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청월관계의 갈등: 균세均勢를 위한 자주自主와 번속藩屬 중국국가박물관 최은호
동아시아질서건축사 : 고대천하에서 미래복합까지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외교학 전공 석사과정
I. 서론
베트남은 흔히 조선, 류큐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조공국으로 꼽 힌다. 하지만 세 국가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복속되기 직전에 청이 도입한 정책은 큰 차이를 보였다. 한편으로, 이 정책적 차이는 각국 이 복속된 시기의 차이에서 기원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 이 세 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이 논문은 1880년-1883년대에 청이 베트남에 적용한 정책을 통해, 일차적으로는 해당 시기의 대對번속국 외교를 규명하고, 이차적으로 는 청 외교에서 베트남의 특수성을 밝혀내고자 한다. 안남의 비협조 와 청의 무관심, 그리고 종국적으로 양국이 서로를 경원시하는 태도 때문에, 둘 사이의 직접적인 협조는 1880년까지 없었다.
이 논문에서의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다. 1880년은 11월 10일은 생 페테르부르크에서 증기택 주프랑스 청 공사가 바르텔레미 생일레르 프 랑스 외무장관에게 1874년 갑술화약의 체결에 대해 첫 번째 항의 서 한을 보낸 시점이고, 1883년은 쿠르베 제독의 후에성 함락과 더불어 이홍장-푸르니에 협약이 체결되어 청과 안남 사이의 종번宗藩관계가 완전히 종식한 시점이다. 이 글은 1880년의 청나라 개입과 1883년 청 월관계의 공식적 종식 사이의 시기를 크게 삼분할한다. 첫째, 증기택 이라는 인물을 통해 청 조정 내에서 주류였던 안남, 속국과 보호권에 대한 인식을 조망하고자 한다. 둘째, 당정경과 응우엔 반 뜨엉의 밀서 를 통해 베트남의 안보 인식과 베트남이 추진했던 균세 정책의 본질 을 밝히고자 한다. 셋째, 안남이 청으로 보낸 마지막 사절단의 사례를 통해 청-안남 관계가 매우 유연했음을 주장하고, 청의 안남 정책이 현 실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논문의 서론에서는 선행 연구와 1차 사료에 대한 검토에 큰 분량을 할애하여, 이 시기와 관련 된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1차 사료 소개
이 시기를 보는데 중요한 사료로는 크게 월, 중, 불 3개국의 사료 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베트남 측의 사료다. 청월관계사 연구에 흔히 사용되는 흠정 월사통감강목『钦定越史通鉴纲目』은 떠이썬西山 반란(1789년)에서 그 쳐서 본 연구에는 이용할 수 없다. 이 시기의 가장 유용한 사료는 응우 옌 왕조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 대남식록『大南寔錄』이다. 대남식록은 1811년에 자롱 황제의 명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북조시대 응우옌 가문의 역사를 다룬 전편前編과 대남 통일 이후를 기록한 정편正編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중 청-대남 관계에 대한 글들만을 수록한 대남실록청월 관계사료회편『大南實錄清越關係史料彙編』이 대만 중앙연구원의 동남 아 연구 프로젝트東南亞區域研究計劃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153) 안타 깝게도 이 문서집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 중이지 않아, 본 연구 는 대남식록 원본을 사용한다.
다른 중요한 사료는 1880년과 1882년 청행 사절로 임명된 팜 턴 주엇(Phạm Thận Duật范慎遹) and 응우옌 투엇(Nguyễn Thuật阮述) 의 연행록이다. 팜 턴 주엇은 형부상서刑部尚書이자, 사절단의 흠차대 신欽差大臣을 역임했고, 시랑가참지함侍郎加參知銜의 직함을 갖고 있 었던 응우옌 투엇은 부사副使를 맡았다. 이 사절단이 공저한 것으로는 천진을 방문하고 집필한 건복원년여청일정『建福元年如清日程』이 있 고, 응우옌 투엇이 집필한 기록으로는 왕진일기『往津日记가 유명하 다. 왕진일기는 Paul Demiéville 교수가 홍콩의 Rao Zongyi 교수에게 넘겨주고, 1977년 8월에 방콕에서 개최된 7차 아시아 사학자 학술회 의에서 최초로 발표되었다.154) 오늘날 이 두 글은 모두 2010년 복단 대학출판사와 한놈연구원(Viện nghiên cứu Hán Nôm)에서 합작으로 출판한 월남한문연행문집『越南漢文燕行文獻』에 수록되어 있다.155) 둘째는 중국 측 사료다. 청월관계 연구에 널리 사용되어 왔던 공식 문헌들로는 대청회전『大清会典』, 청사고『清史稿』와 청실록『清 实录』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두 방대한 양 탓에 문서집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이 연구가 사용하는 주된 문헌은 중국근대 사 자료총간: 청불전쟁편『中國近代史資料叢刊:中法戰爭』와 청광 서조중불교섭사료『淸光緖朝中法交涉史料』이다. 전자는 샤오슝전邵 循正 등이 편찬한 7책짜리 전집인데, 한문으로 번역된 프랑스, 영국, 미국의 외교 문서, 청불월국 간의 협상 자료는 물론, 주요 행위자들 153) 許文堂, 謝奇懿, 《大南實錄清越關係史料彙編》,台湾中央研究院東南亞區域
研究计划, 2000
154) 龚敏, 阮述《往津日记》引发的学术因缘──以香港大学饶宗颐学术馆藏戴密
微、饶宗颐往来书信为中心, 2011
155) 越南漢文燕行文獻集成, 复旦大學出版社, 2010 이 주고받은 서한, 수필과 회고록, 국경 사정 조사 보고서 등을 총망 라하고 있다. 후자는 윈롱션沈雲龍이라는 역사학자가 편찬한 1600페 이지가 넘는 사료집이다. 그 다음은 이홍장 전집『李鴻章全集』이다. 이홍장 전집에서 1880년대 안남에 관한 자료는 33권에 수록되어 있 다. 네번째 자료는 곽정이郭廷以, 왕율균王聿均이 편찬한 중법월남교 섭당『中法越南交涉檔』156)이다. 이는 1962년에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 연구소의 주도 하에 수집된 문서집으로, 1875년부터 1911년 까지 교섭에 관련된 모든 문서를 수록하고 있는 듯하다. 아쉽게도 이 글 역시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 중인 문헌이 아니다. 마지막은 대 만 근대사연구소近代史硏究所 당안관檔案館의 관장검색계통館藏檢 索系統157)에서 “완복시阮福時”, “당경숭唐景崧”, “당정경唐廷庚”, “범신휼范慎遹”을 포함한, 1880년부터 1885년간의 “베트남 목”에 수 록된 모든 문서다. 대만 근대사연구소 당안관은 청나라 말기부터 중 화민국 시기까지를 아우르는 외교문서집의 60%가량을 디지털화한 자료다. 필자가 한문을 읽을 수 없어서 해당 사이트에 있는 모든 자 료를 탐독하진 못했지만, 완복시(뜨득 황제)가 청 병력을 유지해달라 고 양광총독에게 보내는 서한158)과 당정경이 모 안남 관리(응우옌 반 뜨엉)과 나눈 밀담의 내용을 양광총독에게 전달하는 서한159)을 찾아낼 수 있었다.
