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상인과 일본 도쿠가와 막부: 공포의 거래
사랑방의 젊은 그들 진경을 찾아 헤매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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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Ⅰ. 서론
1. 문제의 제기 17세기 네덜란드 상인과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관계는 근대 초기 동아시아 외교사의 가히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609년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히라도(平戸)에 처음 진출한 이래 네덜란드인들은 일본 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해왔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의 해석들이 존재하는 데 한편에서는 네덜란드의 ‘종속화(domestication)’을 강조했고, 다 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들 모두 일본이 네 덜란드에게 가지고 있던 ‘필요성’과 ‘공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데지마 일기(Deshima Diaries 1633-1660)를 검토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특히 일지에 반복적으로 기록된 ‘생(生)실크 수입량 감소에 대한 일본 관리의 지적’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과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관계는 단순한 ‘위계에 의한 종속화’도 아니고 일본의 ‘절대적 우위’도 아니며 오히려 양측의 상호 공포와 필요 성이 제도적으로 고착화된 ‘상호의존성의 제도화’의 사례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과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네 가지 핵심질문들을 제기한다. 우선,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의 공간인식이 어떻 게 형성되어 자국에 한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바깥으로 향하는” 확장주의를 추동했는 가 하는 문제이다. 현존하는 연구들은 네덜란드의 해양 제국 건설을 역사적 필연으로 다루면서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상인들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인식-그들이 매 일 어떤 지평 속에서 판단을 내렸으며 어떤 생각들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 목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쇼군을 “천황폐하(Your Majesty Emperor)”라고 부르며 스스로 신하를 자처한 이유는 무엇이며 왜 이러한 호칭이 VOC 의 공식 문서뿐만이 아니라 사적인 일기에까지 관철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세 번째는 일본은 왜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계속해서 외국 상인들을 맞이했으며 더욱이 당시 세계 최대의 은 생산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밖으로 향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
- 40 - 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2. 선행연구 검토 아담 클로우(Adam Clulow)의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2014)은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이하 VOC)와 일본 도쿠가와 막부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네덜란드는 막부에 정치적으로 ‘종 속화’ 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 내 유일한 유럽 상인으로서 독점권을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클로우는 이 주장을 세 단계를 통해서 구체화한다. 우선 1627년 누이츠 (Pieter Nuyts) 대사 사건을 네덜란드의 첫 번째 ‘전략적 후퇴(strategic retreat)’로 보았 다. 누이츠 대사는 에도에서 쇼군을 알현을 시도하다 이노우에(井上政重)의 강력한 저 항을 만났고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단계는 1638년 시마바라 반란((井上 政重)이었다. 1637년 12월 17일부터 1638년 4월 15일까지 규슈 남부에서 일어난 일본 에도 시대 최대 규모의 대규모 농민 봉기를 마주한 도쿠가와 막부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인들에게 포르투갈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네덜란드인들은 이에 응하여 포르투갈 함대를 향하여 대포로 공격을 가했다. 클로우는 이를 네덜란드의 자발 적 군사협력으로 보았으며 VOC가 “일본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641년 VOC 상관의 히라도에서 데지마(出島)로의 강제이전을 들었다. 클로우는 상관의 강제이전이 네덜란드가 일본의 ‘외교·상업 파트너’에서 ‘통제 대상’이 되었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종속화(domestication)의 과정에서 VOC는 경제 적으로 더욱 강해졌다고 주장한다. 1639년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추방되고 난 이후에 네덜란드는 일본과 중국 간의 무역을 중개하는 유일한 유럽 세력이 되었으며 독점을 통해 지속적으로 높은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클로우는 이를 “길들여진 독점자(The Domesticated Monopolist)”라고 표현했다.
한편 론 토비(Ron Toby)는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1991)에서 완전히 다른 각도의 해석을 제시한다. 토비에 따르면 17세기 도쿠가 와 일본은 ’일본 중심의 외교 질서‘를 구축했으며 네덜란드를 포함한 일본과 교역하던 모든 국가들은 이 질서의 일부분이었다. 토비는 우선 쇄국 정책이 일본의 완전한 자발 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도쿠가와 막부에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며 막부는 기독교 배제 를 결정한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추방했다. 토비는 일본에서의 네덜란드의 생존 이 유를 ’유용성’에서 찾았다.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의 원천, 은 수출의 매개체, 중국과의 무역 중개체로서 네덜란드인들의 일본 거류는 일본의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토비의 주장이다. 토비는 또한 일본의 서양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를 주장한다. 네덜란드인들이 감옥과 같은 숙소에 갇혀 자유로운 이동조차 금지됨과, 쇼군 앞에서 절을 해야 했던 것이 일본의 절대적 권력을 보여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 41 - 일본 학자 시미즈 유코(清水有子, Shimizu Yuko)는 近世日本とルソン―「鎖 国」形成史再考(근세 일본과 루손―「쇄국」 형성사 재고)에서 근세 초기 대외 관계를 기독교 전파와 이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시미즈의 접근은 클로우나 토 비와는 다르게 단순히 "쇄국" 이후의 관계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쇄국 정책 형성 과정 자체를 일본의 정치적 의사결정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제국적 확장 논리의 상호작 용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쇄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후대 역사가들의 해석임을 지 적하며 실제로는 도쿠가와 막부가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외교적 파트너들을 선별하고 통제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의 시각이나 VOC의 행적에 대한 논의로 이 어지지는 않았다.
클로우는 네덜란드의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독점의 동시성을 입증했고 토비는 일보의 주체성과 절대적 우위를 주장했지만 두 주장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일 본의 ‘네덜란드의 필요성’의 구체적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클로우는 ‘왜 일본이 네덜란드를 내쫓지 않고 포용했는지’를 설명하지만, 이는 표면적 설명에 불과하다. 토비 는 일본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데지마 일기에는 더 복 잡한 상황이 제시된다. 또한, 두 저자 모두 데지마 일기에 기록된 일본 관료들의 ‘불안 감(Anxiety)’를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 데지마 일기에서 반복되는 관료들의 ‘왜 실크 (비단)가 적게 왔는지’에 대한 질문을 단순히 협박이라고 치부할 수 없으며 일본 관료 들의 절박한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클로우는 또한 네덜란드의 공포를 강조했다. 일본의 불확실한 권력과 예측 불가능한 처벌, 그리고 자유의 제약 등을 제시하면서 네덜란드인들이 느꼈을 공포를 해석했다. 하지만 일본도 일정 부분 ‘공포’의 감정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1644년의 “If the Dutch were to leave, the economic situation would become unbearable”이라는 문구 를 보면 양방향의 공포가 만드는 관계의 구조를 두 사람이 충분히 포착했다고 볼 수 없다.
