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21세기 사랑방, 격동의 동아시아를 준비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데지마 · 박예은 · 중앙대학교
들어가며
동아시아의 근세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쇄국을 고수했던 조선과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나섰던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 그 배경에는 데지마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습니다. 2023 년 2 월, 사랑방 15 기, 17 기 그리고 19 기까지 세 기수가 함께 했던 규슈 답사 첫 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데지마를 방문했습니다. 현대식 건물로 둘러 쌓여있는 데지마는 홀로 근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가사키에 지어진 부채꼴 모양의 조그마한 인공섬, 데지마(出島)는 2 백년이 넘는 막부의 쇄국 시기 동안 서양과의 무역이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곳입니다. 기독교 전파를 앞세운 포루투칼이 방당하고, 1641 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상관이 데지마로 옮겨졌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데지마에서 그 막을 올린 것입니다.
<그림 1> 데지마 조감도(1669) (출처 : the Memory )
작은 다리가 유일한 출입구였던 데지마에는 허락된 소수의 일본인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네덜란드 VOC 의 상관원들은 1 년에 한 번, 쇼군을 알현하기 위한 외출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이토록 엄격했던 쇄국 정책 하에서 근대화의 단초가 되어 준 것은 바로 난학(蘭學, Rangaku)의 융성입니다. 난학은 네덜란드어 서적을 통해 들어온 유럽의 실용적인 과학, 의학 등 학문과 기술, 문화를 통칭합니다.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쇄국 초기인 1720 년까지 일본 내 양서의 수입과 네덜란드어 학습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지마를 통해 와인과 망원경, 지구본과 같은 서구의 첨단 문물들이 유입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1774 년, 난의학자 스키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 1817)와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沢, 1723-1803)의 『해체신서 (解體新書)』 출간은 난학 융성의 시발점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875 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그의 저서 『문명론 개략』에서 “서양 문명은 우리의 국체를 굳게하고 더불어 우리 황통에 빛을 더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인데, 이를 받아들임에 어찌 주저함이 있어서랴. 단연코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며 서양 문명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여기서 후쿠자와가 말하는 ‘서양 문명‘은 네덜란드어를 통해 구미의 학문과 기술을 연구하는 난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통해 구미의 역사와 문화, 그 사상의 본질을 통찰하는 ‘영학(英學)’을 주창했습니다. 19 세기 일본의 길을 앞서 걸은 것입니다. 그의 문명론은 일본의 오랜 봉건적 전통을 뒤흔들었고, 근대화를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후쿠자와가 세상을 떠난지 120 여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도 그의 초상화는 1 만엔 속에 살아 숨 쉬며 후대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본 답사보고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삶과 심상의 변화를 통해 19 세기 전반에 걸쳐 진행된 난학에서 영학으로의 전환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계질서의 변동과 난학의 쇠퇴
동아시아의 근세가 격동의 시기였다면, 그 진원지는 단연 구미 열강이었습니다. 17 세기 초, 네덜란드는 강력한 자본력과 해군력을 가진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포르투갈을 압도하는 슈퍼 파워로 올라섰습니다. 이는 1639 년에 막부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교역 상대를 전환했던 것의 대외적 배경이기도 합니다. 18 세기의 국제정세는 더욱 복잡했습니다. 문명 표준을 설정하고, 세계 질서를 주도하기 위한 구미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하영선 2019).
네덜란드는 한 세기 동안 해상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그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 세기에 잇따른 영국과의 전쟁으로 패권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태양왕 루이 14 세가 이끄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기로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질서의 변동은 자연스레 일본 내 물상과 심상의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18 세기 네덜란드의 쇠퇴가 곧바로 데지마와 난학의 쇠퇴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개항은 네덜란드가 국제무대의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한 세기가 넘게 지나, 1859 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개항 이후에는 일본 사회 내에서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자는 양이주의가 성행했습니다.
