-정당성 딜레마 논리가 부분적으로 재가동될 수도 있는 있는 환경이다. 단, 1994–2019 모델의 단순 복원이라기 보다 한반도가 현재 당면한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의 비확산을 추구하는 접근으로 변환된다. 한국은 결정 씨앗(미중 사이의 비핵화 공약 확인,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한 인도적 협력, 중국과 러시아 관여를 통한 한반도 핵동결 및 축소 협상 제반 여건 조성 등)을 변환의 매개로 삼고, 미·중을 같은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매개자(convener) 역할을 수행한다.

시나리오 C는 분기적 공존 (bifurcated coexistence) 이다. 여기서는 미·중 공급망·기술 분기와, AI·반도체 표준의 경쟁 구도 심화 속에서 두 개체가 서로 다른 기술적 세계안에서 공존하는 모델이다. 여기서 기술철학자 허욱(Yuk Hui)의 개념이 거시 좌표를 제공한다. 허욱은 모든 기술이 특정 우주관·윤리관에 배태되어 있어 단일 보편이 아니라 복수적이라는 우주기술 개념과, 단일화된 글로벌 기술의 단일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기술다양성(technodiversity), 그리고 통일적 종착점을 거부하고 분기(bifurcation)를 통한 복수의 미래를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명제를 제시한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자유주의-기술네트워크 세계(남)와 권위주의-자력갱생-반제 세계(북)가 충돌이 아닌 공존의 형태로 분기한다. 통일은 목표에서 조건이 갖춰지면 발생할 수 있는 한 경로로 간주되며, 더 핵심적인 과제는 두 기술세계의 충돌이 군사적 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위기관리와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민주주의 기술세계의 매력·우월성을 장기적으로 입증하는 자기증명이다.[6]

시나리오 D는 외부 충격에 의한 강제 개체화 (forced individuation)이다. 북한 내부 정치 위기, 지도부 유고, 또는 중·러의 대북정책 급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후 러시아의 대북 관여 축소), AI 기반 정보·감시 환경의 변화, 북한이 AI에 대응하는 과정에서의 중국에 대한 과잉종속과 같은 통제되지 않은 급격한 구조 전환으로, 결과는 한·미·중의 위기관리 능력에 의해 사후적으로 규정된다. 한국의 과제는 평시부터 다국 간 비공개 유사(contingency) 협의 채널, 인도적·민사 작전 능력, 핵·미사일 자산 통제 시나리오를 정비하는 것이다.

기준A. 동결된 준안정B. 점진적 변환C. 분기적 공존D. 강제 개체화
단기 실현 가능성매우 높음낮음높음(진행
중)
매우 낮음
한국 가치와의 양립부분적높음부분적가변적
한국의 통제 가능성중간중간–높음높음(구성적)낮음
비핵화 진전매우 낮음부분적매우 낮음높으나 불확실

결정적으로, 이 네 시나리오는 상호배타적 미래 상태가 아니라 동시에 부분적으로 작동하는 잠재성의 분포(distribution of potentials) 다. 시몽동의 전개체적 장이 여러 양립 불가능한 잠재성을 동시에 품고 있듯, 한반도의 현재 또한 네 시나리오의 잠재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적대적 두 국가론이 지속되는 동안(A)에도 북한 내부에서 변화의 단초(B)가 누적될 수 있고, 두 기술세계 다양성의 분기(C)는 이미 진행 중이며, 강제 개체화(D)의 contingency는 가능성이 낮지만 대비가 필요한 시나리오 이다. 따라서 한국의 정책은 어느 한 시나리오를 "맞히는" 예측 작업이 아니라, 네 시나리오 모두를 동시에 관리하면서 한국에 유리한 분기 방향으로의 변환을 추동하는 작업이다. 이 평가는 단일 "최선" 시나리오를 가리키지 않으며, 핵심 통찰은 한국의 정책이 단일 시나리오를 향한 결정론적 추구가 아니라 시나리오 간 분기 확률을 한국에 유리하게 변형시키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5 긴장의 인식: 씨앗 심기의 이중 가독성

