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조일관계의 정상화
동아시아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느끼며, 내일을 바라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한일교류박물관 · 나고야 성터 · 박 지 원 · 건국대학교
들어가며
지난밤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진심어린 조언들을 되새기며 사랑방 13 기는 둘째 날 여정을 활기차게 시작했습니다. 사세보에서의 발제를 통해 미 · 중의 군사력 현황을 확인하고, 과거 일본의 군사력 성장을 부러워하다가 도잔신사와 규슈 도자기 박물관을 방문하여 이삼평의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모두가 피곤했던 탓인지, 전날 발제 준비로 밤을 지새웠던 탓인지 둘째 날 마지막 일정이었던 나고야성 박물관(한일교류 박물관)으로 달리는 1 시간 반은 길고 길었습니다. 나고야성 박물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수길)가 임진왜란의 출병거점지로 삼았던 나고야 성의 터 근처에 자리했습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오랜 역사를 이어온 한일관계를
87 단절시켰다는 인식 하에 과거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반성하고, 한일교류 및 우호의 증진거점이 되고 싶었던 사가현의 뜻이 담긴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나고야성 박물관에 ‘한일교류 박물관’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사가현의 의도 하에 박물관 전체의 전시 키워드는 ‘한일 교류’이며 한일 교류의 흔적이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1. 한일교류박물관의 외관
요즈음같이 한일관계가 시끄러울 때면 ‘사상 최악’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맴돕니다. ‘한일교류 박물관’을 답사보고서 주제로 선택한
88 후에는 정말로 역사상 한일관계가 최악이었을 때는 언제였을지 꼽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가 떠올랐고, 한일 관계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암울했을 이 두 시기 이후 한일관계의 정상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첫 공식 외교사절인 1607년 ‘회답겸쇄환사’와 일제강점기 이후 한일관계 재개의 출발점이 되었던 1965년 ‘한일기본협약’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 임진왜란 이후의 조일관계가 사상 최악이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1607년 ‘회답겸쇄환사’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천명의 사상자를 보았을 뿐 아니라 수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고, 이후 일본에 첫 공식사절을 보낸 1607년까지도 국방과 민심이 불안했습니다. 이러한 피해를 고려했을 때 당연하게도 임진왜란 이후 조일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최악의 조일관계가 1607년에 정상화된 계기와 과정은 무엇이었을까요? 국교의 정상화에 따라 조일 두 국가의 서로에 대한 심상은 긍정적으로 바뀌었을까요? 이 역사적인 정상화의 경험이 오늘날의 한일관계에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선조실록》과 《해행총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조일 강화에 대한 조선의 뜨거운 논의
89 1606년 5월 12일, 조선의 신하들은 조일 강화에 대해 열렬히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은 강화 찬성으로 의견을 모았는데 그 이유는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선조실록 v.40, 1989, 15-37).
첫째, 국방에 관한 문제입니다. 조선이 더 이상 임진왜란의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는 기점이 되는 날은 노량해전 이후 수길의 죽음으로 왜적이 도망간 1598년 11월 22일이었습니다(선조실록 v.25, 1988, 180). 그러나 조선은 1598년 임진왜란의 종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국의 국방에 대한 불안을 느껴왔습니다(선조실록 v.40, 1989, 25). 끈질겼던 7년간의 전쟁이 갑작스럽게 종결되면서 일본의 재침략설이 횡행했고, 남방에서의 왜적의 위협은 시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서는 오랑캐들이 활보했고, 당시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었던 훈련도감은 남 · 북방으로 불안한 동아시아 정세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선조실록 v.41, 1989, 47). 따라서 다수의 신하들은 일본과의 강화로 남쪽의 국방을 안정시키면 서북쪽의 방비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선조실록 v.40, 1989, 32).
더불어 임진왜란 직후부터 제기되었던 일본 정탐에 대한 필요성 역시 조선의 국방 강화를 위한 일본과의 강화 찬성 논의를 뒷받침했습니다(선조실록 v. 25, 1988, 245). 남방의 일본 내부사정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수길과 왜란 당시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가강이 집권한 것으로 보입니다(선조실록 v.40, 1989, 28). 일본 내부사정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후에 경섬이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90 방문했을 때 알 수 있었는데 아래와 같이 가강이 집권한 후 가강과 함께 수길에게 후사를 부탁 받았던 휘원에게 권력이 돌아가지 않자, 휘원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가강이 이를 진압하였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기해년(1599년)에 수길이 죽을 적에, 휘원과 가강이 후사를
부탁하는 맹세를 함께 받았는데, 가강이 집권하자 휘원이
그를 미워하였다. 휘원이 한번은 가강에게 조선을 쳐부순
공을 요구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조선이 예의의 나라로,
다만 문교만 숭상하고 무를 드날리거나 군대를 뽐내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까닭없이 군대를 일으켰으니, 비록 전쟁에
이겼다 하더라도 무가 될 것이 없는데, 무슨 공이
있겠소.”하고, 드디어 상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혐오와
원망이 날로 깊어졌다.
