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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의 실현과 좌절

천하질서를 앞서 근심하고, 뒤미처 즐기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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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 장도경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12기 사랑방에게 자금성은 영문명대로 금지된 도시였습니다. 답사 이틀 차에 방문 예정이었던 자금성은 정체 모를 행사로 인하여 관람 시간이 일방적으로 단축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금성 출입구에 들어왔을 때, 한국에서 예약했던 전자 티켓이 말썽을 일으켜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금성 방문을 답사 마지막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답사 3일 차, 오늘이 아니면 자금성을 답사 기간 내에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새벽부터 분주히 준비하고 개관시간에 맞춰 자금성을 향했습니다. 전날 상담원분은 전자티켓이 더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저희가 구매한 입장권은 거듭 하여 예약내역 확인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저희는 현장구매를 통하여

83 금지된 도시에 가까스로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자금성의 영문명은 Forbidden city로 금지된 도시로 ‘금’의 의 미가 강조되었지만, 자금성의 전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앞의 자금 성의 첫 글자인 ‘자’가 갖는 의미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자(紫)는 ‘자 줏빛’이라는 뜻인데, 고대 중국 사람들은 천제(天帝)가 거주하는 天 宮(천궁)을 자궁(紫宮)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紫)의 한자는 바로 ‘紫微垣(자미원)’이라고 하는 北斗星(북두성)의 북쪽에 있는 별 을 가리키는데, 이곳에 天帝(천제)가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데 인간을 다스리는 皇帝(황제)는 스스로 칭하기를 ‘하늘로부터 명령 을 받은 하늘의 아들(天子(천자)’이라고 하여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 을 은연중에 紫微星(자미성)의 운수와 일치시키게 하였고, 이에 따라 궁전의 방위, 위치 등 모든 것을 정밀하게 조사한 뒤에 확정하였기 때 문에 ‘紫宮(자궁)’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도 삼엄한 경계를 하였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皇宮(황궁) 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기 때문에 ‘금지하다’는 뜻의 ‘禁(금)’이라는 한자를 넣어 ‘紫禁城(자금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 니다. 앞선 의미를 고려해보면 자금성은 천하질서에 가장 부합하는 궁전의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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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정전인 태화전 앞에서 단체사진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 앞에서 단체사진

이런 천하질서에 도전한 조선 유일의 임금이 있었으니 그가 효종 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한 번쯤은 가정을 해보는 이유는 아 마도 아쉬움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에서 한 번쯤은 상상해보 는 시기가 있다면 명청교체기일 것인데, 양란 이후 조선의 안팎은 흔 들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토지는 황폐화되었고, 신분제 의 근간이 흔들렸으며 왕권은 추락했습니다. 한편, 문명의 중심에 서 있던 명나라는 융성하는 이민족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조선의 두 왕자가 있었습니다. 일국의 왕 자로서 8년의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함께했지만 두 왕자가 추구했던 방향은 사뭇 달랐습니다. 명청교체기를 보며 중원의 패자로 떠오른 청을 인정하고 배우고자 했던 소현세자가 있었다면, 봉림대군은 청에

85 대한 원한을 키우며 북벌의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둘의 선택은 극단 에 있었고, 이 선택은 조선 후기의 향배를 가로지르는 시작점과도 같 았습니다.

두 왕자의 선택이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기로와도 같았기에 가지 않 은 길에 대한 미련이 크게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외교적 감각이 재조명되면서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 에 올랐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떠하였을까류의 가정을 하게되지만, 정 반대로 효종이 41살의 젊은 나이로 죽지 않고 재위했다면 그가 품었 던 북벌은 현실 정책으로 이어졌을까류의 가정도 존재합니다. 지금껏 효종의 북벌론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의해서 지금껏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측면이 있습니다만, 사실 북벌론의 이념과 명분은 긴 시간 동 안 조선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 사회가 북벌의 굴레에서 해방돼 북학(北學) 사상이 만개하기까지는 꼬박 15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북벌 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북벌에 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북벌이 정책적으로 존재 하였는 지의 여부조차 합의되지 못하였고, 무엇보다 북벌의 연구가 당대의 시각이 아닌 근대적 또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해석된 경향이 있습니다. 본 연구는 북벌의 근거가 되는 악대설화의 재구성을 통해 북벌이 실존한 정책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북벌 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질문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북벌을 당

86 대적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당대 효종에게 놓여진 현실 정치 상 황과 효종 내면의 상황을 바탕으로 북벌을 당대의 맥락에서 구현해보 고자 합니다.