한편, 막부는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국제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데지마에 입항하는 네덜란드의 모든 선박에게 최근 해외 동향에 대한 보고서,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를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막부는 일찍이 네덜란드의 쇠퇴를 알고 있었지만, 19 세기 중반까지 쇄국을 고수했습니다. 그 강경함은 당시 외교사료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844 년,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2 세는 쇼군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습니다. 일본은 영국이 청나라를 개방하려 벌였던 아편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자발적으로 개항하는 것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쇼군은 매우 단호히 개항을 거절했습니다.(Fuyuko, M 2011). 1852 년 네덜란드 국왕의 편지가 또 한번 나가사키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이 일본의 항구를 무력으로 개방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내항하기 1 년 전이었지만, 막부는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2> 빌럼 2 세의 편지(1844)
(출처 : the Memory)
<그림3>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답장(1845)
(출처 : the Memory)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하지만 굳건했던 막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페리의 내항을 기점으로 일본의 쇄국 정책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난학의 쇠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과 난학
18-19 세기 일본 내 학문의 흐름은 한학, 전통 유학에서 난학으로 다시 영학으로의 변환을 거듭했던 후쿠자와의 젊은 시절과 꼭 닮아있습니다. 후쿠자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19 세기 난학의 쇠퇴와 영학으로의 전환을 살펴보겠습니다.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후쿠자와는 번의 풍습에 따라 14 세에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또래보다 늦은 시작이었지만, 학문적 재능을 가졌던 후쿠자와는 금새 한학자의 초보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자란 나카쓰 번은 사족 사이의 문벌제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공적인 문제뿐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을 구별하여 서로 사용하는 말투가 달랐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후쿠자와는 자연스레 문벌 제도에 반감을 품었고, 봉건 사상으로 찌든 고향을 떠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853 년 페리 함대 내항의 여파로 후쿠자와의 형이 난학 공부를 권했고, 마침내 후쿠자와는 난학을 핑계삼아 나가사키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향을 탈출한 후쿠자와는 베개를 베고 잔 적이 없을 정도로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난학에 정진했습니다. 그저 탈출을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공부에 점차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후쿠자와는 난의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오가타 고안(緒方洪庵, 1810-1863)의 데키주쿠에서 5 년 남짓한 서생 생활을 뒤로 하고, 스물 다섯살이 되던 해인 1858 년에 난학을 가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림 4> 데키주쿠 전경
후쿠자와가 난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즈음, 막부 정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교역 요구를 하러 왔던 이전까지의 서양 선박과 달리, 중무장한 함대가 일본 연안에 출현했던 것입니다. 1853 년 미국의 페리는 군함 4 척을 이끌고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나타나, 미일화친조약의 체결과 개항 및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친서를 소지했던 페리는 일본이 요구를 거절할 경우 무력행동을 할 수 있다고 위협했습니다.(Perry M.C 1856) 당시 이미 아편전쟁의 소식을 알고 있었던 막부는 전쟁만은 피해야한다는 전제 하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1854 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치지 않고 1858 년에는 추가 개항과 영사재판권, 협정 세율 인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수호통상조약이 서양 5 개국과 체결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막부는 나가사키와 요코하마, 하코다테까지 세 개의 항구를 개방했고,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후쿠자와가 처음으로 영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은 1859 년, 막 개항된 요코하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 후쿠자와는 외국인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가게의 간판이나 거리의 쪽지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보아도 아는 글자라곤 없고, 영어인지 불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음에 낙담스러웠던 당시의 심정을 후쿠자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이제까지 몇 년이나 필사적으로 네덜란드어 서적읽기를 공부했는데, 그것이 지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정말로 쓸모없는 공부를 한 셈이로구나.”
난학에 입문한지 6 년만에 후쿠자와는 난학의 한계를 직접 목격하고, 이제는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마주했습니다. 일본이 개방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네덜란드어가 유럽을 대표하는 언어였던 것과 무관하게 앞으로는 영어가 틀림없이 필요해질 것임을 내다본 것입니다. 후쿠자와는 난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영학으로 바꾸려면 처음부터 새로 또 고생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기도 잠시, 각고의 노력 끝에 영란사전을 구해 무엇보다도 영어가 최우선이란 각오로 오로지 영문 학습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영학자로서 내딛은 첫 걸음이었습니다.
