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통해 미래를 읽다: 미국의 대중국 디리스킹 전략과 중국의 대응 규슈 국립박물관 이해린
설국 속에서 세계를 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학과 학사 졸업
Ⅰ. 들어가며
2024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낙점되었 다. 대중국 60% 관세를 주요 공약 중 하나로 내걸었던 그라 향후 4 년 간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이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하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던 동안 미국의 대중 경제정책을 두고 ‘디 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비중이 늘었다. 2017년까지만 해도 이 단어는 ‘주요 흐름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움 직이는’ 일정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학술적인 용어였다. 예를 들어, ‘그린 에너지 산업’의 발전 현황은 기존 에너지 산업과 ‘얼마나 독단적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decouple”이라는 동사를 쓰는 일이 드물지 않게 보였다. 디커플링이 국제관계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이다. 미국의 무역제조업정책국 국장 피터 나바로가 “중국과의 관계 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디커플’될 필요가 있다”라고 언급한 이후 ‘디커플링’은 미국이 중국과의 상호 관계를, 그 중에서도 무역에서의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형용하는 명사로서 활 용되기 시작했다.
2018년에서 벌써 거진 7년이 흘렀다. 트럼프의 복귀는 ‘디커플링’ 의 재림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2018년의 디커플링과 2025 년의 디커플링은 같지 않을 것이다. 디커플링이 이루어지는 방향도, 그 결과도 다를 것이다.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상황의 변화를 만들 어냈다. 첫 번째는 단연 플레이어의 변화다. 트럼프 대신 나타난 ‘바 이든’이라는 새로운 플레이어는 트럼프와는 다른 내러티브를 사용해 서 중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바이든의 디리스킹 전략이 우선적으로 판을 뒤흔들었다.
두 번째 변화는 게임 세팅의 변화다. 2018년과 2024년 사이에 기 술은 발전했다. 2018년에도 반도체는 물론 중요했지만, 그 사이 반도 체는 미래 산업의 틀을 기본적으로 결정하는 키를 쥐게 되었다. 다시 금 ‘무역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2025년의 전쟁 품목은 2018 년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7년 동안 리뉴얼된 게임에 7년 전의 플레이어가 입장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미국과 중국의 ‘게임’은 앞으로의 4년 동안 어떤 방 향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게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더 나 아가 세계 전체에는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까?
미래를 예측하는 건 항상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가 처음으로 주장 했던 ‘디커플링’ 이후, 세계정치가, 더욱 정확하게는 미국과 중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상태로 도달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앞으 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줄 것이다.
이 글은 바이든 정부의 디리스킹 전략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리고 중국이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기반으로 향후 미중 관계와 세계정치의 변화 양상을 그려내보려 한다.
Ⅱ. 디리스킹 전략
1. 디리스킹의 시초
이 글이 제시하고 있는 게임의 주요 플레이어는 단연 미국과 중국 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플레이어가 복합적 으로 얽혀 있다. 이런 세상을 보여주듯,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 전략을 말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미국도 중국 도 아니고, 유럽 연합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디커플링’ 대신 ‘디리 스킹’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화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2023년 1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대통령 폰 데어 라이엔은 다보 스 포럼에서 처음으로 ‘디리스킹’이라는 단어를 중국과의 관계 변화 를 서술하는 데에 쓴다 (Von der Leyen 2023).
우리는 계속해서 중국과 같이 일해야 하고 무역해야 합니다. 특히 (‘넷
제로’를 달성하기 위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할 땐 말이에요. 그렇기에
우리는 디커플링보다는 ‘디리스킹’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단순하게 환경적 목표를 위해서는 중국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하다 는 이야기로도 들리지만, 후반부의 한 마디가 핵심이다. 유럽연합은 트럼프의 대중 경제 정책인 ‘디커플링’에 확실하고 명확한 ‘안 할게’ 를 외쳤다. 지금 당장 중국을 유럽의 무역망에서 뺄 수 없다는 뜻이 다.
그러나 ‘디리스킹’은 유럽이 완전히 중국과 협력을 버릴 수 없다는 의미만 담고 있지는 않다. 2023년 3월, 유럽연합은 재차 ‘디리스킹’ 을 입에 담는다. 이번에는 포커스가 환경이 아니고 경제다(MERICS 2023).