본 연구는 위에 언급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서 기여하고자 한 다. 우선, 데지마 일기를 분석함으로써 일본의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 었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특히 실크 공급 문제, 가격 상승, 그리고 반복되는 질문들의 톤과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절박한 불안감’의 표현임을 보이고자 한다. 두 번째로는 호프라이스(hofreis)1)와 에도 조현식2)이라는 의례가 갖는 이중의 기능을 분석한다. 표면적으로 이 두 의례들은 클로우가 말하듯이 네덜란드의 ‘종속화’를 상징하는 의례지만, 동시에 다른 유럽인들을 배제하는 정치적 기능도 수행했 다. 마지막으로는 양방향의 공포가 만드는 ‘상호적 의존성의 제도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클로우의 ‘종속화’와 토비의 ‘일본의 절대적 우위’ 과는 다른 차원의 분 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 VOC 펙토리장이 정기적으로 에도의 쇼군 궁전을 방문하는 의례적 여행
2) 호프라이스 중 에도에서 쇼군에게 예를 갖춰 나아가는 의식(경복, 궁전 입장, 큰 절, 선물 제
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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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네덜란드의 공간인식과 확장: 국가-기업 결합체의 논리
17세기 초 세계 지도에서 네덜란드를 보면 북서유럽의 저지대에 위치함을 볼 수 있다. 라인-마스 강의 삼각주 지역(Rhein-Meuse Delta)3)에 자리잡은 네덜란드는 광범위한 습지와 운하, 제방으로 이루어져 해상 활동과 수로 무역에 최적화된 지리적 조건을 가 지고 있었다.4)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네덜란드가 해안 국가인 동시에 유럽 대륙과 연결 된 육지 기반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육지에 둔 기반은 유럽 대륙의 경제 네트워크에 직 접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해안 국가라는 점은 대서양과 북해를 통한 해양 확장의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해양 무역과 대륙 무역 의 중개 역할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고립된 섬 국가인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출 발점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와 일 본의 지리적 조건은 일견 유사해보인다. 둘 다 해상 활동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 었으며,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면 네덜란드는 유럽 대륙의 경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 해상 무역의 중심이 되었지만, 일본은 도 쿠가와 막부의 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5)
왜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행로가 이렇게 달랐 을까? 이에 대한 답을 단순히 ‘무역’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역은 상인이 있는 사회 라면 기본이며 일본 또한 제한적이지만 무역을 했다. 네덜란드의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인들의 공간 인식과 그 토대가 된 정치·경제적 구조, 전쟁 이 야기한 독특한 역사적 조건들을 알아야 한다.6) 네덜란드의 대외팽창은 지리적 우월 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유럽 대륙에 기반을 둔 정치경제적 구조와 종교 전쟁의 압박 속에서 생겨난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1. 80년 전쟁과 바다로의 도망 네덜란드의 대외팽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568년부터 시작된 80년 전쟁 (Eighty Years' War)7)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80년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이나 독립 전쟁이 아니라 갈수록 중앙화되어 가는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 운 형태의 국가를 창출한 사건이었다.
3) 통상적으로는 스헬러(Scheldt) 강까지 포함하여 Rhine-Meuse-Scheldt delta라고 표현함. 4) Encyclopedia Britannica. n.c. “Netherlands.”
https://www.britannica.com/place/Netherlands (검색일: 2025.12.05.)
5) Tonio Andrade, How Taiwan Became Chinese: Dutch, Spanish, and Han Colonization
in the Seventeenth Centur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도쿠가와 막부는 17세기
중반 이후 쇄국(鎖國) 정책을 실시하여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극도로 제한했으며, 1639년에
는 포르투갈을 추방하고 네덜란드 또한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안에 묶이게 된다.
6) Israel, Jonathan.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University Press
7) 네덜란드 반란(Dutch Revolt)라고도 한다.
- 43 - 1556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되면서 저지대의 도 시들과 지방 귀족들은 중앙화된 왕권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8) 필립 2세(Philip II)는 스페인 절대 왕권의 모델을 네덜란드에 적용하려 했다. 높은 세금, 종교적 획일성의 추 구, 지역 자치권의 박탈 등이 네덜란드의 도시들과 지방 귀족들의 저항을 야기했으며 이는 1566년 성상 파괴 운동(Beeldenstorm)을 통해 표출되었다.9) 2년 후인 1568년에 는 오렌지 공작 윌리엄(William the Silent, 윌리엄 오브 오렌지)의 지도 아래 무장 반 란이 시작되었다.10) 무장반란의 초기 형세는 좋지 않았다. 스페인 파르마 공작(Duke of Parma)의 군대는 반란군을 압도했으며 1585년에 이르면 스페인군이 남부 네덜란드 를 거의 모두 수복했다.11) 브뤼셀(Brussels), 앤트워프(Antwerp) 같은 주요 도시들이 스 페인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북부의 7개 연합주들(Seven United Provinces)이 저항하고 있었지만 형세가 좋지는 못했다.12) 이러한 상황에서 북부 네덜란드가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다’ 덕분이었다. 스페인군은 육상 작전에서는 네덜란드보다 뛰어났지 만 해양 전력에서만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능가했다.
결국 스페인 제국이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네덜란드가 " 바다를 통해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3)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Spanish Armada)가 잉글랜드에 의해 격파되었을 때 네덜란드의 독립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무 적함대의 패퇴는 단순히 스페인의 군사력 감소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바다가 “도망의 공간‘인 동시에 ”권력 투영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581년에는 네덜란드의 도시들이 스페인 왕 필립 2세에게 충성을 거부하는 "단 절 포고(Act of Abjuration)"14)를 발표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성명을 넘어선 네덜 란드가 더 이상 스페인 제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네덜란드는 이제 독립적인 공화국이 라는 공간적 재정의였다. 독립이라는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계속해서 네덜란드 남부를 장악한 상황이었고, 북부의 독립 공화국 또한 멸망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를 겪었다. 이는 12년 휴전(Twelve Years’ Truce, 1609-1621)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8) Israel, Jonathan.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University Press.
9) Discovering Belgium. 2020. “1566 Iconoclasm – When Belgium's Churches Were
Attacked.” https://www.discoveringbelgium.com/1566-iconoclasm/ (검색일: 2025년 12월
10일)
10) Motley, John Lothrop. 1855. 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 A History. Vol. 1. New
York: Harper & Brothers.
11) Israel, Jonathan.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University Press.
12) ibid.
13) Van Duzer, Chet. 2013. Sea Monsters on Medieval and Renaissance Maps. London:
British Library.
14) Act of Abjuration(Plakkaat van Verlatinge)
- 44 - 2. 국가 구조의 특수성15)
네덜란드 공화국은 1581년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가진 영토 국가가 아니라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에 불과했다. 일곱 개의 주-홀란드(Holland), 젤란드 (Zeeland), 우트레흐트(Utrecht), 겔더란드(Gelderland), 오버이셀(Overijssel), 흐로닝언 (Groningen), 프리슬란드(Friesland)-가 각각의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주들의 모 임인 전국 의회(States General)가 연방 차원에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국 의회의 권한 또한 강하지 못했으며 각 주는 언제든지 기존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동시에 전국 의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이 1581년 독립을 선언했을 때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가진 영 토 국가"가 아닌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었다. 일곱 개의 주(Seven United Provinces)가 각각의 자치권을 유지했고, 각 주 내의 도시들도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 다. 각 주는 자신들의 주(States)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들의 모임인 전국 의회(States General, 연합주 정부)가 연방 차원의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이 국가 기구도 매우 약했 다. 각 주는 언제든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동의 없이 전국 의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국가 구조의 핵심은 ‘주’가 아니라 ‘도시 (cities)’들에 있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도시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암스테르담, 로테르 담, 위트레흐트 같은 주요 도시들이 실제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 도시들은 상인과 시민 들로 구성된 레전트(regents, 통치자들)라는 자치 조직이 운영했으며 레전트는 귀족이 아니었다. 유럽의 여타 국가들의 권력이 귀족들에게 있었음을 고려할 때 네덜란드 공화 국은 ‘공화국’이라는 문자 그대로 상인들의 공화국이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해외 확장에서 여타 국가들에 비해서 유리했다. 도시들로 서는 자신들의 상인을 보호하고 지원할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영토 확장을 꾀 하는 왕권 또한 부재했으므로 각 도시의 레전트들은 상인들의 무역 확장을 지원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도시 기반의 권력 구조가 더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화된 국가에서는 왕의 승인을 포함한 수많은 관료 절차를 거쳐야 했으나 네 덜란드에서는 암스테르담 시의회가 직접 선박 건조 자금을 승인하고 직접 상인들과 협 상할 수 있었다. 이는 중앙화된 국가들에 비해 효율성 측면에서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네덜란드 공화국 내부의 도시들이 여러 개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한 도시의 원정이 실패할 시 다른 도시에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위험 분산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포르투 갈처럼 하나의 중앙집중화된 전략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으며 여러 전략을 동시에 추진 할 수 있었다.
