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보살을 겸임하다: 청-준가르 갈등을 통해 본 다민족 제국의 통치술 옹화궁 이해린
동아시아질서건축사 : 고대천하에서 미래복합까지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석사과정
Ⅰ. 서론
1690년부터 1697년까지 강희제는 준가르의 갈단과 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격렬하게 경쟁했다. 이 갈등에서 흥미로운 점은 양측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갈단은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권위에 기반해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했던 반 면, 강희제는 천하의 통치자로서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유교적 의 무를 내세웠다. 청나라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활 용하기 시작한 것은 옹정제 시기부터로, 그 전까지는 천하 질서의 수 호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본 연구는 청나라를 단순히 ‘한화된 정복왕조’로 보지 않는다. 로사비 가 주장한 것처럼 청나라는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을 아우르는 다민 족 국가로서 각 민족과 지역에 적합한 서로 다른 통치 논리를 구사했 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청나라가 천하의 수호자라는 한족 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적재적소에 사용했다는 점이다. 준가르와의 갈등 은 청나라의 복합적 정체성이 실제 군사 정책을 운용할 때 어떻게 활용 되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이다.
현대 중국이 여전히 ‘다민족 국가’이자 ‘중화민족’이라는 복합적 정 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청나라가 어떻게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활용하여 광대한 땅을 통치할 정당성을 얻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의 행동 양식 과 미래 전략을 예측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다.
Ⅱ. 이론적 틀
고대 중국에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기준점은 문명 발전의 차 이였다. 이 때 ‘문명’의 기준은 한족이었다. 천하의 중심에 한족이 세 운 나라가 있고, 문화적으로 한족이 세운 나라가 우위에 있으며, 그 렇기에 주변의 나라들이 한족에게 ‘감화’되어 스스로 경의를 표하고 신하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는 소위 “천하 사상”은 고대부터 전근대 시기의 중국이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적 틀이었다.
그러나 이 틀은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외 부나 내부에서 기인한 충격이나 도전을 받기도 했다. 거자오광은 중국의 천하 세계관이 19세기 이전까지 총 세 번의 변화를 겪었다고 서술했다. 당나라 시기 불교적 세계관의 유입, 송나라 시기 한족 국가의 축소, 원 나라 시기 유사-세계적 관점으로 나눌 수 있다. 거자오광에 따르면 불교 세계관은 천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융합되었으며, 송나라 시 기에 격화된 한족과 비-한족의 경쟁은 “중국인”(화)와 “오랑캐”(이) 사 이의 좀 더 엄격한 구분을 요구하는 식으로 내부적 변화를 이끌었다. 거 자오광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천하’ 관점이 아닌 ‘세계’ 관점을 도 입하려 했다고 평가했으나 원나라가 지속된 기간이 너무 짧아 중국 천 하관의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보았다.
청나라는 이러한 중국식 천하 질서가 완전한 종말을 고한 시기로 받아들여진다. 청나라가 아시아 권역에서의 중심 위치를 완전히 잃어 버리면서 아시아에는 ‘예절’이 지배하는 질서 대신 ‘무력’을 기본 수 단으로 하는 근대적 사고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서방의 근대 질서에 무릎 꿇기 전 시기를 두고 정말 청나라가 어떤 식으로 국제 질서를 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 견이 분분하다. 이는 청나라가 한족이 아닌 만주족, 즉 이민족이 세 운 나라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중국 세계질서를 주창하는 페어뱅크와 같은 학자들은 청나라의 시작은 이민족이었지만 한족이 대부분인 중 원을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서 한화(Sinicization)되었다는 점을 지적 한다. 이민족이 세운 중국 왕조(정복왕조)가 내부적으로 화이 융합보 다 화이의 구별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한족의 논 리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정복왕조와 주변 나라의 관계의 틀 자체 는 여전히 문화적 차이에서 기반한(부자나 형제와 비슷한 것으로 이 해되는) 신분 관계였으며 하위 국가가 경의의 뜻으로 상위 국가에게 조공하며 스스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중화 외의 외부자를 다루는 방 식이었음을 강조한다. (즉 천하 질서의 근간은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 한다.)19) 페어뱅크를 비롯한 사람들이 관심 있게 주목하는 것은 주로 조선과 안남 등의 동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19) <중국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 니시지마 사다오, p. 340 <그림1> 무력이 아닌 영향력으로 지배되는 전통천하질서
이에 대해 정복왕조의 중국은 ‘동등자 사이의 중국’(China among equals)였다며 이민족이 세운 중국을 한족 왕조와 동등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반론도 거세다.20) 이때 로사비 등이 주목하는 시기는 주 로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이며, 서북 지역의 기마 민족과 중화 민족 의 사이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로사비를 필두로 한 학자들은 중국 역사에서(주로 한족의) 문화와 예절로 지배하던 시기가 아닌, 무력과 군사 대응이 주도적으로 주변 관계를 형성했던 시기가 있음을 지적 한다. 이러한 로사비의 논지를 이어받아 청나라가 단순히 ‘한화된 정 복 왕조’로 이해될 수 없고 만주족으로서의 특색을 간과해서는 안 된 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소위 신청사(New Qing History)라고 불리는 이들이 드는 가장 대표적 예시 중 하나가 바로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있었던 청나라와 준가르(만주족) 사이의 갈등이다.
20) <China Among Equals>, Rossabi. 1983. 신청사에 따르면 청나라는 다민족 제국의 대표적 예시로서, 청 황 제는 단순히 중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대변인일 뿐만 아니라 만주족과 몽골족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청나라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민족을 수립한 국가로서 혈통적으로는(당시 만주족과 몽골족은 혼인 으로 긴밀하게 맺어져 있었으므로) 만주족과 몽골족의 대표, 종교적 인 측면에서는 문수보살로서 티베트 지역에서의 종교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 실제로 중원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 하’ 질서의 대표자로서의 의무도 수행해야 했다. 이렇듯 복합적인 청 황제의 대내적 구성 요소는 대외에서도 단순히 예치로 지배되는 천 하질서가 아닌 조금 더 현실주의적인(realpolitik) 정치 수단을 채택 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청나라를 다민족국가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청나라와 준가르의 갈등은 단순히 천하 변경을 어지럽히는 자와 천 하를 지키려는 자의 경쟁보다도 ‘누가 진정으로 몽골족을 대표하느 냐’의 싸움에 가까워진다.
