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 데지마
복합의 눈으로 재구성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유지현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6 세기 중반부터 20 세기 초반까지, 정확하게는 1549 년부터 2022 년 오늘날까지 자그마치 470 년이 넘는 긴 세월에 달한다. 그러나 470 년이라는 긴 세월이 무색하게도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 인구 수는 전체 인구수의 1%로 2 백만이 채 되지 않는다. 500 년에 다다르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크게 성장하지 못한 채 소외된 신앙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향한 일본대중의 무관심 뒤에는 260 년에 달하는 기독교 탄압의 역사가 존재한다. 17 세기 도쿠가와 정권 아래 기독교 신앙은 1614 년부터 1873 년까지 대략 260 년의 긴 세월동안 일본 전역에서 철저히 금지되며 일본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1549 년 포르투갈 선교단을 통해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은 1614 년 당시 일본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기독교 금지령을 발표하면서부터 일본 전역에서 철저히 금지된다. 기존에 일본에서 살며 선교 활동을 펼쳐나갔던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강제 추방령이 내려졌고, 추방령에 따르지 않고 숨어살다 적발되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회당과 기독교 학교 등 기독교 단체와 관련된 모든 시설들은 중앙권력에 의해 파괴되었고 일본 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변절을 강요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쇼군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예외없이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이처럼 이에야스는 16 세기 중반부터 일본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뿌리뽑고자 하였고, 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뤄지고 있진 않지만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는 기독교 금지령에서 더 나아가 서양 국가들과의 교역을 차단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한다. 1549 년에 일본땅에 유입되어 순항의 길을 걸으며 빠르게 성장해나가고 있던 기독교 신앙이 65 년이 지나 1614 년부터 일본 전역에서 철저히 금지된 배경은 무엇일까? 1614 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면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1549 년부터 펼쳐졌던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고 그 탄압 역사의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의 선행연구는 일본의 오랜 기독교 탄압 역사의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 입장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탄압 역사의 근본 원인으로 보며 서양에서부터 건너온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동양 국가인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교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본문화는 다수의 신을 동시에 섬기는 신토사상을 바탕으로 하기에, 절대자만을 섬기는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의견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첫번째로 오늘날 우리는 비교적 쉽게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 신앙이 이미 크게 성장했고 혹은 크게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두번째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셨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고민했던 일본인 기독교 신자 수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서양의 문화 충돌을 아예 관련 없는 요소라고 볼 순 없지만, 거의 3 세기 동안 지속된 일본의 기독교 탄압사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입장은 일본의 국가주의를 기독교 탄압 역사의 근본 원인으로 꼽으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에 일본 정치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일본의 통일이었고,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는 일본의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어 탄압당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일이 당대 가장 중요했던 정치적 사안이라는 점에서는 대개들 동의하지만 기독교 단체에 대한 중앙권력의 인식에 관련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단체가 통일의 방해요소로 인식되었다기보다 통일을 위해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중앙권력의 확립이 필요했던 시기에 만만한 외래 세력으로 정치적 도구로 쓰여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와는 상반된 의견으로 어떤 이들은 일본 정치계가 통일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독교 단체를 공동의 적으로 삼았다기보다 기독교 신앙의 빠른 성장 속도, 정치계 인사들을 겨냥한 포교활동 그리고 그 배후의 강성한 서양 국가의 존재가 일본 중앙권력으로 하여금 기독교 단체를 위협적인 세력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서양의 문화충돌과 다르게 당대 일본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위와 같은 의견들은 일본 일리있는 주장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 또한 사건의 배경을 정확히 그려내기에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일본의 대내적 상황만을 크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사란 물론 일본사회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긴 하지만 그 사건의 적지 않은 부분이 일본 밖의 외래 국가와 외래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대내적 상황만을 고려해서는 사건의 전체적인 배경보다는 부분적인 배경만을 그려낼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 안팎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의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1549 년에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되어 1614 년에 전면적으로 금지되기까지 그 사이 65 년의 기간 동안 세계정치는 역동의 과정을 거쳤다. 세계질서의 재편성과 활발한 항해활동으로 여러 국가들이 연결되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등 역사적으로 굉장히 다채로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일본과 서양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그려낼 수 없기에 일본 안에서 일어난 탄압 역사라 할지라도 일본의 대내적 상황뿐 아니라 안과 밖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존의 연구들과는 다르게 일본의 대내적 상황에만 집중하여 좁은 관점에서 탄압사의 배경을 살펴보기보다 안팎의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여 사건을 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해당 사건을 어느 한 특정 집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압사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고려하여 해당 사건을 복합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끝으로 일본의 대내외적 상황과 함께 탄압사의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 모두의 입장을 헤아려 본 결과로서, 1549 년에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되어 순항의 길을 걷던 기독교 신앙이 1614 년부터 일본 전역에서 철저히 금지된 이유에는 포르투갈의 쇠퇴와 도쿠가와 정권의 중앙권력 확립을 위한 국가 통제가 핵심적인 배경이었음을 주장한다.
