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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 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마오쩌둥 기념관 · 손승포 · 고려대학교

들어가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1962년 2월 무렵, 처칠은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냉전체제라는 새로 운 국제 질서의 도래를 알린다. 미소 갈등의 심화는 중국에도 지 대한 영향을 미치며 당해 6월 국공내전의 발발을 견인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 마오쩌둥은 세계 정세에 대한 독자적 판단을 담은 ‘중간지대’ 개념을 구상하게 된다.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 후 중간지대 개념을 더욱 체계화하여 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삼개 세계론을 주창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마오쩌둥 집권기(1949-1976) 중국 외교는 대략 10년 단위로 나누어 세 단계에 걸쳐 이해할 수 있다(가와시마 신, 모리 가즈코 2012).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는 즈다노프 (A. Zhdanov)의 양대진영론(兩大陣營論)을 수용한 친소반미 노선의 소련일변도(蘇聯 一邊倒) 외교, 1960년대에는 중간지대론에 기반 한 제3세계외교와 더불어 반제반수(反帝反修)로 대표되는 반미반 소의 고립주의 외교, 그리고 1970년대는 삼개세계론을 바탕으로 한 반소 국제통일전선의 형성과 미∙중 데탕트의 추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본 글은 세 시기를 마오 고유의 중간지대론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1950년대에서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신 중국 외교는 냉전 체제 하 초강대국이던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적 으로 돌리며 고립을 자처한 시기로 분명히 국제 안보 전략의 논리 로 설명하기 어려운 양상을 띄고 있다는 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김재철, 2007). 중국이 가장 안보적으로 취약했던 시기를 지탱하던 사상적 토대인 중간지대론과 그 유산에 대해 학계의 주 목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 역시 본 글의 필요성을 말해준 다.

혹자는 마오쩌둥 개인의 대외 인식을 통해 신중국 외교를 이 해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당시 마오쩌둥은 단순한 정치적 지도자가 아닌 백 년 간 지속 된 국가적 혼란을 끝낸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과거 황제의 지위에 비견될 만한 것(Teiwes, 2001)이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혁명과 건국이라는 이중의 과제가 교차하던 냉전 초기, 중공 지도자들의 대외 정책에 관한 정보와 경험의 빈곤은 외교 안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보 전략에 있어 마오쩌둥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결과를 낳은 바 있다(뉴쥔 2015, 5-63). 즉, 마오쩌둥의 대외 인식은 곧 신중국의 대 외 정책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마오쩌둥의 사상적 유산이 현대 중 국 외교의 기본 원리로 계승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마오 개인에 대 한 연구는 곧 신중국 초기 외교에 대한 연구 다름이 아닌 것이다.

중간지대의 창안과 소련일변도 선언

“중간지대”에 관한 마오의 독자적 인식은 국제적으로 냉전 구도가 정착되고 국내적으로는 내전이 진행되던 1946년 8월,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A. L. Strong)과의 담화에서 처음 확인된다.

“미국과 소련은 매우 광활한 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거기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주의 많은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반(半)식민지 국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반동파가 이러한 나라들

을 굴복시키기 전에는 도저히 소련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중

략)… 미국은 여러 가지 구실 하에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 군사

배치를 하고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동파는

그들이 세계 각지에 이미 설치해 놓았거나 이미 설치하려는 군

사기지는 모두 소련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말대로 이러한 군사기지들은 소련을 목표로 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지금 맨 먼저 미국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은 소 련이 아니라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나라들입니다.” (마오쩌

둥 1946)

마오는 냉전 질서 이래 세계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극 화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양대 패권국 사이에 광범위한 중간지 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국제 정세에 관한 냉전 적 도식을 수동적으로 섭취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중간지대는 대 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건설된 신생 민족 국가들로 구 성되어 있었으나,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 들 역시 중간지대 개념에 포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세계는 미소에 이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소련 그리고 중간의 광 활한 지대에 의해 삼분되어 있는 것이며, 중간지대에 위치한 수많 은 자본주의, 식민지 그리고 반식민지를 장악하는 것이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우선적 목표에 해단한다는 것이다.

