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

청의 얼굴 서태후, 그 천의 얼굴

천하질서를 앞서 근심하고, 뒤미처 즐기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8월 1일
sarangbang_12_ch1_cover.png
sarangbang_12_ch1_cover.png

이화원 · 허수진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원명원 미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이화원에 도착하니 호수의 물결을 머금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고, 덕분에 악명 높은 북경의 더위가 조금은 가시는 듯 했습니다. 무리한 보수 공사를 강행해서라도 이화원에서 여름을 나고자 했던 서태후의 마음이 피부에 와 닿은 순간이었습니다. 쿤밍호 옆으로 길게 뻗은 장랑(long corridor)에는 비가 내리는 날에도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지붕이 드리워져 있는데, 천장은 서양풍의 원명원과는 달리 중국의 고전, 신화, 그리고 나라 곳곳의 자연 경관이 담긴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곳 한켠에 자리를 잡아서 지적 연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연애든 상대방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닿고자 노력했다면 그 내용은 절절할 수밖에

4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실패로 끝난 연애의 기록을 이 지면을 빌어 담담히 옮겨 적어 보려고 합니다.

서태후는 남편 함풍제의 서거 이후 황제 자리에 오른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뛰어든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치제 역시 스무 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동치제의 부인인 가순황후가 황태후가 되고 그의 후계자를 양자로 삼는 것이 온당한 절차였으나, 서태후는 조카 재첨(이후 광서제)을 본인의 아들로 삼아 수렴청정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주로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묘사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치제 집권 당시 섭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훌륭한 퍼포먼스 혹은 “연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서태후의 계속되는 집권이 큰 반대를 겪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기도 합니다(Chang 2013: 114).

1889 년 성인이 된 광서제가 결혼식을 올렸고, 섭정에서 물러난 서태후는 이화원 보수가 완료될 때까지 자금성 서쪽에 위치한 중난하이에 임시로 머물렀습니다. 이후에는 해군 예산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곳 이화원에서 은퇴기를 보냈지요. 그러나 장융은 알려진 이화원의 보수비용이 과장된 면이 있고, 실제로는 그 규모가 광서제의 결혼식 비용과 비슷한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Chang 2013: 160).

5

그림 1 이화원의 장랑
그림 1 이화원의 장랑

서태후는 짧은 은퇴기를 뒤로 하고 1898 년 9 월 21 일 캉유웨이의 주도로 이루어진 변법개혁에 제동을 걸면서 세 번째 섭정으로 정치 무대에 복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태후는 1861 년부터 1908 년까지 약 반세기 가까이 청 왕조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는데, 황후가 제국을 이끄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여성학적 관점에서 서태후는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빅토리아 여왕과의 비교 연구나 서태후의 여성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Liu 2004: Pang 2005) 저는 서태후를 여성의 틀 안에서 다루기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먼저 알아보고픈 마음이 컸습니다.

6

서태후의 정치적 위치 찾기

수많은 초상화와 사진을 남긴 천의 얼굴 서태후는 보기에 따라 전혀 반대의 상이 존재했기 때문에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얼굴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전해졌겠지만, 지적 연애에 서툴렀던 저는 그 마음을 읽기 위해 여러 징검다리를 거쳐야 했습니다. 인물 자체가 워낙 입체적이기도 했으나, 서태후를 바라보는 상황과 그에 따른 해석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였기 때문입니다.

서태후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중국 번영을 위한 근대화를 방해한 인물로 그려져 온 전통에 연원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트레버 로퍼 교수에 의해 상당한 내용이 조작되었다고 밝혀진 백하우스와 블랜드의 저서를 비롯하여 20 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성격을 띠는 서양인들의 저술 활동, 그리고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 서태후 암살에 실패하면서 해외에서 주로 활동한 급진 개혁파의 적극적인 언론 공세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Trevor-Roper: 1977, Bland and Backhouse 1914, Chung 1976: 109, Seagrave 1992: 263-72).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서태후에 가해진 비판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서태후 측근들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Der Ling 1931; Conger 1909; Carl 1907: Headland 1909). 시그레이브는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다루어진 위의 기록들과 백하우스의 미출간 일기 등의 자료를 통해 서태후 연구를 보완하였으며(Seagrave 1993:13), 수정주의 경향의

7 연구들 역시 서태후의 이미지를 새롭게 조망했습니다. 장융과 정은 서태후를 중국 근대화의 주역으로까지 여겼는데, 청 군대의 근대화 등 제도적 개혁을 통해 청을 중세에서 근대국가로 이끈 서태후에 가해지는 비판은 지나친 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Chang 2013:339, Chung 1979).

