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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조약의 비밀: 액자식 구성으로 분석한 조약체결 과정

EAI 사랑방 11기 규슈 답사기: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9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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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청강화기념관 · 손상용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사랑방 11 기 답사의 여정은 일청강화기념관에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일청강화기념관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좀 더 역동적으로 재구성 하는 발제를 준비했습니다. 즉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과정을 액자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액자식 구성이란 액자 내부의 조약 체결 과정과 더불어 외부에서 조약을 체결했던 행위자들이 작성한 외교 문서를 중심으로 행위자의 숨겨진 인식과 협상 전략을 복원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물론 개인적 능력의 부족과 언어적 제약으로 모든 외교 문서를 참고할 수는 없었지만, 청나라 이홍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의 숨겨진 인식을 추적하는 겸손한 출발점이라고 작은 변명을 하고 싶습니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던 1894 년부터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95 년 12 월까지로 설정했습니다. 참고자료는 주로 당대의 1 차 외교 문헌을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이홍장의 인식을 복원하기 위해 청나라의 외교문서와 더불어 이홍장과 총리아문 사이에 오갔던 외교 전보를 참고했습니다.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의 인식을 복원하기 위해 외교 비망록인 『건건록』과 당대의 일본 측 문서를 참고했습니다. 또한 2 차 문헌을 통해 1 차 문헌을 보완하고자, 이승만 대통령이 당대 사료를 취합하여 작성했던 『청일전쟁』과 중국 및 일본에서 발간된 역사서를 참고했습니다. 이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던 과거로 돌아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첫 만남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장면#1 이토와 이홍장의 첫 만남

1895 년 3 월 20 일 청나라 전권대사로 임명된 이홍장은 양아들 이경방을 포함한 참찬 11 인을 데리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합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가 서기관 6 명을 대동하여 이들을 맞이합니다. 물론 이홍장과 이토의 첫 만남은 1885 년 천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0 년이 지나서 재회한 양국 외교의 두 거인이 만나 나눈 대화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토: “중당(이홍장)”이 이번 황제의 명을 받드는 직책이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그치고 정의가 다시 통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영원히 화친을 이루면 두 나라에 이익이

많을 것입니다.

이홍장: “아시아에서 우리 두 나라가 가장 가깝고, 또 글이 같습니다.

최근에 잠시 다투었는데, 이것은 서로의 이로움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계속해서 원수지간으로 지내면 우리에게 큰

해가 될 것이며, 일본도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 서양 사정을 보면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이웃 나라와는 우호적으로 지냅니다.

우리 두 나라도 서양 사정을 참고하여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합시다.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면 아시아 황인종이 유럽

백인종에게 잡아 먹히고 말 것입니다.

이토: “중당의 말씀이 내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10 년 전에 내가

중당에게 권한 바 있습니다만, 어찌하여 오늘까지 정치를 한

가지도 개혁하지 못했습니까?”

이홍장: “귀 대신은 저와 만난 후 귀국의 좋지 않은 제도를 일제히

고쳐서 오늘과 같이 발전했으니 진실로 부럽습니다. 우리 청국은

과거의 제도에 젖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10 여년 동안 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참 부끄럽지 그지 없습니다.”

이토: “일본 국민은 청국 국민보다 다스리기가 더 어렵고, 또 의회가

중간에 있어 처신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첫 만남에서 이토와 이홍장은 양국 간 논쟁이 되었던 ‘전권위임장’ 문제를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강화조약 체결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협상 이전에 이홍장이 청일전쟁을 어떻게 인식했고, 청나라의 운명이 걸린 협상을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임하려 했었는지를 복원하고자 합니다.

