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이화원 · 이정승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서태후와 이화원, 격변의 19세기
중국은 기원전 11세기 서주 시대부터 수천 년 동안 조공 책봉, 기 미, 정벌, 회유 등 여러 변환을 거쳐 중화문명 중심의 전통 천하
∙
질서를 유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던 19세기에는 1840년 아편전쟁을 시작하여 끊임없는 외세의 압력으로 봉건 질 서의 붕괴와 근대 국제질서를 직면하게 된다. 중국의 근대화를 위 해 한인 출신 관료들은 리홍장을 필두로 전통의 유학(儒學)을 중 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기 위해 근대 서양의 문물 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받아들여 양무운동을 전개한다. 실제 당시 청나라는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로부터 함대를 구입하여 1888년 북양함대를 창설하는 등 서양 기술을 적극 수용하였다.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양무운동 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금수(禽獸)로 취급했던 서양 국가의 문물을 처음 도입했다는 점에서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기존 전통 천하 질 서를 벗어났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반면 서태후는 1888년 여름 휴 양지로 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재건하였는데 이것이 청일 전쟁의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이 화원은 그만큼 단순히 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세계유산이 아니라 당대 중국의 전통 천하 질서가 근대 질서와 격돌하는 시기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주류 청국관 – 위정척사와 사대주의
그렇다면 그 당시의 조선에서는 청조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수천 년 동안 중국 천하 질서 안에서 조공 책봉 체제를 통해 중국과 사 대교린 관계를 유지해온 한반도는 중국 사대주의와 위정척사가 당
∙
시 국제 정치론을 주도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청나라와 마찬가 지로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을 맞이하게 된다.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가 1866년 8월 병인박 해를 계기로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정부에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 프랑스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 하였을 때 당시 위정척사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동부승지
⋅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외적과 화친하지 말고 항전해야 한 다고 척사(斥邪)의 상소를 올린다.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이제 국론이 交·戰 두 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는데 洋賊을 공격해
야 한다는 것은 우리측의 주장이요, 양적과 和交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적 쪽의 주장입니다. 전자처럼 하면 우리 나라가 옛 풍습
인 衣裳之舊를 보존할 수 있지만 후자처럼 하면 인류가 禽獸之
域에 빠지고 맙니다.
이항로는 서구 문명은 인류의 문명이 아닌 금수의 문명이며, 프랑 스 침략자들과 화친하는 것은 인류를 금수의 지경에 빠뜨리는 것 이며, 만약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사람들을 짐승이나 다름없는 지 경에 빠뜨리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이항로는 조선의 문명을 보전하려면 단호히 배척해야 나라안 사람들과 문물제도를 예전과 같이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이항로가 병인양 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올린 상소에는 문화와 야만, 정통과 이 단을 구별하는 화이의식(華夷意識)에 기반을 둔 위정척사론이 피 력되어 있으며 서양 문물은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일본 과의 교류에서도 최익현(崔益鉉)은 1876년 1월 23일(음) 궁궐 앞 에 엎드려 도끼를 들고 일본과의 개항을 반대하고 청국을 사대할 것을 상소를 올린다.
. . .청인(淸人)의 뜻은 중국의 황제가 되어 사해(四海)를 다스리
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중국의 패주(覇主)를 대략 본받아서 인의에 근사(近似)한 것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이니, 이
는 단지 이적(夷狄)일 뿐이었습니다. 이적은 사람입니다. 그러므
로 당장 도리의 여하는 묻지 않고 만약 소국으로써 대국을 섬길
수만 있다면[以小事大], 피차 호(交好)해서 지금까지 온 것이요,
설령 저들의 뜻에 미흡한 것이있더라도 관서(寬恕)의 도량이 있
어 침학(侵虐)하는 환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적에 이르러선,
한갓 화색(貨色)만을 알고 다시 추호의 인리(人理)도 없으니 이
는 단지 금수일 뿐입니다. 사람과 금수가 화호(和好)해서 함께
무리 짓는데도 우려가 없다고 보장한다는 것은, 신은 그것이 무
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화(和)가 난망(亂亡)을 초래하
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이 상소문에서는 최익현은 왜양일체의 관점에서 적과 화친할 경우 중화를 어지럽히고 삼강이 무너져 만사가 무너지는 환란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전(前) 영의정 이유원 (李裕元)은 1879년 11월 청 북양대신 리훙장에게 조선이 중국의 소국으로서 서양 국가와 조약을 체결해도 서양 국제법이 소국에는 실효성이 없고 조선에 실익도 없다고 직접 서한을 보낸다.