그림 2 이화원의 쿤밍호. 서태후는 쿤밍호에 주둔한 군대를 유지하는
그림 2 이화원의 쿤밍호. 서태후는 쿤밍호에 주둔한 군대를 유지하는

명목으로 해군 예산을 이화원 보수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전통적인 역사기술에서 서태후는 봉건제도의 지배층에 속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과 동등하다고 볼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1976 년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그녀가 소유했던 사치품에 대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자희의 죄”라는

8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는 외국의 제국주의자들에 아첨한 서태후의 잘못을 주제로 했습니다(Li and Zurndorfer 2012: 9). 기존의 공산주의 서사가 “진보”에 초점을 맞추고 청 말기를 평가했다면 1980 년대 이후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변화는 역사기술에 새로운 흐름을 가지고 왔고, 중국 역사 전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 전통의 이해를 강조하는 흐름 속에서 서태후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유지하고자 최선을 다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Li and Zurndorfer 2012: 14).

장융의 주장처럼 실제로 질서의 변화에 직면한 청 왕조는 제도적으로 큰 진통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861 년 3 월 외교 업무를 담당한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설립되었으며 1870 년대에는 처음으로 외교 사절단을 구성하여 해외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행보를 통해 청 왕조는 서구의 근대적인 외교 체제를 수용했다고 여겨집니다(Zhou 2007: 447). 물론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군사적 갈등을 통해 서구 국가들을 조공 국가로 다룰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천하질서 내에서 중국이 강할 때 외교사절은 천자의 위신을 보다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세력이 약할 때에는 평화를 간청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청일전쟁 이후 극도로 약해진 국력을 보유한 상태에서 서구 국가들의 요구대로 외교사절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대신들 사이에서도 나라가 힘을 되찾고 상대적으로 강해질 때까지 사절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9 담론이 주를 이루었고, 친서구 세력인 이홍장 역시 해군을 동반하지 않은 외교 사절은 현명하지 않은 처사라고 보았습니다(Hsü 1960: 206). 그러나 1873 년 7 월 29 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네덜란드, 일본 외교 사절이 황제를 알현했고, 결국 청은 서구식의 외교 의례를 따르게 됩니다.

장융은 서태후가 서구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를 주장하여 중국 발전을 막았다고 보는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도적 관점에 근거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구도는 결국 제도의 변화와 도입이 곧 근대화이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국제질서로의 편입을 이끈다는 특정한 목적론적(teleological) 가정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구의 근대국제질서와 천하질서라는 권역의 충돌 차원에서 보수와 진보를 다시 하나의 청으로 합치는 그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제도적 차원에 제한된 논의는 천하질서에 깊은 뿌리를 두는 청의 국제정치적 관점이 결락된 반쪽짜리 그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천하질서를 바탕으로 한 청 제국이 유럽에서 기원한 국제정치를 겪는 전파의 경험 속에서 주체적으로 “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중국 지성사 내에서는 어떤 중국을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보수파, 온건 개혁파, 급진 개혁파로 대별이 가능합니다.