중국의 국가주도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빚어낸 왜곡은 유럽과 중국의
관계를 불균형하게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 이는 우리
가 ‘디리스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지금 당장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구축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중국과 협력했을 때 야기되는 불균형한 경제 경쟁을 의식한 발언이다. 중국 국영기업(SOE)들이 너무 막강하니 유럽 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 도록 어느 정도의 패널티를 주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같은 날 폰 데어 라이엔은 중국과 러시아가 얼마나 밀접한지, 남중 국해 영토 분쟁 과정에서 중국이 얼마나 큰 군사적 위협을 주고 있는 지 강조하면서 정치적인 영역에서 중국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주고 있는지 설명한다(MERICS 2023). 그러니 폰 데어 라이엔이 주장한 ‘디 리스킹’은 중도적인 성향이 있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도 응하지 않 겠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중국과 현재 수준의 협력을 유지하지도 않겠 다는 뜻이다.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통해 유럽이 만들고자 하 는 것은 단연 유럽 기업들이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공정 한’ 필드다. (폰 데어 라이엔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a level playing field with diversification”이 되겠다.) 이렇듯 디리스킹은 디커플링과 다른 전략이다. 디리스킹에는 고의 적인 모호함이 있다. 디커플링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나 중국이 만 들고자 하는 글로벌 공급망에 ‘동조하지 않음’을 천명하지만 디리스 킹은 그저 중국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의 ‘가능성’을 경계한다는 의미 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위험’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경계’ 할 것인지 무척 모호하다.
또한 디리스킹은 다면적이다. 중국과 한 편으로는 협력하면서 한 편으로는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분야에서만 중국을 배제할 수 있다.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2. 디리스킹의 확장: 미국의 수용
미국이 ‘디리스킹’이라는 개념을 차용함에 따라 디리스킹은 한 층 더 중요한 전략으로 발전한다. 2023년 4월 27일, 미국 국가안보보좌 관 제이크 설리번은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직접적으로 디리스킹이라 는 아이디어를 언급한다(Sullivan 2023).
중국에 대해서 조금 더 포괄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폰 데어 라이엔 대
통령이 최근 말한 것처럼, 우리는 디커플링이 아닌 다양화와 디리스킹
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자와 기업을 위한 공정한 필드를 만
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남용에는 맞설 것입니다.
미국이 유럽의 ‘디리스킹’ 전략을 수용한 가장 큰 까닭은 디커플링 이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 1] WTO가 조사한 2019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의 지정학적
블록 내/블록 간 무역 지수
2023년 WTO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무역지수가 대폭 꺾인 것은 물론, 서로 다른 지정학적 블록 간의 무역이 지정학 적 블록 내의 무역을 제친 것을 볼 수 있다(World Trade Organization 2023). 중국을 전세계적 무역 사이클에서 완전히 배제 하겠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종료되는 2021년 1월까지 떨어진 무역 지수는 복구되지 않았다. 바 이든 행정부 때도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정 학적 정치 상황을 고려해 글로벌 공급망이나 무역 네트워크를 갈라 놓자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반영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에게 는 디커플링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정책적 지향점을 내놓아야 할 필 요가 있었다. 대내적으로 해석하자면 트럼프와는 다르다고 어필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 해석하자면 디커플링에 회의적인 유럽 역시 동조할 수 있는 정책적 지향점을 찾아야 했다.
디커플링은 미국 혼자서 중국을 단절하자고 나선다면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목표다. 가치 동맹으로 연합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전부 중국을 배제해야 중국이 없는 글로벌 공급망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 이다. 그러니 유럽이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중국을 배제하라면, 유 럽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미국의 경 제를 지키면서도 전통적인 우방인 유럽의 지지를 얻으며 트럼프와는 다른 지향점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설리번의 연설에서 직접적으로 읽 어낼 수 있다(Sullivan 2023).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날 무역 정책은 단순한 관세 인하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하며, 또 우리의 국내 및 대외 경제 전략에 완전히 부합해야
만 합니다.
설리번은 어느 부분에서 중국을 배제할 것이고 어느 부분에서 중 국과 협력할 것인지 명시한다(Sullivan 2023).
