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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독립 사이: 천하질서의 붕괴와 국제법 언어의 정치

사랑방의 젊은 그들 진경을 찾아 헤매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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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일청강화기념관

김희선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국제학 전공 (국제정치, 국제법)

I. 들어가며: 천하질서와 국제법 질서의 전환기 속에서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는 기존의 국제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국제법 체제가 확립되는 대전환의 시기였다. 수백 년 동안 조선 외교의 기본 규범이 되어 온 전통적 화이질서는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삼고 주변 세계를 문명/야만의 위계로 배열하는 구 조였으며, 조선은 그 내부에서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 질서에서 외교 는 ‘법적 권리와 의무의 교환’이 아니라 문명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의례와 예교였다. 즉, 조선에게 국제관계란 법적·제도적 공간이 아니라 문화·도덕·예의에 기반한 관계적 질서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조선의 ‘자주(自主)’ 개념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이 말한 자주 는 ‘국가 주권’에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천하질서 내부에서 허용된 자율성, 즉 ‘각기 자기 일을 처리한다(各守其事)’는 의미에 가까웠으며, 이는 청 총리아문이 “조선은 속 국이지만 다만 조공할 뿐, 국사는 모두 자주”라고 설명한 관행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전통적으로 조선이 청과 맺은 조공·책봉 관계도 법적 종속관계가 아니라 문명적 위계와 상호 인정의 질서였기 때문에, 조선은 외교적 자율성을 행사하면서도 스스로를 독립국 가라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듯 ‘자주’는 관계적 개념이었고, 근대 국제법상의 ‘독 립(independence)’ 또는 ‘주권(sovereignty)’ 개념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는 이러한 질서 인식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조선의 대 청 관계와 종속 여부를 확인하려 했고, 속국이라면 책임이 종주국에 귀속된다는 논리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청의 총리아문은 “조선은 확실히 속국이지만 조공을 바칠 뿐, 모든 국사는 자주”라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대외적으로 속국이라는 지위를 외교 적 논리로 활용하며 프랑스와 미국의 조약 체결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 사건은 ‘자주’가 국제법적 독립과는 전혀 다른 의미, 즉 종속 속의 자율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조선과 청 모두 ‘속국-국사자주’라는 결합을 모순으로 보지 않았던 반면, 서구 국제법

- 20 - 언어는 ‘속국’과 ‘독립’을 양립 불가능한 지위로 분리해 이해했다는 점에서, 동일 개념 의 번역은 구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9세기 중반은 보다 넓게 보았을 때, 영국이 주도하는 서구 제국주의가 비서구의 기존 제국 질서를 해체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체제 를 통해 청은 조약·주권·영토에 기반한 법적 질서를 수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천하질서 의 중심은 빠르게 붕괴하였다. 이 틈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식 국제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을 ‘근대적 주권국가’로 재정의했다. 일본은 조약 체결 능력, 대외적 불간섭, 독립국의 법적 지위를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핵심 지표로 삼았고, 이러 한 변화는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인식과 전략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조선의 다수 관료층은 이러한 변화를 근대 국제법의 언어로 전환하기보다 는, 전통적 질서 언어 속에서 흡수, 재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조약 체결을 둘 러싼 상당수 논의에서, 조약을 권리·의무를 명시하는 법적 계약이라기보다 예교 질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려는 해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전통 질서에 기반한 조선의 외 교적 사고와 근대 국제법을 체득한 일본의 외교 전략이 충돌하면서, 같은 단어-‘자주 (自主)’와 ‘독립(independence)’-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충돌’은 ‘현장에서 서로 싸웠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문구가 서로 다 른 규범체계에서 ‘다른 법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외교적 선택지를 충돌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제1조의 “朝鮮國自主之邦、保有與 日本國平等之權”은 조선에게 ‘천하질서 내부의 자율성 확인’으로, 일본에게 ‘청의 종주 권을 배제한 국제법상 독립국 규정’으로 읽혔다. 즉, 문구는 하나였지만 그것이 연결되 는 세계(천하질서)가 달랐고, 그 결과 조항이 ‘관계 유지’와 ‘관계 해체’를 동시에 함축 하는 모순적 장치가 되었다. 이 의미의 갈림이 누적되면서, 훗날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청일 경쟁의 핵심적 쟁점으로 비화했고, 1895년에는 시모노세키조약 제1항에서 조선의 ‘독립자주국’ 지위를 먼저 선언하는 방식으로 국제법 문구가 정치적 결론을 확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자주’는 동아시아 책봉질서 내부에서도 모순 없이 사용 가능한 유연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이를 통해 관계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일본은 이 유연성을 국제법의 ‘독립’으로 번역해 고정시키며, 조선-청 관계를 재규정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렸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교섭은 대체로 쓰시마번이 중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일본의 ‘중앙 권력(막부)’이 조선에 직접 상주, 정례 사절을 파견하는 형태는 제한적이 었다. 그 결과, 통교는 형식상 ‘교린’이었으나 실무 구조에서는 중개자(쓰시마)에 의해 비대칭성이 누적되었다. 예컨대, 외교 문서의 전달, 번역, 의례 조정이 중개자에게 집중 되면서 정보 비대칭이 구조화되었고, 이는 용어의 해석(호칭, 관계 규정)을 둘러싼 ‘절 충’이 장기적으로는 일본 측에 유리하게 작동할 여지를 남겼다. 중개자가 ‘표현 선택권 (번역, 문서 형식, 의례 문구)’를 쥐는 순간, 갈등이 생길 때마다 원문 해석의 주도권이 누적되며, 이는 훗날 조약 문구의 ‘법적 의미’를 일본식으로 고정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 21 - 이는 임진왜란 이후 지속된 대일 경계심의 산물로, 결과적으로 조선과 일본 간 통교는 형식적으로는 대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방적이고 제약된 관계였다. 양국은 서로 다른 언어 인식 속에서도 표면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절충적 해석을 취했다. 예컨대 ‘대군 (大君)’이라는 칭호는 조선에서는 국왕의 하위 호칭이었으나, 일본에서는 대등하거나 상 위의 지위를 나타내는 칭호로 인식되었다. 이런 언어적 절충은 훗날 ‘자주’와 ‘독립’의 인 식 격차를 낳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비대칭적 교린 구조는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이 사용한 외교 언어-조선의 ‘자주’와 일본의 ‘독립’-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두 용어 는 외형적으로 유사했지만,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치적 목적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약문 제1조에 명시된 ‘조선은 자주지방’이라는 표현은 조선에게는 기존 질서 속 자율성의 확인으로, 일본에게는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을 국제법상 독립국으로 규정하는 선언으로 해석되었다. 양국은 같은 용어를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해석하고 있었고, 바로 이 개념적 단절이 이후 조선-일본-청 삼각관계에서 반복되는 갈등의 기원 이었다. 조약문에 적힌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문구는 조선에게는 기존 질서 속 자율 성의 확인으로, 일본에게는 청의 종주권 부정과 조선의 국제법상 독립국 선언이라는 의 미로 작용했다. 양국은 같은 용어를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해석하고 있었고, 바로 이 개념적 단절이 이후 조선–일본–청 삼각관계에서 반복되는 갈등의 기원이었다.