경자년에 휘원이 가강을 제거하려고 비밀히 능동주 태수
경승을 시켜 일부러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게 하고는, …
서병(휘원의 군사)이 크게 패하여 복견성으로 후퇴하여
달아났다. 가강이 복견성까지 뒤쫓아가서 휘원과 언약하되,
만일 처자를 온전히 돌려주면 죽이지 않겠다 하니, 휘원이
언약대로 군사를 풀고 자기 봉읍으로 돌아갔다. … 휘원의
식읍 11주를 빼앗고 …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82-283)
91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인 국방 불안 때문인지 선조는 후에 임진왜란 이후 첫 공식 사절인 1607년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에게 조총 수입을 중심 임무로 전교합니다.
둘째, 포로쇄환에 관한 문제입니다. 포로 쇄환에 대한 논의 역시 임진왜란의 종결 직후인 1598년 12월 8일에 시작되었습니다. 1606년 논의 당시,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는 수만명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포로 쇄환은 조일 강화의 필요성을 한층 더 심화했습니다. 아래와 같은 1606년 11월 9일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포로쇄환에 상당한 중요성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상께서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 있는 우리 나라 백성이 몇 천
몇 만 명인지 모른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를 어찌 묵과할
수 있겠는가. 회답사로 하여금 잘 말하도록 하거나 또는
예조로 하여금 일본의 집정관에게 서장을 보내게 하거나
다른 대책을 세워서 남김없이 쇄환시키도록 하라.
…’하셨는데, 상께서 전념하시고 빠짐없이 쇄환코자 하시니
이는 실로 백성의 부모된 마음이십니다.
(선조실록 v. 41, 1989, 99-100)
또한 1607년 1월 4일 선조는 아래와 같이 백성에 대한 중요성,
92 즉 포로 쇄환에 대한 중요성을 논하면서 1607년 사절의 이름을 회답사에서 회답쇄환사로 변환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비변사의 건의로 1607년 사절은 ‘회답겸쇄환사’로 명명됩니다.) 동시에 선조는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에게 포로쇄환과 조총 수입을 임진왜란 이후 첫 공식사절의 2가지 핵심 임무로 명합니다.
“군주는 백성에게 부모의 도리가 있다. 백성들이 오랑캐에게
잡혀가 예의지방의 백성들로서 장차 오랑캐 나라의 백성이
되게 되었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날 회답사에게
그곳에 이르러서 쇄환에 관한 일을 스스로 주선해 보도록
계하했었으나, 이 말은 허술한 듯하여 그가 능히 쇄환해 올
것인지를 기필하지 못하겠다. … 이제 위에서 보내거나 혹
예조에게 글을 보내게 하여 곧장 의리에 의거, 우리 나라의
포로를 모두 쇄환시켜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게 하라고 하여
한번 그들의 뜻을 떠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신의 칭호를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을 경우
그 호칭을 회답쇄환사라고 하는 것도 한 계책일 것이다. …
그들이 스스로 전 시대의 잘못을 모두 고치겠다고
말하였는데, 이미 전의 잘못을 고치겠다 하였으면 전 시대에
포로로 잡아간 백성을 모두 쇄환시켜 그 잘못을 고치고 다시
새롭게 우호를 맺어야 하는 것으로 소위 신의란 것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의논해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93 또 적을 막는 병기로는 왜의 조총만한 것이 없다. … 만일
이번 회답사의 사행에 해조에게 물건값을 헤아려 주게 하여
조총을 편리한 대로 다수 사들여 오게 한다면 적국의 병기를
배에 가득히 싣고 돌아온다 해도 참으로 방애스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또한 한 가지 이로운 일이니 아울러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선조실록 v.41, 1989, 173)
셋째는 조선의 국체(나라의 체면)와 관련하여 임진왜란 중 왕릉을 범한 왜적에 관한 문제입니다. 조선 비변사의 입장에서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조선)의 삼도를 함락시키고, 우리(조선) 백성들을 살육하였으며, 우리(조선)의 종묘 사직을 허물고, 우리의 능침을 파헤쳤’습니다(선조실록 v.40, 1976, 14). 선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신하들은 특히 왜적이 능을 범했다는 사실에 대해 만고에 통분해 합니다. 따라서 대마도가 조일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할 때 조선은 이에 응하기 위한 2가지 핵심 전제 조건으로 일본에 1) 능을 파헤친 적을 잡아 2) 서계와 함께 보내기를 요구했습니다(선조실록 V.40, 1989, 145-146). 후에 조선의 요구에 응한 일본 측은 능을 범한 도적이라며 2명의 왜인을 보내옵니다. 그러나 조선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인에 대해 ‘간교하고 교활’하다는 심상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진범 여부에 대한 논쟁을 시작합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선조의 전교를
94 보면 조선이 능을 범한 왜적에 대해 얼마나 통분해 하는지 잘 나타납니다.