<그림2> 청나라의 다중적 대내 인식
<그림3> 로사비가 인식한 청-준가르 관계
그렇다면 실제로 청나라와 준가르는 자신들의 경쟁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청나라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였는지, 또 이 정체성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유동적으로 변 했는지 보여준다. 청나라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유는 청나라가 어떤 나라였느냐에 따라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기 때 문이다. 현대 중국은 절대다수인 한족과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 진 ‘다민족 국가’다. 중국은 이러한 다민족 국가를 “중화민족”이라는 하나의 문화 정체성으로 묶으려는 동시에 “위대한 중화 민족의 부 흥”을 민족 사업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화민족’을 규정하는 기억은 첫째,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근대의 역사고 둘째, 폭력적 이고 야만적인 제국주의와 반대로 유연하고 평화로웠던 ‘천하 질서’ 에 대한 우월감과 향수다. 그러니 실제 역사에서 천하 질서라는 것이 중원에 있었던 다민족 국가에 의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고찰하는 것은 지금 중국의 행동을 평가하고 미래에 중국이 어떤 식으로 자신 을 놓고 싶어 하는지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인 단계다.
Ⅲ. 티베트 불교와 준가르의 정치적 관계
1. 갈단의 사명
준가르와 청나라가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시점 으로 나눌 수 있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준가르의 갈단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세 번이나 친정을 나갔던 1696년에서 1697년, 그리고 갈단 이 사망하고 난 후 그의 조카 체왕 랍탄이 티베트 지역의 혼란을 무 마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의 하미를 공격하자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준가르의 티베트 점령을 저지한 1717년이다. 이렇듯 군사를 통해 준가르를 토벌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전근대를 지배했 던 ‘예치’와는 다른 국제정치적 논리가 중국의 북방에서 수행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준가르라는 국가가 자신을 어떤 포지션으로 두었는지 직 접적으로 알 수 있는 1차 사료는 없다. 그러나 티베트 측에 남은 사료 와 갈단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이 당시 준가르가 가지고 있었던 대외적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엔 충분 하다. 준가르와 갈단은 티베트 불교, 그것도 아주 세부적으로 겔룩빠(황 교파)의 수호자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겔룩빠의 수호자라는 이름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청 외부에 있던 몽골족에게 종교적인 권위는 정치적 권위와 순 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원나라 시기부터 존재했던 이 동맹 체제를 cho-yon 체제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티베트 불교에서의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세속 지도자의 ‘스승’이 되어 세속 지도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세속 지도자는 그의 ‘제자’가 되어 종교적 지도자에게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관계를 일컫는다.21) 이러한 스승-제자 관 계는 쿠빌라이 칸의 방계 가족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더욱 적극적으 로 활용된다. 티베트 불교 특유의 ‘환생’ 개념은 전통적인 왕가, 혹은 유목 민족의 관점에서 본가가 아니더라도(즉 쿠빌라이 칸과 직계 가 족이 아니더라도) 전 몽골족을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지 기반 을 만드는 데에 유용했다.
1640년 할하-오이라트 법전이 제정된 전후를 기점으로 티베트 불 교와 몽골 유목민족 국가들 사이의 긴밀한 협력은 보편화되었다. 당 시 부족장들에게는 아들들 중 한 명을 종교적 지도자로, 나머지 한 명을 차기 부족장으로 키우는 것이 정해진 관습이 되었다.22) 오이라 트의 승려 자야 판디타와 호쇼트부의 족장 오치르투는 의형제를 맺 었고, 할하의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형은 할하 좌익의 왕 투셰투 21) Wang, “The Tibet-Dzungar Ideological Alliance’s Challenge to the
Qing Empire and the Adaptation of Qing Ideology in the
mid-18thcentury.”2021.
22) Di Cosmo, “From alliance to tutelage: A historical analysis of
Manchu-mongol relations before the Qing conquest.” 2012. 칸이었다. 준가르도 마찬가지였다. 세력을 점점 확장해나간 준가르의 지도자 바투르 홍타이지는(당시 티베트의 실질적 권력자였던) 구시 칸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차기 후계자로 낙점하고, 형인 셍게는 차기 부족장으로, 동생인 갈단은 달라이 라마5세의 아래로 보 내 승려로 키웠다.
티베트 불교와 준가르 사이의 관계가 무척 종교적이었으면서 동시 에 양자 모두에게 정치적 권력의 기반이었다는 사실은 갈단의 승계 과정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1670년 준가르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 해 셍게가 암살당하자 갈단은 준가르의 차기 수장으로 추대된다. 이 는 당시 셍게의 아들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갈단이 분열된 준가르를 통합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23) 한 편으로 달라이 라마 5세를 필 두로 한 티베트에서도 갈단이 왕위를 잇는 것은 종교적으로도, 정치 적으로도 좋은 일이었다. 셍게 생전에 준가르의 내부 분열을 완화시 키고자 겔룩빠 승려들을 보냈던 달라이 라마5세는 준가르 좌익의 대 표로서 분열을 일으키던 초드바 바투르를 풀어주는 게 낫다고 셍게 를 설득했다. 그런데 바로 이 초드바 바투르에게 셍게가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즉, 이 때 티베트는 준가르의 리더가 죽은 정치적인 책임 을 어느 정도 나눠 가져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겔룩 빠에서는 앞으로 준가르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24) 준가르에서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 뻔한 상황에 갈단이 준가르의 리더가 된다면, 이는 직접적으로 준가르의 정치 상 23) Wang, “The Tibet-Dzungar Ideological Alliance’s Challenge to the
Qing Empire and the Adaptation of Qing Ideology in the
mid-18thcentury.”2021.
24) 윤성제, “17세기 중후반 준가르의 정치-셍게(Sengge)의 집권기(1653-70)를
중심으로-” 2014. 황에 개입하지 않아도 개입할 수 있는 개인적 통로는 아직 견고하다 는 뜻에 가까웠다.