북벌을 당대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북벌을 당대 의 맥락에서 이해하였을 때만 비로소 북벌에 관련된 진위 여부를 정 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후속절차로서 북벌이 갖는 의미를 밝힐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효종은 즉위 직후 북벌을 표방하고 재위 기간 동안 일관성있게 북벌을 추진했습니다. 그 기저에 ‘숭명반청(崇明反 淸)’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효종의 즉위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 한 전기를 갖습니다.

효종 사후에는 문화적 관점의 조선중화주의가 계보화되었습니다. 만동묘에서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모신 것은 그들이 명나라 황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북벌을 추진하여 춘추대의를 밝힌 조선의 효종에 의해 중화 문화의 적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만동묘에는 혈통이나 지역적 요소가 아닌 ‘의리의 실 천’이라는 문화적 행위에 따라 중화를 계보화하려는 의식이 담겨 있 습니다. 따라서 북벌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 사회를 지탱하던 성리학 이 관념화되고 사변화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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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의 진위 논란

북벌정책의 진위 논란은 「악대설화(幄對說話)」가 세상에 공개된 시점에서 비롯됩니다. 효종이 붕어하기 전 송시열과의 독대 기록인 기해독대에는 북벌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공개 된 것은 숙종 1년(1675)이었는데 그 시점이 기해독대가 16년이 지난 시점이고, 공개한 상황 자체가 숙종 초반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측근들이 「악대설화」를 세상에 공개하여 곤경을 모면하자고 제안 했다는 연유로 북벌의 진위성이 의심되었습니다.

또한, 「악대설화」에 나타난 기해독대의 내용을 보면 북벌정책을 바 라보는 효종과 송시열의 시각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 은 효종의 북벌정책에 대해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정책이라며 제갈량이 살아돌아와도 추진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같 은 송시열의 평가를 바탕으로 북벌정책은 당시에도 현실성이 굉장히 낮은 정책이었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라 는 추측을 낳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기해독대의 내용을 살펴보면, 효 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별됩니다. 먼저 효종의 북 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

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예전의 칸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

88 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

며, 예전의 칸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만을 숭상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武事)

를 폐하고 자못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소.(중략)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

을 때에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아마 곧장 관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무비(武備)를 힘쓰지 않아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지경

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 (중략)

또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

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 『송자대전』잡저(雜著) 악대설화(幄對說話)- 효종은 청나라가 무(武)를 숭상하던 이전 문화와 다르게 문(文)을 중 심으로 통치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으며, 조선이 군비를 확장하여 기 병한다면 명나라의 유민들과 포로들이 가세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효종의 북벌에 대해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합니다.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이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도 능히 성공하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89 세상사이다.‟라고 말하였다.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

하시렵니까?”

-『송자대전』잡저(雜著) 「악대설화(幄對說話)- 앞선 대목에서 송시열은 북벌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기해독대의 전반부 내용을 보면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서 먼 저 나라 안부터 기강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송시열의 입 장은 “네 왕권이나 관리하고 북벌을 추진해라”는 말로 받아들여집니 다. 송시열은 효종에게 ‘수신’의 자세로 먼저 자신을 수양할 것을 말 하며, 구체적으로는 강빈과 김홍욱의 옥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것 을 주장합니다. 대학의 8조목에서 수신의 다음이 제가, 치국, 평천하 임을 고려해본다면 송시열이 보기에 효종은 북벌을 너무 염두한 나머 지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 것 같습니다. 그렇 다면 강빈과 김홍욱은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과 어떤 관련이 있기 에 송시열은 북벌을 위한 효종과의 대화에서 이 둘을 이야기한 것일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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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자가 볼모로 있던 문연각 앞에서
두 왕자가 볼모로 있던 문연각 앞에서

