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포르투갈 국제정치와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 형성을 바탕으로 데지마, 일본 26성인 기념관, 나고야성 박물관 이원주
설국 속에서 세계를 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성균관대학교 미래정책대학원 석사 재학
들어가며
2025년 1월 7일에서 1월 9일까지, 일본 규슈 지역 답사를 다녀왔 다. 일본의 과거에 대해 배우고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답사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연구 주제와 관 련된 장소들에 직접 방문한 것이었다. 필자의 답사보고서는 ‘16세기 포르투갈 국제정치’,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임진왜란’, ‘임진왜 란에 대한 관점’ 등을 키워드로 다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답사 장소 중 데지마, 일본 26성인 기념관, 나고야성 박물관 등의 많은 장소들 이 필자의 보고서와 관련이 있었다. 해당 장소들에 방문해 연구하고 찾아본 것들을 목도하며 생동감 넘치는 공부를 했다. 특히, 일본 26 성인 기념관에서는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답사 보고서의 주인 공인 루이스 프로이스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답사 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Ⅰ. 서론
1. 연구 배경 및 연구 문제
지난 학기 수강한 〈국제관계사연구〉 수업에서는 엔리케 두셀의 『1492년 타자의 은폐: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책을 공부했다. 해당 책은 유럽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의 만남을 조명하는데 그들의 만남은 평화롭지 못했고 엄청난 유혈사태와 폭력이 발생했다. 이러한 폭력의 예는 “잉카 제국의 타우안틴수요(현재의 페루)에서 저 항은 아스테카보다 훨씬 강렬하고 또 지속적이었다. 또 카하마르카에 서 아타우알파를 속인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럽인은 철저하게 배신 했다. 아타우알파의 동생 루미냐우이는 키토에서 용감하게 저항하다 고문을 받고 죽었다. 키스키스 장군은 스페인인들에게 연전연승했다. 칼리치마 장국은 산 채로 화형당했다.”와 같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두셀 2019, 182).
이것은 유럽인들이 자행한 폭력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 책에 서는 유럽인들이 벌인 만행을 폭로하며 근대성이 은폐한 다양한 폭 력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다. 근대사의 핵심에는 이렇듯 폭력과 지배가 있었는데 두셀은 유럽의 시각에 의해 이것이 은폐되 었다고 얘기한다. 두셀은 근대성이 타자를 희생시키는 폭력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황경상 2011). 이 책을 읽으 며 15세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만남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 고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생겼다.
이번 학기 사랑방 과정에 참여하며 일본과 관련된 답사 보고서 주 제를 선정해야 했다. <국제관계사> 연구 수업을 통해 형성된 관심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양과 일본의 만 남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만남은 전혀 평화 롭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유럽과 일본의 만남은 어떤 식으 로 진행되었을까?’와 같은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서 양과 일본의 만남을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는 1차 자료와 인물에 대 해 조사해봤다. 그리고 그 결과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에 대해 알 게 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극동에서 활약한 예수회 신부 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563년에 일본에 도착하였고, 1597년 나가 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에 대한 다양한 기록 을 남겼다(프로이스 2008, 14-15). 그의 기록들은 서양인의 눈에서 바 라본 전국시대 일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 치를 지닌다.
<그림 1>1) 일본 26성인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념비. 루이스 프로이스가 26성인 중 한 명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1597년 3월에 ‘26성인 순교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프로이스 2003, 17),
처형당한 26명은 프로이스의 보고를 받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장상인 2013). 이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일본 26성인
순교 기념비 옆에 프로이스의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있는 것이다.
하영선 교수님께서는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이 혼자 일본에 건 너가 활동한 것이 아니며, 16세기 포르투갈의 세계정치적 프레임 속 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모델스키에 의하면 포르투갈은 16세기의 world power였다. 포르투 갈은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그 수단으로 예수회를 활용했고, 예 수회의 일원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가게 된 것 1) 본 논문에 첨부된 그림 자료들은 필자가 사랑방 답사에 참가해 촬영한
사진들이다. 이다. 또한 교수님께서는 프로이스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우리의 관심에도 해당하는 임진왜란을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셨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자신 의 『일본사』 마지막 10장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프로이스 2008, 18).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 제정치적 맥락,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을 탐구하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연결해보는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었다.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한 당시의 조선·일본·명의 관점과 루이스 프로 이스의 관점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루이스 프 로이스는 조선·일본·명과 달리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 포교적 성격, 정치적 성격, 그리고 기술적 성격에 추가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해당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연구 문제는,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해 당시 조선·일본·명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 차이 는 왜 발생하는가?’이다.
2. 주장 및 연구 방법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이 루이스 프로이스의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러한 관점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다르게 표현하 자면,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 제정치적 맥락의 영향을 받은 반면, 조선·일본·명은 그러한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 차이가 발생했다 는 것이다.
연구는 제한된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방식 으로 진행했다.2) Ⅱ장에서는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을 조 명하고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을 살펴본다. 해당 장에서는 모델스키 의 Long Cycles in World Politics, Documenting Global Leadership과 같은 책을 주로 참고했다. Ⅲ장에서는 임진왜란의 성격 에 대한 조선·일본·명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을 살펴본다. 조선·일 본·명의 경우 다양한 2차 자료를 바탕으로 세 국가가 임진왜란의 성 격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조사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경우 『일본사』의 임진왜란 관련 부분을 번역 한 국내의 다양한 책들, 그리고 프로이스가 작성한 Tratado의 영역 본인 The First European Description of Japan, 1585를 참고했다. 해당 책들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관점을 살펴봤다. 그리 고 다양한 2차 자료를 바탕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생애에 대해 조 사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꿈·삶·앎·함을 조사해보는 해석학적 방법 을 통해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구체적 으로 살펴봤다.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과 관련된 루이스 프 로이스의 꿈·삶·앎·함을 탐구한 것이다. 해석학적 방법을 적용해 루이 스 프로이스가 머릿속에 그린 임진왜란이라는 그림은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2) 연구의 시작점을 잡는 데 있어서는 엔리케 두셀의 책과 〈국제관계사연
구〉 수업, 그리고 하영선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두셀의 책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 사례에도 관심이 생겼다. 하영선 교수님의 조언을 통해 해
당 만남에서 어떤 사건과 특징에 주목해야 되는지 파악할 수 있었고, 이
를 바탕으로 연구 문제를 떠올리고 연구 주제를 설정할 수 있었다. 3. 연구 목적
이 연구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세계화 차원에서 의 교훈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 항로 개척, 시장 확대 등은 ‘세계화’의 첫 단계에 이루어진 것 이다. 그리고 해당 시기에 일본과 포르투갈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런데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의 또 다른 국면에 서있다. 탈세계화가 되 느냐 재세계화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사례를 고찰해보며 세계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 갈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 어떤 요인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등의 교훈을 얻고 싶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해 종합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이 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명백히 일본이 잘못한 사건이다. 그런데 사료를 살펴보면 일본의 입장, 명나라의 입장은 꽤나 다른 것 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 다는 것을 파악하고 임진왜란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 을 기르고자 한다. 또한 본 연구는 단순히 동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임진왜란만을 살펴보지 않는다.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선교사의 눈을 빌려 서양인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살펴본다. 임진왜란에 대해 당시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관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며 임진 왜란의 여러 가지 성격을 이해하고 싶다.
세 번째는, 국제정치에서의 구조의 영향력을 확인해보는 것이다. 국제정치에는 Agency vs. Structure, 즉 구조와 행위자 문제가 존재 한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그리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 고받는지 등이 쟁점이 된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의 사례는 구조 가 행위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 례이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우연히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 것 이 아니며 16세기 포르투갈의 세계정치적 프레임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수단으로 예 수회를 활용했고, 그 예수회의 일원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맥락·구조·배경이 임진왜란에 대한 루이스 프 로이스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사례를 통해 Agency vs. Structure 문제를 다뤄보 고, 구조와 맥락의 영향력을 확인해보고 싶다.
