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장의 “제도적 비가역화”: 하노이 이후 북한의 핵교리 전환과 한미의 대응
사랑방의 젊은 그들 진경을 찾아 헤매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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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자료관
김채린
서울대학교 외교학전공 석사과정
I. 서론
1. 연구 배경 북한의 지속된 핵무장을 추동하는 근원적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 1990년대 제1차 북핵 위기 이래 30여 년간 지속된 핵개발 과정에서, 북한은 202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를 채택하며 핵 보유를 완전히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2022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입법화된 해당 법령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력은 국가의 주권과 령토 완정, 근본 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방지하며 세계의 전략적 안정을 보장하는 위력한 수단”이라고 규정된다. 또한 동 법령은 조선이 보유한 핵무력의 사명을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 공격으로부터 국가 주권과 령토 완정, 인민의 생명 안전을 수호하는 국가방위의 기본 력량”으로 명시한다 (조선신보, 2022). 즉, 조선의 핵무력은 한반도 영토 완정을 실현하는 ‘위력한 수단’임에 동시에 핵무력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새로운 양상에 대해 상이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일군의 학자들은 북한의 핵무장을 한반도 내 권력균형의 근본적 전환을 지향하는 ‘수정주의적(revisionist)’ 행태로 규정하는 한편, 다른 진영에서는 이를 제약된 구조 속에서 체제 생존을 극대화하기 위한 ‘생존주의적(survivalist)’ 선택으로 이해한다. 북한의 핵무장을 인식하는 시각 자체가 정치 성향에 대한 일종의 리트머스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영화된 해석 틀은 ‘북한의 시각’ 자체를 정책의 공식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본고는 북한의 핵무장이 이념적 극단성에서 기인하는 현상타파적 시도도, 단순한 생존을 위한 임시방편도 아닌, 일종의 제도화 내의 비가역화 과정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적 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 HI)의 경로의존(path dependency)에서 일부 개념을 차용한다. HI에 따르면
- 4 - 제도(institutions)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을 특징으로 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에 대한 저항—즉 안정성이 증가함에 따라—한 제도의 경로 전환(path switching)이나 역행(reversal)은 점점 더 달성하기 어려워지고, 궁극적으로 제도는 고착(lock-in)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Rixen et al., 2016, 27). 즉,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비가역화가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제도적 비가역화(institutional irreversibility)’이라는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핵보유라는 정책적 선택이 법, 담론, 그리고 교리를 거쳐 ‘되돌리기 어려운 구조’로 고착되는 과정을 관찰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접근으로부터 하여금 핵무장 자체의 동기나 성격에 고착되기 보다, 핵정책이 다양한 국가전략의 층위에서 구조적인 요소로 변하는 매크로(macro)적인 성격을 포착하는 데에 의의를 둔다.
2. 선행 연구 검토
기존 연구들은 현실주의·이상주의·구성주의, 억지(deterrence) 이론, 혹은 미치광이(madman) 이론 등을 활용해 북한의 핵추구 동기를 해석해 왔으며 (Kwon 2022; Cheung and Haggard 2021; Park 2022; Alexandrova and Lee 2021), 북한의 핵추구 동기를 국제적 위상, 지도자 심리, 엘리트 구성, 대외안보 강화라는 네 축으로 설명해 왔다 (Kim 2021).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대부분 ‘외부 위협 대응’이라는 단일 동인에 과도하게 수렴해 있기에, 북한이 왜 타 후견국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력이 취약해진다 (Kim 2021).
