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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박제가가 바라본 청나라와 조선

천하질서를 앞서 근심하고, 뒤미처 즐기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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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 정지원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당대의 시대상을 엿보았는데, 그 중 유리창을 고르면서 18세기 청나라와 조선의 시대상 속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 북학파이자 실학파로 알려진 박제가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병자호란의 아픔을 지닌 조선의 관료가 유리창에서 만난 청나라 나빙이라는 화가와 편지, 시, 그림 등을 애절하게 나눈 것을 보면서, 박제가에게 유리창은 어떠한 의미였으며,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 속에서 그가 유리창에서 보낸 일련의 시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그는 청나라의 문물과 지식에 대해 매우 열려있었던 소수의 조선 관료로 자신의 청나라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청나라에서의 경험을 뒤쫓기로 했습니다.

53 사랑방 답사로 중국으로 떠난 사랑방 멤버들과 비슷하게, 청나라로 떠난 박제가의 삶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청나라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 (출처: 인물한국사)
청나라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 (출처: 인물한국사)

박제가가 청나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트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의 신분이 서얼이라는 점으로부터 시작하고, 두 번째는 그가 가까이하고 교류했던 사람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적인 제한을 상대적으로 일찍 깨닫고,

54 크게 보았을 때 이는 당대의 사대부 및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 그 자체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서얼임에도 정조의 발탁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 차례나 검사관의 생활을 했었고, 중간 중간 네 차례에 걸친 연행을 경험했습니다. 유리창과 같은 장소로의 연행을 통해서 그는 청나라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이를 조선과 비교하며 더 큰 질서 속의 조선 사회의 폐단과 발전 방향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박제가는 연암 박지원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백탑시파’에 속한 사람으로 이덕무, 유득공 등과 고민을 나누며 친하게 지냈으며, 청나라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이덕무와는 같은 서얼의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일하고 연행도 여러 번 같이 다녀오는 등 시간을 많이 보낸 박제가의 벗이었기에 ‘백탑시파’ 중에서 박제가의 이덕무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서 청나라 화가 나빙의 경우에도 살아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빙과의 교류에 대한 기록이 많기 때문에 나방과의 교류도 그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함이 틀림없습니다. 조선 사람이던 청나라 사람이던 박제가는 그들과 함께하며, 적대심 속의 청나라보다 실존하는 청나라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유리창과 같은 곳으로의 연행과 그 과정을 함께 했던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는 넓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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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신분, 서얼

박제가는 서얼의 신분이 사회적 진출을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 기도 했고, 역설적이게도 이는 박제가가 상대적으로 당대의 사회제 도로부터 더 자율성을 지닐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 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제도 의 문제를 일찍 몸으로 느꼈고 그만큼 사대부 계층과 그들을 등용해 서 나랏일을 맡기게 하는 과정인 과거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 습니다. 정유각집을 보면 박제가가 꼬집으려는 사회적 차별의 현실 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뜻이 있어도 가난하면 성취 어렵고

할 만하면 건방 떨며 하려 않누나.

온전한 재주를 하늘 아끼니

국한됨은 마침내 매한가질세.”

그저 서얼이라는 신분 자체에 국한된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사회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에 대한 한탄과 허탈함이 엿보입니다. 그 리고 박제가는 조선의 사회제도가 제대로 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실 패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비판합니다. 심지어 자신은 공부하지 않 고 과거 시험을 본 이후, 3등을 한 자신의 경험을 “어쩌다 높은 등수 에 뽑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을 받게 되니 지금껏 남은 부끄러움이 있

56 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부끄러운’ 행위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북학의』를 써서 왕에게 바치면서 조선을 위해 필요한 조치 중에 가장 먼저해야하는 것을 유생을 도태시키는 일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농업을 장려하는 흐름이 중요한데 10만명이 넘는 유생들이 과거시험에 몰두하는 현재의 상황이 옳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박제가는 강자와 약자의 차별적 구조를 비판합니다.

“똑같은 백성이지만 부림을 받는 자와 부리는 자 사이

에는 강자와 약자의 형세가 형성됩니다. 강자와 약자의

형세가 형성되고 나면 농업은 날로 경시되고 과거는 날

로 중시되게 마련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병오년 조회에 참석했을 때, 국가가 만든 사대부에게 국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스스로를 피폐케 하는 것이고 인재선발이 과거 제도로 인해 무너지는 것 또한 피폐케 하는 것이라며 근본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질문을 날카로운 어조로 기록해놓았습니다. 국가가 만든 제도, 그 제도가 영향을 끼치는 범위를 폭넓게 보고, 구조적인 접근 속에서 조선 사회 내 차별을 찾아냈습니다. 산문에서는 더 날카롭게, 시로는 조금은 더 한탄스럽게, 당대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제도를 평가하는데

57 자서적인 내용과 어조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가 자신의 능력을 가로막는 유리천장과 같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그 벽은 위가 보이는 유리창이었습니다. 서얼이었지만 관직을 경험했고 자신이 느끼기에 더 큰 세상을 청나라에서 연행을 통해 겪었기 때문입니다.

