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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조선의 대일외교 인식: 이홍장과 이유원의 서신을 중심으로 원명원 조도영

동아시아질서건축사 : 고대천하에서 미래복합까지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6월 30일

사랑방 24기

Ⅰ. 서론

1860년 아편전쟁의 패배는 중국의 전통적 천하질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새롭게 등장한 서구의 해양세력들은 북경에 공사관 설치를 요 구하였으며, 더 나아가 청이 근대적 조약체계로 들어와야 한다고 요 구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당시의 실권자인 공친왕은 근대적 외교 를 전담하는 기관인 총리아문을 설치하지만 기존의 전통적 원리에 따라 교섭을 담당하던 예부, 이번원이 존재하던 상태에서 새롭게 만 들어진 총리아문은 각 부처와 권한 문제를 두고 논쟁을 겪기도 하였 고, 이러한 문제는 더 나아가 조공관계를 통해 유지되던 조청관계에 도 영향을 미쳤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국제관계는 ‘외교’가 아닌 ‘사대교린’이었으 며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라는 원칙이 지대한 영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예부만을 통한 전통적인 교류관계로는 격변하는 시대적 변화 를 따라가기 어려웠으며, 조약체계를 관리하는 총리아문까지 등장하 자 따라 인신무외교 원칙을 느슨하게 적용함으로써 실무적 해결책을 강구하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정사 류후조(柳厚祚)는 예부상서 만청려(萬靑藜)의 처소를 방문하여 프랑 스의 군사적 움직임과 관련된 내용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는 편지(短 札)를 받아오기도 하였다.107)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진행된 조선의 이유원과 청의 이홍장이 교환 한 서신은 개항기의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둘의 서신 교환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서신 교환을 연미론의 체결과정의 시작점으로 평가한 송병기의 논문을 시작으로 서신의 왕복 날짜를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권혁수의 연구108)를 포함 하여, 최근에는 이홍장과 이유원의 서신을 매개한 유지개와 이유원의 시문 교류로 확장된 연구109)도 진행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연구성과 를 고려함과 동시에, 이홍장과 이유원이 모두 전통적인 유학자이면서 개항과 근대라는 세계적 변화에 대응책을 마련한 실권자이기도 하였 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둘의 서신 교환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을 동아 시아 질서변화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각자의 서신이 담고 있는 국가 의 외교적 사건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개항기의 정치외교적 사건이 어떻게 과도기적 질서 속에서 표현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107) 손성욱. 2018, "‘外交’의 균열과 모색: 1860~70년대 淸·朝관계." 역사학보,

240, 537쪽.

108) 권혁수. (2003). 한중관계의 근대적 전환과정에서 나타난 비밀 외교채널 -이

홍장과 이유원의 왕복서신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37, 215-239. 109) 리보,노요한. (2018). [번역] 조선 문인 李裕元과 游智開의 시문 교류. 동아한

학연구, 13, 151-173.

Ⅱ. 서신교환의 정치적 맥락

직예총독이 된 이홍장은 일본의 확장욕을 주된 위험으로 판단하였 다. 그리고 이는 이홍장만의 판단이 아닌 당시 대외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총리아문의 주된 의견이었다.

“만일 영국과 프랑스 등이 조선에 출병한다면 그 목적은

크리스트교 포교와 통상에 불과하다. 이들 국가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을 점령하여 토지를 빼앗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일본은 견제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토

지를 탐낼 수도 있다. 만일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된다면 일

본은 중국과 인접하게 되어 커다란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포교와 통상은 안중에도 없다.”110)

그리하여 청은 1873년 ‘청일수호조규’의 제1조를 통하여 양국은 서로의 ‘소속방토(所屬邦土)’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삽입하였 다. 청은 노골적으로 조선이나 여타의 조공국을 명시하지는 않았지 만, 청의 입장에서는 엄연한 천조의 일원인 번속이 소속방토라는 단 어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이에 근거하여 조공국, 특히 직예 지역과 가까이 있는 조선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여겼다.111) 그러나 청 의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1874년 중국의 외번 중 하나인 110) 同治六年二月十五日, 總理衙門の附片,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 1972,

『淸季中日韓關係史料』 第2卷, 54쪽, 재인용: 오카모토 다카시, 홍미화. (2011).

일본의 류큐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전환. 동북아역사논총, 32. 69쪽.