강화도조약 제1조에는 조선을 ‘자주지방’이라고 규정하는 문구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을 근대 국제법 질서에 편입시키고, 동시에 청의 종주권 주장을 사전 에 차단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반영된 조항이었다.

반면,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정국을 타 개하는 한편 기존의 일본과의 우의를 다시 회복하고 돈독하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 다. 조약의 체결은 좋든 싫든 조선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국제관계에 비로소 한 쪽 발을 들여놓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은 국제법 언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단계적 으로 확장했다. 첫째,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해 조선-청 관계를 국제법적으로 해체하 고(속국 부정), 둘째, 조선을 근대 국제법상의 독립국으로 위치시키는 논리를 통해 조선 이 외교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압박함으로써 청을 후견자로 호출하거나 기대는 통 로를 제도적으로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으며(독립의 제도화가 가져온 고립 효과), 셋 째, 조약 체제를 통한 군사·재정·외교 개입을 강화해 보호국화에서 통감정치로, 통감정 치에서 병합으로 이어지는 종속의 완결을 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사용한 ‘독 립’이라는 개념은 해방의 언어가 아닌, 식민 지배를 합법화하기 위한 국제법적 전략 언 어였던 것이다.

다만 1890년대 초의 현실 권력관계(청의 우위) 때문에 겉보기에는 “조선이 청 의 질서 안에 있다”처럼 보였을지라도, 문구의 해석과 지위 규정은 청일이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계속 충돌하고 있었고, 이 충돌이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제1항에서 ‘청국이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한다.’는 선언으로 정리되었다.

- 22 -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실제로 답사하는 현장—데지마, 글로버가든, 한일교류박 물관, 모지코 레트로 등—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데지마는 일 본이 서양의 과학·법·지식을 처음 받아들인 공간이었고, 글로버가든은 일본이 조약항으 로서 근대 국제질서를 실험한 현장이며, 시모노세키는 일본이 서구 열강과 대등하게 외 교하려 했던 국제법적 실전 무대였다. 일본이 근대 국제법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를 대 외 팽창의 기초로 삼아 조선 정책을 전개한 맥락은, 바로 이러한 공간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본 답사보고서는 이러한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조약 문구에 담긴 개념의 의미, 외교적 선택의 배경, 국제법의 전략적 활용, 조선과 일본의 세계관 충돌을 개념사·외교 사·국제법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조선이 이해하지 못한 세계관의 변화와 일본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국제법 언어 사이의 괴리를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구조 적 단절을 파악하는 핵심이며, 이번 답사를 통해 확인한 현장적 맥락은 이러한 변화를 구체적, 그리고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II. ‘자주’와 ‘독립’ 해석의 충돌과 일본의 국제법 전략

1. 조선의 ‘자주(自主)’ 개념: 전통적 중화질서 속 자율성

19세기 조선이 사용한 ‘자주(自主)’는 근대 국제법상의 ‘독립(independence)’과 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었다. 조선의 ‘자주’는 책봉·화이질서 속에서 인정된 ‘종속을 전제로 한 자율성’을 의미하는 관계적 개념이었다. 이때 조선이 전제한 국제질서는 주 권과 영토 개념에 기반한 법적 질서가 아니라, 문화적 위계와 예교를 중심으로 작동하 는 천하질서·사대교린체제였다. 조선은 자신을 중화문명의 일부로 인식하며, 외교 행위 를 법적 권리와 의무의 교환이 아닌, ‘예(禮)를 통한 위치적 관계의 확인’으로 이해하였 다. 따라서 ‘자주’ 역시 독립국 선언이 아니라, 천하질서 내부에서 허용된 자율적 위치 를 확인하는 개념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를 여럿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병인양요(1866) 당시 프랑 스가 “조선은 청의 속국인가?”라고 질의하자, 청의 총리아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朝鮮雖為屬國,惟貢而已,其國事皆自主。」

(조선은 비록 속국이지만, 다만 조공할 뿐이고 그 국사는 모두 자주이다.)

여기에서 ‘自主’는 국제법적 독립(independenc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국 의 지위를 전제로 하면서도 내정은 스스로 처리하는 관습적 자치권을 뜻한다. 조선은 이와 같은 속국, 자주 논리를 외교적으로 활용하여 서양 열강의 조약 요구를 거절했다. 즉, 조선의 ‘자주’는 국제법적 지위가 아니라 관계적·도덕적 질서 개념이었다.

- 23 - 조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은 적어도 (1) 조약이 강제력을 갖는다는 사실, (2) 조약문 문구가 외교 분쟁의 쟁점의 된다는 사실, (3) ‘속 국-국사자주’ 논리가 서구 열강과의 교섭에서 방패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무적 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조선이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했던 것은, ‘자주’가 국제법의 문 법으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지위 재정의 효과(청의 배제, 조선의 단독책임화)”였다. 반 대로, 일본은 애초에 그 효과를 노리고 ’자주‘라는 동아시아 어휘를 택해, 국제법적 ‘독 립’으로 연결되도록 문구를 설계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1880)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中國保之以藩屬之名,而我實自主其國矣。」

(중국은 번속이라 이름 붙여 보호하지만, 실상 조선은 스스로 그 나라를 자주적으로 다 스려 왔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 보내던 공식 외교문서인 『서계(書啓)』에서도 ‘자주’ 개념 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我東藩自主其國已久。」

(우리 동쪽 번은 오랫동안 스스로 나라를 자주적으로 다스려 왔다.)

여기서 조선은 스스로를 ‘東藩(동번)’이라 규정하며, 자신을 명확히 중국 중심 의 책봉체제 내부에 위치시킨다. 즉, 조선의 ‘자주’는 책봉관계를 부정하는 언어가 아니 라, 그 관계를 전제로 유지되는 자율적 국정 운영을 의미하였다. 개념적 경계가 불분명 한 추상적 개념어인 “자주”라는 표현은 동아시아에 특유한 책봉체제와 조화가능한 (compatible)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고도의 유연성을 지닌 개념이었고, 조선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이 개념을 이해, 활용하였던 것이다. “자주지방(自主之邦)”이란 표현 은,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이 의도한 국제법적 의미보다 전통적 질서 안에서 훨 씬 제한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에 불과하였다.