일본과 기독교 신앙의 만남과 그 전개
세계질서의 변동과 동서양의 만남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일본과 기독교 신앙의 만남과 관련하여 16 세기 초반 세계질서의 변동은 큰 의미를 가진다. 만약 포르투갈이 글로벌 파워로 자리매김하여 식민지 개척을 위한 활발한 해양 탐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머나먼 유럽 땅에서 당시 아시아의 변방국가였던 일본으로 건너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선교사들이 일본땅으로 건너오지 못했다면 16 세기 중반에 기독교 신앙의 복음이 일본에 전해지는 일 또한 있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사실 16 세기 초반 세계질서의 변동에서부터 시작된다. 16 세기 초반 포르투갈은 글로벌 파워로 세계중심에 올라서게 되고 이러한 세계질서의 변동에 따라 1515 년 기존의 세계질서는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된다. 이후 포르투갈은 활발한 해양 탐험을 거듭하며 식민지 개척에 몰두했고 글로벌 파워로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에까지 미치게 된다(Modelski 1978, 219). 일본과 기독교 신앙의 만남 또한 이와 같은 동서양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5 세기 초부터 포르투갈 사람들은 활발한 해양 탐험 활동을 벌였고 그러던 중 1543 년에 한 포르투갈 상인의 배가 일본 남단의 다네가시마 섬에 상륙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섬나라 일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두 국가 간의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되고, 두 국가 간의 교역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일본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유럽의 문명과 문화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기독교 신앙 또한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서 일본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 환대받는 기독교 신앙
일본 기독교 신앙의 역사는 1549 년 8 월 15 일 스페인 출생 포르투갈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가 말레이시아 말라카에서 만난 일본인 안지로(Anjiro)와 신부 토레스(Father Torres) 그리고 수사 페르난데즈(Brother Fernandez)와 함께 포교활동을 목표로 일본 카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Cieslik 1954, 1- 2).
21 세기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 현실로 미루어 볼 때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일본대중으로부터 괄대받았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실제로 기독교 신앙은 당대 글로벌 파워로 자리매김한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 일본대중은 물론 정치계 인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자비에르가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중에 포르투갈, 인도, 로마 등의 여러 예수회 사역지로 보낸 편지들과 예수회 단체에서 발표한 여러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16 세기 중반 기독교 신앙은 일본 사람들로부터 굉장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자비에르의 편지에 따르면 권력자들은 종종 선교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복음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했고 선교사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Campbell, 1921).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그림 1. 프란시스 자비에르 (출처: Kobe City Museum)
당시 기독교 신앙이 외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유입되자마자 일본에서 크게 환대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포르투갈이 무역을 통해 당대 일본 경제와 정치, 사회에 끼치고 있던 지대한 영향력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일본상인들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남겼고, 권력을 위해 끊임없는 싸워야했던 봉건 영주 다이묘들은 일본에는 없는 서양의 발달된 강력한 화기들을 들여와 쓸 수 있었다(Boxer 1951, 28). 때문에 경제적 이윤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들에게도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지만 자신의 목숨은 물론 자신의 영토와 가문을 보호할 수 있던 다이묘들에게도 포르투갈과의 무역은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일본 상인들과 다이묘들에게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한층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일본에게는 포르투갈을 대체할만한 무역 파트너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포르투갈은 글로벌 파워로서 아시아와 유럽 간의 무역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물론 아시아 국가 간의 무역 또한 독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게 포르투갈을 통하지 않고서 외국 물품을 들여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역과 관련해서 포르투갈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일본에게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단체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선택지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상인은 물론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외래종교의 포교 활동을 별다른 확인없이 쉽게 허가해주는 것은 물론 포교활동을 지원하는 데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편안히 거처할 수 있는 안식처와 성전 공부를 위한 회당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또 필요하다면 금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모든 다이묘들이 오로지 계산적인 마음만으로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예수회 선교단을 환대해주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포르투갈과의 지속적인 무역이 그들을 향한 환대의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다이묘들이 선교사들을 그토록 환대했던 이유에는 포르투갈 글로벌 파워로서 일본에 끼쳤던 지대한 영향력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두 국가 간의 교역에서 선교사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 때문이었다. 교역을 위해서는 포르투갈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고 이에 선교사들보다 더 적합한 인력은 없었다.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포교 활동을 위해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 상인 사이에서 통역과 함께 중개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력이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예수회 선교단들은 다이묘들의 환대와 보호 아래 일본땅에서 큰 제약없이 복음을 전하고 전쟁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오랜 기간 포교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봉건 사회와 기독교 신앙의 빠른 확산