서얼 출신으로 분명한 신분 제약이 있었지만 정조가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하면서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1779년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됩니다. 그 이후에도 1789년, 1794년에 두 차례 더 검서관 생활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동시에 1778년의 연행을 시작으로 1801년의 마지막 연행까지 총 네 차례에 걸친 연행을 체험하였습니다. 거듭되는 관직 생활과 연행경험을 통해 사회적 구조의 문제점과 차별을 더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소위 말하는 국제정치학적 관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2019년의 사랑방 멤버들이 중국 답사길에 오른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답사지도 그렇겠지만, 특히 유리창 답사는 18세기의 박제가의 길을 걸어보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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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도 거닐었을 유리창의 거리
박제가도 거닐었을 유리창의 거리

박제가는 청나라를 “깡그리 오랑캐”로 인식하지 않고, 청나라의 질서가 백성들에게 이익이라면 성인은 그 법을 택하는 것이 옳고, 심지어는 중국의 “옛 땅”에서 만든 법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맹자의 말을 빌려 오랑캐는 오랑캐이고 주나라의 문물이 오랑캐의 것으로 물들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성인’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선택적 수용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주자의 나라, 소중화의 노선을 택한 조선의 땅에서 오랑캐의 법이 배울만한 점이 분명히 있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59 옳은 성인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시각과 조선의 국제학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짚어냅니다.

“지금 청나라가 되놈이긴 하다. 되놈의 청나라는 중국을

차지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약탈하여 소

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빼앗은 주체가

되놈인 것만 알고 빼앗김을 당한 존재가 중국인 줄을 모

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조차도 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벌써 드러난 명확한 증

거인 것이다. ... 나는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오랑캐를

물리치기는커녕 우리나라 안에 있는 오랑캐의 풍속도

다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하고 천하를 차지했음을 받아들이고, 병 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채로 청나라와 조선의 국제학적 위치를 정 확히 파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국제정서를 파악하지 못하 는 길로 나아가려는 조선의 행보는 백성들을 더 궁핍하게 만들고 발 전을 등한시하는 결과로 이어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시를 남길 때도 ‘중화를 사모한다’는 말을 자주 흔하게 썼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나만큼 여행한 사람 없다오, 어려서부터 중화를 사모하다가 이 몸이 직접 보니 기쁘기만 해. 오악도 오를 수 있을 듯하여 헌신짝

60 버리듯이 집 떠나왔지.” 그러한 사고의 방식 밑에는 그가 다녀온 연행의 경험이 진하게 남아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이는 같이 다녀온 이덕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덕무에게 어째서 중화를 사모하는 지를 물었을 때, 이덕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박제가는 기록합니다.

“내가 중화의 책을 읽었고, 예전에 그 땅을 가보기도 했

다. 땅은 넓고 책은 많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바다와

변화를 알 수 없는 신령과 같았다. 없는 게 없음을 풍부

하다고 하고, 사람이 자득하는 것을 일러 즐거움이라 한

다. 내가 지난날 옛사람의 책을 읽고 그 문장이라는 것

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야 시서와 예악이 모두 중화의 것으로 풍부하여 즐

길 만함을 알았으니 어찌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고개 숙여 글을 읽고,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니

옛사람으로 되는 것이 절로 까닭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

을 사모할 만함을 알지 못하는 옛사람의 글을 알지 못하

는 자일 뿐 아니라, 천세 이전과 만 리의 아득함을 알지

못하는 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덕무가 바라보는 청나라의 모습과 조선의 위치는 박제가와 크 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사모’는 직접 보고

61 듣고 느끼고 온 연행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청나라 의 실제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고 이와 반대의 길로 가는 조선의 시대 착오적인 방향성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18세기의 유리창을 떠올리게 하는 서적 가득한 21세기 유리창
18세기의 유리창을 떠올리게 하는 서적 가득한 21세기 유리창

박제가의 벗들, 이덕무와 나빙

신분적인 한계와 그러한 차별을 직접적으로 관직에 오르면서 견디며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연행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 갇히지 않고

62 국제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 할지라도, 혼자였다면 그 일련의 과정들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트인 사고를 가지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당대 조선의 주요한 정치적인 흐름과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지속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박제가는 곁에도 멀리도 그와 생각하는 바를 나누고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벗이 곁에 있었고, 이들은 서로의 힘이 되어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에서는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뜻이 맞았던 사람들 중에서 이덕무를, 청나라와 교류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나빙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박제가의 시집의 전체적인 어조는 굉장히 한탄스럽고 애틋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삶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더 나은 삶과 사회에 대한 갈망도 보입니다.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자주 나눴던 사람 중 한 명이 이덕무였습니다. 관직에도 같이 오르고, 연행도 같이 가면서 박제가는 이덕무와 관련된 글을 많이 남겼고, 그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시에 종종 담았습니다.