김용구는 이러한 조선의 자주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사대 질서 안에서 외번의 정교금령은 자주에 임하여 왔다. 조선 측은 이런 의미로 강 화도 조약 제1조를 인식하였다.”

즉, 조선이 말한 ‘자주’는 근대 국제법적 독립 선언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연 속성과 정당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식의 표현이었다. 조선은 자신이 종속된 존재가 아 니라 ‘예(禮)를 기반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을 뿐, 이를 국제법상의 독립국 또는 주권국가의 선언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 24 - 이처럼 조선 내부에서 ‘자주’는 국가 정체성의 핵심 언어였기 때문에, 근대 국제법 언어 를 새롭게 받아들여 의미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외래 문화에 대 한 증오와 저항의 결과로 조선은 공법 질서의 가치 체계를 매우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사대 질서의 관념과 유사한 관념 또는 개념 체계나 그러한 체계 에 따라 공법 체계를 해석하려는 태도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인식 구조 때문에,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비롯한 일련의 조약을 예교의 일환으로 이해하려 했고, 조약이 지닌 국제법적, 제도적 함의를 근대 국제법의 언어로 전환하기보다는, 기존 예교 질서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며 대응하였다.

반면 일본은 서양 국제법을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이를 외교 전략 언어로 변환 해 사용하였다. 김용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간에 수호 조약 교섭 당시에는 일본 식자간에는 만국 공법이나 국제법의 용어는 널리 쓰이고 있었는데, 이는 국제법적 언어가 조선에는 낯선 언어였던 데 반해, 일본에서는 이미 조약문 작성과 외교 협상의 실무 언어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조선은 ‘자주’를 전통 국제질서 속의 자율성으로 이해했고, 일본은 이를 근대 국제법상의 독립과 동일한 언어로 번역해 사용하였다. 같은 단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작동하는 구조, 바로 이것이 ‘자주’와 ‘독립’ 개념의 본질적 충돌이다.

이 해석 차이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협상 당사자들의 문구 선택에서 구체화 되었다. 1876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 측 전권은 구로다 기요타카, 조선 측 전권은 신헌이었고, 이들이 합의한 제1조 문구가 훗날 지위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2. 일본의 ‘독립’ 개념: 근대 국제법 수용

반면, 메이지기 일본의 외교 관료층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국제법을 체계적 으로 받아들이며 ‘독립(independence)’ 개념을 국제 전략 언어로 사용했다. 메이지기 일 본은 서구 국제법을 적극적으로 번역, 소개하면서, 독립, 주권, 조약과 같은 법 개념을 외교 실무의 기본 언어로 빠르게 내면화했다.

이때 일본이 사용한 ‘독립’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인 주권 개념이라기보다, 중국 을 정면으로 의식한 전략적 외교 언어에 가까웠다. 일본 외무성은 대조선 정책을 구상 하는 초기 단계부터 조선 문제를 단독 사안으로 다루기보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재 정의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중국의 조공 질서에 속한 존재로 전제한 상태에서, 조선과의 직접 충돌보다 중국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함으로써 조선을 한 단계 낮은 위치로 재배치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에는 유사시 중국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훗날 마관 조약 제1항에서 조선의 지위를 선언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의 ‘독립국’ 구상은 조선을 중국의 조공질서에서 분리하려는 대중(對中) 견제 전략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 25 -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본이 조선 문제를 바라보는 보다 근본적인 인식, 즉 조선 을 둘러싼 열강 경쟁 속에서 일본이 선점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미 서양 열강들은 중국에서 조차지와 이익권을 확보하며 동아시아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지만, 일본에게 보다 시급한 과제는 조선이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투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자국이 먼저 조선에 대한 영향력과 이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국가 이익을 최우 선의 과제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개입을 단순한 세력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 유지를 위한 조선 문제의 해결’이라는 외교적·대 외적 명분으로 포장하였다.

특히 러시아의 극동 진출과 해상 교통로를 둘러싼 불안, 그리고 1861년 이른바 ‘쓰시마 사건’은 일본 내에서 주변 해협과 도서의 전략적 의미를 재인식시키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다만 이러한 안보 위기의식이 곧바로 단일한 대조선 정책으로 직결 되었다기보다는, 1870년대 일본의 정계·언론·정책 담론에서 조선을 둘러싼 위험과 기회 가 동시에 논의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 누적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해 ‘조선 문제’는 단순한 외교 현안이라기보다,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변화, 열강의 침투 가능성, 일본의 해상 방위 구상과 결합하면서 형성된 복합적 담론이었다.

이 담론은 정한론과 결합해 강경한 형태로 분출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약 체 결, 통상 확대, 외교적 개입, 그리고 국제법적 언어를 통한 지위 규정 등 다양한 정책 경로로 분화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말한 ‘조선 문제의 해결’은 표면적으로는 지역 질서 와 안정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실제로는 열강 경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조선에 대한 우선적 영향력과 이권을 확보하려는 국가이익 계산과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이 점에서 ‘조선 문제’라는 표현은 조선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관리· 개입해야 할 대상으로 재구성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이 이후 조약 체제의 확장과 단계적 개입 논리를 뒷받침하는 기반으로 작동하였다.

조일수호조규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인식과 전략이 처음으로 제도화된 조약이 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 문제’를 명분으로 중화체제에 균열을 가하고, 서양 열강에 앞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음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즉, 조일수호 조규는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국제 경쟁 구도 속에서 스스로를 선점자로 위치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1876년 조약문에서 곧바로 ‘독 립’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동아시아 외교어법에서 수용 가능한 ‘자주’를 사용해 동일 한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즉, ‘자주’는 조선이 거부하기 어려운 언어였고, 일본은 그 유연성을 ‘국제법적 독립’으로 번역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 이 거부하기 어려운 말(自主)’을 ‘열강이 인정하는 말(獨立/independence)’로 바꿔 끼우 는 방식으로, 문구의 수용 가능성과 국제정치학적 효력을 동시에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전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이토 히 로부미, 이노우에 고와시 등 핵심 정책 담당자들과 외국인 고문 보아소나드 등 법·외교 지식인들의 논의를 통해 조선 문제를 검토했으며,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동시에 중국