이홍장은 청일전쟁을 세 가지로 평가합니다. 첫째, 일본이 유럽식의 육해군조직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동양의 황색인종도 서양의 백인 못지않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둘째,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오랜 깊은 잠의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국가 발전의 측면에서 좋은 경험이다. 셋째, 일본과 청나라의 협력은 동양이 유럽 열강들에 대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홍장은 전쟁에서 피배한 청나라의 외교적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전략을 고안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탁월한 국제정치적 감각이 돋보입니다. 일본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이홍장은 청나라를 위해 일본과의 정전 및 화친 조약이 필수적이라고 인식합니다. 실제로 딸인 이경숙에게 보냈던 서신에서 이홍장은 “일본과의 조약을 상의하는 일은 절차탁마가 필요하나, 아직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고, 총서 또한 근래의 일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며 조정과 총리아문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보여주었습니다 (김기효 2017).

무엇보다 이홍장은 서양 열강들을 이용하여 일본과의 협상에서 청나라의 협상력을 제고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협상에서 과도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을 예상하고, 서양 각국의 입장과 동향을 분석하며 일본과의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방안에 대해 고민한 것이지요. ‘의화 및 정전에 관하여 총서에 진술하는 글’은 이홍장이 영국, 러시아의 사신과 만나 면담했던 내용을 청나라 총서에 보냈던 문서입니다. 동 문서에서 이홍장은 청일 전쟁에 대한 서양 각국의 입장을 살피며 조언을 듣고, 러시아 사신과의 면담에서는 만약 일본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며, 조선의 영토를 일본이 점유하게 된다면 러시아의 입장은 어떤 것인 지를 물었다. 즉 이홍장은 서양국가들을 이용해서 일본의 과도한 협상 조건을 완화하고자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측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앞두고 어떤 인식과 전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세를 잡아 베이징으로의 진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일본은 전승국 지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청나라에 대하여 유리한 강화조건을 제시하려 했었죠. 하지만 동시에 일본은 동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서양 열강들의 간섭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경 진군 여부를 두고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모토와 정치부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큰 갈등을 빚습니다. 이토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일본은 청국이 아니라 서양 열강들과 강화조약을 협상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안건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토와 무쓰의 흉상
이토와 무쓰의 흉상

서양 열강의 간섭에 대한 일본의 우려는 내각에서 작성한 강화 조약 초안을 구미 각국에 미리 통보할 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에서도 나타납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강화 조건의 내용을 미리 암시하여 구미 각국의 묵인을 얻어내자고 주장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의 조건을 청일 두 국가 사이에만 제한하여 제 3 국이 사전에 간섭할 여지를 제거하자고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이토 총리의 채택되었지요. 이와 같은 두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은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강화 조건을 제시하고자 하는 욕망과 국제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서양 열강의 개입을 방지하고자 하는 이중적 인식을 보입니다.

협상 당시를 복원한 그림
협상 당시를 복원한 그림

이러한 사전 준비 과정을 거쳐 시작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무쓰는 이홍장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이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제일인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또한 이홍장의 논조가 일본의 동정심을 끌어내면서 간간이 칭찬과 혹평 혹은 악설까지 섞어가면서 패전국인 청나라의 굴욕적인 지위를 덜려고 노력하는 지략을 높게 평가하기도 합니다(무쓰 무네미쓰 1994).

장면#2 이홍장 피격사건과 협상의 전환점

1895 년 3 월 24 일에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제 3 차 회담이 개최됩니다. 기존의 두 차례 회담에서는 ‘휴전논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 하고, 논의는 ‘강화조약 체결’로 전환됩니다. 하지만 제 3 차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홍장이 한 일본인 낭인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대에 발간되었던 영자신문은 급박했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홍장이 회의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일본 사람 한