“참으로 능을 범한 도둑이라면 군신 상하가 종묘에 고하고
손수 죽여야 할 것인데, 어찌 헌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심할 것이 없다. …”
(선조실록 v.41, 1989, 61)
“능침을 범한 죄율에 어찌 괴수와 추종자의 구별이 있겠는가.
…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의 무덤을 남에게
도굴당했다면 수천 명의 도적 모두는 응당 그 아들이 손수
베어 살을 저며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을 다 잡을
수 없게 되었고 다행히 한두 명을 잡았다면, 아들된 자는
실성하여 미친 듯 뛰면서 부모의 묘에 가서 통곡하고 손수
죽여서 원수를 갚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냉소하면서
‘이는 묘를 도굴한 괴수가 아니라 수종한 적일 뿐이니
이들에 대해 노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고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의요 불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조실록 v.41, 1989, 113)
이후 일본에서 능을 범한 왜적이라고 보내온 일본국 대마도의
95 왜인 마고사구와 마다화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은 조선의 왕릉을 파헤친 적이 없으며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선조실록 v.41, 1989, 115). 이에 따라 마고사구와 마다화지의 사형여부에 대한 논의는 더 활발해졌고, 결국 선조는 ‘그들의 목을 자르는 일 이외에는 다시 다른 계책이 없다.’며 이 두 왜인을 살려 두는 것을 국체의 손상으로 여기고 사형을 전교합니다(선조실록 v.41, 1989, 153). 능을 범한 왜적에 대한 선조의 통분과 분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서계에 관한 문제 역시-조일 강화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아니었지만, 1606년 논의에서 국체에 관한 문제로 중심 화제로 다뤄졌으니 한 번 짚어보겠습니다. 조선의 사신들은 조일강화 찬성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일본이 서계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일에 대해 주춤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다만 두 나라가 서로 우호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한데도 내부에서는 일찍이 한 장의 글도
보내지 않고 대마도의 왜만이 왕래하면서 말을 전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비망기로 이르기를, “적이 화친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
대마도가 중간에서 한 일이어서 그들이 가강을 칭탁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만일 가강이 진실로 속히 화친하려는
뜻이 있다면 유정이 돌아올 때에는 어찌 한 장의 글도 부치지
96 않고 장황한 사설과 흉악한 위협으로 공갈했겠는가.”
(선조실록 v.40, 1989, 14-15)
이 외에도 많은 신하들이 서계에 대한 문제를 중요시하여 1606년 논의 후 조선은 대마도를 통해 일본에게 서계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조일 강화에 응하는 조선의 협상 조건은 1) 일본의 서계와 2) 조선의 능을 범한 도적의 압송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1606년 7월 4일에 서계를 먼저 보내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서계의 내용입니다. 1606년 8월 17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대마도에 방문한 전 계신 일행은 대마도가 일본으로부터 온 서계라고 소개한 글을 본 후 ‘그 글을 펴보았더니 간혹 불손하고 또 도둑을 포박하여 보낸다는 말도 없었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이 이 서계를 달갑게 여기지만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선조실록 v.41, 1989, 24).
이처럼 대마도가 일본이 보내온 서계라고 소개한 글을 보여주긴 했지만, 선조는 서계가 오기 전부터 ‘가강의 서신과 능을 도굴한 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설사 온다고 하더라도 거짓일 뿐, 필경 속임을 당할 것이다.’라며 이 서계의 진위 여부를 의심합니다(선조실록 v.40, 1989, 143).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이 가지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심상은 임진왜란 전부터 ‘간교하고, 교활함’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보낼 때까지도 일본을 쉽사리 믿지 않았습니다.