경제적 융합은 중국이 자신의 지역에서 군사적 야심을 드러내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 “중국발 쇼크”는 우리의 국내 제조업에 크고 쉽게 극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혔고 [...]
[...] 우리는 ‘좁은 마당, 높은 담’ 정책을 통해 우리의 기초 기술을 보
호할 것입니다. [...] 우리는 중국에 대한 최신 반도체 기술 수출에 신
중하게 맞춤화된 규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규제는 기본적인 국가
안보 의제를 전제로 제시되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이 기후 문제, 거시경제의 안정성, 의료
안보, 식량 안보 등의 전세계적인 도전에 함께 맞설 수 있고 또 그래 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이 가져다줄 수 있는 리스크를 경계 하지만 동시에 비전통적 안보 의제에서는 협력할 수 있다는 창구를 열고 있다. 디리스킹은 유럽에서 당초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 적이고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 탈바꿈했다. 미국은 ‘디리스킹’이라는 단어의 모호성을 줄이고 다층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우방국들에 게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준 셈이다. 지금 당장 중국과 모든 끈을 놓 아버리는 건 어렵지만, 적어도 반도체 부문에서는 중국을 빼보자는 거다. 설리반이 꽤나 직접적으로 말한 것처럼,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을 제칠 필요는 없다. 다만, 기술적인 분야에서는 “미국의 기술 이 미국에 반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중국을 제쳐야만 한다. 기술 분야,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의 우위를 점하고 놓지 않는 것은 미국의 디리스킹을 채택하며 이뤄내야 하는 제1의 목표다.
Ⅲ. 디리스킹의 성과
1. 미국의 맞춤형 규제
그렇다면 디리스킹은 제 역할과 쓸모를 다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을 제지한다는 목표를 위 해 바이든의 미국은 4년 내내 공을 기울였다. 다음은 바이든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칩 수출 규제를 염두에 두고 발표한 주요 정책이다. 단순한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에 머물렀던 정책이 반도체 업계 전반 에 대한 제조 장비 수출 및 투자에 대한 철저한 규제 체계로 확대되 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York 2024).
날짜 부서 내용
‘중국의 군대 현대화’를 도운 혐의로 2021.12.16. 미국 상무부 반도체 제조 회사를 포함한 34개의
중국 기업 제재리스트에 등록
미국산 첨단 컴퓨팅 및 반도체
제품을 중국으로 수출할 때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수출 규제 시행 2022.10.7.- -ASML은 이에 따라 중국 고객에
미국 상무부
13. 서비스 중단
-TSMC는 중국 내 사업장에서
미국산 부품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1년치 라이선스 획득
미국인이 중국 (홍콩, 마카오
포함)에서 특정 세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 (아웃바운드 투자
바이든 미
2023.8.9. 프로그램)
대통령
-반도체
-양자 정보 기술
-특정 인공지능 시스템
대중국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에
미국 상무부 관한 세 가지 추가 규칙 발표 2023.10.17. 산하 -규칙 1: 미국의 무기 금수 조치를
산업안보국 받는 국가 또는 지역에 본사를 둔
모든 회사에 반도체 칩 수출을 위한 라이선스 요구
-규칙 2: 더 많은 종류의 반도체
제조 장비가 수출 규제 대상이 될
예정 (엔비디아 등 주요 칩
제조업체가 중국으로 고성능
반도체를 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함)
-규칙 3: 미국의 국가 안보 및
이익에 반하는 활동을 하는 중국
법인은 제재리스트에 추가. 이러한
법인을 위해 칩을 생산하는 기업
역시 산업안보국에서 추가적으로
라이선스 취득 필요
양자 컴퓨팅,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수출 통제 임시 규율
발표
-양자 컴퓨팅이나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 및 기타 국가로 수출
미국 상무부
또는 재수출하려면 라이선스가
2024.9.5 산하
필요하며, 이러한 라이선스는 ‘거부를
산업안보국
전제로’ 검토
-그러나 재래식 무기와 이중 용도
상품의 수출에 한한 바세나르 체제
참여국1)은 ‘승인 가정’을 전제로
라이선스를 검토받게 될 것
미국 중국 관세 조치 최종 확정 (301조 2024.9.13
무역대표부 관세 확정)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관세율 100%
인상
-중국산 태양전지에 대한 관세율
50% 인상
-중국산 전기차 배터리 부품, 중요
광물, 철강, 알루미늄, 마스크, 해상
컨테이너 크레인에 대한 관세율 25%
인상
140개의 기업을 제재리스트에
미국 상무부
등록하고 반도체 칩 수출 통제 확대 2024.12.3 산하
(특히 첨단 노드 회로를 생산하는
산업안보국
데에 필요한 제조 장비 통제)
[표1]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견제 정책 (~2024년 12월)