명이 사람들의 무리에서 뛰쳐나와 권총을 발사하여 이홍장을

저격한 후 달아나다 순경에게 붙잡혔다. 이홍장은 탄환이 왼편 눈

아래 깊이 들어가 중상을 입었다. 가마꾼이 자객을 보고 놀라

움직이지 못 하고 방황하자 경찰들이 칼을 휘둘러 구경꾼들을 모두

쫓은 다음 가마를 호위하여 여관에 도착하여 침실로 업고 들어가자

이홍장이 혼절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위의 사건은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은 천황이 직접 조칙을 내리며 일본 황실의 사과를 표현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같은 사건을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책을 설계했을까요? 먼저 이홍장의 인식을 복원해보고자 합니다. 이홍장은 피격 사건이 협상 국면을 전환하고, 일본이 내세운 과도한 조건을 조금은 완화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피격 직후 “내 비록 목숨을 버릴지라도 국사에 도움이 된다면 이 목숨 아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인 의사가 수술을 권유하자 “지금 나라에 중요한 일이 많아 한 시라도 강화를 지체할 수 없다. 내 어찌 사사로운 일로 지체하여 국사를 그르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홍장의 예측과 같이, 해당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배상금을 2 억 냥으로 감축하고 미루어 왔던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홍장이 피격되었던 길 안내표시
이홍장이 피격되었던 길 안내표시

그렇다면 일본은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했을까요? 요약하자면 일본은 해당 사건의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파급력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청나라에

대해 조금 온건한 입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변화는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무쓰는 국내적으로 이홍장에 대한 연민의 태도가 급증한 것을 바탕으로 국내적 여론이 세계적 여론으로 확장되어 협상이 난항에 빠지지 않도록 확실한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인식합니다. 이러한 고민은 비단 무쓰 뿐만 아니라 일본 내부의 주요 관료들도 공유하고 있던 것이며 그들은 동 사건이 일본의 국가 이익에 큰 해를 끼칠 사건이라고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크게 화를 내며 “그 죄인이 강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나를 쏘는 것이 옳지 어떻게 청국 사신을

살해하려고 했는가. 강화는 내가 제안한 것이며, 청국 사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이번 일은 비록 미친 사람이 저지른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명예에 큰 타격을 주었다. 만약 나를 죽였다면 문제가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군부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범인이 국가의 대사를 생각하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며 책상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승만 2015)..

국제정치적으로 일본은 이홍장 피격사건이 서구 열강들의 간섭을 촉발할 수 있는 도화선이라고 인식하며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합니다. 무쓰는 현재와 같은 의례적인 대응은 협상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파격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휴전문제’에 대해 일본이 양보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합니다. 무쓰의 제안은 이토의 승인으로 이어지고, 회담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강화조약 체결의 ‘조건’과 ‘기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래는 무쓰의 인식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글입니다. 만약에 이홍장이 단순히 그의 신체상의 부상을 구실로 중도에

귀국하여 통렬하게 일본 국민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교묘하게 구미

각국을 유도하여 재차 그들의 중재를 요구하게 되면, 적어도 유럽의

두서너 강국의 동정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만일

유럽 강국들의 간섭을 초래하게 된다면 우리의 청국에 대한 요구도

또한 많은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현재 교전하고 있는

양국 중 특히 승자인 우리 국내에서 적국의 사신을 대우하는 데

상당한 보호와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은 국제공법상의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변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만에 하나 사회의

감정이 움직이게 된다면, 이러한 분위기를 단순한 어떤 이론으로

무마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무쓰 무네미쓰 1994).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쓰는 서양 열강들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1895 년 3 월 24 일에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의 해외 대사관에 상황을 설명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일본이 국제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동정 여론의 형성과 양국의 협상에 외국이 개입하는 것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결과적으로 이홍장 피격사건은 청나라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상당 부분 감축했고, 합의되지 못 했던 휴전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즉 총알 한 발이 일본과 청나라의 국익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죠.

장면 #3 협상의 난항과 숨은 전략

제 4 차 회담은 이홍장의 치료를 고려해서 일정보다 연기된 후 개최되었어요. 제 4 차 회담에서 일본은 청나라에 배상금, 영토 할양 그리고 일부 지방에 대한 일본의 점거를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청나라는 일본 측이 제시한 과도한 배상금과 더불어 서양 강대국들이 영토 할양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들어 거부하죠. 하지만 이토는 일본이 제시한 조건에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음을 강하게 전달하며 이홍장을 압박하고 결국 아래와 같이 제 5 차 회담이 개최됩니다.

