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
규슈에서 아시아의 미래를 꿈꾸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나가사키 구라바엔 · 강민아 · 이화여자대학교
구라바엔을 찾아서
구라바엔(グラバー園, Glover park)은 나가사키시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메이지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문화유산지구입니다. 저희가 방문한 날은 우연히 ‘빛의 왕국’의 컨셉으로 야간개장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일정을 변경해서 배를 먼저 채우고 해가 지고서야 구라바엔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구라바엔이 위치한 미나미야마테 언덕은 19 세기 외국 상인들이 살았던 과거의 거리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시간이 늦어서 모든 거리의 상점들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거리는 어두웠습니다. 낮 시간 동안 스스로가 원조임을 자랑하며 시끌벅적 사람들을 매혹했을 카스테라 상점들은 한결같이 불을 끄고 조용히 거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싸늘한 공기만큼이나 아쉽게 느껴지는 한편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가습이 설레었던 것 같습니다.
‘구라바’라는 명칭은 19세기 말 나가사키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상인인 토머스 브레이크 글로버(T.B. Glover, 1838-1911)에 게 서 따 온 것 인 데 , 시 에 서 주 최 한 ‘나가사키 메이지 마을(長崎明治村)’의 이름을 짓는 공모전에서 선정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글로버라는 인물이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듯합니다. 구라바엔은 글로버의 옛 주택을 중심으로 19세기 메이지유신과 관련 된 여러 건물들이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1991년에는 일본의 주요 전통 건물 보전지구로, 2015년에는 세계유산으로 등록 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현재는 나가사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9세기 일본이 근대화를 경험했을 그 당시의 숨결이 간직된 채, 21세기에도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구라바엔 답사를 준비하며 가장 마음이 이끌렸던 부분은 과거의 청년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일본’에 대하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었습니다. 저희가 19세기 일본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구라바엔에 방문하는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것처럼 어쩌면 그들은 훨씬 더 절박한 심정으로 이곳에서 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열을 내며 토론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가사키는 일본의 오래 된 대외창구로서 서구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활발히 이루어진 장(場)이었고, 글로버는 외국인 상인으로 대외문물에 해박하며 일본 내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있었던 만큼 그의 저택은 변환의 시대 앞에서 꿈틀꿈틀하는 무언가를 느끼던 청년들이 모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글로버의 아내 쓰루가 사용하던 부인방 복도의 천장에는 창문 없는 비밀의 방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 글로버와 사카모토 료마(坂 本 龍 馬 , 1835-1867)의 밀회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료마는 메이지유신의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던 삿쵸동맹(薩 長 同 盟 )의 주역으로서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으로 기억되고 있는 만큼 구라바엔에서의 료마와 글로버의 만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해 알려진 바는 이들이 1965년 무기거래 협상을 타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번 여정에서는 비밀의 방에서 이루어진 글로버와 료마, 두 인물의 만남을 추적하여 그들이 변환의 시대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회와 호기심, 신념, 그리고 정치적 선택들을 함께 호흡해보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무대, 19세기 나가사키
막말기 일본의 대외적 상황, 서세동점의 충격과 나가사키 두 인물의 만남의 무대가 되었던 19세기 나가사키는 대내외적인 격변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1865년에는 외세와 일본, 막부와 번 사이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 근대적 무기거래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상승한 시기였고 두 인물은 바로 이 시점에 인연을 맺게 됩니다.