마오가 세계를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자유주의 세력과 소련 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으로 이분하여 이해하기 보다는 중간지대를 포함해서 삼분하여 이해하게 된 데에는 그의 모순론적 사고가 기여한 바 있다. ‘모순론’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 에서 이용되는 변증법적 논리를 중국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발 전시킨 것으로, 마오는 사회발전의 기반은 모순의 지속적 발생에 서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현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 단은 당대의 주요 모순을 파악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것이다(김옥준 2011, 35-41). 이러한 마오의 모순론적 사고는 중국 혁명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전후 국제 질서를 이해하는 데에도 지 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예가 중간지대론인 것이 다. 마오는 당시 세계 주요 모순이 미소를 둘러싼 이념 및 체제 대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과 인민 혁명 세력 사 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국가들이 연대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할 것을 촉구하였다. 중간지대 국 가들에 대한 미국 제국주의의 위협을 구체화하고 이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마오가 제기한 것이 바로 “연막론”이다. (Mao Zedong 1946, 43-45) 미국의 ‘반소 전쟁 슬로건’은 중국을 포 함한 중간지대 국가로의 침략 행위를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한 것으로 중간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은 미국의 책략에 절대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Mao Zedong 1954, 121-122; Mao Zedong 1954, 123-126)

세계 주요 모순을 미국 대 소련이 아닌 미제 반동 세력 대 인 민혁명세력 간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마오의 사고는 이후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중국에 대한 미제국 주의의 광적인 침략에 반대”하고 “내전으로 중국 인민을 학살하는 매국적이고 독재적인 국민당 반동 정부에 반대”하는 혁명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김승일 2008, 270-274) 이후 ‘인민민주주의 독재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미국을 사회주의 진영의 주적으로 한 다고 언급하고 있다(김승일 2008, 390-405). 국공내전이 진행되던 시 점 중국 공산당의 주적이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 당 정부였다면, 혁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 주적은 미국으로 전 환된 것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시 점인 1950년 2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소련과 “중소우호동맹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하고 소련일변도 노선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것 이 중국 대외 정책의 커다란 선회 – 중간지대론으로부터 소련일 변도로의 변화 - 로써 인식되는 것은 실상에 대한 절반의 진실 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일관성이 부재해 보일 수 있 겠지만 마오쩌둥의 사고에 따르면 중간지대론과 소련일변도 노선 은 모두 제국주의 세력과 인민 혁명 세력 간의 모순을 공유하고 있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마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진영의 대 립항은 ‘자본주의’진영이 아닌 ‘제국주의’ 진영이었던 것이며 중국 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안보적 위협을 주는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에 게 대항한다는 데에서 정합적 내부 논리를 가진 일관된 대외 정책 이었던 것이다(이원준 2019).

중국은 실제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중간지대의 제3세계 국가 외교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간지대는 중공 지도자들에게 있어 서 세계정치에 영향을 미칠 거대한 잠재력이 있는 전략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특히 아시아는 세계정치 판도를 변화시킬 힘이 내 재되어 있는 동시에 중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지 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뉴쥔 2015, 401-434). 중국은 혁명과 투쟁 대신 비교적 온건한 언어 구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사를 통해 기존의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이미지를 완화시키는 한편 침략과 수탈을 반복한 서구 산업 국가들과 차별화된 인상을 심어 주고자 하였다. 특히 당시 중국이 내세운 주권과 영유권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및 평화공존의 5개원칙 은 식민지라는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는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반둥회의를 통해 평화10원칙으로 확장 된다. 중간지대는 곧 양대 진영 밖에서 중국이 펼치는 새로운 전 략 경쟁의 무대이자 냉전 체제 하에서 모색되지 않았던 새로운 외 교 공간의 발견으로, 특히 그 과정에서 제시된 평화 5원칙은 향후 중국 외교 수사를 규정짓는 규범적 원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중간지대론과 삼개세계론

마오쩌둥의 중간지대론은 소련일변도의 선언 이후 1954년 중국 대외 정책의 구체적 전략으로써 등장하는데 마오는 미국과 ‘중간 지대’의 균열, 자본주의 세력 내부의 모순을 활용하여 제국주의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마오는 영국노동당 대표단과의 담화에서 다음 과 같이 주장한다.