우리 작전(爵前)께서 속마음을 털어놓으셔서 길함을 좇고 해로움
을 피하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하고도 정성스러우시니 설령 아비
와 형이 자식과 동생에 대해서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니까? 하지만 형세가 허락하지 않아서 뜻을 받들 방도가 없으니,
크게 어리석은 제가 종신토록 깨닫지 못함이 도리어 그럴 법하
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제가 의지하고 믿는 것은 태서
와 일본이 이미 작전(爵前)의 위진(威鎭) 아래서 감히 함부로 굴
지 못하니, 소방(小邦)은 영원히 대덕(大德)에 의뢰해서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매번 가르침을 받들기만을 밤낮으로 기축(祈
祝)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당시 수구적인 지배세력은 척양(斥洋)·척왜(斥倭)하며 청국 을 사대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반면에 당시 비주류였던 개 화파의 청국관, 나아가 19세기 말 젊은 개화파였던 좌 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은 어땠을까? 윤치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 반에 일본·중국·미국에서 최초로 유학하여 근대 학문을 수학한 개 화기의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이었다. 윤치호는 1880년대 조선 말 기부터 1940년대 일제강점기까지 약 60여 년간 한문, 국문, 영어 로 작성한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와 수많은 개인 서한을 통해 당시 본인의 생각을 담은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이번 답사보고서 를 통해 좌옹 윤치호라는 인물에 대해 상세히 관찰하여 척사와 개 화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 격동의 19세기 말 윤치 호는 어떻게 청나라를 바라보았는지, 나아가 사랑방 수업에서 배 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시대 배경에서 어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런 시각이 형성되었고 궁극적으로 조선이 개혁하는 데 어떤 꿈을 품었고 좌절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윤치호의 청국관 – 청소년기 (1865 – 1885)
1881년 좌옹 윤치호는 17세 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유길준과 함 께 도일하여 유길준과 함께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어 이후 일본 최고의 개화사상가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설립한 도쿄 소재 도진샤(同人社)라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어학에 재주를 있었던 윤치호는 1882년에는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 영사관의 Leon. V. Polder공사에게 영어를 배우며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영 어를 공부한 지 24일 밖에 안된 윤치호는 미국의 Lucius H. Foote초 대 주한 공사를 동반하여 귀국해달라는 청을 받고 조선으로 귀국 하여 고종과 푸트(Foote) 공사 사이의 통역을 하는 통리교섭통상사 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만 18세밖에 되 지 않았다. 윤치호는 당시 청나라에 의존하는 조선의 사대당에 대 한 반감을 감추지 않고 푸트 공사가 개화의 힘이 되어 주기를 패 기와 함께 요청한다.
공사는 개화파를 위해 최선의 고문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
이 저의 큰 소망입니다. . . 사대당은 재등실이나 소생이 통역함
을 꺼리고 청인이 통역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된다
면 우리는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소생의 열정어린 청
이오니 이것은 내 나라를 위함이고 공사를 위한 말씀입니다.”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윤치호는 당시 조선의 빈곤과 낙후가 청나라에 이끌려 다닌 그 수 모의 역사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는 1884년 2월 일기에서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지금 우리나라와 청국과의 관계는 5대주 사람들이든, 삼척동자
이든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과 옛날을 견주어
볼 때 사세가 많이 변하였다. 옛날에는 속방(屬邦)이 되어 그 밑
에서 만족히 지내는 것은, 비단 사세가 그렇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 나라를 지키는 한 가지 방책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종주
국(宗主國)을 각별히 섬기고 옛 법규를 지키는 것은 비단 일에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게 된다.
