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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

시간을 거슬러 동아시아의 역사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마오쩌둥 기념관 · 윤지원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1937년, 일본은 만주사변에 뒤이어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야심이 본격화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각기 분열하여 내전 중이던 중국은 ‘항일’이라는 구호 아래 연합 전선을 이루고 일본에 맞서기 시작하였지요. 이때 중국공산당은, 중국 전체에서 일어난 반일 감정을 제대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필립 쇼트 2019, 484) 지도자 마오쩌둥 아래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됩니다(Twitchett and Fairbank(eds.) 1986, 620). 일본의 침략이 중국공산당에게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기회가 되었던 것이지요(Van de Ven 2018, 146). 마오는 중일전쟁을 거치며 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결국은 국민당에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오의 항일 이력에 대해서는, 그 결과가 명확한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것과는 달리, 아주 상반된 평가들이 혼재하고 있어요. 그의 행적은 이제 바꿀 수 없는 과거가 되었는데, 그 모습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으로 나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사실 마오가 항일에 임한 태도가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국민당에 맞서기 위한 레토릭의 차원이었는지에 대한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은 ‘항일에 나선 마오의 진심 여부에 대하여 왜 양면적인 평가가 나오게 되었는가’로 바뀔 수 있지요. 본 연구는 마오의 항일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을 먼저 살펴보고, 당시 마오의 항일 전략이 어떠했는지를 추적하여 상기한 연구 질문에 대답해보고자 합니다. 본 연구는 문헌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마오쩌둥의 항일투쟁기를 그리고 있는 책과 논문들을 주로 참고할 것입니다. 1차 자료로는 마오쩌둥의 연설문이나 글, 그가 응답했던 인터뷰 등을, 2차 자료로는 관련 단행본과 논문들을 살펴보려고 해요.

마오쩌둥과 중일전쟁에 관한 대조적 평가

마오쩌둥의 생전 중국에서 중일전쟁은 단순히 마오와 공산당의 훌륭한 영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만 기억되었으나(Coble 2007, 397- 395), 마오 사후 시간이 흐른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장제스와 국민당의 당시 행적도 점차 긍정적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어요(Coble 2007, 397-402).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의 항일이 가지는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니며 이 시기 마오의 리더십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Coble 2007. 401), 마오와 공산당만이 항일전쟁의 주체였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시기 마오의 항일 이력에 대해서는, 사실 매우 대조적인 평가가 혼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장융(張戎)과 핼리데이(Halliday), 그리고 그에 반하는 벤톤(Benton)과 천(Chun)의 논쟁은 이러한 양면적 평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장융과 핼리데이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마오』는 마오의 항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대표적인 저작으로, 이들은 마오가 ‘국민당을 일본의 손으로 멸할 수 있게 만드는 기회’로써 중일전쟁을 바라보았다며 그가 진심으로 일본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음을 주장해요. (장융, 존 핼리데이 2006, 271) 그러나 벤톤과 천은 ‘마오는 정말 괴물이었는가? (Was Mao really a monster?)’ 라는 이름의 책을 편집해 내어 장융의 주장에 반박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마오의 항일 이력에 대한 장융의 비판은 근거가 없다고 이야기하며(Gregor and Lin(eds) 2010, 61), 마오는 다만 홍군의 전멸을 피하면서 전략적으로 일본에 맞서던 전술가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Gregor and Lin(eds) 2010, 143-144). 이는 마오의 항일 활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마오를 직접 대면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던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요. 그는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중국공산당과 함께 지낸 생활을 자신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서 회상하면서, ‘항일에 대한 의지가 결연하며, 이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사 또한 확고하다’고 홍군을 평가합니다(에드거 스노 2013, 143). 스노보다는 중립적인 입장이지만, 슈람(S. Schram) 또한 저서 『毛澤東』에서 마오의 진심 어린 항일정신이 중국인들을 움직였다고 서술하고 있어요(S. 슈람 1977, 205).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일본의 학자 엔도 호마레(遠藤譽)의 주장은 장융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중일전쟁 시기 마오가 비밀리에 일본과 결탁하여 국민당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어요(엔도 호마레 2019). 중국에 파견되었던 소련인 고문 피터 블라디미롭(Peter Vladimirov) 또한 1943년 8월 28일 본인의 일기에 “현재의 단계에서 중국 혁명은 일본 제국주의를 최우선으로 겨냥해야 하지만, 마오에게 그것은 그냥 말뿐인 것(mere words)”이라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Vladimirov 1975, 145).