대외적으로 19세기는 1840년 중국에서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쓰나미가 동아시아 세계에 밀려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서구 열강은 함포외교를 통해 일방적으로 개항하도록 압박하였고 이렇게 맺어진 서구와의 불평등 조약에 따라 동아시아의 외교 질서는 근대적 조약체계에 편입 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동아시아는 독자적인 중화(中 華 )질서의 문명권을 오랜 세월 구성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름의 균형과 풍요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서구열강의 등장은 새로운 ‘문명의 표준’을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것이었고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운명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일본 또한 중국을 문명의 표준으로, 그리고 중화문명권 바깥의 존재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적인 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상대적으로 중화문명권의 주변부에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특징이나 사대부가 아닌 무사계급, 즉 사무라이가 지배층이었다는 특수한 정치적 요건으로 인해 일본의 화이(華夷)관념은 중국의 그것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植 手 通 有 , 1971). 따라서 일본은 전통적 문명질서보다도 대내외적인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현실적 안목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흔적을 나가사키 해안에 위치한 데지마(出島)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근대적 조약체계가 맺어지기 이전부터 네덜란드와의 대외 무역 및 교류가 지속되었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도쿠가와(徳川) 막부 정권은 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인공 섬 데지마를 만들었고 외국인 방문객들은 여기에서 거주하면서 교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관리들도 공무상 용건에 한하여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막부는 데지마의 출입을 엄밀히 규제하여 대외교역을 전면 통제하는 동시에 서구에 대한 호기심의 창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나가사키는 데지마에서 전개 되었던 기왕의 대외교류 양상과는 큰 차이를 보이며, 이때부터 일본의 대외관 또한 본격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과거 데지마를 오가던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막부 관료에게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보였던 반면 19세기 영국 영사는 관료들에게 소집 명령을 임의로 내릴 수 있었습니다(Sidney Devere Brown, 1993). 이러한 변화는 나가사키에서 막부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대외교류를 감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에 일본은 체결된 ‘조약’의 내용에 따라 서구식 외교관 및 영사제도, 자유무역, 관세,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를 수용하여 교류 및 통상의 문제를 풀어가야 했습니다. 또한 이무렵부터 경제적,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항구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19세기 나가사키는 본격적인 근대적 국제정치의 무대로서 재구성 되었던 것입니다.
막말기 일본의 대내적 상황, 존왕양이의 대두와 근대적 군제개혁
한편 이러한 국제정치적 패러다임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당시 일본의 대내적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1853년 페리제독의 등장 및 개항 요구 이후 각 지역, 즉 번(藩)의 다이묘(大名)들 사이에서 개국과 쇄국의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막부는 이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막부에 대한 번의 신뢰도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외세에 대항하여 일본의 중심을 보다 굳건하게 하고 일본 전통의 가치를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수백년 동안 상징 권력에 머물러 있었던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천황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혼란이 극적으로 표출 된 사건으로서 1864년의 금문의 변(禁 門 の変 )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천황을 높이고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는 ‘존황양이’(尊 皇 攘 夷 )를 주장하는 조슈(長州)번이 쿄토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인 것으로 개항 이후의 막부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란은 사쓰마(薩摩)번의 군대가 막부 측의 선봉에 서면서 조슈 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번(幕藩) 체제에서 가장 세력이 큰 번들이었고 막부는 어느 한 편이 문제를 초래할 때마다 다른 상대와 힘을 합세하여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패권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도 막부가 천황의 안위를 명분으로 삼아 사쓰마 번을 끌어들여 조슈번을 막아낸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쓰마번 내부에서도 ‘양이론’보다는 조정과 막부, 그리고 번의 통치력을 합해야 한다는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의 입장이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막부의 편에 섰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쿄토는 불바다가 되어 20,000호 이상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반역을 주도한 조슈번은 조정(朝廷)의 적, 조적 (朝 敵 )으로 낙인 찍혔고 이는 번 바깥과의 교역 및 거래 또한 금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조슈 군의 퇴각 이후 막부는 곧바로 변란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35개의 번에서 약 15만명을 동원하여 조슈 정벌을 나섰고 이는 막말기의 최대의 내전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교토 내에서 조슈 떡(長州おはぎ)이 폭발적으로 팔리면서 곤경에 처한 조슈 군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로부터 개국과 쇄국을 둘러싼 거대한 전환기적 위기상황에서 이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5년, 조슈번과 막부 사이의 갈등이 근대적 군제개혁의 경쟁으로 나타나면서 무기거래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상승하였습니다. 조슈 군은 쿄토에서 후퇴한 직후 시모노세키(下関) 항구에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4개국의 함대와 맞부딪치는 바칸전쟁(馬関戦争)을 겪으면서 현실적으로 양이의 시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이들은 뛰어난 근대적 기술력 앞에서 외세의 배척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군제개혁을 통해 막부에 대한 군사적 대항력을 키우는 것이 전략적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조슈는 외부와의 거래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선 무기를 입수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한편 막부 또한 바칸전쟁 이후 배상문제를 둘러싸고 시모노세키의 개항 혹은 배상금 지불의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부족했지만 한편으로 조슈번의 무기거래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시모노세키의 개항이 더더욱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막부는 프랑스의 권유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막부 권력을 보호하는 한편 막부와의 독점적 거래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일본 시장을 둘러싸고 경쟁하던 영국을 제치고 막부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1865년의 무기거래, 글로버와 료마의 만남
토머스 브레이크 글로버, 바다를 건너
글로버는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개항한 바로 다음 해인 1859년도부터 일본의 대외 교역에서 활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해안 도시에서 태어나 명성 높은 김나지움에서 교육 받았으며 휴일에는 해안 경비대인 아버지에게 항해기술을 전수 받았습니다. 눈 앞에서 펼쳐진 드넓은 바다는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의 궁금증을 매혹했을 것이고, 드높은 긍지와 도전정신을 중시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교육은 그가 실제로 새로운 여정을 떠나도록 추동했을 것입니다.