10 첫째, 보수파는 개혁 세력이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중국 문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왕선겸, 엽덕휘 등은 서구 세계의 정치체가 세력에 바탕을 두는 반면 중국의 그것은 인간성과 올바름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왕도에 기반하는 좋은 정치를 주장하는 유교적 전통에 기인합니다(Yeophantong 2013: 336). 보수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국가 이익으로서 당연시하는 부국강병이 서구의 관념으로 인식되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가르침이 서구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비록 서구가 부국강병할지 몰라도 조화와 통일을 성취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De Bary and Lufrano 2000). 그러나 고전주의자인 왕선겸을 비롯하여 보수파는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경우가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 영향력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나의 예로, 변법 개혁 당시 광서제는 완고파 대신인 강의(剛毅)와 과거제도 개혁을 두고 대립하게 됩니다. 강의는 기존의 팔고문(八股文)을 폐지하고 시책론(試策論)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광서제에게 서태후의 의견을 물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편을 들어주었고, 결국 조서를 반포하여 시책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五月初五日,奉明旨废八股矣。先是二十九日芝栋折上, 上即令枢臣拟旨。是日,京师哗然,传废八股,喜色动人,连数日寂然。闻上得芝栋折, 即令降旨,刚毅请下部议,上曰“:若下礼部议,彼等必驳我矣。”刚又曰“:此事重大,行 之数百年,不可遂废,请上细思。”上厉声曰“:汝欲阻挠我耶?”刚乃不敢言。及将散,

11 刚毅又曰“:此事重大,愿皇上请懿旨”上乃不作声,既而曰“:可请知”故待初二日诣颐 和园请太后懿旨, 而至初五日乃降旨. 中國史學會 1959: 147-8).

반면 온건 개혁파는 이미 서구를 상당히 위계적으로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온건 개혁파의 문제의식은 “왜 그들은 작으나 강하고, 우리는 크지만 약한가”가 핵심이었는데, 그들은 서구와 동등해지는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천하질서 자체를 문제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자강”은 방법을 확보하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장지동은 서구 국가의 세력이 정부 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서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적절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 행위에 관한 중국의 배움과 세계 사정에 대한 서구의 실천적인 배움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Zhang 1900). 나아가서 중국 내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 대해 장지동은 아래와 같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보수 세력은 마치 삼킬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인해 식욕이 없는

상태와 같다. 진보 세력은 양떼와 같아서 갈림길에서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실정이다. 보수는 국제적 교류(international

intercourse)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진보는 중국사(Chinese

affairs)에 있어서 무엇이 급진적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Zhang 1900:

20).

마지막으로, 캉유웨이로 대표되는 급진 개혁파는 송과 명의 전통이 실질적 유용성이나 이득이 되는 어떠한 것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12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온건 개혁파와는 달리 자강을 위해서는 옛 체제를 떨쳐내고 근대 체제를 개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캉유웨이는 완전한 변화를 이끌어 수 있다면 강해질 기회가 있지만 제한된 변화만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여전히 쇠퇴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 당, 원, 명 왕조의 잘못된 흔적으로서 청의 제도가 조상들의 독자적 관념이라기보다는 관료들의 지적 유희와 부패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개혁의 정당성을 찾았습니다. 캉유웨이는 중국이 본받을만한 사례로 러시아의 표토르 1 세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꼽기도 했습니다(De Bary and Lufrano 2000).

실제로 서태후가 장지동, 영록 등 온건 개혁파로 대표되는 세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서태후가 온건 개혁파와 뜻을 같이 했다고 보거나, 혹은 국제정치관을 공유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서태후의 국제정치관이 특정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따라 일관적 양상을 보이지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1900 년 의화단 운동 당시 서태후가 전쟁을 선포하자 장지동은 다른 지역 대관(viceroy)들과 합의하여 서태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지역 자치 차원에서 서구와 전면적으로 군사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역으로 광서제와 급진 개혁파가 항상 뜻을 같이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광서제는 1898 년 9 월 칙령을 통해 캉유웨이가 보국회를 조직하는 것을

13 금지하였습니다(Chung 1979: 184). 광의 경우, 광서제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당파의 움직임을 황제가 장려했다기보다는 서태후의 권위를 약화시키고자 했던 몇몇 개인들의 활동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에 가까웠다고 분석합니다(Kwong 1984: 66-8).