이러한 양면적 평가는, 전술하였다시피 마오의 진심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이 평가들에 대하여 고찰하기 위해서는 당시 마오의 진심을 직접 탐색하는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어요. 본 연구는 중일전쟁 시기 마오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당시 그가 세운 항일 전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연구의 시도는 마오의 항일 전략에서 그의 항일 활동과 일본관에 대한 생각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건국 이후 마오의 말년까지 중국의 대일정책을 분석하는 데에도 적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항일 전략

중일전쟁을 연구한 학자 래너 미터(Rana Mitter) 교수는 중국의 항일에 있어 공산당과 마오만 주목받고, 그 외 장제스와 같은 다른 행위자들은 분명한 업적이 있었음에도 그저 역사 속에 묻혀버렸음을 지적합니다(Mitter 2014, 380). 이에 그는 장제스를 재평가하며, 그에 대하여 “전쟁은 이겼지만, 나라는 잃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Mitter 2013, 6). 이 간단한 문장은, 장제스가 중일전쟁의 승리에 훨씬 더 많은 역할을 담당했지만 결국 내전에서는 마오에게 패하고 말았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지요. 사실 중일전쟁이 시작될 즈음에는 국민당이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공산당보다는 국민당이 더 많이 나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어요. 그러나 마오의 항일 이력에 대해서 판단할 때,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평가의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항일에 나서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될 것이며, 본 연구에서는 마오의 항일 전략을 통하여 이에 대한 그의 심상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마오의 항일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는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민족적 통일전선의 결성입니다. 항일에 대한 마오의 전략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민족과 항일을 위해 계급적 투쟁을 잠시 멈추고 함께 단결하여 ‘민족통일전선(The national united front)’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Schram eds 1999, 94-97). 그는 대지주나 대매판계급과는 달리 민족자산계급(The national bourgeoisie)은 유동성이 있는 계급이며, 따라서 그들을 공산당으로 흡수시키고 함께 항일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Schram eds 1999, 86-102). 마오는 중국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면 결국 자산계급과 지주 또한 “나라 없는 노예”(Schram eds. 1999, 614)가 되고 말 것이라며 이들 계급의 동조를 직접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술은 국민당과 결코 협력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마오는 나라가 없으면 공산주의 또한 실현할 수 없다는 구국의식 아래 이들을 ‘폐쇄주의자’라 칭하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로스 테릴 2008, 331-339). 중국 대중의 애국심 자극 및 국민당과의 합작이라는 전략이 후일 마오의 승리 요인으로 제시될 만큼이나(S. 슈람 1977, 202)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그의 항일전략은 합리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당시 국민당보다 훨씬 열세에 있던 입장으로써 사상적으로나 세력적으로나 흡수당할 위험성이 있는 전략이기도 했어요. 마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경계했는데, 이는 그가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영도권을 다투는 것은 자산계급이다. 자산계급의 동요와 불철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중 역량과 올바른 정책에 의존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산계급이 도리어 무산계급을 꺾고 말 것이다.”(모택동 2001, 336 ; Schram eds 1999, 656).

따라서 통일전선의 형성에 있어 공산당의 관건은, 본질적으로 색채가 다른 계급들을 끌어 모아 안으면서도 어떻게 정체성을 지키며 국민당에 흡수되지 않을 것인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마오는 ‘공산당을 비롯해 통일전선에 포함된 모든 세력이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모택동 2002, 224 ; Schram eds 2004, 527 ; Schram eds 2004, 243) 논리를 내세워, 공산당이 국민당에 흡수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국민당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하겠다는 마오의 의지는 ‘국민당과 모든 일을 사전 논의할 필요는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그의 발언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Schram eds. 2004, 316 참고 ; 모택동 2002, 240-241 ; Schram eds. 2004, 546-547).

이렇게 국민당에 대한 태도를 확고히 하여 외부적 독립을 지켜낼 조건을 마련한 마오는, 내부적으로는 ‘민족’과 ‘계급’을 일체화시킴으로써 그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통일전선과 목적을 같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선에서 계급투쟁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족과 계급의 투쟁이 같은 방향에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하고 두 개념의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일체화를 시도하였습니다(모택동 2002, 240 ; Schram eds. 2004, 546).