실제로 갈단이 준가르로 부임하기 전 달라이 라마 5세는 자신의 제자인 갈단을 불러 ‘은밀히’ 뜻을 전했고, 갈단은 그 뜻을 ‘받아’ 충 실히 수행하겠다고 맹세했다. 달라이 라마5세는 갈단에게 보쇽투 칸 이라는 호칭을 내렸는데, 보쇽투 칸은 ‘명을 지닌 군주’라는 뜻이 다.25) 갈단은 이를 겔룩빠의 부흥과 안전을 위해 힘쓰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갈단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나 그의 섭정 샹 게 갸초가 원할 때면 내키지 않는 공격이라도 감행했다. 할하의 젭춘 담바 후툭투 1세와 달라이 라마 5세 사이에 분쟁이 생긴 1689년, 갈 단은 자신의 조카인 체왕 랍탄(셍게의 아들. 갈단은 체왕 랍탄이 어 느 정도 장성한 이후에는 그를 정치적 위험 요소로 인식하고 미리 제거하려 했다.)과 내부적인 권력 다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나라 와의 갈등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젭춘담바 후툭투 1세를 준가르 쪽으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준가르와 청나라는 결국 요 녕성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갈단이 할하와 청나라와의 갈등에 집 중하는 동안 조카 체왕 랍탄은 준가르로 돌아와 세력을 모을 기회를 잡았다. 추후 갈단은 청나라에게 패배하자 준가르로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다가 죽게 된다.
주지해야 할 사실은 갈단이 티베트 불교의 지지를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 독실하게 믿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 다. 갈단이 직접 쓴 사료 중 지금까지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료는 1696 년 음력 11월 23일 강희제에게 패하고 쫓기던 갈단이 달라이 라마 5세 에게 보내려던 편지 14통이다.26) 이 중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총 네 25) 상동, p.1
26) 조병학, “갈단이 티베트에 보낸 서신의 만·한역 비교 분석 시론-달라이 라마, 통이다. 갈단의 편지에서는 기도에 가까운 간절함이 보인다. “…작고 미천한 저는 여기에서 라마의 사랑하심에 의지해서 잘 있습니 다. 특히 아뢰는 것은, 모든 일을 전부 비밀로 해서 별도로 명백히 문 서에 썼습니다. 모든 것을 밝으심에 비추어 주십시오. 라마의 몸 영원 하고, 라마의 밝음을 빨리 만나서 지금 세대부터 모든 시대에 이르기까 지 사랑하고 보우함을 치우치지 않게 항상 살펴 주십시오.”27)
라모 나이충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조금 더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제가 어찌 되더라도 달라이 라마를 공경하고 경배하고 생각한 큰일을 이루게 해서달라이 라마를 속히 얻어 뵙기 위해 복 구하며 기도합니다. 이 대로 이루게 되는 년 월 일 시를 좋은지, 좋은 말로 분명하게 내려주십시 오! … 제가 생각한 일 크게 이루고자 합니다.”28)
갈단이 이 당시 강희제에게 크게 패하고 도망다니던 신세였다는 것을 생 각하면 단순히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 에는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갈단은 심지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기에 좋은 연, 월, 일시까지 달라이 라마 5세의 뜻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갈단이 준가르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달라이 라마 5세의 제자였다는 이중적 신분이 상호보완적이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디바, 라모 나이충, 바라이붕 나이충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2013. 27) <강희주접> 제8집 문서120, 532쪽6행~534쪽3행(조병학, “갈단이 티베트에 보
낸 서신의 만·한역 비교 분석 시론-달라이 라마, 디바, 라모 나이충, 바라이붕
나이충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2013, pp.50-51 재인용)
28) <강희주접>제8집 문서120(546~550쪽4행) (조병학, “갈단이 티베트에 보낸 서
신의 만·한역 비교 분석 시론-달라이 라마, 디바, 라모 나이충, 바라이붕 나이
충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2013, pp.60-61 재인용) 2. 겔룩빠 수호자로서의 준가르
갈단은 종교적 사명과 정치적 목적에 명확한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이는 비단 갈단 개인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준가르= 겔룩빠 수 호자의 정체성은 갈단 사후에도 이어졌으며, 준가르의 겔룩빠 우선주 의는 너무 견고한 나머지 티베트 불교 안에서 반감과 충격을 불러일 으키기도 했다. 티베트 학자 텐파 체링 밧상은 1717년 달라이 라마 6세를 둘러싸고 가열되었던 티베트 내부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군 대를 끌고 들어온 준가르가 어떻게 티베트 내부 민심을 잃었는지 설 명하면서 준가르의 겔룩빠 우선주의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29)
1717년 12월 3일, 거짓된 달라이 라마 6세를 옹립하고 티베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이유로 라싸에 들어온 체왕 랍탄과 준가르는 비-겔룩빠 사원을 부수고 닝마빠를 비롯한 다른 파벌들의 주요 종교 적 유적지를 파괴했다.30) 1704년 출생해 1700년대 티베트 불교사를 기록한 Sum pa mkhan po Ye shes dpal ‘byor의 사료는 이 당시 준가르의 행적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준다.
“준가르 군대는 라싸에 침입하여 라짱[칸]을 무찌르고 그에게 삶의 비유한성을 보여주었다. Stag rtse의 지배자 mTsho skyes rdo 섭정 29) Tsering Batsang, T. “Reflection on the Dzungar Persecution of the
rNying ma School of Tibetan Buddhism in the 18th Century, Focusing
on Its Cause and the Scale of the Destruction.” Revue d’Etudes
Tibetaines, no. 68, 2024 January, pp.206-248
30) Desideri, “Mission to Tibet: The Extraordinary Eighteenth-century
Account of Father Ippolito Desieri,” 2014, pp. 249 (Tsering Batsang, T.
“Reflection on the Dzungar Persecution of the rNying ma School of
Tibetan Buddhism in the 18th Century, Focusing on Its Causes and
the Scale of the Destruction.”P.229에서 재인용) 으로 지명되었다. 그 후에, 준가르…의 지령에 따라, 닝마 bla ma rDorje brag sprul sku의 고위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1718년과 1719년에 모두 숙청되었다. 수도원들[자세한 수도원들 이름 나열]도 모두 파괴되었다.”
Sum pa mkhan po는 아주 명확하게 “준가르가 부처의 가르침을 ‘정화’하였으며 … Tsong kha pa[겔룩빠의 사상적 기초]의 가르침을 드높였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31)
그러나 겔룩빠 우선주의적인 태도는 티베트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겔룩빠의 대표였지만 대내적으로 닝마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던 달라이 라마 5세부터 샹게 갸초까지 라싸 내부는 준가르보다 더 타 종파를 관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 문에 1717년 12월 준가르에 의해서 내려진 전국적인 닝마빠 가르침 에 대한 규제와 대규모 반달리즘은 소수의 겔룩빠 우선주의자들 외 에는 공포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당시 라싸의 관료였던 mDo mkhar Tseh ring dbang rgyal의 기록 역시 겔룩빠가 자행한 반달리즘의 부 정적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기술되어 있다.