- 26 - 의 의도를 확인하는 외교적 병행 노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또한, 일본은 자국이 이미 근대 국제법 질서에 깊이 편입되었다는 경험을 바탕 으로 조선에 접근하였다. 일본은 1854년 개국 이후 여러 서구 국가들과 연속적으로 통 상수호조약을 체결하며, 조약 체결,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와 같은 서구 국제법적 규범 을 실무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은 국제법을 단순한 외교 기술이나 형식적 규범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대외 전략을 설명하는 기본 언어로 내면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말한 ‘독립’은 중립적 법적 용어가 아니라, 조선에 대한 주도권 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 언어 전략이었다. 일본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조선을 청의 영 향권에서 분리시키고,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다음, 최종적으로는 보호국화를 통 한 통감정치, 통감정치를 통한 병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국제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 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실제로 1876년 조선과 일본 간의 수호 조약 교섭 당시에는 일 본의 식자층 전반에서 이미 만국공법과 국제법의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이는 국제법이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언어’이자 통치 언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일본이 조약 문구를 통해 조선의 지위를 국제법적 언어 로 규정하고 ‘독립’과 같은 개념을 전략적으로 사용한 것은, 서구 열강의 외교 관행을 피상적으로 모방한 결과라기보다 국제법을 자국의 외교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논 리로 활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외무성의 『朝鮮聞見備考(조선문견비고)』와 무쓰 무네미쓰의 『蹇蹇錄 (건건록)』에서 사용된 ‘독립’ 개념은 이러한 전략적 성격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무 쓰는 조선 문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名義上獨立國ト爲スモ、實際ニ於テハ我邦ニ於て扶持スルノ義務アリ。」 (명의상 독립국으로 할지라도, 실제로는 우리나라가 이를 부지할 의무가 있다.)

이는 일본이 말한 ‘독립’ 개념이 조선의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개념이 아니 라, 보호(protection)라는 명목 아래 조선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근거였음을 드러 낸다. 일본 정부의 1894년 내정개혁 문건 또한 조선의 독립을 “정리, 지도해야 할 대 상”으로 규정하였다.

「朝鮮国ノ独立ヲ保護シ、其内政ヲ整理セシムルハ帝国ノ責務ナリ。」

(조선국의 독립을 보호하고 그 내정을 정리하게 하는 것은 제국의 책임이다.)

이처럼 일본의 ‘독립’ 개념은 서구 국제법에서 가져온 언어였지만, 실제로 조선 을 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며, 최종적으로 보호국화와 병 합을 정당화하는 전략적 개념으로 작동하였다.

- 27 - 마관조약(1895) 제1항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마관조약 제 1항은 청이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 지위를 승인하고, 조공·공헌 의례를 폐지한 다는 취지로 조선의 지위를 선언적으로 규정하였다. 마관조약 제1항에 조선 문제가 배 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일본과 청이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전쟁의 의미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려 했던 결과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의 성과가 강화조약의 문구를 통해 명확히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조선 문제가 애매하게 남을 경우, 청일전쟁의 정치적 의미가 흐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의 지위를 선언적으로 규정하는 조항을 제1항에 배치하는 것은, 전쟁의 명분과 성과를 조 약 차원에서 고정하려는 국내 정치적 압박의 반영이었다. 표면상 ‘독립’과 ‘자주’가 병 기되었으나, 일본은 이를 “조선을 청의 속국에서 완전히 분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국제법적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조선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선점하였다. 따라서 일본이 말한 ‘독립’은 중립적 법적 용어가 아니라,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 언어 전략이었다. 일본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재편하려 했 고, 이는 이후 통감정치와 병합의 명분이 되었다.

반면, 리징팡은 조선의 독립을 조약의 명시적 선언으로 규정하는데 대하여 신 중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문제를 마관조약의 서두(제1항)에 배치할 경 우, 청의 국제적 위상이 상징적으로 크게 훼손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러나 전황과 본국의 압박 속에서 이러한 우려를 끝까지 관철시키기는 어려웠고, 결국 조선 문제는 청의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형태로 조약문에 반영되었다.

일본 외무성이 정의한 독립국은 “他国ノ干渉ヲ受ケズ、自主的ニ条約ヲ締結ス ル能力ヲ有スル国家(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조약 체결 능력을 가진 국가)”였지 만, 일본은 조선이 이 조건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지속적 개 입을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수용 방식은 조선의 ‘자주’(사대, 군신 관계 속 자율성)와 일본의 ‘독립’ (근대 국제법적 주권) 사이에 근본적 단절을 낳았다. 동일한 문구가 조약문에 사용되었 음에도 양국의 해석이 전혀 달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국제법적 언어를 이용하여 조선- 청 종주권 관계를 부정하고,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식민지화 과정 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조선은 독립국(sovereign independent state)이다.”라는 표면적 명분을 통하여 조선을 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일본 영향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하였고, “독립국 조선과 대등한 조약 체결”이라는 표면적 명분을 통하여 조약을 통해 조선의 군사, 재정, 외교 에 단계적으로 개입하고자 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보장”이라는 표면적 명분을 통하여 보호국화를 통한 통감정치, 통감정치를 통한 병합의 명분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 28 - 3. ‘독립국’ 규정의 전략적 기능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을 ‘자주지방’으로 규정하는 조항을 근대 국제법적으로 해석, 활용하였다. 일본이 이해한 ‘자주’는 근대 국제법상의 ‘독립 (independence)’과 동일한 의미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대외주권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조선이 청과의 종속 관계가 아니라 독립국임을 국제법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향후 일본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강화도조약 제1조 조항은 자주와 독립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충돌을 나타내고 있다. 사대질서 안의 외번은 그 내정과 외국 교제는 자주에 임한다는 것이 예의 기본 명 제였다. 조선 측은 이런 의미에서 이 조항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자주’를 서양 국제법에서 말하는 독립과 동일한 의미로 번역, 해석하였다. 따라서, ‘독립국’ 조항은 표 면적으로는 조선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떼어내어 근대 국제법 체계의 ‘독립된 단위’로 재구성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였다.

