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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중심을 찾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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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 가든 · 김대영 · 고려대학교

I. 머리말

스코틀랜드 출신의 상인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는 매디슨 상회의 직원으로 상하이에서 근무하다 일본으로 옮겨 간 인물입니다. 1863년 나가사키항이 보이는 미나미야마테 지역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을 정도로 출세했고,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훈2등 욱일중광장을 수훈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고 1911년 도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본 최고의 목조 서양식 건물이 현존해 있는 글로버의 저택은 현재 나가사키 시에서 글로버공원 [구로바엔] 및 기념관으로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19세기 일본은 쇄국 정책으로 고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페리의 흑선 출몰 이후 나가사키를 개항하며 막부는 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개국을 결단합니다. 외국 상인들은 나가사키에 거류지를 형성하며 무역을 이어갔고 글로버 역시 차 위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 내에서 천황은 실권이 없었고, 도쿠가와 가의 쇼군이 실권을 쥐었지만 전국은 ‘한’으로 나눠져 있어 각 지방에서 다이묘가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슈, 사쓰마와 같은 서남쪽의 가문들은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다 시모노세키 전투에서 패한 이후 변두리에서 웅거하고 있었는데, 해외와 밀무역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쇼군이 무역을 독점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일본 각지에서는 막부가 외국과 수교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천황을 옹립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손노조이라는 표어가 확산되며 갈등의 불씨는 커져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구 열강과 사쓰마, 조슈는 1862년에 각자 부딪히게 됩니다. 1862년 9월에는 요코하마 인근에서 영국 상인들이 사쓰마의 다이묘 행렬과 맞닥뜨리며 충돌이 발생하는 나마무기 사건과 조슈의 양이전쟁 이후 구미 각국은 보복 공격에 나섭니다. 1863년 7월 2일 영국 함대는 암스트롱포를 장착한 7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가고시마를 공격해 다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안기고 다음해 8월 5일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4개국 연합함대가 조슈 해안에 나타나 조슈의 지상 포대와 요새를 포격합니다. 이는 조슈와 사쓰마가 서구 군사력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게 하여 대외 정책과 군사 정책 추진에 있어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주목한 글로버는 무기 교역에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뛰어들어 총포를 팔기 시작하고 사쓰마 측의 인물과 접촉하여 1864년에는 산업 근대화, 외국인 전문가 고용 및 서구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해외 유학생 파견을 권하는 제안서를 보내는 데 이릅니다. 1863년 글로버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조슈 번의 젊은 사무라이 다섯 명의 영국 밀항을 도왔고, 1865년 고다이 도모아쓰를 비롯한 사쓰마 번 청년 열다섯 명의 영국행도 주선했습니다. 이들은 서양 근대 문물을 배우고 귀국해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65년 조슈는 서양식 개편 정책을 시행하면서 신식 무기를 구하려고 했지만 대립하던 막부는 외국과 조슈 번의 밀무역을 금지하도록 하여 4국 대표의 공동각서를 받아냅니다. 막부의 조슈 정벌을 앞두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는 밀무역 금지에 대한 대책을 글로버에 물어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쓰마의 명의로 대신 선박과 소총을 구입하는 방안이 등장하고 추후 1866년 삿초동맹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보신전쟁이 발발하며 구질서는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며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될 발판을 마련합니다.

글로버는 조슈에게 무기를 왜 판매하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Sidney DeVere Brown은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정치적 낭만주의에 고취한 글로버가 자신을 정치적 모험가로 인식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가장 큰 적수를 자칭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기도 다카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젊은 조슈 지사들에 공감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젊은 영국 통역가들 (Ernest Satow, Algernon B. Mitford) 역시 나가사키 안팎을 돌아다니며 천황을 지지했는데 이들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둘째로는 막부를 지지한 프랑스에 반해 스코틀랜드인으로서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해 영국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Gordon Daniels가 지적했듯이, 영국은 개혁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완만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조건 하에서만 지지를 표하며 Harry Parkes 공사의 1865년 중립 노선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으나 글로버는 이 노선을 초월하여 조슈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기회주의와 실용주의 노선 하에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기에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활동의 일환이라는 해석입니다. 글로버는 조슈 그리고 바쿠후에게도 무기를 파는 면모를 보여줬기에, 전쟁 준비를 위해 무기와 상선을 구입하고자 한 조슈와 접선하며 1865년 10월 15일 기도와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기도와 글로버의 젊은 나날 (~1865)