“티베트 땅에서 준가르 군사들은[붓다의] 가르침을 해쳤고 많은 고 승들을 죽였다. 그들은 dBus와 gTsang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그들의 음식과 물 역시[빼앗겼 다.] 간결하게 말해서, 그들은 말과 좋은 풀을 비롯한 많은 추가적인, 31) Ye shes dpal ‘byor(1704-1788), “History of the Gelug Monasteris of
Tibet and the Annals of Kokonor”, 1982. (Tsering Batsang, T.
“Reflection on the Dzungar Persecution of the rNying ma School of
Tibetan Buddhism in the 18th Century, Focusing on Its Causes and
the Scale of the Destruction” P.230에서 재인용) 새로운 세금을 거뒀고; 공공을 괴롭혔으며 그들더러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삶]을 누리게 놔두지 않았다.”32)
Ⅳ. 중앙아시아 패권 경쟁에서의 청나라
2. ‘문수보살’의 수사적 의미
이와 비교하여 청나라는 적어도 갈단과 싸우던 1679년까지는 티베 트 불교의 수호자로서 자신을 인지하지 않았다. 티베트 불교 내부에 서 청 황제의 지위가 무척이나 수사적인 것이며 현실 정치와 거의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중원의 지배자는 ‘문수보살’로 치환되었다. 이는 종 교적으로 문수보살이 중국의 오대산에 산다는 전설이 내려져 왔기 때문 이다. 즉, 오대산을 포함한 영역을 다스리는 중국의 통치자는 관음보살 의 화신인 달라이 라마,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첸 라마와 병렬하여 존중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수보살로서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지리적인 근거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실제로 그 황제가 어떤 민족에서 나왔는지와는 관련이 없었다.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문수보살의 화신 32) mDo mkhar Tshe ring dbang rgyal “Mid bang rtogs brjod” 1981. pp.
379 (Tsering Batsang, T. “Reflection on the Dzungar Persecution of
the rNying ma School of Tibetan Buddhism in the 18th Century,
Focusing on Its Causes and the Scale of the Destruction.”P.237에서 재
인용) 이었고 명 성조 역시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1641년, 당시 티베트 불 교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구시 칸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두고 ‘문수 보살의 화신’이라고 불렀고, 1646년 순치제가 청조로의 계승에 승리하 자 곧바로 그를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가장 승리한 문수보살의 화신이 명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중국 을 점령했으며, 위대하고 자비로운 관음보살이 전륜성왕으로 화신하 여 우리 칸이 점령한 티베트를 교화하고 있다.”
따라서 문수보살이라는 지위는 수사적인 것에 그쳤으며, 중원의 정 치적 싸움에 실질적인 힘을 쏟아주지는 못했다. 반대로 중원의 통치 자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지위를 매개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실질 통치권을 인정받는 일도 없었다. 1635년 청나라는 “모든 몽골인의 대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원 제국의 유산을 계승할 정당성을 얻었으나, 이는 몽골 민족을 통치할 수 있다는 뜻에 불과했다. 실질 적으로 몽골 제국이 통치하고 있던 모든 땅을 청나라에게 귀속시키 는 행위는 아니었다. 즉, 문수보살이라는 티베트 불교적 지위는 이미 복속한 몽골 민족이 청 황제에게 반발하지 않도록 만들 수는 있었으 나, 새로이 일어나는 몽골 제국을 합리적으로 장악할 근거를 마련하 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 할하 몽골의 투항과 ‘천자’ 논리의 적용
그렇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패권 경쟁에서 청나라가 몽골족의 지 지를 얻기 위해서는 티베트 불교에서 비롯된 권위가 아니라 자신들 이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 평원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도덕적 의 무에 충실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1688년 할하와 준가르의 분쟁, 그리고 이에 따른 할하 몽골의 청나라 투항은 ‘천자’로서의 청 황제 의 지위가 중앙아시아까지 닿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앞서 쿠빌라이의 방계로 출발한 준가르가 혈통에서 부족한 정당성 을 메우기 위해 종교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혈통적인 방 면에서 볼 때, 준가르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즉 몽골족의 ‘본가’로 취급되었던 나라가 할하였다. 1662년 할하는(마치 준가르 좌익을 통 치하던 셍게가 1670년 준가르 우익의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한 것처 럼)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할하 우익이 권력을 두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할하 좌익이 우익을 사실상 통치하는 모양이 되자, 이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강화 회의가 열렸다. 1686년의 강화 회의에는 할하 우익의 대표(시 라), 달라이 라마 5세를 대리하는 라싸 간덴 사원의 좌주, 할하 좌익 의 대표(쟈쿤 도르지와 젭춘담바 후툭투 1세), 강희제의 대리인 청나 라 이번원의 상서 아라니가 입회했다.33)
이 강화 회의에서 할하 좌익의 쟈쿤 도르지가 할하 우익(자삭투 한가)의 백성들을 반환하고 더는 자삭투 한가의 지배를 침범하지 않 는 내용의 화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쟈쿤 도르지가 이 화약을 이행 하지 않고 자삭투 한가를 멸망시키자, 1688년 갈단의 준가르는 할하 를 궤멸시킨다. 할하와 준가르 사이에서도 흥미로운 종교적 역학 관 계가 보인다. 갈단은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스승의 전생자로 인정받 았다. 그러한 젭춘담바 후툭투 1세가 자신의 스승을 대리하는 간덴 사원의 좌주와 동등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달라이 라마 5세와 자 33) 강희제의 편지,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남상긍 역. 2014. 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더 분개했다는 설이 있다.
이 일화가 어디까지 사실이었는지, 또 얼마나 갈단의 군사적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쳤는지는 미지수다. 다만 당시 티베트가 할하몽골이 겔룩빠가 아닌 다른 종파와 연합할 가능성을 경계했다는 점, 젭춘담바 후툭투 1세가 달라이 라마 5세와는 다른 영적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 다는 점, 추후 달라이 라마 5세의 섭정 상게 갸초가 젭춘담바 후툭투 1 세의 실각은 환영했다는 점은 이 당시 준가르-할하 사이에 혈통적인 경쟁 외에도 종교 분쟁적인 측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준가르에게 패배한 할하(젭춘담바 후툭투 1세와 쟈쿤 도르지)는 청 나라로 도망쳐 강희제에게 귀순을 요청했다. 할하의 귀순은 향후 청 나라가 준가르를 ‘징벌’할 때 무척이나 중요한 명분으로 떠올랐다. 이제 강희제는 옛 할하에 살았던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피고 이 지역 의 분쟁거리를 정당하게 토벌할 수 있는, 즉 할하 몽골의 ‘형’이자 ‘아버지’, 그리고 ‘천자’가 되었다.