수정주의적 독해에서 북한은 “무력 사용을 통해 한반도 내 권력균형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국가, 즉 현상 파괴자(status-breaker)로 위치한다 (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2023). 이들 학자들은 주로 북한이 장기간의 경제적 제재 및 인도주의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을 경험적 근거로 제시하며, 이를 한반도 내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지배”하고 남북 군사력 균형의 역전을 지향하려는 장기 목표의 신호로 해석한다 (우승지, 2013; 윤덕민, 2019). 반면 생존주의적 해석은 북한의 핵개발을 체제 내재적 공격성의 산물이 아니라, 제약된 구조 속에서 생존을 극대화하기 위한 실용적 선택으로 이해한다. 북한이 현상유지의 전면적 전복을 지속적으로 회피해 왔고, 오히려 ‘지속적 위기 수준’의 관리에 가까운 행태를 반복해 왔다는 점은 핵전력이 대외전략의 ‘외교 수단’으로 작동해 왔음을 시사한다. 즉 핵무장은 정권 생존을 보장할 뿐 아니라 협상과 압박을 병행하는 “선별적 분열(selective disruption)”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한국과 미국의 대북 선택지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 및 유도한다는 것이다 (박진휘, 2013; 이수원 & 하상섭, 2023).
그러나 북한의 핵무장을 단순히 현상타파와 비-현상타파의 양분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북한 고유의 통치체계 및 그들의 표현법에 충분히 주안점을 두지 못한다. 북한은 2005년 스스로를 ‘핵보유국’으로 선언한 이후, 당의 노선, 헌법, 관련 법률 등 통치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규범적 장치들에 ‘핵보유’와 ‘핵무력’을
- 5 - 명시적으로 삽입하였다. 김정은 정권 하에서의 핵무장은 단순한 군사·안보적 수단을 넘어, 체제 유지와 통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국가 운영 기제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그 정치적·제도적 성격이 공고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홍민, 2015).
한편, 강대국 중심의 국제 비확산체제는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핵보유를 추동하는 북한에 대하여 압박과 제재를 가해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을 위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확산금지조약(NPT) 등 수평적 핵확산 방지 시스템 하의 국제사회 제재는 북한의 외교·경제적 고립을 초래하여 인도적 상황에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가(cost)’는 결과론적으로 북한의 핵 포기를 촉발시키지 못하였다. 북한은 오히려 대북 인도적 지원을 거부하며 재외공관의 일방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등, 제재로 촉발된 ‘고립’에 적응하여 이를 국가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하려는 양상을 보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북한의 공식적인 핵 정책이 30-40년간의 핵 개발이 이미 시행된 후인 2022년에야 비로소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씨 정권은 핵전략과 대외적인 핵 정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우선적으로 핵 능력 고도화에 국가 역량을 집중한 후, 대외적인 안정을 확보한 시점에서 전략 및 정책을 설계한 것이다 (김진하 외, 2024). 이는 곧 북한이 인식하는 핵 전략의 필요성이 국가 체제 존속 그 자체와 연관된 사활적인 문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2022년의 핵전략은 2013년 발표된 병진노선의 효력을 사실상 대체하는 동시에, 핵보유국으로서의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공식화하는 계기로 기능하였다.
II. 하노이 결렬 이후 북한의 핵교리와 적대적 두 국가론
1. 하노이 결렬: 외교적 단절과 전략적 재조정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단절은 북한의 이후 노선을 전환시키는 촉매(catalyst)로 기능했 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018년 한반도 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재개되었고, 4월 판문점 선언,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연 이어 개최되었다. 이 시기 북한은 2018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병진노 선의 종결과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선언하기도 했다 (김창희, 2019). 표면적으로 이는 비핵화 협상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 자세로 읽힐 수 있었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노딜(No deal)’로 결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남한의 적극적 중재와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담이 파국으로 마 무리되면서, 김정은의 대남 불신은 돌이키기 어려운 수준으로 고착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조건부 비핵화’라는 기존의 협상 노선을 사실상 폐기하 고, 핵보유국 정체성의 제도적 공고화로 경로를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회담 결
- 6 - 렬 이후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2019년 8월 5일자 친서는, 양국 정상 간 오간 현재 까지의 마지막 친서라는 점에서, 하노이 결렬이 남긴 정동(affect)과 인식의 잔류를 포 착하는 데 의미가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실시되는 연합군사훈련은 도대체 누구에 대한
것이며, 봉쇄시키려 하며 물리치고 공격하려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한국군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족이나7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란 육군과 싸우고자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개념적으로나
가설적으로, 전쟁 준비 연습의 주요 타깃은 우리의 군대입니다.