글로버는 1859년 상하이로부터 21살 때 매디슨 상회의 점원으로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나가사키에 도착합니다. 외국인 거류지가 구획되어 초반에 중국의 아편 무역으로 가장 큰 수익을 올린 자딘매디슨 상회(Jardine Matheson Holdings Limited)에서 진로를 시작한 것입니다. 멘토인 Mackenzie만 하더라도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불법 무역에 종사하다 일본으로 Jardine에 의해 파견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처럼 중국에서 일본으로 무역 활동을 옮긴 일은 매우 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후 글로버가 막번에 무기를 판매하는 면모를 보여주며 거상으로 부상하는 자취를 관찰하면 청출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59년 7월 4일에 개항한 나가사키는 4만 명 인구의 소도시로, 250에서 300명 정도의 외국인이 거주했습니다. 에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막부의 정치적 권위가 미치지 않았고 나가사키는 서양으로의 창의 역할을 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 느슨하게 통제되던 나가사키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은 글로버로, 면직물을 영국에서 수입하고 차와 쌀을 각종 번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와중 1862년 자기의 이름이 달린 회사를 출범해 글로버 상회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당해 9월에는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가나가와/나마무기 사건이 발발하여 영국인 찰스 리처드슨이 살해되며 영국의 이목이 사쓰마에 집중되며 19세기의 영일관계를 장식합니다. 이로 인해 영국 정부는 막부의 쇼군과 사쓰마 가문에 책임자의 처형과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이 시기에 글로버는 24살의 어린 나이에 영국과 대치하고 있던 사쓰마와 교역을 하기 시작합니다.

찰스 리처드슨의 죽음 1년 후, 1863년 7월에 배상금과 사죄 그리고 책임자의 처벌을 받아내지 못한 영국은 해군을 투입해 사쓰마 가문의 중심지인 일본 남부의 카고시마에 포격을 가합니다. 비록 도시의 대피령으로 인해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종이와 목재로 이루어진 도시는 불타면서 사쓰마 번은 근대화의 위력을 느끼고 개화를 꾀합니다. 당시 글로버는 1863년에 사쓰마 및 사쓰마와 경쟁 관계에 있는 기타 번 그리고 막부의 쇼군에게도 총포를 팔게 됩니다. 특히 1864년과 1867년 사이 글로버의 교역은 정점을 찍으며 일본 내 각종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막부 세력과 벌족들 간 싸움에서 필요한 군함과 총, 은 등의 금괴를 공급하였습니다. 1864년 9월경 일본에서 고향 애버딘 (Aberdeen)에서 건조된 <사쓰마> 호를 시작으로 선박 판매를 시작한 글로버는 4월에는 사쓰마 번으로부터 미니에식 소총 3,000 정도 구입 요청을 받았으며 이후 글로버 상회를 통해 나가사키에 입수된 소총은 약 17만 1934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1860년과 1867년 사이의 무기 거래로 인해 25살 때 사쓰마 번의 주요한 브로커가 되어 이후 사쓰마와 조슈의 삿쵸동맹(薩長同盟)의 주요 브로커 역할도 맡게 됩니다.

기도 고인, 가쓰라 고고로라고도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의 3걸 중 하나로 천황을 받들어 외국을 격퇴하는 목표로 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864년 6월 5일 저녁,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교토의 이케다 여관에서 존왕양이파 지사 20여 명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교토 치안부대 신센구미가 급습하며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이른바 ‘이케다야 사건’이 일어납니다. 존왕양이의 지도자 기도 다카요시도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미리 도착했으나 참석들이 보이지 않자 이웃에 있는 쓰시마 저택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덕에 목숨을 건집니다. 이로 인해 뺑소니의 명수라고도 불리게 되는 기도는 도피 생활을 하다가 다카스기 신사쿠가 번정을 다시 장악한 뒤에야 조슈로 귀환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격분한 조슈의 존왕양이파들은 천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영주의 억울한 죄를 천황에게 호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토로 출동합니다. 교토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교토로 쳐들어갔다가 사쓰마, 아이즈, 에치젠, 구아나 연합군에게 패하며 황궁 앞에서 총격전까지 벌였던 이 사건은 금문의 전투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조슈는 조정의 적으로 낙인찍히며 최악의 위기에 빠집니다.