1691년의 도론 노르 회맹은 강희제가 이러한 지위를 견고하게 굳 히기 위해서 기획된 이벤트였다. 도론 노르 회맹은 청나라와 준가르 의 우란부퉁 전투에서 준가르가 대승을 거두고 난 직후 이루어진 회 맹으로, 청나라는 내몽골 부족들과 투항한 할하 수령들이 모두 이 회 맹에 참석하게 했다. 도론 노르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한이 나라의 여 름 수도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34) 젭춘담바 후툭투 1세는 “깊은 자 비를 가지고 중생을 구하고 널리 이익을 펴는 것이 부처입니다만 신 들은 폐하의 은혜를 받아 특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활 34) 상동, p. 83 불을 만난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이라고 인사했다. 할하의 세 명의 한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바치자 강희제는 할하 수령들을 팔기에 편성시키고 청조의 작위를 내렸다. 이로 인해 강희제는 공식적으로 할하의 통치자가 되었다.
할하의 삼궤구고두가 있고 난 후 바로 다음 날 강희제는 열병식을 거행 했다. 청군의 전투대형과 나팔소리, 전투 개시의 함성, 소총 소리 등은 할 하 사람들이 여럿 입회한 가운데에 진행되었다. 일련의 의식은 팔기에 소 속된 몽골인들과 새로이 편입된 할하 몽골에게 청이 무력적으로 절대 준가 르에게 밀리지 않으며 무척 우세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35)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활불’ 표현에도 불구하고 강희제가 갈단을 토벌 하러 나갔을 때 중점으로 두었던 것은 천자로서의 의무였다. 1696년 갈단 을 처벌하기 위해 나선 제1차 친정에서 강희제는 이렇게 연설한 바 있다.
“갈단이 할하와 외번 몽골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고통을 주었기 때 문에… [짐은] 천지 종묘사직에 고한 뒤 갈단을 반드시 멸하려고 출 정하였다. … 우리 조상 태조 고황제, 태종 문황제께서는 스스로 검 을 휘두르며 나라를 세웠다. 짐이 선조를 본받아 행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지금 우리가 약속을 깨뜨리고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서로 군은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빠진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북 경에 돌아가 천지, 태묘, 사직에 무어라고 아뢸 것인가?”36)
35) 상동, p. 86
36) <청성조인황제실록> 172권 강희35년4월, <친정평정상모방략> 22권, 강희35년
4월 을미의 기록(오카다 히데히로, 남상긍 역의<강희제의 편지> p.107-8에서
재인용) 강희제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출병을 무를 수 없음을 설 명한다. 첫째, 갈단이 할하를 괴롭혔기 때문에 할하의 대변인, 또는 할하의 통치자로서 반드시 갈단을 벌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만주 황제의 후예로써 검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서로군 한 개 대대로 갈단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갈단을 공격 하는 이유에 티베트 불교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복속 한 할하를 마땅히 돌봐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나타난다.
그의 천하적 사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희제는 1696년 5 월 14일(음력4월14일) 즈음 명의 성조 영락제 시절 외몽골 원정 기 념으로 금호산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보게 된다. 금호산 바위에는 “대명황제가 오랑캐를 토벌하고 육군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다. 짐 이 이곳을 지난 것은 4월14일; 고비가 칼날이 되고 천산이 칼등이 되도록 오랑캐를 일소하여 영원히 사막을 깨끗이 하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강희제는 5월 15일 황태자 윤잉에게 전하는 편지에 따로 종 이를 꺼내고 “짐이 이곳을 지나는 것은 바로 4월 14일”이라고 한문 으로 베껴 썼다.37) 그가 갈단을 토벌하는 논리의 기반으로 ‘오랑캐를 일소하여 영원히 사막을 깨끗이 하는’ 중화적 사상이 분명히 사용되 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제의 제1차 친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강희제가 온다는 소식 을 들은 갈단은 도주했다. 그러나 도주하다가 존 모드에서 청나라의 서로군을 맞닥뜨리게 된다. 존 모드 전투에서 갈단군의 주력은 궤멸 했다. 갈단의 조카 체왕 랍탄이 준가르 본국에서 실권을 잡고 있었 고, 이때까지만 하여도 체왕 랍탄과 청나라는 협력 관계에 있었기 때 문에 그는 다시금 힘을 기를 수도 없었다. 많은 오이라트 부족민과 37) 만무주접 한역 문서162, p.77, 황태자의 주접에 기록된 주비(5월14일) (오카다
히데히로, 남상긍 역의<강희제의 편지> p.113에서 재인용) 준가르 사람들이 청나라에 투항한다. 그 중 한 명은 갈단의 부하 담 바 하시하였다. 강희제는 황태자 윤잉에게 보내는 6월 17일자 편지 에 담바 하시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쓴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주인(갈단)은 맹세를 깨뜨리고 폐하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천벌이 내려 파국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이 전부터 사람을 죽이고 남의 처자를 갈라놓고 살아와서 지금의 화가 자신들에게 미친 것입니다. … 우리는 많은 나라를 정복해서 향하는 곳엔 적이 없었지만, 만주에 적대하는 자는 천하에 없으므로 자신들 의 오이라트는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38)
담바 하시하가 실제로 이러한 말을 했을 지는 미지수다. 강희제가 황 태자 윤잉에게 보내는 편지는 청 조정의 대신들과 황태후에게 공유될 만한 것이었으며, 강희제는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황태자 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강 희제 스스로가 ‘만주에 적대하는 자는 천하에 없다’라는 인식이 몽골족 내에 있다는 인식을 청조에 공식적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천 하를 어지럽히는 갈단의 무리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는 강희제의 친정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유로서 사용되었다.