윤치호의 청국관 – 상해망명 시절 (1885 – 1888)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윤치호는 정변을 주도하지 않았지만 김옥 균과 오랫동안 친분이 있어 이듬해 1885년 1월 19일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상해에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회에 서 설립한 The Anglo-Chinese College중서학원(中西學院)에 입학하여 4년간 Young J. Allen 박사와 W. B. Bonnel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 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게 되었으며. 상해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직접 청국의 일상생활 을 유심히 지켜본 윤치호는 청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청국을 특히 불결하고 게으른 나라로 인식했다.
이날은 청국의 새해 아침이다… 상하이에 대한 소견. . .길 위에
서 마구 오줌을 누어 더러운 냄새가 성안에 가득하다. 남녀노소
는 그 등분에 따라 손톱에 장단이 있다. 가령 상등 귀인은 손톱
의 길이가 5촌(寸), 그 다음은 2촌 5푼(分), 그 다음은 1촌 5푼
이다. 늘 이를 닦지 않는다. 이에 덕지가 두 세촌(寸)이나 두터이
쌓여 있고 색깔은 황금과 같다. 입만 벌리면 더러운 냄새가 개똥
과 같은데 다년간 이를 닦지 않는 것으로 귀한 것을 삼는다. . .
밤낮으로 일을 하여 자못 부지런한 듯하지만 그 조루(粗陋)한 것
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게으름을 또한 볼 수 있다. 인민들은 허풍
떨기를 매우 좋아하고, 부문(浮文)을 크게 숭상하고, 떠들어대기
를 좋아한다. 나라의 체면은 돌보지 않고 다만 푼전의 이익만을
찾는다. 음식은 정결하지 못하여 구역질이 나게 한다.
윤치호는 일기에서 종종 불결한 청국을 발전한 일본과 낙후된 조 선 사회의 현실에 많이 비교하는데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1884년 7월 22일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청나라를 다음과 같이 일본과 비교한다.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아뢰기를,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백성의 이익이 주가 되어야
하며, 옛 것만을 지키어 지금의 것은 잘못되었다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청국은 사람이 많고 땅이 커서 일본의 11배나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30년 내외로 경장(更張)·진작(振作)하여 문명과
부강을 사람들이 일컫게 되었고 60년이나 외국과 더불어 통상한
청국보다 100배나 더 낫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청국
은 옛 것만을 지켰으나 일본은 능히 옛 것을 고쳐 새 것을 본받
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두 개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새 것을 쫓고 옛 것을 지키는 이익과 손해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해에 도착하고 윤치호는 1885년 여름 익명에게 편지를 보내는 데 청국을 더러운 연못, 낡은 집, 그리고 노망 든 늙은이로 비유하 며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1. To Anonymous Person
Shanghai,
June 5. 1885.
With your permission, I will express my opinion about China. It seems to me that this nation is like an old pond full of filthy water. The water might have been fresh and clean, when it was first filled, but it connects with no springs or streams that might feed it with fresh water, and it receives nothing except melted snow and rain; nor has it any drainage or, passage by which to deliver up its old water; so that, as years rolled on, its confined water has become stagnant and filthy, covered with weeds and filled with mire and vermin.
Again, China resembles an old house. No doubt it was well constructed once, but its owner has son neglected his house that the walls have all fallen down, and its timbers are rotten. Some of the tiles on the roof have been stolen off by its neighbours, while others are broken in pieces. So the roof is ready to fall down at the first blow of one of the violent storms that are prevailing in now a days.
Moreover, China is very much like an old foolish man, whose eyes are blind, and whose ears are stopped, so that he can neither see nor hear. But his tongue is perfect and his voice is very loud, indeed, he can make such a big noise that it alarms the neighbouring children.