설상가상으로, 8월에는 시모노세키 연안에 열강 4국 연합 함대 17척이 정박하면서 대포 288문, 병력 약 5천 명의 대부대가 8월 5일 포격을 개시하여 조슈번의 포대를 침묵시킨 뒤 약 2천 명의 병사가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하고 조슈의 기병대와 ‘시모노세키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1863년 5월 10일 조슈의 존왕양이파 지도자 구사카 겐즈이가 군함 두 척을 동원하여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폭풍우를 피해 피난 중이던 미국 상선을 기습적으로 포격하고, 그 뒤에도 프랑스, 네덜란드의 군함에 포격하는 양이 무력행동에 대한 보복 공격이었습니다. 4일 간의 전투에서 조슈번은 15명의 전사자를 내고 완패했고, 관문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의 안전 보장과 식수 및 연료 제공, 그리고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함선이 파괴되어 조슈는 실질적인 해군력을 상실합니다. 이 강화 회담에 조슈 측 통역으로 활약한 인물은 영국 유학 중 급히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토는 1863년에 글로버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조슈 파이브’ 중 하나였습니다.

조슈 번은 본래 외세 배척을 주창했으나 패배를 계기로 ‘존왕양이’에서 ‘존왕도막’으로, 쇄국에서 개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1864-65년을 기점으로 조슈는 사쓰마와 마찬가지로 개항을 통한 교역의 추진, 군사력의 강화와 막부와의 대립적 자세라는 공통된 입장을 갖추게 됩니다. 1865년 조슈 번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구상한 할거정책이 추진되며 4월 26일에 ‘가쓰라 고고로’의 이름으로 기도는 복귀하여 번주의 측근으로서 민정과 군정을 총괄합니다. 보수 세력과 연합하여 막부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야마구치에 제철소를 건설하고 제납, 제철, 조선 등을 민간에 불하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산업 정책도 병행합니다. 육군의 서구식 개혁도 추진하면서 번 재정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전적 위기 상황에서 막부의 해군력에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대항하기에는 무리였기에 함선 구입과 해군 증강을 꾀하게 됩니다.

시모노세키 패전의 경험을 통해 조슈 번은 우수한 무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막부가 장악하고 있는 개항장에서 무기를 구입할 수는 없었고, 밀무역에 눈을 돌립니다. 하지만 서구 열국 역시 일본의 합법정부로서 승인된 막부가 행사하는 정당한 권리인 <개항되지 않은 항구에서는 무역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도의적인 지지를 표명하여 영국정부도 막부가 요구한 각서의 작성에 참여합니다. 윈체스터 영사(대리공사)는, “나가사키에 있는 한두 개의 영국상회가 시모노세키에서 적극적으로 무역에 종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영국국민에게 불법무역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공시를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글로버 상회도 포함된다고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막부가 외부에서 공인된 일본의 합법적인 정부였으며 외국의 영사들은 국제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아직까지 영국은 막부에 적대적인 번 세력의 대의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65년 주일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의 후임으로 해리 파크스가 6월 27일 나가사키에 도착합니다. 글로버는 항구에서 파크스와의 저녁 식사 당시 서남 번의 다이묘에 일본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설득하려 하지만 파크스의 반응은 미적지근합니다. 다음날 글로버는 ‘일본 정부’를 위해 암스트롱 총 35정과 탄약 (183,847달러어치의 총기)을 주문하는 편지를 뉴캐슬로 보내 4만 달러의 수익을 취득합니다. 하지만 쇼군과의 거래에서 얻은 수익 중 3만 달러는 선불로 동월 6월에 사쓰마에 건네줍니다(이후에도 글로버는 자딘 매디슨 상회로부터 ‘일본 투자’를 위한 자금을 선불받아 영국에 있는 사쓰마 19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기도는 글로버에 접근하게 됩니다.