이는 우리의 오해가 아닙니다. … 군사력의 차이는 차치하고,
저는 한국을 공격하거나 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없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진정 없습니다. 문제는 이 [한미군사]훈련을
하면서, 왜 그 누구도 생각하기를 꺼리는 잔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 자신들이[남한이] 대비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소란을 피우느냐는 것입니다 (이정철, 2025, p.
390-392).
이러한 문면의 긴장 자체가, 하노이 결렬이 북한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내면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체제안전 보장을 획득하고자 했으나, 그 시도가 좌절됨에 따라 외교적 경로에 대한 기대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북한이 핵능력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핵 관련 법·제도의 정비에 착수한 것은 이러한 전략적 재조정의 직접적 귀결로 이해할 수 있다. 2. 2022년 핵무력정책법
북한의 핵무력 노선은 물리적 능력의 축적을 넘어, 법·제도적 정당화의 단계를 거쳐 고착화되었다. 특히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이하 ‘핵무력정책법’)는 이러한 전환을 상징하는 문서이다. 이 법령은 핵 사용 가능 조건을 복수로 제시하는 한편, 핵무력이 수행하는 임무를 이중적으로 규정하는 구조를 포함한다. 첫째 임무는 대미 억지 차원의 핵 보유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둘째 임무는 남북관계에서 핵을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작전적 임무를 부여한다는 점에 있다 (하영선, 2026).
이러한 제도화는 2022년 이전부터 축적된 담론적 예고와 맞물려 있다. 예컨대 김정은은 2023년 3월 20일 노동신문 보도에서 핵 반격 가상 종합훈련을 지도하며 “우리나라가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만을 가지고서는 전쟁을 실제적으로 억제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언제든 적이 두려워하게 신속 정확히 가동할 수 있는 핵 공격 태세를 완비할 때에라야 전쟁억제의 중대한 전략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 7 - 언급했다 (중앙일보, 2023).
특히 주목할 것은 202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언급한 ‘핵무력의 제2 사명’이다:
우리 핵무력의 기본 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에까지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무력은 의외의 자기의 둘째의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주시보, 2022).
이 발언은 핵무력정책법의 핵심 내용을 사전 예고하는 것으로서, 핵무력의 목적이 ‘억제’를 넘어 ‘공세적 사용’의 가능성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핵무력정책법은 단순한 법적 형식화가 아니라 핵 운용 독트린의 실질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정책적 선택의 영역에서 법적 규범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며 ‘법적 성문화’를 시도한 것이다.
3. ‘적대적 두 국가론’의 공식화
‘적대적 두 국가론’이 처음 본격적 동력을 획득한 것은 2023년 12월 31일 발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 관한 보도」에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2023). 다만 주목할 점은 이러한 기조가 돌연 출현했다기보다, 이전부터 누적되어 온 강경 기조가 특정 시점에 공식화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한 합동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이례적으로 강경한 반응(2023년 9월 하순-11월 초), 드론의 한국 영공 침범 등은 미국과 서울을 향한 북한의 경화된 자세를 미리 보여주었다(Lee, 2024).
이와 관련해, 해당 회의에서 2022년 경제 성과에 대한 언급은 이례적으로 제한적이었고, 2023년 목표 제시 또한 절제된 톤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2022년이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고 우리는 분명히 전진했다”는 극히 미온적인 표현을 포함해—북한이 경제 분야에서 뚜렷한 성장 성과를 제시하기 어렵고, 경제에 대한 기대를 관리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반대로 정찰위성 발사 성공으로 얻은 군사분야의 자신감” (이승열, 2024) 같은 요인이 결합하며 보고의 상당 부분이 안보 상황과 국방 계획에 집중된 것은, 북한이 강경 노선을 지속·강화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Carlin and Lee, 2023).