천자로서 중앙아시아의 혼란에 개입할 도덕적 의무는 갈단이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39) 갈단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조카인 체왕 랍탄을 제압할 때도 강희제는 유사한 논리를 사용했다. 1705년(강희44년), 강희제는 체왕 랍탄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38) 만문주접 문서53, pp.244-254, 황태자에게 보내는 상서(6월17일) (오카다 히
데히로, 남상긍 역의<강희제의 편지> p.147에서 재인용)
39) 조병학, “18세기 초 청·준가르몽고 관계 연구 –<청내각몽고당당> 중
체왕 랍탄[tsewang labtan]관련 기사 중심으로-”, 2011. “올 겨울 너의 곳으로부터 도망해온 부르구터이의 말에 따르면, 체 왕 랍탄이 군대를 준비하여, 할하 등을 노획하고 토벌한다고 말했다. … 네가 약탈해간 우리의 단진 랍탄 부하들의 여인과 아이들, 또 우 리의 도망간 도망자들을 하나도 숨기지 말고 전부 보낸다면, 너의 압 둘라 자이상 등의 회자들을 나중에 보내고 사신 무역을 예전대로 행 하게 하겠다. 만약 보내지 않는다면 압둘라 자이상 등을 보낼 일이 없으며 너의 사신 무역 또한 행하지 마라.”40)
4년 후인 1709년(강희48년)의 당당은 좀 더 적나라하다.
“예전의 체왕 랍탄 너는 갈단과 반목한 모든 일을 성심으로 상주 하여 행한 일로 나는 어여삐 여겨 너의 사신 무역을 행하게 하였으 며, 수없이 좋은 칙서를 내려 은혜를 베풀어 사신을 파견하였다. 후 에 단진 랍탄이 찾아온 것을 체왕 랍탄 너는 군대를 파견하여 카룬 을 밀고 들어와 추격하는 사람을 보내(사람과 물건을) 빼앗아 갔다. … 또 모든 왕, 대신들, 천하의 모든 생명체가 모두 감화되어 하나로 살아가는데 오직 체왕 랍탄이 이처럼 외톨이로 있는다 하니, 내 천성 대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여, 너의 잘못을 모두 관대히 용서해주었 다. … 체왕 랍탄 네가 반드시 전례대로 사신 무역을 하고 싶다면 네 스스로 알타이, 항가이, 홉드, 우란 굼 등에서(행하는) 회맹에 오라. 그렇지 않고 네 생각에 어떤 곳에서 만나고 싶다면 회맹 장소를 정 하고 빨리 상주하라. 아직(여전히) 전의 칙지대로 너와 함께 회맹에 서 의논하고자 한다.”41)
40) <청내각몽고당당> 11권No.250, 강희44년10월30일의 기사. (조병학, “18세기
초 청·준가르몽고 관계 연구;<청내각몽고당당> 중 체왕 랍탄[tsewang labtan]
관련 기사 중심으로-”, 2011, p.235에서 재인용)
41) <청내각몽고당당> 11권No.255, 강희48년11월 13일의 기사. (조병학, “18세기
초 청·준가르몽고 관계 연구;<청내각몽고당당> 중 체왕 랍탄[tsewang labtan] 천하의 안정을 구가해야 할 천자로서 체왕 랍탄의 비협조성을 더는 좌시할 수 없으므로 하루 빨리 청나라가 주도하는 회맹에 참석하라는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다. 강희제는 체왕 랍탄과 자신의 관계를 동등하 게 보고 있지 않다. 이는 갈단을 친정하려 나섰을 때 ‘벌을 주겠다’고 천명한 것과 비슷한 논지다. 강희제가 직접 통치가 아닌 회맹이라는 해 결책을 통해 준가르를 복속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세 차례의 친정, 그것도 먼 중앙아시아까지 의 친정을 도모한 당시 청나라에는 또 다른 대규모 친정을 벌일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갈단 친정의 사례와는 다르게 체왕 랍 탄이 준가르 내부에서 싸울 수 있다는 점도 청나라에게는 불리한 요소 로 작용했다. 둘째, 갈단과 강희제의 관계와 다르게 체왕 랍탄과 강희 제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협력 관계에 있었다. 이를 명시적으로 깨는 사건이 없다면 갈단의 사례에서는 설득력이 있었던 ‘정벌’의 논리가 무 너질 수 있었다. 천자 스스로 천하의 안정을 깨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 기 때문이다.
로사비가 이해한 것처럼 당시 청나라에게는 다중적 자기인식이 분명 히 존재했다. 만주족이지만 몽골족과의 혼인으로 인해 몽골과 가까웠 고, 몽골의 전투력과 군사력은 중국의 다수인 한족을 누르고 천자로 인정받는 중요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족의 대변자 로 준가르몽골이 떠오르는 것은 청나라에게 단순히 변경 지역의 불 안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의 기반을 흔드는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 다. 하지만 주지해야 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가 한족 세계의 대표자인 천자로서의 위치를 버리면서 몽골 통합에 집중하지는 않았
관련 기사 중심으로-”, 2011, p.239에서 재인용) 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섣부르게 갈단이나 준가르가 차지하고 있는 티베트 불교에서의 정체성에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강희제 집권 시 기 청나라는 티베트 불교를 존중했지만 자신더러 활불이라고 지칭하 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5세의 사망이 밝혀지고 일대 혼란이 벌어진 티베트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짜 달라이 라마’ (즉 달라이 라마 6세) 를 잡아오라고 하는 명을 보면 당시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내 뜻은, 몽골 대중의 마음은 모두 달라이 라마에게 기울어있어, 그가 비록 가짜 달라이 라마일지라도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으로 몽골 대중은 모 두 그에게 복종한다. 만일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잡지 못하고 체왕 랍탄이 가서 맞이한다면 서역 몽골은 모두 체왕 랍탄에게 향할 것이다.”42)
즉, 달라이 라마가 진실된 자인지 아닌지는 청나라에게 그리 중요 한 부분이 아니었다. 이는 달라이 라마 7세 칼샹 걈초에 대한 청나 라의 입장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강희44년(1705년) 청나라는 원래 지목되었던 달라이 라마 6세 대신 당시 청조가 후원하고 있던 티베트의 권력자 라짱 한이 옹립한 새로 운 달라이 라마 6세의 지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강희56년(1717년) 준가르의 체왕 랍탄이 청조가 폐위한 6세의 전생자라며 ‘칼샹 감초’ 를 내세워 라싸로 밀고 들어온다. 3년이 지난 강희59년(1720년), 청 나라는 칼상 걈초를 달라이 라마 7세로 공식 승인하고 라싸에 진군 해 준가르부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43)
이러한 정치 행위에서 강희제가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인 면모보다 42) Zahiruddin Ahmad, “Sino-Tibetan relations in the seventeenth
century.” 1970.
43) 류정아, “준가르부 침공 기간 중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실상.” 2009. 는 현실 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훨씬 더 높게 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겔룩빠 우선주의를 주창하다가 티베트 내부에서 민심을 점 점 잃어버린 준가르몽골과는 사뭇 대립되는 행보다.
