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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毛主席記念堂)

천년의 수도 베이징에서 새천년을 그리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16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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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기념당 · 신보람 · 캠브리지대학교

이것만은 알고 가자!

◆위 치: 北京市 东城区 前门东大街11号 ◆개관시간: 08:00~13:00

(마오쩌둥의 생일인 12월 26일, 사망일 9월 9일에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추가 개장한다) ◆휴 무 일: 월요일

◆요 금: 무료(개인 소지품 보관료 2元-10元)

◆가는방법: 지하철 13호선

들어가며

한 도시가 ‘수도’로서 가지는 의미를 실감하게 하는 랜드마크로 마오 쩌둥 기념당만큼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장소는 드물 것이라 생각합 니다. 총 면적 44만m2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톈안먼 광 장 중심부에 위치한 마오쩌둥 기념당은 휴관일을 제외하곤 항상 문전 성시를 이루는 곳으로, 1977년 개관 후 지금까지 약 16억 명의 관람객 이 방문했습니다. 중국을 찾은 외국 방문자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의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견학을 오고, 지방에서 수도를 방문한 중국인들 이 꼭 한번 ‘순례’를 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2013년 12월 26일에는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을 맞아 참배를 위해 다녀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오쩌둥 배지. 15RMB 의 저렴한 가격에 텐안먼 광장에서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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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답사 전, 인터넷으로 검색했던 마오쩌둥 기념당 관련 사 진들은 수정관에 잠든 중국의 ‘붉은 별’을 보기 위해 줄을 선 관광객 들의 행렬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줄을 서고, 몇 분 남짓 기념당 안을 관람했다는 (그것도 빨리 움직이라며 등을 떠미는 삼엄한 경비들의 재촉을 받으며) 후기들을 보며, ‘왜?’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왜 중국 사람 들은 아직도 마오쩌둥 기념당에 찾아오는 걸까요? 그리고 마오쩌둥 기념당의 상징적 장소(symbolic place)이자 역사적 체험의 공간(historical space)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번 답사가 우리에게는 언뜻 이해 되지 않는 ‘절대 존엄’의 의미를 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중국 공산당이 신을 창조해낸 과정과 권력이 바뀌는 과정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1976년 9월 9일, 중국의 붉은 별이 지다

사진

1976년 9월 9일, ◀ 마 새벽 0시 15분, 오 쩌 마오쩌둥 주석이 둥 사망합니다. 그 전 기 념 날만해도 공식 매 관 체는 마오쩌둥의 외 관 건강 악화 사실을 함구하였고, 중국

인들은 ‘중국의 붉은별’이 영원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9월 9일, 중국 전역에는 하루 종일 ‘중요 방송’에 대한 예고가 되풀이 되며 불길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중국 전역에 장송곡 과 함께 마오쩌둥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단결을 거듭 강조하였으며, 마오쩌둥의 정신을 계승할 것 을 요구했지요. 높이 휘날리던 오성홍기가 낮게 걸리고, 천안문에 걸 린 마오 주석의 초상화에는 검은 휘장이 걸렸습니다.

마오쩌둥의 추모 대회는 사망 후 9일이 지난 9월 18일 치러졌습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니다. 천안문 광장은 백만 명의 군중으로 메워졌습니다. 대회에 참가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오후 3시가 되자 시각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작업을 멈추고 묵념했습니다. 유튜브(YouTube)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마오쩌둥 장례식 자료 영상을 보면, 중국을 이루고 있는 각 민족과 각기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 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을 상징하는 전통 의상 또는 자신의 직업을 상징하는 유니폼 차림으로 그룹을 지어 움직였습니다. 당 간부, 군인, 노동자, 소수민족 대표단, 그리고 학생 순이었습니다. 모두 검거나 붉 은 완장을 차고, 오성홍기로 덮인 마오쩌둥의 시신 곁을 지나갔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화장(火葬)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1944년, 중국 공산당은 조상숭배 문화 철폐 및 호화로운 장례 문화의 개혁을 시작 하였으며, 1956년부터는 화장을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오쩌둥은 화장에 관한 법을 개정하여 모든 정부 관계자들에게 화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게 했고, 개정법에 따라 1976년 전에 사망한 모든 당원들과 정부 인사들은 화장되었습니다. 마오쩌둥 자신 또한 생전에 “내가 죽 으면 화장하고 재는 양자강에 던져 물고기 밥에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산케이신문특별취재반 2001, 64).

