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사신이 남아 있는 곳
EAI 사랑방 학생들의 베이징 답사기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국가박물관 · 배예슬 · 조지타운대학교
들어가며
저희 사랑방 8기 답사팀은 2017년 6월 22일 목요일 아침 10시 40분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떠나기 전날 며칠 계속 될 것으로 예상되던 기록적인 폭우로 북경에서 6명이 실종 되었다는 기사를 접하여서 큰 관심사는 북경 날씨였는데, 다행히 저희가 도착했을 때 비가 거의 그쳐서 악명 높은 중국 미세먼지는 씻겨 내려가고 운치 있는 북경이 저희를 맞이해주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5 북촌한옥마을 분위기를 풍겼던 중국 전통 후통 거리의 식당에서 운남성식 훠궈(샤브샤브)를 먹고 답사의 첫 장소인 천안문 광장 동쪽에 위치한 국가 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국가박물관은 면적이 세계 박물관 중 최대 규모로 약 170만년전 중국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아우르는 무려 130만개의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한 학기 사랑방 수업을 통해 배운 천하질서의 역사를 유물을 통해 접할 생각을 하니 설렜습니다. 저는 국가박물관의 수없이 많은 유물 중에서도 남북조 시대 남조 양(梁)나라에 조공한 외국 사신들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대해 발제를 했는데, 국가박물관의 유물을 통해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천하질서에 포함되었던 동아시아의 역사도 보게 될 것 같아 기대 되었습니다.
빨리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의 사신을 보고 싶은 기대감을 갖고 시간절약상 국가박물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백제 사신에 대해 발제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백제의 사신이 왜 양나라에 파견되었으며 양나라에서 무엇을 봤으며 백제의 외교에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 그 상황을 재구성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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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로 파견된 백제 사신
6세기 초·중반 백제는 중국 한족의 정통성과 선진문화로 남조 최대의 전성기를 맞은 남조 양(梁)나라에 사신을 총 5번 파견하였는데(정재윤 2009, 188) 양나라 원제(元帝) 소역(簫繹, 508- 554)은 조공을 바치러 오는 외국 사신들의 모습과 사신들의 나라 역사와 풍속에 대한 기록을 담은 양직공도(梁職貢圖)를 제작하였습니다. 단정한 차림의 백제 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에 대한 정보를 적은 직방지(職方志)가 있는데, 백제와 고구려 및 주변 소국과의 관계, 백제와 중국과의 관계 역사, 백제의 통치체제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은 왜 양나라에 파견되었고 무엇을 보고 백제에 가져왔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국 왜국과 신라와의 관계를 비롯해 고대 백제의 외교 전략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양직공도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簫繹, 재위 552-554년)이 왕자 시절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내던 526년에서 539년 사이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양무제(梁武帝)가 나라를 설립한지 40년인 540년에 완성했는데(홍윤기 2004, 243) 양원제는 양나라에 파견 되었던 실제 타국 사신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풍습을 물은 뒤 제작 하였습니다(정재윤 2009, 188). 백제에서 양나라로 5번 파견한 사신 중 이 시기에 파견한 사신의 활동에 대해서 중국 역사서
7 양서(梁序)와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양(梁)·백제전(傳)』: “중대통(中大通) 6년 (534년)과 대동(大同)
7년(541년)에 백제는 거푸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서 나는 물산을
바쳤고, 아울러 『열반경』등의 경전과 그 해설서와 『모시』박사
그리고 공장(工匠)과 화사(畫師) 등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양 무제께서는) 조칙을 내려 이들을 모두
백제에 주었다. (中大通六年, 大同七年, 累遣使獻方物;
幷請涅槃等經義, 毛詩博士, 幷工匠, 畵師等, 敕並給之.”)
『삼국사기·백제본4·성왕·19년』: “성왕19년 (541년), 성왕은
사신을 양나라로 보내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와 『열반경』 등에 대한 경전과 그 풀이 및 공장과
화사 당을 요청하였는데, 양나라에서는 우리의 요청을
따라주었다.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
涅槃等經義, 幷工匠·畵師等, 從之.)”