효종의 콤플렉스 : 강빈과 김홍욱

강빈과 김홍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효종이 가진 컴플렉스를 이해 해야 합니다. 효종은 즉위기간 동안 두 가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 었습니다. 하나는 정통성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산림과의 관계입니 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효종은 본 래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 들이고, 죽은 소현세자에게는 세 명의 세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91 봉림대군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소현세자와 인조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뜻과는 맞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것으 로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의 학문을 수양하지 않고 다른 잡학(雜學)에 심취하고, 청의 중요 인물들과 교류하기 위해 많은 물자를 사용하면 서 인조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조실록을 보면 인조가 청의 압박과 청의 세력을 업은 소현세자를 두려워하고 불안했던 기록이 발겹됩니다. 청은 병자호란 후, 인조를 길들이기 위 해 „소현세자 카드‟를 교묘히 활용했는데 인조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 우, 볼모인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청이 소현세자를 활용하여 인조를 견제하겠다는 의향을 드러내 당시 인조 로서는 정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39년 7월 청은 명의 금주(錦州) 공략을 앞두고, 조선에게 병력과 함선을 제공하라고 요구 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청은 ‘왕위 교체론’을 흘리면서 인조를 협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청의 ‘왕위 교체론’에 인조는 상당한 심적 압박을 받았고 아들인 소현세자를 정 치적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배경이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1645년(인조 22)에 4월에 사망하고 5월에 봉림대군(효종)이 귀국하게 됩니다. 같 은 해 6월 인조가 세자 책봉을 이유로 대신들을 불렀는데 여기서 봉 림대군을 세자로 할 뜻을 밝힙니다. 좌의정 홍서봉을 비롯해 영중추 부사 심열, 판중추부사 이경여, 우참찬 김육, 이조판서 이경 등의 대

92 신들은 소현세자의 적장자인 원손이 종통을 계승해야 옳으며 또한, 원손이 학문에 영민한 데다가 실덕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동조하지 않았지만, 낙흥부원군 김자점, 영의정 김류가 인조의 뜻에 동조하고 인조는 장성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면서 결국 봉 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사관에 기록에서도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이 공론이 반대를 무릅쓰 고 감행된 것이라고 한 대목이 드러납니다. 봉림대군 역시 원손이 있 는 것을 이유로 자신의 세자 책봉을 거둘 것을 요청하지만 인조는 특 별히 과거 “맏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兄亡弟及 형망제급]’는 예를 썼다며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인조는 세자 의 지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죽은 소현세자의 처였던 강빈을 옥사로 죽이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소현세자의 세 아들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면서 유배를 보냅니다. 이렇게 잠잠하게 끝날 것 같던 강빈과 관련된 문제는 효종 3년(1652). 4월 26일 민정중이 재해문제에 관해 상소를 올리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신이 오랫동안 가까운 반열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도움을 드린 바가 없던 차에,

마침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경계를 보여 가뭄이 매우 참혹한 시기를 만나 성상의

심기가 걱정과 두려움에 쌓여 밤낮으로 편치 못해 하시다가 전지를 내리시어 해

결책을 구하시는 등 정성이 지극하셨다. (중략) 두 역적이 법의 심판을 받아 간사

한 꾀가 모두 드러나니 사람들은 더욱 당혹해 하며 모두가 두 역적이 속여가지고

그 옥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중략) 진실로 의혹스러운 단서가 조금이라도

93 있다면 천륜(天倫)의 지극한 정에 필시 애처로움이 배나 될 것이니, 신생(辛生)

을 엄하게 국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즉시 원한을 풀게 하고, 만일 역모한 사실이

명백하다면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결정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말끔

히 제거하소서."