156) 郭廷以、王聿均, 中法越南交涉檔, 台湾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 1962 157) archivesonline.mh.sinica.edu.tw
158)
https://archivesonline.mh.sinica.edu.tw/detail/2804b68c9023714a7565eb
65d759603a/?seq=1
159)
https://archivesonline.mh.sinica.edu.tw/detail/fc85a821ddadcf1c7bdf08b
1c40b808b/?seq=1 셋째는 프랑스 측 사료다. 황서黃書라고도 불리우는 프랑스 외교문 집『Documents diplomatiques』은 총 네 문집으로 분류된다. 첫째 는 갑술화약부터 부레Bourée 공사가 협상을 시작하는 시점까지 (1874년 3월-1882년 12월), 부레 공사 협상 시작부터 쥘 페리와 증 기택의 서한까지 (1882년 12월-1883년 11월), 리 푸르니에 협약 체 결부터 박레 사건으로 청불관계 격화까지(1884년 5월-1884년 7월) 그리고 청불전쟁의 시작부터 청불전쟁의 종전까지(1884년 7월-1885 년 12월)로 분류되어 있다. 이 사료는 프랑스의 관점을 온전히 반영 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지만, 우리가 조명하고자 하는 중월관계 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명확하여, 이 논문에서는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2. 선행연구
프랑스, 중국, 베트남 학계의 갑술화약 이후의 청월관계에 천착한 연구를 알아보기 전에, 제3국 (한국, 영미권, 일본) 학계에서 축적된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분석하자. 한국에서 중월관계에 대한 연구는 레黎왕조의 전문가인 유인선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19세기의 안남의 외교관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월선越鮮관계가 많았다. 후자에 속하 는 연구서로는 윤대영의 1862년부터 1945년의 한월 교류사를 다룬 글과 인하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최병욱이 주도한 조선과 안남의 조공 사절단이 북경에서 공유한 창화시唱和詩에 대한 연구160)가 대 표적이다. 국내에서 越南漢文燕行文獻에 천착한 연구로는 김영죽의 연구(金玲竹, 2013)161)와 강찬수(姜贊洙, 2011)162)의 연구가 유이했 160)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과 베트남 사신, 북경에서 만나다: 창화시唱和詩 연구, 2013 는데, 그마저도 강찬수는 안남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위 문집에 서 조선과 교류한 사례를 검토한 연구였다. 그 외에 영미권 연구로 주목할 만한 글로는 Phạm Thận Duật과 Nguyễn Thuật의 사절단의 정치를 “마키아벨리적”이라고 형용한 Tsang과 Nguyen의 논문이 있 다.163) 두 공저자는 응우옌 왕조의 리반픅을 위시한 전통적인 사절단 과 팜 턴 주엇, 응우옌 투엇의 사절단과 비교하면서, 후자가 전통에 서 벗어난, realpolitik적인 외교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와 이대학의 리암 켈리 (Liam Kelley, 2005)164)가 집필한 단행본은 16 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여청 연행사의 한시를 바탕으로 조공관계를 재 구성한다. 그의 연구는 Woodside165)가 주창하고 기존 베트남의 역 사 서술 방법을 대표했던 중국 중심적인 관점의 “little China theory”에 도전한다. 그는 Keith Taylor166)의 서술 방법을 이어받아, 베트남의 독자적 정체성을 강조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베트남-중국 관계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야마모토 타츠로 (1975)167)를 포함한 일 본 학계의 연구도 다수 존재하지만, 필자의 언어적인 한계로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다.
161) 金玲竹, 베트남 漢文 使行文獻에 담긴 中國見聞, 그 특징적 면모, 2013 162) 姜贊洙, 16-19세기 越南漢文燕行文獻에 수록된 朝鮮 使行文學에 대한 고찰 163) Gabriel F. Y. Tsang, Hoang Yen Nguyen, The Vietnamese Confucian
Diplomatic Tradition and the Last Nguyễn Precolonial Envoys’ Textual
Communication with Li Hongzhang, 2020
164) Liam Kelley, Beyond The Bronze Pillars: Envoy Poetry And The
Sino-Vietnamese Relationship, 2005
165) Woodside, Alexander Barton. Vietnam and the Chinese Model: A
Comparative Study of Nguyen and Ch'ing Civil Government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88
166) Taylor, Keith Weller, The Birth of Vietna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167) 山本達郎,越南雨中國關係史,東京,山川出版社,1975 19세기 말 안남 역사 전반을 다룬 프랑스 학계의 연구들은 상당히 축적되어 있으나, 주로 안남-청의 국경문제나 프랑스 식민시기에 편 중된다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 학계에서 응우옌 왕조에 대한 가장 권 위있는 역사학자인 응우옌 테 아잉(Nguyễn Thế Anh, 1992)168)과 요시하루 츠보이(Yoshiharu Tsuboï, 1987)169)는 안남의 관점에서 안 남 왕조의 종막을 조망했다. 하지만 두 연구는 상당히 광범위한 시기 를 포괄적으로 조명한다는 맹점이 있다. Philippe Truong(1998)은 응우옌 왕조의 청행 사절단과 조공품으로 바친 베트남 청자를 연구 했으나, 본 연구는 이 연구를 접근성의 문제로 탐독하지 못했다.170) 프랑수아 조요(François Joyaux, 2022)171) 프랑스 사료에만 거의 전 적으로 의존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서술하는 데, 그는 19세기 후반 대남은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중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투쟁의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또한 그 는 대남이 1874년 조약의 2조로써 외교권을 상실하고 보호국이 되는 것임을 알았으나 의도적으로 묵인한 것이며, 항시 중국의 은덕에서 비롯된 보호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그 외에 프랑스어로 1880년대 초반의 시기를 다룬 2차 문헌은 거의 없 으나, 당시 관찰자들이 남긴 기록들은 일부 존재한다. Pene-Siefert라 는 신부가 발간한 단행본172),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상하이와 광저 168) Nguyen The Anh, Monarchie et fait colonial au Viet-nam.
(1875-1925) Le crépuscule d'un ordre traditionnel, Harmattan 1992 169) Yoshiharu Tsuboi, L'empire Vietnamien face à la France et à la
Chine, Harmattan, 1987
170) Philippe Truong, Les ambassades en Chine sous la dynastie des
Nguyễn (1804 - 1924) et les bleu de Hué. Paris, 1998
171) François Joyaux, Nouvelle histoire de l'Indochine française, 2022 172) Jocelyn Pène-Siefert, La Question Tonkinoise avant et apres le traité
avec la Chine, 1885 우에서 차례로 영사직을 맡았던 Dabry de Thiersant의 기록173), 통 킹 총독을 지낸 해군 제독 Olivier Martellière의 기록174), Edouard Guillon이라는 법학 교수가 집필한 논설175), Albert Billot라는 외교 관의 역사서176)로, 대부분 1885년 6월 9일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청 불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에 집필된 기록들이다. 상당한 완성도를 보 이는 Albert Billot의 역사서를 제외하고는 와전된 경우가 많고, 모든 저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안남 보호화와 관계가 있다고 해도, 주요 행 위자가 아닌 적이 많다.