백제는 534년과 54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534년에 파견 된 사신은 백제에서 나는 물산을 바쳤고, 541년에 파견 된 사신은 열반경 등의 경전과 그 해설서, 모시 박사, 그리고
8 공장과 화사 등을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원본 문서에 사용 된 ‘칙(敕)’과 ‘표청(表請)’ 글자입니다. 이 한자는 백제가 양나라에 정식 문서 형태를 통해 문물을 요청하였고 양나라 또한 정식 문서를 통해 요청에 응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541년에 양나라에 파견되었던 백제 사신이 양나라 현지에서 즉흥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윤기 2004, 249). 541년 사신을 파견하며 이미 백제 측에서는 양나라의 문물을 파악한 상태로 자원을 요청할 계획으로 공식적 문서를 사신을 통해 보낸 것인데, 541년 양나라에 문물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서는 그 전 파견되었던 사신이 양나라 현지에서 자원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534년에 파견 되었던 백제 사신은 양나라 파견 당시 위 양서에 언급되어 있는 열반경 등의 불교 경전과 그에 대한 해설서, 모시박사, 공장(工匠), 그리고 화사(畵師)를 관찰하고 간 것이 핵심 활동 중 일부였을 것입니다.
백제 사신이 양나라에서 보고 온 것
백제가 양나라로부터 요청한 열반경과 같은 경전과 그 해설서,
9 공장, 화사 등 대부분의 문물은 불교의 수용 및 보급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양직공도 제작 당시 백제는 기존 한강 유역을 남하하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상태였는데, 영토도 많이 축소 되어 내부 강화에 힘쓰던 상황이었습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환경 가운데 다른 불교 경전보다 상대적으로 내면적 강제(强制)에 초점을 둔 열반경의 이론을 백제가 매력적이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홍윤기 2004, 264). 특히 양무제가 509년 양나라 유명 열반학자인 보량(寶亮)에게 열반경의소 (涅槃經義疏)를, 승랑(僧郞)에게는 열반경의 주요 해석 10대법사 (大法師)와 양 무제의 생각을 종합한 열반경집해 (涅槃經集解)을 편찬하도록 하는 등 열반경에 대한 자원을 많이 개발해 둔 상태였기에 백제의 관심을 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열반경에는 양직공도 제작 당시 양나라 불교의 핵심적인 이론인 불성(佛性)의 본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백제의 성왕(聖王, 재위 523- 554년) 때 특히 양나라의 불교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왕권 강화 정책들도 본받았습니다(최연식 2011, 199). 성왕은 양나라를 따라 대규모 사찰을 짓고 양무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고대 인도 불교의 이상적 군주상을 의미하는 전륜성왕 지위를 똑같이 자신에게 부여하기도 했습니다(정재윤 2009, 192).
공장(工匠)은 건축설계사와 목공을 뜻하고 화사(畵師)는 화공을 뜻하는데,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은 양나라 현지에서 목격한
10 양나라의 대규모 사찰과 불상을 눈 여겨 보며 수준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양나라의 공장과 당나라 승려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에 양나라 사찰에 대해 ‘모두 합치면 2,846곳, 번역된 불경이 248부, 승니는 82,700명이었다’라고 그 큰 규모를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한반도 공주 지역에서 발견 된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라는 벽돌 등도 백제가 양에서 공장을 초빙해 기술을 전수 받았음을 확인시켜줍니다(홍윤기 2004, 250-251).
불교 관련 문물 이외에도 위 양서에서도 언급 되었듯 백제는 중국 최고의 유학(儒學) 시집(詩集)인 시경(詩經)에 대한 해설서 모시의 양나라 권위자인 모시박사를 요청하였습니다. 양나라 무제는 모시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에 힘썼는데, 모시발제서의 (毛詩發題序義) 1권과 모시대의(毛詩大義) 등 모시 관련 해석서를 편찬하여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은 이런 사실을 파악하여 양나라 모시 박사를 요청한 것입니다(홍윤기 2004, 252).