실제로 비행간(費行簡)의 자희전신록(慈禧傳信錄)에 실린 광서제와 서태후의 대화도 흥미롭습니다. 1898 년 독일이 청에 교오조차조약(膠澳租借條約) 체결을 강요한 당시, 광서제는 울면서 서태후에게 “망국의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서태후는 “부강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과 정책을 펼치십시오. 나는 그것을 억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適德人假細故 攘我膠澳,舉朝無一策,帝 復泣告后,謂不欲為亡國之主。后曰:苟可致富強者,兒自為之,吾不內制也)” 라고 답하였습니다(中國史學會, 1953: 464).

발제 중에는 서태후가 상술한 집단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지, 나아가서 과연 그녀가 뚜렷한 국제정치적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답사를 위해 준비했던 보고서에는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통치의 방향성을 고민했던 서태후”라고 적어두었는데, 저는 한 나라를 이끈 서태후가 청의 얼굴로서 서구를 대상으로 나름대로 전면전을 펼쳤기에 당연히 국제정치적으로 특정한 입장을 가졌으리라 넘겨짚는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후당과 제당파 갈등의 핵심은 궁정 내 권력 정치에 있었고, 뚜렷한 국제정치관을 가지는 것 보다는 세력 유지 차원에서 서구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오히려 제도

14 변화의 연원이 된 부국강병은 그 필요성을 양측 모두 공감하는 상황에서 대립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발제가 끝나고 저는 서태후의 위치를 찾기 위해 청 왕조 내 광서제를 지지하는 제당파와 서태후를 지지하던 후당파의 대립을 새로 읽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험난한 정치적 노정을 지탱한 서태후의 균형력

정치인으로서 서태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왕정 정치를 지속가능하게 한 균형력에 있습니다. 서태후의 정치적 노정은 공친왕, 재풍, 자안태후와의 협력을 통해 함풍제가 향후 섭정을 위해 임명한 여덟 명의 대신을 몰아낸 신유정변(1861)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섭정 중에도 끊임없이 견제 세력에 직면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왕정 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약점 균형”의 복잡한 게임에서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Hsü 1960: 204-5).

만주인의 청 제국은 서태후의 첫 번째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만주와 한의 갈등적 관계에 주목한 로즈는 서태후가 만주 지배층이 중국 개혁 재건의 방해물로 여겨지는 양상을 심화시켰다고 분석합니다. 서태후는 청 왕조 세력의 유지를 위해 청 말기 만주와 한족이 융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만주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만주와 한의 눈에 띄는 차이를 줄여나가야만 했는데, 이는 까다로운

15 균형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Rhoads 2015). 1898 년 백일천하로 끝난 변법개혁 이후 서태후가 한족으로 복수의 대상을 삼고 만주인들을 내부자로, 한족을 외부자로 여긴다는 “내만외한” 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서태후는 이를 전적으로 부인했습니다(Rhoads 2015: 71).

둘째, 서태후는 이홍장 등 고위 관료의 세력을 견제하고 균형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는 중국 정치 제도의 변화에서 파생된 서태후의 약점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청 왕조는 태평천국운동(1850-1864) 당시 이를 제압하기 위해 지방군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경제, 군사적 자원에 대한 재량권을 허가하였습니다. 지역 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 경제, 군사 정책의 발전은 한족 출신 고위 관료인 증국번, 이홍장과 같은 인물들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습니다(Crossley 2014). 특히 이홍장은 회군과 북양함대를 보유했고, 외국인 고문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는 서태후가 이홍장의 능력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의 세력을 두려워했다고 분석합니다(Hsü 1960: 204-5).