그러나 견제만 이어진 건 아니었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과 중국은 대화도 했다. 특히 환경 분야에서의 협력이 두드러졌다. 2021년 11월 10일 COP26의 마지막 날 미중 공동 기후 행동 선언 을 한 것부터 시작하여, 환경 의제는 2021년 11월 15일 처음으로 온라인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을 때도 빠지지 않았다. 2024년 9월 4일 부터 6일, 그러니까 미국이 중국에 대한 관세를 대폭 늘리던 그 시 기에도 미국은 중국과 기후를 매개로 한 대화 채널을 열어 놓았다. 1) 아르헨티나, 호주, 오스트리아, 벨기에, 불가리아, 캐나다, 크로아티아, 체
코, 덴마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헝가리, 아일랜드,
인도, 이탈리아, 일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 말타,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폴란드, 포르투갈, 한국, 루마니아, 러시
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남아공,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터키, 우크
라이나, 영국, 미국 등 42개국 (존 포데스타 미국 기후 특사가 미중 기후 회담을 위해서 베이징을 방문한 것을 예로 들겠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동안 수뇌회담을 제외 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화 채널이 거의 전무했던 것과는 확실히 대조 적인 모습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이루어진 대중국 견제는 동일하게 디리스킹 전략 을 내세운 유럽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었다. 2023년 7월 25일 통과 된 반도체 법(Chips Act)가 그 결정적인 예나 다름 없다(European Union 2023).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의 유럽연합 점유율을 10%에서 20%로 높인다는 내용의 법안은 유럽이 ‘디리스킹’을 외치며 쟁취하고 자 했던 ‘공정한 필드’를 만든다는 목표에 충실했다.
미국은 디커플링 전략에서 나타났던 두 가지 허점을 모두 보완한 셈이다. 비현실적인 절단을 요구하지 않았고 점진적으로 중국이라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려고 했으며, 이러한 전략은 유럽연합이 겨냥하는 목표와 쏙 닮아 있었으므로 동맹국에서의 반발도 줄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2024년 10월 23일 브루킹스 연구소에 돌아온 제이크 설 리번은 자랑스럽게 디리스킹 전략의 ‘성공’을 선포했다(Sullivan 2024).
[...] 현재 미국은 5개의 선진적인 메모리 칩 제조업체가 대규모로 운영
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2개 이상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데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지속적으로
길러내고 있으며, 차세대 AI 모델을 훈련하는 데에 필요한 물리적 인프
라가 바로 여기 미국에 구축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 이는
우리만 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파트너들과 함께 해낸 것입니다.
현재, 지정학적 라이벌 사이에서 기술 무역을 포함하여 무역이 전무했
던 냉전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실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정학적 맥락에 있
기 때문에 타협해야만 합니다. 즉, 국가 안보와 전략적 경쟁을 정의하 는 가장 민감한 기술만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입니다.
2. 중국의 대응
미국은, 적어도 바이든 정부는 디리스킹 전략에 대해서 고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미국의 디리스킹 전략 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시선을 반대로도 돌려 야 한다. 중국은 디리스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19년 부터 중국은 꾸준히 디커플링 전략을 ‘탈구단연(脱钩断链·관계를 끊 고 연결고리를 부수다)’ 혹은 ‘탈구(관계를 끊다)’로 치환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이 ‘탈구’를 언급한 것은 2024 년 3월 27일이다.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만난 그는 이렇게 발언한다 (国际在线 2024).
[...] 역사의 큰 물결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탈구단연’은 출구 없는
길이며, 개방하며 협조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중국의 외교부 부장 왕이 역시 ‘탈구’를 비슷하게 해석한다. 트럼 프 1기 행정부 시절인 2019년 3월 8일, 중국의 국가의사 결정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왕이에게 묻는다. 미국 과 중국 간의 무역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한 왕 이의 대답은 이러하다(新华网 2019).