당시 일본사회는 봉건사회로,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개종할 경우 제도적으로 그의 가족, 신하 등을 모두 포함하여 최소한 3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개종하게 되는 사회적 형태를 띄고 있었다. 사실 자비에르가 일본땅을 새로운 선교지로 선택한 이유 또한 이와 같은 일본의 봉건적 사회 제도와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타지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동안 일본의 봉건사회제도에 대해 전해듣게 된 자비에르는 일본 황제를 개종시키면 그 아래 봉건 영주와 지식인들 또한 기독교 신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을 또 다른 기독교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일본땅으로 건너왔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이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봉건 영주 다이묘의 허락 아래 포교활동을 펼쳐나갔고 그와 동시에 하루 빨리 황제가 있는 오늘날 쿄토(京都)인 미야코(Miyako)를 방문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비에르는 마침내 일본의 황제를 만나 복음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일본땅에서 황제란 그저 상징적인 지위인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큰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계획을 수정하여 일본에서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봉건 영주 다이묘를 선교 활동의 주요 대상으로 정하고 일본땅에서 계속해서 포교활동을 이어나갔다. 2 년 남짓의 포교활동을 뒤로하고 일본을 떠날 때 그는 다음 선교사들에게 일본땅에서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서는 다이묘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Cieslik, 1594).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그림 2. 선교사들의 포교활동 (출처: Japanese History and Culture)
그 이후 예수회 선교 단체는 다이묘를 포교활동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포르투갈은 무역과 관련하여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이에 더하여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은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선교사들로 하여금 다이묘로부터 포교활동에 대한 자유를 허락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은 서양의 외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유입된 이래로 전면 금지령을 받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영향력과 일본의 봉건적 사회 제도의 힘을 입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일본 사회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내 기독교 신자수가 1582 년에는 15 만명, 1609 년에는 22 만명에 달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은 빠르게 성장해나갔다고 한다(Elison, 1988). 예수회 선교단의 일본 문화 수용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몇몇의 기존연구들은 기독교 신앙이 일본에서 성장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동서양의 문화충돌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16 세기 후반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문화와 기독교 신앙이 그저 충돌했다기보다 서로의 것을 수용하며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를 상대에게 강조하기 보다 절충점을 찾으며 함께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6 세기 초반 예수회 선교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포교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던 당시 선교사들은 헌금제도를 시행하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선교활동을 위해 새로운 장소로 떠날 때면 헌금제도와 관련하여 미리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본 내 포교 활동의 계획에 있어 자비에르는 헌금과 관련된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대중들 사이에서는 종교단체라면 자금을 모아 지역사회의 불우이웃을 돕는 도와야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예수회 선교단은 이러한 일본 기독교 신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이를 지역사회 불우이웃 돕기에 활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예를 통해 예수회 선교단은 포교 활동에 있어 그들만의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방식만을 고집하며 일본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다 일본사람들의 문화를 적절히 수용하는 융통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선교사들은 일본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1579 년 일본에 도착한 이탈리아 출생 예수회 선교사 알렉산더 발리가노(Alexander Valignano)는 기독교 신앙이 일본땅에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 사람들의 관습과 사고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일본사회를 대상으로 한 복음의 전파와 일본대중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선교사들은 반드시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을 위해 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발리가노는 1590 년 리스본에서 마카오를 통해 일본으로 인쇄기를 들여왔고 이후 일본에는 다양한 설교집과 언어교육을 위한 서적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본래 예상했던 것보다 인쇄기는 더욱 유용하게 쓰여졌고, 서양 선교사들의 일본어 학습을 위한 서적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라틴어, 포르투갈어 교육을 위한 언어교육 서적 또한 함께 발행되었다(Midzunoe 2005, 2). 기독교 선교단체는 일본에 대해 공부하며 일본대중에게 서양의 문화를 강요하기보다 반대로 그들의 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했고, 이러한 선교단체의 노력이 결국에는 일본인들이 서양의 학문과 언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단체와의 갈등