III. 기도와 글로버의 첫 만남 (1865년)

1865년 당시 글로버가 친분에 있던 조슈 사무라이(이토와 이노우에)는 나가사키에 오기 전 사쓰마 관저에 피신하고 있었으며, 무기류와 증기선을 사러 올 때에는 사쓰마 사무라이로 변장하고 방문했습니다. 이 당시 글로버는 아오키, 기도와 같은 조슈 반군 지도자들을 자기 집에 숨겨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일본 관리 중 일부가 영국 영사관에 이를 제보했고 글로버는 이러한 행동이 지속될 경우 나가사키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글로버는 ‘개항과 서구 문명을 향해 일본을 이끌고자 했던’ 기도에 호감을 느꼈고, 친쇼군 사무라이에 쫓기며 도움을 요청하던 기도를 자신의 배에 태워 항해하도록 했으며, 이에 대해 추궁을 받자 배를 수리해야 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당시 글로버는 쇼군과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암스트롱 총포를 쇼군에 팔아 4만 달러의 이익을 거두었지만 3만 달러를 사쓰마에 빌려주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편지를 통한 연락 끝에, 글로버는 나가사키로부터 총기를 직접 보급하고자 했으며 1865년 10월 15일 시모노세키에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가 기도와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밀무역 금지에 대한 대책을 글로버에게 묻자, “막부가 영국에게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부탁을 한 것 같으며 그 진의는 결국 조슈번을 방해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어쨌든 막부는 조약을 체결한 상대이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 때문에 조슈번은 이후 무기를 구할 수단이 전혀 없어졌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이어서 “조슈번주의 선박으로 상하이에 가서 구입한다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 만약 배가 없다면 상하이에 한두 사람이 밀항하여 기선을 구입하고 그 배에 소총을 몰래 실은 다음 수송하는 일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협력해주겠다”는 방책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이 무렵의 글로버가 매우 침통한 모습이었다고 하는데, 글로버도 밀무역 금지로 거액을 벌 수 있는 대상을 잃게 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 대책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 무기상들이 잉여 총포를 처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시점으로, 상하이 항구에 쌓여 있었습니다. 료마는 이 정보를 나가사키를 통해 입수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의를 얻은 후 야마구치의 온천장으로 가 기도에게 사쓰마가 조슈의 무기거래를 도와준다는 제안을 합니다. 당시 사쓰마 번의 실력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 간 회담이 사이고의 갑작스러운 상경으로 무산되자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을 근대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번 사이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료마는 기도를 5월에 만나 설득합니다. 조슈 번의 다카스기와 이노우에를 만나서는 “막부군에 대항하려면 총과 기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외국 상인들은 조슈 번에 물건을 팔지 않을 것이니 사쓰마 번의 명의로 대신 구입해달라고 부탁해보라. 구입에 동의하느냐에 따라 사쓰마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동해 음력 윤 5월에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 두 사람이 잇달아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두 사람(이노우에 몬타와 이토 슌스케)과 상담해 조슈번이 사쓰마번의 명의를 빌려 기선을 사들이는 방책을 마련했습니다. 기선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소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때 아오키 군페이가 소총 천 정을 구입하라는 명을 받고 이미 나가사키에 가 있었기 때문인데 나가사키에서 막부 관리들의 방해로 소총 구입에 대한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무역단체 가메야마 모임을 운영하던 료마는 거상 글로버에게 이를 의뢰하는데, 조정의 적인 조슈나 일개 낭인인 료마가 거래 상대라면 이런 위험한 거래를 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미 예전에 대량의 무기를 구입한 바 있는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사쓰마 명의라면 괜찮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준비 교섭 끝에 조슈 번 지도자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이끄는 무기구매단을 7월 나가사키에 파견하고 이들은 사쓰마 번사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글로버와의 교섭이 조슈 번에 유리하게 흘러가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는데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글로버의 도움으로 1863년 영국에 밀항한 ‘조슈 파이브’의 일원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카오루가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로 고마쓰 다테와키와 협의하여 사쓰마의 명의를 빌려 (구식) 게베르식 소총 3,000정과 (최신식) 미니에식 소총 4,300정을 약 9만 2400냥에 구입하기로 계약합니다. 당시 막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번이 도입하고 있던 게벨총은 재래식 전장총으로, 총알을 총구 앞에서 막대기로 밀어넣는 방식이었습니다. 1850년대에는 소총의 제작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는 소총과 같은 장전 방식인 미니에총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크림전쟁에서는 영국군이 처음 사용해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조작이 간편하여 사격 속도가 빠르고 명중률이 높아 게벨총 10정과 같은 위력이 있었습니다. 사거리의 경우 (막부군의 주력 무기였던) 게벨총은 100미터에 불과햇으나 미니에총은 300미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이토는 사쓰마 번 무사인 것처럼 흉내를 내며 사쓰마 소속 증기선으로 조슈의 미타지리 항구에 총포를 대량으로 반입하는 등 소총을 시모노세키까지 나르고, 나가사키에 머물면서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 외에도 프랑스 군함 함장, 그리고 글로버와 만나 정보를 모아 기도에게 보고합니다.