- 효종실록 3년 4월 26일 -

이 상소를 읽은 효종은 분노하면서 직접 민정중과 독대하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상법으로 말하면 그대는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이미 구언을 하였고, 그대가 진달한 것도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 달하겠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 다.“ 이윽고 몇 차례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효종이 직접 나섰고 분위기 가 험악해지자 민정중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물러나게 된다. 그 리고 민정중의 상소 이후, 효종은 불안을 느꼈는지 같은 해 6월, 강빈 의 옥사에 대해 발언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규정하며 엄포를 내립니 다.

이렇게 강빈에 문제에 대해 엄포를 내린 이후, 한동안 강빈의 문제는 조용해지는 듯했으나 1654년 황해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의 형식을 빌려 강빈의 신원 문제에 대해 언급하게 됩니다. 김홍욱의 내용을 요 약하면 당시 궁중은 화목했는데 강빈이 무슨 원한으로 그 역모를 꾸 미냐는 것이고, 저주가 실제로 행해졌다면 심양에서부터 비복을 시켜 흉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그 기밀이 누설되지 않았을 리가 없 다는 것으로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94 김홍욱의 상소에 진노한 효종은 체포를 명하며 김홍욱이 한양에 압 송되자 친국을 개시합니다. 김홍욱은 효종 연간에 가뭄, 서리. 태풍, 폭설 등 다양한 자연재해가 일어났으며 이에 구언교를 내렸고 응지상 소를 통해 고칠 점은 고치고 어떤 의견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이미 공 표한 바가 있었기에 본인도 이 말에 착안하여 응지상소를 올린 것이 라 해명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구언은 나라에 재난이나 중대한 사안 이 발생하였을 때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왕이 널리 의견을 구 하는 명령을 말하고, 구언교에 응답하는 상소를 응지상소라 하였습니 다. 왕은 응지상소에 내용에 경청해야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대 신들 모두가 김홍욱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의 위신을 먹칠하면서까지 이 문제에 대해 한 치 의 양보와 타협도 없었습니다. 김홍욱의 죽음 이후, 강빈에 대한 문제 가 언급되지 않았으나 효종은 사대부의 중론을 무시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구언과 응지상소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쌓으려던 효종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홍욱 사건 이후 효종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홍욱의 죽음 이후 응지상소가 대폭 감소했는데, 감히 왕에 대해 목숨을 걸고 간할 용기를 가진 자는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이조판서였던 조경은 이런 세태를 비판하며 ‘김홍욱 옥사에서부터 대간은 입을 다물고 있는 습 관이 조장되었으며, 언로가 막히고 아첨하는 풍조를 이루었다.’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런 종류의 상소가 빗발치고, 효종이 시행하려 한 정책들이 산림을 비롯한 대다수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급속도

95 로 위축되게 됩니다.

효종과 산림

즉위 후 효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산림들을 중앙 정계로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송시열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산림은 과 거와 제한적인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리 재야 에서 높은 학문적 지식과 명망을 가진 사람들을 왕이 불러서 중앙 정 치에 참여한 인물들 및 세력을 부르는 용어로 보편적인 관료 등용 방 식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의 등용 방법으로 관료가 된 자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효종은 산림을 불렀을까요. 당시 현실 정치의 실력자는 김자점으로 효종 자신을 세자로 옹립하는데 기여한 결정적 인물이고, 인조가 강빈을 옥사하는데 동조한 핵심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 신의 왕위계승과 강빈 옥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산림보다는 김자 점을 우군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효종은 김자점과의 연대는 곧 전체 사대부와의 관계단절을 의미하였기에 산 림의 진출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산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며, 인조 대의 권신들 과 친청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이루게 됩니다. 시작은 영 의정 김자점에 대한 김홍욱의 탄핵이었습니다. 김홍욱은 김자점에 대 해 선왕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고 사리사욕만 채우면서 조정을 유린