전술했던 것처럼 마오는 민족자산계급을 설득하면서 그들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Schram, eds. 1999, 614), 이는 결국 그들도 나라를 잃으면 언제든 억압받는 계급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상술한 ‘민족과 계급의 일체화’가 미묘하게 이루어진 일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오의 일체화 전략은 비단 민족자산계급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어요. 아래의 인용문은 청조와 대립하였던 비밀 조직 가로회(에드가 스노우 1985, 97)를 상대로 보인 마오의 태도인데, 이를 통해 그가 공산당과 가로회의 이념을 함께 엮어내며 항일을 설득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로회에 가해진 지배 계급의 압제는 우리에게 가해진 것과 정말 거의 똑같습니다! … …여러분은 부자를 공격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지원하며 우리는 지방의 토호를 공격하고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지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견해와 입장은 특히 우리의 적과 나라를 위하는 길에서 서로 매우 가깝습니다.”(로스 테릴 2008, 333-334)

따라서 ‘민족통일전선 구축’이라는 마오의 항일 전략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항일이라는 목적 아래 모으고 일본에 대항하되, 그 가운데 민족과 계급의 이념을 적절히 조화하여 최종적으로는 공산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오의 전략은 그 스스로가 직접 언급한바, 공산당을 “위대한 대중적인 당으로”(모택동 2002, 223 ; Schram eds. 2004, 526) 만들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지요.

마오의 두 번째 전략은 ‘선전’과 ‘교육’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항일에 대한 의지를 고조시키는 역할도 담당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산당에 우호적인 사람과 세력을 양성하고 이로써 공산당의 영도를 실현하게 해 주는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오는 공산당이 인민들을 “참을성 있게 교양”하여, “자기자신을 개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모택동 1992, 1074-1075. ; 毛泽东 1983b, 113-114), 일찍이 10대 구국 강령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를 교육이라고 명시해 놓고 (모택동 2002, 31 ; Schram eds. 2004, 31-32) 실제로 ‘항일’과 ‘공산주의’를 교육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스노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에서 확실하게 살펴볼 수 있어요.

“이러한 ‘공산주의’가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을 받은 청년 수천 명이… …‘더욱 풍성한 삶’을 이룩하는 데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선전 활동과 실천적 행동을 통해 국가와 사회, 개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수백만 인민에게 심어 주었다.”(에드거 스노 2013, 154).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이때 스노가 홍군과 함께 본 연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잘 살펴보면, 당시 공산당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공산당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면서 동시에 국민당의 장개석을 일본에 협조한 매국노로 선전하고 있었어요. (에드거 스노 2013, 144-155). 물론 이러한 스노의 경험은 중일전쟁의 직전, 즉 국공합작이 합의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국공합작 이후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국민당과 손을 잡은 이후에는 국민당에 대한 비판의 수위도 다소 누그러졌어요. 하지만 상기한 것과 같이, 열세였던 공산당이 되레 흡수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산당에 대한 선전 및 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오직 항일하기만을 원하는 비교적 충실하고 곤란을 이겨낼 수 있는 지식인이라면, 그들을 다방면으로 받아들여 교양을

고양시키고,… …동시에 구체적 상황에 따라 입당조건이 구비된 일부 지식인들을 입당시켜야 한다.… …다소라도 쓸모가 있는 비교적 충실한 모든 지식인에 대해서는 적당한 사업을 맡기도록 해야 하며, 그들을 잘 교육하고 인도하여 장기적 투쟁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약점을 극복하게 하며, 혁명화 · 대중화시키며, 노당원 · 노간부와 어울리게 하며, 노동자 · 농민 출신의 당원과 어울리게 해야 한다.”(모택동 2002, 329 ; 毛泽东 1983a, 88-89). 상기한 글에 드러나 있듯이, 마오는 선전 및 교육을 통해 지식인들을 공산당으로 흡수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당시 공산당의 거점이던 연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참고한다면(Mitter 2013, 190-191) 이러한 전략은 당시 마오가 공산당 확장을 위한 의도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협력으로 승리한 전투를 자신들의 대단한 성공으로 치켜세웠으며(Van de Ven 2018, 144), 마오는 합작 이후에도 국민당이 공산당을 억압하고 있음을 본인의 연설에서 공공연히 밝혀(Mitter 2013, 224) 공산당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는 등, 공산당을 위한 선전은 계속되었습니다.