마오쩌둥의 사후 처리에 관해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축이 된 4인방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9월 9일, 마오 주석의 사망 소식을 알린 중앙 방송 또한 덩 샤오핑에 대한 비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4인방의 메시지를 담 고 있었지요. 사망 소식을 전한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또한 이 점 을 수상쩍게 보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4인방은 문화혁명 때와 마찬 가지로 마오쩌둥의 개인 숭배와 군중 폭력을 통해 화궈펑의 세력을 압박하고 권력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10월 4일, 4인방은 공산당 당보인 광명일보에 ‘영원히 모(毛) 주석의 기정 방침대로 나아가자’라는 문혁 (文革) 노선 계승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고,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인 상 하이에 10만 명에 가까운 민병들을 모집하고 무장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4인방의 체포를 지휘했던 정치국원 겸 중앙 판공청 주임 왕둥싱에 따르면, 마오 주석의 유체를 영구히 보존할 것과 천안문 광 장에 기념당을 세울 것을 이미 중앙이 결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 오쩌둥의 주치의였던 리지수이도 자신의 회고록에 그와 비슷한 내용 을 적었습니다. 리지수이에 따르면 주석의 사망 소식을 어떻게 알릴 지와 장례 절차에 대한 당 회의가 열렸으며, 회의에 참석한 왕둥싱이 이 같은 결정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리지수이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 니다. 당시 중국에는 방부 처리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추모대 회가 열리기 전 이미 마오 주석의 시체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에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추모일인 9월 18일 전까지 사 체 보존 기술을 들여오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소련에서 시신 방부 기 술을 배운 베트남으로 연구팀을 보냈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결국, 추모대회를 하루 남겨둔 17일, 리지수이와 그의 연구팀은 포르말린에 절인 마오쩌둥의 시신을 천안문 광장에 마련된 빈소로 운반했습니다 (리지수이 1997, 47–54).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왜 중국 정치국이 마오 주석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하였

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오쩌

둥 신격화의 주역으로 문화혁명기에 정권의 중심이 된 4인방이 독단

적으로 마오 주석의 사후를 결정지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죽은 마오쩌둥’의 상징적 가치가 컸다는 것입니다. 장칭

과 그 일행 못지않게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거론된 화궈펑도 장례절차

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질국을 통해 관을 제작할 최상

급 수정을 전국에서 공수해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10월 8일,

화궈펑 주석은 마오쩌둥 기념당 건축 계획을 공표합니다. 같은 날, 그

의 정적이던 4인방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인민들에게 최초로 공개됩

니다. 결국 공산주의 중국의 신은 산 사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창조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인민을 위한 그리고 인민에 의한‘신’

12월 23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 미리 줄을 서기 위해 주원이와 톈

안먼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넓은 광장 근처는 아직 이른 아침의 스산

함이 느껴졌습니다. 고요한 광장에서 공간의 구도와 그곳에서의 관람

객들의 동선을 ‘역사를 읽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찬찬히 돌아보았습니

다. 이윽고 톈안먼 광장의 정치적 역할이 더 확실히 보이더군요.

마오쩌둥 기념당은 추모 공간이기에 앞서 전시 공간이기도 합니

다. 기념당에는 수정관에 안치되어 있는 마오쩌둥 외에도 중국 공산당 [문서 인용문이나 흥미 5대 서기들 즉 조우언라이(Zhou Enlai, 1989-1976), 류사오치(Liu Shaoqui, 1898-1969), 주더 (Zhu De, 1885-1976), 첸윈(Chen Yun, 1905-1995)과 3번째 주 석 덩샤오핑(Deng Xiaoping, 1904-1997)의 대리석 동상들이 2층에 전시되 어 있습니다. 5대 서기들과 같은 1세대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으나 1971년에 소련으로 망명을 꾀한 린뱌오(Lin Biao, 1907-1971)는 이 곳에 기념될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즉, 마오쩌둥 기념당은 ‘마오쩌 둥’으로 상징되는 현대 중국의 ‘올바른’ 역사 의식(historical ideology)을 추진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중 국 공산당 홈페이지는 기념당을 ‘애국 교육을 위한 민족적 장 소’(national place of patriotic education)라 설명하고 있습니다(中國共產黨新聞 網 2006).