15) 네덜란드의 국가 구조의 특수성에 대한 자료들은 Israel, Jonathan.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Oxford: Clarendon Press.를 참고
- 45 - 3. 새로운 공간인식
네덜란드인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바다를 정복 가 능한 공간으로 인식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에야 이러한 인식이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16세기만 하더라도 이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바다를 공포의 공간 으로 인식했다.16) 유럽인들에게 바다는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 었으며 포르투갈인들조차 초기 항해에서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17) 하지만 네덜 란드인들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바다를 통제 가능한 공간으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항해법(navigation)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자리하고 있었다.18) 항해 지침서(rutters)와 파일럿(pilots)이라고 불린 전문 항해사들의 등장이 항해법의 발 전을 추동했다.19) 지도 제작(cartography)에서의 혁신 또한 이 시기에 일어났다. 야콥 판 데벤터(Jacob van Deventer)과 같은 인물들이 새로운 지도 제작 방식들을 활용하여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데벤터는 새로운 삼각측량(triangulation) 기술을 사용하여 정확 한 거리를 보여주어 미지의 공간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두려움을 감소시켰다.20)
4. VOC의 탄생: 국가와 기업의 결합
VOC는 1602년 네덜란드 공화국에 의해 설립된 합작 회사로서 단순한 상업회 사가 아니었다.21) 1602년 3월 20일에 전국 의회가 승인한 VOC 헌장을 보면 민간 회 사라고 간주하기에는 지나친 권한들-군대를 유지할 권리, 지역 통치자들과 조약을 맺을 권리, 21년간의 독점 무역권 등-이 부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회 사의 설립은 이전에 존재하던 여러 동인도 무역 회사들을 통합한 결과였다.22) 1590년 대부터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에서 상인들이 포르투갈의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동인도 원정을 시작했으며 각각의 도시에서 동인도 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러 네덜란드 회 사들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가격을 낮추어 이윤 감소로 이어진 동시에 포르투갈의 16) Van Duzer, Chet. 2013. Sea Monsters on Medieval and Renaissance Maps. London:
British Library.
17) Diffie, Bailey W. and Winius, George D. 1977.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p. 1-50.
18) Campbell, Tony. 2023. "Mediterranean portolan charts: their origin in the mental..."
Map History Archives. https://www.maphistory.info/PortolanOriginsTEXT.html (검색일:
2025년 12월 10일).
19) Matteo Valleriani, ed. 2017. The Structures of Practical Knowledge. Springer, pp. 1-50. 20) Harley, J. B., and David Woodward, eds. 2007. The History of Cartography, Volume
3: Cartography in the European Renaissa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1) "Charter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States General of the United
Netherlands, March 20, 1602).
22) EBSCO Research Starters. 2018. “Dutch East India Company is Founded.”
https://www.google.com/search?q=https://www.ebsco.com/research-starters/history/dutch
-east-india-company-founded(%EA%B2%80%EC%83%89%EC%9D%BC](https://www.go
ogle.com/search?q=https://www.ebsco.com/research-starters/history/dutch-east-india-com
pany-founded(%EA%B2%80%EC%83%89%EC%9D%BC) (검색일: 2025년 12월 10일)
- 46 - 해군력에 대항하기 또한 어려웠다.23) 이에 네덜란드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전국 의회는 이들을 통합하여 VOC라는 단일 조직을 만들었다. 포르투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거대 한 규모의 회사가 필요했기에 독점권 또한 허용되었다.24)
VOC는 단순한 상업회사라고 할 수 없다. VOC는 국가-기업 결합체 (Company-State)25)라고 불러야 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VOC는 상업회사였 기에 목표 자체는 동인도에서 향신료, 면화, 비단 등을 사서 유럽에 팔아 이윤을 남기 는 것이었다. 또한, 군사조직으로서 군함을 소유했고, 군인들을 고용했으며, 행정기구로 써 정복한 영토에서 법을 만들고 세금을 징수했다. 또한, 식민 개척자였기에 바타비아 (Batavia)26), 암본(Ambon)27), 반다(Banda)28)와 같은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건설했다. 이러한 기능들이 단일 조직 내에서 통합되었으며 전국 의회는 VOC 활동을 통제하기보 다는 지원했다. VOC가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무역을 장악할수록 네덜란드가 얻을 수 있는 이윤도 커졌기 때문이다.29)
이러한 국가-기업 결합체라는 구조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 된 것이었다. 중앙 권력이 지역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을 경계한 네덜란드는 강력한 중앙 군부 조직을 원치 않았기에 VOC에 식민지 건설의 업무를 위임했다고 결국 상인 회사가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30)
VOC의 이러한 성격은 네덜란드인들의 공간인식과 결합하여 대외팽창으로 이 어지게 되었다. 향상된 항해술과 지도 기술은 네덜란드가 바다를 정복 가능한 공간으로 인식하게끔 했고 네덜란드는 바다를 무한한 가능성의 장(field)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한 번 공간이 정복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정복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비합 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VOC가 이윤 최대화라는 목적을 가지고서 식민지를 정복하고 그 과정에서 대량학살과 노예무역의 문제들이 발생한 것은 현대의 경제학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비용-편익 분석’에 따른 의사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네덜 란드인들의 공간인식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섬나라에 머물면서 국내 안정 을 유지한 대신에 외국으로부터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울 수 있 었지만, 장기적으로는 19세기의 서구 제국주의의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네덜 란드는 결국에 세계로 나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23) ibid. 24) ibid.
25) ‘Company-State’의 개념은 단순히 ‘국가처럼(state-like)’ 혹은 ‘준국가적
(quasi-governmental)’인 조직이 아니라 근대 초기의 맥락에서 실제로 주권을 행사한 정치체
(polity)이자 기업 주권자(corporate sovereign)를 의미함.; Stern, Philip J. 2011. The
Company State: Corporate Sovereignty and the Early Modern Foundations of the British
Empire in India. Oxford University Press.
26) 현재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명칭. 27) 말루쿠 제도의 중심지로서 향신료(정향) 무역의 핵심 요충지였음. 28) 세계에서 유일하게 육두구(Nutmeg)가 생산되던 곳.
29) ibid.
30) Israel, Jonathan I. 1995.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
1806. Oxford: Clarendon Press.
- 47 -
Ⅲ. 공포의 상호 함정: 비대칭성의 논증 너머
클로우는 The Company and the Shogun에서 17세기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관계를 “조용한 협박(silent coercion)”으로 규정했다.31) 클로우에 따르면 일본은 일방적으로 VOC를 종속시켰으며 네덜란드 또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초의 상황은 16세기 말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활동과 기독교 신앙의 확산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기독교 박해라는 역 사적 맥락에서 일본의 엄격한 통제, 호프라이스 의례32), 기독교 포교 금지 등이 네덜란 드인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들이었음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양상으로 흘러 갔다. 클로우는 단순히 “유럽이 일본을 개항시키려고 들었으나 실패했다”라는 식의 서술 에서 벗어나 일본의 체계적인 네덜란드 통제를 주장했다. 1641년 VOC 상관의 데지마 로의 강제이전, 호프라이스 의례의 도입, 생활반경에 대한 엄격한 감시 등은 모두 일본 의 정치적 주도권을 입증하는 증거로써 활용되었다. 포르투갈이 추방된 이후에 일본과 유럽을 연결하는 유일무이한 무역 파트너가 된 네덜란드는 겉으로는 경제적 특권을 누 렸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절대적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 클로우의 핵심 논지였다.
토비(Toby)는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에서 이 시기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던 일본 을 쇄국 상태가 아닌 자국 중심의 외교 질서를 능동적으로 설계·운용한 행위자로 본다. 막부는 기독교 세력을 배제하는 대신에 조선과 류큐, 중국, 네덜란드 등 제한적인 파트 너들과의 교류를 통해 정보와 무역을 통제했으며 네덜란드 역시 일본이 필요에 따라 선택한 여러 정보·상업 채널 중의 하나라는 논지였다.