중국과 미국이 ‘탈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탈구’하는 것은 기회와 ‘탈구’하는 것이고 미래와 ‘탈구’하는 것이며 모
종의 의미로는 세계와 ‘탈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협력은 중미관
계의 주류이며 양국 지도자의 공통적인 인식일 뿐만 아니라, 쌍방 각계
의 일관되고 일치된 의견입니다.
디커플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매우 알기 쉽다. ‘탈구’는 협력의 반대어다. 그리고 중국과 협력하지 않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고 세계의 흐름과 역행한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上观 2020). 디커플링의 한 계는 설리번이 연설에서 이미 인정도 했고, WTO의 조사 결과로 인 해 사실로 드러난 바도 있으니 이러한 중국의 인식이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
‘디리스킹’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떨까? 디커플링과 ‘탈구’는 비교 적 빠르게 번역이 됐다. 그러나 ‘디리스킹’을 부르는 말은 정말 다양 하다. ‘위험 최소(去风险)’, ‘중국 최소화(去中国化)’, ‘탈구(脱钩)’가 모두 디리스킹 전략을 부르는 데 쓰인 적 있다. 왜 디커플링과 다르 게 중국에서 디리스킹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말은 없을까? 그 이유 는 중국의 정책 인지에 있다. 중국이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이 다른 전 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2023년까지만 해도 디리스킹을 왕이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국의 ‘디커플링’ 개념에 대항하 기 위해 유럽에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인지하는 일이 잦았다. 2023 년 5월 중국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미국의 협박회교와 그 폐 해>를 보면 2023년 3월 설리번이 발표한 미국의 전략을 어떻게 받 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해당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협박외교(胁迫外交)’의 창시자로 오랫 동안 경제제재, 군사위협, 기술봉쇄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전세계의 발전을 저해한다(中国外交部 2023). 그와 비교하여 중국은 국가 크기 에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하며, 군사동맹을 강요하거나, 이념을 수출 하거나 무역전쟁을 도발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중국은 2023년 바이든 지도부가 발표한 ‘디리스킹’을 협박외 교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위험 최소화’라는 말이 더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24년 부터다. 2024년 2월 17일 왕이는 뮌헨안보회의에 출석해서 매우 간 단하고 명료하게 말한다(观察者网 2024).
‘위험 최소화’라는 명목으로 ‘중국 최소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역사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 ‘넥스트 차이나’는 여전히 중국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이루어진 미국 국무부 장관인 블링컨과 왕이의 대화에서는 중국이 보는 디리스킹과 디커플링 사이의 등치가 더욱 잘 드러난다.
‘위험 최소화’는 ‘중국 최소화’와 같고, ‘좁은 마당에 높은 담’을 세우는
것은 ‘중국에 대한 탈구’를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시도는 최종적으
로 미국이 스스로 ‘반서’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반서(反噬)’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반대로 깨물다’ 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음해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다. 미국이 스스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는 내러티브 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미국의 ‘탈구’ 정책에 가해졌던 비판이 동일하 게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2024년 4월 26일에는 중국이 정확히 미국의 ‘어떤’ 정책적 결정을 두고 ‘반서’를 일으킬 만한 행동이라고 판단하는지 알 수 있는 근거 가 나온다. 다시 한 번 블링컨과 만난 왕이는 이렇게 말한다(中国外 交部 2024).
미국 무역법 301조는 철회되어야 합니다. 중국 인민이 발전할 권리는
박탈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중국의 경제, 무역, 기술에 가
하는 압박은 끊임이 없습니다. 이는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포위하여 억
제하는 정책이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만드는 것입
니다.
사실 중국이 디리스킹과 디커플링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중국이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고, 중국이 무 엇을 말하지 않는지에서 나온다. ‘탈구’와 달리 ‘위험 최소화’ 정책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즉, 중국은 미국이 디리스킹과 디커플링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묵살하 고 있다. 바이든의 미국이 관세와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게 트럼프의 방식과는 다른데도 말이다.