한반도 개체화 전략은 한 가지 불편한 긴장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한국이 심는 "결정 씨앗"은 북한의 관점에서 체제전복 기획으로 읽힐 수 있다. 북중 및 북러 관계에 대한 관여,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한 인도적 협력, 정보 유입, 시장 접촉, 대미 및 대일 로비—이 모든 것이 평양에는 정권의 정당성 기반을 잠식하려는 시도로 비칠 수 있다. 이 긴장을 숨기는 것은 전략의 정직성과 견고함을 모두 훼손한다. 따라서 본고는 이 이중 가독성(dual readability) 을 전략의 구조적 특징으로 명시한다.[7]

여기서 시몽동의 통찰이 일종의 방어 자원을 제공한다. 앞서 강조했듯, 씨앗은 형상을 부과하지 않는다. 결정 구조는 용액 자체의 내재적 잠재성에서 나오며, 씨앗은 어느 방향으로 결정화될지 미결정인 촉발점일 뿐이다. 한국이 심는 씨앗은 특정한 통일 형상(흡수통일)을 강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한반도라는 전개체적 장의 내재적 잠재성이—충격이 왔을 때— 무질서한 붕괴가 아닌 구조화된 전파로 이어지도록 하는 핵이다. 그 최종 형태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주조하거나, 주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재성이 불완전주권 이론을 제시하며 제기한 "소멸(消滅)의 딜레마" 와 연결된다. 전재성은 분단국가의 안보딜레마가 일반 주권국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완전한 주권국가들 사이에서는 안보가 취약해져도 국가 자체가 소멸하는 일이 드물지만, 불완전 주권 분단국가에서는 안보딜레마가 국가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소멸의 딜레마로 작동한다. 통일은 흡수통일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이기에, 한쪽의 주권 완성은 다른 쪽의 소멸을 함의할 수 있다. 개체화의 언어로 옮기면, 분단국가에서 개체화의 완성(단일 결정화)은 곧 한 단위의 소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이 심는 씨앗이 "체제전복 기획"으로 읽히는 이중 가독성은 전략의 우발적 부작용이 아니라, 소멸의 딜레마가 부과하는 조건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전략은 시몽동에서 출발하되 결정적 국면에서 허욱의 분기(bifurcation) 쪽으로 무게를 옮긴다. 소멸의 딜레마를 직시한다면, 추구할 것은 개체화의 완성(어느 한쪽의 결정적 승리로 귀결되는 단일 결정화)이 아니라, 긴장을 생산적 준안정으로 유지·관리하면서 분기 확률을 한국에 유리하게 형성하는 것이다. 시몽동이 시사하듯, 개체화의 성급한 완성은 곧 모든 변화·과정·생성의 정지를 의미한다.[8] 전재성의 틀에서 이는 한층 분명해진다 — 소멸의 딜레마가 작동하는 장에서 단일 결정화를 서두르는 것은 상대를 소멸의 공포로 몰아 더 깊은 결박(핵무력 강화·반제 결속)으로 후퇴시킬 뿐이다. 한국이 추구할 것은 성급한 단일 결정화가 아니라, 소멸의 위협을 관리하면서 다음 개체화를 위한 잠재성을 보존하는 열린 준안정이다. 이것이 "촉발하되 부과하지 않는" 씨앗 전략이 소멸의 딜레마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2.6 정책적 함의: 조합적 종합 전략

이상의 분석은 한국의 정책이 시나리오별 단편 대응의 합이 아니라, 네 시나리오를 동시에 관리하는 조합적 종합 전략(combinatorial synthesis) 으로 설계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어느 한 시나리오가 단독으로 도래하지 않고, 시점·국면별로 둘 이상이 부분적으로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합은 다음 네 층위의 동시 운용으로 구성된다.