더 넓게 보면,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는 전통적인 사대교린체제를 근대국제법체 계에 의하여 대체하려는 일본의 의도와, 가급적이면 양국관계를 (조선이 이해할 수 없는 규범언어였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틀 안에 묶어두려던 조선의 의도가 충돌하 여 최종적인 결말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절충되고 있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일수호조규의 “위선 종전에 교정지해의 화근이던 제법규를 혁제하고 극력 관유홍통의 법규를 개확하여 쌍방의 영원한 안녕을 기한다”는 규정은 일본측에 의하여 장래에 있어 양국 관계를 근대국제법관계로 재편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양국관계의 근대국제법관계로의 변환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 제2관의 규정 이었다. 이 규정은 근대 유럽 국제법에서 일반화된 상주사절제도를 규정하고 있다고 일 본은 해석하였다. 또한 근대국제법의 차별적 본질을 이미 간주하고 있던 일본은 유럽열 강으로부터 자신이 당하고 있던 차별을 주변 국가, 특히 조선에 강요함으로써 근대국제 법적 실행에 자신도 참여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양국 공히 다양한 국제법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구체적인 국제법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음은 조일수호조규 제12조, 제14조, 제15조, 제16조, 제17조 등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조항들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제12조는 해상 조난 선박 및 승무원 구조에 관한 규정, 제14조는 양국 상선의 자유로운 항행과 통상에 관한 규 정, 제15조는 관세 징수와 세율에 관한 규정, 제16조는 분쟁 발생 시 해결 절차, 제17 조는 밀무역 방지와 단속에 관한 규정 등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통용되던 관습 이상 의 상당히 구체적인 국제법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이 국 제법적 질서에 입각하여 조약을 체결하고 해석하고 행동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 29 - 4. 국제법 언어를 통한 조선의 외교적 고립과 종속 심화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한 뒤, 이를 근거로 조선이 외교를 스스로 책 임져야 하는 주권국가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는 ‘독립국이라면 스스로 외교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를 통해, 조선이 청을 외교적 후견자로 삼거나 기대는 통로를 제 도적으로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반면, 조선은 중화질서적 의미의 ‘자주’에 머물렀기 때문에, 근대 국제법 체계 의 규범—특히 대등 조약 체결, 치외법권, 조세 회피, 외교 관할권 등—을 전통 질서의 관행 속에서 해석한 결과, 불리한 조약을 잇달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조선 을 근대적 외교 모델에 미숙한 국가로 규정하며 개입의 정당성을 강화했다.

조일수호조규 제10관에 규정된 영사재판권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불평등성이 큰 영사재판권 조항이었지만, 당시 조선은 이를 근대 국제법적 ‘치외법권’이라기보다 기존 교린 관행(속인주의적 처리 관행)의 연장으로 이해하면서 협상, 수용의 문턱이 낮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이 단순히 국제법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해당 조항을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관행 속에서 이해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동아시 아의 책봉·교린체제에서는 개인의 형사관할권이 기본적으로 속인주의 원리에 따라 행사 되었으며, 특히 조일관계에서는 속인주의적 처리 관행이 작동한 측면이 있었고, 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제10관을 근대적 치외법권이라기보다 관행의 제도화로 축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조선은 제10관 영사재판권 조항을 근대 국제법적 불평등 조항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관행의 연장선에서 수용 가능한 조항으로 판단하였다.

즉, 조선은 이 조항을 일본이 의도한 ‘근대적 국제법 체제의 제도적 장치’로 이 해한 것이 아니라, 기존 예교 질서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허용되어 온 ‘관행적 예외 조 치’ 정도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제10관을 근대 국제법상의 영사재판 권, 즉 자국민에 대한 외국 사법권의 부정으로 해석한 반면, 조선은 이를 단순히 관습 적으로 인정된 속인주의적 재판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조약 자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했는가라는 근본적 인 문제로 이어진다. 조선은 조일수호조규를 여전히 전통적 의미의 ‘교린적 화친 협정’, 즉 예교 관계의 조정 행위로 인식했으나, 일본은 이 조약을 근대 국제법상의 ‘권리와 의무가 명확히 규정된 법적 계약’으로 해석하였다. 조선은 조약 문구를 의례적 수사로 이해했고, 일본은 이를 국제법 질서의 구속력 있는 법적 언어로 이해한 것이다.

결국, 동일한 조약문을 두고도 조선은 예의의 언어로, 일본은 법의 언어로 해석 한 것이다. 이 개념적·체계적 해석 차이가 바로 ‘자주’와 ‘독립’이라는 용어의 충돌을 낳 았고, 나아가 전통 질서와 근대 국제법 체제의 구조적 단절을 발생시킨 근본 원인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두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1880년의 조선 정책으로 다 시 회귀하였다. 중국과 직접적인 정치 대립은 회피하고 간접적인 경제, 문화 침투에 주 력한다는 정책 노선으로 복귀하였다. 1882년 10월 이와쿠라 도모미의 의견서, 그리고 1885년 1월 이노우에 가오루가 서울을 떠나면서 곤도 마스키 대리공사에게 건네 준 훈

- 30 - 령이 이런 정책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종속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기왕의 종속관계는 전통적인 유교권 질서의 예에 입각한 주종관계인 데 반하여, 임오군란 이후 중국은 조 선에 대하여 근대 국제법 질서에서 보는 종속국의 위치를 강요하였다. 장젠, 덩청슈, 장 페이륀 등은 이 기회에 조선을 동삼성에 편입시키자는 병합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국제법 언어를 활용해 조선의 ‘전통적 자주’를 무력화하고, 조선을 새로운 법질서 속 고립된 단위로 재편하면서 개입·보호·병합으로 이어지는 구조 를 제도화하였다.

III. 강화도조약(1876)과 ‘자주지방’ 해석의 분기

1. 조선이 이해한 ‘자주지방’ 해석: 천하질서 내부의 자율성

강화도조약 제1조는 “朝鮮國自主之邦 ,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 이라고 규정한 다. 이 조항은 문자 그대로 ‘조선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뜻 으로 읽힌다.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의 “朝鮮國自主之邦”이라는 문구를 조선은 전통적 의 미(천하질서 내부의 자율성 확인)로 받아들였다. 즉, 스스로를 중국 중심 질서의 일부로 보면서도 특정 국가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화이질서 내부의 자주를 확인하는 조항 정도 로 인식하였다. 조선에게 ‘자주지방’은 여전히 중화적 국제질서의 연장선에 놓인 개념이 었으며, 이 조항이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를 재정의하거나 청과의 관계를 해체하는 국제 법적 효과로까지는 전환해 이해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독해에서 강화도조약 제1 조는 ‘지위 변경의 선언’이라기보다 ‘기존 질서 안에서의 자율성 확인’에 가까웠고, 이 간극이 바로 일본의 후속 개입을 가능하게 한 해석의 틈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에서 보였듯, 조선의 ‘자주’는 국 제법적 독립이 아니라 ‘종속 속의 자율’을 의미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을 청의 속국 으로 간주하고 조약 체결 시 청의 책임을 물으려 했을 때, 청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모 든 국사는 자주”라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속국-국사자주’ 논리를 외교적으로 활용하여 서구의 조약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런 사례는 조선이 사용한 ‘자주’가 근대적 주권과 구조적으로 다른 개념임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은 조약 체결이라는 행위 자체를 ‘예교적 의례의 연장’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서양식 조약이 국가의 국제법적 지위를 규정하고 간섭 범위를 설정한다는 점을 근대 국제법의 언어로 전환해 이해하기보다, 예교 질서의 연장선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 했다. 이는 강화도조약의 법적 효과가 전통 질서의 재해석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근관은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조규 체결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성립하고 있던 국제질서관의 관점에서 평가하려는 이해학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지적한다. 조일수호조규의 체결을