셋째, 반-외세 이미지는 서태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서구 세력의 지지를 받는 광서제와의 대립에서도 균형을 찾아야만 했던 서태후는 앞서 살펴본 두 사례만큼 이 균형 게임을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반-외세 이미지를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의화단 운동을 지지한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화단 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6 서구 국가의 선교사들이 주도한 철도, 교회, 학교 설립 등이 전통 조직과 충돌하면서 농민들이 외세의 “물질적 침략”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연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갈등이 있을 때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지방 관료들은 대부분의 경우 전자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갈등을 해결했습니다(Chang 2013: 260). 의화단 운동이 전통 조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자를 색출해서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고, 지방 관료들 역시 의화단의 영향력이 확산되는데 큰 제재를 걸지 않았습니다. 이에 외국 외교단과 선교사 집단은 적극적으로 항의하였고, 서태후는 친- 의화단 성향의 관료들을 해임하고 위안스카이와 북양군대를 산둥으로 보내 반란을 저지하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또한 1900 년 2 월에는 직례, 산둥 지방에서 의화단 활동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6 월 20 일에는 독일 외교관이었던 케텔러(Clemens von Ketteler)가 거리에서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다음날 전쟁을 선포한 측은 서구 국가들이 아니라 서태후였습니다. 서태후와 그의 측근들은 의화단이 중국에 거류하던 외국인들과 기독교 확산의 기세를 꺾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고, 동시에 반청 감정을 외세에 대항하는 청에 대한 지지로 바꾸고자 시도했던 것입니다.

서태후는 이와 같은 행보를 자신의 유일한 실수로 여겼습니다.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한 경험으로 영어 통역을 맡아 서태후를

17 보좌했던 유덕령의 기록에 따르면, 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궁 내에서 의화단 운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궁을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의화단 운동과 관련하여 어떤 말들이 오고가는지 유덕령에게 종종 물었는데, 그녀의 기록에 남아있는 서태후의 말을 옮겨보면, “...나는 지금까지 꽤 성공적이었으나 의화단 운동이 중국에 이렇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이는 살면서 내가 저지른 유일한 실수이다. 의화단을 저지하기 위한 칙령을 발표해야 했으나, 재의(Zaiyi)와 란공(Duke Lan)은 하늘이 해로운 외세를 제거하기 위해 의화단을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말합니다(Der Ling 1911: 357).

서태후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의화단은 합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서태후를 지지하던 장지동을 비롯하여 다수의 지역 대관들은 서태후에게 공격을 멈출 것을 간청하였고, 심지어 난징에서는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는 방안까지 논의되었습니다(Chang 2013: 278). 8 월 11 일 북경이 외세에 함락되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판단한 서태후는 2 차 아편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860 년 프랑스와 영국군을 피해 예허로 예상치 못한 귀향을 해야 했던 것처럼 1900 년 또 다시 자금성을 떠나 시안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이홍장과 위안 스카이는 서태후와 광서제가 부재한 북경에서 8 개국과 협약을 작성했고, 협상은 이듬해 9 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신축조약으로 인해 청은 39 년간 4 억 5 천만 온스의 은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미국에 보상하는 약속을 하게

18 됩니다. 협약 체결 후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어떤 방식으로 계속해서 균형력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녀가 남긴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 그 노력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균형 회복 노력의 흔적이 묻어있는 서태후의 얼굴

지난 5 월, 워싱턴에 출장을 다녀오신 하영선 선생님께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아서 새클러(Arthur M. Sackler) 갤러리에서 열린 “자금성의 황후들” 전시회에 서태후의 초상화가 걸려있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지금으로부터 114 년전 워싱턴의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서태후의 초상화가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던 것이 떠올랐고, 비록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미국의 눈에 비친 서태후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여 정보를 조금 더 찾아보았습니다. 위 전시회는 초상화를 통해 여성을 수동적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을 타파하고 여성들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전통에 도전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 이후 외국인과 기독교 신자들을 죽이는데 동조했다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본인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선보여졌습니다. 이는 서태후의 허영심의 상징이나 청 왕조의 사치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진과 초상화