4. 선행 연구 검토 및 선행 연구와의 차별성
선행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6세기 포르 투갈에 대한 연구, 포르투갈과 일본에 대한 연구,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우선, 16세기 포르투갈에 대한 연구로는 조지 모델 스키의 연구들이 있다. Long Cycles in World Politics를 통해 그의 장주기론과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 다. 더 나아가, 그가 실비아 모델스키와 함께 작성한 Documenting Global Leadership을 통해서는 16세기 포르투갈이 Global Leadership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세기 포르투갈이 세계질서를 어떻게 관리했는가를 보여주는 문서 들도 참고할 수 있었다.
다음은, 포르투갈과 일본에 대한 연구인데 세 가지 종류로 기존 연 구를 분류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포르투갈과 일본의 관계사에 초 점을 맞춘 연구다. 이 연구들은 포르투갈과 일본이 어떻게 처음 만나 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그 역사를 조명하는 연구들이다. 해당 연구들은 포르투갈과 일본 사 이에 진행되었던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자세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최영수는 그의 논문에서 포르투갈의 극동 진출 과정, 포 르투갈의 일본 발견과 양국 관계의 진전, 양국의 경제적·문화적 교류 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최영수 2005, 117-137). 홍성화는 그의 논문에 서 16-17세기 포르투갈의 중일무역을 다루며,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 에 어떤 경제적 교류가 있었는지 살펴본다(홍성화 2014, 12-22).
두 번째는,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에 있어서 예수회에 초점을 맞 추는 연구들이다.3) 이 연구들은 예수회의 활동이나 예수회의 전략 등에 주목한다. 장혜진은 그의 논문에서 예수회의 선교 원칙과 선교 활동, 그리고 동아시아 선교 활동에 있어서 예수회가 전략으로 사용 한 ‘적응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장혜진 2020, 109-130). 세 번째는, 당시 일본에 대해 서양인들이 지녔던 관점을 소개하는 연구 들이다. 이 연구들은 당시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에 참여했던 다양 한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행적과 그들이 남긴 글들을 소개한다. 강성우는 그의 논문에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꼬스메 데 또레스, 알 레산드로 발리냐노 등의 인물과 그들의 생각을 소개한다(강성우 2021, 182-185).4)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 3) 필자는 예수회에 대한 다양한 논문과 책을 참고했는데, 글마다 ‘기독교’,
‘그리스도교’, ‘크리스트교’, ‘가톨릭’ 등 선호하는 표현이 달랐다. 본 논
문에서는 이들 글을 인용할 때 최대한 원문에서 사용한 표현을 그대로
실었다.
4) 다만, 글의 가독성을 높이고 독자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인명과 지명은
최대한 통일해서 적었다. 여기 등장하는 ‘사비에르’ 신부의 경우, 그를
‘하비에르’, ‘샤비에르’ 등으로 표기한 글도 있었는데, 본 논문에서는 ‘사
비에르’로 통일해서 적었다. ‘말라카’라는 지명도 ‘말래카’로 표기한 글이
있었지만 인용 과정에서 ‘말라카’로 통일해서 적었다. 고 일본과 조선에 대한 프로이스의 관점을 소개하는 여러 권의 책들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도 많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 시 혹은 그 직후에 간행된 문헌을 통해 당시 조선·일본·명이 해당 전 쟁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소개하는 연구들이었다. 조선의 경우 류성룡 의 『난후잡록』·『징비록』,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중요한 역사 적 사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덴케이의 『서정일 기』, 슈쿠로의 『숙로고』, 명나라의 경우에는 제갈원성의 『양조평 양록』,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 등이 참고할만한 문헌으로 평가 된다. 이런 문헌들을 토대로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며 조선·일 본·명의 관점을 소개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당시의 서양 관점을 보여 주는 글로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가 있다. 『일본사』를 우 리나라 말로 번역한 다양한 책들을 통해 임진왜란에 대한 프로이스 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 연구들은, 포르투갈과 일본의 경제적·문화적 교류나 예수회의 활동 등에 주목은 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것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 에서 한계가 있다. 즉,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 치적 맥락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맥락과 배경하에서 포르투갈과 일본의 교류나 예수회의 활동을 살펴보는 논문은 없었는 데, 다시 말해 국제정치적인 논문이 부재했다. 또한, 임진왜란에 대한 동양의 관점, 서양의 관점에 대해 소개하는 연구는 존재했지만, 동서 양의 관점을 함께 소개하고 동서양의 관점에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 이 있는지 분석하는 연구는 부재했다.
본 연구는 포르투갈과 일본의 교류나 예수회의 활동을 그것 자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그 뒤에 배경으로 존재하는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구조를 함께 고려한다. 그러한 프레 임워크 속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기존에 연 구되었던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 경제적·문화적 교류, 예수회의 활 동 같은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들을 한데 엮어서 국제정치적 프 레임 속에 집어넣는다는 점에서 독창성이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한 당시의 동서양의 관점을 함께 살펴보고, 관점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을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구조 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도 차별성이 있다.
Ⅱ.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
1.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
모델스키는 그의 책과 논문을 통해 장주기 이론을 설명한다. 모델 스키는 세계정치가 반복되는 주기를 가진다고 얘기하는데, 그는 주기 마다 네 개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봤다. 첫 번째 단계는 global war 단계이다. 조직력이 약한, 거의 무정부상태와 비슷한 시기에 global war이 발발하는데 이러한 전쟁은 새로운 세계질서의 탄생을 불러온 다. 두 번째 단계는 world power 단계이다.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world power가 등장해, 세계를 관리 하고 운영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delegitimation 단계로, 이 단계에서는 세계를 운영하던 world power의 힘과 에너지가 상대적 으로 위축된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deconcentration 단계이다. 새로운 경쟁자들이 등장하여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되고 그 결과 첫 번째 단계에서 global war을 촉발했던 무질서의 상태로 점차 회귀하 게 된다. 모델스키는 이와 같은 주기가 국제정치에서 반복되어 나타 났다고 주장한다(Modelski 1978, 217; 1987, 30-31; 1988, 2-3).
모델스키는 그의 장주기 이론의 첫 번째 사례로 포르투갈에 주목 하며 16세기의 world power는 포르투갈이었다고 얘기한다. 15세기 말에는 베니스의 세력이 매우 강성했다. 당시 베니스는 알렉산드리아 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왕들은 베니스인들이 무역 독점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누리는 시스템을 엎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에서 여러 전쟁이 터졌고 그 결과 베니스의 권 력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 기회를 틈타 포르투갈은 새로운 world power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Modelski 1978, 218-219). 사 실 당시 포르투갈보다 스페인이 오히려 더 강력했다고 보며 16세기 를 스페인의 시기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모델스키가 포 르투갈을 World Power라고 평가한 이유는, 당시 포르투갈이 oceanic supremacy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은 육지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아메리카로 넘어가 영토 정복을 하며 식 민지화에 집중했고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반면 포르투갈은 바다의 지배자였다. 동양과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고 이를 통해 글로벌한 시 스템을 건설해냈다. 모델스키는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달리 해양에 초 점을 맞추고 강력한 해양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16세기 의 World Power로 평가했던 것이다(Modelski 1978, 217; 1987, 41; 1988, 37-38).