사회주의 국가들은 종교를 타도하는 대신 국가를 대표하는 ‘신’을 내세웠습니다. 1994년 사망한 김일성과 2011년 사망한 김정일 부자를 포함하여, 소련의 레닌(1925년 사망), 베트남의 호치민(1969년 사망), 앙골 라의 네토 (1979년 사망), 가이아나의 번햄(1985년 사망)까지 사회주의 국가 주석들이 방부 처리되어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에 퍼진 괴이한 장례문화는 1923년 스탈린-트로츠키의 정치적 대립에 시발점을 두고 있습니다. 1923년 뇌졸증을 겪은 레닌이 아직 살아있을 당시, 스탈린은 레닌의 사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레닌은 러시아인이므로 러시아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하지만 몇몇 동지들은 현대 과학이 죽은 자의 시체를 방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부 처리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보존 가능케 한다고 믿고 있다. 적

어도 인민들이 레닌의 정신이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음을 인

지할 기간 동안은 보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Tumarkin 1997, 174).

스탈린처럼 방부처리를 지지하는 소련 공산당 간부들은 소련의 월등한 과학의 힘보다 레닌의 상징적 가치에 더 주목했습니다. 반면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학은 과학일 뿐 레닌의 장례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 습니다. 트로츠키는 역으로 레닌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것은 러시아 정교(Orthodox church)의 성인(聖人) 숭배 의식을 도입하는 것과 마찬가 지라고 비난하며, 무신론을 원칙으로 하는 볼셰비키 정신과 동떨어진 장례 절차라고 외쳤습니다. 무엇보다 레닌 자신이 어머니와 누나 곁에 조용히 묻히고 싶다고 죽기 전에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독재 자의 장례 문제는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대립의 장 그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한 종교 의식에 ‘첨단 과학’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하여 민중을 단결시켰고, 스탈린에 게 패한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 불참하고 맙니다. 그 후 그는 남 미의 한 은신처에서 암살 당하죠. 레닌의 장례식이 치러진 1924년 1 월 27일 자 소련 당보인 프라브다(Pravda) 신문은 시신의 영구보존이 ‘인민들과 당의 뜻’으로 결정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까지 모스크 바의 붉은 광장에 안치되어 있는 레닌의 ‘공공의 몸’(public body)은 스 탈린 정권뿐만 아니라 그 후 들어서게 되는 러시아 정상들에게 정당 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흐루쇼프 도 여기서는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1