“미합중국은 일본에서 영국에 이르는 중간지대를 장악하고자 하

는 이면의 동기를 숨기고 반공이라는 구실을 만들고 있다…(중

략)… 미국의 목적은 광활한 중간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을 점령하 고, 괴롭히고, 그들의 경제를 통제하며, 군사 기지를 설립하고,

그들이 쇠약해지는 것을 목격하는 데 있다. 여기서 일본과 독일

은 중간지대에 포함된다.” (마오쩌둥, 1954)

이는 1946년에 제기된 제국주의 “연막론”을 일면 답습한 논 리 같아 보이지만 초기의 중간 지대 개념과는 중대한 차이를 지니 고 있다. 1946년 8월에 제시된 중간지대 개념에서의 주요 행위자 가 혁명적 인민 세력이었다면 1954년 등장한 제1차 중간지대론에 서의 주요 행위자는 전후 질서 속 탄생한 수많은 신흥독립국은 물 론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의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 들을 지칭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뉴쥔 2015, 407-409). 중간지대 국가에 대한 마오의 발전된 이해는 다음의 글을 통해 더욱 명확히 표현된다.

“서독과 같은 독점자본주의 국가는 미국과 협력하는 동시에 저

항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지역을 중간

지대라 부르는 것이다. 사회주의 진영이 한 쪽으로, 그리고 미국

이 다른 한 쪽으로 계산된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중간지

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간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은 모두 본질적

으로 상이하다…(중략)… 그러나 미국은 그 모두를 집어삼키고자

한다.” (마오쩌둥 1962)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즉, 마오는 양대진영론의 기초 위에서 미국의 영원한 우방으 로 인식되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기 모순이 심화 하고 있으며 그들 또한 반제국주의적 기치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연대가 가능함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유연한 중국 외교 정책 집행 을 가능케 하고자 한 것이다. 중간지대에 관한 마오의 확장적 인 식은 프랑스 드골이 주도하는 독립 외교의 등장과 함께 더욱 굳어 진다. 프랑스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독 자적으로 핵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을 목격한 마오는 미소 양 제국 의 이분법적 냉전 구도를 거부하는 흐름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역시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Michael Yahuda 1983, 104-114).

마오는 이후 세계가 “두 개의 중간지대”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지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의 신생 독립국들이 개발도상국으로의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그들 을 제1중간지대라고 불렀다. 두 번째 지대는 “유럽, 일본과 캐나다” 로 대표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써 미국과의 사이에서 모순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이들을 제2중간지대라 불렀다. 즉, 세계는 삼 분되어 있으며, 중간지대는 다시금 제1중간지대와 제2중간지대로 나뉜다는 것이며, 제1중간지대는 제2중간지대의 산업국가들을 포 함한 국제적 통일 전선을 형성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 다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를 걸쳐 모든 인민은 미국에

반대한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많은 사람들

역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몇몇 제국주의자들 또한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기도 한다. 미국에 대한 드골의 반대가 그 증

거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제 두 개의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는

관점을 제기할 수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그

첫 번째이며, 유럽,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는 그 두 번째에 해

당한다. 일본 역시 두 번째 중간지대에 속한다. 일본의 독점 자

본주의자 역시 미국에 불편을 기색을 내비치며 공개적으로 반대

하기도 한다. 비록 많은 이들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은 스스로 미국을 권좌에서 쫓아낼 것이다.”