기독교 신앙은 일본에 유입된 이래로 포르투갈의 보호막 아래 순항의 길만 걸어온 듯하지만 그 길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들이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본래 일본 내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고 있던 불교단체가 기독교 단체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단체는 일본 전역에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그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를 거짓된 교리라고 비판했으며 그로 인해 오랜 시간 쌓아온 불교의 명망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봉건사회의 제도로 인해 많은 수의 불교 신자들이 한꺼번에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면서 몇몇 도시에서는 사찰로 모아졌던 시주의 크기 또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찰로 생계를 유지했던 승려들의 삶은 급격히 힘겨워지기 시작했고, 승려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생계마저 위협하는 서양의 외래종교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 단체와 불교 단체 사이에서 벌어진 직접적인 갈등은 예수회 선교단체에서 자비에르의 편지를 복구해 발표한 자료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료에 따르면 자비에르가 카코시마에서 포교활동을 이어나가던 때 불교승려들은 사람들에게 루머를 퍼뜨려 선교단체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자극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다이묘들을 끊임없이 부추겨 더 이상의 기독교 확산을 금하는 법령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그리하여 카코시마에는 곧 기독교 포교활동을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제한하는 법령이 발표되었고 이후 더 이상의 포교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자비에르는 안지로에게 카코시마를 맡기고 신부 토레스와 수사 페르난데즈, 그리고 몇몇의 일본인들과 함께 히라도로 떠났다. 1549 년 9 월 자비에르와 처음으로 대면할 당시 다이묘는 분명 서둘러 미야코로 떠나려는 자비에르를 막아서며, 반년 뒤 바람이 좋아져 안전한 항해가 가능할 때 떠날 것을 당부했지만 법령 발표 이후에는 그의 출발을 허락하며 히라도로 떠날 수 있도록 배를 마련해주었다(Cieslik 1954, 3). 다이묘들은 대개 포르투갈과의 원활한 무역을 위해 예수회 선교사들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환대해주었지만 그 중에 몇몇 다이묘들은 불교단체의 설득에 넘어가 기독교 단체의 포교활동을 제한하곤 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2 년 반 남짓의 선교활동을 이어나가며 줄곧 유럽으로 편지를 보냈던 자비에르는 불교단체를 기독교 단체의 최대의 적으로 묘사했고(Coleridge, 1872), 일본에 남아있는 선교사들에게 앞으로 일본땅으로 건너와 선교활동을 이어나갈 선교사들에게 불교를 조심할 것을 경고했다. 사상 차이로 결코 함께할 수 없었던 두 종교에게 서로를 최대의 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탄압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기독교 포교 활동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든든한 지원 아래 순항의 길을 걸었다. 예수회 선교단은 회당과 학교를 지어 복음을 전파하고 심지어는 일본의 사절단을 꾸려 함께 유럽을 방문하면서 유럽 예수회와 일본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만남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면서 기독교의 난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노부나가 이후 일본 최고의 권력가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기독교 세력에 대해 반감을 표했던 것은 아니었다. 히데요시가 집권할 당시에도 포르투갈과의 무역은 여전히 중요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의 지속적인 무역과 또 선교사들로부터 무역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히데요시를 포함한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순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기독교 신앙도 1587 년 히데요시가 크리스천 세력의 확산을 제한하는 공고문과 신부추방령을 연달아 발표면서 기독교 신앙의 난항은 시작되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1587 년 7 월 23 일, 신부추방령을 발표하기 하루 직전 반기독교 공지문을 먼저 공표했다. 총 11 가지의 조항이 담겨져 있는 반기독교 공지문은 핵심적으로 앞으로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개종의 문제는 중앙권력에서 통제할 것이며 기독교 신자들은 일본 사회 전체에 해가 되는 악의 무리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세하게는 봉건 영주가 신하들에게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도록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강제하는 것을 금하고, 소작농 등의 하층민에게는 개종의 자유를 허가하지만 봉건 영주 계급에게는 개종 전 반드시 중앙권력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 일본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불교계의 한 종파, Ikko 를 언급하며 기독교 신자들은 이들보다 더 악한 무리임을 강력히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반기독교 공지문 이후 잇따라 발표된 신부추방령에서는 첫머리에서부터 일본은 신의 나라임을 강조하며, 신사와 불교를 망가뜨리며 신의 나라를 더럽히는 기독교 세력은 20 일 안에 신국(일본)에서 떠날 것을 명령한다(Elison 1988, 115-118).
결과적으로 두 포고령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지만 포고령 이후 기독교 단체는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큰 어려움을 처했다. 히데요시는 오무라 수미타다(大村純忠)가 예수회에게 양도했던 나가사키땅을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지로 두었고, 뿐만 아니라 긴키(Kinki)의 교회와 수녀원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 무역 상인들과의 교역은 여전히 중요했기에 포고령 시행을 잠시 중단하고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잦았다. 그리하여 반기독교 포고령의 시행은 중단되는 듯 보였지만, 1596 년 산 펠레페(San Felipe) 사건으로 인해 26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당시 크리스천의 도시라고 알려진 나가사키땅에서 잔혹하게 처형당하는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한다(Hur 2007, 34).