97 따라서 이후에도 서계의 진위 문제는 회답겸쇄환사를 보내는 일에 관해 관건이 되는 화제였습니다(선조실록 v.41, 1989, 163).
실제로 1607년 회답겸쇄환사 경섬은 일본 방문 당시에 대마도가 일본이 먼저 보내온 서계라고 소개한 글이 위서임을 거의 확신합니다. 대마도가 보여준 글에는 인으로 ‘일본국왕’이 쓰여 있던 반면에, 새로운 관백이 된 가강의 아들 원 수충은 회답 국서에 인으로 ‘원수충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포함한 네 글자를 새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섬이 가강에게 사용하는 인신이 있냐고 물었을 때, 가강의 환노가 “전에는 있었으나, 어떤 사람이 그것을 위조하다가 드러나자, … 곧 녹여버리고 지금은 없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경섬은 이 대답을 듣고 대마도가 보여준 일본의 서계가 위서임을 확신합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02-305). 그러나 서계의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조선이 제시한 조일 강화를 위한 2가지 요건 중 하나인 일본의 서계가 먼저 왔다는 점은 1607년 회답겸쇄환사의 방문이 이루어지기까지 비중 있는 역할을 합니다. 나머지 요건인 능을 범한 왜적 2명의 압송이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회답겸쇄환사의 방문을 촉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넷째, 1598년부터 7-8년간 지속되어 왔던 대마도의 조일강화 간청도 강화 찬성에 대한 비중 있는 이유였습니다. 대마도의 조일강화 간청은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 6월 3일에 시작됩니다. 본래 대마도 사람인 요시라가 조선에 강화를 요청하며, 당시 조선에 머물던 중국 장수인 경리도감과 타협을 보려 합니다.
98 ‘관백은 이 일을 알지 못하고, 행장이 강화를 하고자 하여 보내서 왔다’는 요시라의 언급 때문에 강화 요청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되기는 하지만(선조실록 v.24, 1988, 166-167), 이렇게 1598년에 시작된 대마도의 조일강화 간청은 1607년 임진왜란 이후 첫 공식 사절인 회답겸쇄환사를 보내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특히 1601년 6월 대마도의 조선인 250여명 쇄환에서 시작해서 주기적인 조선인 포로 쇄환을 통해 조선이 일본과 강화하도록 유인책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김문자 2019, 48-49).
1606년 논의에서 조선의 신하들은 6-7년간 미뤄온 대마도의 조일강화 간청에 대한 결정을 더 지연시킬 경우, 더이상 참지 못한 대마도의 후환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국방력이 약했기 때문에 대마도의 후환이 두려웠고, 즉 앞서 첫째로 언급한 국방 요소와 함께 대마도가 여러 차례 조선인 포로를 쇄환해 온 바, 즉 둘째로 언급한 포로 쇄환이라는 필요성이 모두 작용하여 네 번째 강화 찬성 이유인 ‘대마도의 지속적 간청’이 설득력 있는 강화 찬성 이유가 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강화찬성 이유는 각자의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며 조일 국교재개의 필요성을 강화했습니다.
유영경의 의논은 다음과 같다.
“다만 근래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평수길이 이미 죽고 가강이
당국하여 스스로 모든 일을 수길의 소위와 반대되게 한다고
99 하는데, 대마도의 왜가 이 말을 가지고 화호를 요구하면서 독촉이 급하니, 이 때에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면 무서운 독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위협을 당한 후에 허락하느니보다 먼저 잘 도모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이 역시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 …. 그러므로 신이 전일 비변사에서 여러 당상과 회의할 때 예조에서 서계를 만들어 사람을 차출하여 일본에 들여보내어 한편으로는 대마도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여 후일 처치하는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정했던 것입니다.”
(선조실록 v.40, 1989, 24) 심희수의 의논은 다음과 같다.
“강토를 회복한 지 이미 8~9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사방을 둘러보면 정벌할 준비는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게을리 시간만 허송하는 것이 신묘년 이전보다 더욱 심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마도 적이 우리 나라에 방비가 없음을 엿보아 알고는 더욱 함부로 능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사세가 이에 이르러 조절하는 권한이 저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 …대체로 귤지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긴 지 오래인데, 또다시 미루어서 낙심하고 돌아가게 하면 혹 노여움을 격발시켜 기꺼이 가강에게 가서 서계를 받아가지고
100 오지 않을 듯하니”
(선조실록 v.40, 1989, 25-26)
성영의 의논은 다음과 같다.