<장면#4 제 5 차 회담> 이홍장: 황제로부터 지(旨)를 받았는데, 본 대신에게 이번 일을 헤아려

처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처리하기 어려우니, 귀 대신이

나를 대신하여 헤아려 주기 바란다. 나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이토: 내 처지도 중당과 비슷하다. 중당은 중국에서 지위가 높아, 누구도

지위에 도전할 수 없다. 본국은 의원의 권한이 중요하여, 내가 실을

잘못 처리하면 곧바로 비판을 받는다.

이홍장: 내가 일본의 이토 수상과 친분이 좋다며, 작년에 나를 여러 차례

탄핵하였다. 지금 당신과 의화를 체결하고 있는 것이 어찌 친분의

증명이 아니겠는가? 이토: 시대의 형국을 그들이 몰라서 중당을 탄핵한 것이다.

이홍장: 이처럼 모진 조약에 서명을 하면, 또한 반드시 나를 욕할

것이다. 어찌하란 말인가?

이토: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이처럼 중요한 일은 중국에서는 중당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이홍장: 분명 조약 체결 후 나를 비난할 것이다. 귀 대신이 나를

대신하여 잘 생각해서, 배상금과 영토할양 두 가지에 대해서 양보를

해 줄 것을 청한다.

이토: 처음에도 말했지만, 조금의 양보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홍장: 일전에 헤어질 때 5 천 만의 감액을 청했는데, 그때 귀 대신은

그럴 의사를 보이지 않았는가? 만약 양보가 가능하다면, 전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 이미 양보를 하였다.

(중 략) 이홍장: 일본 병사들이 철수한다면, 의약은 반드시 비준될 것이다. 이토: 만일 비준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홍장: 비준이 되면 즉시 전보로 통지하겠다.

이토: 전보는 영어로 하되, 비밀부호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환약의 시기와 장소를 정해주어야 한다. 의약 체결 15 일 이내로

청한다. 이홍장: 15 일로는 부족하고, 1 개월로 하자.

이토: 우리 병사들은 너무도 많아서 1 개월을 머무르기에는 너무 길다. 이홍장: 1 개월이 아니면 어렵다.

이토: 3 주로 하자.

위에는 제 5 차 회담의 녹취록이 제시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협상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서 이홍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의 인식을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로 나누어 분석해 보겠습니다. 국내정치적으로 이홍장은 조약 체결의 성과와 관계 없이, 자신에 대해 돌아올 국내정치적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청나라 내부에서 이홍장의 최대 정적이었던 양강총독 짱즈뚱은 탄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천하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청나라 백성들의 비판 여론은 폭발했으며 심지어 반제국주의와 반기독교 투쟁으로 변질되고, 랴오난과 타이완 백성들은 기독교회당과 천주교회당을 방화하기도 합니다(왕사오팡 2018).

그렇다면 이홍장은 국내정치적 여론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웠을까요? 이홍장은 제 5 차 회담 이후 이토가 제시한 4 일 기한부에 대해 청나라 총리아문에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며 최종적으로 이토가 제출안 수정안에 조인해도 될 지 혹은 조정에서 다른 훈령을 줄 지를 지속적으로 물었습니다(이승만 2015). 아래 이홍장과 총리아문 사이에 오갔던 전보들을 확인한다면, 이홍장이 최종적인 조약 체결의 승인권을 조정에 넘기고, 자신이 처한 상황의 급박함을 전달하고자 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국내정치적 여론의 반대를 인지하고 있었던 이홍장의 입장에서 비록 전권위임대사로 파견되었지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상황을 조금이나마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죠.