그가 이덕무를 비롯한 벗들과 사회에 대한 고뇌와 삶을 힘들고 기쁜 순간들을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등과 함께 승가사에 올랐습니다. 이덕무가 먼저 돌아가기에 가는 길에 보통정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북한산을 거쳐 조계에서 놀다가 다시 서상수와

63 익무를 만나 묵으며 기행시를 지었다.”에 보면, “진솔함을 따를 뿐 구속 따위 내던지고 껄껄대며 크게 웃다 손바닥을 쳐 댔다네. 그 누가 이 밤을 썩지 않게 할 것인가. 자라건대 글로 적어 벗들에게 전하리라”던가 “백문에서 박지원을 만나다”의 “푸른 잎 서편으로 초승달 빛 흘리고 엷은 구름 남은 더위 더더욱 쓸쓸해라. 어이해 알았으리 서너 사람 만나서 밤새도록 가을벌레 소리 함께 들을 줄”을 통해 이 특별한 인연에 대한 박제가의 애틋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저 웃으며 풍류를 즐기는 것에 끝나지 않고 서로 돌아가면서 글을 적고 시를 읊으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덕무와의 편지를 보면 학술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공유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덕무가 1793년에 생을 마감한 이후 그즈음 박제가의 부인도 사망하기도 하여, 박제가의 슬픔과 그리움이 극에 달하는 것을 그의 무덤을 지나며 마음이 상해 술을 따른다는 시를 보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덕무의 편지를 읽고 쓴 내용에서도 박제가에게 벗, 이덕무의 강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청장관이 생전에는 나는 새와 같았는데 한순간 사라지고

푸른 하늘 아득하네. 그 누가 허공 좇아 그 모습 기억할까

너울너울 떨어진 깃 그것으론 알 수 없네. 갑자기 손을 놓

고 낭떠러지 떨어지니 귤껍질 매미 모두 함께 사라졌네.

구름 지금 스쳐 가도 말을 할 수 없으니 옛 구름에 묻는다

64 면 그대는 어떠한가. 황금도 주조하고 비단도 짤 만하니

두 마리 모기로써 우주를 경영하네. <이십일사탄사>의 소

리는 싸늘하여 악기 붙여 소리 내지 못하누나. 물가의 붉

은 버들 버들개지 토했으며 가는 비늘 붉은 고기 푸른 물

거스르네. 두만강 물가에는 봄날이 저무는데 굽은 물에 잔

띄우던 그곳과 같지 않네”

이덕무는 규장각에서도, 풍류를 즐기는 순간에서도, 연행을 같이 갔 을 때에도, 이덕무의 사후에 박제가가 혼자 남았을 때에도, 박제가에 게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감정과 학술, 정치적인 식견을 공유하는 사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제가와 이덕무가 함께 거닐었을 유리창 거리
박제가와 이덕무가 함께 거닐었을 유리창 거리

65 네 차례의 연행을 다녀온 박제가는 특히, 1790년에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연행길에 두 번째로 올랐을 때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동시에 청나라 화가 양봄 나빙과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빙과는 시문을 활발히 주고받았었고 나빙은 박제가에게 초상화, 부채 등을 선물해준 것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우정이기도 하지만 청나라 사람과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이미 다른 조선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계속 걸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로써 청나라에 대한 박제가의 가치관은 더 강해졌을 것이고, 이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박제가와 나빙이 함께 지나다녔을 유리창 거리
박제가와 나빙이 함께 지나다녔을 유리창 거리

66 정유각집을 보면 나빙과 관련된 시가 굉장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빙도 부모를 청나라 군사로 인해 잃었고 병자호란을 겪은 나라에서 온 박제가의 우정도 특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박제가는 그의 예술적인 감각을 칭찬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우연히 그림 보러 길 나섰다가

사찰에서 좋은 벗 만나 보았네.

사람들 하나같이 옥골 재사요.

꽃잎도 송이송이 빙옥 같구나.

한가지로 서글픔 만들어내니

짧은 이별 애석해 마음 상하네.

가정 땅은 풍류의 고장이거니

고운 그대 중흥에 있구려.”

“도인이 대나무를 그릴 적에는

도리어 색상 따라 일으키지만,

그대 보게 대나무 그린 뒤에는

신묘함 겉모습에 있지 않다네.”

나빙의 생일과 같은 기쁜 순간에도 박제가의 청나라 사람과의 진정성 있는 교류는 지속되었지만 슬픈 순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67 심지어는 나빙의 아내 방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와 관련된 글을 남기고, 편지를 보냈다. “<당운> 베낀 신선 인연 가볍지 않고 시 지어도 부덕은 밝기만 했네. 문재는 유서보다 윗길에 서니 그 집안의 연원이 동성에 있네. 자잘해도 모두 다 명리에 맞고 고고함은 그 또한 성정이었네. 저승의 시 모임은 쓸쓸하리니 뉘 다시 나횡을 생각하리오”라면서 부인에 대한 평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나빙의 사별의 슬픔을 함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덕무도 마찬가지였지만 박제가도 청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려면 청나라에 가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청나라와의 실질적인 교류가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청나라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을 포함한 수용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박제가에게 나빙과 같은 청나라 사람과의 지속적인 교류는 스스로 세상을 읽고, 그 큰 세상 속에 스스로를 위치하는 방식이었으며, 조선의 벗들과 그 길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지속적으로 박제가의 소신을 이러나갈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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