마오쩌둥이라는 한 개인(private individual)이 죽고, 대신 공공의 ‘상 징적 몸’(symbolic body)이 탄생하게 된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오쩌둥의 죽음은 중국에 조용하지만 엄청난 폭풍 을 야기했습니다. 1976년 10월 6일 밤, 극비에 4인방을 체포한 화궈펑 은 10월 8일, 마오쩌둥 기념당 설립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포스트-마 오쩌둥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의 회고에 따르면 기념당 건 립은 마오 주석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1949년 당 지도자의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이를 인용하여 1956년 당 지도자의 생일을 공식적으로 축 하하거나, 과도한 선물을 보내는 일, 지도자의 이름으로 거리 또는 건 물의 이름으로 짓거나, ‘마르크스’ 또는 ‘레닌’과 이어 부르는 일을 포 함하여 개인의 찬양이나 숭배 행위를 금지시켰습니다. 흐루쇼프의 ‘비 밀 연설’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2개월이 지난 같은 해 4월, 마오쩌둥은 1 1956년 열린 제20회 소련 공산당 총회에서 흐루쇼프는 공산주위 지도자의 사체를 방부처리하는 관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1953년 사망하여 방부 처리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의 사체가 1963년 화장되었습니다. 그는 방부처리되어 레닌 옆에 안치되어있던 스탈린의 사체를 기념관에서 옮기는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레닌 기념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레닌 참배 의식을 흐루쇼프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소련이나 동유럽에서는 법으로 금지된 이같은 장례문화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회국가 주위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인민일보에 실린 글에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비난하며 이는 스탈린이 인민과 현실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0년 뒤인 1966년,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비슷한 우상화의 행보를 걷게 되 었죠.2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56년 당시에도 지방 관료들은 덩샤 오핑의 규정을 이행하지 않았고, 반대로 마오쩌둥 동상을 곳곳에 세우 는데요, 그 이유는 장제스 우상화를 반대하는 한편, 마오쩌둥의 신봉 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 하려 했기 때문입 니다. 지방 관료들이 마오쩌둥의 장수를 빌고 그의 혁명 정신을 세기 는 사당을 지었는데, 이 사당을 마오쩌둥 기념당의 전 모델로 보는 견 해도 있습니다. 이 사당은 그 지역에서 나는 최상급의 자재가 사용되 었으며 주민 모두가 동참하여 지어졌습니다. 1968년 문화혁명이 한참 일 때, 마오쩌둥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개인 숭배가 도를 지나치고 있 음을 감지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고, 그 해부터 마오쩌둥 사당을 짓 는 행위는 금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뒤에 도 마오쩌둥 숭배화는 그 수위는 낮아졌으나 꾸준히 진행되었습니다. 2 1958년 마오쩌둥은 개인 숭배에 대한 재해석을 내놓는데, 그의 주장에 따 르면 숭배의 대상이 개인이냐 민중이냐는 문제는 중요치 않고, 그것이 진실 에 기반한 것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혁명적 진실”을 옹호하며 찬양하는 숭배의식은 공산당 정신에 위배되지 않지만, 소련의 스탈 린 숭배는 ‘잘못된 숭배’로 혁명적 진실과는 무관하다고 말합니다(Mao, 1968). 톈안먼 광장을 역사 체험의 공간으로 본다면, 우리는 마오쩌둥 기념당과 기념당이 위치한 광장의 건축물들과 그 구도에서 중국 역사 의 주역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쩡양먼(正陽門)을 통과하여 톈안먼 관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오쩌둥 기념당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념 당은 마오쩌둥의 정신을 계승할 이들은 바로 중국 인민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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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해 주는 기념물로, 착공 ◀ 인 과정이 매우 흥미로운 건축물 민 영 입니다. 마오쩌둥 기념당은 웅 기 1976년 11월에 착공되어 마오 념 비 쩌둥 사망 1주년인 이듬해 9월 9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1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 70여 만 명의 인민들이 기념당 건설을 지원하러 나섰다고 합니다. 즉, 마오쩌둥 기념당은 중국의 인 민들이 죽은 주석에게 예를 표 한다는 의미보다는, 중국 인민 들이 손수 지었다는 의미가 더 욱 부각된 기념물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랜드마크로 가장 먼저 톈안먼 광장에 등장하게 된 기념물은 바로 인민영웅기념비입니다. 중국 혁명 영웅의 현창비로 1949년 건립 계획이 세워지고 1958년에 완공된 기념비로, 마오쩌둥의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금석문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과 조우언라이가 쓴 현충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받침대에는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중국의 혁명 투쟁의 역사를 담은 8가지의 장면이 새겨져 있죠. 인민영웅기념비는 베네딕트 엔더슨 (Benedict Anderson) 이 말하는 이름없는 군인의 무덤과도 같이, 중국인민공화국 건국에 희생된 ‘이름 없는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가 ‘순교자’들을 기리는 상징물인 것이지요. 즉, 현재의 중국이 존재할 수 있게 해준 ‘이름없는’ 주역들을 기념하는 건축물인 셈이죠. 마오쩌둥 기념당에서 인민영웅기념비로, 그리고 거기서 톈안먼과 자금성을 향해 걷다 보면, 중국의 과거와 미래가 바로 이 인민영웅기념비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중국과 마오쩌둥 기념당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중국이 만나는 지점이자, 동