(1) A·D 기반층: 평시 위기관리·억제·contingency의 통합

시나리오 A(동결된 준안정)의 위기관리·확장억제·역내 허브화 자산은 시나리오 D(강제 개체화)의 통제되지 않는 전환에 대한 유사시(contingency)와 동일한 인프라 위에서 운용된다. 평시 다국 간 비공개 유사시(contingency) 협의는 시나리오A의 위기 방지 채널이자 시나리오D의 사후 관리 자산이며, 두 시나리오의 대응은 분리된 트랙이 아니라 하나의 상시 인프라의 두 운용 모드다.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남북 직통 채널이 단절된 상황에서, 우발 충돌 방지와 위기 소통을 위한 최소 기제를 다자 채널(한·미·중 비공식 트랙 포함) 또는 대체 경로로 복원하는 것이 이 층위의 핵심 과제다.

(2) B·C 변환층: 매개 인프라와 자기증명의 결합

시나리오 B(점진적 변환)의 작은 안정점(인도·보건·기후·ICBM 모라토리엄, 핵동결 및 축소)과 시나리오 C(분기적 공존)의 기술세계에서의 (cosmotechnical) 자기증명은 시간 지평이 다를 뿐 같은 자산을 공유한다. 한·미·중 비공식 트랙과 다자 외교 자산은 시나리오B에서는 결정 씨앗으로, 시나리오C에서는 충돌 방지 인프라로 작동한다. 민주주의·기술네트워크 안의 한국이 매력적이라는 사실 자체는 시나리오C에서는 장기 비대칭 자산이지만, 시나리오B에서는 북한 내부 변화 누적을 촉진하는 외부 압력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저(低)정치 영역의 협력 씨앗 축적과 기술세계에서의(cosmotechnical) 자기증명은 별개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변환층에서 통합 운용되어야 한다. 다만 언급한 이중 가독성을 의식하여, 씨앗이 체제전복으로 읽힐 여지를 최소화하는 설계가 전제된다.

(3) AI 기술 축의 횡단적 운용

네 번째 시나리오 축(AI 혁신)은 별도의 대응 항목이 아니라 위 네 시나리오 모두에 횡단적으로 적용되는 변형 계수다. 시나리오A에서는 AI-증강 억제·정보전 대응 능력으로, 시나리오B에서는 AI를 통한 인도·보건·기후 협력의 새로운 매개 형식으로, 시나리오C에서는 기술세계에서의(cosmotechnical) 우월성의 핵심콘텐츠로, 시나리오D에서는 유사시(contingency) 핵·미사일 자산 추적·민사 작전의 핵심 기술로 작동한다. 한국의 AI·반도체 우위는 전 시나리오 횡단의 비대칭 자산이며, 따라서 대북전략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종합 전략의 중심 자원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4) 불완전 주권의 능동적 운용층

한국은 현재 완전 주권국가로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전재성의 통찰을 시몽동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뒤집으면, 이 불완전성은 약점이 아니라 복합적 무정부상태 안에서의 매개·결합·전환의 공간이다. 한국의 종합 전략은 이 공간을 능동적으로 운용한다—양안관계 속 하나의 중국이라는 불완전 주권 상태의 미·중관계 속에서 한반도라는 단위가 갖는 전략적 함의를 활용하고, 한미동맹·한미일 협력·한중일 네트워크·ASEAN+3·NATO-IP4·MIKTA 등 다자 외교·역내 매개자 역할을, 네 시나리오의 분기 확률을 한국에 유리하게 변형시키는 변환(transduction) 작업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불완전 주권은 메워야 할 결손이 아니라 운용해야 할 자산이라는 이 역설적 재규정이, 개체화 전략의 거시 층위가 도달하는 최종 명제다.

이 네 층위는 하나의 종합 전략의 동시 운용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기반층(1)이 긴장의 군사적 비화를 막는 토대를 제공하고, 변환층(2)이 결정 씨앗과 자기증명을 축적하며, AI 축(3)이 전 층위를 횡단하는 비대칭 자산을 제공하고, 불완전 주권 운용층(4)이 이 모두를 역내 행위자성으로 통합한다. 어느 한 시나리오가 도래할지 예측하는 대신, 네 층위를 동시에 운용함으로써 어떤 시나리오가 도래하든 한국에 유리한 결정화 방향을 확보한다는 것이 조합적 종합의 핵심이다.