111) 김재선. 2012. 이홍장(李鴻章)의 대외정책(對外政策) 연구(硏究). 동국사학,

53, 447쪽. 대만으로 출병하였다. 1871년 11월 경에 류큐의 표류민이 타이완에 포착된 후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출병의 근거였다. 일본은 1872년 류큐 국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는 등, 류큐를 오키나와로 전환하는 폐번치헌의 과정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고 류큐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1874년에 출병을 감행한 것이다.

청에게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청은 북 쪽에서는 러시아, 운남 지역에서는 영국, 안남에서는 프랑스 등 육지 변경을 통한 여러 국가들의 압박과 마주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대 만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청의 지위를 종주국이 아니라고 해석한 것 은 이홍장에게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홍장은 이 시기까지 국 가 간의 교제란 천자로부터 조공국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이름에 맞 는 의무와 규범을 실천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보았다.112) 그러나 일본 은 일본이 류큐의 종주국으로서 류큐인이 대만에 표류되어 살해당한 것에 관하여 군사력을 실현한 반면, 청은 대만인 중 ‘생번’은 청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다는 핑계로 책임을 피했기에 종주국이 아니라는 것을 공인했다고 주장하며 대만 출병을 정당화했다113)

당초 청일수호조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비롯되는 안보 위협을 억 제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서양세력을 견제하는 변경외교에 집중하 려고 했던 청의 계획은 틀어졌다. 오히려 전력적 요충지인 북경과 동 북지방에 접한 조선으로 일본이 침략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이 더해졌다. 이에 청은 북양해군을 양성함으로써 해양방어 정책을 개진하면서도, 조선의 외교적 움직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이 프랑스의 해군 제독 지켈은(Giquel)은 대만 출병 후에도 나가사키 에 5천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며 일본의 조 112) 김재선, 2012, 440쪽.

113) 오카모토, 홍미화, 2011, 79쪽. 선 침략 가능성을 타진하기에까지 이른다.

총리아문은 해당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1874년 6월 예부를 통해 조선에게 자문을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114) 이홍장은 안보위기가 극대 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주로 전례를 따라 예부를 통하여 조선에게 정 보를 전달하는 것은 정보 전달의 신속성이나 전달하는 내용의 민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조선과 교류할 소통망을 찾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은 청이 보내온 자문 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우리나라에 알리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저 그 일만 말하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무

엇 때문에 통상(通商) 등의 얘기를 하여 마치 공갈을 치

고 유혹하듯이 한단 말입니까?”115)

이렇듯 이유원은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고종의 친정 을 돕고 있었지만, 그가 개화나 통상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유원은 전통적인 위정척사파의 주장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이홍장과의 서신교환에서도 보인다. 따라서 청이 암시한 통상 제안에는 거부감을 들어내면서도 이홍장과의 비밀연결선을 만 들려고 한 이유원의 정치적인 동기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유원은 일본의 대만 출병이 발생한 지 1년 후인 1875년에 북경 에 주청사로 등장한다. 당시 조선은 고종이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킨 후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 114) 정선모. 2012. 李裕元의 乙亥燕行과 江華島條約. 동방한문학, 52, 5쪽. 115) 『조선왕조실록』 고종 11년 6월 25일. 다. 고종은 대원군 시기의 업적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권위 를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대원군 시기 대일업무를 담당한 훈도 안동준(安東晙)을 공목 유용혐의로 심문하고, 경상도 관 찰사 김세호(金世鎬), 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에게 유배형을 내 린 것이 대표적이다.116) 이러한 조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외 교문서에 ‘황(皇)’자를 사용하고 이를 ‘귀국(貴國)’이라는 단어보다 한 칸 높여서 적은 일로 인하여 조선과 일본의 외교가 단절되었던 ‘서계 문제’를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민비는 당시 후궁으로부터 먼 저 태어난 완화궁이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 었다. 실각 후에도 대원군 세력이 언제 반격을 해올지 모르는 만큼, 민비에게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에 빨리 책봉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던 와중 총리아문이 서양세력에 관한 정보를 담당하고 또 이를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알려주는 상황에 이르자, 조선 조정으로서는 외 국과의 교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총리아문과의 연결망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1876년 진하사 정사인 남정순(南廷順)과 1878년 동지 사 정사인 이용숙(李容肅)을 통해 총리아문의 실력자가 이홍장이라는 사실 또한 조선 조정에 보고 되었다.117) 그렇기에 고종은 이전부터 잦 은 사직서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당상관이자 측근으로 두려고 했던 이 유원을 세자 책봉 주청사라는 명목으로 청에 파견한다.