“이 일은 여러 해 미루다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더는 미룰
수가 없으니 … 다만 ‘근래에 대마도가 귀국의 뜻을 받들어
강화를 요청하면서 사람을 보내어서 해마다 두세 번씩
간청하였고, 우리 나라의 포로를 전후로 계속 쇄환하고
있으니, 그 성의가 가상하다. 다만 이것이 오로지 대마도의
생각으로 한 일인가, 아니면 귀국의 분부를 듣고서 이처럼
간절하게 하는 것인가? 해로가 멀어 자세히 알 수 없어 감히
모관을 차출하여 보낸다.’고 말하여야 합니다.”
(선조실록 v.40, 1989, 30)
이후, 1606년 8월 17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조선의 부사과 전 계신, 역관 사역원 판관 이 언서, 부사정 박 대근이 대마도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귤지정은 이 세 사람에게 ‘일을 왜 이렇게 지체하느냐며 이번 탐지는 반드시 일본을 노하게 할 것’이라며 ‘조선이 일본을 믿지 않는다.’고 격노하고, 광언을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귤지정은 ‘내부(일본)에서 조선사람들을 대마도로 쇄환하였는데 이들을 조선에 송환한 후 조일 국교재개가 성사되지 않으면 대마도가 죽은 목숨이니 한 번에 많은 수를 보내어
101 큰 일을 성사하고자 한다.’며 조일강화를 위해 포로 쇄환을 조선 유인책으로 제공하기도 합니다. (선조실록 v.41, 1989, 21-28) 후에 대마도는 일본에 이 세 사람이 대마도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데 일본은 이 보고를 듣고 성을 냅니다. 이처럼 대마도가 절박함과 조급함을 보이고, 일본이 성을 내자 일이 궁하게 될 것을 염려한 조선은 대마도의 사신을 접대할 준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후에 논의를 거쳐 조선이 일본에 회답겸쇄환사를 보내기로 결정한 후, 역관 이 언서의 ‘사신을 보내기로 허락하였는데 세전(설을 세기 전)에 꼭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라는 말에 귤왜(귤지정)가 노기를 띠며 ‘만일 세후(설을 센 후)로 연기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장정이 반드시 이 기회를 틈타 (대마)도주를 죄에 빠뜨릴 것이다.’라고 조선의 사신 행차를 재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선조실록 v.41, 1989, 140). 뿐만 아니라 귤지정은 이후에 <해사록>을 통해 살펴볼 1607년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의 일본 방문 전 과정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며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합니다.
한편, 일부 신하들은 조일강화에 주춤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쓰인 것처럼 대마도의 뜻만 분명하게 보일 뿐, 일본의 관백이라고 판단되는 가강의 서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일본의 의도와 내부사정을 정확히 모르니 사신을 보내 정탐하는 것이 알맞다고 간청합니다(선조실록 v.40, 1989, 15,17-19).
이처럼 1606년 5월 중순쯤 조선에서의 조일강화에 대한 토론은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하고 있던 사관은 ‘조정의 여러
102 재상들이 임시 구제책에만 급급하여 사신을 보내자는 논의를 힘써 주장하면서 종사와 생령을 위한 계책이라고 칭탁하니, 그 말이 매우 구차하지 않은가. 종사와 생령을 위한 계책은 자강하는 한 가지 일 이외에는 없는데, 애석하게도 건백한 신하가 하나도 없었다.’라며 정작 조선과 백성을 지키는 기본이 되는 국방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신을 보내는 문제에만 집중했던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였습니다(선조실록 v.40, 1989, 36).
사진 2. 나고야 성터, 하영선 선생님과 사랑방 13 기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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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첫 공식 사절, 경섬의 <해사록>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조선은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절을 보내게 되고, 이에 대한 기록이 경섬의 <해사록>입니다. 1607년 1월 12일, 칠송 경섬, 정사 여우길, 종사관 정호관은 회답겸쇄환사의 사명을 받고 예궐하여 하직합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37). 앞서 선조실록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포로 쇄환은 회답겸쇄환사의 2가지 핵심 임무 중 하나였고, 결과적으로 1천 4백 18명을 쇄환하는 성과를 이룹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25). 또한 1607년 회답겸쇄환사 방문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 재개의 출발점이 되었던 만큼, 경섬 일행에게 보냈던 선조와 예조참판 오억령의 서계를 보면 국교 재개 과정에서의 조선의 고민이 요약적으로 드러납니다.
