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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시대의 승부사, 스기타 겐파쿠 - 근대적 내러티브를 넘어서

동아시아의 어제를 보고, 오늘을 느끼며, 내일을 바라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0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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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 김 예 은 · 고려대학교

들어가며

동아시아의 근대는 그야말로 굴곡진 시간이었습니다. 급격한 서구와의 접촉과 근대화, 제국주의, 그리고 전쟁.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는 현재, 위안부 문제, 북한 문제, 영토분쟁 등을 두고 씨름하는 한, 중, 일 삼국에는 여전히 근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동아시아의 근대를 질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사례를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 조그마한 인공 섬 데지마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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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다리에서 보는 데지마

유럽인이 처음으로 일본에 발을 디딘 것은 16 세기 중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교사들, 특히 중국과 교역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처음엔 히라도, 이후에는 나가사키를 거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곳 데지마는 1636 년 이 포르투갈 무역상들을 위해 지어진 인공섬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와

46 감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작은 반도에 운하를 파 다리 하나로만 연결해 놓고,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데지마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요. 1637-8 년에 걸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시마바라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의 주체는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낭인들과 카톨릭 교도 농민들이었지요. 그 결과 1639 년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모든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합니다. 그리고 1641 년 히라도에 머물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을 데지마로 강제 이주시킴과 동시에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꼭 필요한 인원 외 일본인의 데지마 출입은 금지되었고, 네덜란드 선원들 역시 데지마 밖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2 년 혹은 4 년에 한 번 에도로 올라가 쇼군을 알현하는 것 이외에는요. 이 독특한 관계는 1855 년 일본과 네덜란드가 근대적 개항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유지됩니다. 또 일본은 54 년 미일화친조약 전까지 중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두 국가와만 교류를 했던 것이지요. 사고쿠(鎖國), 쇄국 정책의 시작이었습니다.

1904 년 항만개량공사를 하면서 매립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나가사키 시 사업의 일환으로 20 년에 걸쳐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메웠던 곳을 다시 파내어 부채꼴 모양을 다시 재현했다고 해요.

얼마나 중요한 곳이길래 그렇게 공을 들여 복원한 것일까요? 이 답을 찾기 위해, 데지마로 상징되는 일-네덜란드 관계가 일본

47 근대사에 남긴 아주 특별한 족적, 란가쿠(蘭學), 난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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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복원된 데지마 입구

오란다의 공부, 난학

1690 년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들어온 독일인 학자였던 엥겔베르트 켐페르(Engelbert Kaempfer)는 2 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48 일본의 사회, 경제, 식생 등 다양한 기록을 남깁니다. 쇼군을 알현하기 위해 에도에 다녀오며 거친 여러 도시들에 대한 감상 역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나가사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짧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융성한 일본의 가장 먼 구석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지역의 곡창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제는 외국인들로부터 물건을 수입하거나 얻기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이 도시는 상인, 여관이나 가게 주인, 공예가, 지주나 부자들이 거의 없는 반면, 일반 시민들이나 몸으로 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는 날품팔이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산세가 험하고 에도, 교토 등 일본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나가사키는 쇄국 이후 경제적으로 크게 쇠퇴합니다. 당시 에도 일본의 주변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중에서도 데지마는 특히 비좁고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 세기와 19 세기에 걸쳐 데지마와 나가사키는 배움의 성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난학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학문이 융성하면서였습니다. 19 세기 양학(洋學)에 대체되기 전까지 난학의 발전은 일본이 서구로부터 배우고 또 그들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려 했던 독특한 발자취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난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沢),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의 《해체신서(解体新書)》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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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지식의 시작, 해체신서