1596 년 산 펠리페라고 부르는 스페인 선박이 오늘날 코오치현인 토사(土佐)에 표착하게 되면서 당시 집권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앙권력의 허가 없이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 난
그림 3. 나가사키 순교 (출처: Saint Benedict Center) 히데요시는 이 기회에 자신의 명령을 어길 시 어떤 형벌에 처하게 되는지 본보기를 제대로 보이기 위해 쿄토에서 24 명의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기독교인들의 도시인 나가사키로 끌고가 공개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24 명의 기독교 신자들은 쿄토에서부터 나가사키까지 무려 1000km 가량의 거리를 한달 동안 걷게 되었다. 도중에 두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에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26 명이 되었고 1597 년 2 월 5 일 이 26 명의 기독교 신자들은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처형당했다.
나가사키 순교를 통해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심어주어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잠재우고자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나가사키 순교와 그 이후로도 진행된 몇 차례의 순교 사건들은 오히려 남은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권력은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기독교 신자들을 처형하기보다 그들을 아주 잔혹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고문하여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도록 유도했다(Website of Churches, 2014). 히데요시 정권 아래 발표된 반기독교 포고령은 결국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기독교 신앙에 보내는 중앙권력의 첫 경고음과 같은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 정권 아래 기독교 신앙의 난항을 알리는 경고음을 울렸다면 도쿠가와 정권 때는 그 난항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전개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히데요시 다음으로 일본의 최고 권력가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실 반기독교도 친불교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한 것 또한 아니었다. 그 역시 앞서 정권을 잡았던 노부나가,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과의 지속적인 교역을 위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환대를 베풀었다. 교토, 오사카 그리고 나가사키 등 일본 여러 도시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허락했고 심지어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재정적인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1600 년대 초 네덜란드, 영국 등과 같은 새로운 무역 파트너가 등장하면서 기독교 단체를 향한 이에야스의 온건한 태도는 180 도 달라지게 된다. 포르투갈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역 파트너를 갖게 되자 이것은 이에야스로 하여금 더 이상 포르투갈과의 무역 없이도 외국 물건을 수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크리스천 선교사들을 환대해야 하는 이유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중앙권력에서 기독교 단체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Hur 2007, 37).
도쿠가와 정권 아래 기독교 단체를 가혹한 탄압은 두 개의 반기독교 포고령이 발표됨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1612 년에 기독교 단체를 향한 비교적 짧은 경고문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 신앙을 금지하며 법령을 어길 경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Morries 2018, 300). 그리고 2 년 뒤 1614 년에는 앞서 발표되었던 비교적 짧은 경고문에 비해 긴 글의 배크리찬문(Hai Kirishitan bun)을 발표하였는데, 직전의 경고문과는 다르게 기독교 단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금지령을 어기는 신자들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가혹한 형벌을 내리겠다는 기독교 단체에 대한 강한 배척의 내용을 담고 있다(Morries 2018, 301- 306). 그 이후로도 많은 반기독교 관련 포고령이 발표되었고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가 정권을 잡고 나서는 서양과 무역을 금하는 포고령 또한 발표되었다.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감독 아래 제작되어 2016 년에 상영된 영화 사일런스(Silence)는 17 세기 도쿠가와 정권 아래 고통받던 포르투갈 출신 외국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있다. 사일런스는 비록 일본 작가 슈사쿠 엔도(Shusaku Endo)가 쓴 소설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예수회 선교단체에서도 인정할 만큼 영화의 많은 내용들이 실제 벌어진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Jesuits, 2021). 1614 년 외국인 선교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추방령과 일본 전역에 기독교 신앙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는 일보 역사상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중앙권력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기독교 신자들을 탐색했다. 마을사람들은 줄을 서서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가 그려진 돌이나 나무판을 밟아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그림 4. 반기독교 포고령 (출처: Jesuits)
단순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러한 행위는 곧 자신의 믿음을 버리는 것과 동일시 되었기에 명령을 거부하는 신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처형당하거나 가혹한 고문에 처해졌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 전역에 추방령이 내려졌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교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중앙권력의 감시를 피해 숨어살며 지하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을 찾는 사람에게는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고, 숨겨준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주어졌기에 은신하며 살아가는 것 또한 결코 쉽지 않았다. 은신하다 적발되는 경우 거꾸로 메달려 머리는 구덩이에 파묻힌 채 이마에 난 칼자국을 통해 한방울씩 흘러내리는 피가 멈추어 죽을 때까지 고통받다 죽는 가혹형에 처해졌다(Silence, 2016).