19 자체는 스러져가는 왕조의 항구적인 상징성, 그리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지하는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라는 페르소나를 만드는데 동조했다는 설명입니다. 앞서 우리가 알아본 서태후는 균형을 유지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화단 운동의 결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비록 자신의 뜻을 과감히 내세울 때 실패했던 경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후의 균형력은 왕조 정치를 반세기 가까이 지속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약 일 년간 이화원과 자금성에 머문 칼은 고궁에서의 어느 하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늘은 금빛을 품었고, 그 빛나는 배경과 대조되는 탑은 검은 윤곽을 드리웠다. 아름다운 정적이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Carl 1909: 99).” 그러나 자금성은 그저 조용하기만 한 무풍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외세가 군대로, 그리고 문명표준으로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양면적으로 묘사되는 천의 얼굴 서태후는 균형력을 통해 왕조를 유지하는 단 하나의 청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외교 전략으로 사용된 사진과 초상화는 서태후의 자애로운 이미지가 국제적 명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계산이 포함된 결과였습니다(Dong 2017, Peng 2014: Fang 2006). 실제로 서태후의 초상화는 1905 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우호에 대한 감사의 표시, 그리고 미국 국민들의 복지와 번영을 기원한다는 서태후의 메시지를 포함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양국의 친선과 호의를 하나로 모으는 것에 대한

20 기념비적인 기록으로서 서태후의 초상화가 국가박물관에 걸릴 것이라고 회답하였고, 이는 올해 워싱턴에서 열린 전시회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장융은 서태후가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서구와 우호관계를 맺을 의지를 초상화에 투영했다고 해석합니다(Chang 2013: 310). 실제로 콩거는 서구에서 서태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세인트 루이스 전시회에 초상화를 선보이자고 제안하였습니다(Conger 1909). 청 내무부는 성용장을 설치하여 서태후의 사진과 그 내용 등을 전문으로 담당하도록 했습니다(Wang 2012: 128). 이러한 변화는 서태후의 국제적 위신과 이미지에도 파급효과를 가지고 왔는데, 왕은 오직 국제 규범을 따르는 것을 통해서만 손상된 위신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서태후가 사진과 초상화라는 수단의 유용성을 파악했다고 분석합니다(Wang 2012: 138).

21

그림 3 캐서린 칼, 휘베르트 보스, 청 전통 양식의 서태후 초상화를 겹친 모습
그림 3 캐서린 칼, 휘베르트 보스, 청 전통 양식의 서태후 초상화를 겹친 모습

(출처: 저자 편집)

22 나아가서 왕은 대청국의 수장으로서 서태후가 국제 외교와 정치에서 위신을 재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초상화를 이용해서 스스로에 대한 일관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의상, 자세, 장식품 등 작은 변화를 주면서도 반복을 피해서 일관적인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예를 들어, 사진의 크기는 상대의 중요도에 따라 다양하게 선보여졌습니다. 또한 손수건을 들고 있는 사진은 부채를 들고 있는 사진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합니다. 공식 의복을 입고 있는 사진은 국가 수장에게 전달되었고, 부채를 들고 있는 사진은 외교관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영빈관에서 찍은 사진은 마치 공식적으로 알현 과정에 있는 것처럼 의도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의 권위나 혹은 국가 수장으로서 정당성을 전달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Wang 2012: 142).

비록 저는 무엇이 서태후의 진짜 얼굴인지 아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녀의 다양한 초상화를 겹쳐보니 사진과 유사한 서태후의 얼굴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림과 사진의 이목구비가 닮아서라기보다는 서태후를 알아가면서 그녀의 눈에 비치는 균형력이라는 하나의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3

마치며

북경 답사 마지막 날, 삼고초궁을 통해 자금성에 입성한 저는 기념품 가게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서태후에 관한 책은 자수에 관한 연구와 백하우스의 책을 번역한 “자희외기”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청의 얼굴 서태후 치고는 참으로 소박한 흔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토론, 그러나 새로운 숙제를 선물해준 12 기 사랑방 동기들과 하영선
재미있는 토론, 그러나 새로운 숙제를 선물해준 12 기 사랑방 동기들과 하영선

선생님

24 동아시아 국가들은 시기만 다를 뿐 서태후처럼 서양 권역에서 몰려오는 파도를 고스란히 겪어내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국제정치학의 존재론적 고민은 전통천하질서와 근대국제질서가 공존하는 아태질서 건축사에서 지구 어느 곳보다 끈질기게 계속될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근대로 불리는 개화 그리고 전통의 고민은 서태후 뿐 아니라 한국의 국제정치학도인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을지로의 사랑방에서 공부하면서 동아시아 곳곳을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답사기를 마무리하는 지금, 하영선 선생님께서 북경 서우두 공항 한 켠에 전시된 청명상하도를 보여주셨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림은 너무나도 길어서 그 끝이 돌돌 말려있었습니다. 2019 년의 봄과 여름은 끝이 보이지 않던 기나긴 길을 이끌어주신 선생님을 그림처럼 따라 걸어본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25 참고문헌 Bland, J.O.P. and Backhouse, E. China Under the Empress Dowager.