Having such a great body, and such large limbs, and looking like the strongest man in the world, as, indeed, he believes himself to be, he is as proud as can be. Notwithstanding all this, he can not walk even as fast as a four or five years old child. And he is so cowardly and mean, that his neighbours consider him one of the most weak and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contemptible men on the surface of the globe. What is still worse in
his character, is that, he is as wicked as he is proud, and injust as he is
self-conceited, and is so mean and shameless that he is pleased to have
the name of a barbarian as the title of a king.
윤치호의 청국관 – 미국 유학 시절 (1888 – 1893)
윤치호는 4년 동안 중서학원에 있으면서 조직적으로 배운 영어 덕 택에 이젠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그로서는 더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먼저 돌아간 박정양에게 큰 변이 닥치고 있는 것을 본 윤치호는 조선으론 아직 갈 수 없고, 또 일본으로 가면 학비 문제가 있어 알렌 교장과 본넬 교수의 추천서를 가지고 미국 유학을 선택하게 된다. 이로서 윤치호는 1888년 11월 4일 미국 Vanderbilt 대학에서 공부하고 1890년 여름에는 에모리대학으 로 가서 1893년 10월까지 공부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과 청 국은 알아도 조선을 몰랐기에 조선을 소개한 제1인자였다. 윤치호 가 미국에서 체류할 당시 청국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하지 않지만 3번의 일기로 청국관을 기록하였다. 청국관에 대한 첫 번째 기록 은 1889년 윤치호가 교회에서 청나라와 일본을 소개하면서 개인 적인 혐오감을 넘어서 전교를 위해 청나라를 칭찬했다고 기록한다. 일과 여전하다. 건군(Gunn)의 편지 받아 보다. 맥킨토시군의 편
지 보다. 밤에 야마구지(山口)군과 모어 메모리오(More
Memorio) 교회당에 가 야마구지군은 일본 전교 경황을 연설하
고, 나는 청국 전교 사세를 연설한 뒤 일본, 청국의 여러 가지
토산물을 회중에게 구경시키고 12시에 돌아오다. 오늘 저녁 연설
은 장로회(Presbyterian Ch) 부인전교회(婦人傳敎會) 회원의 청
을 받아 간 것이다. 전교회에 모인 남녀 아이들이 수백인은 되고
노성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가 청국을 위하여 말한 바가 별로
없었지만 전교하는 일은 하늘에 당한 일이라 어찌 내 사혐(私嫌)
으로 청국에 전교하는 일을 언어 동작으로 저희(阻戱)하겠는가?
까닭에 이 연설에서 청인과 청국을 칭찬한 것이다. 꽃 한 바구니
받아 오다. 오늘 로마사기(羅馬史記) 월례 시험 치르다.
1889년 3월 25일 (24일, 월, 맑음)
하지만 추후 윤치호의 부정적인 청나라 시각이 계속 유지되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윤치호는 1889년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러시아나 영국 속국이 되어 개화를 배우는 것 이 낫다고 국문과 영어로 두 차례 일기로 남긴다.
일과 여전하다. 우리나라 시사 의논한 책을 본넬선생이 보냈기에
대강 읽어 보다. 우리나라 지금 정부의 무신(無信) 무지(無智)한
행실을 자세히 말했으며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취하려는 사정을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다 말하고 있다. 나라든지 개인이든지 자기 행실을 먼저 잘 닦지
않으면 외면으로 비록 친구의 도움을 입는다 하여 무슨 효험이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지금 급무는 내정을 잘 닦아 백성의 신명 재산을 보
전하여 국가 기본을 견고히 하는 데 있지 외교에 있지 않다. 우
리나라 군민(君民)은 다만 재물만 탐하여 인민을 도탄에 놓고 조
정에 쓸데없는 관원이 수없이 많으며 모든 일에 방향이 없어 다
만 조석지계(朝夕之計)에 구구하여 원대한 도리를 쓰지 않는다.