클로우와 토비의 ‘종속화’와 ‘일본의 절대적 우위’라는 시각은 일견 타당해 보 이지만 VOC의 일본 상관이 쓴 데지마 일기33)를 살펴보면 더 복잡한 현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라도에서 데지마로의 강제이전을 당하고 난 이후 1960년까지 VOC의 일본 펙토리장들이 작성한 일지를 살펴보면 일본 또한 네덜란드와는 다른 형태 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러한 양방향의 공포가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를 지탱 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클로우와 토비의 논증은 정치적 차원의 권력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경제적 차원의 의존성을 간과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군사력이 라는 요소만을 고려하며 경제력을 무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권력관계를 규정한다는 원칙’이 이미 17세기 데지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17세기의 데지마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상호 필요성이 상충하는 가운데 양측 이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절하게 관리하는 공간이었다. 통제와 복종이라는 단 순한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의 필요성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균형 속에서 관계가 유지되 었다. 이에 데지마 일지에 기록된 일본 관료들의 반복적인 질문과 가격 책정의 구체적 31) Clulow, Adam. 2014.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32) 클로우는 호프라이스 의례가 네덜란드의 일본에 대한 종속화를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33) 데지마로의 강제이전 전에는 히라도 일지
- 48 - 인 과정, 일본-네덜란드 관계의 제도화 과정을 통해 이전의 ‘비대칭성’ 논증을 재검토 할 필요가 있다.
1. 1641년 일본의 절대 통제 체제 1641년 데지마로 상관을 강제이전 당한 직후에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을 압도적인 권력 을 지닌 것으로 묘사한다. 당시 초대 팩토리장으로 재임한 얀 판 엘세라크(Jan van Elseracq)34)의 기록에 의하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다. 자유로운 이동의 자유가 없었고, 일거수일투족이 일본 관리들의 감시하에 있었으며, 기 독교 신앙의 표현 또한 절대적으로 금지되었다.
1641년 11월에는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기독교 예배 행위도 관찰되지 않도록 하고 일본인들이 개종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쇼군과 의뢰로부터의 가장 엄격한 명령이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이 고문으로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남겨 져 있다.35) 이러한 기록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얼마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는지와 함 께 기독교의 포교 금지는 일본이 서구 세력의 침투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 표현의 절대적인 금지라는 정책은 이미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일 본의 기독교 박해의 역사라는 배경 위에서 수립되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 하여 1614년 재차 기독교 금지령을 발포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서구 세 력의 침입 경로로 간주하여 일본의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으로 기독교가 일본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자 막부는 기독교가 제 국주의적 침략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1639년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완 전히 추방되기 이전까지 수십 년 동안 일본은 기독교 신자들을 체계적으로 탄압했다. 수천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고문과 화형, 익사 등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살되었다.36) 34) 1641년 11월부터 1642년 10월까지 근무
35) Jan van Elseracq, Dagregister, November 1641,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p.
78.
36) 데지마 일기(1638년 기록이기에 히라도 일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에는 네덜란드
인들이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하라 성
에서 농성하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던 3만 7천여 명의 반란군은 진압된 이후에 남녀노소
를 가리지 않고 전원 참수되었다. 1640년 일본에 온 포르투갈 사절단 중 61명이 처형되고
오직 13명만이 살아남아 마카오로 돌려보내진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는데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색채를 띠거나 금지령을 어기면 즉시 처형될 수 있다는 공포를 기록하고 있다.
고문 등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카론(François Caron)이 자신의 저서 A True Description of
the Mighty Kingdom of Japan and Siam에서 기술하고 있다(카론은 1619년 VOC의 요리
사 보조로 히라도에 처음 도착했으며 이후 히라도 상관장을 역임했다). 카론이 기록한 고문
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아나츠루시(穴吊るし, 구멍 매달기)로서 죄인
의 몸을 묶어 거꾸로 매단 뒤에 오물로 채워진 구덩이에 머리만 집어넣는다. 이때 피가 머리
로 쏠려 의식을 잃거나 너무 빨리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관자놀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게 했다. 이 상태로 며칠 동안 방치하여 정신적인 붕괴와 배교를 유도했다고
- 49 - 그 결과로 일본의 기독교 신앙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공개적인 종교 활동은 소멸하다시 피 했다. 1641년 데지마로 VOC 상관이 강제이전을 당한 이후에도 이러한 종교 억압 의 기억은 생생했다. 엘세라크가 언급한 “수천 명이 고문으로 죽었기 때문”이라는 표현 은 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단호하고 무자비한 태도를 네덜란드인들 또한 인지하고 있음 을 드러낸다. 또한 “쇼군과 의뢰로부터의 가장 엄격한 명령”이라는 표현은 이상의 표현 들이 일본의 최고 권력층의 결정임을 의미한다.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이 전국의 지방 관료들에게 하달되었고, 나가사키에 있던 지사들은 이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 것이다. 2. 반복되는 질문의 시작과 일본의 불안감 이러한 엄격한 통제 체제 속에서 역설적으로 일본 관료들의 불안감이 비롯되었다. 정치 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사력과 행정력에 기반을 둔 정치적 권력과 달리 경제적 필요성은 시장 메 커니즘과 상품의 유용성에 기반을 두기에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한다 치더라도 경제적으로 필요한 상품의 유통과 관련해서 약한 부분이 있다면 무 역 파트너로서의 가치와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643년에서 1644년에 걸쳐 일본 관료들은 VOC 팩토리장을 반복적으로 소환 하여 같은 질문을 한다. 그 배경에는 1641년의 톤킹 실크의 대량수입이 있었다. 톤킹 실크는 1637년부터 네덜란드가 일본에 직접 조달하기 시작한 상품으로 1641년에 이르 러서는 4227,249 길더37) 규모의 대규모 화물이 일본에 수입되었다.38) 당시 일본은 이 를 높은 수익률을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다량을 사들였으나 나가사키에서 판매될 당시 50%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예상치보다 훨씬 낮은 수익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일본 당국은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안았으며 이로 인해 일본 관료들은 향후 생실크 공 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642년 6월, 나가사키의 지사 바바 사부르자에몬(Baba Saburzaemon)을 만난 엘세라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생실크의 양이 이렇게 적은 이유를 물었다. 그의 톤은 화난 것이 아니라 불안한 것이었다. 그는 경제 상황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39) 긴 시간 동안 일본 관료들과 상호작용한 네덜란드인이 그들의 톤을 ‘협박’이 아닌 ‘불안감’으로 읽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적혀있다. 두 번째는 운젠 지옥(Unzen Hells)이다. 나가사키 인근의 운젠 화산(雲仙岳)에서
유황 온천물을 가져다 진행했으며 죄인의 몸에 끓는 유황 물을 조금씩 붓거나 유황 가스를
마시게 하여 피부가 문드러지는 고통을 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은 미노도오리(蓑踊り, 도롱이
춤)으로 죄인에게 마른 짚으로 만든 옷(도롱이)을 입힌 후 불을 붙여 고통스러워하며 뛰는
모습을 ‘춤춘다’라고 조롱하며 태워 죽이는 방식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Caron, François.
1935. A True Description of the Mighty Kingdoms of Japan and Siam. London: The
Argonaut Press.
37) 길더(Dutch Guilder): 15세기부터 2002년 유로화 도입 전까지 사용된 네덜란드의 법정 통
화
38) Leiden University Press, "Silk for Silver: Dutch-Vietnamese Relations, 1637-1700", 톤킹
실크 무역 기록 참조.
39) Jan van Elseracq, Dagregister, June 1643,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p. 145.