Boston and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any, 1914.

Carl, Katharine. With the Empress Dowager of China (New York: The Century Co, 1907)

Chang, Jung. 2013. Empress Dowager Cixi: The Concubine Who

Launched Modern China. New York: Alfred A. KNOPF. Chung, Sue Fawn. “The Much Maligned Empress Dowager: A

Revisionist Study of the Empress Dowager Tz‟u-hsi(1835-1908).”

Modern Asian Studies 13-2 (April 1979).

Chung, Sue Fawn. “The image of the empress dowager Tz‟u Hsi,” in

Cohen, Paul A. and Schrecker, John E(eds). Reform in

Nineteenth-Century China.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Crossley, Pamela. “In the Hornets‟ Nest.” London Review of Books. 36-

8 (April 2014).

Conger, Sarah Pike. Letters from China. With Particular reference to the empress dowager and the women of China. Chicago: A.C.McClurg&Co,

1909.

26 De Bary, Wm. Theodore and Lufrano, Richard. 2000. Sources of

Chinese Tradition. Volume II.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Der Ling, Two Years in the forbidden city. New York: DODD, Mead

and Company, 1931.

Dong, Lihui. “The Way to be Modern: Empress Dowager Cixi‟s

Portraits of the late Qing Dynasty.”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Pittsburgh (2017).

Headland, Isaac Taylor. Court Life in China: The Capital, its officials

and people.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09. Fang, Shiou-yun. “Images, Ideas and Reality: Empress Dowager Cixi‟s

Self-Image and Western Understandings of Cixi.” PdD

Dissertation. University of Glasgow (2006).

Hsu, Immanuel C.Y. China‟s entrance into the family of Nations: The

Diplomatic Phase, 1858-1880.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Kwong, Luke S.K. A Mosaic of the Hundred Days: Personalities,

Politics, and Ideas of 1898.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Li, Yuhang and Zurndorfer, Harriet T. “Rethinking Empress Dowager

Cixi throught the Production of Art.” Nan Nü 14 (2012).

27 Liu, Lydia. The Clash of Empires: The Invention of China in Modern

World Making.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ang, Laikan. “Photography, Performance, and the making of Female

images in Modern China.” Journal of Women‟s History 17-4

(2005).

Peng, Ying-chen. “Staging Sovereignty: Empress Dowager Cixi (1835-

1908) and Late Qing Court Art Production.”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2014).

Rhoads, Edward J. M.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Seattle and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5.

Seagrave, Sterling. 1992. Dragon Lady: The Life and Legend of the Last

Empress of China. New York: ALFRED A. KNOPF.

Trevor-Roper, Hugh. Hermit of Peking: The Hidden Life of Sir Edmund

Backhouse. New York: Alfred A.Knopf, 1977.

Wang, Cheng-hua. ““Going Public”: Portraits of the Empress

Dowager Cixi, Circa 1904.“ Nan Nü 14 (2012). Yeophantong, Pichamon. “Governing the World: China‟s evolving

conceptions of responsibility.” The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Politics 6 (October 2013).

28 Zhang, Zhidong. China‟s Only hope: An Appeal.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00.

Zhou, Fangyin. “The Role of Ideational and Material Factors in the

Qing Dynasty Diplomatic Transformation.”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Politics 1 (2007).

https://www.freersackler.si.edu/exhibition/power-play-chinas-empress-

dowager/(검색일: 2019.07.15).

http://www.chinadaily.com.cn/life/2011-04/28/content_12415115.htm

(검색일: 2019.07.15).

29

← 뒤로 · ← 홈으로 ·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