조선국왕 성휘는 일본국왕 전하에게 답서를 올립니다. 이웃
나라와의 교제는 예로부터 그랬던 것입니다. 2백 년 동안
전쟁이 없어 바다가 조용해진 것은 모두 중국 조정의
덕택이지만, 우리 나라인들 또한 어찌 귀국을
저버렸겠습니까?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 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6~7년동안 대마도가 비록 강화할
104 것을 청해오기는 하였으나, 실로 우리 나라가 수치스럽게 여겼던 바입니다.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어찌 두 나라 생령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37) 조선국 예조 참판 오억령은 삼가 우리 국왕의 명을 받들어 일본의 집정 각하에게 글을 보냅니다. 임진년의 변란은 실로 우리 나라의 잊을 수 없는 아픔이요, 또한 귀국의 씻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는 신의가 중한 것인데, 까닭없이 침범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이는 천지 귀신이 함께 분히 여길 일이었습니다. 이제 귀국이 먼저 짧은 편지를 보내와서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하니,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어찌 양국 생령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이미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하였으면, … 억류된 우리 나라 몇 만 명의 생령이 억류된 지가 대범 몇 해인 지 압니까? 6~7년 대마도가 쇄환하기에 힘을 쓰는 듯하였으나 전후에 보내온 것은 아홉 마리 소의 터럭 하나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각하께서 여기에 관해 생각이나 또한 하여 보았습니까? 대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백성이 있기 때문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의 백성은 실로 중국 조정의
105 백성이 아닙니까? 이제 두 나라가 새로 화친을 맺으려고 하는
이 때에, 사로잡힌 남녀들을 모두 돌려주지 않으면, 귀국이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할지라도 그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습니까? 이야말로 각하가 주선하여 힘쓸 시기입니다.
만일 속히 영을 내려 즉시 쇄환하되, 한 사람의 남녀도 그대로
남겨 두지 않게 하여, 피차의 민생들로 하여금 각자 안정하게
살도록 한다면, 두 나라의 교제가 만세토록 길이 힘입게 될
것이니, … 각하께서 힘써 도모하기 바랍니다.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38)
이제 《선조실록》과 <해사록>에서 볼 수 있었던 1) 조선의 대일 심상, 일본의 대조선 심상, 경섬의 대일 심상을 정리하고, 2) 중국을 대하는 태도에서의 조선과 일본의 차이, 그리고 3) 포로 쇄환과 조총 수입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조실록》에서 조선의 대일 심상을 엿볼 수 있었다면 경섬의 <해사록>에서는 일본의 대조선 심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귤 지정이 ‘조선 사람은 의심이 많아 모든 경한 일이나 중한 일, 큰일이나 작은 일에 있어 논의가 분분하고, 때로는 이미 결정하였던 것도 도로 그만두는 사례가 있음을 익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55). 《선조실록》에서도 1606년 8월 17일 전계신 일행이 탐문차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귤지정이 조선이 일본을 믿지 못한다며
106 격노하기도 했던 기록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일본의, 특히 귤지정의 대조선 심상은 ‘의심이 많고, 신중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선조실록 v.41, 1989, 26).