(Mao Zedong 1964)

세계는 소련이 이끄는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이 이끄는 제국주 의 침략 세력, 그리고 그 사이 중간지대 세 개의 세계로 구성되며,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는 국가들은 더 이상 중국공산당이 반제국주 의 투쟁을 수행하고 지원하는 혁명의 최전선이 아닌 반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연대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 위상이 변화한 것이다. 당시 중국의 외교적 노력은 제1중간지대 국가의 민족해방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는 상당 부분 중국의 세계혁명전략이 라는 지극히 이념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곤 하였다(김옥준 2009). 그 러나 마오는 중간지대론을 통해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뿐만 아니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라 종래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인식되던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 의 국가와의 연대를 추진할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삼개세계론

중간지대에 관한 마오의 70년대에 접어들며 결정적 변화를 경험하 게 된다. 이는 60년대부터 진행된 소련과의 관계 악화에서 기인하 고 있는데, 그는 제2차 중간지대론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보다 현 실주의적 방향으로 논리를 발전시킨 삼개세계론을 주창하게 된다.

“마오쩌둥: 제1세계에는 누가 해당되는가?

카운다: 착취자와 제국주의자들이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 그렇다면 제2세계에는?

카운다: 수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오쩌둥: 나는 미국과 소련이 제1세계에 속해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간은 제2세계로 일본과 유럽, 호주와 캐나다가 해당된다.

나머지는 제3세계에 해당한다.” (Mao Zedong 1974)

마오는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양대진영론의 기초 위에서 세 계를 삼분하던 종래의 인식에서 벗어나 미국과 소련을 동일한 제1 세계권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 대한 자기인식은 중간지대 국가에서 제3세계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소련을 더 이상 중국과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동맹국이 아닌 투 쟁해야 할 저항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련은 미 국과 같이 제3세계를 착취하는 제1세계의 제국주의 국가로 여겨지 게 된 것이다.

중국과 소련 간의 관계는 사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함께 시 작된 오랜 애증의 역사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계속해서 의심하였 으며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는 과정과 그 이후 소련 이 보여준 거만한 태도는 마오쩌둥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중국의 일변도 외교는 소련으로부터 경제적, 기술 적 지원을 받고 소련식 산업화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경제개발을 성취하는 한편 미국이라는 압도적 안보 위협에 대응해야만 했던 현실적 필요 속에서 추진된 정책에 불과하다는 평가 역시 존재한 다(Michael Yahuda 1983; 이동률 2015). 스탈린 사후 1950년대에 접어들어 집권하게 된 흐루쇼프(N. Khrushev)가 주도한 ‘스탈린 격 하 운동’은 중국과 소련 간의 수정주의 이념 논쟁을 부추겼으며 한국 전쟁(1950)과 타이완 해협 위기(1958) 속에서 노정된 소련의 군사적 소극성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Nakajima Mineo 1977). 또한, 흐루쇼프가 내세운 “평화공존론”은 타파해야 할 수정주의적 이념이자 중국에 대한 사 상적 그리고 안보적 배반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 로 1960년대에 들어서 미소 간에 이루어진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1963)”은 소련이 미국과 함께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 공모하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고 있다는 중국의 의혹을 가중시켰으며(Miachael Yahuda 1968) 소련 의 체코 침공(1968)은 중국으로 하여금 소련식 팽창주의를 중국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는데 이르게 하였다. 양국 간의 긴장 은 결국 중소 간의 국경 분쟁(1969)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이는 마오의 안보불안감을 가중시키며 본격적인 반소 통일 전선 형성에 나서게 한다(Yang Kuisong 2000).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이 군사적으 로 중국을 공격할 실질적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에 기 반하여 가중된 안보 불안감은 향후 미중 데탕트를 추진하는 배경 으로 작용하게 된다(Radchenko, Sergey 2017). 결국 중국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안보 인식에 따라 미제국주의와 소련 사회제국주의를 동시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와 반수정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해 제1중간지대와 제2중간지대의 연대를 통한 통 일혁명전선 구축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김옥준, 2009).