과 서

로 봤을 때는

(東)

(西)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중국인민대회당과 중국의 역사를 축척하고 있는 중국국가박물관이 마주보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어쩌면 역사의 주역인 ‘중국 인민’이란 결국 마오쩌둥이라는 절대 존엄의 상징처럼 중국이란 국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의식(Ritual)에서 소비(Consumption)로

이론적으로 봤을 때, 사회주의 사회의 인민은 일상 생활에서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 의식(ritual)에 ‘자발적’으로 동참합니다. 중국의 ‘인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기념당 건축에 참가하고, 나중에는 수정관에 안치된 마오 주석을 방문하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겁니다. 즉, 마오쩌둥 우상화에 동참한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알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이들 중에는 분명 젊은 시절,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가슴에 달거나 그의 얼굴이 그려진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 이들이 상당수일 겁니다. 홍위병의 상징이기도 한 마오쩌둥 배지는 사실 중국인민공화국이 만들어진 직후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중국 사회에서 개인의 소속과 신분을 구분하는 용도뿐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 국가적 행사 또는 여행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각각 다른 디자인의 마오쩌둥 배지들은 가게에서 구입할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또한, 도시에 사는 인민이면 모두 가지고 있는 필수품이 기도 했습니다. 마오쩌둥 배지나 시계는 소지자 개개인의 충성심을 드러내주는 도구인 동시에 개인의 정치 정체성(political presence)을 보여주는 상징물인 셈이지요.

배지를 달거나 또는 마오쩌둥 기념당을 방문한 (혹은, 배지를 달고 기 념당을 방문하거나) ‘인민’들 중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마오쩌둥의 상징 물을 이용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념에는 무관심하지만 습관적으 로 마오쩌둥을 찬양하거나, 마오쩌둥의 사상에는 반대하는데 감히 입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밖에 내지 못했던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을 겁니다. 소련의 붕괴가 너 무나도 당연하고 예측 가능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붕괴의 순간 ▶ 이 왔을 때는 왜 모두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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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오 에 빠졌는지를 연구한 알렉 쩌 둥 세이 율첵 (Aleexei Yurchak) 은 배 반복되는 정치적 의식(ritual), 지 이념 선전과 일상이던 정치 활동이 결국에는 그 속에 담 겨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대 중으로 하여금 부정(reject)하 거나 동조(accept)하기보다는 회피(evade)할 수 있는 ‘해석 의 공간’을 열어주었다고 주 장합니다(Yurchak 2005). 과연 중국의 경우에는 반복되는 절대존엄에 대한 강조와 일 상화된 정치 의식의 참여가 어떠한 정치적 문화를 만들어 낼까요? 또 한, 자본주의적 물질주의(capitalist consumerism)의 도입이 마오쩌둥 상징 성에 대해 어떤 ‘해석의 공간’을 열어주었을까요?

저는 소련이 붕괴되고 20년이 지난 2009년 러시아를 방문했습니 다. 탈-사회주의 과도기에 놓인 러시아의 정치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 고 있는지 목격할 계기가 되었죠. 당시 서구에서는 사회주의의 붕괴가 정권교체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 즉 이상적으로는 민주주의로의 전환 을 불러오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하는 분위기였죠.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에서는 비록 1당 체제는 사라졌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들어서며 권위주의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밀물처럼 들어온 자본주의 가 오히려 러시아의 권위주의를 지속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을 하곤 했습니다. 매력적인 걸그룹(girl group)이 ‘푸틴 같은 강한 남자 를 원해’라는 댄스 곡을 유행시켰고,3 푸틴의 이름을 딴 ‘Putinka’라는 보드카가 소비자들의 흥미를 끌었습니다.4