즉, 예부와 총리아문으로 분리된 외교 채널 속에서 기존의 인신무 외교 원칙이 서서히 와해되며 실질적인 사무를 위한 인신 간의 접촉 이 늘어난 환경을 바탕으로 청은 안보의 관점 속에서, 조선은 내외부 의 정치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네트워크’를 추 116) 김종학, 2021, 『흥선대원군 평전』, 서울: 선인, 150쪽. 117) 권혁수, 2003, 225쪽. 구할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유원이 사행길 길목에 있는 영평부(永 平府)의 지부(知府) 유지개(游智開)를 통해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냄 으로써 이홍장과 이유원은 서신 교환을 시작한다. 또한 둘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서신의 내용은 당대 정부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자들이 각 국가의 입장을 교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홍장은 서신의 내용을 총리아문에 보고하거나 총리아문으로부터 지 시를 받기도 하였고, 김윤식 또한 이유원이 받은 서신은 고종과 공유 되었다고 증언하였다.118) 그러한 의미에서 서신 교환이 아닌 서신 외 교라고 호칭할 수 있는 맥락이 구성된다.

Ⅲ. 서신의 내용과 함의

1. 대일정책으로서의 서신 교환과 강화도 조약

이유원의 첫 편지는 1876년 1월 9일 유지개에게 전달되었고 첫 편지 인 만큼 이홍장의 건강을 염려하고 공덕을 기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 다. “가르침을 내려주신다면 더한 영광이 없겠다”119)라는 내용이 포함되 어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가르침이 필요한 상황이 무엇인지는 표현 되지 않는다. 첫 번째 편지인 만큼 실무적인 이야기보다는 서신 교환의 성사여부에 방점을 두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홍장은 유지개 로부터 편지를 받은 바로 다음날에 답신을 보낸다. 그는 서신 속에서 조 선을 “중화의 방패”120)로 표현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중국의 동북 3성 118) 권혁수, 2003, 227쪽.

119) 李裕元-李鴻章 서한, “若下答敎, 與榮無比” 동북아역사넷. (2025년 3월 15

일). http://contents.na hf.orkr/search/item/list.do 안보 위기 의식과 상응하다. 뒤이어 “일본국과 귀국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왕래와 교제함이 어떠하신지?”121)라며 일본과의 관계 문제를 물 어본다. 이는 이홍장이 조선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대일관계에 관한 것임을 드러낸다. 다만 뒤이어 이홍장은 “[중국의] 형세 를 보면, 이미 문을 잠그고 자치[自治]할 수 없다.”122)라고 말한다. 이는 아편전쟁 이후 서양과의 교역을 시작한 중국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실은 조선에 전쟁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시 청이 명 때처럼 조선에 적극적인 병역 파견은 불가능한 실정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홍장이 총리아문에 보낸 문서에서 잘 드러난다.

양국이 서로 원망하고 노여워하면 전쟁이 일어나기 쉬운

법입니다. 조선의 상황을 보면 빈약해서 그 세력이 일본

을 대적할 수 없으니, 장차 조선이 혹 이전 명나라 때처

럼 중국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면 우리는 장차 어떻게 응

해야 하겠습니까?123)

특히, 이홍장이 해당 편지를 전달할 때는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이 선보사(先報使)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를 1875년에 부산 으로 파견하여 서계 문제와 운요호 사건 처리에 관한 사절 파견을 120) 李裕元-李鴻章 서한, “東方爲中華屛蔽”, 동북아역사넷.

121) 李裕元-李鴻章 서한, “日本與貴國, 畺宇相望, 通來交際如何”, 동북아역사넷. 122) 李裕元-李鴻章 서한, “揆厥形勢, 旣未能閉關自治”, 동북아역사넷.