- 31 - 전통적인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분석·평가하면, 수호조규의 형식 및 내용은 1876년 이전 시기의 동아시아, 특히 한일 양국 간에 성립하고 있던 국제법적인 관행과 상당한 연속 성(continuity)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호조규의 체결에 이르는 협상과정에서도 조선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에서 체면치레만 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 의 관점에서 때로는 방어적이고 때로는 적극적인 협상태도를 보였으며, 일부 문제와 pianometrics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876년 조선–일본 조약 제1조에 규정된 ‘조선은 자주지방’이라는 표현은, 흔 히 일본이 사대 질서를 일방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삽입한 조항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러나 이 표현이 당대에 받아들여진 방식은 이러한 단순한 해석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 시 조선은 이 조항을 근대 국제법상의 독립국 선언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중화 질서 안 에서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신의 지위를 설명하는 언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자주지 방’은 청의 속국이라는 전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외교적·행정적 자율성을 행사해 온 조선의 기존 정체성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 속에 서 조선은 해당 조항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이유를 느끼지 않았으며, 이는 일본이 염두 에 두었던 근대 국제법적 독립 개념과는 서로 다른 차원의 수용이었다. 다시 말해 동일 한 조약 문구가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상이한 의미로 해석되었고, 이 의미의 어긋남은 이후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의 잠재적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인식과 대응은 조일수호조규를 둘러싼 기존의 통설적 이해에 대해 재검토의 여지를 제공한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이 조약을 일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불평등 조약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 측이 항상 적극적이거나 주도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조선 측이 자신이 이해하는 전통 질서의 언어 속에서 능동적으로 협상 에 임했음을 실증하고 있다. 또한, 조일수교 체결 당시의 주된 쟁점은 양국 간의 정치 적 평등성 확보였으며, 오늘날 흔히 지적되는 불평등성은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재구성된 평가라는 점도 함께 지적되고 있다. 이는 강화도조약 제1조의 ‘자주지방’ 규정 이 당대 조선에게는 기존 질서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조약을 둘 러싼 의미 충돌이 필연적이었음을 시사한다.

2. 일본의 근대 국제법적 해석: ‘독립국’ 개념의 전략적 삽입

반면, 일본은 같은 조항을 근대 국제법상의 완전한 독립국 규정으로 해석하였 다. 일본은 조약 제1조의 ‘자주지방’ 문구를 근대 국제법적으로 해석, 활용하여, 조선과 청의 종주권 관계를 해체하고 조선을 근대 국제법 질서로 끌어냄으로써 이후의 대륙정 책·식민정책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일본은 ‘자주지방’ 조항을 국제법적 지위 변환을 강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 32 - 무쓰 무네미쓰는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마관조약에서 조선 문제를 핵심적인 정 치적 선언으로 위치시키고자 했다. 조선이 청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났음을 조약 문구로 명시하는 것은, 일본이 수행한 전쟁의 성격과 목적을 국제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조선의 ‘독립’이 곧바로 자율적 정치역량의 확보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하였고, 조약을 통해 청의 개입을 배제하는 수 준에서 조선 문제를 정리하려는 인식을 보였다. 이러한 접근은 전후 조선 문제를 일본 의 영향권 안에서 관리하려는 외교 전략과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오카모토 다카시는 강화도조약을 “예전부터 내려온 교린 관계를 서구식 근대 조약 관계 로 전환하려 한 시도”로 규정한다. 일본이 조선을 청의 속국이 아닌 대등한 국가로 규 정한 이유는, 조선을 국제법상의 독립국으로 만들어 청의 종주권 주장을 차단하고 조선 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합법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음의 조약 제1조이다. “朝鮮國自主之邦、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제1조, 1876년

여기서 일본이 강조한 ‘자주’와 ‘평등한 권리’는 전통적 의미의 자율성이 아니 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대외적 불간섭권·조약 체결 능력 등을 포함하는 법적 지위를 의미했다. 즉, 일본에게 ‘자주지방’ 조항은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법질 서 속 개별 단위로 재배치하는 ‘국제법적 재구성’의 수단이었다.

3. 조약문 해석의 충돌: 동일한 문구, 다른 세계관

조선의 전통적 세계관과 일본의 근대적 국제법 인식은 강화도조약에서 정면으 로 충돌했다. 동일한 조항을 두고도 조선은 “자주는 질서 내 자율성의 확인”, 일본은 ‘자주’를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을 독립국으로 규정하는 효과를 갖는 것으로 이 해하였다. 동일한 조항을 두고도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이후 조선·일본·청 삼각관계의 모든 외교적 갈등의 뿌리가 되었으며, 나아가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 마관조약(1895)으 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 충돌은 이후 국제법의 문법 속에서 재해석 및 재단되며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제1항에서 하나의 ‘법적 결론’으로 확정되게 된다.

- 33 -

IV. 시모노세키조약(1895) 제1항과 ‘독립자주국’의 국제법화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 1895)의 당사자는 일본 전권의 이토 히로부미와 무 쓰 무네미쓰였으며, 청의 전권은 리훙장과 리징팡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1895)의 제1항은 1876년 pianometrics도조약에서 시작된 ‘자주’와 ‘독립’ 개념의 충돌 이 국제법적 문구로 ‘독립자주국’ 지위가 선언적으로 규정되는 장면이었다. 청일전쟁의 종전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제1항이 조선의 지위를 가장 먼저 규정한 것은, 전쟁의 핵심 대상이 바로 조선의 법적·국제적 위치를 둘러싼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종전조약의 서두 에 조선의 지위를 적시한 것은, 전쟁의 성격을 ‘영토/배상’ 이전에 ‘조선의 지위 재규정’ 으로 규정하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이 조항이 ‘조선이 앉아 있는 협상 테이블’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 라, 청과 일본이 조선의 지위를 ‘국제법 문구’로 재단해 확정한 문장이라는 데 있다. 즉, ‘충돌’의 직접 당사자는 (조선-일본만이 아니라) 청의 전권(리홍장, 리징팡)과 일본 전권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이었고, 조선은 그 결과를 ‘수용당하는 위치’에 놓였다.