중간지대론의 의의와 한계

마오쩌둥의 중간지대론은 중국 외교의 높은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청왕조의 몰락 이후 지속된 정치적 혼란을 끝내고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을 회복해내고자 하는 마오의 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 하나 그 한계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중간지대론의 허와 실, 공과 과를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의의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마오쩌둥은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국제 질서를 냉전이라는 체제 대립의 맥락이 아닌 서세동점의 시 기 이래 지속되어 온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해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중간지대 개념에서 세계적 대립구도의 경계선은 미소 사이가 아닌 제국주의적 반동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중간지대’의 인민 사이에 그어진 것이다(이원준 2016). 이 는 곧, 동서간의 수평적 갈등관계를 상정하는 냉전적 도식을 거부 하고 남북간의 수직적 갈등 관계- 선진자본주의 세력과 개발도상 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신생독립국가 사이의 모순 – 를 상정하는 혁신적인 논리(Okabe Tatsumi 1977)였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추진된 평화5원칙과 반둥 외교는 미중이 주도하는 양극 적 국제 질서 속 중간지대로의 진출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서 지도자적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중국 다자외교의 시발점이라는 평가 역시 존재한다(뉴쥔 2015, 434-435).

마오쩌둥의 중간지대론은 또한 국내 정치적 목적성을 가진 논 리였다. 마오는 세게 모순에 대한 독자적 판단을 통해 중국 혁명 운동의 중요성과 지위를 격상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 마오 는 의도적으로 미소 갈등의 중요성을 격하하는 한편 세계인민과 제국주의적 반동세력 간의 투쟁을 부각시켜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을 그 세계사적 흐름 한 가운데 위치시킨 것이다. 즉, 중간지대론 을 통해 중공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은 단순히 중국 내부 모순을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혁파하는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의의를 띈 운동으로 격 상되는 것이다.

특히 국제 정세의 핵심 모순이 미국과 ‘중간지대’ 사이에 존재 함을 전제함으로써 미국의 물질적 지원을 받는 장제스 국민당 정 부와 중국 공산당 간의 전선은 곧 세계 혁명의 최전선으로 치환되 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마오는 사회주의 혁명의 정치적 명분과 정 당성은 물론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으며, 이후 소련과 의 내부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원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Okabe Tatsumi 1977, 231-233).

또한, 베트남 전쟁의 발발은 마오가 중간지대론에서 지적한 세 계의 주요 모순이 증명된 사건이자 중간지대로 진출하고자 하는 미 제국주의의 야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Michael Yahuda 1983, 110). 이후 국제혁명전선에서의 중국의 주도적 역할과 지위를 강조하는 중간지대론의 논리는 중공 지도자들이 외 부 세계를 이해하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새롭게 정의 내리는데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뉴쥔 2015, 18-23).

한계

그러나 중간지대론은 한계 역시 명확했다. 마오쩌둥이 이끌었던 대약진운동(1958-1961)과 문화대혁명(1966-1976)의 흐름 속에서 과격화 된 중국의 외교는 국제환경 현실과 괴리된 채 고립되어 갔 으며, 중국의 대 중간지대 외교 역시 초기의 성공 이후 별다른 성 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특히, 혁명의 분위기가 중국 외교의 수 사를 지배하던 60년대에 이르러서 중국은 동남아 국가 정부와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온건한 외교 정책은 혁명 수사 로 점철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기니, 가나, 말리 3개 국을 제외 하고는 사회주의 혁명 세력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김옥준 2011, 72-76).