백제의 중간국가 외교 전략
534년 양나라에 파견된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이 양나라 현지에서
11 접한 것 중에서도 백제는 541년 양나라에 열반경과 모시박사, 공장과 화사를 요청했습니다. 백제가 들여온 이러한 선진문물은 백제의 문화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쳐 백제의 불상과 사찰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인상적인 것이 백제는 양나라에서 공수해온 선진문물을 주변국인 왜국과 신라에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을 매개체로 양직공도 제작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는 양나라에서 백제, 백제에서 왜국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군사력으로 고구려보다 우세하지 않은 백제의 주변국 포섭 전략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백제는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양직공도의 백제 직방지에는 “고구려에게 자주 격파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75년에 백제의 수도가 있던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는데, 그래서 주변의 왜국과 신라와 연합하려 노력했습니다.
왜국과의 외교의 경우, 양직공도가 제작 되던 6세기 초·중반을 전후로 백제는 왜국에 오경박사(모시박사 포함), 불경, 공장 등을 꾸준히 보냈는데,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임나(任那, 가야지역)의 분쟁이 있던 510년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揚爾)와 고안무(高安茂)
12 등을 보냈고, 신라가 금관가야를 정복하려 하던 532년 전후에는 오경박사 마정안(馬丁安)과 백제의 토산물을 보냈습니다. 542-554년 동안 왜국에 오경박사와 불경, 공장을 보냈고 고구려와 전투하던 550년 초에는 학자들과 불교 서적, 불상, 그리고 역사, 의료, 음악 분야의 전문인들을 보냈습니다(김현구 2002, 29-32). 일본역사서인 일본서기는 4세기말부터 백제가 적극적으로 왜국에 선진문물을 제공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홍선화 2010, 98-99). 왜국도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선진문물이 필요했는데 양나라의 문물과 백제 특유의 문화를 전수 받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고 백제는 왜국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던 것입니다. 특히 양직공도의 사신들을 살펴보면 왜국 사신은 말끔한 백제 사신과 비교해 맨발에 봉제 되지 않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맨 모습을 하고 있어 양나라의 입장에서도 백제보다 문물이 덜 발달된 국가로 인식되었습니다.
신라도 백제를 통해 불교 자원과 기술 등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양서에 의하면 신라는 양직공도 제작 당시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고” 백제를 통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5세기 말 신라 소지마립간 15년(493년) 백제는 신라와 이미 혼인 관계를 통해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관산성전투와 백제의 시련”,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백제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즈음 신라와 공식적
13 통호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와 백제 사이 협정이 맺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정재윤 2009, 191) 신라를 대신해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주면서 함께 고구려를 대적할 수 있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신라에게도 필요한 선진문물과 기술을 전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던 양나라와 백제
양직공도에는 다른 나라 사신 중 여럿이 맨발, 헝클어진 머리, 풀어헤친 옷 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백제 사신은 공손한 자세를 한 말끔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양직공도 제작 당시 양나라와 백제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양나라가 필요했던 것처럼 양나라 또한 백제와의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양직공도 제작 시기에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남조의 양나라는 북중국을 견제해야 했는데, 북중국은 강한 기마 군단을 토대로 군사력이 막강했고 남조는 한족 정통 왕조의 정당성과 선진문물에서 우위를 차지했기에 서로가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14 백제가 주변국 왜국과 신라를 포섭하여 고구려에 대항했듯 남북조도 주변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상대국을 견제하려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양직공도의 백제 직방지에는 “양나라 초에 여태(餘太) 는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제수하였다”라 쓰여 있는데, 이는 502 년 백제가 처음으로 양나라에 책봉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정동장군이라는 작호는 ‘동쪽을 정벌하였다’라는 뜻으로 그 전 진동장군, 진동대장군의 관작보다 높은 단계로, 이때 백제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직방지에는 또 521 년 백제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물리쳤다고 기록하는데, 이와 관련해 양서 백제조에서도 ‘비로소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해석은 정재윤 2009, 190 참고). 그러므로 양직공도가 제작 되었을 당시 양나라 입장에서는 백제가 한반도에서 고구려를 견제할 만한 국력을 갖춘 나라로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양나라의 선진문물을 왜국과 신라에도 전달하여 양나라에게는 백제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유리했을 것입니다.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이 6 세기 중국 양나라에 파견 되어 현지에서 관찰하고 백제에 보고한 것을 기반으로 백제는 선진문물을 들여와 주변국 왜국과 신라를 포섭하는 전략을 세울
15 수 있었습니다. 수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주변국과 비교했을 때 군사력이 현저히 막강하지도 않은 중간국가로서 문화 전달을 통해 주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가며 생존전략을 세워 나간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박물관을 훑어보다
백제 사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버스는 딱 알맞게 국가박물관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국가박물관은 축구장 27 개에 해당하는 192,000 제곱 미터로 이루어져 있어 전세계 박물관 중 가장 큰
16 면적에서 약 130 만개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저희 답사팀은 이런 국가박물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약 한시간 반으로 최대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와야 하는 미션을 안고 양직공도의 백제사신을 만나러 국가박물관에 입장하였습니다.