마관조약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문제를 조약의 첫 조항으로 배치하는 데 동의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지위를 둘러싼 문제가 청일전쟁의 핵심 쟁점이었음을 pianometrics조약의 문구로 고정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었다. 동시에 이는 이후에 이 어지는 배상금 지급과 영토 할양과 같은 조항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법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승전 이후 일본 국내에서 제기되던 전쟁 성과의 명확한 가 시화를 요구하는 여론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第一款 中國認明朝鮮國確為完全無缺之獨立自主國。故凡有虧損其獨立自主體制,即如 該國向中國所修貢獻典禮等,嗣後全行廢絶。

“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승인하고, 조선이 중국에 대하여 행하던 공 헌의 전례 및 의식을 폐지한다.”

— 『근대한국외교문서』 제3권

리홍장은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종주권 아래에 있음을 주장하기 어려운 정황 속 에서, 조선 문제를 마관조약의 첫 조항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협상에 임했다. 그는 조 선에 대한 명목상의 지위를 고수하기보다는, 이를 양보함으로써 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 다른 조건을 완화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조선 문제를 둘러싼 국제 질서가 이미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한 결과였으며, 시모노세키조약 제1항은 이러한 현실 인식이 문구로 고정된 사례였다.

청이 말한 ‘자주’는 전통적인 책봉 체제 속의 자율성이었으며, 일본이 해석한 ‘독립’은 근대 국제법상의 완전한 주권국가였다. 일본은 이를 “조선을 청의 속국에서 완 전히 분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국제법적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조선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선점하였다.

- 34 - 오카모토 다카시는 이러한 일본의 ‘독립’ 개념에 대하여, “무쓰가 말한 ‘명실상부한 조 선의 독립’은 조선의 자율성을 pianometrics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종래 의 ‘속국 자주’는 종식되었고,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호하고 도우며 지지한다’는 의 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 수단은 곧 일본 단독으로 추진한 조선 내정 개혁, 즉 갑오개 혁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마관조약 제1항은 조선에게 있어서는 전통적 자주 개념의 해체, 청 에게 있어서는 종주권 포기의 공식 선언, 그리고 일본에게 있어서는 조선 개입의 국제 법적 명분 확보라는 세 가지 변화를 동시에 완성한 조항이었다.

이는 1876년의 ‘자주(自主)’ → 1895년의 ‘독립(獨立)’ → 1905년 보호국화 → 1910년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일관된 국제법 전략이 구조적으로 완성된 순간이었다.

V. 결론: 천하질서의 붕괴와 국제법 질서의 재편 속에서

19세기 후반의 조선–일본 관계는 단순한 양국 외교 갈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국제 질서가 충돌한 역사적 장면이었다. 조선은 천하질서를, 일본은 근대 국제법 체제를 외 교의 기본 언어로 삼았기 때문에, 동일한 단어-‘자주’와 ‘독립’-조차 서로 다른 세계관 속에서 해석되었던 것이다.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이 ‘자주지방’으로 규정된 문구는 조선에게는 전통적 자율성의 확인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조선-청 관계를 국제법적으로 재규정하고 조선을 국제법 체제 속 ‘독립국’ 단위로 위치시키려는 전략적 해석의 근거 로 기능했다. 이러한 해석의 비대칭성은 조선 외교의 고립, 일본의 개입 정당화, 식민지 화로 이어지는 구조적 기반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독립국’으로 규정된 조선은 원칙상 외교를 ‘자기 책임’으로 떠안게 되었고, 일본은 그 책임 수행의 불가능/미숙을 근거로 ‘보호, 지도’의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관조약의 ‘독립자주국’ 조항은 일본의 제국적 언어전략의 완성판이었다. 무쓰 무네미쓰는 『건건록』에서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일본이 이를 간접·직접적으로 부지(扶持)한다”고 적으며, 조선에 대한 ‘독립 보장’이 사실상 보호국화를 의미하는 비 대칭적 종속 장치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오오이시 마사미 등 일부 논의에서 제기된 ‘보 호’ 구상은, ‘독립’을 곧바로 자율성의 확대가 아니라 간섭과 관리의 구조로 전환시키는 일본의 국제법 상상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흔히 19세기 말의 흐름을 ‘독립이 자주를 이겼다’고 요약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개념 간의 단순한 승패라기보다 어떤 규범 언어가 외교 분쟁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채택되었는가의 문제였다. ‘자주’는 천하질서에서는 종속과 양립 가능한 자율성의 언어였 던 반면, ‘독립’은 근대 국제법에서 종주권, 속국 관계를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지위 규정 의 언어였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제1항이 “중국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한다”는 방식으로 조선의 지위를 조약의 서두에서 선언한 것은, 조선의 의사와 무관 하게 국제법의 문법이 지위 규정의 최종 언어로 채택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 기를 ‘독립이 자주를 이긴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국제법 질서가 천하질서의 번역 규

- 35 - 칙을 압도하며 외교적 효력을 독점하게 된 과정으로 서술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김종학이 이 과정을 ‘자주-독립 개념의 충돌’로 규정한 것은, 당대의 외교 행위 자들이 스스로 이를 충돌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조약 문구가 서로 다른 규 범 질서 위에서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1차 문헌들이 반복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 다. 구체적으로 김종학의 ‘충돌’ 규정은 특정 사건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규범 언 어가 동일한 사안을 반복적으로 상이하게 서술하는 1차 문헌의 축적된 패턴에 근거한 다. 청의 총리아문 문서에서는 조선이 “屬國”이면서도 “國事皆自主”인 존재로 설명되 어, 종속과 자율의 병존이 자연스러운 질서로 전제된다. 반면 일본 외무성 문건과 무쓰 무네미쓰의 『蹇蹇錄』에서는 조선의 ‘독립’이 자율성의 확대가 아니라 “扶持·保護”의 대상으로 규정되어, 독립 개념이 곧 개입의 논리로 접속한다.