96 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이에 많은 대간들이 동조했지만, 효종은 선왕 의 원로대신을 탄핵할 수 없다며 김홍욱과 이석을 체차시켰습니다. 그러자 체차를 반대하는 상소가 승정원과 대간에서 빗발쳤고 양사에 서 김자점의 죄목을 들면서 파직하기를 간하자 효종은 마지못해 김자 점을 파직하고 귀양 보내게 됩니다. 김자점의 탄핵에 성공하고 많은 인물들을 산림세력과 대간에서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효종은 상당 부분을 다 윤허하는데 효종 또한 김자점 세력이 자신에게 있어 서 흠이 될 수 있었기에 강력하게 김자점을 옹호할 수 없었고, 김자점 의 탄핵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 회였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김자점은 이 후 효종 2년 11월, 인조의 후궁인 조 귀인(소용 조씨)의 저주사건과 연루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김자점과 그 일파의 옥사로 사사된 이 사건은 친청세력의 완전한 절멸을 의미했고, 효종에게도 자신의 왕권 강화에 대한 저해세력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효종 2년에 접어들 때, 적극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하면서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섭정왕 도르곤이 사망하게 되는데, 이 사건 이 후, 여러 가지 명목으로 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면서 간섭하는 것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조선에 대한 외교노선을 변경하게 되는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청의 간섭이 줄어들고, 김자 점을 필두로 하는 친청세력이 사라지자 안정된 왕권의 기반이 만들어 졌고, 이 때를 기점으로 효종이 의도한 본격적인 군비증강과 군사정 책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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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과 북벌

효종 2년(1651) 12월에서 3년(1652) 2월, 친청세력의 거두이자 왕 권강화의 걸림돌이 되는 권신인 김자점이 사사되고, 섭정왕 도르곤이 사망하자 이에 따른 청의 외교 노선의 변화가 생겨 간섭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효종의 군사정책은 김자점이 축출당한 효종 3 년부터 적극적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사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군사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즉위년 (1649) 11월, 변방 방비가 허술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잡는 것을 명했 고, 효종 1년(1650) 7월, 중앙과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시 방을 수어사로 임명하여 충청도의 군사를 수어청 개혁을 시도하였습 니다. 개혁의 내용은 충청도의 군사를 경기지역과 바꾸고 총융사 소 속 죽산영을 남한산성에 편입시킵니다. 또한, 충주와 청주의 군사를 본도로 소속시키면서 남한산성의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조치도 취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청은 효종 1년 8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칙서를 보내 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국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정돈한

다고 했는데, 이런 말을 한 것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었다. 그대의 선왕(先王) 때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번인지 모른다. (중략)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으

고 병기를 정돈하는 등의 일은 원래 왜국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짐(朕)과 문제

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에서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병마(兵馬)를

98 불러 모으고 기계를 정돈하는 것은 교묘하게 속이는 처사로서 예절에도 위배되

는 것이다. 짐은 그에 대비할 따름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 효종실록 1년 8월 27일 - 실제로 청은 효종 1년에 7번, 효종 2년 초에 4회나 사신을 파견한 정황으로 보아 일정 부분 효종의 군사정책을 어느 정도 감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 목이며, 효종은 섭정왕 도르곤이 사망하기 전까지 청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 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친청파의 몰락과 섭정왕 도르곤이 사망하자 본 격적으로 군사정책을 추진합니다.

먼저 효종은 중앙군 정비와 증강책을 추진합니다. 효종 3년 6월 조정 대신들 과 어영군을 증치시키는 것을 논하는데 인조 시기의 4천 명이었던 정예군이 이완을 시켜 6천 명으로 증강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같은 해 8월 청나라의 기 병에 맞서 금군을 모두 기병으로 바꿀 것을 박서와 논의하며 내삼청을 정비하 여 좌별장과 우별장이 전담하게 합니다. 그리고 9월 궁수와 포수를 반반씩 하 는 대오를 갖추게 하여 포 중심의 병력 구조에서 재편을 명합니다. 효종 6년 (1656) 4월에는 재정을 걱정하지만, 금군의 군의 숫자를 629명에서 371명을 충원해 1천명 규모로 확장시킵니다.