국가박물관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저희는 1 층의 ‘지도자·인민’이라는 제목의 현대미술작품전과 지하 1 의 ‘고대중국’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박물관의 로비에서부터 이미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중국 공산당의 창단과 업적을 강조하는 큰 규모의 작품과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는데, 1 층 현대미술작품전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인민들을
17 주제로 한 그림들을 구경했습니다. 붉은 깃발을 들고 험난해 보이는 환경에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전투에 임하는 중국 공산당의 모습들을 비롯해 혁명에 공헌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생동감 있는 역사적 현장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대미술작품전에서 그림들을 구경한 후 저희 답사팀은 지하 1 층 고대중국 전시관으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은 약 170 만년전 상고시대부터 하상서주, 춘추전국, 진한, 삼국양진 남북조, 수당오, 요송하금원, 그리고 명청시대까지의 유물들을 시대순으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시대별로 유물들을 구체적으로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평소에 들어본 진시황의 병마용 등의 유물을 알아볼 수 있었고, 각 시대 전시관을 지나면서 시대별 인상적인 특징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상서주 시대 전시관에서는 사랑방 수업을 통해 배운 천하질서의 ‘천(天)’ 글자가 처음으로 단순히 자연을 뜻하는 글자에서 정치적인 뜻을 갖게 되었다는 청동 제기 ‘대우정’과 흡사한 형태 한 유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당나라 전시관에서는 다른 시대와는 구별되는 화려한 색감의 삼채유약 도자기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전시관을 지나 드디어 몇 달 동안 연구했던 양직공도가 전시 되어 있는 남북조시대 전시관을 설렌 마음으로 들어갔을 때, 안타깝게도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은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18 양직공도는 아래 사진에 나타나듯 두루마리 형태를 하고 있는데, 현재 양직공도엔 양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 12 명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본 양직공도는 양쪽이 돌돌 말려 있어서 가운데 7 명의 사신만 볼 수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오른쪽 끝부분에 있어야 할 백제 사신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오며
저희는 한시간 반정도 국가박물관을 둘러본 후 아쉬운 마음으로
19 자금성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겨야 해서 구체적으로 유물에 대한 설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아예 지나친 유물도 많았습니다. 특히나 아쉬웠던 점은 방문 전 국가박물관은 중국 다민족 통합의 역사와 공산당의 정당성을 굉장히 많이 반영한다는 평가를 많이 접해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흡수하는데 급급했던 나머지 정말 그런지 살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에 알차게 수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며 앞으로 더 채워 나갈 수 있는 뼈대가 뿌듯하게 세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양직공도라는 그림 한 작품의 인물을 통해서 중간국가의 외교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듯 국가박물관 유물에 얽힌 여러 사연이 궁금해져 또 찾고 싶은 국가박물관이었습니다.
참고문헌 “관산성 전투와 백제의 시련,”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홈페이지http://nlcollection.nl.go.kr/front/detail/detail.do?rec_
key=CO0000004004&category_id=CA0000000058 (검색일:
2017. 6.20)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서울: 창작과비평사. 정재윤. 2009. “5-6세기 백제의 남조 중심 외교 정책과 그 의미.”
20 <백제 문화> 41권 0호. 최연식. 2011. “백제 후기의 불교학의 전개과정.” <불교학연구> 제
28호.
홍선화. 2010. “4-6세기 百濟와 倭의 관계.” <한일관계사연구> 제
36집, 3-38.
홍윤기. 2004.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과 유협.” <중국어문논총>
27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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