더 나아가 김정은은 전원회의 보고에서 현 국제질서가 “명백히 ‘신냉전(new Cold War) 체계’로 전환되었”다고 진단하고, ‘다극화(multipolarization)’를 반복해 언급했는데, 이는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의 ‘다극 세계(multipolar world)’ 발언과도 결을 같이한다. 이 인식은 중국·러시아로의 기울기(pivot)를
- 8 - 정당화하는 동시에, 미국이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에 갖는 전략적 가치 자체를 재평가(또는 재조정)하는 방향의 장기적 외교노선 변화를 함축한다 (Carlin and Lee, 2023). 실제로 전원회의 보도는 다음과 같이 ‘반제자주’ 국가들과의 연대, 그리고 국제적 규모의 공동 투쟁을 천명한다:
총비서동지께서는 사회주의나라 집권당들과의 관계발전에
주력하면서 나라의 대외령역을 보다 확대강화하며 변천하는
국제정세에 맞게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반제자주적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켜 우리 국가의
지지련대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지고 국제적규모에서
반제공동행동, 공동투쟁을 과감히 전개해나갈데 대한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로동신문, 2023).
여기서 김정은 정부의 차후 노선으로 선정된 ‘다극 세계질서(multipolar world order)’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북한은 스스로를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국제적 규모”의 “공동 투쟁” 주체로 위치시키며, 이러한 어구는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반제자주’ 담론의 연장선에서 반복된다. 예컨대 2024년6월의 북·러 정상회담 보도에서 북·러 관계를 “반제자주(anti-imperialist independence)”를 이념적 기반으로 재확인한 표현은, 북·중 관계에 관행적으로 부여되어 온 ‘반제자주’의 이념적 정초를 북·러 관계에도 이식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2023년 7월 쇼이구 방문 이후 반제 담론이 북·러 관계에서 가시화되었고, 같은 해 9월 회담 이후 “반제자주를 이념적 기초로 한다”는 공식화가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김정은이 의회 연설에서 “반제자주”를 ‘불변의 일관된 제1 국책’으로 규정하고 “국제적 규모의 반제 공동행동과 공동투쟁”을 촉구한 맥락과도 맞물린다 (한호석, 2024a).
이러한 대외 인식과 동시에, 대남 인식의 제도적 재구성으로서 ‘적대적 두 국가론’은 다음과 같은 언어를 통해 더 노골적으로 표면화된다.
장구한 북남관계를 돌이켜보면서 우리 당이 내린 총적인 결론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 제도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로선과 극명하게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수 없다는것입니다. …우리가 동족이라는
수사적표현때문에 미국의 식민지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문제를 론한다는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 9 -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담론적 수사는 “대한민국것들”이라는 용어이다. 그 전까지 김씨 남매가 주로 사용하던 “괴뢰”가 ‘꼭두각시’라는 의미를 담더라도 ‘한민족’으로서의 동족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 것들”은 ‘동족에서 배제된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해석이 제시된다 (한호석, 2024b). 또한 김여정이 2023년 7월 11일 담화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이후 관행적으로 이중꺾쇠를 제거해 “대한민국”을 사용한다는 관찰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법률상의 국가(de jure state)로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의 국가(de facto state)로는 취급하는 미묘한 변화를 내포한다는 해석과 연결된다 (한호석, 2024b). 이러한 담론적 경계설정은 제도적 비가역화의 또 다른 차원을 구성한다. 기존의 민족 담론과 통일 담론을 해체함으로써, 핵보유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인식 틀이 구축되는 것이다.