포르투갈은 16세기의 World Power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global leadership을 행사하고 과시했다. 첫 번째로, 그들은 계속해서 discovery에 나섰다. 그런데 이 discovery는 territorial conquest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의 영토를 확실히 구분하 기 위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의 다른 이름은 ‘Agreement for the Division of the Ocean Sea’였다. 조약의 이름을 통해 포르투갈이 육지가 아닌 해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포르투갈의 마누엘 왕은 ‘Lord of Guinea and of the Conquest, the Navigation and Commerce of Ethiopia, Arabia, Persia and India’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무역과 해양 통 제권 확립을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포르투갈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discovery 활동을 계속했던 것이다(Modelski 1988, 38-40).
두 번째로, 그들은 베니스에 의해 유지되어 온 시스템을 대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베니스는 포르투갈 이전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국가였고 베니스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며 수 익을 얻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항로를 개척해 베니스가 누리고 있었던 독점을 타파했고 새로운 글로벌 무역 체계 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Modelski 1988, 40).
세 번째로, 그들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 계를 지배하고자 했던 포르투갈은 단순히 그런 열망을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에도 나섰다. 당시 포르투갈의 마누엘 왕 은 인도로 가는 항로에 40여 척의 배를 보냈고 선박 건설 프로그램 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포르투갈은 함대·요새·무역 거점·동맹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Modelski 1988, 40-41). 2. 포르투갈과 일본의 만남
이렇듯 포르투갈은 16세기의 World Power였고 그들이 가진 리더 십을 전 세계를 향해 발산했다. 포르투갈은 해양을 탐험하기 위해, 새로운 글로벌 무역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글로벌 네 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세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과 만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포르투갈의 상인들 그리고 예수회 신부들이 일본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우선, 상인들이 먼저 일본으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서쪽 연안으로 탐험 대를 보내 조사하여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이후 그들은 1510년 인도 서쪽 연안에 있는 고아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동아시아 해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동아시아 해역 진출을 통해 국토가 협소하고 자원이 부족했던 포르투갈은 발전하게 되었고, 그만 큼 동아시아 해역은 포르투갈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장혜진 2020, 112).
포르투갈인들은 1543년에 일본을 발견하는데,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서 중국 해안에서보다 훨씬 이익이 많이 나는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최영수 2005, 127). 1550년대 포르투갈 상선들은 일본 규슈 지역을 정기적으로 내항하며 해당 지역을 기반 으로 동남 아시아산 향료나 유럽산 모직물을 중국산 견직물이나 생 사, 도자기 등과 교역하였다(홍성화 2014, 5).
<그림 2> 밤에 바라본 데지마의 거리 풍경. 나가사키 항이 개항된 이후 나가사키는 남만무역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발전했고 크리스트교 신자 수도
증가했다. 에도 막부는 그리스도교 포교활동을 저지하고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을 한군데 수용 및 무역을 엄격하게 감시할 목적으로
인공섬 데지마를 만든다. 그런데 1639년에 포르투갈 배의 도항을 전면 금지하는 쇄국령이 내려지면서 데지마 거주의 포르투갈인은 모두 국외로 추방된다. 이후 막부는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데지마로
이전토록 했고, 데지마는 네덜란드인들의 상업 기지로 발전한다(공미희
2018, 141).
이 시기 포르투갈은 명나라에도 진출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고 그 결과 1554년에 마카오에서 교역을 허가 받게 된다. 또한 1557년 에는 마카오 거주에 관한 명정부의 허가도 받아낸다(홍성화 2014, 5). 포르투갈 상인들은 카자도라고 불리며 마카오를 거점으로 동아시아 각 항구에 정주하고, 상호 교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동아 시아 교역에 참여했다(장혜진 2020, 113). 이들은 말라카-마카오-나가 사키라는 루트를 정기적으로 항해하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며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홍성화 2014, 5). 일본에 중국의 비단 을 팔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일본의 은을 구입해서 되파는 사업을 주로 했고, 일본과 중국 양측이 필요한 부분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맡 았다(최영수 2005, 127-128). 그 결과 포르투갈인들은 유럽에서 일본 규슈 지역까지 그들의 무역권을 확대할 수 있었다(장혜진 2020, 116).
다음으로, 선교사들도 일본으로 넘어갔다. 1547년에 세 명의 일본 인 범법자들이 말라카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란시스코 사비 에르와 만났고, 이들은 함께 고아로 떠났다(최영수 2005, 128). 사비에 르 신부는 가고시마 출신의 해적 안지로에게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 었고, 그에게 세례를 주며 포르투갈어를 가르쳤다. 안지로와의 만남 을 통해 일본의 복음화를 준비했던 사비에르는 1549년 일본으로 넘 어가 최초로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는 2년 2개월 동안 일본 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했다(홍성화 2014, 8). 초창기에 일본 규슈 해 안만을 왕래하던 포르투갈인들은 1549년 사비에르 신부의 도착과 더 불어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양국의 관계는 더욱 더 활발해졌다(최 영수 2005, 132). 사비에르를 비롯해서 가스파르 빌레라, 루이스 프로 이스 등과 같은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향했고 일본 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했다.
이 시기 예수회는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경제와 무역에 있어서도 중요한 행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남만무역(포르투 갈 무역)을 활용했고, 남만무역에 참여하는 유럽의 상인들도 예수회 의 중개 내지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무역 활동과 종교적 선교는 따 로 구별되거나 독립적일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장혜진 2020, 110). 포르투갈인들은 이익의 추구와 육체적 고행과 멸 시를 극복한 영혼의 구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일본에서의 활동을 이어나갔다(최영수 2005, 134).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극동에서 활약한 예수회 신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로서 1563년 일본에 도착 한 이래, 잠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추방당한 적은 있었지만, 1597년 65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줄곧 일본에 머물렀다. 프로이 스는 일본에서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몸소 경험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과정을 직접 지켜본 극소수 의 이방인 중 한 명이었다(프로이스 2008, 14-15).
프로이스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다양한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 는 1582년부터 일본 부관구에 속한 신부로서 로마나 유럽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보내는 예수회 일본 연례 서간문의 집필을 담당했다(프로 이스 2008, 15). 프로이스는 Tratado라는 책도 남겼다. 해당 책은 서 양의 문화와 일본의 문화를 대조해서 기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 다. 프로이스는 이 책에서 서양과 일본이 양육·종교·식문화·무기·건축 등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예수회 일본 순찰사로 파견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신부의 지시를 받아 일본 포교사를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바로 『일 본사』이다(프로이스 2017, 5-6). 프로이스는 『일본사』를 통해 세계 속의 일본이란 무대에서 예수회 신부들의 활약을 기술했고, 일본의 사회적·정치적·지리적 특성들을 다수 기술하고 있다(프로이스, 1999, 11). 『일본사』는 16세기에 작성된 저서들 중 일본 포교사업에 대한 가장 충실하고 완벽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프로이스, 2008, 198).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마지막 10장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 록이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내용은 1594년 초까지만 기술되어 있지 만, 해당 내용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의도와 준비 과정, 전 쟁 발발 전 일본의 정세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프로이스 2008, 197-198). 또한 10장에는 조선의 지형·기후·관습·복장·전통에 대한 묘 사도 등장한다(프로이스 1999, 12). 16세기 포르투갈은 world power 였으며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활용했다. 그리고 예수회 소속 인물 중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선교사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제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여러 측면에서 루이스 프로이 스라는 인물은 매우 중요한 행위자이며 그가 남긴 기록은 중요한 가 치를 지니고 있다.