그 당시 러시아 사회는 소련 과거사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스 탈린이 러시아 현대화를 성공시키고 나치 위협을 막은 위대한 지도자 인지, 아니면 개인숭배를 강요하고 수 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 한 독재자인지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죠. 아울러, 소련이라는 과거가 공포와 정치적 압박의 역사인지 또는 러시아가 세계적인 강대 국으로 부강했던 영광의 역사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 문화 속에서 소련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서구 학자들이 ‘소비에트 키쉬’(Soviet Kitsch)라고 부르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키쉬’란 대중에게 인기가 많지만 저속한 예술을 일컫는 말로, 붕괴된 소련의 문화적 또는 일상 생활 속 의 유산들을 패러디를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문화 생성의 정치적 목적 3 걸그룹의 기획사는 그 어떤 정치적 목적도 없다고 밝혔으며 특정 정치인과의 관계 도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4 보드카 맛은 별로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과 과정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소련의 예술과 문화는 정치적 상징물이나 이념 담론과 마찬가지 로 특화된 정부 기관—작가 연맹, 미술가 연맹, 작곡자 연맹 등—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이들 기관은 정부의 지원과 지시를 받아 문화와 예술품을 생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문화는 사회주의적 현실주의 (socialist realism) 미학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고, 당의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정치 지도자의 아이코노그래피(iconography) 또한 마찬가지로 엄격한 정부의 개입 아래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레닌의 이 미지는 한번 규격화된 아이코노그래피에서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재생 산되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바로 상징의 유일한 저자였던 공산당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죠.

이번 답사에서는 찾아가 보지 못했지만, 베이징에는 ‘홍써징톈주 티찬팅’ (红色经典主题餐厅, 붉은색의 전통을 테마로 하는 레스토랑)이라는 레스 토랑이 있다고 합니다. 흥미로는 것은 이 레스토랑의 특징이 바로 마 오쩌둥 시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겁니다. 레스토랑 중앙 무대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홍위병 의상을 입은 종업원들이 손 님들을 ‘동지’라고 부르며 주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무대에서는 홍위병 들과 노동자들이 망치와 삽을 들고 나와 마오쩌둥의 어록을 읊거나, 찬양가를 부르는 공연이 펼쳐집니다. 손님들은 즐거운 분위기에 그 시 절을 회상하거나,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살았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 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 레스토랑에 대한 기사를 읽다, 모스크바에 있는 ‘조브 일리차’(일리치는 레닌의 이름으로, 번역하면 ‘일리치의 부름’)라는 레스토랑이 기억났습니다. 소비에트 키쉬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소련시대 소년단의 유니폼에 붉은 스카프를 맨 종업원 들이 소련 시대에 구내 식당에서 판매하던 음식을 서빙하는 독특한 레스토랑이었습니다. 외국인에게나 내국인에게 인기 만점인 ‘맛집’이었 죠. 레스토랑의 내부에는 소련 시절에 타부화되었던 포르노그래피와 성신화되었던 레닌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적 상징이었 던 ‘레닌’이 소비를 위한 ‘재해석’을 넘어서 ‘재생산’ 되고 있는 모습이 었습니다. 즉, 정치적 상징이 이념적 메시지를 상실한 소비 물품으로 ‘전락’해 버린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에게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위 대한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기념당에 안치된 마오 쩌둥이, 또는 그를 방부 처리한 정부가 의도했던 정치적 메시지가 오 늘날 중국인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질 지는 의문입니다. 소련의 케이 스와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상징물은 이제 정부가 아닌 개인 사업체가 재생산 할 수 있는 문화 아이콘이 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자본 주의 또는 물질주의의 도입으로 소비라는 ‘순수한’ 즉 비정치적인 행 위를 위해 재생산되는 정치 지도자의 아이콘을 중국 정부도 딱히 막 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팝 아트 요소가 가미 된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미국의 한 문구전문 회사가 내놓은 ‘마오쩌둥 노트 세트’를 구입한 중국인 친구는 자신의 소비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선택이 마오쩌둥의 공과(功過)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흥미롭고 디자인이 귀여워서’ 구입했다는 그 친구는 중국에서도 마오쩌둥 배지를 달거나 티셔츠를 입는 것이 유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말 그대로 유행인지, 이번에 방문한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그려진 상품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마오쩌둥 정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서구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작년 이맘때 즈음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 주석 시진핑이 기념당을 참배했습니다.