그는 극동지역 무역으로 유명한 자르딘 마티슨 상회(Jardin & Matheson co.)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의 상해에 머물렀습니다. 상해는 이미 서구와의 교역이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었고 자르딘 마티슨 상회는 당시 3대 상품인 비단, 차, 아편 무역으로 상당한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일과 술, 그리고 매춘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가운데 만나게 된 케네스 맥킨지(Kenneth Mackenzie)를 따라 다시 새로운 여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분명히 대외교역의 블루오션이었지만, 그만큼 외국인 상인에게는 불안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개항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습격 및 살해 등의 혐오 범죄가 빈번히 나타나기도 하였고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장소는 여전히 데지마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맥킨지의 하수인으로서 그의 경력을 쌓아가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였습니다. 그는 데지마에 첫 번째 터를 잡고 외국인에게 적대적으로 간주 되던 젊은 사무라이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교역의 확산을 규제하는 막부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무라이 사이에서도 대내외적으로 독단적인 행보를 보이는 막부에 대한 반발심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杉 浦 裕 子 , 2012). 어린 나이에서부터 고향을 떠나 발 딛고 살아갈 곳을 찾아다닌 그는 타지의 동년배인 사무라이들과의 관계 에서 강한 유대감을 경험했던 것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같습니다. 이후 그는 이러한 그와 사무라이들 간의 정서적 교류를 토대로 일본정세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직간접적으로 막말기의 정치 상황에 개입하게 됩니다.
1862년 맥킨지가 상해로 떠난 이후 글로버는 자신의 이름을 걸어 자르딘 마티스사의 대리점인 글로버 상회(Glover co.)를
사진 1. 구라바엔에서 보이는 야경 설립했습니다. 그는 차와 비단 무역을 시작으로 상회의 규모를 키워갔고 1863년에는 미나미야마테(南 山 手 ) 지역에 글로버 저택을 세워 나가사키 중심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시내에 그의 활동 본거지를 마련한 것입니다.
미나미야마테의 언덕을 올라 글로버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서 고개를 돌려보면 상당히 높은 고도에 새삼스레 놀라게 됩니다. 특히 어두워진 나가사키의 시내는 신기할 정도로 고층 건물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유난히 작은 조명들이 야경을 이루고 있어서 이곳에 서있는 스스로가 무언가 신성한 존재라도 되어 시내를 ‘굽어보는’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다른 편의 깜깜한 바다 또한 완벽한 풍경을 위해 그곳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구라바엔에서 보이는 전망은 계속해서 변했겠지만 그래도 밤의 풍경은 과거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글로버도 이곳에서 나가사키를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구라바엔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글로버의 환영과 19세기의 나가사키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 그가 19세기 말의 특정 국면을 전면적으로 대변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당대에 처해있던 복합적인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는 그토록 사무라이들의 소식통을 통해 당시 막부정권의 대내외적 갈등과 번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일본 정세에 귀를 기울이던 것일까요. 이러한 그의 정치적 관심이 무역상으로서 거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인지, 혹은 ‘scottishi samurai’로서 막부정권을 타도하고 더 나은 일본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대영제국의 국민으로서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일본 정국에 개입하고자 한 것인지에, 여기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Sidney Devere Brown, 1993). 그는 막부의 타도를 주장하는 사무라이들과 교류하며 스스로를 “도쿠가와 막부의 반역자 중에서도 나는 최대의 반역자이다(McKay Alexander, 1993)”라고 표현하는 한편, 막부와의 교역에서 얻었던 실리를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글로버가 영일관계를 조정하는 데 있어서 실제로 주요한 역할을 도맡았었던 대목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대일외교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제정치적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프랑스는 바칸전쟁 이후 막부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에 반해 영국 공사인 해리 파크스(Harry Parks)는 막부권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조정, 막부, 번의 혼란 속에서 자유무역을 확장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1864년 글로버는 팍스가 사쓰마 번에 위치한 카고시마(鹿 児 島 )에 방문하도록 중개하는데, 이 회담 이후 영국은 막부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번의 세력에 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대일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영국 측에서도 번 세력이 ‘양이’의 비현실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막부의 무역독점에 대한 불만이 높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결국 글로버의 개입으로 