한편, 경섬은 일본 방문 중 일본 국속으로 단오에 사람을 죽이는 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경섬은 <해사록>에 ‘이 날에 살인을 많이 하는 자는 비록 시정의 천한 사람일지라도 성가가 곧 배로 오르고, 두려워서 회피하는 자는 비록 권귀의 자제일지라도 온 나라가 버려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다.’고 기록하며 ‘그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이기를 즐겨하는 풍속이 이와 같다.’라고 평하였습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298-299). 이 밖에도 일본이 회답겸쇄환사 일행을 후하게 대접한 뒤 사신 행차 이전에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일본의 중국 진공 요청에 대한 조선의 도움을 요구하자 ‘궤휼스런 말을 끄집어내어, 뒷날 농간질하려고 계획한 것이니 밉살스럽다.’고 표현합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9). 이처럼 조선은 ‘일본인은 간교하고, 교활하다’는 대일 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은 ‘조선인은 의심이 많고, 신중하다’는 대조선 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섬의 <해사록>은 중국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선조실록》을 보면 조선은 자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한다는 증거가 지속적으로 눈에 띕니다. 이와 달리 아래와 같이 <해사록>에서 일본은 자국이 중국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107 현소는 만력(명 신종의 연호) 연호를 쓰려 하고, 승태는 일본
연호를 쓰려 하여 관백에 여쭈었더니, 관백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대명(명 나라의 존칭)을 섬기지 않았으니 그 연호를 쓸
수 없고, 만약 일본 연호를 쓴다면 사신이 반드시 온편치 못한
뜻이 있을 것이니, 둘 다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02-303)
중론이 천조(중국 조정)에 진공하는 한 조목을 가지고 회서
안에 적어 넣으려 하였고, 관백도 그럴 뜻이 있었다. 그런데,
승태가 관백에게 말하기를, “일본에는 천황이 있고, 대명에는
천자가 있으니, 이는 서로 동등한 나라입니다. 전일 관백들이
통화하려고 신이라 칭하면서 진공한 것은 매우
불가하였습니다. 어찌 서로 동등한 나라로서 스스로 낮추어
신이라 일컬을 이치가 있습니까?”하니, 관백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적어 넣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2)
마지막으로 선조가 1607년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에게 주었던 2가지 핵심 임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사록>에 대한 논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회답겸쇄환사에게 주어진 2가지 핵심 임무는 포로쇄환과 조총 수입이었습니다. 특히 포로쇄환에 관하여 선조는
108 회답겸쇄환사를 보내기 전에도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예조 참판 오억령이 일본에 보내는 서계에서도 그 중요성이 엿보입니다. 따라서 경섬 일행 역시 일본 측에게 포로 쇄환에 대해 ‘모름지기 마음을 다하여 일을 성취시켜 양국의 화호를 이루게 하기 바라오.’라며 특별한 뜻을 전합니다. 이후 일본의 좌도수는 예조 참판 오억령에게 회답 서계로 다음과 같이 포로 쇄환에 대한 답을 전합니다.
생금되어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군국에 흩어져 산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그들이 귀국할 생각이 없으면 각각 생각대로 해 주고,
고향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속히 돌아갈 준비를
해주라는 것이 국왕의 엄명입니다. 우리 임금이 먼 데 사랑을
사랑함이 더욱 심후하옵니다. 비록 우리 전에서 양육한
선비일지라도 돌아갈 마음이 간절하다면 허락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정이 아니면 그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1)
원풍이 준하에서 뒤따라 와서 말하기를, “가강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을 일체 쇄환하게 하고, 만약 돌아가기를
원하는데도 억류하는 주인 있으면 죄를 주리라 …
하였습니다.”
109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3)
이처럼 회답겸쇄환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던 포로 쇄환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섬 일행은 곧 일본이 포로 쇄환까지 응하며 조일강화에 적극적이었던 속뜻을 알게 됩니다.
경직이 또 말하기를, “…전일 손 문욱이 말하기를, ‘강화하는
일이 만일 이루어지면 진공하는 일도 절로 차례대로 허락할
것이다’하였는데 어떻소.”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2)
“다시 모름지기 (포로쇄환에) 십분 힘써서 화호하는 실증을
보여 주요”하니, 원풍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사신이 떠나가신 뒷일지라도 연달아 쇄환하겠습니다. 또
통화하는 한 가지 일은 오로지 천조에 진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했다.
우리가 말하기를 “일본이 천조에 진공하는 것이 조선에 무슨
상관이기에 우리들에게 말하오. 꼭 입공하고 싶다면 옛길이
있으니, 일본이 스스로 주청할 것이지, 더욱 우리 나라가 알
바가 아니오.”하니,
110 원풍은, “조선은 중국과 한 몸과 같은 나라입니다. 조선으로 인하여 진공할 뜻을 아뢰게 하려는 것입니다. 장군이 사신을 접대할 때에 말을 꺼내려 하였고 혹은 서계 안에 말을 만들어 보내려 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일로 국왕에게 번거롭게 할 수 없고, 또 사신에게 범연히 말할 수도 없으므로, 다만 마도로 하여금 조선의 집정에게 통하도록 해야겠다’하였습니다.