[그림2] 미국의 광물 수입 중 중국의 비중 변화율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바이든 행정부는 점진적으로 중국의 반도 체 공급망을 압박해왔다. 여태껏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반도체 제조 장비는 수출할 수 있게 허락했으나 2024년 12월 23일 중국산 범용 반도체에 대한 불공정 무역행위에 착수하겠다고 밝히면서 더욱 포괄적인 규제를 시행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꾸준히 반발해왔다. 중국은 갈륨, 게르마늄, 안티 몬 등 대미 광물 수출 규제를 보복성으로 발표하곤 했다. (2023년 7 월 3일에도, 2024년 12월 3일에도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보복 제지는 미국 경제에 그렇게까지 막대한 영향 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갈륨은 보통 레이더, 위성, 전자레인 지, LED 등에 사용되는데 미국은 갈륨 웨이퍼의 조달에 있어서 원 래도 중국에게 그리 많이 의존하는 편이 아니었다. (수출 통제 이전 미국의 갈륨 웨이퍼 총 수입 중 4.8%만이 중국에서 수입되는 것이 었다.) 또한 이러한 중국의 원자재 수출 규제가 오히려 서방 국가들 이 더 많은 원자재 수입 경로를 탐색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는 분석 역시 존재한다(Hendrix 2024).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디리스킹 전략에 대한 대미 보복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중국이 디커플링과 디리스킹 사이의 차이점을 그다지 강조하거나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여 기서 찾을 수 있다. 디리스킹이 실제로 중국을 제약하는 데에 효과적 인 방안이기 때문에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아직 중국 에게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서’라는 말도 다시 들린다. 중국이 미국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3. 프레임워크의 변화
미국은 디리스킹 전략을 성공이라 평가한다. 유럽은 디리스킹 전략 에 동조한다. 중국은 디리스킹 전략이 그리 성공적이지 않길 바라지만 그것을 막을 뾰족한 수도 없다. 하지만 중국이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완전한 곤경에 빠진 것은 아니다.
중국은 자국과 외교 관계에 있는 나라에 ‘동반자 관계(伙伴关系)’ 라는 단어를 붙여서 형용한다. 이는 1960년대 중국이 스스로를 제3 세계의 일원으로 천명하면서 ‘비동맹원칙(不结盟原则)’을 따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동맹을 맺지 않는 대신 각기 다른 국가들과 각기 다른 영역의, 각기 다른 깊이를 가진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협의한 것이다(赵纪周 2010). 이름 국가 신시대전면전략협업동반자관계
러시아 (新时代全面战略协作伙伴关系)
전천후전략협조동반자관계
파키스탄(2005)
(全天候战略合作伙伴关系)
전천후전략동반자관계 에티오피아(2023), 베네수엘라 (全天候战略伙伴关系) (2023)
전천후전면전략동반자관계
벨라루스(2022), 헝가리(2024) (全天候全面战略合作伙伴关系)
신시대전천후전면전략동반자관계
우즈베키스탄(2024)
(新时代全天候全面战略合作伙伴关系)
베트남,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모잠비크, 콩고, 나미비 전면전략협조동반자관계
아, 짐바브웨, 기니, 케냐, 탄자 (全面战略合作伙伴关系)
니아, 몰디브, 앙골라, 이탈리아
(2024)
전략협조동반자관계 인도, 한국, 아프가니스탄, 스리 (战略合作伙伴关系) 랑카
독일, 벨기에(전방위우호협조동 전방위전략동반자관계
반자관계), 싱가폴(전방위고품질 (全方位战略伙伴关系)
전망성동반자관계)
인도네시아, 브라질, 오스트레일 전면전략동반자관계 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EU, 영 (全面战略伙伴关系) 국(21세기전지구전면전략동반자
관계)
전략동반자관계 아세안, AU, 캐나다, 아랍에미 (战略伙伴关系) 리트연합, 칠레, 카타르 등
[표2] 2024년 기준 중국의 ‘동반자 관계’ 나라 정리
[그림3] 2020년 기준 중국의 ‘동반자 관계’ 나라 정리 ‘동반자 관계’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전면’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경 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며, ‘전략’이 없이 ‘협조’라고만 써져 있는 경우에는 무역 이나 경제적으로 협력할 여지가 더 많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동반자 관계’에 붙여진 복잡하고 다양한 이름은 상대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赵纪周 2010).
