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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

시간을 거슬러 동아시아의 역사를 만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 김대영 · 고려대학교

I. 장개석의 공산당 탄압

마오는 중국이 외국의 반식민지가 되어 가던 시대에 태어나 군주가 다스리던 청조가 멸망하고 1911 년의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부가 혼란을 겪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중앙정부는 약했으며 군벌들은 세력 확장을 꾀하던 와중 지식인 계층 중 일부는 봉건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대안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1921 년 7 월 23 일 중국공산당 제 1 차 전국대표대회가 치외법권 지대인 상해에서 거행되었고, 1922 년 5 월 상해에서 열린 제 2 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코민테른 노선을 수용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부르주아민주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습니다. 손문의 광동정부는 군벌을 제거하고 국가를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통일시킬 수 있는 군대 그리고 강력하고 효율적인 당 조직을 필요로 했으며,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중국의 공산당과 연합했습니다. 소련이 코민테른 대표로 파견한 요페(A.Joffe)가 국공합작을 추진하여 1923 년 1 월 26 일 ‘손孫-요페 공동선언’으로 제 1 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6 월 중국공산당 3 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공합작 방침을 결정하였습니다. 1924 년 1 월 중국국민당 제 1 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개최되어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되었지만, 1925 년 3 월 손문의 사망으로 인해 국민당과 공산당간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된 장개석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1926 년 7 월 9 일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고 북벌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효율적인 북벌의 수행을 위한 정부소재지 이전에 있어서 남창南昌을 주장한 장개석에게 반대한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1927 년 2 월 무한으로의 이전을 강행하여 혁명 주도권을 잡으려 하자 장개석은 공산당을 축출코자 했습니다. 1927 년 4 월 12 일 상해로 들어온 장개석 부대는 공격을 개시해 도시를 장악하고 대대적인 공산당 숙청을 단행해 제 1 차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었습니다. 이후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무한정부를 흡수하고, 1928 년 동북지방의 군벌인 장작림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하고 아들인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에 귀의하면서 북벌은 와수되었습니다. 1928 년 10 월 장개석은 북벌의 완성으로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국민당정부를 중국을 대표하는 중앙정부로 세웠는데, 아직까지 지방의 군벌세력은 독립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도전은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마오는 1927 년 9 월의 추수봉기에 실패한 뒤 정치국에서 추방된 후 군대를 정강산에 집결시켜 놓으며 홍군을 구성한 후 소비에트지구를 건설하게 됩니다. 1931 년 11 월에는 중앙당 간부를 포함한 각 혁명기지 대표들이 제 1 차 전국 노농군 대표대회(工農兵代表大會)를 개최하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주덕을 홍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앙공농민주정부 中央工農民主政府’(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이에 장개석은 1930 년 12 월부터 1934 년 10 월 사이 다섯 차례에 걸친 초공전을 단행하고, 1 차-3 차는 다 실패합니다. 장개석이 ‘먼저 국내의 적을 소탕한 다음 외국의 침략을 막는다’라는 방침 아래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며 군사 50 만을 동원하여 제 4 차 초공전을 벌이자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을 통해 겨우 막고, 일본군의 ‘열하熱河’ 진격으로 작전을 멈춥니다. 그러나 장개석이 1934 년 5 월 일본과 협정을 맺어 시간을 번 뒤 100 만에 달하는 군대를 모집해 제 5 차 군사작전을 시행, 토치카 전술과 동시에 농민과 홍군을 떼어놓으며 경제 봉쇄를 하는 등 지역을 통제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공산당은 1934 년 10 월 대장정이라 불리는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됩니다.