영국은 막번 체제를 둘러싼 일본 정세에 예리하게 대응하고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대외 전략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로버는 대내외적 격변 속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야욕이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겠지만, 청년시절 그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였던 1863년 조슈에서, 1865년 사쓰마에서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이 영국에 다녀오도록 비밀리에 힘 썼던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막부정권은 번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기에 이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시도를 기획한 것은 그의 야욕이 경제적 실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막부정권에 대한 비판의식, 젊은 사무라이 들에 대한 동류의식과 기대, 그리고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감 등에 걸쳐 있으며 혼란스러운 시대만큼이나 복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영국으로 떠나게 된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을 ‘살아있는 기계(生 きたる機 械 )’라 칭하며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가는 데 헌신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선원으로 변장하여 아편 선박에 밀항하는 등 막말기 일본의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기본적으로 존황양이를 마음에 품고 전통적인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사무라이들이 런던에서 증기 기관차와 같은 근대 기술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혼란을 지금으로서는 감히 가늠해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키워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조슈에 파견 된 조슈5걸의 경우 최초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초대 내각총리 대신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폐국장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철도국장관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그리고 지금의 동경대학 공학부의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설립자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로 성장하여 메이지 일본의 다양한 위치에서 제각기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 번을 탈주하여 1862년 사카모토료마는 난학(蘭學)의 전문가이자 미국의 외교 사절단이었던 가쓰 카이슈(勝海舟, 1823-1899)를 암살하려 합니다. 당대 젊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막부와 외세에 대한 불만이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 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었고 료마 또한 이러한 대열 속에서 칼을 갈았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료마는 카이슈와의 만남으로 오히려 현실적인 대외 정세에서 부국강병을 위해 ‘개국’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카이슈는 개국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특히 해군력을 갖추어 인근의 아시아 국가들과 연합하여 서구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이는 막부가 아니라 국가 공동의 이해를 위한 것으로 그는 번과의 교섭에 적극적이었고, 번의 구분 없이 인재를 발굴하였습니다. 료마는 이처럼 시대를 앞선 파격적인 기획에 매료되었습니다. 칼을 들고 카이슈를 찾아가던 료마는 시대의 복합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한층 더 성숙해진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사(土佐)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였습니다. 1850년대부터 일본사회는 서양 세력의 위협에 맞서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전통무술이나 검술 도장이 대거 운영 되었습니다(Jansen, Marius B, 1961). 이는 사무라이 정신의 전통을 강조하는 반(反)개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료마 또한 학업에 매진하기보다 검술 도장을 다니며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와 어울렸고 19살에는 검술을 수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에도(江戸)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54년 페리제독의 흑선이 출현하면서 젊은 사무라이 층에서 외세에 대한 반발심이 더욱 강해지고 존황양이의 정서가 널리 확산 되었습니다. 서구 오랑캐의 유입과 막부 고위층의 타락에 대한 분노, 그리고 천황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이라는 사무라이 특유의 명료하고도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이 젊은 사무라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1862년 가쓰 카이슈를 찾아가기까지 료마는 존황양이를 마음에 품는 한편 도사 번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크게 방황한 듯합니다. 그가 존황양이를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당면했던 신분제 앞에서의 주장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는 그가 1862년 위험을 감수하고도 번을 탈출하여 국가 무대에서 설 자리를 찾도록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카이슈와의 만남에서 그가 개국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그가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우유부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의(大義)에 대한 꿈과 열정 속에서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64년 막부는 가쓰 카이슈를 해임했습니다. 