1880년대 초반 청월관계에 대한 가장 많은 연구가 축적된 것은 중 국과 대만이다. 펑치안의 석사학위 논문은 연행사 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으나, 정치적인 함의를 도출하진 않았다177). 외교사적으로 가 장 완성도가 높은 연구는 왕지캉王志强의 연구다. 특히, 그의 박사학 위 논문178)은 이홍장의 대안남 인식과 정책을 통시적으로 조망하고, 조선의 정책에 준 영향까지 설명한다. 추안 흐씨우와 공저한 논문(王 志强, 权赫秀, 2011b)179)은 1883년 Phạm Thận Duật과 Nguyễn 173) Dabry de Thiersant, La solution de la question du Tonkin, au point
de vue des intérets francais, 1885
174) Olivier Martellière, La Question du Tonkin, 1886
175) Edouard Guillon, Le conflit franco-chinois (La guerre et les traités)
d’après les documents officiels, 1885
176) Albert Billot, L’Affaire du Tonkin. Histoire diplomatique de
l’établissement de notre protectorat sur l’Annam et de notre conflit
avec la Chine 1882-1885 par un diplomate, 1888
177)彭茜, Tribute and Literary Exchange: The Study of Vietnamese
Envoys to China in the Qing dynasty and Guangxi, 朝貢關係與文學交
流:清代越南來華使臣與廣西研究, 2014
178) 王志强. A study on Li Hongchang’s awareness and policy of
Vietnamese issue (1881–1886) 李鸿章对越南问题的认识与策略研究, 1881–
1886, 2011
179) Wang, Zhiqiang, Quan, Hexiu, From the 1883 voyage of the Thuật의 사절단의 여정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의 3자 교섭 시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베트남 및 청-티 베트 관계 전문가인 쑨훙녠孙宏年이 이 시기에 대해 집필한 논문은 두 편이 있는데, 두 편 모두 각각 2페이지, 6페이지 남짓되는 간략한 논문이다. 첫째는 응우옌 투엇의 사절에 대한 짧은 요약에 해당하고, 두번째는 안남의 사절단이 청에서 목격한 서양 문물에 천착하며, 안 남의 근대화 정책이 청을 통해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이렇듯 1880년대 베트남 연행사에 대한 선행연구는 10편 정도 된 다. 대남식록, 연행록, 청의 외교문서와 프랑스의 외교문서를 두루 참 고한 연구는 왕지캉의 박사논문이 유일한데, 그는 이홍장의 외교정책 에 천착하여 청의 전반적인 정책 방향을 재구성하는데는 한계를 갖 는다. 그 외에 중요한 연구로는 대만의 라이충쳉(賴淙誠)의 박사학위 논문180)은 통상과 국경 획정 문제를 중심으로 청월관계를 다루었다. 양쯔샹의 박사학위 논문(杨紫翔, 2014)181)은 19세기 후반 청월관계 를 국제정치학적으로 분석한 흔치 않은 학위논문이다. 그는 Brantley Womack, 2006182)에서 제안된 “불균형”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전 통 청월관계를 불균형적 관계라고 규정한다. 또 대남의 청 인식은 조 선이나 류큐의 청 인식과 크게 달라서, 현실주의적 질서에서의 강대
Vietnamese ambassador to China: considering the end of the Zongfan
relationship between Vietnam and China. 王志强, 权赫秀, 从1883年越南
遣使来华看中越宗藩关系的终结, 2011
180) 賴淙誠,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Việt Nam under the
Qing Dynasty: Annual Trade and Border Issues [清越關係研究-以貿易與
邊務為探討中心 (1644~1885)]. Ph.D. Dissertation. Taipei, 2006
181) 杨紫翔, 非对称视角下的近代中越相互认识:以中法越南交涉为 中心, The
Recent Sino-Vietnamese Mutual Perceptions in the View of Asymmetry
——Center on the Sino-French Negotiation Over Vietnam, 2014
182) Womack, Brantley, China and Vietnam: The Politics of Asymmetry,
2006 국과 약소국의 양국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유효하 다고 주장한다. 응우옌 호앙 옌이 대만에서 출판한 박사학위 논문은 1849년부터 1877년 사이의 베트남 연행록을 연구하고 있다.183)
중국의 연구는 크게 3가지 키워드에 맞춰서 진행되고 있다. 첫째 로, 중국 학계는 청월 관계를 “서세동점”이라는 비극적 숙명을 공유 하여, 이에 저항한 연대의 역사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다. 쑨훙녠의 연구가 가장 이러한 성향이 두드러지는데, 그는 1882년 대남 사절단 의 청 연행은 근대와의 조우이며, 사절단이 귀국한 이후 뜨득 황제에 게 중국을 모방한 모델을 제안했다고 한다. 두 번째 키워드는 “국경 획정”이다. 국경 문제는 한국 학계에서 조청관계를 다루는데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데, 왜 청월관계에서는 이 문제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 고 있을까? 우선, 통킹-윈난 국경에 흑기군, 황기군을 포함한 비적들 이 청-불 관계가 전개되는데 지대한 명분적, 군사적 역할을 했기 때 문이다. 또한, 조선 문제를 둘러싼 청일 협상에서 통상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프랑스는 안남 점령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홍강 유역을 통해 윈난과 통상할 수 있는 무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연구 현황은 어떠할까? 베트남 학계의 연구는 전반적으 로 동아시아 타국에 비해 전산화가 미진하다. 예컨대, 베트남 학술 잡지들을 총망라한 웹사이트에서 “이홍장”을 검색하면 등장하는 연 구는 1개에 불과하다.184) 따라서 본 연구 주제에 대한 베트남 국내 183) 阮黃燕. 2015. 『1849-1877年間越南燕行錄之研究(博士論文)』。國立成功大
學,台南。
184) https://vjol.info.vn/. 해당 연구는 이홍장의 양무운동과 베트남의 동유운동
을 비교한 논문이다. Phạm Đức Thuận, Phong trào Dương vụ ở Trung
Quốc cuối thế kỷ XIX và Phong trào Đông Du ở Việt Nam đầu thế kỷ
XX, 2024 성과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 시기에 대해 열람 가능한 소수의 논문이 인용하는 주석을 통해 현재 베트남 학계의 성과를 간접적으 로 측정할 수 있다. 쩐득안 (Trần, Đức Anh, 2024)185)는 18세기 19 세기의 대남 사절단에 의한 통상 사례를 보고 있으나, 외교사적 관점 에서 수행된 연구는 아니다. 그는 1885년에 프랑스의 중국 전문가이 자 통역사 Devéria가 집필한 글186)을 주로 인용하고 있는데, 중국 측의 자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료적 기여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브우 껌 (1966)187)은 응우옌 왕조 하의 사절단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 주제의 문제의식에 가장 부합한다. 안타깝게도, 이 글은 전산화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레티호아이탄의 연구188) 역시 8쪽에 불과한 것에 비해 1802년부 터 1885년이라는 방대한 시간을 다루고 있다. 이 글은 프랑스와의 조약들이 기존 청월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하지 않으며, 전술한 Devéria의 글을 포함한 사료에 기반하 여, 사절의 의례 규정과 형식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응우옌 티 타오, 외(1996)189)은 베트남 연행사의 인물 사전이다. 이 단행본 185) Trần, Đức Anh, Role of the Vietnamese Diplomatic Envoys in Trade
between Vietnam and China during the 18-19 Centuries. Tạp chí Khoa
học Đại học Đông Á, 3(4), 2024
186) Gabriel Devéria, Histoire des relations de la Chine avec
l'Annam-Việtnam du XVIe au XIXe siècle, 1885
187) Bửu Cầm, Các sứ bộ do triều Nguyễn phái sang nhà Thanh (Envoy
missions to China, sent by the Nguyễn dynasty). Sử địa (History and
Geography magazine.) No 2, 46-51, 1966
188) Lê Thị Hoài Thanh, Hoạt động đi sứ và tiếp sứ trong quan hệ
ngoại giao Việt Nam - Trung Quốc dưới triều Nguyễn (1802-1885),
2019
189) Nguyễn Thị Thảo, Phạm Văn Thắm, Nguyễn Kim Oanh (1996). Sứ
thần Việt Nam (Vietnamese Envoys.) Hà Nội: Văn hóa Thông tin. 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된 사절단에 대한 간략한 전기적 정보를 제공 하는데, 응우옌 투엇과 팜턴주엇에 대한 항목이 각각 한 문단 정도로 지나치게 간략하고, 정보를 뒷받침할만한 사료에 대한 각주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팜턴주엇과 응우옌투엇의 사절단을 다룬 연구는 한 건 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다른 연구에서 이미 수차례 인용된 왕진일기 를 다시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90)
2015년에 나온 응우옌 호앙 옌의 베트남의 중국 사절단의 작품들 에 대한 외국 연구 정형 총관191)에 의하면, 응우옌 투엇의 왕진일기 에 대한 연구가 Trần Kinh Hòa라는 홍콩대학 소속 베트남인 학자 에 의해 1980년에 출판된 것이 외국 대학의 베트남 연행록 연구의 최초다. 호앙 옌은 중국 측 연행사에 대한 연구가 총 57건 발견되었 는데, 이는 조선의 연행사에 대한 120건이 넘는 논문에 한참 못 미 친다며, 사료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연구 접근성이 더 어 려운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 외에 레뀌돈의 사절192)과 당후이쯔 의 사절193), 그리고 건륭제 80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194)에 대한 190) Phạm Hoàng Quân, Lược tả về sách “Vãng sứ Thiên Tân nhật ký”
của Phạm Thận Duật và “Vãng Tân nhật ký” của Nguyễn
Thuật/Description about the Book “Vãng sứ Thiên Tân nhật ký” by
Phạm Thận Duật and “Vãng Tân nhật ký” by Nguyễn Thuật, 2008 191) Nguyễn Hoàng Yến, Tổng quan tình hình nghiên cứu về các tác
phẩm đi sứ Trung Quốc của Việt Nam ở nước ngoài, 2015
192) Hoàng Xuân Hãn, Vụ Bắc sứ năm Canh thìn đời Cảnh Hưng với Lê
Quý Đôn và bài trình bằng văn Nôm” (The Mission to China in
Gengchen Year under the Reign of Cảnh Hưng, with Lê Quý Đôn and
the Report in Nôm Script.) Sử địa (History and Geography Magazine).