다만, 북한은 자신들에게서 ‘일방적인 공격자’의 이미지를 벗기기 위하여 항시 담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들의 핵무력이 “일방적” 선제공격 수단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하는 것이다. ‘적대적 두 국가론’이 공개된 며칠 후인 2024년1월16일, 김정은은 다음과 같은 시정연설을 한다:
우리가 키우는 최강의 절대적힘은 그 무슨 일방적인
《무력통일》을 위한 선제공격수단이 아니라 철저히
우리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꼭 키워야만 하는 자위권에 속하는
정당방위력이라는것을 다시금 확언합니다. … 전쟁이라는
선택을 할 그 어떤 리유도 없으며 따라서 일방적으로 결행할
의도도 없지만 일단 전쟁이 우리앞의 현실로 다가온다면 절대로
피하는데 노력하지 않을것이며 자기의 주권사수와 인민의
안전,생존권을 수호하여 우리는 철저히 준비된 행동에 완벽하고
신속하게 림할것입니다 (조선신보, 2024)
이는 표면상 ‘생존’과 ‘자위’의 논리로 핵무장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서술이다. 그러나 곧이어 김정은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며 군사적 충돌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는 방식으로 위기 서사를 재강화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최대의 적국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
병존하고있는 특수한 환경과 미국놈들의 주도하에
군사적긴장격화로 지역정세의 불안정성이 증대되는 현실을
랭철하게 고찰해보면 물리적충돌에 의한 확전으로 전쟁이
발발할 위험은 현저히 높아지고 위험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신보, 2024).
- 10 - 라고 덧붙이며 군사적 충돌의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는 방식으로 위기 서사를 재강화한다.
이 맥락에서, 공표 이후 북한의 군사적 위협 서사는 더욱 직접화된다. 예컨대 2024년 1월8-9일 화성-11형 근거리 전술핵미사일 발사대차를 조립하는 공장 시찰 보도에서 김정은은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대한민국이 우리 국가를 상대로 감히 무력 사용을 기도하려
들거나 우리의 주권과 안전을 위협하려 든다면, 그러한 기회가
온다면 주저 없이 수중의 모든 수단과 력량을 총동원하여
대한민국을 완전히 초토화해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의지와 력량과 능력이 있으며 앞으로도 드팀없이 계속 확대
강화해나갈 것이다 (연합뉴스, 2024).
“초토화”라는 언어가 명시하는 것은 핵습격임이 분명하다. 북한은 “압도적인 전략적 억제력으로 (적을) 일거에 무력화”하는 습격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음을 드러낸다. 결국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과 ‘두 국가론’의 공표는 단일한 변곡점이라기보다, 관행 속에서 장기간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온 “사실상의 두 국가 현실”을 공식적으로 언어화하고, 그동안 지향해 온 전략적 자립을 ‘정면돌파전’의 형태로 제도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중구, 2024). 북한은 비핵화를 전제로 한 최소한의 군비통제 논의마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사문화된 협상 틀을 고수하는 것보다 핵무장국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그에 상응하는 군사 교리를 구축하는 편이 훨씬 더 큰 전략적 이득을 산출한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정철, 2025).
또 하나 주목할 사항은 공표 이후 북한 관영매체가 한국 관련 언급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2024년 12월 16일 조선중앙통신은 한국 국회가 이틀 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고 전했으나, 별도의 해석적 논평은 최소화했다. 이러한 절제된 어조는 2016년 북한 매체가 국회 표결 이후 약 4시간 만에 박근혜 탄핵 소식을 신속히 보도했던 사례와 뚜렷이 대비되며, 북한이 남한을 언급함에 있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유환, 2024).
III. 한미의 대응: 제도적 비가역화에 대한 적응
한국과 미국의 대응은 “적대적 두 국가론”이 전면화되던 시기 각각 집권 중이던 정부의 대북 인식과 위협평가, 그리고 국내정치적 제약에 의해 규정되었다. 북한의 제도적 비가역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미 양국은 확장억제의 신뢰성 강화와 동맹 조율 메커니즘의 정비를 통해 이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러한 대응이 북한의 비가역화 전략에 대한 ‘적응(adaptation)’의 성격을 띠는지, 아니면 여전히 ‘비핵화’를 실현 가능한
- 11 - 목표로 전제하고 있는지는 분석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북한의 기조 변화에 대한 한미 공동대응의 정점으로는 2023년 「워싱턴 선언(Washington Declaration)」을 들 수 있다. 선언은 “한미동맹은 핵억제에 관해 보다 심화되고 협력적인 정책결정에 관여할 것을 약속”하며, “증가하는 핵 위협에 대한 소통 및 정보공유 증진”을 명시했다. 또한 양 정상은 확장억제 강화를 위해 핵 및 전략 기획을 논의하고, 비확산체제에 대한 북한의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핵협의그룹(NCG: Nuclear Consultative Group) 설립을 선언하였다 (외교부, 2023).