각각 나카쓰 번, 오바마 번의 번의이자 친구였던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파쿠는 모두 네덜란드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 영향을 받은 ‘오란다류 의학’을 행해 오던 의사들이었습니다. 이 둘은 각자 다른 경로로 독일인 의대 교수 요한 아담 쿨무스(Johan Adam Kulmus)가 쓴 《타펠 아나토미아》 라는 해부서를 입수했는데요, 그 이후 1771 년 스기타는 형장에서 사형수의 사체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후와케(腑分) (해부)에 참관을 초대받습니다. 스기타가 급하게 연락을 전한 끝에 만나게 된 마에노와 스기타는 서로 같은 책을 가지고 왔음을 알게 되고 ‘손을 맞잡고 감격했다’고 합니다. 실제 해부된 신체의 모습을 보니 기존 한방 이론과는 전혀 달랐고, 그들이 가진 책과는 놀랍도록 일치했지요. 형장에 널린 뼈를 주워 확인해보니 그마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기타는 그의 회고록에서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형장에서 돌아오던 길, 스기타와 마에노, 나카가와 세 사람은 “의술로서 … 그 바탕이 되는 몸의 진짜 구조를 모른 채 지금까지 하루하루 , 이 업을 해왔다는 것은 면목이 없는 일이다”며 한숨을 쉽니다. 대략적이라도 인체 구조를 판별하면서 의료를 해야 할 것이라며, 《타펠 아나토미아》만이라도 직접 번역해내고 싶다는 스기타의 말에 마에노는 적극 동의합니다. 본인이 나가사키에 유학한

50 적이 있으며 네덜란드어도 조금 알고 있으니 함께 읽어 보자고 제안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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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데지마에서 발제

마에노 외에 네덜란드어 지식이 전혀 없었던 세 사람은 바로 다음 날부터 마에노의 집에 모여 《타펠 아나토미아》의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도 문장 하나조차 풀 수 없는 날이 많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예를 들어 ‘코는

51 후루햇핸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문장을 해석할 때, 마에노가 구해 온 소책자에서 ‘나뭇가지를 쌓아 놓으면 후루햇핸도’ ‘먼지가 쌓이면 후룻햇핸도’ 라는 문장으로부터 그 의미를 유추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실로 악전고투였지만, 한 문장을 해석해냈을 때의 기쁨을 스기타는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놀랍게도 3 년이 지난 1774 년, 이 지리한 싸움의 결실이 ‘해체신서’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네덜란드어를 깊이 공부하고자 했고 완벽한 번역에 힘을 쓰던 마에노와는 달리, 스기타는 본인이 “뭐든지 대충하는 성격”이라고 우스개소리하듯 빨리 책을 출간하는 데 목표를 뒀다고 합니다. 그의 목표가 네덜란드어에 정통하는 것이 아닌, “인체 구조라는 아주 중요한 것이 중국 의서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대강의 사실”을 알리고 실제 치료와 의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학자로서의 성향이 강했던 마에노는 《해체신서》의 저자에서 본인의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합니다.

수 차례 그를 설득해도 통하지 않자, 스기타는 모임에 참여했던 이들 중 고위층에 속했던 이시카와 겐조(石川玄常)와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를 저자 이름에 올립니다. 당시 스기타는 6 년 전 네덜란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실은 홍모반이라는 책이 서양 알파벳이 실렸다는 이유로 발금 처리를 당한 것을 염두에 두어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고위층의 자제들을 저자로 참여시킨 것은 예상되는 반발로부터 어느 정도의 완충을 마련하려고 했던 시도로 생각할 수

52 있습니다. 《해체신서》 발간 약 일 년 전 《해체약도(解體略圖)》 라는 제목으로 일부 해부도를 떼내어 광고지 형식으로 먼저 출간한 것, 본격적 출판 전에 쇼군에게 먼저 책을 진상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습니다.