강희제가 있었을 때의 청나라는 티베트 불교를 어디까지나 중앙아 시아의 민심을 좌우하고 정치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 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았듯 강희제가 갈단을 대응할 때나 체왕 랍탄을 대응할 때 그는 천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끈질기게 사용했다.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가 몽골 대중의 민심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알았으나, 그만큼 이 미 달라이 라마에게서 종교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준가르몽골과 동일 한 명분을 가지고 싸운다면 자신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 았다. 또 한 편으로는 한족이 완전히 만주족에 대한 신뢰가 자리잡지 않은 상황에서(강희제는1673년부터1681년까지 삼번의 난에 시달렸 다) 섣불리 다른 종교를 믿는 이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선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강희제에게 할하 몽골의 투항은 중앙아시아 패 권을 두고 경쟁할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환점이었다. 투항 이전까지 준가르는 “겔룩빠의 수호자”라는 종교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몽골 세 계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갈단의 ‘보쇽투 칸’에 대항하 는 것은 단순히 갈단 개인을 적으로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위를 하사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포함하여 모든 몽골을 적으 로 돌리는 행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할하 몽골이 청나라에 투항 함으로써 경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준가르는 ‘몽골 (일부라 할지라도)을 침략하고 괴롭히는 자’가 되었고 청나라는 ‘몽골 백성들의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할하의 투항은 청나라의 천자 논리를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 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강희제가 갈단 정벌을 ‘천지 종묘 사직에 고한 뒤’ 결정했다고 언급한 것은 이를 개인적 야심이나 변경 지역의 다툼이 아닌 천자로서의 숭고한 의무로 포장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이러한 천자 논리는 기존 몽골 세계의 정치 질서와도 양립 가 능했다. 몽골족에게 천자는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원나라 시기부터 몽골 대칸들은 중원의 천자 역할을 겸해왔고, 명나라 시기에도 몽골 족은 중원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청나라가 천자로서 몽골을 보호한다는 논리는 종교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개념 이 아니라 오히려 친숙한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는 추후 티베트 의 중국에 대한 지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림4> 할하 투항(1691)이후 중앙아시아 패권 경쟁 구도
3. 티베트 불교 수호자의 대체 1717년 준가르의 하미 공략과 이후 벌어진 준가르의 겔룩빠 우선 주의 반달리즘은 티베트에서 비-겔룩빠 승려들이 탈출하거나 도망치 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청나라의 ‘천자적 의무’에 정치적 합당성을 더해줬음은 당연한 일이다. 강희제가 죽고 옹정제가 즉위한 1723년부터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준가르가 잃어버린 종교적 권위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옹정 원년(1723년) 청나라는 준가르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티베트 정치인 캉첸내를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출범시켰다. 4년 뒤 캉첸내 가 암살당하자 청조는 이를 빌미로 라싸에 파병해 캉첸내 암살 세력 을 숙청하고 라싸에 대신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 옹정제는 달라이 라마가 거주할 수 있는 사원 건립을 명하고 달라이 라마 7세를 책봉 하기에 이른다. 달라이 라마7세가 거처할 사원과 그에 따른 경비, 달 라이 라마 7세의 수행원들을 지원할 경비는 모두 청조가 부담했다. 다음은 청나라의 신하였던 악종기가 청조가 달라이 라마7세의 체제 비용을 제공할 것을 아뢰는 상소문이다.
“달라이 라마가 리탕에 도착하자마자 라싸의 모든 물자가 바로 도 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착하자마자 필요한 물자는 미리 그 지급 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황상께서 겔룩빠를 진흥하시 는 넓은 인덕에 부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44)
이러한 상주에 옹정제는 “지극히 옳다. … 라마의 모든 사용 물자 는 충족하게 지급하도록 해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44) 옹정6년12월 초7일 상주, p.5 (류정아, “준가르부 침공 기간 중 청조의 티베
트 지배의 실상.” 2009, p. 287 재인용) 옹정9년(1731년) 준가르와 청나라는 군사적 대립을 일단 중지하고 강화 협상을 통해 잠시 준가르부와의 관계 정상황에 돌입한다. 이 때 도 달라이 라마 7세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었던 쪽은 준가르가 아니 라 청조였다. 청나라는 이 시기 과친왕을 파견하여 달라이 라마 7세 와 회담을 하고 오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달라이 라마7세와 옹정제의 회담을 대신하려는 의도였다. 회담을 하고 돌아온 과친왕은 달라이 라마7세가 황제의 자비를 칭송했다며 이렇게 보고했다.
“어렸을 때에는 성조황제[강희제]의 커다란 자비로 장군을 파견해 서 병사들을 통솔해서 라싸의 달라이 라마의 성전까지 보내주셨습니 다. 또 다시 황상을 은혜를 입어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 다. 후에 황제의 얼굴을 배견하도록이라는 언지가 있어 빨리 가고 싶 었습니다면 아직 천연두에 걸리지 않아 …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지 금 … 다시 은혜를 받아 단지 교를 진흥시키고 성왕의 만년가복을 경하하겠다고 말씀드릴 뿐입니다.”45)
티베트 사료인 달라이 라마 7세전에서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당분간 도매 지역[암도와 캄 지역을 포함한 동티 베트 지역]에 불교 중생을 위해 커다란 일을 하실 시기라고 생각하여 마음으로부터 황제의 언질대로 하시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46)
중국 측 사료뿐만 아니라 티베트 측 자체 기록 역시 달라이 라마 45) 세종실록155권, 옹정13년4월 갑오일. (류정아, “준가르부 침공 기간 중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실상.” 2009, p. 291 재인용)
46) Lcang skya rol pa’I rdo rjes dpag bsam rinpo ch’I snye ma, p. 233
(류정아, “준가르부 침공 기간 중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실상.” 2009, pp.
291-2 재인용) 7세가 자발적으로 청 황제가 지시한 이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강희제의 신중한 접근으로부터 발생한 종교적 권위 대체 과정이라고 보인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할하 몽골 차원으로 고정되었던 보호의 의무를 준가르의 종교적 권위 공백을 틈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한 보호 의무로 확장시킨 것이다.