- 50 - 만약 클로우의 주장대로 일본이 순전히 정치적 통제와 ‘조용한 협박’으로 네덜 란드 상인들을 지배했다면 사부르자에몬의 톤은 화난 것이거나 최소한 우월감이 보이는 명령조의 어투여야 했다. 하지만 엘세라크가 기록한 것은 “불안한 것” 이었고, “경제 상황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라는 기록에서 미루어보아 우월한 권력을 지닌 자들이 통상적으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질문은 1643년의 9 월 11월에도 “여전히 같은 걱정”으로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1644년 1월과 3월, 5 월에도 반복되었다.40) 더군다나 이러한 질문들이 서로 다른 관료들에게서 나왔다는 점 을 고려하면 이러한 불안감이 사부르자에몬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일본 당국 전체의 체 계적인 관심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3. 경제적 의존성의 구조 형성과 양방향의 공포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추방된 이후 일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중국과의 주요 무역 경 로들이 변화했다. 포르투갈이 추방되기 이전에 일본은 여러 무역 중개자들-포르투갈, 중국 등-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일본에게 무역 중개자들을 선택하는 데 협상력이 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추방된 이후에는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서만 중 국 상품을 수입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일본의 유일한 서양 무역 파트너로 등극했고 중국 상품을 일본에 공급하는 공식 채널이자 ‘독점’을 향유했다. 만약 네덜란드가 생실 크를 충분히 공급하지 않는다면 일본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실크라는 주요 상품의 공급이 단 하나의 공급망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현대 경제학적 용어로 ‘공급사슬의 집중화(supply chain concentration)’이었다. 네덜란드가 생실크 공급을 중단할 가능성, 네덜란드가 가격을 급격히 올릴 가능성, 네덜란드가 일 본 시장에 흥미를 잃고 다른 지역으로 떠날 가능성 등 가상의 시나리오들이 일본 관료 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1644년 중반에는 피터 안토니스 오버트워터(Pieter Antonisz Overtwater)41)가 일본 당국의 경제적 곤경을 기록했다. “그들은 내 이유들이 타당하다고 대답했다. 그러 나 지난해의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 그 높은 가격을 그 이후 수입된 모든 비단에 대해 지불해야 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이 겨울에 엄청난 양의 비단을 수입했고, 그들도 같은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으며,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42) 이 기록에 의하면 1641년에 생실크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었고 일본은 그 가격에 대량의 생실크를 구매했다. 이후에 시장 상황이 변화해 생실크의 시장 가격이 하락했거나 수요가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상인들과 당국은 높은 가격으로 구매한 생실크를 더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여 막 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이 경제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동시에 공급자인 네덜란 드 상인들의 영향력이 증가했음을 의미했다.
40) ibid.
41) 오버트워터는 1642년 10월부터 1643년 8월까지 VOC 일본 팩토리장을 역임한 후, 1644년
11월부터 1645년 11월까지 팩토리장을 재역임했다.
42)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1644,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 51 - 1644년에 사부르자에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너희 네덜란드가 떠난다 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큰 곤경에 빠질 것이다.”43) 이는 일본의 관 료가 네덜란드가 떠나면 일본의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1641년 11월부터 1644년 11월까지 3년의 기간 동안 일본의 절대적 우위로 시작한 관 계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의존성이 권력관계를 변화 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들에서 미루어보아 일본은 네덜란드인들을 협박했지만 동시에 네 덜란드도 일본에 대한 협상력을 가지고 있었고 네덜란드가 떠날 수 있다는 위협 또한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일본의 절대적인 정치적 우위 하에서 일본이 계속해서 네덜란드에 경제적 손실을 강요한다면 네덜란드가 가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은 “떠나는 것”이었다, 공급망이 다각화되어 있었을 때는 이러한 위협에 현실성이 별로 없었기에 협상력이 떨 어졌지만, 공급망이 일원화되자 이러한 위협이 일본 당국자들에게 현실화된 것이다.
일본의 네덜란드 상인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력의 우위와 더불어 네덜란드 상인 들의 경제력 측면에서의 우위는 ‘상호 억지력(mutual deterrence)’를 형성했다. 양측이 모두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극단적인 행동이 자제될 수 있었다. 데 지마에서 또한 일본은 네덜란드를 추방할 수 있다는 위협능력을 가지는 동시에, 네덜란 드 또한 떠날 수 있다는 위협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17세기 당시의 일본의 전체 경제 규모(GDP) 대비 VOC를 통한 교역이 차 지하던 비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GDP를 명확히 측정한 자료는 부재하나 1637년 일본의 전체 규모 자체는 약 9억 4,500만 국제 달러44)로 추정된다.45) 이를 기준 으로 보아 1637년의 VOC 무역 규모인 42만 7,249길더의 비중을 계산하면 당시에 VOC 와의 교역이 일본의 전체 GDP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0.01% 만의 극히 미미한 규모임을 확인할 수 있다.4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관료들의 공포가 부재하지는 않았다.
우선 VOC와의 무역이 일본 전체 지역에서 균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을 고려해야 한다. VOC와의 무역은 히라도, 나가사키, 그 주변 지역들에만 집중되었으 며 이 지역들에서는 일본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달리 VOC와의 교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637년 히라도의 VOC 상관의 총 무역액(42만 길더)은 도쿠 가와 막부 전체의 연간 재정(약 700~750만 석의 쌀 수익47))에 비해 미미해 보이지만 43)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November 1644, The Deshima Diaries 1641–
1660.
44) 1990년 미국 물가 기준; Saito와 Takashima의 종이에서 사용된 기준을 사용.
45) Osamu Saito and Masanori Takashima. 2015. "Estimating the shares of secondary- and
tertiary-sector output in the age of early modern growth: the case of Japan,
1600-1874," RCESR Discussion Paper Series No. DP15-4. Tokyo: Hitotsubashi
University.
46) 1637년 히라도 무역액 427,249길더를 금은 환율(당시 1길더 ≈ 약 2.5-3g의 은)을 기준으
로 환산하면 약 10~15만 달러 규모로 GDP(9억 달러)의 약 0.011-0.017%에 해당한다. 이
계산은 보수적인 추정이며, 실제 비중은 더 낮을 수 있다.; ibid.
47) Howell, D. L. (Ed.). (2023). “Economy, Environment, and Technology”. The New
Cambridge History of Japan (pp. 227–440). p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 52 - 히라도의 영주와 나가사키 지역의 상인들, 더욱이 실크 판매상들에게는 직접적인 수입 원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히라도와 나가사키는 인구가 약 50,000~100,000명에 불과한 도시였지만48) 이 지역들을 통한 VOC와의 무역은 이들 도시 상인층의 상당수의 생계를 좌우했다.49) 특히 포르투갈이 1639년 추방된 이후에는 지역상인들과 도시 관료들은 오직 네덜란드와의 무역만이 정상적인 수익의 원천이었 다.50)
VOC를 통해 일본으로 수입되던 생실크라는 상품의 성격 또한 고려해야 한다. 오버트워터가 기술하듯이 생실크가 일본의 정치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없 다.51) 17세기에 일본에 대량 수입된 실크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일본의 권력층-도 쿠가와 막부의 고위 관료들, 부유한 상인층-의 지위를 상징하고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 하는 수단이었다.52) 도쿠가와 막부 당시 고급 실크는 기모노의 주요 소재였으며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과 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53) 또한, 실크는 외교 선물 및 막부가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하사하는 선물 중 주요 품목이었다.54) VOC를 통해 들여 오는 생실크의 공급이 막힐 경우에 생실크의 부족은 단순한 사치품의 부족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적인 약화-도쿠가와 막부의 다이묘들에 대한 선물이 중단-을 의미했다.55) 이러한 점들에서 1641~1642년의 가격 협상에서 일본 관료들이 보인 불안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생실크 수입이 야기한 상업적 손실이 관료들에게는 실크를 앞으로 계속 해서 공급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으로서 작용한 것이다.
Press.
48) Clulow, Adam. 2014.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pp. 42-45.