이 무기거래를 통하여 사쓰마에 대한 조슈의 신뢰는 회복됩니다. 동시에 료마를 지원했던 사쓰마 번 사람들이 그에게 선박 한 척을 맡겨 가스 린타로 밑에서 습득한 항해 지식을 활용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조직의 책임자라는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조직에 ‘샤추’(회사)라는 이름을 붙이나 이후 이는 ‘해상 지원 부대’라는 의미를 가진 ‘가이엔타이’로 개칭됩니다. 작은 상회를 연상시키는 이 명칭은 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막부령 항구 도시에서 서양 국가들과 무역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료마는 외국 상인들과의 교섭 업무 대부분을 맡게 되었고, 상회는 우선 막부의 봉쇄 조치가 내려진 조슈 번의 외국 무기 입수를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사키에 파견된 조슈 번 대표는 엄격한 감시 때문에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없었지만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승인을 받아 그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쓰마 번의 명의를 사용해서 수입한 미니에 총 4,300정이 8월에 조슈번에 도착하고, 증기선 구입도 실현을 향해 나아갑니다. 조슈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사쓰마 번의 히사미스 부자에게 서한을 보내 사쓰마 번과의 대립은 “만단, 오해가 풀렸다.”라고 전하고 군함 구입도 공식적으로 의뢰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865년 12월 4일(게이오 원년 10월)에는 조슈 번은 사쓰마의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중개로 토마스 글로버를 통해 증기군함 <잇츄마루/오초마루>(the Union호, 사쓰마에서는 사쿠라지지마루: 70마력 205톤)을 37,500냥의 비용으로 구매하게 되고 사쓰마의 군사적 지원을 계기로 두 번은 반막부 비밀동맹까지 체결하게 됩니다. 이후 조슈가 사쓰마에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게 되어 발언권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료마는 그해 10월, 조슈 번의 곡물을 사쓰마 번의 군량미로 활용할 수 있도록 주선합니다. 사쓰마가 있던 가고시마는 쌀이 부족한 지역으로 교토에 주둔한 사쓰마 번 병력에 대한 병량 공급처를 확보하는 문제로 사이고가 고심한 것으로 비롯되었습니다. 료마의 제안을 기도가 수락하면서 1865년 가을에는 사쓰마와 조슈 간의 통상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글로버로부터 구입한 유니언호는 시모노세키 해협의 해전에 참전한 이후 조슈 번의 통제 하에 완전히 넘어가고 오초마루라는 이름으로 바뀐 후 조슈 번 해군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는 사쓰마 측과의 협력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과물이었지만 료마의 상회 입장에서는 손실이었다고 합니다. 별도로 사쓰마 번을 경유해 구입한 스쿠너형 범선<와일드웨이브>호는 유니언호에 이어 상회가 구입한 두 번째 선박으로, 가고시마로 유니언호와 함께 첫 항해에 나섰지만 격랑이 두 척의 배를 덮치자 증기 기관을 갖지 못한 스쿠너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시오야사키에서 풍랑을 만나 잃게 된 12명의 동료 중에는 료마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이케 구라타도 있었습니다.