Ⅲ.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한 관점
해당 장에서는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한 조선·일본·명의 입장, 루이 스 프로이스의 입장 등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필자의 원래 목표 는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조선·일본·명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입장 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바꿔 임진왜란의 ‘성격’ 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글에서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사』에서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며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을 전달하 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간을 읽는 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해 낸 것이지, 프로이스가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많 은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격’이라고 했을 때 그 속에 원인도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일 본·명과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의 여러 측면에 대해 방대한 기 록을 남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한 입 장만 파악하는 것은 좁은 시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의 원인을 포함해서 임진왜란의 성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해당 장에서는 임진왜란의 성격에 대한 조선·일본·명의 입장을 살 펴본다. 그리고 그 입장은 임진왜란 당시 혹은 그 직후의 글들을 참 고해 발견하고자 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전쟁 이후부터 오늘날까 지 다양한 연구가 국가마다 있어 왔지만,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 과의 비교를 위해서는 당대의 글과 주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 각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와 동시대인이면서 임진왜란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인물들의 기록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최대한 다른 나라의 기록에 영향을 받지 않은, 그 나라의 날것의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기록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 3> 일본의 임진왜란 출정지였던 나고야 성터에서 바라본 바다. 답사보고서를 작성하며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 차이와 그 차이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나고야 성터를 방문해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모였을까?’, ‘일본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바다 건너를
바라봤을까?‘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1. 조선·일본·명의 관점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 차이 (1) 조선·일본·명의 관점
조선의 경우, 류성룡의 저서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류성룡 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영의정·도체찰사 등을 역임하며 전란의 한복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장준호 2020, 13). 그렇 기 때문에 그가 작성한 『난후잡록』·『징비록』과 같은 사료들은 임 진왜란에 대한 당대의 조선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징비록』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지만 당파성의 영향으로 공정하지 않은 기록으로 평가받는 『선조실록』을 보완할 수 있는 사료이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원인을 구명하 고, 전란의 전개 과정에 따라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등을 중심으로 찬술한 기록이다. 『징비록』은 실제로 『선조실록』의 수 정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고 조선 후기 각종 문헌에 많은 영향을 주는 등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장준호 2020, 14-15).
『난후잡록』은 『징비록』의 초고로 평가받는 책이다. 『난후잡 록』에서는 임진왜란의 주요 원인으로 명종 대 권신으로 인한 정치 문란, 을묘왜변 당시 드러난 군정 문란, 선조 대에 시작된 당쟁을 꼽 고 있다(정해은 2021, 188). 『징비록』에서는 일본으로 보낸 통신사가 가지 못한 채 되돌아 온 이후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은 100여 년 동 안에 일본 동향을 도외시한 데서부터 전쟁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정해은 2021, 189). 류성룡은 우리가 일본과 선린우호를 맺어온 지 20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신숙주의 임종 시 성종과의 일화를 소 개한다. 그러면서 신숙주가 임종 시에 성종에게 일본과 실화하지 말 것을 유언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懲毖錄』 권1: 장준호 2020, 66에서 재인용). 이것은 일본과 실화한 것이 일본의 침략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임을 지적한 것이다(장준호 2020, 66).
또 함께 볼만한 문헌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이수광은 임진 왜란 당시 전선과 조정의 중심에서 모두 활동하며 다양한 임무를 수 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가 남긴 저작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있어 서 큰 가치를 지닌다. 그는 『지봉유설』에서 전쟁을 회고하며 여러 논설과 현실 대책을 남기고 있다(김경태 2018, 77). 이수광은 전쟁이 시 작된 원인을 오로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욕구’에서 찾았다(김경 태 2018, 85). 그러면서도 그는 전쟁 이후 취해야 할 대책을 제시하는 데, 군량과 군사 확보책, 군사제도의 운용, 논공행상 등의 분야에서 개 혁안을 제시하고 있다(『芝峯類說』: 김경태 2019, 93-105에서 재인용).
다음은 일본의 관점이다. 덴케이의 『서정일기』가 참고할만한 사 료이다. 덴케이는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종군승이었고, 그는 조선에 대한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서정일기』는 덴케이의 진중 일기이다(현병주 2016, 17). 『서정일기』에는 “신이 여기 와서 우리 군대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강화를 위함입니다. ⋯ 이에 앞서 여러 차례 귀국에 사신으로 와서 전쟁의 승패에 대해 아뢰었으나 귀국이 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패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전하는 귀국의 길을 빌려 대명국에 원한을 갚고 자 합니다. 지난 해 귀국의 통신사에게 이를 상세히 고하였고 신 또 한 이러한 내용으로 조정에 편지를 보내었으나, 귀국의 번신들은 국 경을 굳게 지킬 뿐 우리가 길을 지나도록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 기까지 들었습니다. 이에 우리 군은 이를 격파하고 상주에 이르러 조 정에 서한을 보내었으니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西征日記』: 김시덕 2012, 93에서 재인용). 해당 기록을 통해 일 본이 전쟁의 책임을 조선에 돌리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숙로고』 역시 참고할만한 사료이다. 『숙로고』는 모리 데루모 토의 종군승 슈쿠로가 남긴 글이다.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정당성과 민간인 학살의 당위성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우리 군은 개선해 군영으로 돌아와서 베어온 귀를 요시카와 경의 앞에 늘어놓았다. 경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라도 남겨두면 다친 호랑이를 남겨두는 꼴이다. 노약자, 부녀자를 가리지 말고 한꺼번에 죽여야 한다.”와 같은 구절을 통해, 무차별 학살에 대 한 슈쿠로의 지지를 엿볼 수 있다(신성민 2022).
마지막은 명의 관점이다. 제갈원성의 『양조평양록』이 살펴볼만한 사료 중 하나이다. 이것은 임진왜란 직후에 중국의 입장에서 집필한 임진왜란 통사이다(현병주 2016, 18). 『양조평양록』에서는 문란하고 무능한 조선의 정치와 조선 국왕 선조의 음란함, 류성룡·이덕형 등 간신의 발호로 조선이 일본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조 선을 구해준 것이라는 주장이 되풀이된다. 이런 식으로 조선의 무능 력함과 책임을 강조하는 주장은 이후 중국의 『무비지』·『명사기사 본말』, 일본의 『조선정벌기』 등에 영향을 줬다(김시덕 2012, 166-167).
다음은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이다. 송응창은 1592년 임진왜 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이듬해까지 명군을 총지휘한 경략으로, 전투에 임한 제독 이여송에게 물자를 지원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경략복 국요편』에는 중국 시각에서 본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 일본의 조공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명 조정 비판에 대한 해명 등이 담겨있다. 송 응창은 왜가 조선을 차지하면 중국을 침범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 면서 “아군이 조선을 구제하는 것은 사실 중국을 보호하기 위함”이 라고 주장했다(박상현 2021).