금문의 변과 바칸전쟁 이후 막부 내에서 막부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파가 힘을 얻으면서 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고 번의 낭인들과 어울리는 카이슈가 눈에 걸렸던 것입니다. 료마 또한 새로운 길을 다시 찾아야 했고 카이슈의 소개로 인연이 있는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에게 신세를 지게 됩니다. 당시 사이고다카모리는 조슈 정벌에 가담하고서도 공무합체론에서 구상했던 번의 협의체 구성이나 쇼군(将軍)의 기득권 양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막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막부가 외세와의 교역에서 이윤을 독점하는 한 편 사쓰마 번의 재정상황은 악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막번 체제, 새로운 대외 관계의 방향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료마가 사쓰마 번을 방문한 것은 료마에게도 사이고 다카모리에게도 일본의 미래를 그려가는 데 있어서 큰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1865년 료마와 일행은 카고시마를 경유하여 나가사키로 떠났습니다. 일행들은 대부분 카쓰카이슈가 만든 해군조련소의 수련생들로 해군력을 갖추어 막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료마는 그들을 이끌어 나가사키에서 무기거래의 중개와 물자 운반 등으로 이익을 얻는 한편 막부를 타도하는 데에 힘을 더할 수 있는 무역회사이자 정치단체인 카메야마샤츄 (亀山社中)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주주로 끌어들여 양번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유력한 번의 성장이 막부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는 동료들 앞에서 새 정부가 수립되면 이를 국책회사로 발전시켜 더 넓은 바다에서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할 것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는데, 이는 힘의 정세를 통찰하는 예리함, 권력을 넘어선 나라를 향한 애정, 그리고 자신감이 나타난 것이겠지요. 회사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인 카이엔타이(海援隊)로 발전하여 제 모습을 갖추어 갔고 이를 기점으로 료마는 사쓰마와 조슈, 막부와 에도, 그리고 외세 사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쳐가게 됩니다. 또한 막말기의 중요한 역사적 지점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만들어 온 글로버와 료마가 드디어 직접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65년 협상타결
구라바엔의 입구를 지나서 바로 보이는 워커 저택에 가면 2층 첫 번째 방에 료마의 사진이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 앞에서 글로버가 섰을 것
사진 2. 발표하는 본인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같은 모자를 꺼내 쓰고 료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실 굉장히 긴장되었습니다.
1865년 3월 막부는 2차 조슈정벌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864년 바칸전쟁 이후 가쓰 카이슈와 같은 진보적 인사를 쳐내고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된 보수 인사들이 조정에서 막부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막부의 자신감은 바칸전쟁 이래로 막부의 배후였던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번들은 또한 이 전쟁이 막번 체제와 천황의 조정을 둘러싼 힘겨루기라는 것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응하였습니다. 조적으로 낙인 된 조슈 번의 경우 근대적 무기를 입수하여 막부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1차 조슈정벌에서 선두에 섰던 사쓰마번의 경우에는 번의 재정난이 악화 되고 공무합체론의 이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막부의 계획에 유보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1865년 7월, 영국의 새로운 공사 해리 파크스가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사쓰마에 방문하여 막부의 힘이 기울고 있으며 프랑스를 견제하고 자유무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번의 편에 서는 입장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처럼 1865년은 요동하는 서세동점의 무대에서 전통적으로 제자리를 지키던 다양한 주체들이 새롭게 제 모습을 꾸려갈 준비를 완수해 가던 시점이었습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서양의 문물을 수용한 국가로 간주되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유혈사태를 최소화 하여 메이지유신이라는 새로운 장막을 시작할 수 있었던 역사적 계기가 형성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글로버와 료마의 만남은 대내외적으로 복잡하게 진행되었던 일본의 문명사적 변환에서 일본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유력한 세력들을 결집시키고, 근대적 군사체제나 무기와 같은 물리적 조건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가사키를 무대로 한 이들의 첫 만남은 글로버상회와 카메야마샤츄의 무기거래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두 상회를 통해 조적으로 낙인 찍힌 조슈번은 사쓰마번의 이름을 빌어 외국에서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65년 5월 조슈번의 다이묘가 번군의 근대적 군제개혁 정책을 선포하였을 때, 메이지3걸 중 한명으로 거명되기도 하는 키도 다카요시 (木戸孝允)는 평소 친분이 있던 글로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60년대에 