123) 李文忠公全書․譯署函稿 巻四, 「論日本派使入朝鮮(光緖元年十二月十三日)」,

“兩相怨怒, 則兵端易開,度朝鮮貧弱, 其勢不足以敵日本, 將來該國或援前明故事,

求救大邦, 我將 何以應之“, 재인용: 정선모. (2012). 李裕元의 乙亥燕行과 江華

島條約. 동방한문학, 52, 15쪽. 예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124) 더욱이, 일본 문제에 관한 이유원의 답신이 도착하기 전인 1876년 1월 24일에는 직예보정(直隷保定)에 서 이홍장과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만나 조선 문제에 대해 회담 을 열었다. 모리 아리노리는 이 자리에서 조선의 속국문제를 언급하 며 조선은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라는 주장을 펴며 청의 간섭을 배제 하려 했다. 이홍장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전통적인 명분론과 청일수호조규의 ‘소속방토’ 조약을 통해 모리 아리노리의 논리에 맞 서려고 했지만, 모리 아리노리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국가를 속국이라고 볼 수 없다며 국제법적 논리로 이 홍장에 맞선다.125) 보정회담이 양국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데 그친 상황 속에서 이홍장의 방점은 조선과 일본에서 실질적인 전쟁이 개 시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강화도 조약은 근대적 국제법 체계로 진입하는 분 수령이었다기보다는 왜관을 통해 교린 관계를 유지하던 일본과의 관 계가 서계 문제로 단절된 일을 복원한 성격으로 이해되었다. 조규 제 1관의 “자주지방(自主之邦)”은 정교와 외교는 조선의 권리에 해당된 다는 전통적 개념을 계승한 개념으로 이해되었고126), 일본 또한 정한 론으로부터 비롯된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들이 제안한 초안에 대한 조선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조규를 체 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27)

124) 김종학. 2016.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비평, 114,

42쪽.

125) 김재선, 2012, 444쪽,

126) 유바다. (2016). 1876년 朝日修好條規의 체결과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 한국

근현대사연구, 78, 33쪽.

127) 김종학, 2016, 44쪽. 이는 보정회담과 강화도 조약의 후에 작성된 1876년 6월 6일 이 유원의 편지에서도 “요사이에 강화도에서 만나 사신을 접견하고 수 신사를 보내니, 그 우호가 옛날과 같아 앞으로도 온전하고 완만할 것 입니다. 또한 향후의 일은 시종일관 오로지 당신[이홍장]께 달려있을 뿐입니다.”128)라는 표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또한 “[이홍장이] 다시 자문을 보내어 경계를 엄중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이어 분쟁을 풀 어주는 일이 있었다.”129)라는 표현은 보정회담을 비롯하여 청이 조선 을 속국으로 지정하여 일본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당시의 인식을 보 여준다. 이는 1874년 연행사로 파견되었던 강위(姜瑋)에 의해 조선 이 ‘소속방토’로서 청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130) 강화도 조약이 근대 조약 체제로의 편입이 아닌 서계 문제를 해결하고 기존의 관습을 재개하였다고 인식되었다 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이 운요호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분쟁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은 조선과 청이 당시의 양국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조선과 청은 조약 체제로의 진입이라는 문제를 건들이지 않고 기존의 사대교린 체제의 틀 안에서 1876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후 1877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초대 조선 공사로 부 임하고, 항구를 열어 일본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그러나 이유원은 개항 이후 일본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앞서 말했듯 이유원은 통상은 곧 서학의 유입이라는 입장을 바탕으로 개항을 반 대한 전형적인 위정척사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유원은 1878년 128) 李裕元-李鴻章 서한, “廼者會沁, 接見遣使修信, 其好如舊而向後周全, 專靠於爵前終

始之地”, 동북아역사넷.

129) 李裕元-李鴻章 서한, “示戒嚴之方 繼有解紛之擧”, 동북아역사넷.

130) 유바다, 2016, 23쪽. 상소를 통하여 덕원 개항지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묻혀있는 숙릉 과 가깝다고 주장하며 덕원 개항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후에 도 인천은 서울과 가깝기에 개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131) 이를 통해 이유원이 인식한 당대 외교문제의 핵심은 기존의 수호(修 好)를 재개한 것으로 여겨진 조일수호조약이 가져온 개항이라는 새 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유원은 1878년 보낸 서신에서도 “관북지역의 영흥은 우리 왕조 의 고향 땅[枌楡]인데, 그중 함흥과 문천과 안변은 선왕의 릉이 있는 곳입니다. 덕원, 원산은 문천과 하루 밤이면 닿을 거리이므로 [개항 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일본]이 기회를 엿보아 서로 대치 중에 있으니 무척이나 걱정됩니다.”132)라고 말하며 개항 위치 문제를 조정해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하나부사 공사가 부산에서의 무역과 관련하여 항의한 일과 관련하여 “저들[하나부사]가 돌아갈 때 에, 그 문서가 불손하고 또한 무역의 손해에 관한 배상을 운운하니, 내년 봄에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겠습니다.”133)라고 말하며 일본과의 협상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이유원은 1875년 편지가 시작된 이후로 1878년까지 꾸 준하게 대일본 관련 사무의 조정을 이홍장에게 요청하는 목적으로 서신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경우는 1878년부터 편지의 내 용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일본이 귀국[조선]에게 있어서 단 131) 이유원, 2023, 『가오고략4』, 이상아 역, 서울: 성균관대학교동아시아학술원,

312~316쪽.