소인 간신이 임금 좌우에 가득하여 나라의 안위 존망은 돌아보
지 않고 저의 구복(口腹)만 채우기에 분주하다.
이 같은 정부로 이같이 험한 세상에 우리나라 같은 약소국을 보
전하기는 짐짓 꿈밖의 일인 것이다. 이왕 청인의 속국 될 바에야
차라리 러시아나 영국 속국이 되어 그 개화를 배우는 것이 낫겠
다. 우리나라 조정 수 백 년 죄악을 생각하면 그같이 더럽고 금
수 같은 정부 진작 망하는 것이 도리이며 백만 창생의 복이리라.
종일 마음 편하지 않아 어떻다고 형용하지 못하겠다.
밤에 월례 전교회 시작하다. 오전에 본넬선생에게 편지하다.
1889년 9월 11일(17일, 금, 맑음)
Read some if the "Our Brother in Black." For the first time, I was
convinced that the dark slavery was, after all, the best thing that could
be done for the colored people under circumstances. Compare the conditions of the Indians with that of the negroes. 「When a nation is
unfit to govern herself it is better for her to be governed and protected
and taught by a more enlightened and stronger people until she is able
to be independent.」 Say what you may bring as many real and unreal
charges against the English in the east Indian policy. 「I stand by the
conviction and undeniable fact that India is infinitely better off under
Englishgovernment than it ever did under others. It will be infinitely
better for Corea to be under the English, if she is unfit for self-
government, than to be under the China.」
December 3rd, 1889
이렇듯 윤치호가 미국 체류기간 중 가졌던 청국관은 종교적인 신 념을 가지고 청나라를 대할 때는 전교해야 하는 대상국으로서 긍 정적으로 보고 조선의 국익을 생각할 때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치호의 청국관 - 중서서원 교사 생활 (1893 –
1895)
윤치호는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893년 11월 14일 상해로 돌 아와 모교인 중서서원에서 1893년 11월부터 1895년 초까지 영어 를 가르쳤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시절과 동일하게 종교적인 시각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을 가지고 청나라를 바라볼 때는 부정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 정적으로 보는 서양인들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32. To Dr. Young J. Allen
Oxford,
December 18, 1893.
My dear Doctor:
A word or two if for nothing else, at least for bidding you "how d'ye!"
We are all doing first rate here. The college in all its departments is
doing fine.
Have you read Bishop Key's letter on China? I don't like that way of
"cussing out" China―though I have, as you know, always been more
or less prejudiced against the Chinese myself. He says most
dogmatically that "China, as compared with Christian countries is, a
thousand years behind in the race of national progress." By what rules
of mathematics has he arrived at such infinite conclusion expressed in
numbers "a thousand years"! He then goes on to say "she is afloat like
a great hulk without rudder or sail, drifting with wind and tide," etc.
To speak about China with a most steady government in the world as
being "afloat without rudder or sail!" "The statement of immortality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bewilders him" (the Chinaman) says the
Bishop. What's strange about that? Has not the learned and sympathetic(?) Bishop read somewhere in the Bible that "when they
heard of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mocked; and others said,
we will hear thee again of this matter"? The story of the cross has
always been a foolishness to a certain class of people, even in
Christian countries.7
윤치호가 중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청일전쟁 (Aug 1, 1894 – Apr 17, 1895)이 발발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 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윤치 호 또한 이 전쟁을 관심을 가지고 예의 주시하였다.
33. To Dr. Warren A. Candler
September 20, 1894.
My dear Doctor:
In my last letter, I told you something about the strained relations
between Japan and China. The war was declared on the 1st August as
you know. The Far East has had nothing of so great an importance
than this war for a long while. On the 15 and 16 inst. a decisive battle
was fought at Piong-yang in the North of Corea between the Japanese 7 윤치호, 『윤치호서한집(尹致昊書翰集)』, 1893 年 12 月 18 日.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and Chinese forces. The latter consisting of 20,000 soldiers was utterly
routed by a Japanese force of 10,000. If the Chinese fought like they
lie, they could beat anybody under heaven. They brag most
outrageously. But the thorough rottenness of the Chinese government
is something dreadful.