시작은 해부 의학서의 번역이었지만, 난학의 외연은 의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난학은 당대의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네덜란드와 관련된 학문을 총칭했습니다.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난학은 그 본래 뿌리인 의학 외에 국제정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합니다. 1792 년 러시아 사절 럭스만이 홋카이도에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고 돌아간 이후, 막부는 이를 ‘북변 문제’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유일한 외부로의 창구인 네덜란드어 문서를 이용해 러시아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마에노 료타쿠를 비롯한 난학자들에게 러시아 관련 문서를 번역하게 합니다. 난학이 의사들이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지사의 일부로 여겨지게 된 것이지요. 1808 년 네덜란드 선박을 쫓아온 프랑스의 파에톤(Phaeton) 함이 나가사키 항에 포격을 하면서 외세에 대한 대응이라는 과제는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해군 전술이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데지마로 사람이 몰려들면서 스기타 등이 꽃피운 난학은 이른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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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경험적 지식’의 시작

사상적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이 짧은 이야기는 실로 놀랍습니다. 언어 지식이 전무하거나 초보적인 사람 셋이 모여, 실증과 실리에 대한 열정만으로 문명 간의 대화를 성취해 낸 이 이야기는 곧 일본 근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강제가 아닌 자발로 서구를 알려 하고, 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54 맞추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일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의 일본이 스기타와 난학을 높게 평가하는 데에는 후키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영향이 큽니다. 그는 야시장에서 우연히 스기타의 잘 알려지지 않은 회고록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발견하고 다시 펴냈다고 하는데,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이 실었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했고, 그 강단과 용기에 놀랐으며, 그 성심성의에 감동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이 근대화의 내러티브에 희생당해야 했던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후쿠자와의 열광적인 감격으로부터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난학이란 학문 또는 네트워크가 피어나게 된 그 토양은 무엇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지요. 이를 위해 난학의 출발점이 된 스기타 겐파쿠, 그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의 일본 사회를 이해해보려 합니다.

한방의학을 전면으로 부정하는《해체신서》의 내용에 반발한 한방의들은 스기타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이에 대응해 그는 책을 펴낸 이듬해, 대화 형식으로 쓴《광의지언(狂醫之言)》을 펴냅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을 “의사들의 역적”으로 표현하는데요, 지나 (당시 중국의 다른 표현)의 성인들이 화이(華夷)를 분명히 구분해 백성을 가르친 것은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경멸하기 위함이 아닌, 자기 나라의 습속이 약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55 글에서 나타난 스기타와 그에 대한 기존 한방의들의 인식 격차의 크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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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데지마에서 발제 2

“본디 중화는 성인, 현자의 나라입니다. 하 · 은 · 주의 선왕들이

예악을 세우고 문물을 밝히고 가르침을 세계에 펼치니 사방의

오랑캐도 그것을 신봉하게 된 겁니다. 우리 의학에 대해 말하자면

… 그 법이 이미 분명하여 수천 년에 걸쳐 민중의 질병을 고쳐

왔습니다. 그러니 이 의학의 길에는 이제 뭐 하나 결여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스기타라는 소인이 이상한 것을 좋아하여

56 성현의 글을 의심하고 서양 오랑캐의 글을 믿어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전해져 온 귀중한 법을 새삼스럽게 어지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진정 우리 의사들의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선이나 오키나와라면 중화에서 떨어져 있다고 해도 크게 멀지 않고 그곳의 책도 중화와 같은 글로, 때로는 고대 성인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기타가 배우고 있는 것은 세계 서북 끝에 있는 나라 것으로, 중화로부터 구만리나 떨어진 그야말로 언어가 안 통하는 나라 것입니다. 태어나서 성인의 도를 들어 본 적도 없는 야만국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나라로, 그 풍속도 우리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 의술도 어느 정도인지 뻔합니다.”

“대개 세상의 썩은 유학자, 돌팔이 의사 등은 이 천지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동양의 두세 나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지나를 만국의 최고라고 생각하고, 얼마 안 되는 그 서적들을 읽고 막연히 오랑캐는 원래 그 습속 중에 예악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본디 예악 문물은 그로써 존귀한 것과 비천한 것을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법입니다. 세상 어느 나라에 존비의 구별이 없겠습니까? 어느 나라에 예악이 없겠습니까? 공자는 ‘오랑캐에게도 군주는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주나라 시대의 의관이 좋다 하여 이를 예컨대 적도 아래의 보르네오나 수마트라 등에서 행한다면 백성은 그 더위에 참을 수