두번의 서양 체험
그 시기 막부는 조약의 후속 절차를 위해 구미에 공식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860 년, 첫 공식사절단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후쿠자와는 함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하였습니다. 6 개월이 채 되지 않던 짧은 여행이었지만, 후쿠자와로 하여금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양탄자, 마차 등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마주한 물건과 기술에 놀라기도 했지만, 정말로 새로워 그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지금 워싱턴의 자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워싱턴의 자손으로는 여자가 있을 것이다. 지금 어떻게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집안에 시집갔다는 소문이 있다 하고 냉담하게 대답할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나도 미국이 공화국이고 대통령은 4 년마다 교체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워싱턴의 자손이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그런 반응을 보이니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과학문명에 관해서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지만, 사회생활에 관해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림 5> 워싱턴에서 견미사찰단(1860)
웹스터 사전 한 권을 사들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쿠자와는 이전처럼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달라진 것은 생도들에게 더이상 난서를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영서만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후쿠자와는 영난 사전에 의지하여 영서를 배우듯 가르치며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막부의 외무성에 고용돼 영국공사와 미국공사가 막부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번역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일은 영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자유로이 막부의 외교문서를 열람할 기회를 얻음으로써 후쿠자와는 국제 사회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임종원 2011). 이어 후쿠자와는 1861 년에 파견된 견구사절단에 막부의 고용된 정식 통역관으로써 참여했습니다.
첫 구미 여행에서 후쿠자와가 봉건적인 일본 사회와는 상이한 미국의 문물과 풍속에 놀랐다면, 그는 두 번 째 구미 경험인 유럽 여행을 통해서 그 차이의 근원을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즉,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그 문명을 만들어 낸 정신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품었던 것 입니다.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일본에서도 원서를 읽고 사전을 뒤져서 알아낼 수 있기에, 후쿠자와는 그러한 학문적 지식 이외에 외국인에겐 너무 기초적인 지식이라 사전에도 실려있지 않은 것들을 유럽 체류 중에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증기기관의 원리나 인쇄술과 같은 원서에 나와있는 내용은 차치하고, 병원의 유지비는 누가 어떤 식으로 내는지, 은행에서 돈의 출납은 어떤 식으로 관리되는지, 또 나라마다 다른 징병제는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어떤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인지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들을 궁금해 한 것입니다.
<그림 6> 유럽 여행 중 후쿠자와 유키치(1862)(출처:keio.ac.jp)
체류 초반 후쿠자와는 런던, 파리 등에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갖은 이야기를 들어도 그 배경을 몰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이센의 의회를 직접 방청하고, 의회 정치의 형태, 민주주의 이념과 원리 등을 여러 사람에게 물어가길 반복했습니다. 따라서 조금씩 그 내막을 이해하게 되고, 복잡한 사정은 열흘이 걸려서든 간신히 납득하게 되었습니다. 후쿠자와는 이를 유럽 순방의 성과로 꼽았으며, 그의 성과는 『서양 사정 (西洋事情, 1866)』에 소상히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부터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의문을 품었던 후쿠자와에게 두번의 구미체험은 유럽과 미국의 문명을 모델로 한 근대문명의 규범을 스스로 확립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양이론의 성행
하지만 유럽에서 돌아와 마주한 국내의 사정은 후쿠자와가 경험하고 온 구미의 세상과 정 반대였습니다.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1831-1866)이 1858 년 서양 5 개국과 체결한 통상조약의 추인을 거부한 것이 알려지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존왕양이 운동이 절정에 달해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양인을 오랑캐로 간주하여 일본 땅에서 무조건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이론자들은 개국이나 서구 문명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했습니다. 곳곳에서 양학자들이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후쿠자와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사회를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최대한 몸가짐을 조심했고, 오로지 저작과 번역에만 열중해 세월을 보냈습니다.
양이론의 분위기가 고조될 수록, 양학을 향한 후쿠자와의 뜻은 확고하고 깊어져 갔습니다. 이는 후쿠자와가 1865 년에 저술한 “당인왕래(唐人往來)”에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의 세계상과 문명을 연결지은 후쿠자와는 당인 즉, 서구인들에게서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하여 대륙별, 국가별 단계론을 제시하며 일본인들이 보다 넓은 세계를 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합중국은 상국(上國)으로,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을 하국(下國)으로 분류하였는데, 아시아는 중간 등급으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자만을 일삼는 국가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일본 한 나라만을 가리켜 스스로 신국이라느니 떠들고, 세상과의 교류를 피해 홀로 칩거하면서 서양사람을 추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일본 내 팽배한 양이론을 비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이주의를 외치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양학을 공부하는 소수의 학자들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이야기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정신을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서양의 근대 문명을 일본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으로 보았습니다. 더하여 그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과 핵심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후쿠자와가 난학에서 영학으로의 전환을 선택했던 이유입니다.