IV. 삿쵸 동맹과 무기 거래 (1866~1867)

1866년 3월 7일 조슈 번을 대표하는 기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중재자 료마 사카모토가 삿쵸동맹을 성사시키며 6월에 쇼군의 군대는 조슈를 공격(막부군의 2차 조슈 정벌)하지만 격퇴당합니다. 막부가 동원한 제번의 병력은 약 10만 명으로 조슈 번 병력의 약 10배에 달했지만 유럽 전술에 훈련받고 글로버의 우수한 총기 덕분에 쇼군의 군대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삿쵸밀약에 따라 가장 막강한 군대를 가진 사쓰마군이 막부군에 가담하지 않았고, 다카스기 신사쿠가 구입한 군함을 이끌고 막부 함대를 야간기습해 승리한 것이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글로버가 제공한 증기선 Union 역시 7월 28일 해전에 참전합니다. 이 전쟁 초기 이토는 이시카와 방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번 정부로부터 돌아와 중국으로 가서 군함을 사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토는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상인 글로버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건너가 군함 2척을 구입하는 계약을 맺고 8월 말 귀국합니다. 군함은 전쟁이 끝난 10월에 도착했으나 그 후 부대 수송 등에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기존에 사쓰마에 냉담했던 영국은 입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고, 사쓰마 가문의 수장인 시마즈는 글로버를 통해 파크스 영국 공사에게 카고시마로 초청합니다. 초대받은 파크스와 글로버는 저녁 만찬에서 영국 정부가 더 이상 쇼군을 지지하지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않고 일본의 내전에서 막부의 편을 들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영국은 사쓰마, 시모노세키와의 전쟁을 거쳐 사쓰마와 조슈를 비롯한 번과 만남으로써 정치와 무역 참가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게 되고, 특히 사쓰마와 조슈에 접근한 것은 영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는 청년 서기관 사토(Ernest Satow)와 나가사키 영사 가워 등이었습니다. 사토는 회고록 <한 외교관이 본 메이지 유신>(A Diplomat In Japan)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테 무네나리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서남 유력 번의 다이묘와 번사와도 친밀하게 교류하여 다이묘 세력을 포함하는 일본의 정체 변혁을 기록한 <영국책론>을 공표했고 공사 파크스도 이를 묵인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 조약 칙허로부터 개세약서 체결이라고 하는 1866년경의 막부 외교에 대해서 파크스는 “쇼군은 우리에게 성심성의껏 행동하고 있다. 다이묘보다 쇼군을 통해서 훨씬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한편으로는 다이묘 간 어쩔 수 없는 질투심과 불화를 간파하고 본국 외무부에 보고합니다. 또 사쓰마 번이 종종 조약 칙허를 방해하고 외교 문제를 이용하여 쇼군을 공격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1866년 조슈 제2차 정벌 이후 서구식 무기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1867년에 들어 일본 국내 긴장이 고조되고 전운이 돌자 화기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 됩니다. 이는 영국 공식 자료로 인해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영국 외무부, 일본 나가사키 영사관, 1859-1870 기록 Shinya Sugiyama, “Thomas B. Glover: A British Merchant in Japan, 1861-70,” Business History 26, no. 2 (1984):120

영국 영사관의 무역 보고서에는 1865-8년 나가사키에서만 17만 정 이상의 총기가 수입되었으며 이는 2,400만 달러의 규모로 50만 파운드 상당어치라고 합니다.

1866년에서 1867년까지 나가사키에서의 공식 무기 교역의 대부분 (85퍼센트)은 영국 혹은 네덜란드/독일 상인들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계약 기록을 통해 33,875 소규모 화기 거래 내역을 조회할 수 있는데, 이는 나가사키 수입액의 약 40퍼센트에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1863-1869년도 항구당 소형 무기 수입 규모 연도 요코하마 나가사키 고베 일본 1863 5,817 5,817 1864 11,568 11,568 1865 56,843 25,850 82,693 1866 53,000 (추정) 21,620 74,620 1867 102,333 65,367 167,700 1868 106,036 36,514 142,550 1869 58,613 19,163 7,120 84,896 총합 394,210 168,514 7,120 569,844

출처: Hoya Toru, Boshin senso [The Boshin War] (Tokyo: Yoshikawa Kobunkan, 2007), p.99.