마오는 ‘30 여 년의 중국혁명에서 성과가 작은 것은 목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전략적인 잘못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전략적 잘못은 진정한 친구를 단결시키지 못하고, 진정한 적을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공격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누가 적인지 누가 친구인지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때 누가 적인지 친구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계급분석입니다. 마오는 중산계급과 소자산계급의 의식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며, 학생과 지식분자들 역시 노동자와 농민대중과 결합할 의사가 있으면 혁명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혁명적이지 않거나 반혁명적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그들이 가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의식에 의해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혁명계급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 기준에 따라 ‘민족’과 조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됩니다.(신봉수 2009, 75-76)

II. 모택동의 항일 정치 선전

제 1 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제 1 의 적으로 삼아 소비에트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당의 남경국민정부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항일정책은 처음부터 일관되지는 않았고 처음에는 구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고 항일에 대한 의지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어 화북에까지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점차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처음에는 선전 차원에서 반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우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중된 후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일정책을 제기하였습니다. 이후 만주를 넘어 중국 내지로 확대되자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정책을 제시하고 구체화하였습니다. 본래는 장개석 제외 세력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반제항일 노선을 제기하였으나 이후에는 통일전선으로 적극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비해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에 전념하며 일본에 대해 소극적 대응을 취하다 일본이 화북지방을 침략하고 국민당 통치기반을 위협하자 비로소 대일항전의 기치 하에 중공과의 연합을 꾀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공산당, 장개석, 코민테른의 이해관계가 ‘항일’이라는 공통목표에 합치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본래 모택동은 장개석과 연장항일을 꾀하지 않고 ‘장학량과 연대하여 장개석에 반대하는 항일’ 전략(연장반장항일)을 펼치고자 했습니다. 장개석 역시 ‘선안내후양외’ 정책을 펼쳤습니다.(박정현 2002, 283-284)

중공은 9.18 만주사변을 계기로 대중의 항일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수용했습니다. 1931 년 9 월 18 일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사변을 일으켜 만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봉천과 길림 성의 성회인 장춘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소비에트 지구에 대한 군사 작전에 전념하느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반일 운동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애국주의가 고조되자 모택동은 1932 년 1 월 중국공산당이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대중의 반일 정서를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아무런 방어 태세도 갖추지 않고 있는 장개석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쪽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12 월 중순에는 국민당 제 26 로군이 일본에 대해 ‘타협’하는 장개석의 정책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932 년 1 월 중순 중앙국 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거 침략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인민의 항일 정서가 고조되고, 국내 계급 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1932 년 4 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항일 의용군’ 편성을 주장했습니다. 마오와 주덕은 국민당이 공산당과 싸우기를 멈추고 그 대신 일본과 싸우기로 결정한다면 휴전 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1934 년 8 월 홍군의 일부 부대는 근거지 밖으로 나가 저장성에서 적을 혼란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벌였는데, 그때 공산당은 홍군 부대가 ‘항일 선봉 부대’이며 북쪽으로 진격하여 침입자들과 싸우러 간다고 선전했습니다. 공산당의 행동은 지식인들 사이에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지 않는 것을 엄청난 수치로 느꼈습니다. 장개석은 일본보다 공산당이 더 큰 위협이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나라의 명예를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Philip Short 2019, 533-534)

장개석의 쿠데타로 인해 국공합작이 와해되고 나서, 중국공산당을 위시한 중국내 사회주의자 그룹 내에서 1920 년대 말에서 1930 년대 초에 걸쳐 중국이 어떤 성격의 사회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의 쟁점은 중국에 있어서의 주요모순이 자본주의적인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봉건적인 모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였지만 결국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신사조파’가 주장했던 소위 반식민지반봉건론(半植民地半封建論)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1935 년 1 월 대장정 초기 모택동이 당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홍군이 연안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않아 발발한 중일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모순을 중화민족과 외세 즉 일본군국주의의 모순으로 돌려놓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쟁이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더욱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즉 중국인들은 민족적인 위기감을 다시금 느끼게 되고 국공내전의 중단과 일본에 대한 일치항전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조봉래 2011, 529-530)