임진왜란에 대한 당시의 조선·일본·명의 관점은 이렇듯 많은 편차 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본의 국내정치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 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일본·명의 여러 기록들은 임진왜란이 발생 한 이유를 고찰함에 있어서 일본 측의 국내정치적 사정을 충분히 살 피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순전히 일본 탓이라고 보는 입장의 글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욕심과 공명심에 주목하고 있을 뿐, 일본의 정치적 사정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 측의 문헌들에서는 조선의 책임을 내세우는 연구가 많 아 일본의 국내정치에 대한 서술이 배제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임 진왜란의 성격을 진단할 때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일본·명의 여러 기록들은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자기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보며 개선할 점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일 본·명 세 나라에만, 동아시아 내부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세 국가는 모두 임진왜란을 조선·일본·명이 관여된 동아시아 전쟁이라고 바라봤 고 ‘동아시아’라는 맥락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2)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은 앞서 살펴본 조선·일본·명의 관점과 공 통점을 갖는다. 루이스 프로이스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에 주목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관백(히데요시)은 자신의 명성을 과시하 고 기념하기에 도움이 되는 대사업을 일으킬 기회를 놓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혹은 “관백은 영예와 명성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 에”와 같은 『일본사』의 구절들을 통해(프로이스 2003, 151; 2003, 166), 프로이스가 히데요시의 야욕과 공명심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조선·일본·명의 관점과 루이스 프로이스 관점의 차이이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바라보는 임진왜란의 성격은 조선·일본· 명이 바라보는 임진왜란의 성격과 달랐는데, 프로이스는 조선·일본·명 과 달리 네 가지 측면에 추가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임 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를 넘어선, 일종의 국제전쟁으로 바라봤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의 포 교적 성격이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통해 예수회의 세력 확장과 기독교 전파를 어느 정도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임진왜 란의 정치적 성격이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서 특히 일본의 국내정치적 요인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임진왜란의 기술적 성격이다. 프로이스는 해양 기술과 화 약무기 기술이 임진왜란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은 조선·일본·명의 관점이 가지는 한계를 극 복하고 있다. 조선·일본·명의 관점은 공통적으로 일본의 국내정치에 대한 언급이 부족했는데,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 하며 일본의 국내정치를 중요하게 살피고 있다. 또한 조선·일본·명은 임진왜란을 동아시아라는 맥락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는데, 프로이스 는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과 포교적 성격, 그리고 기술적 성격에 주 목하고 있다. 해당 특징들에 주목하며 프로이스는 더 넓은 시각으로 임진왜란을 바라본다. 이렇듯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동양 삼국의 관점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있으며 그것을 보완할 수 있 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을 연구할 때 당시의 동양 삼국의 관점과 더불어 루이스 프로이스의 연구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이 어떻게 형 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관점은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구조·배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임 진왜란의 국제적·포교적·정치적·기술적 성격에 주목할 수 있었다. 반 면, 조선·일본·명은 그러한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 왜란의 국제적·포교적·정치적·기술적 성격에 주목하지 못했다.
2. 루이스 프로이스 관점의 형성 요인 (1)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에 주목했다. 임진왜란 을 동아시아를 넘어선 일종의 국제전쟁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사』에서 인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1590년 6월 인도 부왕의 사절이 히데요 시를 접견하는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 은 예수회 소속 신부인 알렉산드로 발리냐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로 일본 나가사키에 왔다는 것이다(프로이스 2017, 370-371). 또한 프로 이스는 『일본사』에서 여러 차례 히데요시의 편지를 인용한다. 프로 이스는 히데요시가 인도 부왕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또한 저는 반드 시 중국 왕국을 정복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나 라로 건너갈 것이고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정복 야욕을 내비치는 부분에 주목한다(프로이스 2017, 405).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카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세계를 나누어 가진 세 나라, 곧 일본·중국·인도 가운데에서 나에게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과 같이 얘기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프로이스 2003, 221). 이렇듯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의 임진왜란 관련 장에서 인도 사절 얘기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인도 와 관련된 히데요시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단순히 동 아시아만의 전쟁이 아닌, 인도 역시 관여된 전쟁으로 본 것이다. 임진왜란을 동아시아를 넘어선 일종의 국제전쟁으로 바라보는 관 점은 『일본사』에서 천주교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의 전개에 대해 서술하며 “관백 전하의 명 령을 받아서 히고노쿠니의 반을 다스리던 영주인 아고스띠뇨 쓰노카 미 도노, 곧 고니시 유키나가는 곧바로 원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 의 휘하에는 규슈 지방의 모든 천주교도 무장들이 배치되었다. 그 한 사람은 쁘로따지오 아리마 하루노부 영주로, 그는 수많은 고귀한 귀 족 중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타고난 주도면밀함과 과감한 행동으로 전투를 위한 각종 무기와 탄약을 가장 잘 갖추었는데, 그 점에서 이 채를 발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었다.”와 같은 기록을 남 긴다(프로이스 2003, 189-190). 또한, “사제가 머물던 지방의 천주교도 들은 가능하면 사제에게 고해를 하고, 성체를 받고서 이번 원정을 위 해서 최선의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천주교 신자 전원이 아고스띠뇨 휘하에 모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이며, 아고 스띠뇨의 간청에 답하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으로 특파되었던 것이다.”와 같은 기록도 남기고 있다(프로이스 2003, 191; 2003, 245). 프로이스는 임진왜란 관련 장에서 계속해서 천주교에 대 해 언급하며 임진왜란에서의 천주교도들의 활약과 사제의 역할에 주 목한다. 그는 임진왜란을 단순히 동아시아만의 전쟁이 아닌, 예수회 를 비롯한 서구의 천주교 세력이 관여된 전쟁으로 본 것이다. 정리하 자면 프로이스는 동양 삼국과 비교해봤을 때, 임진왜란을 조금 더 넓 은 차원의 전쟁으로 바라봤다.
임진왜란을 일종의 국제전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될 수 있었 던 이유는 프로이스의 어린 시절 경험, 그가 받은 교육과 참여한 활 동,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프로이스의 어린 시절 경험이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 다. 포르투갈은 당시 글로벌한 시야를 가진 국가였다. 앞에서도 확인 했듯이 16세기의 World Power였던 포르투갈은 당시 어떤 나라보다 도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국가였다. 그런데 프로이스는 포르투갈 왕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1532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태 어난 프로이스는 귀족 출신이었고, 1541년 9살의 나이로 포르투갈 왕실 비서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프로이스 2003, 13). 왕실에서 일하 며 프로이스는 포르투갈의 글로벌한 시야를 배우고 획득할 수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프로이스가 받은 교육과 그가 참여한 활동이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프로이스가 예수회에 입회할 당시, 포 르투갈은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미 인도까지 진출한 상황이었 다. 인도에 진출한 포르투갈의 목적은 앞서 Ⅱ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글로벌 네트워크의 형성과 글로벌 무역 체계의 형성이었다. 포르투갈 은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고자 했으며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자 했 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왕 요한 3세는 인도에 선교사들을 파견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도 인도 고아로 파견되었다(박영호 2003). 그는 인도 고아로 넘어가 세인트 폴 대학을 다니며 선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과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는 고아 관 구장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프로이스 2003, 13). 프로이스는 또한 인도의 여러 지역과 말라카 등을 방문하면서 식견을 넓혀 나갔다(프 로이스 2008, 184-185). 포르투갈의 선교사 정책에 따라 인도로 넘어 가고, 또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여행하게 되면서, 프로이스는 더 폭 넓은 시야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해 서술할 때 인도에 대한 얘기를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등, 해당 전쟁을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로이스에게 영향을 준 인물과 자료를 살펴봐야 한 다. 여러 인물과 다양한 자료의 영향을 받아 해당 관점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프로이스는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사비에르는 프로이스보다 인도로 먼저 넘어가고, 또 일본에 최초 로 선교를 떠났던 인물이다(홍성화 2014, 8). 프로이스는 글로벌하게 활동했던 사비에르 신부의 제자였기 때문에(김학준 2009, 269), 그의 폭넓은 시각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프로이스는 상인들과 기 독교도인들,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얻었다(프로 이스 1999, 11). 그는 일본 부관구장 가스파르 코엘류를 따라 1586년 포교활동이 이뤄지고 있던 일본의 모든 지역을 여행해 그곳에서 만 난 신부와 수사와 가톨릭교도들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은 것이 『일본사』 집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얘기한다(프로이스 2008, 196). 그는 또한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쓴 편지 덕분에 한반도 정세에도 밝았다(박영자 2016). 포르투갈은 글로벌한 네트워크와 무역 체계를 형성하게 위해 예수회 선교사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 사비에르 신부였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런 인물에게 배우며 글로벌한 시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세계 각 지에 있는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며, 더 넓은 시각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임진왜란을 단순히 한반도 의 문제, 동아시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2) 임진왜란의 ‘포교적’ 성격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이 포교적 성격을 가진다고 봤다. 프로 이스는 임진왜란을 통해 예수회의 세력 확장과 기독교 전파를 어느 정도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사』에서 임진 왜란 얘기를 하며 천주교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 내용은 바로 위의 항목에서 살펴봤다. 프로 이스는 임진왜란에서의 천주교도들의 활약, 사제의 역할 등에 주목하 며 임진왜란을 천주교 세력이 관여된 전쟁으로 바라본다. 임진왜란의 전개를 서술하며 천주교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천주교에 대한 긍정 적인 가치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로이스가 임진왜란을 천주 교와 관련된 전쟁이라고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로이 스는 조선에서 보내온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두 번째 편 지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저는 그날 밤 그의 조카 및 다른 30 명의 고위 무사들에게, 그리고 다음날에는 다시 10명에게 세례를 주 었습니다. 이들이 보여 준 환희하는 모습과 기도문을 일본어로 번역 하여 열심히 외우는 모습에서 적잖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천주교도의 휘장이 되는 물건을 저에게 요구해 왔으므로 모두 에게 로사리오를 주었더니 매우 위안을 느끼는 듯했습니다.”와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프로이스 2003, 256).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포 교 얘기는 아니지만, 해당 구절을 통해 예수회가 전쟁에 참여한 일본 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세례를 주고 포교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스를 비롯한 예수회는 임진왜란을 포교의 수단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종의 포교의 기회로 생각하는 관점은 프란시스코 빠 시오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사』를 번역한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책에는 부록으로 프란시스코 빠시오가 작 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려 있다(프로 이스 2003, 329-353). 해당 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종 관련 정 황을 담은 글이다. 프로이스는 1597년에 병사했기 때문에 히데요시 의 임종에 대해 기록할 수 없었고, 프로이스 사후 일본의 사정에 대 한 이해를 돕고자 위의 책에 해당 글이 부록으로 실린 것이다. ‘도요 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은 프로이스가 작성한 글은 아니지만, 프로이스와 동시대에 그리고 같은 공간인 일본에서 활동했 던 예수회 소속의 신부 빠시오가 작성한 글이다. 프로이스와 빠시오 는 둘 다 예수회 소속으로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공유했을 것이고, 같은 시간대와 장소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더 많은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빠시오의 글은 참고할만하다.