132) 李裕元-李鴻章 서한, 關北之永興, 卽小邦枌楡之鄕也, 咸興文川安邊, 先陵所奉也,

德源之元山, 與文川之陵寢, 咫尺相望, 此無可許之道, 而彼必欲窺覘, 乃已方在相持之中,

極悶極悶, 동북아역사넷.

133) 李裕元-李鴻章 서한, 彼使還歸時, 其書不恭, 且有貿易失利賠償等說, 未知春間有何

事端矣, 동북아역사넷. 지 악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서로 연합하여 이와 잇몸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데, 귀국이 자신들을 상대해주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합니 다.”134)라는 말로 일본과 평화적인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면서, 동시 에 “서양국가 중 미국과 영국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통상에만 뜻이 있으니 영토를 침범할 계획은 업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토 가 세 개의 주에 걸쳐있고, 우리 동북 지방과도 국경을 맞닿고 있습 니다. 또한 때대로 영토를 잠식하려는 행위를 취하고, 동쪽 바다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과 일본에도 병선을 보내어 상황을 몰 래 살펴보니, [러시아의 위협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135)라고 말하며 러시아를 새로운 주제로 꺼내기 시작한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침략 에 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이홍장이 어떠한 계기로 러시아의 위협을 언급하는지, 또한 그 일환으로 일본과의 제휴를 제시한 것인 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2. 이리분쟁과 류큐처분에 따른 균세전략

러시아는 1854년에 발발한 크림전쟁으로 동유럽 및 발칸반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실패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 을 돌려 1858년 아이훈조약(愛琿條約)을 통하여 아무르강 부근을 러 시아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서방세력이 연해주 부근 혹은 조선 부근에 항구를 설치함으로써 태평양으로 연결될 가 능성이 생기자,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에서의 세력을 강화함으로써 이 134) 李裕元-李鴻章 서한, 其於貴國 不特並無惡意 似欲聯爲輔車 引爲唇齒 頗疑貴國不肯

傾誠相待, 동북아역사넷.

135) 李裕元-李鴻章 서한, 泰西英美各邦, 相距過遠, 志在通商, 無利人土地之心, 俄跨有

三洲邊境, 實與我東北各界毗連, 又時以蠶食鯨呑爲事. 貴國與日本, 濱臨東海, 俄國兵船,

游奕窺伺, 而終不能免, 동북아역사넷 를 저지하고자 하였다.136)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860년 11월 북경조약을 통하여 두만강까지 국경을 확대 하며 목표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던 와중 1871년 과거 준가르의 지역이었던 신장 부근 이리 지역에서 이슬람교도 봉기가 발행하자, 러시아는 봉기를 진압한 후 이리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1년 2월 이리조약을 통해 분쟁이 일단락 될 때까지 이리 분쟁을 조절하는 문제는 단순한 양국의 국경 분쟁을 넘어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이해관계자인 각국의 움직임을 예상해야 하는 국제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특히 북경조약을 통해 조선과 러시 아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만큼 이홍장의 입장에서는 일본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러시아의 남침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와 튀르키예 간의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서쪽이 일이 마무리되었고, 동쪽 의 일을 도모하려 한다.”137)라는 이홍장의 편지 문구는 이러한 당시 청의 외교적 노선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답장에서 이유원은 러시아 문제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이홍장이 과거 중국역사의 사례를 들며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일 면 수용하면서도, 서신의 주된 내용을 개항 후 일본 관료들의 행태를 고 발하는 내용으로 구성함으로써 러시아 문제 자체를 논의에서 치워버린다.

그러나 1878년 이후 1881년까지 러시아와의 이리분쟁은 더욱 격 화되었고, 함포의 수입과 제작 등에 자원을 투자하며 조선 사무에 미 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더욱이, 이홍장은 비록 대만출병과 136) 한동훈. 2021, "19세기 후반 조선과 러시아의 상호인식과 외교정책." 국내박

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울, 47쪽.

137) 李裕元-李鴻章 서한, “邇聞俄國與土耳其和議已成, 西事方蕆, 將圖東略”, 동북아역

사넷. 류큐의 외무권 박탈 등 일본이 청일수호조규의 ‘소속방토’ 방침을 어 기는 일이 있었으나,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조약이라는 ‘수호갱신’으 로 마무리된 만큼 일본이 조선으로 침략하는 것은 방지하는 것에 성 공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은 이중의 고난을 지니고 있 었다. 이리 분쟁으로 인하여 재원이 서북방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에 서 일본이 다시 한 번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일본은 1879년 청의 조공국이었던 류큐를 일본 영토로 병합시켰고, 청은 칙 유를 통해 사실상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전부터 일본과 청이 다르게 해석하였던 ‘소속방토’에 대한 해 석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청일수호조규의 체제 가 유지되었다는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었지만 류큐의 병합은 이러한 청 의 해석이 안일한 태도였음을 드러냈다. 이홍장은 주일공사 하여장에게 보낸 류큐 문제에 관한 답변서는 이홍장의 판단실수를 잘 보여준다.