중국 정부는 어떤 ‘동반자 관계’가 가장 견고한지에 대한 공식적인 등급을 설명한 적은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2014년부터 유지하고 있 는 ‘전면전략협업동반자관계’가 가장 높은 등급일 것이라고 추측되나 그것 역시 외교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 교부가 직접적으로 ‘강화된’ 동반자 관계에 있는 국가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라고 공식적으로 말한 수식어가 있다. 바로 ‘전천후’ 동반 자 관계다(中国外交部 2015).
‘전천후’란 이름이 알려주는 대로 어떤 날씨나 기후에도 상관 없다 는 뜻이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정세가 어떻게 바뀌고 어떤 변화가 닥쳐와도 관련 없이 전략적으로 협조하는 동반자 관계 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원래 ‘전천후전략동반자관계’는 파키스탄만 을 특별히 지칭하는 동반자 관계였다. 15년이 넘도록 파키스탄만 가 지고 있던 ‘전천후’ 동반자 관계는, 2022년 벨라루스를 기점으로 갑 자기 더 많은 국가와의 관계를 견고하게 다지는 데에 사용된다. 2022년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23년 에티오피아, 베네수엘라에 이어서 2024년 헝가리와 우즈베키스탄과의 ‘동반자 관계’를 ‘국제정세가 어 떻게 변하든 간에 관계 없는 견고한 전략적 파트너 관계’로 재정의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즉, 중국이 아주 이르게는 2022년, 아주 늦어도 2023년부터 세계 정세가 변했고 또 더 많이 급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2023년을 기점으로 유라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아울러 ‘전천후 동반자 관계’로 묘사되는 중국만의 네트워크를 구축 하려는 시도에서는 미국의 ‘디리스킹’ 공세에서 자신의 입지를 견고 하게 다지려는 의도가 보인다.
Ⅳ. 나가며
미국의 디리스킹은 중국이 뻗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특히 반도체 칩 과 같이 미래 세계 산업, 나아가 세계 정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핵심 산업에서 중국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트럼프가 집권해도 이러한 기조는 비슷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내각의 새로운 국무부장 마르코 루비오는 2024년 9월 9일 “중국이 만든 세상: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9년 후”라는 리포트에 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Rubio 2024).
중국 공산당은 세계 최대의 산업 기반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시장 왜곡 보조금, 전략적 계획을 통해 베이징은 이제 21세기 지정학
적 패권을 좌우할 많은 산업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나라를 재건하고, 중국의 도전을 극복하며, 다가올 세대를
위해 자유의 횃불을 계속 밝히기 위한 전 사회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루비오는 중국이 전기차, 에너지 발전(특히 태양광 발전), 고속 철도, 조선업에서는 목표치를 능가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레거시 반 도체 칩 생산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며 고평가하는 모습 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성장과 그를 경계한 시선이 트럼프 내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으로 탈바꿈할지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트럼 프 내각의 국무차관 앨브리지 콜비가 2021년에 쓴 “The Strategy of Denial”이다.
미국의 핵심 국익은 여타 국가가 세계의 주요 지역에 대한 패권을 형
성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에 있으며, 그 국익에 대한 주된 위협은 아시
아의 중국이다. [...] 아시아야말로 미국이 의지와 국력을 집중하고 차
별적 신뢰를 극대화하고자 할 곳이어야 한다.
이 책에서 콜비는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동맹 국가 간 전략적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Colby 2021). 즉, 현재까 지 미국의 기본적인 기조가 가치 동맹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 려는 쪽에 집중되어 있다면, 콜비의 생각은 좀 더 효과적인 세력 균 형 전략을 위해 포기할 국가에서는 발을 빼라는 진단이다.
미국 부통령 J.D. 밴스의 생각은 이보다도 더 파격적이다. 2024년 7월 17일 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한 그의 연설은 미국이라 는 나라에 대한 그의 정의를 잘 보여준다(Vance 2024).
이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 [...] 비록 이상과 원칙이 위대
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조국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조국입니다. 사람들
은 추상적인 것을 위해 싸우지 않지만, 그들의 집을 위해서는 싸울 것
입니다. [...] 우리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것을 기억해
야 하며, 미국 시민들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도자들을 가
질 자격이 있습니다.