해당 글에서 빠시오는 “이리하여 전후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 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 (일본인) 천주교도 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영지는 천주교회에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하면서 히데요시에 의해 다른 영주들의 손에 넘어 갔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은 포교 상의 성과, 또한 이렇듯 수많은 영주와 고귀한 사람들 사이에 놀랄 정도로 전파되었 던 이 새로운 포도원에서 별다른 장애에 부딪히지 않고서 순조롭게 수확이 가능했던 것, 더욱이 이 시기에 저희가 매우 존경하옵는 사교 님을 무사히 일본에서 맞이하게 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얘기한다(프로이스 2003, 351). 그는 천주교도들의 전쟁 참전 사실과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교 성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빠시오 의 글을 통해 우리는 당시 프로이스를 포함한 예수회가, 임진왜란을 포교의 수단으로 바라봤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종의 포교의 기회로 생각하는 관점이 형성될 수 있 었던 이유는 예수회의 영향과 프로이스에게 주어진 임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예수회가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예수회를 전 세계로 파견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 기 위해 예수회의 선교를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예수회가 아시아 로 넘어간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영혼을 구제해주는 선교에 있었다(최 영수 2005, 134). 구체적으로 예수회는 일본에서 여러 가지 선교 원칙 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선교에 나섰는데 일본 문화와 일본인에 대한 긍정적 수용,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내항을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이용, 봉건영주의 선교 허가를 통해 신하와 영민에 대한 선교의 자유 확보, 기회를 활용하여 수도인 교토 선교에 착수가 그 원칙들이다(장 혜진 2020, 121). 또한 예수회는 일본 풍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전향 하여 일본 위정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사회에 반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 일본에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고 노력했다. 그 리스도교가 일본 사회에서 제도 종교로 진입할 수 있게 노력했던 것 이다(장혜진 2019, 60). 루이스 프로이스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 수회 소속의 신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일본으로 넘어간 목적 역 시, 천주교의 전파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예수회가 선 교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일본·명이 모두 참여한 전쟁이다. 예수회의 목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였기에,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 란 역시도 중국과 조선 등을 포섭하기 위한 기회, 네트워크 형성의 기회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프로이스에게 주어진 임무가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예수회 를 활용하며 세계 각지로 신부들을 파견했다. 그런데 예수회는 제대 로 된 포교를 하기 위해 신부들이 따를만한 지침 같은 것이 필요했 을 것이다. 훗날 포교 활동에 나설 신부들을 위해 앞서 활동했던 신 부들의 포교 활동과 전략 등을 담은, 참고할만한 자료가 필요했을 것 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작성하는 임무가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내려졌다. 조반니 피에트로 마페이 신부는 포르투갈령 동인도에서의 예수회 포교활동에 대한 글을 쓰려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프 로이스가 작성한 예수회 연례서간문을 읽고 프로이스의 문장가로서 의 재능을 알게 된다. 그는 예수회 총장인 에베라르도 메르쿠리아노 에게 서신을 보내 프로이스에게 일본 예수회 신부들의 포교활동과 발전사는 물론 일본에 대한 정보, 포교활동에 장애가 된 내전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게 할 것을 제안했다. 메르쿠리아노 총장 사후 후계자인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 신부는 이 제안을 수용 했고 이후 발리냐노에게 서신을 보내 이를 지시했다. 발리냐노는 1584년 4월 일본 예수회 부관구장인 가스파르 코엘류에게 서신을 보 내 프로이스에게 『일본사』 집필을 의뢰하도록 함으로써 프로이스 는 『일본사』 집필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프로이스 2008, 188-189).
실제로 프로이스가 『일본사』에서 애초에 다루고자 했던 것은 일 본에서의 반세기에 걸친 천주교 포교와 발전의 역사였다(프로이스 2003, 11). 프로이스는 『일본사』의 서문에서 집필 이유를 “가톨릭 포교를 위해 노력하는 신부와 형제들에게 과거 선행자들의 업적을 알게 함으로써 이들을 고무시키고, 『일본사』가 유럽에서 출판돼 아 주 먼 지역에서도 가톨릭 포교와 발전사를 알리려는 예수회 총장님 의 바람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밝히고 있다(프로이스 2008, 195). 루이스 프로이스는 예수회로부터 포교활동에 대해 정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 스스로도 그러한 임무를 잘 수행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자신의 활동, 임진왜란과 관련된 정황을 관찰하는 자신의 행동이 모두 포교와 관련되어 있다 고 인지했을 것이다. 그 결과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일종의 포교적 성격을 가지는 전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포교활동을 기록한 책 에 임진왜란 얘기가 많은 장에 걸쳐 적혀 있다는 사실은, 프로이스가 해당 전쟁을 포교의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임진왜란의 ‘정치적’ 성격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가지는 전쟁 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사』에서 그가 일본의 국내정 치적 요인들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사』 에는 “그런데 그(히데요시)는 일본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변하기 쉽 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또 제후는 싸움이나 모반에 의해 자신이 일 단 결정한 것을 바꾸지 않고서는 자국을 안전하게, 그리고 자신을 가 지고 지배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알았기 때문 에, 제국의 영주를 농락하고 복종시킨 뒤에는 그 절묘한 수완과 배려 에 의해 그들을 중국 정복이라는 계획에 몰아세우고자 결심했다.”, “일본의 무장들은 관백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따랐기 때 문에”와 같이 히데요시와 일본 무장들의 속마음을 서술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프로이스 2003, 165; 2003, 167).