Số 6, 3-5., 1967
193) Phạm Tuấn Khánh (1995). Chuyến đi sứ của Đặng Huy Trứ và một
tư liệu chưa được công bố (Đặng Huy Trứ mission Journey and a
Document not Made Public.) Thông tin Khoa học và Công nghệ
(Inform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No 3. 개별적인 연구가 존재하지만, 본 연구의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
이렇듯, 베트남 학계의 1880년대 중월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웃 중 국 학계의 그것에 비해 성과가 매우 미진하다. 호찌민 사회대학에서 나온 “조공책봉 관계로 본 중월관계”195)라는 짧은 논문에서 베트남 학계의 대청외교에 대한 연구적 성향의 편린을 볼 수 있다. 이 글은 송으로부터 독립한 10세기의 딘 왕조와 레 왕조 시절부터, “주권 국 가”였으며, “베트남 민족 의식”은 독립 이래로 베트남 역사에서 상수 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 연구는 “베트남의 민족성”을 베트남 최초 의 국가 성립 이전까지 소급적용시키고, “수천 년간 어느 시점에도 중국은 베트남을 번속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베트남이 스스로가 “독 립된 주권 국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외왕내제를 행했다”고 한다. 하노이 국립 사범 대학의 부학장인 득리엠 역시, 송나라 시대의 조공 관계에 대해 기술하며, 떠이썬과 응우옌 왕조 시절에 베트남이 “방교 邦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중국과의 관계가 종속적이지 않은 관 계였다고 주장한다.196) 그가 인용하고 있는 유일한 베트남 국내 연구 가 석사 학위 논문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 논문(유인선)을 포함한 외국 연구라는 점을 고려하면,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 후반기의 청월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 조야한 민족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복합적 층위의 담론을 구성하지도 못하는 수준이 라고 볼 수 있다.
194) Nguyễn Duy Chính. Phái đoàn Đại Việt và lễ Bát tuần khánh thọ
của Thanh Cao Tông. (Đại Việt Delegation and the 80th Birthday
Ceremony of Emperor Qianlong.) TP. Hồ Chí Minh: Văn hóa - Văn
nghệ, 2016
195) Quan hệ Đại Việt – Trung Hoa nhìn từ vấn đề ‘sắc phong, triều
cống’. https://hcmussh.edu.vn/news/item/22584
196) Vũ Đức Liêm, Đừng để “triều cống” đánh lừa: Quan hệ Trung Hoa
và Đông Nam Á thời Tống, 2019 이렇게 19세기 천조질서에서 근대국제질서로 이행해가는 과정의 청월관계에 대한 선행연구를 중국, 프랑스, 베트남, 그리고 한국, 영 미권 및 일본의 학계별로 구분해보았다. 하지만 “국제질서의 전환”이 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이 시기를 연구한 논문은 거의 모두 중국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주요 당사국들 학 계의 연구들을 비교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무릇 토론에서 논의의 비교는 그 단층선을 파악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각국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논의하거나, 서로 다른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바탕으 로 논지를 전개한다. 무엇보다 베트남 학계의 중월관계에 관한 연구 는 너무 통사적이고, 19세기 말 대청 외교에 관한 연구는 질은 고사 하고 양적으로도 충분치 않아서, 그 논의의 지형도를 구축할 수 없 다.
3. 역사적 배경
1802년에 새로 설립된 응우옌 왕조와 청의 관계는 동시대 조선과 청의 관계에 비해 다소 소원했다. 이는 조공의 빈도에서 단적으로 드 러난다. 안남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조공 사절단의 통상적인 루트가 끊겨서 1868년까지 조공을 바칠 수 없었고, 이후 1870년, 1872년, 1876년, 1880년, 1883년에 걸쳐서 총 5회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이 는 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안남의 자기인식이다. 안남은 남조南朝를 자처하며, 청과 같은 천조상국을 자처하고 있었 고, 비록 청의 사절에는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는데 힘썼지만, 라오스 3국, 캄보디아, 화사火舍국과 수사水舍국197)에 대해서는 황제皇帝를 197) Thủy xá-hỏa xá: 15세기부터 19세기 사이까지 존재했던 중부의 플라이쿠
고원 지대의 정치체다. 오늘날에도 50만명 남짓되는 Jarai인이라는 소수민족으 내세우는, 전형적인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둘 째 이유는 중국과 대남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는 것이 었다. 1787년에 안남에서는 서산Tây Sơn운동이 발발했고, 폐위된 황 제 레찌에우똥은 중국 광서성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사대자소의 원칙 에 호소하며 건륭제에게 반란군인 서산 왕조를 진압할 수 있는 지원 을 요청했다. 청은 1788년부터 1789년 사이에 청은 2만명 가량의 군대를 출병했으나, Ngọc Hồi-Đống Đa 전투에서 패배했다. 서산 왕조는 불과 20년 채 지나지 않아, 16세기부터 남부를 장악한 군벌 이자 서산 운동에 의해 종식되었던 응우옌朝의 응우옌푹아잉(阮福 暎)에 의해 전복당하고 만다.
이후 청의 대남에 대한 미묘한 인식은 1840년 안남의 사절단에 대 한 대우에서 드러난다. 청은 원래 대남을 조선, 유구의 반열에 두었 으나, 해당 사절단을 조선, 류큐, 시암, 심지어 라오스의 아래로 의전 했던 것이다. 대남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민감했던 민망(明命)은 이 에 분노하여, “이 일은 청조 예부의 실수다. 고려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남장南掌은 우리에 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이고, 섬라暹羅와 유구琉球는 이적의 나라이 니, 그렇게 대우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너희는 자리 에서 물러나도록 하여라. 차라리 처벌받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후 태평천국 운동이 육로를 장악하여 청은 조공을 중단하라는 칙령을 내렸으니,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
이렇듯 응우옌 왕조에 대한 청의 대우는 레 왕조의 대우보다 훨씬 소원한 것이었다. 청은 안남에게 조공사祖工使만을 보내고 경조사敬
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남의 조공국들 중 가장 작은 나라들이었으며, 이들의 존
재는 대남이 스스로를 남조南朝이자 제국이라 칭할 수 있는 정당성의 기반이
되었다. 祖使를 중단해 달라고 흔히 요청했기 때문에 예외적 사절의 횟수가 줄어들었고, 안남 역시 청을 경원하여, 응우옌 왕조의 조공품의 가치 는 레 왕조 시절의 그것에 절반에 불과하게 되었다. 마지막 이유는, 단지 안남이 조선보다 북경에서 더 멀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응우옌 왕조가 레 왕조의 수도였던 하노이에서 700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후에로 천도하는 바람에 연경까지의 거리가 더 벌어졌었다. 응우옌 왕조의 대청외교는 주로 광서와 광동을 총괄하는 양광총독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로써 청 조정 인사들의 안남에 대한 심리적 거리는 더 멀어졌다. 위 세 요소는 서세동점 시기에 청이 조선보다 안남에 대해 훨씬 더 미온적인 정책을 펼치는 부분적 이유를 제공한다.
대남은 1858년을 시작으로 꾸준히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왔다. 결 국 대남은 1862년에 동남부 3성을 할양하고, 1867년에는 서남부 3 성을 할양함으로서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설립을 인가할 수밖에 없 었다. 대남 조정은 당시 민란 문제들을 더욱 시급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고, 코친차이나의 상실이 불가역적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1873년에 뒤퓌Dupuis라는 상인이 항해의 자유가 금지되어 있던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남을 위협하던 태평천국의 잔당 황기군과 내 통하여, 프랑스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안남 정부가 뒤퓌를 감금하자, 프랑시스 가르니에 제독이 뒤퓌를 두둔하고 하노이 성채를 공략하던 중 안남 정부와 동맹을 맺은 흑기군에게 피살당했다.