NCG는 2023년 출범 이후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라, 최소 2025년까지 ‘원칙-절차-연습’을 축으로 하는 연속적 트랙으로 운영되었다. 구체적으로, ① 2023년 7월 18일 서울에서의 출범 회의(1차) 이후, ② 2023년 12월 15일 워싱턴 D.C.에서 2차 회의가 개최되었고, ③ 2024년 6월 10일 서울에서 3차 회의가 열렸으며, ④ 2024년 7월 11일에는 한미 「핵억제 및 핵작전 지침(Guidelines for Nuclear Deterrence and Nuclear Operations)」 서명이 이루어졌다. ⑤ 2025년 1월 10일 워싱턴 D.C.에서 4차 회의가, ⑥ 2025년 12월 11일에는 5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아울러 워싱턴 선언은 “유사시 미국 핵 작전에 대한 한국 재래식 지원의 공동 실행 및 기획”을 가능케 하는 협력, 한반도 핵억제 적용 관련 연합 교육·훈련의 강화, 그리고 “핵 유사시 기획에 대한 공동의 접근을 강화하기 위한” 범정부 도상 시뮬레이션(table-top simulation) 도입을 포함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對)한국 확장억제가 “항구적이고 철통같으며(enduring and ironclad)”, 북한의 대남 핵 공격은 “즉각적·압도적·결정적 대응(swift, overwhelming, and decisive response)”에 직면할 것임을 재확인했고, 미국은 전략핵잠수함(SSBN: nuclear ballistic missile submarine) 기항 등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regular visibility)도 예고했다. 동시에 양 정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라는 공동 목표를 진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제조건 없는 대화와 외교(without preconditions)”를 추구한다는 문구를 병치하였다.
당시 CSIS는 워싱턴 선언을 1953년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과 병렬적으로 위치할 정도로, 미국의 핵보장(nuclear guarantee)의 의미와 실행을 구체화하는 문서로 평가하면서, NCG의 활동이 (i) 유사시 미국 핵작전과 관련된 공동 핵 기획 및 실행(joint nuclear planning and execution), (ii) 미 전략사령부(U.S. Strategic Command)와의 연습, (iii) 항공·해상 기반 핵운용 가능 자산(nuclear-capable assets)의 정례적 전개, (iv) 한국 군 인력에 대한 핵억제 교육·훈련 등을 포함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Cha, 2023).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워싱턴 선언의 텍스트 자체가 “협력(cooperation)”과 “공약/약속(commitment)”을 반복적으로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확장억제의 ‘정치적 신뢰성’과 ‘동맹 조율 메커니즘’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성명/선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키워드가 협력과 공약(약속)이며, 그 외에도 동맹(alliance), 핵/비핵(nuclear/denuclearize), 억제(deterrence)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12 - (아산정책연구원, 2023). NCG 설립은 한미 간 핵전력 관련 정보공유, 핵자산 운용, 전력기획 및 전략기획 논의를 제도화(또는 상설화)하는 시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NCG는 확장억제를 ‘선언적 공약’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협의·기획·연습으로 연결하는 절차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워싱턴 선언의 구속력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두 정상의 친필서명 부재 등을 근거로, 워싱턴 선언이 법적 이행의무를 담보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이행 의무가 없는” 정치적 문서에 가깝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한호석, 2023). 또한 선언의 문구를 면밀히 검토하면, 미국이 한반도 핵 사용과 관련해 한국과 “협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make every effort to consult)”을 약속한다는 식의 표현이 포함되는데, 이는 강행규정이라기보다 ‘최선노력(best-efforts)’ 조항에 가까워, 일종의 이중 구속적 확약(double-binding commitment)으로서의 강제력이 제한적이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본 연구의 분석틀에서 볼 때, 워싱턴 선언과 NCG의 운용은 북한의 제도적 비가역화에 대한 한미 양국의 ‘적응’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선언이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여전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정책 초점이 억제력 강화와 동맹 조율 메커니즘 정비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한미가 사실상(de facto) 핵무장 북한과의 공존을 관리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선언적 수준에서는 비핵화를 목표로 유지하면서도, 운용적 수준에서는 핵 북한에 대한 억제 관리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는 북한의 제도적 비가역화 전략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반증하는 동시에, 한미 양국이 직면한 정책적 딜레마—비핵화 목표의 공식적 유지와 핵 현실에 대한 실질적 적응 사이의 긴장—를 드러낸다.