또한 『일본사』에는 “관백은 그들 모두의 내심을 실로 잘 간파하 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호의와 관대함을 보이는 한편, 이따금 방 황하는 늑대처럼 끔찍하게 울부짖으며 무서운 협박의 말을 내뱉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는 감히 자신의 결정에 반하는 것과 같은 무 모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바로 사려 없는 까닭으 로 사멸시키고 영토는 파괴하도록 하라.”고 말하여 모두를 더 없는 공포감으로 제압하였다.”, “나는 일본 왕국, 곧 천하의 군주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재보·번영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것 들을 포기하고서 세계에서 유례없는 명예롭고 경탄할 만한 계획을 나의 힘으로 성취하고자 한다. 모두는 이 계획과 도항에 나를 좇고, 만일 목숨을 바치게 되더라도 그것은 나와 함께 영원히 기념되고 찬 미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생을 달게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너 희는 그 숭고한 용기로 세상이 가장 갈망하고 있는 한 사업을 수행 하는 것이며, 생명을 유지하고서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면 새로운 정 복으로 획득될 제국·봉록·유리한 영지를 하사 받아 너희는 많은 즐거 움과 기쁨 속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와 같이 히데요시가 일본의 제후들에게 했던 발언도 인용되어 있다(프로이스 2003, 175-177).
해당 발언들에 주목하며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일본 내 반대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벌인 전쟁, 공을 세우고 싶은 일본 제 후들의 정치적 야망을 활용한 전쟁 등으로 바라봤다. 추가적으로, 프 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 과 명예를 얻는 한편 전국 다이묘들의 재산을 빼앗고 일본에서 몰아 내려는 술책이라고 평가하며 히데요시를 비난한다(프로이스 2008, 197). 위의 구절들과 그의 평가를 통해, 프로이스가 일본의 국내정치 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본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일본에 대한 정 보, 그리고 예수회의 적응주의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프로이 스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가지고 있었던 정보가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 을 미쳤을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1532년 리스본에서 태어나 16 세에 예수회에 입회한다.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있던 인도 고아로 파 견되어 고아 관구장의 비서로 활약한다. 당시 아시아 각 지역의 선교 사들이 로마의 예수회 총장에게 보내는 모든 보고서는 고아 관구장을 거쳐야 했는데, 프로이스는 비서 자격으로 그 문서를 모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러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시아 각 지역의 정세, 특히 일본 사정에 정통하게 된다(프로이스 2003, 12-13). 더 나아가 그 는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쓴 편지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정세 에도 밝았다(박영자 2016).
프로이스는 다른 인물들의 글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일본을 돌아다니며 정부를 입수했다. 그는 일본의 모든 지역을 여행해 그곳에서 만난 신부와 수사와 가톨릭교도들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은 것이 『일본사』 집필에 있어서 특히 도움이 되 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이스는 일본 지역에 대한 생생하고도 비교적 정확한 정보는 물론 주요 인물들에 대해 자 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프로이스 2008, 196). 포르투갈은 세계를 운영 하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수단으로 활용했고, 예수회는 세계로 나아가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프로이스는 그러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것들을 공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본으로 가기 전에도 이미 일본 사정에 정통할 수 있었다. 일본의 여러 국내정치적인 사정과 문제 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여러 경로를 통해 히데요시와 일본의 국내정치적 사정에 밝았던 프로이스였기에, 임진왜란에 대해 서술하 며 일본의 국내정치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프 로이스는 동양 삼국에 비해, 임진왜란을 일본의 국내정치적 사정과 더욱더 엮어서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예수회의 적응주의 전략이 그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 쳤을 것이다. 예수회가 동아시아 선교활동에 있어서 대외 전략으로 세웠던 방침은 ‘적응’이었다(장혜진 2019, 53). 이것은 15세기부터 시 작된 대항해시대의 선교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담론인 데, 종교가 타문화 혹은 타세계의 질서 속에 정합적으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론적 전략이 바로 ‘적응’ 혹은 ‘적응주의’ 라고 할 수 있다(장혜진 2019, 55).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 선교와 중국 선교도 적응주의 선교의 특징을 보였다. 예수회는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먼저 그 나라의 언 어와 문자를 충분히 학습하여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익 히고자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배층이나 지식인들과의 학술적 교 유를 통해 교리를 전파하고자 했다. 이러한 전략은 당시 스페인과 프 랑스 등이 신대륙에서 행하던 군사적 우위에 입각한 기독교 전파 전 략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김종건 2011, 1-2). 사비에르, 발리냐노 등 이 추진한 적응주의 선교방식은 위로부터의 선교의 확대, 선교사들의 생활양식 변화, 선교사들의 토착 언어 학습, 토착 성직자들의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김혜경 2010, 21-25).
프로이스는 예수회가 적응주의 전략을 채택한 시기에 일본에서 활 동한 선교사였고, 적응주의 선교를 내세웠던 사비에르의 제자이기도 했다(김학준 2009, 269). 언어적 능력이 뛰어났던 프로이스도 해당 전 략에 따라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스는 1563년 7월 6일에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일본어를 공부하는 등 현지 적응을 위한 학습에 힘썼다(프로이스 2003, 13-14). 그리고 노력의 결과 프로이스는 일본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 로 일본의 지배층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교류하고 그들을 지켜보며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입경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그와 약 18회에 걸쳐 개인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또한 프로이스는 히데요시를 오사카 성에서 알현하기도 했고, 발리그니아누 일행이 쥬라쿠테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할 때 동행 하기도 했다(프로이스 2003, 14-16). 프로이스 『일본사』의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상당히 객관적인 기 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스는 일본 측의 어떠한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히데요시가 육손이라는 신체적 결함까지도 과감히 언 급한다. 더 나아가 천황이 몹시 궁핍하게 살았다든가, 쇼군이 매우 어리석었다든가, 히데요시가 매우 기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사 실 등을 거리낌 없이 전달한다(프로이스 2003, 11). 이러한 객관적인 서술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일본인이 아닌 국외자라는 자유로운 입 장에 서있었기 때문도 있겠지만(프로이스 2003, 11), 일본에 오랜 기 간 체류하며 일본의 권력자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포르투갈은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당시 예수회가 일본에서 펼친 전략은 ‘적응주의’였다. 포 르투갈과 예수회는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전략을 통해 글로벌 네트 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다. 프로이스는 앞서 살펴본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일본 사정에 정통했는데, 예수회의 적응주의 전략 덕분에 일본 에 머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 국내정치를 더욱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파 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이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일본의 국내정치적 요인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을 것이고, 임진왜 란이 일본의 국내정치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4) 임진왜란의 ‘기술적’ 성격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사용된 기술에 주목했다. 해양 기술 과 화약무기 기술이 임진왜란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본사』에서 그가 조선과 일본의 함선과 무기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스는 “그들(조 선인)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이 타는 배는 견고하고 크며, 상부에 갑판을 두르고 있다. 화약 용기와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된 사석 포와 같은 포를 쓰는데,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서 대신 쇳조각을 물고 기 꼬리같이 덧붙인,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을 채워 넣어서 발사한다. 이들 화살은 부딪치는 어떤 것도 다 꿰뚫어 파괴하는 위력 을 가지고 있다. 그 밖의 무기는 위력이 없고, 특히 칼은 짧으며 그 다지 쓸모가 없다. 개머리판이 없는 몇 가지 총포를 사용한다고도 한 다.”와 같이 조선의 함선과 무기에 대해 소개한다(프로이스 2003, 185-186).