그로 인해 1874년에 프랑스와 안남은 2차 사이공 조약으로도 알 려져 있는 갑술화약甲戌和約을 맺었으나, 양국의 조약에 대한 이해 는 달랐다. 프랑스는 이 조약을 보호국 조약으로 인식했었으나, 베트 남은 단지 가르니에 제독이 사살당한 불미스러운 사건을 끝맺고, 우 호적인 관계를 재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조약 체결 당사자였던 코 친차이나의 관료들 또한, 본국의 허락없이 통킹을 공격하였으니 사태 가 확전되어 본국의 추궁을 당할 것을 우려했었다. 게다가 프랑스군 은 가르니에 제독이 통킹-중국의 접경 지역인 랑썬에 주둔하고 있던 흑기군에게 피살당한 이후 패주하고 있었으니, 사건이 빨리 해결되기 만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갑술화약의 내용을 읽어보면, 캄보디아 보호령 조약(1863년)이나, 후일 맺을 바르도 조약(1881년)이나 1차, 2차 후에 조약 (1883, 1884년), 마다가스카르 보호화 조약(1885년) 에 비하면, 피보호국에 대한 양보가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갑술화약은 1874년부터 1883년까지 기존에 있었던 상이한 동서東西국제질서 간의 모순을 부각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문제 가 되는 조항은 베트남의 보호화와 관련된 2조와 3조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제2조에 “프랑스 대통령은 베 트남 왕의 주권과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하고, “모든 공 격으로부터 안남을 보호, 안남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지원 과 안남 국토 일부를 노략하고 있는 비적/해적들을 파괴하기 위한 지원을 무상으로 약속한다”고 했고, “2조에 대한 보답으로 안남의 국 왕은 외교정책을 프랑스의 정책과 같이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과 “모든 세력으로부터의 보호”가 현대인에게는 상충하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보호령”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지언정 “배타적인 주권의 보장으로서의 보호권”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터라, 조약 체결 당시 당사자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조 약의 내용이 안남 측에 많은 부분 양보하고 있는 점을 보아, 속전속 결로 조약 체결을 하는 것이 전략적 우위가 보장되지 않은 프랑스에 주요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황이 어찌 되었든, 이때 보호령을 확실히 정의하지 않은 것은 1874년부터 1883년까지 불-월-청 관계 를 오염시키는 화근이 된다.
한편, 1880년 이전의 청은 베트남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 다. 청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것은 항상 프랑스가 먼저 건의를 했 을 때였다. 예컨대, 1875년에 주청 프랑스 공사가 공친왕 이신에게 안 남과 맺은 1874년 조약을 통보하고, 청의 입장을 물었을 때, 공친왕은 “안남은 청의 속국이나, 정교금령에서 자주적이니 조약을 맺을 수 있 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다. 더욱 구체적으로 청의 정책 기조는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이 전개 하던 반프랑스 투쟁을 은밀히 지원하되, 프랑스군과의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는 것이었다. 당경숭唐景崧은 유영복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198)
적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고, 국경 관리들은 그를 추천했습니다.
유영복의 부하들은 모두 용감하고 전투에 능숙했습니다. 그들에게 관
직을 주거나 임시로 칭호를 주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십시오. 사
람들을 보내 그곳으로 보내 직접 알리고, 비밀리에 적을 격퇴할 전
략을 짜십시오. 또한 그 나라(베트남)의 왕과 대신들을 인도하여 의
심을 불식시키고 식량을 제공하십시오. 흑기군은 베트남의 발톱일 뿐
만 아니라 우리 국경의 주요 보루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분쟁을 일으킬 빌미를 만들지 않고, 윈난 지역의 국경 방위 를 강화함으로써 프랑스 상인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 었다. 윈난 및 귀주 총독 잠육영岑毓英은 청과 프랑스 군대가 청월 국경에서 합의해서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외국 세력이 무역을 명분 으로 윈난성에 진입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했다.199)
198) 敵人慘懾,疆吏薦揚,其部下亦皆剽勇善戰之材。…聞其欲來,誠無路得達;
明畀以官職,或權給予銜領,自必奮興鼓舞。遣員前往,面為宣示,即與密籌卻
敵機宜,並隨行隨事開導該國(越南)君臣,釋其嫌疑,繼以糧餉,以使黑旗軍
非獨該國之爪牙,亦即我邊徼之干城。
199) 請旨敕下總理衙門照會轉行駐越南之領事各官,以飭軍於邊界堵剿越南各匪,
與法兵不相干涉,勿生嫌疑。至通商一事,前定條約原無雲南地方,雲南亦無通 총리에게 주 월남 영사들에게 각서를 전달하여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국경의 도적들을 진압하게 두고, 프랑스군의 일에 간섭하여 의심을
받지 않게 하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무역과 관련하여, 이전 조약에는
윈난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윈난에는 무역할 상품이 없으므로 논의
할 필요가 없습니다.
II. 본론
1. 주프랑스 청 공사 증기택曽紀澤의 항의: 번속의 조약 맺을 권리?
전술했듯이 청은 줄곧 프랑스에 원론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공 식적인 항의는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청의 대월 정책 이 왜 변화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한 추론이 존 재한다. 첫째, 1880년 프랑스의 해군장관 조레기베리와 외무장관 생 일레르는 1874년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대남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전쟁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둘째는, 1881년에 증기택을 필두로 러시아에 신장의 대부분을 할양했던 조약을 개정하고 일리 조약을 새롭게 맺으면서, 청은 서양 열강과의 외교 교섭에 일정한 자 신감을 획득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감은 단순히 국제법 운 용에 대한 숙련도 향상이 아니라, 애초에 이번원을 통해 기미정책을 도입했던 신장 지역을 근대적인 “주권”이 미치는 온전한 영토로 탈 바꿈할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해석은 양쯔썅의 논 문200)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필자는 이 가설이 보다 설
商貨物,應無庸議。 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1880년 이후 청의 대베트남 정책을 주도한 두 핵심 인물은 증기택과 이홍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청나라에서 드물게 서양 국제법에 정통한 관료들이었다. 증기택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공사를 역임한 외교관으 로, 중국 내에서 국제법 전문가로 널리 이름을 떨쳤었다. 증기택으로 대표되는 강경파는 안남이 독자적으로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직례총독 이홍장은 조선의 사례를 모델로 삼아, 안남에 외부 세력들의 균세로 보존하여 중립화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홍장이 추진한 “안남 균세안”은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 열강들의 거절로 좌절되었고, 애초에 안남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그는 결국 프랑스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는 과정을 그대로 방관하게 된다. 한 편, 증기택의 속국 개념에 대한 인식은 1880년대 초반과 청월전쟁 이후 인 1885년을 기점으로 두드러지게 변화한다. 초기에는 속국을 배타적 영향권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그는, 전쟁 이후에는 속국을 주권 영역으 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된다.
증기택은 1880년, 프랑스의 베트남 종속화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담은 각서를 프랑스 외무부 에 전달했다. 비록 그의 이러한 강경파 노선이 프랑스의 정책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청조 내부에서는 허난성 태수 예문위倪 文蔚나 양광총독 장수성張樹聲 등 지방 관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 다. 그렇다면 월남 문제와 관련하여 증기택이 보낸 일련의 항의 서한 들은 어떠한 함의를 갖는가? 증기택은 총리아문에 제출한 각서에서 일곱 가지 주요 쟁점을 제기 하였고, 그중 두 번째 항목에서 그는 베 200) 杨紫翔, 非对称视角下的近代中越相互认识:以中法越南交涉为中心, The
Recent Sino-Vietnamese Mutual Perceptions in the View of Asymmetry
——Center on the Sino-French Negotiation Over Vietnam, 2014 트남이 속국이므로 자주적으로 조약을 맺을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이는 갑술화약만의 법적 무효성을 설파하려고 한 시도로 볼 수 있지 만, 실제로는 월남의 조약 체결 권한 자체를 차단하는 의도를 내포하 고 있었다. 증기택은 프랑스와 월남 간에 체결된 1874년의 조약을 논하면서:
외교부가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아 매우 염려된다. 프랑스와
월남 국왕 간에 체결된 조약 2조에선, 프랑스가 베트남 국왕을 독립
된 국왕으로 인정하며, 방어를 돕겠다고 약속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300년 전 여전히 중국의 일부였다. 이후 베트남은
속국이 되어 스스로 내정을 관리했다.201) 프랑스가 베트남과 조약을
체결했지만, 중국의 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보
호하고자 했고, 이는 선의에 의해서였다.
중국은 프랑스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아무런 위험도 없다.
둘째, 월남은 중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고, 중국은 월남의 요
구가 있어야만 개입할 수 있다. (...) 셋째, 월남과 중국은 넓은 국경
을 접하고 있다. 월남이 중국이 속국이 아니더라도, 중국은 월남의
국경에 대해서 우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한에는 파병이나 점령
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조약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 당신네 나라가 월남을 보호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하
지만 중국을 점령할 생각이라면 내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는가?