본고가 마지막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마오의 세 번째 항일 전략은 바로 유격전과 후방전입니다. 마오는 중국이 유격전, 즉 게릴라전과 운동전으로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가 강조한 또 한 가지는 바로 ‘후방전’이예요. 마오는 적의 후방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으며, 실제로 공산당의 팔로군은 일본군의 측면이나 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모택동 2002, 56 ; Schram eds 2004, 107). 그는 중국의 영토가 매우 넓으므로 일본은 사실상 포위 되어있는 형국이라고 보고(모택동 2002, 131 ; Schram eds 2004, 527 ; Schram eds 2004, 325), 그렇기 때문에 후방에서 일본의 운수로를 교란하는 것은 특별히 큰 역할을 한다고 하였어요. (모택동 2002, 56 ; Schram eds 2004, 117). 그러면서 마오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만약 대량의 군대가 운동전을 하고 팔로군은 유격전으로써 이를 보조한다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모택동 2002, 57 ; Schram eds 2004, 117).

여기서 ‘대량의 군대’와 ‘팔로군’은 대비되며, 당시 팔로군에 대비될 만한 ‘대량의 군대’라 함은 사실상 국민당 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팔로군이 후방에서 유격전을 진행하며 국민당을 보조하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후방전을 치르는 부대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으며, 마오는 자신이 불리한 조건에서는 결코 싸움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Schram eds. 1966, 56- 57). 이러한 언사들은 그가 공산당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전략의 목적은 단순히 피해를 줄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본군의 배후에서 공산당의 영도를 실현할 진지를 건축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Twitchett and Fairbank(eds.) 1986, 614). 공산당은 “재빠르게 일본군 배후 지역으로 대거 진입”(레이 황 2009, 221)하여, 그 지역을 공산당의 실효 지배 아래 두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마오가 고려하고 있었던 것은 이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어요.

“전쟁 수행과정에서 중국은 많은 일본군을 포로로 할 수 있을 것이며 많은 무기탄약을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을 것이고··· ···중국군대의 장비를 점차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모택동 2002, 132 ; Schram eds. 2004, 325 ; Schram eds. 1999, 266)

군의 장비 문제는 국공합작 이전, 홍군 시절부터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공산당은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무기의 양이 한정되어 있어, 적으로부터 빼앗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는 하였어요(에드거 스노 2013, 345). 국공합작 이후에는 장제스가 팔로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은 다시 적군인 일본군의 장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요(로스 테릴 2008, 342. ; Schram eds. 2004, 136). 따라서 일본의 후방과 운송로를 공격한다는 것은 일본군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나 물자를 탈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는 뜻이예요. 실제로 마오는 유격전의 기습 작전과 그 목적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유격전을 하며 획득하는 무기들은 유격부대를 점차 강화하여 정규군을 보완할 것이다”(Schram eds. 2004, 180) 라고 쓴 바 있는데, 이는 유격전의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가 물자 획득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매복의 대상을 나열하며 적의 트럭, 기차, 선박 등 운송수단들을 함께 거론하였고, 여기서 무기와 자원을 찾아 탈취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요(Schram eds. 2004, 189-191). 마오의 기본 전술서에 쓰여 있는 아래의 글은 그러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적이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그 무기를 탈취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적이 우리의 허기를 채워 줄 빵인 것처럼 행하여 그를 즉시 삼켜버려야 한다.”(Schram 1966, 53)

상술한 마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항일 전략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결국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끌어 모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선전하여 공산당을 인적으로 확장하는 데에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당의 지배 지역을 넓히면서 군비는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마오가 세워놓은 항일 전략, 그 자체가 결과적으로는 공산당을 강화하는 전략이었음을 제시합니다. 이는 그가 항일 활동을 아예 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항일 활동에 공산당을 보전하고 확장하려는 목적이 반영된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뜻이예요. 역설적이게도, 이는 공산당의 세력이 적고 열세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전략의 결과

전술하였듯이, 마오의 전략은 일본과 장제스, 이중의 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족통일전선의 수립은 적은 세력으로 항일에 나설 수 있는 방안이었던 동시에, 마오와 공산당이 민족의 위기에 대하여 진중하게 나서고 있음을 공공연히 보여주는 기제였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전까지 주적이었던 국민당과 손을 잡음으로써 그들의 공격을 공식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회였기도 합니다. 다만 국공의 협력관계는 전쟁 초기에만 어느 정도 유지되다가 전쟁이 후반부로 가면서 다시 소원해졌어요(래너 미터 2020, 364). 하지만 내전을 멈추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극히 열세였던 공산당에게는 상당한 유익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공산당의 선전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습니다(FRUS 1945, 1948 참고).