한편, 조선 관료층의 서계·상소·『홍범14조』 등에서는 ‘독립’이 청과의 관계를 법적으로 단절하는 지위 선언이라기보다, 기존의 ‘자주’(자강·정통성) 개념을 근대적 언 어로 재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처럼 동일한 조약 문구와 개념이 각기 다른 규범 질서 안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김종학이 말한 ‘자주–독립 개념의 충돌’을 성립시키는 1차 문헌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청의 총리아문은 조선을 “속국이지만 국사는 자주”라고 설명하며 종속과 자율의 병존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반면, 일본 외무성 문건과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 록』에서는 ‘독립’을 보호와 개입의 전제로 이해하는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다. 동시에 조 선 관료층의 서계, 상소, 『홍범14조』 등에서는 ‘독립’이 기존의 ‘자주’를 대체하는 새 로운 법적 지위라기보다, 전통적 자주 개념을 근대적 언어로 재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처럼 당사자들은 각기 자신의 질서 언어 안에서 일관되게 사고하고 있었으나, 그 언어들이 조약이라는 하나의 문서 안에서 중첩되면서 결과적으로 상호 번역 불가능 한 의미 차이가 누적되었다. 김종학의 ‘충돌’이라는 규정은 바로 이 사후적으로 드러난 규범 언어 간 비대칭성과 그 정치적 효과를 개념화한 분석적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1876년의 ‘자주(自主)’ → 1895년의 ‘독립(獨立)’ → 1905년 보호국화 → 1910년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일관된 국제법 전략이 구조적으로 완성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사용하는 ‘독립’ 언어를 그대로 동일시하기보다, 기존의 ‘자주’ 개념을 바탕으로 선택적으로 번역, 재해석하였다. 『홍범14조』 제1조는 그 대표 적인 언어적 전환이다.

“청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립한다.”(홍범14조 제1조, 번역)

이는 조선이 일본식 독립 개념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 ‘자주’ 개 념을 근대적 국가 정체성으로 재구성한 결과였다. 김윤식 등의 상소에서도 “청의 덕화 를 떠나 홀로 자립함은 시의가 아니요, 외세를 막음은 스스로의 자주에 달려 있다”는 식의 인식이 반복되는데, 이는 조선이 ‘독립’을 단절이나 고립이라기보다, 전통적 자주 개념과 결합된 정통성, 자강의 문제로 재의미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 36 - 양국의 ‘자주–독립’ 인식 차이는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 언어를 사용하는 두 세계관의 구조적 단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은 단순히 한·일 양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 동아시아 질서와 근대 유럽 국제법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질서 간 번역의 실패’였다는 점에서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역사적 경험과 규범 구조가 다르면, 그 언어는 상호 이해의 매개 가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 연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다. E. H. Carr가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과거에 대한 해석은 현재 우리가 처한 국제질서와 문제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이번 답사에서 방문한 공간들—데지마, 한일교류박물관, 글로버가든, 시모노세 키, 모지코—은 이러한 국제질서 전환이 추상적 개념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공 간과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데지마는 서양 지식과 국제법 이 처음으로 일본에 유입된 관문이었고, 글로버가든과 조약항은 일본이 스스로를 ‘조약 체결 능력을 가진 근대국가’로 연출해 보인 무대였다. 시모노세키와 모지코는 일본이 열강과 대등한 주체를 자처하며 새로운 국제법 언어를 실전에서 구사한 pianometrics였 다. 이러한 공간적 맥락 속에서 일본은 국제법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를 대외 팽창과 제국 형성의 전략 언어로 변환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 험은 오늘날 한국에게도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외교 언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관리하는 능력은 국가의 존립과 직 결된다는 점이다. 19세기 조선이 국제법상의 ‘독립’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약 문구를 수용했던 경험은, 오늘날 조약 문구, 공동성명, 그리고 국제 규범의 단어 하나하나가 갖는 법적, 정치적 효과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다. 특히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도 ‘전략적 문구 구성(strategic wording)’을 통해 사실상 의 지위 변화나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어를 둘러싼 협상력 은 군사력, 경제력 못지않게 중요한 전략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국제질서의 변화를 감지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할 때, 가장 큰 비용을 치르는 주체는 중간 규모의 국가라는 점이다. 조선이 천하질서의 붕괴와 국제법 질서의 부상을 끝까지 ‘내부 문제’로만 보던 사이, 일본은 새로운 질서를 학습하고 이를 활용해 조선 정책을 재설계했다. 오늘날의 한국 또한 미중 경쟁과 인도, 태평양 질서 재편, 글 로벌 사우스의 부상 등 구조 변화 속에 놓여 있다. 질서 전환기에 기존 규범이 약화되 고 새로운 규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식의 지체와 오판은 곧 외교적 취약성으로 이 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국제법을 수동적으로 적용받는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활용 할 줄 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국제법을 ‘객관적 규범’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이를 자신의 이해에 맞게 번역하고 재구성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략 언어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한국은 WTO, FTA, 해양법, 인권·안보 규 범, 투자분쟁(ISDS) 등 다양한 무대에서 국제법을 단지 수동적으로 따르는 규칙이 아니

- 37 - 라, 자국의 이익과 규범적 지향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조선과 달리, 법 언어의 해석과 적용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곧 구조적 열세를 상 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넷째, 동아시아 외교사에서 반복되는 ‘개념의 비대칭’ 문제는 현재형의 과제라 는 점이다. 강화도조약의 ‘자주–독립’ 충돌이 그랬듯, 오늘날에도 한국·일본·중국은 “질 서(order)”, “안정(stability)”, “자율성(autonomy)”, “개방성(openness)” 등 유사한 용어 를 사용하지만, 각국의 역사적 경험과 전략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표현은 같지만 지시하는 세계가 다른 이 개념의 비대칭성은 때로는 오해와 갈등을 증 폭시키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질서 간 번역 실패’를 성찰하는 일은 오늘날 동 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 규범과 신뢰 형성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데도 중요한 전제 조 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과거의 질서 충돌을 면밀히 분석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적 회고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한국 외교 전략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이 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하영선·남궁곤, 『변환의 세계정치』에서 강조되었던 ‘지식력’과 도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주간의 사랑방 수업들을 통하여 역사 연구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거의 다양한 선택지와 가능성을 탐색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방향성 을 모색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본 답사보고서와 앞으로 있을 나의 국제 정치학, 그리고 국제법 공부가 결합될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하였고, 본 답사보고서는 그러한 시도가 반영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동아시아 근대사의 전환이 문헌 속의 추상적인 변화가 아 닌, 실제 공간과 외교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조약 속 문구들과 행동으로 드러난 역사적 과정이었음을 깨닫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한국의 외교 전략·국제법 적 대응·세계관 형성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읽지 못했던 국 제질서의 변화, 일본이 능숙하게 활용했던 국제법의 언어, 그리고 두 세계관의 충돌이 남긴 흔적은 오늘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의하고, 보다 능동적인 외교 전략과 법적 대응을 모색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 자원으로 쓰일 것이라 생각한 다. 이번 답사보고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을 다시 밟으며 그 공 간에 새겨진 언어와 권력의 흔적을 현재의 한국과 연결해 보려는 나의 작은 시도였다.

- 38 - 【참고문헌】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 1876.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조약), 1895. 『홍범14조』,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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