1934 년부터 1935 년에 걸쳐 일본의 중국침략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며 1935 년 6 월에 일본국 사령관 매진은 국민당 정부대표 하응흠과 협정을 체결하여 화북성과 북경, 천진의 국민당 지부의 해산과 하북성의 중국군을 철수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1935 년 8 월 1 일 사천성 모아개에서 ‘항일구국을 위해 전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합니다. 이전의 선언과 달리 즉각적인 민주주의와 대중무장을 요구하지는 않고,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전쟁행위의 중단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항일통일전선이 반국민당적인 통일전선을 주장함에 반해 무엇보다도 항일을 중화민족의 존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파악하고, 단순히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상공업부르조아를 포함한 일체의 동포의 광범한 결집을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 ‘8.1 선언’은 국민당을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타도하지 않는 통일전선이고 이전에 일제와 백색권력 모두를 타도한 내용을 담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이건일 2014, 298-299)

1935 년 12 월 27 일 와요보에서 개최된 당의 활동분자회의에서는 “일본제국주의책략에 대한 반대에 대하여 논함”이라는 보고를 통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서안 사변 당시 중공은 장개석에 대한 강경 입장을 취하는 대신 평화적 해결을 선택했는데, 이는 장개석을 제거할 시 남경정부 실권은 친일파인 하응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때 모택동을 비롯한 일부는 “남경정부는 이미 적극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하여 장학량, 양호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음으로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할 우려가 있다”며 적극적 대처를 주장하였습니다.(오수열 2012, 205) 이후 국민당에 공동항일을 제기하는 등 중공은 정세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대중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서안사변을 통해서 국민정부가 연안에 대해 공격을 중지하면서 홍군은 국부군에 편입-개편하여 합법성을 부여받았습니다. 중공당은 위기에서 벗어나 세력 확대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모택동 리더십이 중공당 내에서 반석 위에 올랐으나 지도노선에 대한 당내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오수열 2012, 208-209)

협상이 진전됨에 따라 장개석과 일본 침략의 의미를 바라보는 마오의 관점이 점차 변화했습니다. 1936 년 4 월 마오는 ‘일본에 항거하고 장개석에 반대한다(抗日反蔣)’는 구호가 역효과를 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마오는 장원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입장은 일본과 싸우고 내전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장개석과 싸우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한 달 뒤, 마오는 모든 제국주의 열강을 단 하나의 연합으로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Philip Short 2019, 576)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최근 대두하는 주장에 따르면, 모택동은 일본군과 싸우자는 홍군의 병사들과 공산당 지도자들에 반대했습니다. 중일전쟁을 모든 중국인들이 단결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전쟁으로 보지 않았으며 자신이 장개석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중일전쟁을 장개석, 일본 그리고 공산당의 삼파전으로 간주해 일본군이 장개석을 파멸시키는 기회로 보았다고 합니다.(Jon Halliday 1968)

이러한 배경에서 에드거 스노의 공산당 근거지 방문이 허락되었습니다. 공산당의 대의를 서방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 월 홍군은 와야오부의 본부를 더 외지고 빈곤한 바오안으로 옮겼습니다. 바오안은 광막한 황토 지대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풍화로 만들어진 붉은 사암(沙巖) 절벽에 있는 동굴에 거주했습니다. 언덕에서는 흙탕물 강이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마오는 에드거 스노에게 예언적인 발언을 합니다. 다음은 그들이 7 월 16 일에 나눈 대화입니다.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중국의 주권을 좀 더 희생하면… 일본의 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적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일본 해군은 중국해를 봉쇄하고 필리핀, 시암(태국), 인도차이나,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탈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은 이들 지역을 전략 기지로 활용할 겁니다…..(하지만) 중국은 매우 큰 나라입니다. 나라의 모든 땅 한 치 한 치가 전부 적의 칼날 아래 놓이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일본이 중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그 당 위에 사는 1 억 명 심지어 2 억 명의 중국인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파도는 중국인의 저항이라는 암초 위에서 산산이 흩어져 그 힘을 잃을 것이며, 혁명적인 중국 인민이라는 거대한 인적 자원의 저수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와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1936 년 7 월 16 일, 모택동은 에드가 스노우와 면담하면서 중국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된 모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며, 만리장성 이남 지역뿐 아니라 만주 역시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의 중국 식민지인’ 한국은 포함하지는 않지만, 중국이 잃은 영토의 독립을 실현한 후 한국인들이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면 독립 투쟁에 열정적으로 도울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대만에도 해당되며 내몽골 같은 경우는 중국인과 몽골인이 살고 있는데 일본을 쫓아내고 자치주를 설립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항일 군대가 점거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며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으며 전시에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민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무장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하며 이는 장개석의 억압으로 인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Edgar Snow 1968, 110-112)