글로버는 차와 비단뿐 아니라 선박과 무기거래에 손을 넓히고 있었고, 또한 넓고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슈번에서 그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는 번을 가리지 않고 젊은 사무라이들과 교류했었고 실제로 키도다카요시와 사쓰마번의 사무라이이자 기업가인 고다이도모아쓰(五代友厚)의 교우를 주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이 오랜 기간 숙적이었던 조슈번과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사쓰마번의 협력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주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료마 또한 이 시기를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쓰 카이슈의 문하를 떠나면서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힘을 모아 막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정세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키도 다카요시는 그에게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식량난을 겪고 있는 사쓰마번과 근대적 무기가 필요한 조슈번 사이의 비밀거래를 위한 장(場)을 마련해주도록 요청합니다. 카메야마샤츄는 사쓰마번을 주주로 하는 만큼 이들의 이해를 반영하여 비밀거래를 성공시키는 데 있어서 최적의 중개자일 것이며, 그 수장인 료마는 막부 혹은 특정 번의 당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협상의 결과 조슈번은 글로버가 입수해 온 약 7300대의 최신 소총을 필두로 서구식 무기체제를 갖출 수 있었고, 카메야마샤츄 선원들이 이들의 해상기동훈련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데지마에서 나가사키로 건너 온 스코틀랜드의 상인 글로버와 도사번을 탈번하여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도중에 나가사키로 온 료마가 그동안 특별히 대면할 기회는 없었으나 이들은 거대한 전환기를 예리하게 이해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으로서, 하급무사 출신으로서 전통적 의미에서 이들은 주변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으로 번과 신분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기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두 인물의 촘촘하고 넓은 관계의 그물망에 기대는 측면이 상당히 큰 것입니다. 이즈음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으나 글로버와 료마의 교류가 더욱 있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당시 글로버가 영국에 유학 보냈던 조슈5걸 중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카오루가 귀국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 있었고, 글로버는 이들을 통해 막부 타도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료마는 에도, 쿄토, 사쓰마, 조슈, 그리고 나가사키를 종횡하며 번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요. 따라서 번들의 대대적인 근대적 군제 개편이 진행되었던 당시 나가사키에서 무기거래를 하던 두 인물은 계속해서 얽힐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야망은 달랐겠으나 바다를 보고 자라며 고향을 떠나고 더 넓은 세상에서 뜻을 품었던 두 인물은 서로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866 3월 7일 삿쵸동맹이 맺어졌습니다. 전통적 막번체제가 오랜 진통 끝에 드디어 새로운 정치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의 연합이 구성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지마에 도착하여 미지의 개척지와 같은 땅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던 글로버는 이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료마 또한 자신의 숙명의 과제를 1. 1865년 나가사키, 두 청년의 만남_나가사키 구라바엔 끝내고 드디어 새로운 일본을 맞이하는 듯하였습니다.
메이지유신과 두 청년의 막다른 길
막말기 일본의 근대적 군제 개편과 무기거래를 둘러싸고 극적으로 교차점에서 만나게 되었던 글로버와 료마는 이후 다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료마는 메이지정부 포고문의 초고가 된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작성하여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여 대대적인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대정봉환 직후 1867년 괴한의 습격으로 암살당하면서 33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한편 글로버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메이지 당국에 협력하여 조선, 석탄, 수산, 철도, 맥주 산업 등에 힘을 써 일본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문헌자료에서도, 그리고 이번 답사에서도 느껴지듯 글로버와 료마가 서있던 19세기 나가사키는 대내외적 상황이 얽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무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제 자리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던 두 청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써 그때-그곳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답사의 첫날밤 구라바엔에서 바라본 야경은 다시 새로운 격변기인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아름답고도 낯선 곳에서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진 3. 구라바엔에서 사랑방 9기와 선생님의 단체사진 참고문헌 Jansen, Marius B. 1961. Sakamoto Ryoma and the Meiji Rest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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