이 서한에서 증기택은 안남이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안남은 전통적으 로 중국의 판도版圖 내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속국이었다는 점이고, 201) 三百年以前, 越南尙隸中國版圖. 厥後封爲屬國, 自理內政。 둘째, 안남이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프랑스군의 주둔을 방기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가 월남을 보호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증기택이 국제법에 무지해 서가 아니라, 당시 보호권이라는 실정법적 제도가 현실 정치에 아직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 년 전인 1877년 9월 30일, 이에 대 해 주청 프랑스 공사 몽모랑(Montmorand)은 프랑스가 안남과 보호 국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이 개입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 게 여기며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 청이 프랑스를 두려워하고 우호적 관계 유지를 중시하여 굳 이 불필요한 충돌을 유발시킬 필요가 없어서 묵인한 것이었고, 둘째, 청이 보호국保護國이라는 국제법적 개념의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다.202) 당시 청에게 “보호”란 전통적 외 교 질서에서도 의미를 갖는 개념이었다. 대국이 소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가족관계의 연장선인 국제관계에서 대국에게 부여된 도덕적 책 무일 뿐 아니라, 화외지민化外之民의 침입으로부터 중국을 방어하기 위한 실용적 의무이기도 했다. 단, 이러한 보호 행위는 속국 군주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야 정당화될 수 있었기에, 보호는 외교권을 배 타적으로 장악한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갑술화약에 는 “보호령”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지 않았고, “전통적인 관계를 변화 하지 않”는다고 명기되었으니, 청이 이를 두고 격하게 저항할 이유도 부족했던 셈이다.
증기택은 1880년 초에 프랑스 외무부장관 프레시네(Freycinet) 및 주상트페테르부르크 프랑스 영사 샹지Chanzy와의 논의에서는 다소 202) Ministère des affaires étrangères, Documents diplomatiques, Affaires
du Tonkin, 1874-décembre 1882, number 25, lettre de Montmorand à
Decazes 온건한 입장과 어조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반발은 점증적으로 강경 해져, 후일 생 일레르와 쥘 페리와 토론 시점에 이르러서는 격정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류큐를 일본에 상실한 사건이 중국의 위상에 타격을 주었다”고 평가하며, 전통적인 천조상국으로서의 관념 과 천조질서 체계 속에서 프랑스의 안남 보호국화에 저항했다. 증기 택의 이러한 입장은 청 조정에서도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으나, 궁극 적으로는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서는 주류의 입장은 아니었다. 이홍 장은 비교적 온건파였고, 생 일레르의 서한에 따르면 공친왕은 “증기 택의 주장은 청 조정의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않으니 방념하라”고 까지 프랑스 측에 당부했다고 한다.
증기택은 1880년부터 1885년 사이 프랑스 외무부와 꾸준히 서신 을 교환했으며, 총리아문에도 더 강경한 방향으로의 정책 변환을 계 속 요구했다. 그는 “속국”을 “보호국”에 개념에 빗대어, 기존 속국 관계가 보호령과 다름없었음에도 중국이 이를 방만하게 운영한 탓에 서구 열강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그는 중국의 영 향력이 미치는 “속국”들을 모두 근대적인 “주권”이 미치는 지역으로 전환하고, 내지화시킬 것을 종용했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점 차 근대 제국주의적 성격으로 변질된 청의 대조선 정책 기조를 반영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시점부터 청은 전통적 속국 관계에 대해 보 호국 개념을 소급 적용하며, 양자의 등치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증기 택이 청불전쟁이 끝날 무렵 올린 상주문은 이러한 인식과 입장을 매 우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203)
203) 窃思西洋各大国,近者专以侵夺中华屬国为事, 而以非真属国 为词。 该中国
之于属国,不问其国 内之政,不问其境外之交, 本与西洋各国之待屬国遐然不
同。西藏与蒙古同 乃中国之屬地, 非属国也。然我之管辖西藏, 较之西洋之约
束屬国者犹为宽焉。西洋于该处亦只称中华属国,而已视内地省份固 为有间。我
不于此时总揽大权, 明示天下, 则将来称屬地为屬国者,将复称屬国 为非真屬 서구 주요 강대국들은 최근 중국의 속국들을 침략하고 점령하
는 데 주력하며, 그들이 진정한 속국이 아니라는 변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속국의 국내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대외
관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서구 국가들이 속국을 대하는 방식
과는 매우 다릅니다. 티베트와 몽골은 모두 중국의 속지(屬地)이지
속국(屬國)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티베트 관할권은 서구의 속국
을 대하는 방식보다 훨씬 관대합니다. 그리하여 서구는 티베트를 중
국의 속국으로만 칭하고, 내륙의 지방들과는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
다. 만약 우리의 완전한 주권적 권위를 확립하고 이를 세계에 분명
히 알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저희의 속지를 속국이라고 부르는 자들
은 저희의 속국은 진정한 속국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며, 침략과
점령의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권을 확립하고, 국경을 더
욱 명확히 하며, 관세 수입이 풍부해지고, 국방을 영구히 보장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번영을 누리고 위협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당정경唐廷庚-응우옌 반 뜨엉(Nguyễn Văn Tường阮文祥)의 필담: 대남의 자주적인 균세 추구와 균세를 위한 자주
직례총독 이홍장은 양광총독을 통해 안남에 당정경을 파견한다. 당 정경의 중국상인증기운행회사輪船招商局의 부장副將 직위을 갖고 있 었으며 정3품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204) 증기선회사는 양무운동 이 래 청의 조선 사업과 자강 사업을 견인하며, 양광총독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정경에게 부여된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안남의 실제 상황을 정탐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国, 又有侵夺之虞矣。 …我之主权既著, 边界益明, 關榷日饒, 屏藩永固,
兴利也, 而除害之道在焉。
204) 대남식록, 8부 535쪽 황기군과 이양재의 난, 그리고 홍강에 주둔한 프랑스군으로 인해 통 킹-광서 접경 지역의 왕래가 불편해진 상황 속에서, 이를 우회해 안 남 황제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비밀 창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홍장과 종번국의 정승이 서한을 교환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이유원과 이홍장이 나눴던 서한이 연상되지만, 두 사례는 실상에서 약간 차이 가 있었다. 이홍장은 이유원을 통해 조선이 서양 각국과 수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며 적극적인 입장을 보 였었다.
이에 반해, 응우옌 반 뜨엉과의 교류는 단발성에 그쳤다. 더구나 응우옌 반 뜨엉은 원래 수신인이 아니었고, 황제와 직접 대화하려는 당정경의 요청을 받아 대리인으로서 응대한 인물이었다. 대남식록에 따르면, 청 관리가 안남 황제를 조문하러 왔으나, 프랑스 관리가 의 심할 것을 우려해 응우옌 반 뜨엉에게 대신 응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 한다. 응우옌 반 뜨엉은 기밀원機密院 소속의 4인 내각대학사內 閣大學士 중 한 명이었고, 뜨득 황제 사후에 똔떳투옛(존실설尊室 說)과 함께 어린 황제를 섭정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할 거물 정치인 이었다. 그는 예부에서 당정경에게 연회를 열어 환대하고 선물을 증 정하였으며, 밀담 후에는 상아와 코뿔소 뿔을 장수성과 이홍장에게 전달할 선물을 주어 보냈다. 당정경은 이 서한을 양광총독에게 보냈 고, 총독은 다시 그 내용을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이 서한에서 응우옌 반 뜨엉은 안남이 천조天朝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屬國인 것은 만국이 아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그가 청 조정에 요 구하는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연경에 안남 관리를 상주시켜, 프랑스 가 조약을 위반할 경우 총리아문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는 것이었다. 둘째, 당시 여러 나라의 영사들이 광둥성에 거주하고 있 듯이, 안남 역시 양광총독의 승인을 받아 영사를 광둥에 파견함으로써 무역과 정보 교환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셋째, 영국, 러 시아, 프로이센, 미국, 오스트리아, 일본, 프랑스 등에 안남 유학생을 보내서 견문하게 하고, 국가의 부강을 꾀한다. 청의 선박들이 안남보 다 해외로 자주 출항하여 서양 견문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안들은 일정 부분 이홍장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는 안남 문제의 관할 기관을 예부에서 총리아문으로 이관해서, 더 원활하고 신속한 교류가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두 번째 제안은 시간의 부족으 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홍장은 안남 영사를 광둥에 파견 하는 방안을 양광총독과 논의했다. 세 번째 제안에 대해서도, 중국의 함선을 임차해서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안건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안남의 보호국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서, 이홍 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남은 이러한 정책을 실행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책의 실현 여부와 별개로 중요한 점은, 당시 청과 안남의 외교관들이 조공 관계라는 틀을 고수하면서도 시세의 변화에 저항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태의 중대함과 급박함 때문에 기존 공식 교류 채널을 통한 교류가 불가능해졌음을 바로 인 식했고, 새로운 채널을 통해 유연하게 소통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후 이홍장은 영국, 독일, 미국 공사와 접촉해서, 월남과 통상조약을 맺고 수교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881년 12 월에 주청 영국 공사 토머스 웨이드는 이미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지배 력이 확고하므로 수교는 무의미하다고 답변한다. 1883년 6월에 다시 독일 공사에게 동일한 제안을 시도하지만, 독일은 이홍장에게 동정을 표하면서도 안남과 조약을 맺으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 공사 인 존 러셀 영 역시, 월남에서 정세가 조금 안정된 이후에 다시 논의해 보자며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결국 대남은 태국, 스페인, 코친차이나와 만 통상조약을 맺고 공사를 파견했다. 이 가운데 스페인은 사실상 프랑 스의 파트너이자 갑술화약의 공동서명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권리가 화 약에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은 프랑스의 영향력에 균형을 잡 아줄 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안남의 균세 전략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청과 안남의 균세 추구가 너무 늦었다는 점에 있다. 이홍장이 본격적으로 안남과 조약을 맺을만한 국가를 찾기 시작한 시점은 1881 년으로, 보호령 조약을 맺기 불과 2년 전이었다. 또한 이홍장의 개인적 인 태도에도 문제였다. 그는 조선의 문제에 비해 안남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관조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이홍장이 프랑스의 야욕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점이 다. 그가 1881년에 남긴 서한을 보자.