1936 년 여름과 가을 내내 공산당은 사적으로나 국민당과 국민당 지도자들에게 휴전을 체결하고 일본에 대항하여 힘을 합치자고 여러 번 호소했습니다. 8 월 뒤늦게나마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항일 연합이 소련의 이해관계에 극히 중요하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마오는 과거 1920 년대에 존재한 국공 통일전선을 부활시키고, ‘대중화통일민주공화국(大中華統一民主公和國)’을 수립하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홍군 근거지도 의회제를 보장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마오는 스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의 자유가 박탈된 인민에게 혁명 과업은 즉각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립 쟁취입니다. 만일 국가가 없다면 사회주의를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국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시행할 것 아닙니까?” 심지어 마오는 홍군이 명목상 국민당 군대의 지휘 계통에 들어가 공식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일부가 된다면 홍군의 명칭을 변경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산당 군대와 영토에 관한 당의 통제권만 인정된다면 그 어떠한 양보도 할 수 있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마오는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장개석에 대한 의심도 표현했습니다. 장개석이 정말로 전략을 바꾸었는지 의심스러우며 그가 앞으로도 계속 입장을 바꿀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Philip Short 2019, 577)

III. 서안 사변과 국공합작

섬서성 북부 와요보에서 열린 당의 활동분자 회의에서 한 모택동의 보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1935 년 12 월 27 일)에서는 장개석을 ‘1927 년에 혁명을 배반’하고 ‘매국 역적’이며 ‘중국을 팔아먹으려는’ 정책을 편다면서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일본제국주의자’와 같은 선상에 둡니다.

대토호, 대악덕인사, 대군벌, 대관료, 대매판들은 아주 일찍부터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은(어떠한 혁명임을 막론하고) 무조건 제국주의가 하는 짓보다 나쁘다고 과거에도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매국 역적의 진영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은 망국의 노예로 되느냐 안 되느냐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민족적 경계선을 없애버렸다. 그들은 이해관계 면에서 제국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가장 우두머리가 바로 장개석이다. 이 매국역적들의 진영은 중국 인민의 철천지 원수라고 하겠다. 만일 이 매국 일당들이 없었다면 일본제국주의가 지금처럼 이렇게 제멋대로 횡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것이다.

또한, 서안 사변 당시 소식을 접한 공산당원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저녁에는 군중집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마오, 주덕, 주은래는 장개석을 군중 앞에 끌어내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궈타오는 훗날 이렇게 회고합니다. “일어나서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 사건이었다. 모든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요일 오전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장궈타오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국민당 정부 타도와 장개석 처형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내전을 시작했으며, 치욕스러운 유화 정책으로 일본에 부역했고, 불과 며칠 전 공산당의 화해 제의를 최종적으로 거절하고 중국의 방어보다는 ‘비적 소탕’ 정책을 우선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마오의 입장은 좀 더 신중했습니다. 마오는 객관적으로 볼 때 장개석이 친일적이었다고 언명했습니다. 그리고 장개석의 구금은 ‘혁명적 의의’가 있으므로 공산당은 이를 당연히 저지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을 타도하는 데 공산당이 앞장서서는 안 되며, 더 적절한 방식은 장개석을 ‘인민의 심판대’ 앞에 끌어내 그의 죄가 널리 공개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훗날 장궈타오의 해석에 따르면, 모택동의 발언은 공산당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장학량이 직접 장개석을- 마오는 장개석을 ‘원흉’이라고 표현했습니다.-처리하도록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오는 난징 정부의 좌익 및 중도 세력의 지지를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끌어내 거국적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우익 국민당 지도자들이 시안 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이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Philip Short 2019, 580)