그림 5.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나무판 (출처: Jesuits)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후에 도쿠가와 정권은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불교 사찰에서 발행하는 증명서를 통해 증명하도록 하기도 했고(Hur 2007, 14), 이러한 정책 살아남은 크리스천들은 불교신자로 위장하여 지하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삶을 살다. 이들은 숨어지내는 크리스천으로 가쿠레 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이라 이름지어졌고 오랜 시간 자신들의 믿음을 숨겨오다 19 세기 들어 일본의 폐쇄 정책이 끝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도쿠가와 정권 아래 17 세기는 크리스천 대학살의 시대였다.
1549 년부터 점진적으로 증가했던 외국인 선교사 수는 1614 년을 기점으로 큰 폭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1586 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는 크리스천 외국인 선교사 수는 1614 년까지 매년 100 명 이상의 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1614 년 포고령 이후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이어지면서 1614 년에서 118 명으로 집계되었던 선교사 수가 다음해 1615 년에 58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Schütte 1968, 379-380). 선교사 수가 포고령 이후 이전해의 반도 안되는 수로 줄어든 당대 현실은 도쿠가와 정권이 얼마나 가혹한 기독교 탄압 정책을 이행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림 6. 기독교 신자들에게 내려진 고문 (출처: Jesuits)
기독교 탄압 역사의 대내외적 배경
기본적으로 신토와 불교 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일본땅에 외래종교인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순항의 길을 걸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무역과 관련하여 포르투갈이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처음 유입됐을 때도 새로운 종교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웠던 일본사회가 머나먼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서양땅에서 건너온 외래 종교단체에 대해서는 큰 반감을 드러내기는 커녕 처음부터 환대하며 생소한 종교의 포교활동까지 허락했던 까닭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점차 힘을 잃고 네덜란드, 영국과 같이 포르투갈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역 파트너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기독교 단체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급변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세계질서의 변화로 일본은 더 이상 교역문제와 관련하여 포르투갈에 크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고,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예전과 같이 중요하지 않은 만큼 기독교 단체를 특별히 환대할 이유도 자연스레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포르투갈의 쇠퇴와 네덜란드, 영국의 성장이라는 나라 밖의 변화된 상황이 일본 정치계에게 기독교 단체를 이전과 달리 마음대로 통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했다면,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대내적 배경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한 반감과, 기독교 관련 정치 세력으로부터 느끼는 정치적 위협 그리고 중앙권력의 확립과 강화 등의 여러가지 요소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펼쳐지면서 이것들이 결국 기독교 단체를 향한 가혹한 탄압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먼저, 일본사회 내 존재했던 기독교 단체에 대한 반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시기는 성장의 시기로 기독교 신앙이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되었던 1549 년 해부터 반기독교 포고령이 일본 전역에 실시되기 직전인 1614 년 초까지의 기간을 일컫고, 두번째 시기는 박해와 은신의 시기로 도쿠가와 정권 아래 반기독교 포고령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던 1614 년부터 기독교 박해가 막을 내린 1873 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Morries 2018, 92). 이처럼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크게 성장의 시기와 박해와 은신의 시기로 나누어지기에, 기독교 신앙이 크게 성장했던 시기에 일본사회 내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감이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겉으로 봤을 때 기독교 단체는 초기에 환대받다 후에 탄압받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일본사회의 반감도 처음엔 존재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 후에 생겨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어느 외래 종료이든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환대받기보다는 박대당하고, 호감보다는 반감을 사듯이 기독교 신앙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크리스천 선교사 단체가 처음부터 일본 대중과 정치계로부터 크게 환영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이어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주로 포르투갈과의 원활한 무역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진정한 환영이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궁극적으로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하여 상황에 맞춰 잠시 진심을 감춘 것이지 기독교 단체를 향하여 오로지 좋은 마음만을 품고 반감이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1600 년대에 들어서 네덜란드, 영국 등과 같이 포르투갈을 대신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가 새롭게 등장하자 빠르게 기독교 단체에 등을 돌린 도쿠가와 정권의 태도 변화 또한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존재했지만 단지 드러나지 않았던 반감이 상황이 바뀌게 되자 표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 단체를 향한 일본 중앙권력의 반감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첫번째 이유는 기존에 일본에서 자리잡고 있던 신토, 불교사상과 상반되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이 일본에 처음 유입되었을 당시 예수회 선교사 단체는 사상 차이로 인해 불교 단체와 많은 갈등을 빚어냈다. 본래 기독교 신앙은 유일신 사상으로써 다른 신을 섬기는 등의 우상숭배는 금지하며 오로지 절대자이신 하나님 한분만을 섬길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기존에 일본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신토와 불교사상은 800 만이 넘는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물론 인간은 죽고 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에 놓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부류는 사상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졌고, 기독교 신앙이 16 세기 중반부터 일본 곳곳에 퍼져나가게 되자 불교 단체는 기독교 신자 수가 늘어난 만큼 불교 신자들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불교 승려들은 조용하던 일본 땅에 생소한 외래 종교가 등장하여 불교 단체의 종교적, 사회적 입지를 위협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기독교 단체를 향한 불만과 적개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기독교 단체와 불교 단체 사이의 갈등이 단순히 다른 두 종교 간의 갈등으로 끝이 났다면 아마 일본의 기독교 탄압사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종교 간의 갈등은 정치계로까지 이어져 결국 기독교 단체를 향한 일본 정치계의 반감을 더욱 부추기게 된다.