밴스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아니라 “피와 땅” 으로 정의한다. 세대에 걸쳐 ‘미국’을 지킨 사람들이 진정한 미국인 이라는 그의 발상은 미국 우선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지킨다.
콜비와 밴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국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결정 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콜비의 미국은 전략적으로 몇몇 지역에서 후퇴를 할 뿐, 최종 목표는 여전히 패권국으로 남는 것이다. 중국을 새로운 패권으로 절대 떠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여전히 세계의 질서를 짜는 나라로 남기 위해서 ‘세력 균형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지역’의 중요성을 조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밴스의 미국은 다르다. 밴스의 미국은 강대한 미국, 미국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이다 (전재성 2025). 그의 미국 속에 ‘미국 외를 고려하는 세상’은 없다.
마르코 루비오가 인정하는 것처럼, 새로운 트럼프 내각에서도 중국 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그러나 이 라이벌을 얼마만큼 견제할 것 인가? 디리스킹은 중국을 완전히 고립시키진 않았지만, 중국이 더 성 장하도록 놔두지도 않았다. 그에 대비하듯 중국은 자신의 네트워크 역량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때 미국이 지향하는 바가 ‘패권국’인지, 아니면 ‘강대국’인지에 따라 미국의 행보는 달라진다. 미국은 과연 자신의 가치 동맹을 더욱 확대하고 중국을 견제할 것인 가?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네트워크 역량 이 커질 수 있는 여지를 용인할 것인가?
둘 다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미국 보호 주의를 강력하게 외치는 트럼프의 주장이 ‘공정한 필드’의 구축을 바 라는 유럽의 소망과 양립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기 때문이다. 트 럼프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 중국 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에 있는 국가들까지 제약을 가하려 한다면, 그게 어떤 식으로 미국의 대중 견 제 전략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디커플링 전략이 디리스킹을 낳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중국은 조심스럽고 간접적인 한 발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이 문제 를 미국과의 양자 담판으로 끝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가까운 타국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쌓는 것은 내수 불안정을 안 고 있는 중국이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미국 과 중국이 벌이는 접전을 조금 더 세계적인 관점으로 넓히려는 의도 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2019년과 확연히 다르다. 중국에게 남은 가 장 큰 과제는 역시 첨단 반도체 산업에서 어떻게 미국을 따라잡느냐 는 문제다. 미국이 이미 중국을 배제하는 큰 틀을 짠 상태에서 중국 이 자력으로만 경쟁력 있는 첨단 반도체 시장을 만들어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이 경쟁의 승자를 결정지을 것이다.
디리스킹이 효과적인 전략이었던 이유는 이미 미국이 상응할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동맹국들을 해치지 않고 도리어 동맹을 강화하 겠다는 명분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전천후 전략’ 역시 기술 독려가 얼마나 빠른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국이 동맹 국들과 함께 기술을 발전시키는 속도가 충분히 빠르고 미국이 자신 의 목표를 강대국으로 결정짓는다면 세계의 패권국은 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국이 충분히 빠르지 않다면, 이제 이 질문의 답은 제 3자들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되었을 때 얼마만 큼의 손실이 나고, 또 그것을 중국이 얼마만큼 상쇄시킬 수 있는가. 제3자들은 어떤 계산을 했고 또 어떤 결과를 도출해낼까.
이것이 바로 디리스킹이 지난 4년 간 만들어낸 새롭고 복합적인 세계 질서의 모습이다. 트럼프가 다시 돌아오지만 이미 게임의 규칙 은 바뀌었다. 2018년의 디커플링이 중국과의 단순한 단절을 의미하 고 주변 국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면, 2025년의 세계는 기술 패 권을 중심으로 한 다층적인 경쟁의 장을 열고 있다. 미국이 디리스킹 을 통해 동맹국들과 쌓아올린 기술 장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 이다. 중국 역시 나름대로 네트워크를 넓혀나가며 파훼법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심지어 미국이나 중국마저도 서로와의 완전한 단절이나 무조건적 인 협력을 시도할 수 없다.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속에 서 모든 국가는 자국 나름대로의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트럼프 의 복귀와 함께 시작될 새로운 4년은, 이러한 변화된 게임의 규칙 속에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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