프로이스는 “관백의 두 지휘관 곧 가토 도라노스케와 아와노쿠니의 영주인 다른 한 사람은 바다에서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끼쳤던 막대한 손해를 보고서 가지고 있던 300척의 함대를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 하였다. 그리고 이 회전에 필요한 무기·탄약을 적재하고서 유능한 정 예 병력을 승선시켰다. 그들은 수많은 총포·창·활과 화살을 휴대하였 다. 이렇듯 일본군은 자신들의 우수한 장비를 믿고서 약간의 배밖에 보유하지 않은 조선의 해적을 찾아서 출격하였다.”와 같이 일본 측의 함선과 무기에 대해서도 얘기한다(프로이스 2003, 234). 그리고 더 나 아가, “그런데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 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 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 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 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 이 노를 저어 배와 함께 달아날 수 없게끔 튼튼한 갈고리가 달린 쇠 사슬을 위에서 집어던졌기 때문에 일본 배들은 쉽게 빠져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와 같이 조선과 일본의 해상 전투에 대해서 언급하며, 해양 기술과 화약무기 기술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프로이스 2003, 234-235).
또한 그는 “일본 국내의 분쟁을 종식시켜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고 싶고 그것을 달성한 후에는 일본국을 동생인 히데나가에게 양도하고 나 자신은 조선과 중국 정복에 전념하고 싶다. 그 준비로 대군이 바 다를 건널 때 사용할 2,000척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하여 현재 목재 를 모으고 있다. 나는 선교사들에게 충분한 장비를 갖춘 대형 나우선 (14~16세기 유럽에서 이용한 대형 범선) 두 척의 조달을 알선해 달 라는 부탁 외에 다른 원조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 나우선 도 무상으로 얻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라는 히데요시의 발언을 인용 하며, 임진왜란을 위해 히데요시가 예수회에 나우선을 요구했다는 사 실에 주목한다(프로이스 2017, 269).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여러 기 술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계속 언급하며 그것들이 임진왜란에서 중 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활용된 다양한 기술에 주목하는 관점이 형성될 수 있 었던 이유는 포르투갈의 해상 강국 지위, 그리고 예수회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포르투갈의 해상 강국 지위가 프로이스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델스키는 포르 투갈이 oceanic supremacy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World Power라고 평가했다. 16세기의 포르투갈은 강력한 해양 기술 로 무장한 바다의 지배자였다. 즉, 포르투갈이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 에서 해양 기술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예수회와 상인들은 포르투 갈의 해양 기술과 선박을 이용해 세계 각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프 로이스 역시 인도나 일본으로 파견되는 과정과 여러 지역을 여행하 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선박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시간 바 다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선박에 대한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실제 로 프로이스는 Tratado라는 책의 12장에서 ‘Ships, seafaring and dogus’에 대해 서술하며 선박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해당 장 에서 일본의 선박과 유럽의 선박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나열 하고 있을 정도로 해양 기술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Frois 2014, 217-226).
추가적으로, 프로이스는 오랜 기간 일본에 직접 머물고 정치인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일본의 해양 기술과 선박에 대해 더 자세 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히데요시 자신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정보와 조선의 사정과 지세가 인쇄되어 있는 여러 지도 에 근거해(프로이스 2003, 183), 조선의 해양 기술과 선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해양 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서술에서도 관련 부분을 많이 언급하며 임진왜란에서 활용된 기술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프로이스의 관점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앞서 Ⅱ장에서는 일본에서의 무역활동과 종교적 선교가 따로 구별되거나 독립적일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는 힘을 합쳐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상인들은 무역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회의 중개 내지 도움을 받아야 했고, 예수회 스스로도 무역에 참여했다. 그리고 예수회가 참 여한 대표적인 무역이 바로 무기를 판매하는 철포 무역이었다. 예수 회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 등에 서양식 화기를 거래 조건으로 그리 스도교 선교를 시작하였다(장혜진 2020, 115). 더 나아가, 서양식 화기 거래를 통해 현지 선교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도 했다(장혜진 2020, 120). 선교사들은 서양식 화기를 가져와서 전국 다이묘의 정치, 군사적 필요성을 충족시켜 주었는데, 일본 위정자들은 자신의 군사력 강화 내지 영지 확장을 위해서 서양의 선진 무기인 대포나 화승총을 강력하게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포르투갈 상선 을 자신의 영지에 있는 항구로 유치하려고 노력했고 예수회는 이들 을 통해 재정을 충당했다(장혜진 2020, 122-123). 예수회는 일본에 무 기를 판매하며 기술 전파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스 역시 자연스럽 게 화약무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많이 배울 수 있었을 것이 다. 실제로 프로이스는 Tratado라는 책의 7장에서 ‘Japanese offensive and defensive weapons and warfare’에 대해 서술하며 무 기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해당 장에서 일본의 무기와 유럽의 무기를 비교하고 있을 정도로 무기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보여주는 데, 해당 장에서는 화약무기의 사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Frois 2014, 147-162). 추가적으로, 프로이스는 오랜 기간 일본에 직접 머 물고 정치인들과 교류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일본에서 화약무기가 어 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세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예수회는 일본에 서 철포 무역을 활발히 전개해나갔다. 프로이스는 그러한 예수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부였고 일본에 장기간 체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화약무기에 대해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임진왜란을 지켜볼 때도, 해당 전쟁에 사용된 화약무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Ⅳ. 결론 및 연구의 기대효과
1. 결론
루이스 프로이스는 동양 삼국이 주목하지 않았던 임진왜란의 네 가지 성격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의 국제적 성격이다. 프로 이스는 임진왜란을 인도와 천주교가 관여된 일종의 국제전쟁으로 바 라봤는데 이러한 관점은 어린 시절의 경험, 그가 받은 교육과 참여한 활동, 그리고 다양한 인물과 자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의 포교적 성격이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포교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예수회와 그에게 주어진 임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세 번째는, 임진왜란의 정치적 성격이다. 프 로이스는 임진왜란이 일본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는 데, 이러한 관점은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용하고 예수회의 적응주의 전략을 채택한 결과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임진왜란의 기술적 성격이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사용된 해양 기술과 화약무 기 기술에 특히 주목한다. 이러한 관점은 포르투갈의 해상 강국 지 위, 그리고 예수회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을 형성한 요인들을 살펴 보면, 그것들은 모두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맥락·구 조·배경과 관련이 있는 요인들이다. 그러한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관점 형성 요인들이 작동할 수 있었고, 그것들 이 작동해 임진왜란에 대한 프로이스의 관점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 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 제정치적 맥락(Structure)은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인물(Agency)에게 영향을 미쳤고, 임진왜란에 대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관점을 형성했 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World Power 포르투갈’이라는 국제 정치적 맥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국제적·포교적·정치 적·기술적 성격에 주목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일본·명은 그러한 구 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국제적·포교적·정치적·기 술적 성격에 주목하지 못했다.
2. 연구의 기대효과
이 연구의 기대효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특히, 본 연구에서 했던 것처럼, 임진 왜란 당시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관점을 더욱 더 자세히 살펴보고 비교하는 연구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두 번째 는, 16세기에 아시아에서 활동한 서양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 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에서 30년 남짓 머물며 선교 활동을 펼친 루이스 프로이스와 그의 글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 기에 아시아에서 활동한 다른 선교사들도 많이 있었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가스파르 빌레라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예이다. 예 수회 출신 선교사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회 소속의 마르틴 데 라다, 도미니크회 소속의 가스파르 다 크루즈 등의 인물이 아시아에서 활 동했다. 이런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들이 남긴 기록을 탐구하 는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이들의 기록에서 조선 과 관련된 사항, 조선에 대한 관점을 찾아보는 연구의 등장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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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 연구에서는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을 번역한 자료를 많이 활
용했다. 그런데 해당 기록들은 1차 자료와 2차 자료의 특성을 모두 가지
고 있어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애매했다. 이에 따라 프로이스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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