사진

▶ 마 오 쩌 둥 기 념 당 동 상 앞

우리는 줄을 선지 10분도 안 되어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행렬을 따라 기념당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선발대에 함께 나선 주원이와 저는 마오쩌둥 기념당을 연속 두 번이나 관람할 수 있었습 니다. 그것도 꽤나 느긋하게 말입니다. 물론 기념당 앞에 관람객들의 줄이 얼마나 길게 늘어져 있는지의 여부로 중국인들에게 절대 존엄의 상징이 어떤 의미로 변화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 만, 누군가가 물었던 것처럼 ‘톈안먼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이 내려 질 날이 올까?’라는 질문을 중국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던져볼 수 있지 는 않을까요?

나가며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솔직히 털어놓자면, 마오쩌둥 기념당은 ‘관람’할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볼 것’이 그리 많지 않은 기념당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에도 수 백 명의 관람객들이 1시간이 넘 게 줄을 서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죽어서는 ‘전시품’이 된 지도 자가 자신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의 중국인들에게 어떤 영향 을 미치게 될까 하는 의문이 베이징 답사 내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국가의 어떤 특별한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상징의 장소가 아닌, 그 안에서 살아가며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국인들에게 초점을 맞춰 향후 중국의 방향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자! 오승희: 마오쩌둥이 태어난 1893년 12월 26일이 있던 주일

아침이라 대기 줄이 길 것이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마오쩌둥 기념당에 줄을 서기 위해

바빴던 보람과 주원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신기하게도 그날 아침에는 줄을 서지 않고서도 입장할 수

있었어요~ 드디어 마오쩌둥 기념당에 입성! 그가 가진

상징성의 무게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일까요? 실제로 본

마오쩌둥의 모습은 생각보다 작아 보였습니다.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상징적 장소이자 체험의 공간으로서 마오쩌둥

기념당을 조명했던 보람이의 발제로 베이징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복합적 공간의 의미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의 맥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백미네요.

김유정: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纪念碑)를

중심으로 자금성과 마주보고 있는 마오쩌둥 기념당,

국가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인민대회당의 공간 배치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서 중국

근현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2008년

12월에도 같은 장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2014년

12월에는 두 가지 점에서 달랐습니다. 천안문 광장을 휩쓰는 칼 바람에 맞서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대기줄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내부는 그 때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내부는 더욱

화려해졌는데 대기줄은 줄어든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중국 내부의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흰색 국화를 추모의 상징으로

쓰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노란 꽃이 마오쩌둥 동상 앞에 한

가득 놓여 있는 모습을 뒤로 한 채, 20세기의 마오쩌둥이

21세기의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일지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게 됩니다.

이재성: 보람 선생님이 인민영웅기념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자금성과 마오쩌둥 기념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설명해주셨을 때 비로소 저는 그 장소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오쩌둥 기념당 방문

전에는 단순히 자금성과 기념탑, 마오쩌둥 기념당이

있구나 라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설명을 들은 이후에는

그 장소가 보여주는 중국의 과거와 근대 그리고 현재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민걸: 마오쩌둥의 시신이 중국 현대사의 맥락과 중국 공산당의

지위 측면에서 가지는 상징성을 정말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천안문 광장, 인민대회당, 6. 마오쩌둥의 시체정치학: 마오쩌둥 기념당

국가박물관 등 굵직굵직한 주요 건물들과 함께한 마오쩌둥

기념당의 배치를 확인하니 그 상징성을 이용한 ‘시체

정치학’의 의미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리즈수이. 손풍삼 역. 1995. 《모택동의 사생활-1》. 서울: 고려원. 산케이신문특별취재반. 2001. 《모택동 비록-상》. 임홍빈 역. 서울:

문학사상사.

Leese, Daniel. 2011. “A Place Where Great Men Rest?: The Chai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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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 Andre Matthen. Leiden: B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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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0. Jianguo Yilai Mao Zedong Wengao 7: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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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chak, Alexei. 2005. Everything Was Forever, Until It Was No Mor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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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http://cpc.people.com.cn /BIG5/69112/113427/6694839. Pravda . 1924. “Smert' i pokhorony Vladimira Il'icha.” January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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