말을 듣지 않더라도 한 번 더 말을 하면 일본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즉각적인 폐번치현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류큐도 그 토지를 보전할 수 있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책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청일수호조규 제1조에

‘양국의 소속방토는 서로 예의를 가지고 존중하고 침략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 이것으로 일본의 침략도 조금은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138)

138) 光緖四年五月九日, 「密議日本爭琉球事」, 吳汝綸 編, 1965, 『李文忠公全集』

譯署函稿 卷8, 文海出版社, 1~2쪽. 재인용: 오카모토 다카시, 홍미화. (2011).

일본의 류큐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전환. 동북아역사논총, 32. 91쪽. 이러한 정세 판단의 결과로 류큐를 잃어버리고도 이를 황제의 칙유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청은 제거되지 않은 일본의 위협과 새롭게 등장 한 러시아의 위협을 모두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이 서양의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는 ‘균세(均勢)’ 전략을 제안하도록 한다. 류큐처분에 관한 정 여창의 상소는 이러한 청 조정의 입장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이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상,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서양은 타국을 멸망시킨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장래에 만일 일본과 조선이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면, 조약을 맺고 있는 각국이 모두 반대하여

일본이 마음대로 횡포를 부릴 수 없게 될 것이다.139)

이홍장은 앞서 일본이 조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 은 편지를 보낸 이후, 류큐처분의 과정을 거치며 조선에게 보다 적극 적으로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으라고 권유하기 시작한다. 먼저 이홍장 은 “예로부터 교린의 방법은 응대하는 방법이 적합하면 원수도 우방 이 되고, 응대하는 방법이 적합하지 못하면 우방도 원수가 된다.”라 고 말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말 한다.140) 그리고 이러한 조치가 필요한 이유에 관해서는 “만일 일본 이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양의 국가와 결합하여 항구로부터 오는 139) 光緖五年四月二十五日, 「前福建巡撫丁日昌奏」, 中國史學會 主編, 1961, 『洋

務運動』 第2冊, 中國近代史資料叢刊, 上海人民出版社, 394~395쪽. 재인용: 오

카모토 다카시, 홍미화. (2011). 일본의 류큐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전환. 동

북아역사논총, 32. 96쪽.

140) 李裕元-李鴻章 서한, “自古交隣之道 因應得其宜 則仇敵可爲外援 因應未得

其宜 則外援可爲仇敵”, 동북아역사넷. 이익을 통해 서양을 꾀어내고, 아니면 북쪽의 러시아와 손을 잡아 영 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낸다면, 조선이 형세는 고립되고 우려는 더 욱 커질 것”141)이기 때문이라도 뒷받침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법 으로 다양한 나라들과의 조약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태 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적의 술수를 제어하고 이 기회를 틈타 차례차례 태서의 여러 나

라들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42)

또한 이홍장은 이러한 자신의 계책은 국제법(公法)에 의해 보장된 는 실효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유원은 서양열강과의 조약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라는 이독제독(以毒制毒) 전략에 대해 기존의 편 지와는 다르게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사실 이러한 반응 은 이유원의 균세 전략 권고 이전에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 유원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말하는 이홍장에게

대저 러시아와 일본의 사정은 [청이] 베풀어주는 정보가 없

다면 암연하게 암실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

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관계없이 마치 억울함을

풀기위해 [청으로] 달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적을] 압박 141) 李裕元-李鴻章 서한, “萬一日本陰結英法美諸邦, 誘以開埠之利, 抑或北與俄

羅斯勾合, 導以拓土之謀, 則貴國勢成孤注, 隱憂方大, 동북아역사넷.

142) 李裕元-李鴻章 서한, 爲今之計 似宜用以毒攻毒 以敵制敵之策 乘機次第 亦

與泰西各國立約 籍以牽制日本”, 동북아역사넷. 해주는 은혜를 바랄 뿐이니, 이는 단순히 저 한 사람의 의견

이 아닌 온 나라의 의견입니다.”143)

즉, 조공국으로써 조선은 타국과 통상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며 일본과의 실질적 사무에만 청의 중재를 통해 해결할 것이라는 입장 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는 청이 청일수호조규를 통해 시행하고자 하였던 전략과도 일치한다.