49) Reinier H. Hesselink, Prisoners from Nambu: Reality and Make-believe in
Seventeenth-Century Japanese Diplomacy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2),
pp. 112-145.
50) Adam Clulow, "The Domesticated Monopolist: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and
the Shogunate in Seventeenth-Century Japan," Journal of Early Modern History Vol. 14,
No. 3-4 (2010): 291-331.
51)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September 20, 1644,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p. 223.
52) Screech, Timon. 2002. The Lens Within the Heart: The Western Scientific Gaze and
Popular Imagery in Later Edo Japa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23-167; Jansen, Marius B. 2000. The Making of Modern Japa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p. 34-40.
53) Dalby, Liza. 1993. Kimono: Fashioning Cultur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pp. 145-178.
54) Jurgis Elisonas, "Christianity and the Daimyo," in John Whitney Hall, ed.,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4: Early Modern Jap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360-407.
55) Mary Elizabeth Berry, Hideyoshi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pp.
78-92.
- 53 - 17세기 일본의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 또한 VOC와의 무역의 중요성을 증가시켰다.56) 17세기 일본은 연간 약 150톤의 은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은 광산국 이었지만57) 막대한 양의 은의 공급은 동시에 심각한 통화 문제를 야기했다.58) 과도한 은 생산은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낳았으며 막부로서는 이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59) VOC와의 무역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은을 소비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60) 일본이 네덜란드에 은을 지불하고 생실크를 구매하는 과정은 국내 은의 과잉 공급을 조절하는 자동 균형 기제였다. 만약 네덜란드가 떠나면, 일본은 은을 해외로 정기적으로 배출하 는 새로운 창구를 찾지 않는 이상 국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나가사키 지역 관료들의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이해관계 구조도 고려해야 한 다. 바바 사부르자에몬 같은 나가사키 지사는 상당한 부분 VOC 무역으로부터의 세수 와 상업 규제료에 의존했다.61) VOC가 일본에서 철수할 때는 이들 관료 개인의 수익도 크게 감소할 것이었다.62) 1642년 6월의 기록에서 사부르자에몬이 "화난" 것이 아니라 " 불안한"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보인 이유는 국가 경제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본인의 직 위 유지와 수익 보장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3)
이상의 사항들에 더해서 포르투갈의 추방 이후 네덜란드가 외국과의 유일한 공 식 무역 채널로서 존재하는 ‘공급사슬 위험’의 상태를 고려하면 일본 관료들의 공포는 지역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권력의 상징적 표현의 공급, 관료 개인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데지마 일기에 기록된 관료들의 불안감과 생실크의 공급에 대한 반복되는 질문들은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64) 일본 관 료들의 공포는 단순히 "네덜란드 무역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라는 인식이 아니라 "일본은 네덜란드라는 단일 공급처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들이 철수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연쇄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라는 실질적인 위기 인식이었다.65)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결국 1644년과 1645년에 걸친 상호 억지력을 작동할 수 있게 했으며 이를 56) Atelier Japan, "Japanese Silver: Trading over time" (2024).
57) Dennis O. Flynn and Arturo Giráldez, "Cycles of Silver: Global Economic Unity
through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Journal of World History Vol. 13,
No. 2 (2002): 391-427
58) Tashiro Kazui, "Foreign Relations during the Edo Period: Sakoku Re examined,"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 8, No. 2 (1982): 283-306; Yoshida Tora, Edo Jidai no
Kahei Seido [Edo Period Monetary System] (Tokyo: Ochanomizu Shobo, 1951), pp.
145-178.
59) Sakudo, Yozo.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Japan," in Terence K. Hopkins and
Immanuel Wallerstein, eds. 1980. Processes of the World-System. Beverly Hills: Sage.
pp. 109-139.
60) Flynn and Giráldez. 2002. "Cycles of Silver," Journal of World History (Vol. 13, No.
2: p.p. 391-427).
61) Overtwater, "Dagregister," 1642-1645, The Deshima Diaries, p. 225. 62) Hesselink, Prisoners from Nambu, pp. 122-135.
63) Jan van Elseracq, "Dagregister," June 1642,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p. 145. 64) 3.2 파트 참고
65)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November 1644, The Deshima Diaries 1641–
1660, p. 228.
- 54 - 통해 양국은 타협의 제도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4. 호프라이스 의례와 타협의 제도화
"네덜란드인들이 연속으로 2년 동안 손실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 망해서는 안 되며, 앞으로는 히라도에서 오랫동안 해온 것처럼 이윤을 낼 것이라는 믿 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기록에서 일본 당국자가 네덜란드 상인들을 격려한 이유는 일 본이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계속해서 이윤을 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네덜란 드가 계속해서 손실만 입는다면 언젠가는 일본에 관심을 잃고 떠날 수 있다는 점을 우 려한 것이다. 1609년에서 1641년까지 네덜란드가 히라도에 33년간 무역소를 유지한 기 간을 언급한 것은 데지마에서 또한 히라도에서와같이 이윤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유 인(inducement)이었다. 이처럼 양방향의 유인과 협박이 결합하여 관계의 안정성을 구현 하고 있었다.
1644년의 10월에서 11월에 이르는 일지에서 오버트워터는 생실크의 가격에 대 해 일본 상인들과 당국이 높은 가격에 대량 구매해서 손실을 보았기에 올해는 더 낮은 가격을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측이 반복되는 절차를 통해 협 상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이는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관계가 제도화-협상의 기본 틀에 양측이 동의했다는 점-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협상 과정에서 오버트워터는 자신의 요 구를 완전히 관철하지 못했다. 일본 당국이 제시한 가격은 "1등급은 320 타엘, 2등급은 280 타엘이었다." 오버트워터는 이 가격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1등급과 2등급 사이 에는 40 타엘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가격들에 항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내 항의는 귀를 기울임을 받지 못했고, 나는 그 가격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것이 "협상"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일방적인 가격 책정이었 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협상 절차를 거쳤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일방적인 가격 책정 에 불과했다. 일본이 네덜란드의 이탈을 우려하면서도 가격을 강하게 밀어붙인 이유에 는 일본의 공포가 가격 협상 이상의 더 깊은 구조적 문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음을 시 사한다. 막부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 거래에서의 최대 이윤이 아니라 네덜란드를 일본이 형성해둔 질서 내에 영구적으로 안착시킨 것이었다. 가격의 일방적 책정을 통해 일본은 ‘너희는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치적 우월성의 명시와 ‘우리는 너희를 필 요로 한다’는 경제적 의존성의 은폐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결국, 일방적인 가 격 책정은 네덜란드를 일본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일본이 제시 한 조건으로만 일본 내에 머무를 수 있다는 위계를 확립하려는 행위였다. 네덜란드는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일본 시장에 남았고 이는 일본 관료들에게 네덜란드를 충분히 통 제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경제적 의존성을 정치적 우월성으로 ‘봉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설적 관계는 오버트워터의 이어진 기록에서 추가로 논의된다. 오버트 워터는 일본이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에 대해 “네덜란드는 일본 시장이 필요했고, 일본 당국은 네덜란드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
- 55 - 했다.66) 양측 모두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극단적인 선택-철수 혹은 추방-보다 는 낫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일방적 우 위로 포장됨으로써 양측은 관계의 불안정성을 은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상호 공 포가 일본의 가격 강압이라는 형태로 제도화된 방식이었다. 호프라이스 의례는 이러한 상호 공포와 상호의존성의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호프라이스는 독일어로 " 궁정 여행"을 의미하며 네덜란드 팩토리장은 매년 에도에 가서 쇼군을 만나고 선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쳐야 했다. 클로우는 호프라이스를 네덜란드의 종속화를 상징하는 의 례로 해석했다. ²³ 그리고 초기 기록들, 특히 엘세라크의 1641~1642년 기록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반드시 틀리다고 볼 수는 없다. 호프라이스 의례 자체가 네덜란드인들에 게 매우 굴욕적인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프라이스 과정은 극도의 감시 와 제약이 특징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에도로 가는 길에 감시자들이 상인들을 따라다녔으며 에도에서도 지정된 숙소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호 프라이스를 통해 일본은 네덜란드를 명확하게 종속시키고 있었으며 클로우는 이것을 정 치적 서열을 확립하는 의례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호프라이스에는 의례를 거침으로써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 쇼군의 신 하가 되었다는 의미도 있었다. VOC 상인들은 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히라도 기록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네 덜란드 상인들이 호프라이스 기회를 얻기 위해 경쟁하던 모습을 보면 호프라이스를 통 해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네덜란드만이 쇼군을 알현하고 일본 내에서 공식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유일한 서 양 무역 파트너로서 네덜란드는 유럽이 일본 시장에 접근하는 것 또한 제한할 수 있었 고 이는 네덜란드에 엄청난 경제적 이윤으로 이어졌다.