하지만 서안사변 이후 1936 년 12 월 28 일의 ‘장개석의 성명에 대한 성명’에서 ‘지난 10 년 간 그릇된 정책을 바꾼다’며 성명에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다’ 등의 칭찬할 만한 구절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혁명파를 ‘반동파’라고 부른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무사히 서안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공산당의 조정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민족생존을 위한 견지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합니다.(모택동 2001) 12 월 29 일 전보, The Situation and Our Policy After the Peaceful Settlement of the Xi’an Incident 에서는 남경 정부의 항일파들이 조금 더 유리해졌지만, 친일파가 다시 우세를 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점을 밝힙니다. 가능하면 정부 내외에서 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여 좌파 및 중도파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동시에 홍군 역시 강화시킨다는 것이 계획입니다.(Chou 1981, 91-92)

1937 년 7 월 23 일의 <일본의 공격에 반대하는 방침, 방책 및 그 전도>에서는 장개석의 명칭이 ‘선생’으로 바뀝니다.

장개석 선생과 전체 애국 국민당원들은, 자신의 방침을 견지하며 자신의 약속을 실천하며 타협과 양보를 반대하고 끝까지 항전하여 실질적으로 원수들이 준 모욕에 응답해 줄 것을 여러분들에게 바란다. 홍군을 포함한 전국의 군대는 장개석 선생의 선언을 지지하며 타협과 양보를 반대하고 끝까지 항전하자!

공산당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자기의 선언을 충실히 집행하며 동시에 장개석 선생의 선언을 계속적으로 지지하면서 국민당원 및 전국 동포와 함께 국토 방위를 위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며 싸우고, 일제의 주저-동요-타협-양보를 반대하고 끝까지 항전하자.

모택동은 1937 년 8 월 22 일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민당과의 관계는 합작 후에도 공산당이 독립자주 원칙을 견지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8 월 25 일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항전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에서는 국민당의 정책이 안 바뀌는 것에 대해 ‘전면적인 민족적 항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합니다. 9 월 29 일의 <국공합작 성립 후의 절박한 임무>에서도 역시 정부, 군만으로는 항일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각 당-각파-각계-각 군 등 모든 단체와 개인을 밧줄에 묶듯 단단히 통제해야 하며 민중을 대하는 방법이 변화하여 국민당의 전제정책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후 11 월 12 일 <항일전쟁의 형세와 임무>라는 보고를 통해 독립성을 상실하고 국민당으로 기우는 ‘우경투항주의’를 엄중히 경고하며 공산당의 자주독립원칙과 통전에서의 영도권을 다시 한번 역설했습니다.(이병주, 김기훈 2002, 147-148)

모택동은 신민주주의론을 통하여 당시 중국적 상황 속에서 중국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공산당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국민당 주도의 순수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아니고, 무산계급과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고 중간파를 흡수하는 통일전선을 통하여 이룩해야 할 신민주주의 혁명임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신민주주의 혁명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기본 조건을 형성하는 단계이므로 무산계급과 공산당이 통일전선에서 영도권을 확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강조했습니다.(이병주, 김기훈 2002, 150)

항전관은 중국공산당과 같이 항일투쟁을 이끈 특정 주도세력을 전시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일전쟁을 주도한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신 또 다른 항일투쟁의 주체로서 중국국민당은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항전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집단기억이 중국공산당 중심의 항일투쟁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조은경 2014, 211)

1939 년 7 월 15 일에는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가 국공합작을 선포하며, 황제의 후손인 인민의 노력을 통해 항일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선언하며 투쟁을 통해 첫째, 독립과 자유 그리고 해방을 이뤄내 영토와 주권을 회복하며, 둘째,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실현해 국회를 설립하여 헌법을 통해 인민 해방을 이루며 셋째, 중국 인민이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사보타주와 방해를 사전 방지하기 위해 엄숙히 선언하는데, 첫째, 손문의 삼민주의가 현재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당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둘째, 국민당 정권을 뒤집어 엎기 위한 폭동을 선동하는 정책을 포기하며 소비에트화 운동을 취소, 지주의 땅을 강제로 압수하는 정책을 그만두며, 셋째, 현재 소비에트 정부들을 철폐하고 국가 권력이 국내에 통합되기 위해 민주주의의 실천을 부르짖으며, 넷째, 홍군은 현재 이름을 포기하고 국민정부의 군위원회의 국민해방군 하 통솔, 편입되어 항일 전선을 향해 행군할 준비를 한다.