<이홍장과 총리아문 사이의 전보 재구성> 4 월 11 일 (이홍장 →총리아문)

“어제 이토와 면담했으나 그 어투가 이미 결정된 것으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오늘 또 송치되어온 서한은 최종적인 결의를

표시한 것 같다. 따라서 다시 얼마만큼 양보할 것인가를 속히

훈시해주기 바람.”

(총리아문→이홍장)

“이토의 재촉이 심한 듯하니 만약 다시 협상할 길이 없으면 귀관은

한편으로 그 뜻을 전신으로 보내주고, 한 편으로 조약을 체결할

것이나, 귀관이 명령을 받고 나서 안심하고 논쟁을 하더라도 결코

파열의 국면에는 이르지 않도록 하게 하라” 4 월 14 일 (이홍장→총리아문)

“내일 오후 4 시에 만나 의정할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면

담판은 순조롭지 못하게 될 것이며 사태 또한 매우 중대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요구대로 승낙한다면 경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일이 의외로 번질 수가 있으므로, 이제 전훈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총리아문→이홍장)

“먼저 훈령한 것은(12 일 총리아문이 이홍장에게 전보를 보내어

일본 측 요구 중 아직 더 경감시킬 수 있도록 하라고 한 내용을

가리킴) 그 뜻이 일분이라도 다투게 되면 그 일분에 투자한 만큼의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지만, 더 이상 협상을 바꿀 수 없다면

이전에 지시한 훈령대로 조약에 조인하라”

국제정치와 관련하여 이홍장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비준 기간을 최대한 연장할 수 있다면, 주변 서양 강대국들이 개입할 여지를 조성해서 일본을 일정 수준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했어요. 즉 위의 제 5 차 회담 녹취록에서 이홍장이 조약의 비준기간을 최대한 연장하려고 했던 해답이 여기 존재해요. 실제로 그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전권대사로 파견되기 전부터, 청나라 내부에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 방안을 모색하였답니다. 1894 년(광서 20 년 9 월 14 일) ‘러시아 사신 객(喀)과의 문답 요약 첨부’를 참고한다면 이홍장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김기효 2017). 이홍장은 중국 주재 러시아 사신 아르투르 파블로비치 카시니(Arthur Pavlovitch Cassini)와의 면담에서 일본과의 정전 문제에 대해서 “만일 객 대인이 귀국 정부가 일본 동경주재 러시아공사에게 명령하여 일본 외부와 상의토록 요청한다면, 더욱 직접적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러시아를 이용해서 일본과의 정전협정을 최대한 유리하게 추진하고자 했어요. 동 문서에서 이홍장은 일본인을 “매우 교활하고 농간을 부리는 사람”으로 표현하며 일본이 서양 국가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또한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게 된다면 프랑스가 월남( 越 南 )을 점령한 것과 같이, 추후에 중국과 러시아 양국이 조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 큰 지장이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 사신의 불안감을 자극하며 서양 열강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는 외교전략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마무리하며,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과 청나라를 대표하는 두 외교 관료인 이토와 이홍장에 의해 조인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은 동아시아 질서에 큰 변곡점을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죠. 첫째,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둘째, 청나라가 통치하던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그리고 펑후 제도는 일본에 양도됩니다. 셋째, 청나라는 일본에 2 억 냥을 보상했으며 양국 간의 무역을 규율하는 새로운 근대적 조약이 체결됩니다.

하지만 결론을 대신하여 마지막 단락에서는 1 차 문헌의 부재로 심도 있게 다루지 못 했던 조선의 인식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시모노세키 조약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두 가지 1 차 자료를 참고해보죠.

첫째, 『대한계년사』는 고종의 인식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한계년사 2 권 을미년(1895) 고종 32 편은 ‘독립경축일을 정하도록 지시하다’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이 완전한 독립을 얻어냈으며, 더 이상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고종의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정교, 2004). 또한 대한계년사는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대해 패배한 이유와 시모노세키 조약의 중요 조항에 대해 아래와 같은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1895 년 3 월: 청나라의 전쟁 패배 이유>

청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연달아 패배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 18 개 성(省)의 영토를 지키는 신하들이 영토는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핑계대면서 북양(北洋)이 궤멸되는 상황을 앉아서 보고만 있었다.