5. 권력의 이중성과 상호 구속의 안정화
클로우의 "비대칭성" 논증의 근본적 한계는 권력을 단일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일본이 독점했지만, 실상은 정치적 권력은 일본이 압도적이었지만 경제적 권력은 양측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오버트워터는 정치적으로는 일본 당국의 결 정에 따라야 했다. 생실크의 가격, 무역 기간, 판매 방식, 창고 위치, 심지어 무역소의 건축 자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일본 당국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오버트워터의 항의 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고수한 가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도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네덜란드를 완전히 짓누를 수는 없었다. 생실크가 없으면 일본의 경제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고 상인들과 당국은 큰 손 실을 감수해야 했었다. 지나친 억압은 네덜란드가 떠난다는 선택지를 고려하게끔 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은 네덜란드가 계속해서 일본과의 무역에 임하도록 유인해야 했다. 결 국, 정치 권력은 일본이 압도적이었지만 경제 권력은 네덜란드 또한 일본에게 필수적으 66)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1642, November. The Deshima Diaries 1641–
1660.
- 56 - 로 됨으로써 권력의 이중적 구조를 보였다.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는 약했지만, 경제적 으로는 필수적이었다.
1644년의 협상 기록은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의 미묘한 '상호 억지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준다. 당시 일본은 무역의 최종 결정권을 쥔 주권국이었으나 네덜란드 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무역 자체를 철회(Exit option)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협 수단 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측은 상대의 극단적 선택이 가져올 공동의 손실을 인지하고 있 었으며, 이러한 인식이 타협의 지점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타협의 반복은 협상의 과정과 절차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며 '협상의 정례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 은 단순한 심리적 위협에 그치지 않았다. 양측 모두 극단적 행동으로 인한 자원 낭비와 경제적 손실을 회피하고자 했기에 충분한 위협능력이 오히려 행동의 자제로 이어지는 상호 억지의 균형이 달성되었다.
1645년에 이르러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양방향 긴장 관계는 본격적인 '제도적 공식화' 단계에 진입한다. 『데지마 일지』에 따르면 일본 당국과 VOC 팩토리장의 관 계는 일방적인 협박과 복종을 넘어 상호 필요성을 인정하는 실무적 관계로 진화했다. 매년 정해진 시기에 협상을 진행하고, 반복적인 절차에 따라 가격 변동 폭을 예상 범위 내로 한정하며, 일본의 최종 결정 과정에 네덜란드의 이의 제기권을 실질적으로 고려하 는 구조가 안착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화는 일본에게는 체계적인 통제권을, 네덜란드에 게는 안정적인 무역 환경을 보장하며 양측 모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관계 제도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 강요가 아 닌 장기간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정교한 균형의 산물이었다.
1645년 기록에 등장하는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政重)의 발언은 에도 막부의 네덜란드 인식이 통제의 대상을 넘어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오메 츠케(大目付)67)이자 치쿠고노카미(筑後守)68)로서 대외 정책과 종교 통제를 관장하던 이노우에가 네덜란드 팩토리장에게 "너희는 불가결하다."69)라고 말한 것은 네덜란드가 제공하는 효용 가치에 대해 일본 정부가 내린 전략적 승인이자 양국 관계의 성격을 나 타내는 것이었다.
이노우에가 언급한 가치는 정보와 경제라는 실용적 축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정세와 국제 무역 네트워크의 동향을 파악하며 세계의 역학 구도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를 획득하는 동시에 생실크를 비롯한 상품들은 일본 내부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키고 막부의 재정적 안정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다. 네 덜란드는 막부에게 정치적 안목과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 67)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으며, 광범위한 정보 수집 및 감시 권한을 가지고 있
었다. 17세기 전반에는 기독교 박해 업무와 나가사키를 통한 해외 교역 관리도 오메츠케가
담당했다.
68) ‘치쿠고 지방(現 후쿠오카현 남부)의 지사(수령)’라는 뜻으로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전
과 달리 실제 통치권과는 무관하게 무사들의 격식과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막부가 부여한
일종의 훈장이나 관등과 같은 역할을 했다.
69) Pieter Antonisz Overtwater, Dagregister, 1645, The Deshima Diaries 1641–1660, p.
250.
- 57 - 한 점들을 고려할 때 "너희를 왜 소중히 여기는지 이제 이해할 것"70)이라는 이노우에의 언급은 일방적인 위협이나 복종의 요구가 아닌, 상호 필요성을 인정한 태도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Ⅳ.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의 일본 인식
17세기 초 일본에 도착한 네덜란드 상인들은 VOC의 광대한 제국 건설 경험을 바탕으 로 일본 시장에 진출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여타 지역에서 경험했던 메커니즘-군사 적 우위를 통한 강압, 요새화를 통한 영토 지배 등-이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았다.71) 1609년 히라도에 첫 무역소를 연 이후 1641년 데지마로 강제이전 당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네덜란드 상인들은 도쿠가와 막부가 정한 질서 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정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쇼군을 “천황폐하(Your Majesty Empero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초기 네덜란드가 일본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대해 가진 기대는 매우 컸다. VOC는 광범위한 확장을 기대했고, 포르투갈이나 영국과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일본 의 주요 상업 파트너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이오우에와 같은 막부 관료들의 강력한 저 항에 직면하면서 네덜란드는 자신들이 기대한 미래가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1627년 의 누이츠 대사 사건과 1637년에서 1638년까지 이어진 시마바라 반란 사태를 겪으면 서 VOC는 데지마로 강제이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채택한 “천황폐하”라는 호칭과 쇼군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절은 한편으로는 네덜란드인들의 정치적 종속을 의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략적 선택으로 서 작동했다. “천황폐하”라는 호칭은 VOC의 공식 문서뿐만 아니라 팩토리장들의 사적 인 일기(데지마 일지)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이는 VOC의 네덜란드인들이 막부 의 권위를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데지마의 상관에 머무르던 시기 동안 팩토리장들은 연 례적인 호프라이스(에도 조현식)에 참석하여 쇼군에게 절을 하고 선물을 바쳤다. 이러 한 의례들은 막부의 정치적 우월성을 상징했으며 에도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감시를 받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하로서의 정체성은 VOC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 네덜란드가 쇼군의 신하가 됨으로써 네덜란드의 주된 경쟁자이던 포르투갈을 포함하여 유럽의 여타 세력들을 배제할 수 있었다. 호프라이스 의례를 통한 정치적 종속은 표면 적으로는 일본의 정치적 우위를 확인하는 절차였지만 동시에 네덜란드인들에게 일본 내 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70) ibid.