베트남은 이미 매우 약해져서 모든 면에서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프랑스가 조약을 체결한 이상, 중국이 그들을 만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사절의 의도를 보면, 베트남을 당
장 합병할 의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리를 두고 언제든 중
재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205)
프랑스 외교문서집의 1882년 11월 27일에 부레 공사와 이홍장의 회담에서 이홍장이 구상했던 방안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그는 프랑 스가 윈난 지방에서 통상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며, 단지 마가리Margary 사태 (중국인이 영국인을 사살했던 사태)와 유 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고 했다. 둘째로는, 안남과 청 사이에 오랜 전통적인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빼앗 기는 모양새가 되면 국내에서 큰 반발이 있을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205) 越南孱弱已甚, 事事求助于法人, 既立有约据, 恐非中国所能劝阻,然窥法
使之意,尚非即思吞并者, 似只可不即不离, 随时设法调停. 그러면서, 하나의 방안으로, 안남을 공동보호하는 것을 제안한다. 부 레는 절대 안남에서의 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통킹 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자 한다고 한다. 이홍장은 부레에게 보호국과 조공관계의 차이점을 굳이 상세히 논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는 통킹 을 영세중립화하여 홍강 이북 지역을 청이 보호하고, 이남 지역을 프 랑스가 보호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이런 영세중립화안에서, 이홍장의 대남에 대한 방안을 근대 조약 체제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이홍장 은 대남이 자주국으로 생존할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고, 청과 프 랑스 군대의 동시 주둔을 통해 완충 지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3. 팜턴주엇(Phạm Thận Duật范慎遹), 응우옌 투엇(Nguyễn
Thuật阮述)의 사절단과 이홍장李鴻章: 조약을 상국에 통보할 의무와 3자회담의 좌절
원래 1882년의 사절단은 청나라에서 광둥성까지 내려온 사신이자 장수 당경숭唐景崧과 함께 연경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앙리 리비에르 제독에 의해 하노이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홍장은 관리 두세 명을 천진에 초청하고, 안남 황제의 국서를 가져오게 하는 방향으로 틀었다.206) 이때 선정된 사절단은 1880년에 청을 견문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사절과 같은 인물로, 중국의 유명인 사와 회동하여 시를 나누어 많은 문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었다. 1883년의 사절도 예외는 아니라서, 팜턴주엇과 응우옌 투엇은 청의 명문들과 시와 서적을 주고 받았을 뿐 아니라, 소네 슌토라曽根俊虎 라는 일본 해군 장교와도 접견하여 “동아협동체”를 생성할 필요성을 206) 대남식록 8권 643쪽 논의하기도 한다. 이때 그는 소네 슌토라로부터 청월 비공식 교전을 요약한 법월교병기法越交兵記를 한 부 받는데, 풍문으로 와전된 이 야기가 많아서 고쳐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홍장은 주청 프랑스 공사인 알베르 부레Albert Bourée와 안 남을 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전술했다시피, 안남은 청에게 조약의 존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감추고 있었으며, 청은 프랑스와 영국 언론 을 통해서 안남의 사정에 대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따라서, 이홍장은 협상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안남의 정보가 필요했던 상황이었 다. 그는 부레 공사에게 안남 대표와 함께 3자 회담을 진행할 것을 제 안하는데, 프랑스 측에서는 이를 거절한다. 왕지캉을 포함한 대부분 중국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이 자애로운 상국上國이었기 때문에 베 트남에게 목소리를 낼 권리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홍장과 팜턴 주엇 사이의 대화는 이홍장이 월남의 조약 맺을 권리를 부정하는 모 습을 보여준다. 이홍장이 팜턴주엇에게 몇 개의 조약을 맺었는지 묻자 주엇은 1862년의 1차 사이공 조약과 1874년 2차 사이공 조약이 전부 라고 대답한다. 이홍장은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속국과 타국 간의 조약(예컨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은 천조天
朝에게 보고되어야 한다. 초안은 예부에 바쳐질 것이고, 미국, 영국,
독일과 맺은 조약은 청 조정에 의해 검토될 것이다. 나는 (...) 조약
이 호혜적인지 아니면 해로운지를 판별해서 가장 좋은 조건으로 안
남에게 조약을 맺게 했을 것이다. 대국은 소국을 은덕恩德으로 보살
피며 유원柔遠한다. 그러나, 안남은 천조의 동의없이 법국과 조약을
맺었고, 나중에서야 사신을 보내서 통보했다. 이는 번속국藩屬國의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10년이 지났건만, 이제 와서 조약의 사본을
보내서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홍장은 조선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사례를 “모범사례”로 내세우고, 비밀스럽게 조약을 맺은 안남을 꾸짖는다. 이는 “안남이 정교금령政敎禁令에 있어 자주自主하기 때문에, 청이 알 필요가 없 다”고 했던 공친왕恭親王 혁흔의 대답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 를 이홍장이 종래부터 갖고 있었던 의견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임 오군란 이후 청의 대對외번 외교정책의 변화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까. 전통적인 청-안남 관계에 비추어볼 때, 제3국과 조약을 맺을 때 청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다. 다만, 안남 문제를 전담하고 있었던 청 외교관들은 번속의 상실이 야기할 조정 내에서의 추궁 때 문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안남이 속국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 지 않아서 자신이 손쓸 방법이 없었다는 주장은, 대안남 외교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청 관리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공통 된 수사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래 양광총독 장지동의 글을 보자.207)
함풍(咸豊), 동치(同治) 이후, 해당 나라(대남)는 여러 차례 내란을
겪었으나, 모두 천조(天朝)의 군대가 진격하여 토벌함으로써 차례로
평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대남을 위기로부터 구제하고 기
울어짐을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데도 대남의 국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보존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였 207) 咸丰同治以来, 该国数有寇乱, 均赖王师进讨, 次第削平, 扶危定倾之
衷, 我国家未尝一日忘也。 乃该国王昧于制治保邦之义, 历年与法人叠次私立
盟约, 渐撤藩萬, 冒境丧师, 自赔祸患。 前年滇桂出师, 本部堂遵旨力筹规
越之计, 征兵转饷, 百道经营, 该国并不遣一使备一文来辕陈请商定, 并举
夹攻之策。迨大兵破敌南关, 克复谅山长庆之际, 复不能纠集义旅, 协助官军
乘机却敌。 朝廷不忍生灵久罹锋镝, 俯从法人款议, 今成局久定, 该国 自顾
归法人保护, 近来势愈不振, 乃始来文想乞援。 览其情词, 极为可悯, 而事
机已失, 补救无从, 盟约昭然, 也能更生他议。 으며, 수년을 거듭하며 프랑스와 잇따라 사적으로 맹약을 체결하고
점차 속국의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대남이 국경을 잃고 군사를 잃은
것은 스스로 화근을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작년 운남(雲南)과 광서
(廣西)에서 군대를 파견할 때, 본부당(本部堂, 청 조정)은 성지(聖旨)
를 받들어 월남을 규합할 계책을 꾸렸고,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을
운송하며 백 가지 방도를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남은 한 명의 사
절도 보내지 않고 한 통의 서한도 보내지 않아 진영(陣營)에 와서
협공의 전략을 함께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대군(大軍)이 남관(南關)에서 적을 격파하고 량산(諒山), 장경(長慶)
을 탈환했을 때에도, 다시 의병으로 관군을 도와 적을 물리치지 못
했습니다. 조정은 백성이 오랫동안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것을 차
마 방관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화의(和議) 요청을 윤허하였으니, 이제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대남은 스스로 프랑스의 보호에 귀속하려 하
였고, 근래에는 형세가 더욱 쇠퇴하여 비로소 원군을 청하는 긴급한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정황과 글로 보니 지극히 가련하나, 나라를
살릴 기회는 이미 잃었고 보완할 길이 없으며, 맹약이 분명하니 다
시 다른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홍장이 팜턴주엇에게 3자 회담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 지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이홍장은 안남으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 3자회담이라는 형식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홍장은 부레 공사와의 협상을 앞두고 있었으나 안남 내부 사 정에 대한 파악이 매우 부족했다. 둘째, 프랑스와의 보호조약을 사실 상 부정하고, 안남이 여전히 자주적인 외교 주체임을 국제사회에 각 인시키기 위해 안남을 협상 테이블에 참여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다. 결국, 3자 회담은 프랑스 측의 거부로 인해 무산되었기 때문에, 이홍 장의 본심을 단정할 수는 없다. 셋째 가능성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이홍장의 국제질서에 대한 관념 속에 여전히 가족의 연장선으 로서의 상상된 국제관계가 배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우 안남과 외 부자 프랑스를 화해시키려는 형, 또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 던 것일지도 모른다.