(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6-317)
사진 3. 나고야 성터에서 내려다 본 풍경
111 위의 사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이 조일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대표적인 이유는 조선을 통해 중국에 다시 진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일본이 중국에 진공하려 하였다가 태도를 급변해 ‘조명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책사를 욕보이고 구박하여 내쫓기까지 한’ 전례가 있음을 아는 경섬 일행은 일본의 중국 진공 도움 요구를 극구 반대합니다. 경섬 일행의 확실한 반대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에 대마도를 통해 조선의 집정에게 일본의 중국 입공 과정에서 조선의 도움을 요구하겠다고 고집합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7-319). 종합하여 보면, 일본이 조선의 사신 행차 2가지 요건, 즉 1) 일본 측 서계와 2) 능을 범한 도적 보내기뿐만 아니라 회답겸쇄환사의 2가지 핵심 임무였던 포로쇄환과 조총 수입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중국에 다시 진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다시 회답겸쇄환사의 포로쇄환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잘 모이지 않다가 경섬이 포로쇄환을 위해 예정에 없던 일정을 늘리자 포로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강이 포로 자신이 본국에 돌아가고 싶은데 억류하는 주인이 있다면 죄를 주리라고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주인들은 조선인 포로를 억류했습니다. 경섬 일행이 더 많은 포로 쇄환을 위해 한집한집 방문했을 때도 주인들이 포로를 숨겨 애석하게도 많은 포로를
112 쇄환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결혼한 조선인 포로의 경우 남편이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6, 320-326). 이러한 이유로 - 경섬 일행이 1천 4백 18명의 포로를 쇄환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도 불구하고 - 경섬은 ‘포로인으로 일본 내지에 흩어져 있는 자가 몇 만이나 되는지 모른다. … 지금 쇄환해 오는 수는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로 못되니,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며 애석해했습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25-326).
한편, 회답겸쇄환사의 나머지 중요한 임무였던 조총 수입은 가강의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하겠는가?’라는 대답에 따라 포로 쇄환과 달리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조총 5백자루를 수입해 올 수 있었습니다(국역 해행총재 Ⅱ, 1974, 319).
마치며
임진왜란 이후 10년간 단절되었던 국교가 재개되었던 요인은 결국 조선과 일본 모두 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은 1) 국방과 2) 포로 쇄환 3) 국체 회복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북방 지역의 국방이 불안했고, 자국의 국방 시스템을 개선하지
113 못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해 남방 지역의 국방이라도 안정화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한 나라의 왕 혹은 신하로서 이웃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자국의 백성들을 쇄환하는 것은 도리라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1) 국방을 위한 조총 수입과 2) 포로 쇄환은 1607년 회답겸쇄환사 경섬 일행에게 2가지 핵심 과제로 주어집니다. 또한 국교재개의 조건으로 일본으로부터 능을 범한 도적 2명과 서계를 받아 임진왜란으로 실추된 3) 국체를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중국에 진공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조일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이 사신 행차를 위해 제시한 2가지 전제 조건인 1) 서계와 2) 능을 범한 적을 보내왔습니다. -비록 서계는 경섬에 따르면 위서로 추정되고, 능을 범한 적들도 그들의 자백에 따르면 거짓일 가능성이 높지만, 피상적으로라도- 일본이 조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사실은 조선으로 하여금 조일강화에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게 했습니다.
한편, 조선의 대일 심상은 ‘간교하고, 교활함’이었고, 일본의 대조선 심상은 ‘의심이 많고, 신중함’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10년만에 양국관계가 재개되었다고 해서 서로에 대한 심상이 긍정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심상이 위와 같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국교 재개는 지속적으로 지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각국이 조일강화에 대해 체감하는 필요성이 양국에 대한 부정적 심상을 뛰어넘었기에 1607년
114 회답겸쇄환사의 일본 방문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요즈음처럼 한일 관계가 시끄러울 때,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에 잠기며 그렇게 우리는 나고야성 터를 나섰습니다.
사진 4. 나고야 성터를 내려오며, 정든 사랑방 식구들과 함께 참고문헌 1. 1 차 문헌
민족문화추진회. (1598-1607)《선조소경대왕실록》. v.24-26, 30-
31, 41-42.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15 경섬. (1974). 《해사록》. 고전 국역 총서 해행총재 Ⅱ.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2. 단행본 가. 국문
김문자. (2019). 《임진왜란 이후 朝·日간의 국내사정과 통신사
파견》. (부산: 부산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한명기. 2010. 《東아시아 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서울: 경인문화사.)
나. 번역본
후마 스스무. (2008). 《연행사와 통신사》. (서울: 서신원.) 3. 기타 자료
이용희. 1970. “한일관계의 정신사적 문제-변경문화 의식의 갈등에
대하여”. <신동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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