우리 작전(爵前)[이홍장]께서는 성망이 먼 곳까지 떨치시고 모

획이 중외에 적절해서 […] 일본인이 대만을 노리는 것을 우

려할 필요가 없으며 폐방은 오랫동안 그 길러 준 은혜를 입었

으니 또한 항상 이를 믿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144)

이러한 발언은 청이 처음에 수행하고자 했던 전략이기도 하며, 조선에게 강화도 조약은 이러한 청의 능력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 의 입장에서는 서양과 일본이 조선에서 이권을 노리는 것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어째서 청은 조선의 외교적 전략을 수정하라고 권고하는지 알 필 요가 있었다. 다만 청은 상국의 체통을 위하여 앞서 언급된 “자치가 불가 능하다”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143) 李裕元과의 서한 왕복 보고, “大抵俄洋事狀, 日本情形, 若非下布之纖悉, 漠然尙在

暗室中矣, 無論何方何人何事, 如有走愬之端, 則惟冀鎭壓之澤 此豈小生一人之顒望, 乃擧

國齊聲之祝”, 동북아역사넷.

144) 장인성 외 엮음,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 제1권 개항·대한제국기』, (서

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49쪽. 이러한 청의 입장은 이유원이 이홍장의 서신 속 논리의 모순을 지 적하는 근거가 된다.

태서의 공법이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국가를 빼앗거나

멸망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터키를 구원할 때는 공법에 의지할 수 있지만, 이미 멸망한 류

큐를 부흥시키는 데는 공법이 시행되기 어렵습니까? […] 일본

은 통상에 익숙하고 제조에 뛰어나서 부강지술을 모두 깨우쳤

는데도 오히려 그 창고가 비고 국채가 누적되었으니, […] 어찌

국고를 고갈하고 국채를 누적해서 일본의 전철을 밟겠습니까?

터키와 일본의 상반된 사례, 그리고 통상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얻 고 있다고 하지만 국채가 쌓이고 있는 일본 등은 모두 이홍장이 이 유원을 설득하기 위해 서신에 적었던 내용들이다. 이홍장으로써는 일 본에 대한 조선의 적의를 낮추어 전략적 동맹까지는 나아가게 하되, 동시에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인식하여 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해 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목표의 원인은 중국의 약세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으로써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이유원의 반박이 단순히 조선의 입장 을 표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에 이홍장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루어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홍장의 균세 전력은 그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 실책, 그리고 청 자 체의 국력 감소로 인하여 외교적 혼선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청의 주장의 타당성을 감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청의 외교적 혼선 혹은 변화가 위정척사파로 하여금 개항 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이홍장의 서신과 황준헌의 『조 선책략』의 내용적 차이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김홍집이 수신 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책략』을 가져올 때, 황준헌은 주일 청 국 공사관 참찬관이었다. 이때 그의 상사가 하여장이었으며 하여장과 이홍장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황준헌도 이홍장과 함께 움직였음을 추 측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조선책략』의 요지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라는 것이고, 책의 대부분 은 일본에 대해 의심할 조선 내부의 논의를 상정한 후 이를 파훼하 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이홍장과 황준헌, 곧 청이 일본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을 취하지 못했고 조선의 위정자들은 당 시 일본과의 개항 후 생긴 문제들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신 뢰를 얻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자신의 균세 전략을 반대한 이유원의 상소를 확인한 후, 청은 이유 원을 통한 서신 교환의 가치에 의문을 가진다.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서신 교환에 대해 보고하며 “[이유원은] 일본과의 개항은 부득이함에 서 나온 것이며, 서양과 통상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입을 여는 일이 없다.”145)라고 말하며, “생각하건대, 이유원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 같다”146)라며 서신 교환의 실효성을 의심한다. 이후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답장을 보냈으나, 단지 안부를 묻는 형식 으로 했다.”147)라는 보고를 통해 이유원을 통해 조선의 외교 정책을 전환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이유원은 145) 李裕元과의 서한 왕복 보고, 동북아역사넷, (2025년 3월 15일),