57 없어서 아마도 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 반드시 지나의 것이

좋다고 하지 말고 각각의 풍토에 적절한 것을 좋다고 해야

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지나의 성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천지에 본래 갖추어져 있던 것이 도입니다. … 하물며

일본의 썩은 유학자, 돌팔이 의사들은 지나 서적이 말하는 대로

중국을 중토(中土)라고 말합니다. 원래 대지란 하나의 큰 원으로,

만국이 그 위에 기거하고 있으니 각각의 나라가 있는 곳은 모두

중심입니다. … 지나 또한 동해 한 구석의 소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기타의 상대방으로 설정된, 당시 스기타 본인이 받았을 비판들은 당시 일본을 소중화(小中華)로 생각하고 있었던 일본 주자학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지요. 반면 더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해 스기타가 얼마나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입니다. ‘지나’ 와 ‘중화’ 라는 용어 차이에서부터 극명히 드러나듯 그의 인식은 완전히 중화의 그것에서 벗어나 있지요.

일본에도 주자학이 일찍부터 소개되었습니다만, 일본 사회는 선종 불교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주자학은 에도 시대, 그 중에서도 16 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막부의 지배층에 유학자들이 들어서며 통치 철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합니다. 물론 불교와의 긴장 상태는 유지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막부를 섬기며 유학자 시대의

58 시작을 알린 하야시 라잔(林羅山) 역시 삭발을 해야 했죠. 그러나 일본에서 통치 철학으로서의 주자학은 완전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양명학, 고문학 등의 강력한 분파가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국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17 세기 말부터 18-19 세기에 걸쳐 발전했습니다. 광의지언에서 볼 수 있듯 한방의들은 한문으로 공부를 하는 지식인, 즉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의료를 행하며 경험적 현실을 접하는 프랙티셔너이기도 했지요. 이런 점은 ‘의학은 실질을 중시한다’는 스기타의 인식에서도 드러납니다. 바로 이 의학이라는 영역에서 스기타와 같은 난방의들과 한방의들의 엄청난 격차가 생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17 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다양한 의료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쇄국 이후 남아 내려오는 의학 기술을 남만의학, 이후 들어온 네덜란드 인들이 전한 의술을 오란다류 의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스기타 역시 이 흐름의 일부였지요. 그의 스승을 가르친 사람은 쇄국 당시 개종 및 개명을 당한 포르투갈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이 의료 행위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유학의 발전과 맞물려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감시가 심해지기 전인 16 세기 말에는, 다이묘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사례가 있을 만큼 외세에 대한 경계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에도와 교토에 병원이 세워져 많은 수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쇄국 이후에도 서양의 의료만큼은 건재했습니다. 스기타는 남만류와

59 오란다류를 같이 행하던 니시가 매우 인기가 좋아 후일 막부 전속 의사로 기용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만학과 오란다 의학은 ‘학’ 이었지만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스기타가 적고 있듯 초기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맡은 통사들은 카타카나로 소리를 외워 의사소통을 하는 데 그쳤고, 오란다와 남방 의학은 모두 이 통역의 영역에 속했습니다. 쇄국 이후 기독교를 극도로 경계한 막부가 일본 안에서 외국의 문자를 읽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수교한 지 약 백 년이 지난 시점에 요시무네 막부가 이 금서령을 완화하면서 네덜란드 서책이 점차 유입됩니다.

스기타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덜란드로부터 들어온 서양 물건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반면 문자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세상만사는 언젠가는 때가 오는 법인지라” 나가사키 통사들의 서책 수입에 대한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야기한 《홍모반》의 사례처럼 여전히 서양의 서책에 대한 경계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스기타는 이렇게 느슨한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서양의 일에 특별히 능통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서양의 일을 꺼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오란다 책 등을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가끔씩 나타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 네덜란드 책을 직접 번역하면 좋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던 차에