이렇듯 천자의 보호 의무는 종교적인 권위와 점차 융합되기 시작 했다. 옹정12년과 13년 <청대옹화궁당안>은 왕부에 티베트 불교 사 원을 개축하자는 조서가 수록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옹정제 시기 이 후 건륭제의 시기 때는 건륭제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방대한 규모의 겔룩빠 사원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는 티베트 불교 신자들의 눈길 을 베이징으로 유인하고, 준가르몽골과 티베트 겔룩빠 세력 사이의 연대를 훨씬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47)
이러한 시도로서 건립된 옹화궁은 건륭제의 의도를 완벽하게 수행했 다. 옹화궁은 베이징 최대 규모의 겔룩빠 사원으로서 달라이 라마, 뺀 첸 어르더니, 젭춘담바 쿠툭투와 쨩꺄 쿠툭투 등 티베트 불교의 영수들 이 모두 다녀가는 곳이 되어 베이징을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탈바꿈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옹화궁은 건륭제가 태어난 곳으로, 이곳을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개조한 것은 건륭제 개인에 대한 종교적 권위를 간접적으로(그렇지만 확실하게)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따라서 다민족 제국으로서 이 시기 청나라의 정체성 설정은 단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청나라 내부의 다중적 정체성과 더불어 국 제정치적 고려가 수반된 일이었다. 강희제는 수사적인 말에 불과한 문 수보살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도 있었다. 보쇽투 한으로 47) 안윤아, 조병학 “옹화궁 시론1 -옹화궁의 기능과 옹화궁을 통한 건륭제 시기
의 티베트 불교정책-“. 2019. 서의 갈단만큼이나 티베트 불교에서 인정한 지도자가 청 황제임을 천명 하고 보쇽투 한과 문수보살의 대등한 싸움인 것처럼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갈단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5세 사이에 존재하는 개 인적인 스승-제자 관계가 훨씬 더 긴밀하며 종교적으로 접근했을 때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수사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천자 지위에 집중하고, 할하 몽골의 투항을 종교적인 것으로 비화하지 않고 오히려 천자 범위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갈단과의 싸움에서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내부 한족의 반발을 잠재우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문수보살’로서의 정체성은 갈단이 죽고 난 다음, 종교적인 목적을 명 확하게 띄고 있던 준가르에 대한 인기가 점점 떨어졌을 때에 비로소 빛 을 발했다. 이 때에도 청나라는 종교적인 신분을 천명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 7세의 권한을 인정하면서 다만 티베트의 안녕을 지킬 도덕적 의무 가 그에게 주어진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원래 존재했지 만 허울뿐이었던 문수보살로서의 종교적 권위와 만나 준가르가 잃어버 린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 역할을 채우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다.
Ⅴ. 결론
페어뱅크로 대표되는 ‘한화된 정복왕조’ 이론은 청나라가 결국 전 통적 천하 질서를 계승했다고 보았지만, 이는 청나라가 보여준 정체 성 활용의 전략적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로사비의 ‘동등자 사이의 중국’ 개념과 그로 영향을 받은 신청사적 사고는 청 나라의 다민족적 특성에 매몰되어 청나라가 천자 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측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본 연구가 제시하는 청나라상은 이 두 해석을 종합하되 새로운 차원을 추가한다. 청나라는 상황에 맞추어서 정체성을 관리했다. 강희제가 갈단과 의 경쟁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무시하고 세속적 정체성(천자)에 집중하여 강희제-갈단, 또는 강희제-체왕 랍탄의 갈등은 철저하게 도덕적으로 우월 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휘하에 있는 다른 나라를 ‘벌 준다’ ‘정벌한다’라고 의식하게 만든 것, 반면 옹정제 이후 종교적 권위에 공백이 생기자 비로소 티베트 불교의 후원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은 이러한 전략적 정체 성 관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즉, 페어뱅크가 주목한 조선이나 안남과의 관계에서 나타는 전통 천하질서와 로사비가 강조한 서북 기마민족과의 현실정치적 관계는 사실 청나라의 동일한 전략적 사고에서 나온 서로 다른 표현이었다. 청나라는 상대방의 성격과 자신의 역량, 그리고 국제정치적 타이밍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효과적인 정체성을 선택적으로 활용했다.
청나라와 준가르의 중앙아시아 패권 경쟁은 단순한 영토 다툼을 넘어 서서 서로 다른 정체성 전략의 경쟁이었다. 준가르가 겔룩빠 수호자라 는 단일하고 순수한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운 반면, 청나라는 천자와 보 살이라는 복합적 정체성을 국제정치적인 상황에 맞춰 순차적으로 활용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할하 몽골의 투항을 계기로 천자로서의 보 호 의무를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는 한편, 문수보살로서의 종교적 정체 성은 준가르의 극단주의가 티베트 내부에서 반감을 산 이후, 즉 최적의 타이밍에 비로소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을 견지한 반면 준가르가 종교적 사명에 너무 몰입하여 현실 정치에서의 우위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청나라의 복합적 정체성은 정당성 요소가 쉽게 약화되지 않 는 강점을 보여주었다. 천자로서의 도덕적 의무는 추후 종교적인 후 원을 정당화했고, 종교적인 후원은 천자로서의 덕치를 입증했다. 할 하에 대한 보호는 천자 지위를 실증했으며 티베트 안정을 위해 달라 이 라마 7세를 보호하는 것은 보살로서의 자비를 보여주는 일례였다. 이러한 상호보완적 구조는 청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지속 가능한 패 권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준 핵심 요인이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의 질문은 현대 중국에 서도 큰 울림을 가진다. 현대 중국은 ‘위대한 중화민족’이라는 슬로건 아래, 소수민족을 융합하면서 국가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현대 국가 를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수민족의 민족어를 국가시험에서 배제하 고, 국가의 통일된 목표 지향을 위해 민족적 특수성을 점진적으로 약화 시키는 현재의 접근법은 청나라의 전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청나라의 경험이 현대 중국에 주는 교훈은 복합적 정체성의 전략 적 활용이 단순한 동화나 억압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 대내성을 국가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적재적소에 조율했으며,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정체성을 전환함으로써 장기적 안정을 확보했다. 현대 중국이 추구하는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성과를 거두려면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복합적 자기인식이 대내의 소수민족들에게도 통용되어야 한다. 즉, 개발도상 국에게는 남남 협력의 대표자로, 또 대국들 사이에서는 책임감 있는 대국의 대표로 보이고자 하는 그 유연성이 소수민족의 문화적 정체 성을 대하는 데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청나라와 준가르 중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의 지지를 얻고 결국 준 가르를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 가장 주요한 이유는 다양성을 통일 성의 적이 아닌 자산으로 활용한 데 있었다. 이는 21세기 다민족 국 가의 운영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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