71) Clulow, Adam. 2014.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58 - 1639년에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기독교 포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추방된 이후에 네덜란드는 일본과 중국 간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는 유일한 유럽 세력이 되었 다. VOC 팩토리장들의 일지에는 막부가 “나가사키 지역 행정관들의 부패와 불공정한 행동을 완전히 모르고 있으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라는 점 을 파악하고서는 정치적 종속을 경제적 특권의 대가로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네덜란드의 일본에 대한 완전한 종속을 뜻하는 것은 아 니었다. 막부 관료들은 반복적으로 생실크 수입량에 대해 질문하면서 팩토리장인 엘세 라크에 불안감을 표출했다. 만약 일본이 순전히 정치적 우월성에 기반을 두어 네덜란드 를 압도했다면 관료들의 태도에는 명령조의 우월감이 드러났을 것이지만 오히려 국내 경제 상황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 수입된 생실크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규모의 화물이었다. 일본은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면 이를 대량 구매했 으나 실제로는 기대보다 낮은 수익률을 기록하며 일본 당국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이후 일본 관료들의 반복되는 질문들은 이러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절박한 시도였 다.72) 포르투갈을 추방한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가 생실크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따로 공 급받을 여타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가격을 급격히 올릴 가능성, 일본 시장에서 철수할 가능성 등이 일본 관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이러한 불안감의 표현이 나가사키 지사에 의해서 표출된 것이다.
VOC 대표들이 일본의 다층적인 권력 구조에 대해서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음 도 주목할 만하다. 네덜란드인들은 에도 중앙 정부의 고위 관리들(Raetsheeren)과 나가 사키 지역 행정관(Regent) 사이의 구조적 갈등을 이해하는 동시에 이를 자신들의 이익 을 위해 활용했다. 특히 라에츠헤렌 타키몬돈네(Raetsheeren Takimondonne)와 같은 일부 관료들이 네덜란드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때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 을 보인다.
1645년에 이르면 네덜란드와 일본은 매년 정해진 시기에 가격 협상을 진행하 고 반복적인 절차에 따라 가격 변동 폭이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되는 과정에서 협상이 예측 가능한 궤도에 올랐다. 가격의 최종 결정은 일본이 하고 이에 네덜란드의 이의 제 기권이 실질적으로 고려되는 구조가 안착하였다. 이는 일본이 네덜란드를 추방할 수 있 다는 위협과 동시에 네덜란드 또한 떠날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 호 억지력의 작동을 의미했다. 이에 양국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인한 자원 낭비와 경제 적 손실을 피하고자 타협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호프라이스 의례는 이러한 상호의존 성을 제도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 기능했다. 호프라이스를 통해 일본은 네덜란드의 정치 적 종속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네덜란드가 일본과의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를 고려하면 “황제 폐하께서 당신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일본의 일방적 시계가 아니라 상호 필요성의 인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72) 이에 대해서는 4.3. 파트를 참고.
- 59 - 결국, 네덜란드인들의 일본 인식은 일본 진출 초기의 제국 팽창론에서 현실적 적응으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준다. VOC가 타국에서 경험한 군사력과 외교적 우월성은 일본에서 작동하지 않았기에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의 정치적 질서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 결과 “천황폐하”라는 호칭과 호프라이스 의례를 통한 정치적 종속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종속화는 일방적인 강압의 결과만은 아니었으며 경제적 필요성 이 만든 상호의존의 구조 속에서 네덜란드 또한 일본 시장의 독점권이라는 경제적 특 권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네덜란드인들의 일본 인식은 역설적 보완성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을 자신들이 정복할 수 없는 강력한 국 가로 인식하는 동시에 일본이 자신들을 필요로 함을 이해했고 이러한 상호 필요성의 구조 속에서 제도적 관계를 구축했다. 일본에게 정치적으로는 종속되지만, 경제적으로 는 필수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제도화된 것이 매년 반복되는 호프 라이스 의례였다.
Ⅴ. 결론
17세기 네덜란드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관계는 기존의 ‘종속화’와 ‘일본의 절대적 우위’라는 분석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불충분하며 ‘상호 공포와 경제적 의존성의 제도화’ 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데지마 일기에는 3년간 진행된 생실크 협상 과정에서 일본 관료들이 보인 불안감이 단순히 협박이 아니라 네덜란드에 대한 구조적 의존성에서 비롯된 우려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가사키 지사가 만약 네덜 란드가 떠날 경우에 일본의 경제를 우려한 것은 일본의 압도적 정치적 우월성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본의 경제적 취약성을 드러낸다. 일본은 포르투갈을 추방한 이후 생 실크 공급을 네덜란드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급사슬의 집중화가 양국 관계의 근본적인 구조를 변화시켰다.
VOC 펙토리장들 또한 일본 시장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일본 시장에 남으려고 했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추방하거나 네덜란드가 일본 시장에서 철수하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한 상호 손실을 피하는 것이 양측 모두 에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본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17세기의 국제관계에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정치적 차원에서 절대적 우위를 유지했지만, 경제적 차원에서 차츰 네덜란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게 되었다. 생실크 대량수입으로부터 야기된 경제 손실은 단순한 일본 내의 시장 실패가 아니라 공급사슬의 다각화가 없었기에 일어난 구조적 위기였다. 일본 관료들의 생실크 수입에 대한 반복적인 문의는 이러한 의존성에서 시작된 불안감의 표출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양국 관계에 변화를 야기했다. 이러한 권력의 이중성은 현대의 국제관 계 이론에서 논하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권력관계를 규정한다“는 원칙의 초기
- 60 - 사례를 제공한다. 기존 연구들은 정치적 서열 관계에는 주목했지만, 경제적 구조가 정 치적 결정을 제약하는 메커니즘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
1644년에서 1645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전까지 일본의 일방적 통제와 네 덜란드의 복종이 주를 이루든 관계는 상호 억지력이 작동하는 관계로 변화했다. 양측이 모두 상대방을 완전히 이길 수는 없고, 이길 필요도 없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극단적 인 행동들이 자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 고 있었지만 이를 실행할 경우 네덜란드가 제공하던 정보와 무역 물품들에서 손실이 일어날 수 있었다. 네덜란드 또한 VOC 상관이 일기에서 ’이윤을 낼 수 있다면‘ 일본에 머물 것이라고 기록한 점에서 미루어보아 계속해서 손실을 볼 경우 언제든 떠날 수 있 다는 암묵적 위협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양방향의 공포는 협상의 정례화라는 제도적 형태로 고착화되어 타협의 공간을 창출했다. 1645년 이후에 양국은 매년 정해 진 시기에 가격 협상을 진행하며 협상 과정 및 가격 변동 폭 또한 일정 범위 내로 제 한되었다.
호프라이스 의례 또한 단순히 네덜란드의 정치적 종속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의례를 통해 네덜란드가 쇼군의 신하 됨을 자처함으로써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 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과 호프라이스 의례 기회를 두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의례가 단순히 종속의 표현이 아닌 특권의 인정이기도 했음을 시사 한다. 호프라이스는 양면성을 가진 의례였으며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정치적 우월성을 확 인하는 절차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네덜란드에 일본 내 독점 무역권을 보장해줬다. 네덜란 드 또한 매년 반복되는 의례를 통해 자신들이 일본과의 관계를 지속할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으며 일본에게 네덜란드가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과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관계는 ’공포의 거래‘였다. 하지 만 이 공포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일본은 기독교 세력의 침투와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공포 그리고 네덜란드의 철수가 야기할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이라는 강력한 국가와 매력적인 시장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양측의 공포는 협상 테이블 위에서 타협의 지점을 찾았으며 이러한 가정 에서 VOC는 일본에 정치적으로 종속되면서도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위치에 자리 잡았 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17세기의 데지마는 단순히 식민지도 아니고 완전한 독립 도 아닌 상호 공포와 경제적 의존성이 제도화된 공간이었다.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일 본은 군사력이나 정치 권력이 아닌 경제적 필요성을 통해 관계의 틀을 구축했으며 이는 근대 초기 국제관계에 색다른 모델을 제시했다. 군사력이나 정치적 압박이 아닌 상호 필 요성이 만드는 제도화된 타협의 힘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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