즉, 항일을 위해 세력 통합의 필요성을 느껴 국민당과 합치는 동시에 소비에트화 노력을 그만두는 것을 공산당이 선언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Chou 1981, 94)

1937 년 7 월 23 일 ‘일본의 공격에 반대하는 방침-방책 및 그 전도’에서는 7 월 17 일에 장개석 ‘선생’이 담화를 발표하여 항전하려는 방침을 확고히 했다고 합니다. 이는 대외문제에 있어서 ‘국민당으로서는 그동안 여러 해에 걸쳐 발표한 선언 중에서 처음으로 올바른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어, 우리와 전국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1937 년 8 월 25 일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항전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에서는 ‘항전 문제에 있어서 국민당의 진보는 찬양할 만한 것이며, 이것은 중국공산당과 전국 인민이 다년간 희망하던 바’라고 하면서 이러한 진보를 환영하되 ‘인민의 항일운동에 대해 자유를 주지 않고, 정부기구에 대해 원칙적인 변화를 하려 하지 않으며, 인민생활에 대해 개선하려는 방침이 없고, 공산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합작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1937 년 9 월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29 일 ‘국공합작 성립 후의 절박한 임무’에서는 장개석씨의 담화는 전국에서의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으며,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구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제시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나, 아직도 필요한 자기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만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되었든 양당 간의 통일전선은 그 성립은 선고하였다고 합니다. 1938 년 5 월 연안항일전쟁연구회에서 한 모택동의 강연 ‘지구전을 논함’에서는 국민당이 영국과 미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영-미가 투항하라고 하지 않는 한 투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1940 년 5 월 4 일 ‘항일역량을 적극 발전시키며 반공완공파의 공격에 저항하자’에는 국민당 통치영역에서는 국민당의 법률과 명령과 사회적 관습이 허락하는 한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범위를 이용해 온건하고 정확하게 투쟁하며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모택동 2002)

모택동은 항일대학에서 행한 장호張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속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목전의 상황에서는 반드시 국민당과 타협을 해야 하며, 국민당과의 일시적 타협이 결코 투항이나 무산계급의 이익을 팔아먹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받고 있는 광범한 대중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국민당에 투항하지 않으며 오직 항일을 향해 가는 것이다. 국민당과의 합작은 항일 단계에서의 합작이니 본당 동지들은 의심을 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8 로군 정치부는 10 가지 문제를 선정하여 문답형식으로 설명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게 ‘4 대 보장’을 약속함으로써 야기된 홍군 내의 동요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중 장개석이 항일을 영도하도록 옹호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현재의 장 위원장은 이미 항일 쪽으로 돌아섰으며, 우리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민족전선을 받아들이고, 원래 우리를 공격하려던 군대를 항전을 위해 전선으로 이동시켰으며, 공산당이 제기한 항일 정강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를 옹호해야 한다. 결코 장 위원장 개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항일 주장을 실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며, 그가 확고하게 항일민족전선의 길을 걷도록 격려하는 것이다.”(이건일 2014)

IV. 제 2 차 국공내전

제 2 차 국공합작이 깨진 후, 1945 년 4 월 30 일의 On the United Front 에서는 장개석은 내전 진행에 대한 꿈을 버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서안 사건 전까지 계속 공산당을 억압한 동시에, 항일 투쟁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국민당군을 억제했습니다. 한때는 장학량 장군에게 그의 임무는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리는 것이며, 일본군을 싸우러 가면 보직에서 해임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서안 사건 후 내전에 더 이상 종사하지 않고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학량을 가두고 양호성을 해외로 파견하여 동북군과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17 로군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후 송자문은 장개석이 석방된 후 남경정부를 개편하겠다고 했지만 8 년 동안 이 약속은 지켜졌지 않았습니다. (Chou 1981, 216-217)