중앙군 정비와 더불어 효종은 지방군에 대한 정비와 개혁도 추진합니다. 대 표적인 정책으로 박서 때 언급했던 영장제도의 부활을 꼽을 수 있는데, 영장 이란 지방군의 지휘와 훈련의 책임자로 박서가 효종 4년 부활을 건의했고 5 년 원두표가 삼남에 영장을 파견하여 군무를 전적으로 맡길 것을 건의하면서 삼남에 파견된 영장 외에 다른 지역에서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

99 행하게 됩니다.

인재양성과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시행한 관무재를 시행한 것도 주목해야할 부분입니다. 관무재는 병자호란 이후 중단된 것이었는데 효종이 이를 부활시 키면서 매년 관무재를 시행하였고 효종 5년에는 노량과 춘당대에서, 7년에는 광릉에서 환궁하는 길에 열병식을 거동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효종은 군사재정을 마련하는 것에도 집중하였습니다. 효종 6년 노비추쇄(奴 婢推刷)를 추진하며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각 도에 어사(御史)를 보냅니 다. 명부에 적힌 노비는 19만이었지만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물인 신공(身貢) 을 내는 자는 2만 7천명에 불과해 나머지 노비들을 찾아내서 군비를 확충하자 는 건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동법도 재정에 큰 도움을 줬는데 효종 3년엔 충청도에, 9년(1658)에는 전라도 연해에 시행하여 일정 부분 재정확보에 힘을 보태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군비 증강책은 조정관료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유로는 각종 정책이 갖는 비효율성도 있었지만, 강빈과 김홍욱 사건으로 인해 지지기 반이 취약했고 여기에 더해 효종 치세 내내 자연재해가 극심했습니다. 각종 상소에는 백성들이 잦은 부역과 군사훈련으로 원망이 심해 그 폐단이 수없이 많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능에 거동하시는 것이야 비록 정지하였지만 열무를 바야흐로 거행하게 되어, 초

췌한 경기(京畿) 백성들이 이미 도로를 정비하는 일에 고생하고, 굶주린 방민(坊

民)들이 강가의 부역에 지탱할 수가 없으니,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고 비방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임금의 과오는 일식 월식과 같아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

100 두 알고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어가를 수행하는

여부는 참으로 하찮은 일이지만, 과오에 대하여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 것은 관계

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어리석은 마음으로 연모하는 생각에는 거의 고치리라는

희망이 있다. 동료들에게 간통(簡通)을 보내 도로 거둬들이시라는 주청을 진달하

려고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어렵게 여기니 신이 경시를 당한 소치가 아님이

없다.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 효종실록 5년 3월 3일 -

마치며

효종은 즉위 초반, 산림을 등용했고 그들이 친청세력들을 축출하며 북벌정책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섭정왕이었던 도르곤이 사 망하자 본격적으로 정책을 시행하면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 만, 자신의 정통성 문제에 닿아있는 형수 강빈 문제를 해결하면서 김 홍욱을 옥사시켰고 이로 인해 정통성에 도전을 받게 됩니다. 요약하 면 효종은 즉위시기부터 일관되게 북벌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고, 자 신이 놓인 현실 정치 무대에서 정통성을 둘러싸고 북벌정책 실현에 난항을 겪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앞선 정통성의 문제는 일시적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이 과정에서 북벌 추진에 난항을 겪게 됩니 다.

101 참고문헌

이경찬. 1988. “조선 효종조의 북벌운동.” <청계사학>, 한국정신

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우경섭. 2018. “악대설화와 효종의 비밀 편지.” <한국학연구> 제

50집 219~244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공식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 /main/main.d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 /item/level.do?itemId=jo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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