해당하는 수치로 당대 국제무역을 양호하게 문서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 1위인 글로버와 2위 니플러(Kniffler)는 점유율 과반을 누리면서 상위 5개의 상인 가문이 총포의 72퍼센트를 차지하며 높은 점유율을 차지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별로 구분 시, 글로버와 영국 상인들은 53퍼센트를 차지하며 선두에 섰고 니플러를 비롯한 독일 상인들(프러시아와 함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인들은 32퍼센트를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 가문 로우레이로(Loureiro)는 1,780정의 소규모 화기를 판매하며 5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미국 상인들을 합한 교역량보다도 많은 수치입니다. ‘프랑스’ 상인은 William F. Gaymans로 스위스 국적자임을 내세우고 프랑스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네덜란드 태생이며 독일에서 죽은 자입니다. 전반적으로 서남부 일본으로 흘러들어오는 소규모 화기의 95퍼센트 이상은 유럽 상인들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상인 국적 1866 (1/2) 1867 합 1 글로버(Glover) British 685 12,140 12,825 2 Kniffler German 3,100 1,901 5,001 3 Alt British 250 2,829 3,079 4 Hughes British 1,810 1,810 5 Loureiro Portuguese 1,780 1,780 6 Lehmann German 926 526 1,452 7 Bauduin Dutch 1,000 300 1,300 8 Gaymans French 1,120 1,120 9 French USA 500 366 866 10 Bohlens German 268 500 768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IV. 메이지유신과 글로버의 쇠락 (1868년)

1864년과 1867년 사이, 글로버는 나가사키에서만 20척의 배를 팔아 117만 달러의 이익을 거둡니다. 하지만 메이지 원년, 1868년에 쇼군이 실권을 천황에 넘겨주면서 전쟁 상황이 종식되자 더 이상 군함과 총포로 수익을 거둘 길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글로버의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의 첫 신군함, Ho Sho Maru와 Jho Sho Maru (Ryojomaru) 건축은 1868년에 이루어지면서 1860년대의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일본의 첫 근대적인 탄광을 운영하지만 수익을 거두기 전 1870년 파산하여 소유권을 싼값에 처분해야 하고 글로버 상회도 잃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추후 미쓰비시로 발전하게 되는 다른 회사를 설립하고 기린 맥주 주식회사로 성장하게 되는 일본 맥주 사업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바쿠후 말기에 바쿠후와 신정부 세력이 대결하면서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5천 명의 신정부군은 1만 5천명의 바쿠후군을 격퇴하는데, 이는 대포와 함께 사용한 영국 직수입 화약의 정밀 사격으로 적군에 훨씬 큰 피해를 주면서 3배의 인원 차이를 극복한 것입니다. 이때 사쓰마 부대가 소지한, 영국제를 능가하는 미국제 무기인 스펜서 총 1만 6,015자루는 글로버가 조달한 것입니다. 스펜서 총은 레버 액션 라이플(lever action rifle)로, 방아쇠울과 연결된 레버를 앞으로 젖혀 탄피를 배출하고 원 위치시켜 장전하는 수동 연사식 소총으로, 빠른 속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조정은 바쿠후를 적으로 공식 선포하고 서일본 지역 대부분 번들은 신정부에 굴복했습니다. 에도를 장악하고, 항전파를 격퇴한 결과 다이묘들이 지배하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근대적 국민국가가 수립되면서 보신전쟁은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을 맞이합니다.