또한 마오는 줄곧 주장하던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여, 국민당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마오가 장제스보다 더 효율적으로 자원을 유용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아래의 글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유격전을 내세움으로서 전시 동맹에 깊숙이 개입하기 위해서 국민당이 필요로 했던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마오는 상대적으로 군비 부담이 낮아 국민당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정 수입을 배분할 수 있었다. 국민당 통치 구역에서의 삶이 갈수록 가혹하고 불평등해지는 동안, 공산당은 점점 희망의 상징이 됨과 동시에 국민당과 명확히 비교되었다.”(래너 미터 2020, 343)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마오는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은 되도록 피하여 항일에서는 비교적 적은 부담을 지고, 일본군의 배후지에서 통신선을 비롯한 각종 자원을 이용해(FRUS 1944) 국민당이 점령한 곳보다 나은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행적들은 마오가 항일 활동을 하되, 동시에 공산당을 보전하고 나아가 확장시키는 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즉, 하나의 전략으로 두 가지의 목표를 함께 달성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전쟁 이전까지는 미미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전쟁 이후에는 국민당과 비등한 세력에, 그보다도 높은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러한 전략은 실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중일전쟁이 세계대전과 맞물리면서, 마오의 전략은 공산당 내부의 성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조금 더 기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0년대에 들어서 그의 관심은 “군사 영역으로부터 민간 영역으로 더욱 뻗어 나갔고”(Van de Ven 2018, 152),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공산당에 무기가 부족했던 이유로 일본군과의 교전도 기피했습니다(‘Diary of Fu Bingchang’, entry of 7 April 1945. 재인용 : Van de Ven 2003, 59).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이루어 낸 공산당의 성장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연합국이었던 미국까지도 중국공산당에 점차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어요(래너 미터 2020, 408-409.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2017, 492) 반대로 국민당은 대일 전쟁에서의 자원 소모와 내부의 부패로 인해 국내는 물론 국외적으로도 신뢰를 상실해 갔습니다(래너 미터 2020, 398-405). 중일전쟁이 막 발발했을 때와는 판도가 완전히 달라진 셈이지요. 국민당은 쇠락했고 공산당은 득세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일본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양당은 종전 이후 협력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끝내 타협하지 못했고, 다시 시작된 내전에서 결국 마오와 공산당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래너 미터 2020, 462-469).

맺는 말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은 항일로 세력을 키우고 대륙의 승자가 되었지만, 정작 그의 항일 활동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들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극명하게 나뉘는 평가의 기준은 ‘마오가 항일을 위한 항일을 하였는지, 아니면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항일을 하였는지’의 여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연구는 마오가 제시한 항일 전략의 주요한 세 가지 방안을 살피면서, 그의 전략이 결국은 공산당을 확장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본고에서 살펴본 그의 항일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는 민족자산계급과의 단결을 도모하고 통일전선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공산당의 확장과 대중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 기대에 부합하였어요. 소련인 고문 피터 블라디미롭은 1942년 10월 22일, 5. 중일전쟁과 마오쩌둥의 항일 활동 평가_마오쩌둥 기념관 자신의 일기에 ‘마오가 “노동자와 농민(workers and peasants)”의 당에서 “사람들(People’s)”의 당으로 공산당이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을 항일투쟁의 이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적어둔 바 있는데(Vladimirov 1975. 69), 이러한 자료는 마오가 항일전쟁에 나서면서 공산당의 확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당시 국민당에 비해 열세였던 공산당에게는 오히려 흡수당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오는 다만 협력할 뿐,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른 개체임을 분명히 하며 내부적으로는 사상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두 번째 전략인 선전과 교육은 이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오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공산당의 이념을 공유하고 전파하여, 당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당원들을 규합하였습니다. 마오쩌둥 평전을 집필한 로스 테릴은 공산당이 국민당과 협력하면서도, “정신 속 어딘가에는 혁명에 대한 약속이 자리 잡고 있었다”(로스 테릴 2008, 341) 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공산당이 가지는 이념과 사상이 국민당과의 협력과는 별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오의 세 번째 전략은 후방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전투를 치르고 진지를 건설하며,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었어요. 이는 최대한 군사를 잃지 않으면서 자원을 획득하고, 동시에 공산당의 지배력이 닿는 범위를 확대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그가 일본을 상대로 아예 싸우지 않았거나 혹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항일 활동을 하되 공산당의 확장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전략으로 항일도, 공산당 세력의 확대도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일 전략 자체가 결국은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는 데 기여했고 후일 내전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마오의 항일에 대하여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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