You know which side of the struggle I sympathize with. If Japan wins
there is hope for the regeneration of Corea. If China gets the better of
the quarrel, I may just as well give up the reformation of Corea as a
dead thing. To deliver Corea from the corruption and deadening
influence of China is one of the greatest blessings that a Corean may
pray for this unhappy country.8
윤치호는 서한에서 만약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조선의 개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며 청일전쟁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 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윤치호는 조선이 드디어 청 나라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평가한다.
40.
June 28, 1895.
My dearest Doctor Candler: 8 윤치호, 『윤치호서한집(尹致昊書翰集)』, 1894 年 9 月 20 日. The war is over. Peace may prevail in this part of Asia at least until
Russia be ready with Siberian R.R. or Japan be strong enough to take
Russia or China be powerful enough to settle her accounts with Japan.
That is while there are probabilities of war at any moment its actual
occurrence may be years off. In the meantime you may like to know
whether Corea has gained anything by the last storm. I think she has
on the whole. For:
1. The condition of Corea was such just before the war that she
couldn't go worse―if she went to the deuce.
2. The war broke up the nest of rascals who made it their sole business
to bleed the people to death by all sorts of exactions.
3. As one of the results of the strife Corea has been freed from the
influence of China.
4. The Royal power limited.
5. Useless offices abolished.
6. The caste system weakened.
7. The importance of education recognized.(윤치호 1895, 6.28)
마치며, 과거 윤치호가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의
윤치호는 청년기 시절부터 상해와 미국에서 유학, 그리고 다시 상 해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청나라가 부패하고 불결한 나라로 부정 5. 좌옹(佐翁) 윤치호의 청국관_이화원 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모국의 개화 표본으로는 부적절하 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윤치호는 청나라 또한 종교 전교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나라로 매사 부정적으로 표 현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윤치호는 직접 일본, 청나라, 그리 고 미국으로 건너가 서로 다른 근대화 모델을 경험하고 비교함으 로써 조선의 진정한 개화를 위해서는 청나라 모델이 적합하지 않 다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실제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통해 중체서 용의 근대화를 노력했지만 청일전쟁의 패로 궁극적으로 실패하여 머지않아 멸망하게 된다. 이토록 윤치호는 냉철한 비교분석을 통 해 서양식 일본 모델을 통해 모국을 근대화를 시도한 당대 조선 말기 시대에 지적으로 가장 예민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는 윤 치호의 추후 친일 활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이 한반 도의 정세를 장학하던 19세기 후반에 본인의 소신을 내세운 것 또 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영선 교수는 “척사와 개화와 같은 소박하고 무리한 이분법 으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칼질하기보다는 섬세한 눈과 애정 어 린 마음으로 그들의 좌절한 꿈을 조심스럽게 살릴 필요가 있다”라 고 말한다. 그러므로 윤치호가 당시 청국관이 단순히 친일 개화파 로 분류하는 것보단 격동하는 19세기 말을 조선, 일본, 중국, 그리 고 미국에서 직접 경험하고 공부를 끊임없이 하며 모국인 조선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윤치호 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윤치호일기를 통해 당대 개화 가 꼭 친일을 뜻한다는 것이 아닌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의로서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을 뛰어넘어 복합적인 시각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필 요가 있다는 귀중한 교훈도 준다.
참고문헌 윤치호.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윤치호. 『윤치호서한집(尹致昊書翰集)』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1998.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을유
문화사
김영희. 1999. 『좌옹 윤치호 선생약전』. 서울: 좌옹윤치호문화사업
위원회.
장인성. 2012.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 서울: 서울대학교 출
판문화원.
하영선. 2019. 『한국 외교사 바로보기』. 서울: 한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