http://contents.nahf.or.kr/sea

rch/item/list.do

146) 李裕元과의 서한 왕복 보고. 동북아역사넷. 147) 李裕元과의 서한 왕복 보고. 동북아역사넷. 이어지는 편지에서도 인천 개항과 관련된 불만을 주로 하면서 일본 을 통해 전달된 프랑스의 국서를 돌려보냈다는 일 등을 전달한다. 이 후 이유원은 청나라로 조선인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과 관련되어 이 전에 없던 방대한 양의 선물을 보내며 이홍장의 호의를 구하고, 이홍 장 역시 형식적인 답변을 이어간다. 그리고 1881년 황준헌의 『조선 책략』을 참고하라는 이홍장의 편지를 끝으로 둘의 서신 왕복은 서 서히 중단된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세워지고, 이유원이 이홍장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변명하며 파직된 것이 영향 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조선이 근대적 조약체계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서신이라는 사적인 연락망을 통해 소통할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청은 더 이상 기존의 명분론만으로는 조선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의 외교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 홍장은 류큐 문제를 두고 한 번 협상한 적이 있던 그랜트 전 미국 대 통령(Ulysses S. Grant)과 친한 사이라고 알려진 슈펠트 제독(Robert Wilson Shufeldt)이 조선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잘 대변해 줄 수 있다 고 판단하여 기존까지 “태서(泰西)”로 지칭하던 통상국을 “연미론(聯美 論)”이라는 주장으로 탈바꿈시킨다.148) 그리고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서울에서 발발한 임오군란을 거 치며 감국정치에 가까운 개입으로 발전하는 통로가 된다.

148) 崔蘭英, 2024, 「李鴻章の朝鮮に対する「開国」勧告(二)―「対米開国論」の展

開―」, 常磐大学人間科学部紀要『人間科学』 41(2) 66쪽.

Ⅳ. 결론

본고는 개항기 조선의 외교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 과 도기적 기간인 강화도 조약을 전후로 한 이홍장과 이유원의 서신 교 환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전통적인 기관 간의 교류로는 외교적 소 통에 차질이 있었던 점을 바탕으로 양 정부가 사실상 공인한 비밀 서신이 주요 소통창구로 떠올랐음에 주목하였고, 내용적으로는 청의 외교적 조언이 조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청이 처했던 국제정세적 위기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하였다. 청은 서신 초기에는 대 만 출병 등의 사건을 겪으며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경계하였지만, 청일 수호조규와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일본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리분쟁을 통해 러시아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 장하고, 일본이 류큐를 병합함에 따라 조선 정책에도 변화와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찰은 이후 전개되는 한국외교사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 게 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유원은 서신 교환의 시작부터 끝까지 위정척사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이유원이 연행사로 파견된 적 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세계 인식이 유달리 폐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역죽지사」와 같은 시를 통해 『해 국도지』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를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이국적인 흥 취를 취하기만 하였고149), 아편전쟁을 위로하기 위하여 열하사로 떠 난 친구를 배웅하면서도 병자호란의 기억을 되새기는 태도를 보였 다150). 그가 이홍장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얻으려 한 것은 일본의 149) 이유원, 『가오고략1』, 이성민 역, (서울: 성균관대학교동아시아학술원, 2022),

253쪽.

150) 이유원, 2022, 463쪽. 개항을 저지하거나, 개항 이후의 분쟁을 조절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홍장의 조언에 혼선이 있었던 것 또한 이유원이 본인의 입장을 고수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고종이 이유원의 서신 교환의 배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이홍장으로부터 전해진 이독제독 전략이 나 황준헌의 『조선책략』 속 전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 는 없다. 이만손의 상소문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청의 논리는 세계 의 실상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논리만으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이는 청의 논의라는 명목을 통해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국고를 보강하려고 조약을 맺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까닭이기도 하 다.151) 다만 조미수호통상조약과 동년에 발생한 임오군란은 개항과 근대조약으로의 편입이 국내적인 지지기반을 얻지 못하였던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서신 교환을 통해 국가의 외교적 사무를 상담받고 또 결정하는 것은 이유원과 이홍장의 사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체제가 현실을 따라 가지 못하고, 또 그 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적은 국가에서 몇몇은 이 와 같은 비밀 서신 교환을 통해 자신의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강화도 조약 당시 주청 영국 공사나 일본 측의 함선을 찾은 오경석(吳 慶錫), 청으로부터의 외교적 자주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제한 김옥균(金玉均)의 사례152)는 단순히 개화파와 매국노와 같은 관점이 아 닌 당대의 조선 정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51) 김종학, 2021, 163쪽.

152) 김종학, 2017,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서울: 일조각, 27~64쪽. <참고문헌> 1. 1차문헌 『조선왕조실록』 李裕元-李鴻章 서한 2. 단행본 김종학, 2017,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서울: 일조각. 김종학, 2021, 『흥선대원군 평전』, 서울: 선인.

이유원, 2023, 『가오고략4』, 이상아 역, 서울: 성균관대학교동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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