60 《타펠 아나토미아》를 손에 넣게 되었고, 바로 그 해 시체 해부에 참관하게 된 우연을 가리켜서는 “묘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해부서를 입수한 것은 난학이 퍼져 나가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적었습니다. 결국 함께 해부에 참관한 마에노도 같은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번역을 결의하게 되는 것을 보면 때가 무르익었던 것이라는 스기타의 판단이 단순한 겸손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해부 자체는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완전히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가 수 차례 시신을 해부해《장지(藏志)》라는 책을 발간한 것이 십수 년 전인 1759 년의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외에도 막부 소속 관의들이 수 차례 해부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광의지언》에서 살폈듯 모든 일본의 의사들이 해부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부에 반대하는 《비장지(非藏志)》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죽은 뒤의 내장은 살아있는 사람의 치료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해부무용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해부무용론은 스기타 이후 난학의 주요 라이벌이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스기타와 동료들이 그 이전의 선배들과 달랐던 점은 바로 비교였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한방의 이론과는 전혀 달랐고, 가지고 갔던 《타펠 아나토미아》와는 똑같았던 것이지요. 서양 책이 일본인의 신체구조와 들어맞았으니, 선배들이 가졌던 ‘중국인은 서양인과 인체 구조가 다른가’와 같은 의문들이 힘을 잃었습니다. 스기타는 해부 참관에 초대받은 뒤

61 “(중국과 오란다의 이론 중)어느 쪽이 정말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주 드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실증으로써 ‘중국의 것’ 과 ‘서양의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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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진 6. 데지마에서 하영선 선생님과 아이들

시대의 승부사 겐파쿠

63 겐파쿠와 《해체신서》를 따라갈수록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겐파쿠가 살았던 18~19 세기 일본이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했다는 점입니다. 16-17 세기에 막부 권력의 핵심에 진출한 주자학이 나라 곳곳에 완전히 자리잡기 전, 양명학, 고증학 등의 경쟁 분파가 힘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서학이 유입되고, 국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는 등 당대의 일본은 물질적 번영과 대도시의 발달이라는 배경 아래 사상의 각축전이 펼쳐지던 장이었습니다.

스기타는 《해체신서》의 출간 당시의 일본 사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점차 네덜란드의 기술적 발전을 인식하고 있었고, 의사들이 에도에 머무는 네덜란드 상관장을 찾아가는 일이 더욱 잦아지고 있었다고 적습니다. 스기타가 속한 오란다류 의학 역시 발전이 가속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해체신서》작업 동료 중 네덜란드어에 가장 조예가 깊었던 마에노가 저자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만큼, 스기타는 불완전한 번역이라도 빠르게 세상에 선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런 그의 조급함의 배경에는 이토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최신의 이론을 제시해 명성을 얻는, 현대의 학자와 같은 야심이 자리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해체신서》 출간 이후에 모든 경쟁 이론이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후의 난학은 기존 한학의들과의 경쟁을 계속하게 됩니다. 다만 19 세기를 전후해 이러한 이론들, 그리고 각 이론이 대표하는 사상들의 각축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1792 년 홋카이도로 찾아와 통상을

64 요구한 이후 계속되는 러시아의 남하, 그리고 1808 년 네덜란드 선박을 쫓아온 파에톤 호의 포격을 겪으며 일본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일면을 경험하게 됩니다. 서구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길은 유일하게 교류를 계속해오던 네덜란드를 통해서 외에는 없었지요. 막부는 1792 년 통상요구 사건 이후 난학자들에게 러시아 관련 문서를 번역할 것을 명령합니다. 마에노 료타쿠가 이 명을 받은 학자 중 한 명이었지요. 그런가 하면 스기타의 사숙은 문하생들로 넘치고, 그는 일본사에 전례없는, 대중적인 인기의 유행의(流行醫)로서 명성을 떨칩니다. 그의 수입은 600 량 가까이 될 때도 있었는데, 이는 당대 최고의 대중 작가였던 쿄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의 전성기 수입이었던 40 량의 열 배가 넘는 수치였다고 해요. 쇼군을 직접 알현하는 영광을 안기도 합니다. 단순히 의학 저술뿐 아니라 일본과 세계의 상황에 대해 비평하는 글들을 다수 남겼는데요, 예를 들어 1807 년에 적은 《야수독어(野隻獨話)》에서는 러시아의 역사와 그의 위협에 대해, 그리고 일본의 쇠퇴한 막부 체제를 낡은 집에 비유하며 집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낡은 것은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고 적습니다.