2.7 맺으며: 형상의 부과에서 조건의 조성으로

한반도 개체화 전략은 한국 대북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다. 종래의 전략이 단일한 통일 형상을 향해 현실을 밀어붙이는 작업이었다면, 개체화 전략은 전개체적 긴장의 장에 조건을 조성하고, 충격이 왔을 때 분기 확률을 한국에 유리하게 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는 형상의 부과에서 조건의 조성으로의 전환이다.

이 같은 전환은 비핵화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결정론적 종착점이 아니라 조건이 갖춰질 때 발생할 수 있는 개체화 경로로 재배치함으로써, 적대적 두 국가론이라는 새로운 현실에서도 한국이 능동적 행위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전재성의 불완전 주권 이론이 한반도를 "미완의 주권게임이 진행 중인 장"으로 진단하고,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이 그 장의 동학(준안정·씨앗·변환)을 기술하며, 허욱의 분기 개념이 미·중 기술 분기 시대의 거시 좌표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충격의 시점과 형태다. 그러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충격이 왔을 때 결정화가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작되도록 씨앗을 미리 심어두는 일이다. 그것이 본 시론이 제안하는 한반도 개체화 전략의 요점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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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적 단위를 미리 완성된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관계적·과정적 존재론은 최근 국제정치이론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다만 기존 관계존재론이 대체로 정태적·구성적 성격을 갖는 데 비해, 본고가 활용하는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준안정·변환·상전이(phase transition)라는 동학의 언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2] 발견적 틀로서의 위상 규정은 본 전략이 직면할 가장 흔한 비판 — "자연철학 개념의 사회과학적 전용이 정당한가" — 에 대한 선제적 답변이다. 본고는 개체화 개념을 검증 가능한 인과 법칙으로 제시하지 않으며, 기존 패러다임이 보지 못한 정책 공간을 열어주는 재기술의 도구로 한정하여 사용한다.

[3] 시몽동의 질료형상론·실체주의 비판과 전개체성·준안정 개념의 표준적 정식화는 Simondon (2005[1958]) 참조. 그가 결정화를 물리적 개체화의 패러다임으로 삼되 그것이 물리적 개체화를 남김없이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단서를 단 점도 본고의 "발견적 틀" 위상과 부합한다.

[4] 시몽동에게 초개체화는 본래 심리적·집단적 개체화를 다루는 개념이나(Simondon,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본고는 이를 국가 단위의 행위자성이 역내 관계망 속에서 구성되는 양상을 기술하는 유비로 전용한다.

[5] AI 기술 축을 변형 계수로 도입하는 것은 본 시론의 잠정적 제안이며, 각 시나리오에서의 구체적 작동 방식과 측정 가능한 지표는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는다.

[6] 허욱의 cosmotechnics·technodiversity 개념은 Hui (2016; 2024) 참조. 후이의 분기(bifurcation) 명제를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은 통일을 단일 종착점으로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두 체제의 비대칭적 매력 경쟁을 전략의 중심에 놓을 수 있게 한다.

[7] 이중 가독성은 대북 관여정책이 역사적으로 직면해 온 딜레마—관여가 평양에 의해 체제 위협으로 해석되어 역효과를 낳는 문제—의 개념화다. 전재성이 “소멸의 딜레마”라고 표현한 이 딜레마를 본고는 부정하지 않고 전략의 구조적 조건으로 명시한다.

[8] 개체화의 완성이 곧 변화·과정·생성의 정지(나아가 죽음)라는 통찰은 시몽동 개체화론의 핵심 함의 중 하나로, 생명체가 영속적 개체화를 유지하는 한에서만 살아 있다는 그의 논의와 연결된다. 본고는 이를 "성급한 단일 결정화를 경계해야 하는" 전략적 근거로 전용한다.

■ 오인환_EAI 수석연구원, 서울대 강사.

■ 담당 및 편집: 이상준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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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인환_한반도 개체화 전략 시론_260810_GlobalNK스페셜리포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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