어찌 되었든, 워싱턴 선언은 북한의 공세성에 대한 ‘대응의 초석’으로 기능하였으며, 그 당시 설립된 NCG는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는 한미 양국이 북한의 핵 위협을 장기적·구조적 현실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관건은 이러한 억제 메커니즘이 북한의 추가적인 핵 능력 고도화와 담론적 경계설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완전한 비핵화’라는 선언적 목표와 ‘핵 현실 관리’라는 운용적 필요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IV. 결론: 제도화된 구조적 제약과 ‘이벤트 정치’의 한계
2022년의 법제화, 2023년의 법적 성문화 및 담론적 경계설정, 그리고 2024-5년의 활성화를 통해, 북한의 핵정책은 완전한 ‘제도적 비가역화’의 궤도에 진입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이 향후 대북 외교에 어떠한 함의를 갖는지는, 트럼프 2기 출범을 계기로 ‘유화 국면’ 재현 가능성이 제기되는 현 시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 13 - 김정은은 트럼프의 재집권 직후 북·미 대화 재개의 가능성이 거론되던 시점에 조선중앙통신 연설을 통해 자신의 대미 인식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였다:
우리는 이미 미국과 함께 협상주로의 갈수 있는 곳까지 다
가보았으며 결과에 확신한 것은 초대국의 공존의지가 아니라
철저한 힘의 립장과 언제 가도 변할 수 없는 침략적이며
적대적인 대조선정책이였습니다. … 현재까지도 미국의
정객들이 버릇처럼 입에 올리는 미국은 절대로 적대적이지
않다는 그 교설이 세상사람들에게 이상한 괴설로 들린지는 이미
오랩니다. … 제반 현실은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최강의 국방력,
이것만이 유일한 평화수호이고 공고한 안정과 발전의 담보임을
매일, 매시각 절감케 하고 있습니다 (이정철, 2025, p. 335).
이어, 김정은은 2025년 9월 22일에 트럼프의 구애에 다시금 응답하며 두 지도자 간 “좋은 기억”을 인정하는 한편, 미국이 “비핵화에 대한 터무니없는 집착을 버린다면” “평화적 공존”이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okolin, 2025). 위와 같은 발언들은 미국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패권을 영위하는 한 미국과의 관계 정립은 불가하다는 김정은의 확신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현재 북한의 대미 정책은 상대적 재래적 열세 속에서도 우월성을 투사하려는 시도, 그리고 강대국에 의한 외교적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종속에 대한 경계가 이중으로 작용하는 보완적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정철, 2025). 북한에 있어 이제 미국과의 지위 대등성—즉, 동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받는 것—은 자국의 전략적 야심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능케 하는 북한 측 근거는 복수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북한이 스스로를 ‘전략국가’로 규정하는 담론적 기반에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지정학적 연쇄 속에서 자신을 ‘전략적 요충지’로 위치시키는 자기인식이 결부되어 있다. 둘째, 남한이 하노이 ‘노딜’(No deal)의 충격 속에서 북한이 좌절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과 달리, 북한은 ‘북방외교 회복’이라는 성과를 향해 외교적 좌표를 재조정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2018-2019년의 시기 동안 북한은 북·미 및 북·중 관계를 두고 ‘저울질(hedging: 위험분산)’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정철, 2025), 북·러 관계를 ‘원상 복구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재구축함으로써 2025년 현재까지도 군사국가로서의 미래를 전망하는 경향이 지속된다.