본래 일본 정치계는 기독교 신앙이 일본에 유입되기 훨씬 오래전부터 불교단체와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다. 기본적으로 사찰에 새전을 바침으로서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사회적 풍토가 만연했던 시기였기에 누구든 사찰에 새전을 갖다바치고 불교 승려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다이묘들은 가장 많은 새전을 갖다바쳤던 사회계층이었기에 불교승려들과 더욱 가깝고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Cieslik, 1954). 이처럼 가깝게 지내며 하물며 자신의 업장소멸을 도와주는 승려들이 찾아와 기독교 단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다이묘들은 당연히 승려들의 말을 믿고 기독교 단체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에도 몇몇 다이묘들이 불교승려들의 꾐에 이끌려 크리스천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제한시키곤 했다는 기록을 살펴볼 수 있듯이, 불교와의 마찰은 기독교 단체로 하여금 일본 정치계로부터 미움과 반감을 사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신토, 불교 사이의 갈등이 정치계에까지 이어진 또 다른 이유는 1500 년대 신토, 불교사상의 정치적 유용성과 관련깊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시대 때부터 신토와 불교사상은 줄곧 일본 중앙권력의 정치적 도구로써 지배계층의 권력에 신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신 앞에서 맹세한 충성을 바탕으로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관계를 곤고히하는 데 이용되었다. 즉, 중앙권력은 신토와 불교를 지배층의 권력을 강화하고 잠재적인 하극상의 발생을 미리 저지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Kudora, 1996). 1500 년대에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기독교 포고령에 일본의 신의 나라라고 명시하며 신토와 불교를 옹호한 것 또한 이러한 고대의 정치적 관습을 따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불안정했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중앙권력의 확립을 위해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시점에서 신토, 불교 사상과 마찰을 일으키고 대중에게 이들의 허물을 부각시키는 기독교 단체는 중앙권력으로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앙권력은 기독교 신앙과 단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일본 전체의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 1587 년에 발표한 반기독교 공문에서 기독교 단체를 이전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불교의 한 종파인 Ikko 와 비교하며 기독교 신자들을 Ikko 보다 더 악한 무리로 표현했고, 하루 뒤에 발표한 신부추방령에서는 기독교 단체를 일본의 오랜 전통을 파괴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의 무리로 묘사했다(Elison 1988, 115-118).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기독교 단체와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매우 비슷한 방향의 정책을 펼쳤다. 1614 년 이에야스 정권 아래 발표된 배크리스찬문은 크리스천 선교사들을 가리켜 일본에 해로운 교리를 퍼뜨리고, 진실된 종교를 거짓되다 말하고, 나라의 공권력을 탐하는 악의 무리라고 비판했다(Morris 2018, 301-306). 다시 말해, 히데요시도 이에야스도 공통적으로 기독교 단체를 일본의 적, 일본사회의 악으로 만들어 이를 교묘하게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이용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악으로부터 신의 나라를 보호하는 수호자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켰고, 그와 동시에 기독교 신자들을 의도적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중앙권력의 입지를 단단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또 다른 배경은 중앙권력이 기독교 단체를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선교단체가 실제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도 부재하기에 섣불리 판단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의 유무를 차치하고 이 시대 기독교 단체들이 보여준 행보는 중앙권력으로부터 오해를 살만한 소지가 충분했다고 보여진다. 첫번째로, 선교단체는 시간이 흘러 더 넓은 지역에 걸쳐 선교활동을 이어나갈 뿐만 아니라 선교단체의 이름으로 일부분의 땅을 소유하기도 했다. 1580 년 오무라 수미타다가 예수회 단체에 나가사키 땅을 양도하면서 기독교 단체는 처음으로 일본땅에 기독교 도시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두번째로, 선교단체는 종교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대비하는 군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성벽을 높여 요새화시켰고 무기를 사전에 비치해놓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정치계 인사들을 포교활동의 주된 대상으로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삼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특별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Morris 2018, 107). 항상 경건하고 선한 일만 행할 것 같은 선교 단체가 마치 참전을 준비하는 이들과 같이 높은 성벽을 쌓고 무기를 준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종교 단체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기에, 이와 같은 종교 단체의 군사적인 면모를 포착한 이들은 분명 선교 단체가 선교가 아닌 다른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일본사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정도의 선교 단체의 행보는 사실 어떤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보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선교 활동의 일부라고 해석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정권 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례로 정권을 잡은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중앙권력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내전과 반란의 시대였다. 1467 년부터 1477 년까지 대략 10 년동안 지속된 오닌 전쟁(應仁―亂) 이후 중앙권력이 무너지고 무려 120 명이 넘는 다이묘들이 제각기 일부분의 국가영토를 지배하면서 서로 더욱 많은 권력과 넓은 영토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던 시기였다(Morris 2018, 101). 