하나, 관리의 일 처리이다. 청나라의 포대와 포함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쌓은 모래성과 흡사해서, 발로 차버리자 곧바로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청나라의 해군과 육군은 진을 치고 싸우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군량은 급속히 떨어지고, 무기에는 이끼가 끼었다. 싸움터에 나서서는 배가 고파서 단지 백성의 재물을 빼앗을 생각만 품었다. 적을 마주 대해서는 무서움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오로지 달아나 숨어서 목숨을 보존할 궁리만 했다.

하나, 수십 년간 정열을 들이고 20 개 성의 알짜배기만을 모아서, 비로소 갖추고 마련한 씩씩한 군대의 위용과 정예 무기를 하루아침에 모조리 적병에게 넘겨버렸다. <1895 년 3 월: 시모노세키 조약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

이때에 청나라에서 파견한 대신 이홍장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 화친을 애걸했다. 일본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 대신 무쓰 무네미쓰에게 명령하여 3 월 23 일 <양력 4 월 17 일이다> 시모노세키에서 회동을 갖고 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그 중 중요한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 1 관 조선은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갑오년(1894) 10 월 25 일 청나라는 이미 성명을 통해 조선은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제 2 관 청나라는 장차 봉천성 남쪽 지방 일대와 대만 전체 및 그에 부속한 여러 섬 그리고 팽호열도를 일본에게 떼어 준다.

제 4 관 청나라는 일본에게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 2 억만 냥을 지불한다.

제 6 관 일본은 청나라 호북성 형주부 사시, 사천성 중경부, 강소성 소주부, 절강성 항주부에서 통상한다.”

4 월 8 일에는 강화조약을 비준했다. 얼마 안 있어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 세 나라가 일본에 말하기를, “일본이 요동(遼東) <바로 봉천성 남쪽이다>을 점거하면 동아시아는 영원히 평안치 못할 것이니, 청나라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좋겠다” 했다. 일본이 그 말대로 따랐으며, 청나라는 은 3 천만냥으로 보답했다. 둘째, 1895 년 1 월 7 일에 반포된 ‘홍범 14 조’는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명시하며 종묘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포한 문서입니다. 홍범 14 조의 도입부에는 “지금 이후로는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나라의 기운이 융성하며 신민이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누려서 자주 독립의 기초를 완전하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며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 독립의 기틀을 다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기점으로 청나라의 천하질서를 탈피하여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고 인식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위한 야욕이 드러난 결과물이었죠. 즉 일본은 ‘조선의 지위’를 문제 삼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서 조선을 병합하고자 했던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갑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 1 조는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을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위한 첫 단추였던 것이죠. 홍범 14 조도 조심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한국의 자주적 개혁이 아닌 일본의 각본에 의해 추진되었던 개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실제로 홍범 14 조의 입안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와 내부대신 박영효의 입김이 상당히 존재했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경쟁 속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의 의의를 완벽하게 오판했어요. 동시에 조선은 동아시아 질서가 청나라의 천하질서에서 일본의 근대 국제질서로 이행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더딘 대응으로 일관합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아픈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죠. 이제 암울한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 동아시아는 중국과 미국이 건축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청일전쟁 시기의 시모노세키 조약에 대한 오판과 외교적 실패를 넘어 미중 세력경쟁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외교적 방안 마련에 모든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의 국익을 위한 치열한 외교적 협상과정은 외교 관료가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가의 생존을 걸고 협상하는 강대국 외교 관료들의 모습을 보며 중소국인 한국의 외교적 역량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21 세기에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외교 전략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각축 속에서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외교가 무엇일지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외교관료가 되고자 하는 저는 일청강화기념관을 떠나면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참고문헌 1 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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