예컨대 2025년 9월, 중국 열병식에 참석한 국가들은 상징정치의 차원에서 향후 평양과의 외교적 교류를 재개·확대할 의사를 사실상 표명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낳는다. 이 맥락에서 트럼프가 북한과의 접촉을 재차 거론하는 이유 또한, 북한이 한반도 및 동북아 지정학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며 협상·관리의 대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비용이 증대되는 행위자로 자리 잡았다는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온 ‘북한 붕괴론’은 설명력과 정책적 유효성이 제한적이며, 오히려
- 14 - 북한의 체제 지속, 핵무장, 그리고 대외 협력의 재구성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김정은 집권 초기 지도부가 김일성·김정일의 ‘통일 유산’을 호명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전위기구의 기능을 (명목상으로) 유지했던 것과 달리,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이전까지 그러한 수사적 연속성이 실질적 정책과 지속적 협력으로 구체화되지 못했고, 민족통일 담론이 대체로 의례화되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이지선, 2025).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제창과 이후 유사 성향 국가들과의 연대는, 한반도 질서를 전복하려는 수정주의적 의지의 표출이라기보다 하노이 결렬, 한미일 안보체제 강화, 대안적 국제질서의 부상이라는 환경 변화에 적응하려는 ‘실용적 재조정’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본고가 제시한 ‘제도적 비가역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재조정이 일회적 정책 선택이 아니라, 법·제도·담론의 층위에서 되돌리기 어려운 구조로 고착되는 과정임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북한은 현 단계에서 자신들의 대미 ‘현상 유지(status quo)’를 전제로, 미국과의 관계를 ‘굴복-보상’의 비대칭 구도가 아니라 동등한 협상 당사자 간의 교섭으로 재정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대미 협상은 더 이상 체제의 사활이 걸린 일회적 결단이라기보다,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관리·조정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양상에 가깝다. 이를 시사하는 최근의 단서로, 북한은 2026년 1월 4일 미국의 베네수엘라 군사행동을 두고 외무성 대변인 명의의 ‘조선중앙통신 문답’ 형식을 통해 “주권침해행위” 및 미국의 “불량배적이며 야수적인 본성”을 거론하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다만 같은 내용이라도 정식 ‘담화’가 아니라 문답 형식으로 첫 반응을 제시했다는 점은, 대외 메시지의 격(格式)과 수위를 조절함으로써 향후 대미 메시지의 조정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신호적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겨레, 2026).
그러나 향후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이 제기되더라도 그 자체가 실질적 성과로 직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과도하다. 특히 ‘적대적 두 국가론’을 사실상 철회하라는 요구가 협상의 전제처럼 작동하는 한 (하영선, 2026),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인하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
종합하면, 북·미 간 개인적 친분의 재현—소위 ‘브로맨스’—이 가능할 수는 있으나, 그 친분 자체를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panacea)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석상 중대한 오류가 된다. 핵심은 정상 간 분위기 변화가 아니라, 북한이 이미 제도화한 핵보유국 정체성과 ‘두 국가론’이 협상 공간에 부과하는 구조적 제약,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상호 인식의 비대칭이 지속되는 한 ‘이벤트 정치’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향후 대북 정책은 정상 간 친분이나 일회적 회담 성사 여부가 아니라, 북한의 제도화된 핵 현실을 전제로 한 억제·관리·점진적 관여의 복합적 접근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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