팜턴주엇은 이후 이홍장과 회담을 장수성에게 설명하며 다음과 같 이 변명한다. 조선은 북경과 인접하여 소통하기 편한데, 폐방은 조선 과 달리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약을 통보하는 것이 관례인 줄 몰랐다. 종래에 우리나라 역시 천조상국의 법률을 지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고의로 통보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를 통보받은 이홍장은 분개하여 베트남을 놓고 수서양단首鼠兩端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남은 청이 프랑스와의 중재자 역할을 하길 원했고, 전시에는 청이 군함을 파견해 안남을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팜턴주엇은 톈진에 머물다가 투언안 요새가 쿠르베 제독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다. 그와 응우옌 투엇은 더 이상 청에 희망을 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귀국한다.208) 팜턴주엇은 왕진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분개했다. 청 조정은 아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조정할 것을
약속했다. 청은 우리를 톈진까지 불렀으나, 아직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
았고, 지원 군함을 보내는 것도 망설이고 있다. (...) 어떻게 청 조정은
자신의 속국을 보호하지도 않으면서 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가?
208)
https://archivesonline.mh.sinica.edu.tw/detail/243392a7a130eee9f8e0565
55438ee31/?seq=5 팜턴주엇이 사용한 수사는 초기에는 상국과 속국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나, 점진적으로 대남이 중국의 안보에 기여하는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는 전통적 수사에 이홍장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체감하고, 상국-속국 관계 가 포장하고 있던 월청관계의 본질을 폭로한 뒤, 보다 현실주의적 국 제관계에 입각한 수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팜턴주엇은 “대남이 프 랑스로 넘어가면 중국도 안전하지 않다”며, 이홍장의 상상력과 안보 의식을 자극하고자 했으나, 결국 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 패했다. 역설적이게도 팜턴주엇이 소환한 현실주의적 국제관계 논리 는 3자 회담이 좌절된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기존 중국 학계의 해 석과 달리, 이홍장을 포함한 청의 관료들은 소국을 보호할 당위나 의 무감을 느끼지 않았고, 안남 또한 청의 은덕에 감화된 상태가 아니었 던 것이다. 월청관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안보와 경제적 이해를 중 심으로 한 현실주의적 관계였으며, 번속과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는 수사는 이 관계가 무리 없이 존속될 수 있도록 안정성을 부여하는 명분이자 윤활제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3자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것은 이홍장이 애초에 3자회담을 추진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의 안보에 실질적인 위협 초래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했고, 임오군란으로 가시화된 일본과의 대립으로 일어날 병력 분산의 위험 을 감안해 안남을 이미 전략적으로 포기했던 것이다.
III. 결론
이 연구는 세 개의 사건을 통해 월청관계의 변곡점을 분석해보았 다. 1874년 이후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던 청이 1880년대에 이르러 개입주의적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는데, 이러한 전환은 양광총독과 주 청 프랑스 공사를 포함한 실무자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이홍장을 포함한 주요 정책 결정권자층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홍장의 정책 은 무엇보다도 안남으로 하여금 유럽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게 하 여 균세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프랑스의 일방적 침탈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개입정책보다는 관조觀照정책에 더 가까웠다. 이홍장은 당정경과 같은 밀정을 통해 후에 황실과 접촉을 꾀했지만, 이미 전쟁을 포기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 에게 안남은 조선보다 전략적 우선순위가 낮았고, 청의 4대 신축 함 대가 완비되지 않은 시점에서 프랑스의 강력한 해군력에 맞서기 어 렵다는 현실 인식 속에 평화적 해결을 지향하고 있었다.
반면 응우옌 반 뜨엉은 당정경과의 회담에서 내적으로는 자강, 외 적으로는 균세를 도모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북경 총리아문 인 근에 베트남 공사관을 설치하고, 서양 국가들과 교류하여 대남을 중 립화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는 대남이 북쪽 대국이 읽는 판도를 상 당히 정확하게 읽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883년 3자회담은 이홍장 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프랑스의 원천적 차단 때문에 애초부터 무산 될 운명이었다. 이홍장이 군함을 원조를 거절한 사실은 청의 대안남 정책 기조를 명쾌히 보여준다. 결국 그는 1884년 5월 12일에 푸르니 에와 접견해서 안남을 사실상 포기하는 리-푸르니에 협정을 체결한 다. 협약의 골자는 통킹을 포함한 중국의 남부에 있는 영토를 프랑스 가 보호하고, 통킹 북부의 국경에는 청군이 주둔한다는 것이었다. 베 트남을 국제법상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대신 윈난성, 광동성을 포함한 청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본 연구는 증기택, 이홍장 그리고 응우옌반뜨엉의 “외교에 있어서 속국의 자주성”에 대한 인식을 조명했다. 이홍장은 대남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균세를 추구한 반면, 증기택은 대남은 청의 속 국이므로 프랑스와 맺은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 러나 이들을 외교권의 유무有無로 구분하기보다, “전통 조공질서 대 국제법 질서”의 스펙트럼 위에서 보면 양자 모두 현실주의적 국제관 으로 수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로 갈수록 증기택은 속국 논리가 서양 열강들에 의해 수용되지 않음을 인식하고, 남은 속국(조 선)을 서양의 속국 개념(보호국)이나 주권 지역으로 재정의하여 속국 이 열강들에 의해 침탈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 실 안보를 고려해 전통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를 포기하고 서양 국제 적 규범을 수용하겠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홍장 역시, 리-푸르니에 협약 당시 대남을 영세중립국화하는 방안 을 검토했고, 홍강 이북과 이남을 나누어 공동 보호함으로써 완충지대 를 확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는 중국 국경에 프랑스인들이 유입 되어 불안정을 야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 홍장을 방문했던 대남 사절단 역시 “속국”임을 자처함으로써 청의 보호 를 호소했고, 그 보호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자 대남이 붕괴하면 청의 안보에 야기될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다. 역설적이 게도 이들은 “속국”, “천조”와 같은 전통 수사를 자신들의 정책적 이상 을 투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1880년대의 천조상국 수사는 아무 도 믿지 않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유용하고도 공공연한 허구, 일종의 “조직된 위선”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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