기도는 메이지 원년인 1868년 4월부터 1877년 5월 타계 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고, <기도 다카요시 일기>는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영역본으로도 간행되는 등 메이지 시기 초기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후 기도는 1868년 5월 12일, 오사카에서 메이지 천황을 접견하러 갔을 당시 글로버와 만나 지난 3년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고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굉장한 친밀도를 보이고 있으며, 헤어지는 자리에서 글로버는 권총을 기도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1866년 막부 군대에 조슈 군대가 우위를 점하는 데 있어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의 조치로서는 굉장히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며칠 후, 이 둘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6월 1일 조슈 가문의 후예가 귀환할 수 있도록 군함을 글로버 상회로부터 빌리는 이야기를 잠깐 합니다.

기도 다카요시, 혹은 기도 고인은 분명히 천황 그리고 나라를 위해 열정이 넘치던 인물이라는 것을 일기 곳곳에서 알 수 있습니다. 1868년 8월 6일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보더라도 메이지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유신의 성공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이 다수 희생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으며 친구 중 수십 명이 제국을 위해 순교한 만큼 자신도 몸을 다 바쳐야 한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에 대해 빚을 지고 있으며 목적을 달성하여 구천을 떠도는 이들의 혼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쓰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 연초 야마구치에서 자신이 제국 정부의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고향인 조슈를 내팽개치고 주군인 다이묘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돌았다고 한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중앙정부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것은 맞지만, 쓰러진 사무라이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그런 것이며 이를 통해 다이묘에 충성을 다한다고 역설하는 동시에 고향 사람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오해를 풀지 못한 것을 매우 슬피 여기고 있습니다. 1868년 8월 12일에는 존왕양이의 거사를 진행한 지사들 중 오로지 열 중 두셋만이 살아남은 것,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깊은 감정에 빠져든다고 기록합니다.

V. 맺음말

글로버는 무기 교역을 주도한 유일한 서구 상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타고 자신과 동년배인 젊은 타국의 열정적인 지사들과 교류하며 손익을 넘나드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사석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의 가장 큰 반역자라고 할만큼 역할에 몰입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을 뒤집어 엎게 되는 사쓰마-조슈 동맹 형성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도 다카요시라는 조슈의 인사와 친분을 쌓는데, 추측하건대 나마무기 사건과 사쓰에이 전쟁, 그리고 양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 등을 목격하며 서양 무기의 위력을 느낀 것과 더불어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으로 인해 막부에 적대적이라는 공통된 개인적 경험을 지닌 것이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무기 교섭 과정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글로버는 영국과 막부의 협약으로 인해 밀무역은 큰 리스크를 갖추고 있었고, 수익이 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기도는 막부의 조슈 정벌을 앞두고 군제 개혁 추진 상황에서 무기는 사활을 가르는 일이기에 절박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래가 최대한 안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쓰마를 통해 위장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 사쓰마와 깊은 관계를 맺은 글로버가 기도에게는 필요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조슈와 사쓰마의 협력을 통해 무역망 확장하고자 했던 상인 글로버 입장에서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글로버 특성상 사업의 여러 방면에 진출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차원을 계속해서 개척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던 3. 메이지 유신 전야 글로버와 기도의 만남_글로버 가든 나머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한 사업에 집중 못 해서 추후 몰락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던 점을 고려할 시, 글로버는 조슈와 밀거래하는 것을 굉장히 흥미롭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살펴본 것과 같이, 기도가 글로버와 만나기까지에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만난 후 무기 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까지에 있어서는 다양한 행위자들과 소통하고 이해관계를 조율했습니다. 그 결과 글로버의 무기 중개 덕분에 조슈 번은 1865년의 군정 개혁으로 전번일치 군제를 성공적으로 확립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의한 군대를 보유한 최초의 번이 되고,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전투력을 입증합니다. 이들은 개개인의 노력과 국제무역이 얽히고설켜 결과물을 도출해낸 반면, 반대로 막부의 경우 오히려 자본과 물자가 풍부하며 심지어 서구 열강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이점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에는 일본 열도의 패권을 사쓰마와 조슈 등에 넘겨주고 맙니다. 19세기에도 이토록 사람 간 네트워크가 중층적으로 얽혀 전개되었는데, 정보혁명과 세계화가 심화된 21세기의 국제질서를 곱씹어봄에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1차 자료 The Diary of Kido Takayoshi. Vol.1: 1868-1871, Translated by Sid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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