일본 패망 후인 1945 년 8 월 16 일에는 장개석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까지 이릅니다. Actively Propagate Opposition to Civil War and Dictatorship and Expose Chiang Kai-shek’s Deceitful Plot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장개석은 내전을 위한 그의 선전 강도를 높여 왔으며 공산당 탓을 하며 인민을 공포로 몰아넣어 내전을 펼쳐 독재를 계속하고자 한다. 지난 5-6 년 동안 장개석은 해방구의 군대를 인정하거나 구호물품을 보내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갑자기 명령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이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괴뢰군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Chou 1981, 247)

예전에 마오는 항일전선에 참가하는 8 로군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중일전쟁은 본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가 결정한 정책은 100 분의 70 의 힘은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 쓰고, 100 분의 20 의 힘은 국민당과 타협을 하는데 쓰며, 100 분의 10 의 힘은 일본군에 대항하는데 쓰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을 견제하면서 후방 지역에서 당 조직을 건설하는데 힘을 썼으며, 대중노선을 강화해 온 것입니다.

V. 마오의 사상 체계

이미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1935 년 12 월 27 일)에서 마오는 장개석이 중국 인민의 철천지 원수인 매국역적들의 진영의 우두머리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비록 1945 년에 이르러 역설한 것이기도 하지만, 장개석은 내전 진행에 대한 꿈을 버린 적이 없는 데다가, 서안 사변 전까지는 계속 공산당을 억압하면서 항일 투쟁을 하고자 하는 국민당군을 억제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23 년 전저우에서 ‘2.7 학살’ 사건을 겪은 이후 마오는 자산계급이 국민 혁명을 주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1920 년대에 통일전선을 염두에 둘 때, 공산당에 우호적인 국민당 좌파와의 협력을 고려할 때마저도 고민했습니다. 마오는 이러한 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고사성어인 ‘첩상가옥(疊床架屋)’이라는 말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침대 위에 침대를 놓고, 집 위에 집을 얹는다’는 뜻으로 쓸데없이 반복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오의 말은 만일 통일전선이 공산당이 친공산주의 성향의 국민당 좌파, 즉 생각과 목표를 공산당과 공유하는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기 위한 전술이라면,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둘 중 하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는 어느 편이 사라져야 하는가였습니다.(필립 쇼트 2019) 국민당 좌파에 대해서도 이러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장개석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4. 마오의 고민: 장개석 접근법 연합전선, 그리고 명분과 실리_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모순론’을 통해 답할 수 있습니다. 주은래가 <On the United Front>(April 30, 1945)의 I. On the Anti-Japanese National United Front 에서 설명하기도 하는 이 모순론은, 모순을 활용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소수를 반대하며 적들을 하나씩 격파해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본래 교조주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어떠한 사물도 모두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순이 없으면 세계는 없다. 세계는 불완전한 모순들 사이에서 진보를 이루어낸다’고 정의한 것으로부터 모택동은 제국주의와 반봉건 등 외부적 장애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모택동은 냉철한 자기분석과 진단을 통해 반식민지국가 중국의 경우, 중국민족과 제국주의 국가와의 모순 및 중국인민과 봉건제와의 모순 중 주요 모순이 바로 제국주의와 반식민지(중국) 사이이기에 국공합작이 정당화된다고 했습니다. 즉,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의 계급모순에 질적인 변화가 발생했으며, 이런 변화에 따라 계급모순은 민족모순에 비해 부차적인 지위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인식에 따라 마오는 수많은 동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장개석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배후에서 기만전술을 펼치면서조차도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당과 장개석을 태하는 어투를 관찰할 때, 북한이 남한을 겨냥해서 하는 언행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북측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 위 내용이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참고문헌 박정현. 2002. “중국공산당 항일정책의 변화과정”. 사총,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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