또한, 중간지대에 위치한 제3세계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세 계 패권 세력에 저항한다는 발상은 상당 부분 프롤레타리아 국제 주의와 같은 사회주의 이념에서 비롯된 관점으로 객관적인 물상 조건을 직시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특히, 1950년대 반미노선에 더해 1960년대 반소 노선을 걷게 되며 지나치게 이념화된 중국의 대외정책은 조국을 유례없는 안보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소련은 1969년 전다바오에서의 무력 충돌 이후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120만 대군을 주둔시키며 북방 전선을 형성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국은 남방에서 미국과의 간접적 전쟁까지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 제국주의와 소련 제국주의에 모두 대항해야 하는 외교안보적으로 매우 취약했 던 시기를 경험하며 중국의 안보 불안감은 극에 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마오가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진하는 것은 곧 형해화 한 중간지대론을 포기하고 현실주의적 대외 정책으로의 회귀를 선언 하는 것 다름 아니었다. 냉전 체제 하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미국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과 소련을 동시에 적대시하는 것은 애당초 중국의 군사력이나 경 제력에 미루어 보았을 때 비현실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가 명확했다면 어떻게 중간지대론에 기 반한 고립주의 정책이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었 을까. 물론 외교의 이념화가 한 가지 원인이겠지만 이외에도 국내 정치적 원인이 존재하였다. 마오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기점으로 위축된 국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급진적 대외 정책을 대중 동 원의 도구로 활용했다 것이다(Chen Jian 2012, 10-11). 대약진운동에 따른 극심한 경제난으로 마오는 국내 정치적 동력을 상실하기 시 작하였으며, 그가 이끈 혁명적 열기 역시 식어가는 듯했다. 국내적 으로는 류샤오치(劉少奇)를 비롯한 정통 레닌주의자들과 덩샤오핑 (鄧小平)을 비롯한 실용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하 였기에 마오가 주도하는 혁명에 대한 당 내부의 지지 역시 빈약해 지고 있었다. 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 역시 퍼지기 시작하는 바 로 이 시점, 마오는 극단적 대외 정책을 통해 마오 개인의 권위 회복은 물론 계속적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Chen Jian 2012, 49-84). 실제로 그는 소련과의 이념 논쟁을 국내 정 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활용하기 위해 그 양상을 극대화 한 면이 있으며, 반수정주의의 기치 이래 류샤오치를 축출하였다. 다시 말해 60년대 혁명 외교는 마오쩌둥 스스로가 국내 정치적 목 적을 위해 스스로 동원한 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보전략적 측면에서 반소반미 노선의 장기화를 마오 쩌둥이 의도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대신, 국내외적 상황 – 혁 명적 열정과 베트남 전쟁 – 속에서 중간지대론은 강제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양패권국을 적대시하는 정책은 소련의 위협으로 안보 불안감이 극에 달하자 데탕트로 귀결된 것 이다.

결론

마오쩌둥 집권기 중국의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적 침략 세력에 대항 하는 민족해방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친소반미에서 시작하여 반소반미, 그리고 반소친미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국의 대외 정책은 일면 그 예측가능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한 외교 로 여겨질 수 있지만, 중국 외교는 세계의 주요 모순을 파악하여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 세력의 변화에 따라 힘의 균형을 모색하고 자 했다는 데에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마오쩌둥은 중간지대 개념을 통해 세계의 주요 모순을 미소 간 의 냉전 질서가 아닌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의 인 민 혁명 세력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중국혁명의 최대 위협은 미국을 등에 업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였다. 즉, 마오 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제1차 중간지대론을 통해 중국 혁명 을 이미 자기 운동 능력을 지닌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해석한 것이 6. 마오쩌둥의 신중국 외교: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의 이상과 한계에 관하여_마오쩌둥 기념관 다. 이를 통해 중공은 국민당 정부에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정당 성과 역사적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중국 혁명의 위상을 세계사적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격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이후 중국은 소련과의 동맹을 택하지만, 중국은 머지않아 소련을 중국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다. 소련 특유의 거만한 태도는 건국 이전부터 마오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군사 동맹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보여준 군사적 소극성, 스탈린 사후의 수정주의 이념 논쟁, 동유럽에 대한 폭력적 간섭과 반복되는 중국과의 국경 충돌은 결국 중국으로 하여금 소 련의 팽창주의를 실질적인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마오는 제2차 중간지대론에서 세계가 삼분되어 있다는 인식을 드 러내며 종래의 연대 파트너로 여겨지던 신생독립국의 제3세계 뿐 만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반제국주의 기치 아래 연 대할 수 있는 파트너임을 인정하며 반소반미 노선을 확립한다. 그러나 근 십여 년 간 지속된 혁명외교는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며 극단적 이념성에 기반한 중간지대론은 포기되고 미중 데탕트가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마오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국내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고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중간지대론에 기반 한 혁명외교를 추진했음 역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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