때문에 이 시대 일본사회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날들을 손에 꼽을 정도로 폭력으로 가득찬 시대를 보냈고, 선교사들 또한 잦은 내란으로 인해 선교활동을 중도에 포기하고 전쟁을 피해 다른 도시로 옮겨가야 하는 상황과 자주 대면하였다.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예수회 단체도 마냥 아무런 준비 없이 다이묘들의 도움만을 바라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모국에 있는 교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전쟁에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교 단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전쟁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땅을 선교단체 이름으로 소유하게 된 것도 분명 무력이 아닌 양도를 통해 얻은 것이었고, 내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기에 직접 전쟁을 대비한 것도 다이묘들의 보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안정적인 선교활동을 보장하고자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치계 인사들을 포교활동의 주된 대상으로 삼은 선교적 전략은 사실 초대 선교사 자비에르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당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던 봉건사회에서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법적으로 허가받은 포교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에게 다이묘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더군다나 봉건사회 특성상 한 명의 다이묘를 개종시키면 그 아래 3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개종했기 때문에 선교 단체가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 다이묘들을 포교활동의 주된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실 선교지의 당대 사회 현실을 반영한 당연한 선교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단체가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된 또 다른 배경에는 도쿠가와 정권 당시 기독교 신자로 확인되었던 다이묘들이 일으킨 정치적 스캔들이 관련되어 있다. 1614 년 일본 전역에 내려진 기독교 금지령의 촉발제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1608 년 마카오에서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일어난 무력충돌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스천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의 선원들과 포르투갈 상인들 사이에 무력충돌이 마카오에서 벌어졌고, 그 결과 60 명의 일본인이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해 1609 년 마카오 무력충돌 사건에 관여했던 포르투갈 출신 마카오 총독 안드레 페소아(Andre Pessoa)는 선원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정박했다. 이 때 하루노부는 마카오 사건을 기억하고 복수극을 펼쳤고 하루노부가 승리하면서 페소아와 그의 선원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하루노부와 같은 편에서 함께 싸웠던 또 다른 크리스천 다이묘인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는 하루노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이에야스로부터 보상을 받길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고, 하루노부에게 그를 대신해 이에야스의 측근이자 자신의 지휘관인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를 설득해 이전에 아리마 가문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이하치는 하루노부에게 이에야스가 곧 땅을 하사할 것이라는 거짓된 소식을 전했고 이에 기뻤던 하루노부는 다이하치에게 후한 뇌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1612 년, 기다림에 지친 하루노부는 직접 마사주미를 찾아가 땅에 대한 얘기를 꺼냈고 이로써 다이하치의 거짓은 탄로나게 되었다. 두 크리스천 다이묘의 스캔들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이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조사 결과 다이묘들 사이에 기독교 신앙이 넓게 확산되어 있으며, 자신의 부하들 사이에도 기독교 신자가 많고 그들 사이에는 신앙으로 형성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나,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며 도쿠가와 정권의 권력 장악을 위협하고 있을 당시,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친기독교 성향이 강했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에야스의 반감은 이를 계기로 더욱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Hur 2007, 35-40).
결국 기독교 단체가 탄압받게 된 대내적 배경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중앙권력 확립을 위한 강압적인 통치가 핵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이묘들은 물론 종교 세력과 소작농 세력까지 합쳐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던 시기에 도쿠가와 가문은 앞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본받아 중앙권력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무력을 통해 위협하고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 선교 단체와 일본 내 기독교 신자들은 앞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요소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물려 통제적이고 강압적인 도쿠가와 정권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며
일본 기독교 탄압사는 일본 안팎의 변화가 맞물려 펼쳐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포르투갈이 흥망성쇠, 대내적으로는 얽히고설킨 복합적인 배경 중에서도 중앙권력을 바로 세우고 국가 2.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배경: 1549-1614_데지마 전체를 철저히 통제하고자 했던 도쿠가와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가 일본 기독교 탄압사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과 반대로 믿음과 신념을 지키려는 자들의 기나긴 싸움으로 비춰지지만 또 다른 복합접인 관점에서는 역사란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안팎으로 여러가지 관찰 가능한 요소와 관찰 불가능한 요소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펼쳐진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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