이렇듯 스기타는 의학자보다는 시사평론가, 혹은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는, 지금의 인플루언서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기타는 추가적인 번역 작업은 하지 않았고, 난학의 정신을 다룬 《화란의사문답(和蘭醫事問答)》 이나 《형영야화(形影夜話)》 등을 제외한 실질적인 연구 활동들은

65 대부분 그의 아들들과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해체신서》 작업의 맹주이자 가장 큰 기여를 한 마에노 료타쿠는 실제로 겐파쿠에 비하면 큰 명예나 명성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무리하지요. 따라서 스기타의 성공은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 대중서의 보급 등과 맞물린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그 성공의 중요한 방아쇠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비롯한 국제정치 현실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겐파쿠가 시작한 난학의 성공은, 따라서 단순한 학문적 성공일 뿐만은 아닙니다. 때문에 그를 일본인에 특별히 내재되어 있던 르네상스적 인간형으로 그려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지배적인 서구 근대적 내러티브를 소급해 적용하는 목적론적 사고방식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만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근대적 학자상에 걸맞는 마에노 료타쿠는 오히려 역사의 그늘진 곳에 남겨졌으니까요.

나가며 – 선형의 근대를 지나다

모든 사회가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그 생각에 맞추어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또 이 생각은 지식 역시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요. 스기타와 동료들의《해체신서》이전에도 비슷한 노력과 발견들이

66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접하시면서, 쿤(Thomas Kuhn)이 이야기한 비선형적 지식을 떠올리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이제는 고루하게까지 들리는 카의 전언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탈근대라는 이름으로 근대의 모든 것에 물음을 던져온 지금 이 시점에서, 스기타 겐파쿠를 위시한 난학의 등장과 발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려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겐파쿠의 이야기가 동아시아를 얼룩지게 했던 일본의 근대의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일본의 난학이라는 과거와의 대화로부터 어떤 역사를 써 낼 수 있을까? 시간과 역량의 부족으로 동시대 조선과의 비교를 포함한 중요한 것들을 녹여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까지가 이 질문에 대해 제 짧은 고민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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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진 7. 데지마 출구 참고문헌 1. 1 차 문헌 가. 국문

스기타 겐파쿠 외. (2014). 《해체신서》. 김성수 역. (파주: 한길사.) 이예안. (2016).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광의지언(狂醫之言)”.

<개념과 소통>. 제 17 호. 223-243.

이종각. (2013).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서울:

서해문집.)

68 나. 영문

Kaempfer, Engelbert, Beatrice, M. Bodart-Bailey. (1999). Kaempfer’s

Japan: Tokugawa Culture Observed.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Olga V. Klimova. (2016). ―A Monologue about Foreign Ships by Sugita

Genpaku‖ Basic Research Program Working Papers. National

Research University Higher School of Economics (HSE) St-

Petersburg, Centre for Asian and African Studies.

2. 단행본

Masao, Maruyama. (1974). Studies in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 (Tokyo: University of Tokyo Press.)

Jansen, Marius B. (2002). Making of Modern Japan. (Cambridge :

University of Harvard Press.)

3. 정기 간행물 가. 국문

김성수. 2018. “일본의 해부학 초기의 특성:

『해체신서(解體新書)』와『중정해체신서(重訂解體新書)』에

나타난 세계와 인체”. <연세의사학>. 제 21 권. 제 2 호. 53-76.

69 여인석, 황상인. 1994. “일본의 해부학 도입과 정착 과정”. <의사학>

제 3 권 제 2 호. 218-229.

이근상. 2018.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沢)와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沢)의 네덜란드어 인식과 학습

寫本『和蘭譯文略草稿』와 刊本『蘭學階梯』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 49 집. 43-60.

이근상. 2016. “난학계제를 통해 본 학습과 번역”. <일본연구> 제 42 집. 12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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