그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차이가 단순히 실용적인 기술이 아닌 그 문명의 바탕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것입니다.
<그림 7> 1 만엔에 실려있는 후쿠자와의 모습
난학에서 영학으로의 전환
후쿠자와가 일본의 근세를 대표하는 계몽가이자 교육자, 근대화를 이끈 아버지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19 세기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후쿠자와는 화혼양재를 주장했던 다수의 양학자와도, 봉건적 전통을 탈피하고자 했던 메이지 유신 시기의 사상가와도 달랐습니다. 그는 피상적인 기술 진보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일본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후쿠자와는 독립을 위한 19 세기 일본의 길로 ‘문명‘을 제시했고,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그 목적지로 설정했습니다. 그의 초기 저작을 순서대로 짚으며 심상의 변화를 쫓아가 보겠습니다.
후쿠자와의 대표적인 저서 3 부작 중 첫번 째인 『서양사정 (1866)』은 앞선 두 차례의 구미 체험을 토대로 쓰여진 서양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문물의 소개서입니다. 병원, 학교, 전신 등 서양 사회의 제도와 사회상, 이념 등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과 함께, 미국, 네덜란드,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 같은 서양 주요국의 역사와 군사제도, 재정출납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후쿠자와가 책을 통해서 강조했던 것은 정치 풍속이었습니다.
초편 서론에서 그는 “서양의 여러 학문이 날로 열리고 다달이 밝아져 우리에게 이익이 크나, 오직 해외의 학문과 기예만을 강구할 뿐 각국이 정치풍속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설령 그 학문과 기예는 얻었을지언정 그 경국의 근본은 살피지 않는 것이기에 실용에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초래할 수 있다.”며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것보다, 문명의 근본 즉 각국의 정치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림 8> 『서양사정』 초편 표지(1866) 또한 그는 『서양사정』을 통해 외국의 대략적인 형세와 실정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적으로 볼 것인지, 친구로 볼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을 밝혔습니다. 근대국가로서 일본의 길을 스스로 찾겠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후쿠자와는 국제사회내 네덜란드의 위상에 대해 17 세기 초 무역이 성대해졌다가 연이은 전쟁으로 명예를 잃었다고 하며 객관적인 분석을 펼치는가 하면, 당시 잉글랜드가 번영하는 이유로 안정된 정치체제와 관대한 국률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일본에 존재하지 않던 개념인 ‘liberty’와 ‘right’을 각각 ’자유‘와 ’통의’로 번역하고, “All men are created equal”이란 문구를 포함하는 미국독립선언서의 전문을 번역하여 실었습니다. 후쿠자와는 서양의 정치와 문화는 어떠한가 하는 관점에서 출발해 근대사회를 근본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입니다.
후쿠자와 스스로는 자신의 저작에 대해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수입함과 동시에 나라의 오랜 폐습을 제거할 목적으로, 말하자면 문명의 한 부분을 조금씩 잘라 판매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작이 단순히 서양문물을 수입, 판매하는 중개상과 같은 역할에 머문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의 봉건 문벌체제를 넘어 문명사회를 향해 가고자하는 그의 의지와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성희엽 2020).
하지만 근대 문명의 표준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중 어느 모델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여전히 그에게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남아있었습니다(하영선 2019). 이러한 그의 고민은 1867 년 세 번 째 구미 체험을 이후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후쿠자와가 양학 중에서도 영학을 향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저작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후쿠자와는 1869 년 『영국의사회담(英國議事院談)』을 출간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특정 국가의 정치 체제를 상세히 소개한 단독 저작물은 영국이 유일합니다. 그는 책에서 영국 의회가 군주정, 귀족정, 서민정 세가지의 정치 체계가 혼합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는 타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해 더욱 정돈된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국이 의원내각제란 탁월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기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라고 분석하는 등 영국의 의원내각제에 대한 선호를 드러냈습니다.
서양사정 초편이 간행된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양이론이 들끓었지만, 1867 년 후쿠자와는 다시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과격한 양이론자들로 인해 전쟁의 위험이 도사렸음에도 후쿠자와는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대신 경제서를 비롯해 만국사, 영국사, 지리, 법률 등에 관한 원서를 다량으로 구입해 돌아왔습니다.
막부의 양이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후쿠자와는 ‘어떻게든 양학이 성행하도록 해서 반드시 일본을 서양과 같은 문명 부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양이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설립한 양학숙, 게이오기주쿠의 학생들을 격려하며 했던 말에는 서양 세계에 대한 그의 박학한 이해와 문명을 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래전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는 본국은 물론이고 인도 지역까지 모두 점령당해 국기를 게양할 곳이 없어졌지만, 전세계에 단 한 곳만 남아 있었다. 바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이다.
데지마는 예전부터 네덜란드인의 거류지로, 유럽 전쟁의 영향도 일본에는 미치지 않아 데지마의 국기는 항상 하늘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왕국은 단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다며,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은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게이오기주쿠는 일본의 양학을 위해 네덜란드의 데지마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온갖 소동이나 난리에도 불구하고 양학의 명맥을 굳게 지켜왔다. 게이오기주쿠는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이 주쿠가 건재하는 한 대일본은 세계 속의 문명국이라 할 수 있다. 긍지를 가져라."
<그림 9> 게이오 대학 내 후쿠자와의 흉상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칼을 버리고 서양을 공부하다, 후쿠자와의 ‘문명론’
『서양사정』과 함께 대표적인 3 부작으로 꼽히는 『학문의 권유(學問のすすめ,1872)』와 『문명론개략 (文明論之概略, 1875)』에는 후쿠자와의 문명사관이 매우 집약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저작들이 주로 번역을 통해 서구의 근대사회와 그 문명을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면, 『학문의 권유』와 『문명론 개략』은 후쿠자와가 자신만의 문체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민중에게 전달하려했던 본격적인 계몽서입니다(임종원 2011).
후쿠자와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였다.“라는 문장으로 『학문의 권유』 초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어 선천적으로 차별이 없는 사람간 귀천과 빈부의 차별이 생기는 것은 오로지 학문의 유무라고 설명하며 민중들을 학문으로 이끌었습니다. 봉건 시대의 허학이 아닌 실용, 활용의 학문임을 강조하는 후쿠자와는 서양의 문명사회가 자본주의를 통해 번영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경제학이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는 만큼, 국가의 독립과 사회의 발전에 금전이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입니다.
『문명론 개략』 전반에 걸쳐 후쿠자와는 ’일본의 당면 과제이자 목적은 나라의 독립이고, 문명은 그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일본의 문명이 서구에 비해 뒤쳐진 이유가 봉건시대의 가치 체계와 풍속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후쿠자와는 서구 문명의 핵심이 ‘개인의 자유‘에 있음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이것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 여전히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서구 국가, 그 중에서도 영국이 부상하는 이유를 그 문명에서 찾아내고, 문명의 핵심 정신을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10> 미타연설관 내부와 후쿠자와의 사진
(출처: keio.ac.jp)
서구 문명의 핵심인 자유의 기풍은 다사쟁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후쿠자와는 서구의 문명 정신을 배우기 위해 그들의 speech 문화, 대중연설을 최초로 일본에 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토론의 형식을 빌려 반대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또 인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874 년 후쿠자와는 게이오 의식 내에 ‘미타연설관(三田演説館)‘을 건립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등 민중 계몽에 앞장 섰습니다. 3. 난학의 종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젊은 시절 나가며 일본의 근세를 대표하는 인물로 1 만엔에 실려 있는 후쿠자와는 19 세기 일본의 길을 먼저 걸었던 계몽가이자 교육자이며 누구보다 뛰어난 사상가였습니다. 보다 앞서 근대 국가체제로 들어선 서구 열강간 힘의 각축전 속에서, 후쿠자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바깥으로 ‘자주 독립‘을 그리고 안으로는 ‘민중 개인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17-19 세기 서구를 향한 유일한 창문이던 데지마에서 시작하여, 영학으로의 전환과 문명론을 주창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러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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