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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의 복합 제국 건설: 『대의각미록』의 유교적 정체성 구상 자금성 구진영

동아시아질서건축사 : 고대천하에서 미래복합까지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6월 30일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 수료

Ⅰ. 서론

청(淸)나라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고 있다. 청나라의 모습을 표현하는 개념이 중외일 통(中外一統), 화이일가(華夷一家), 다민족 제국(多民族 帝國), 대중화 주의(大中華主義) 등으로 통일되지 않은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상징물로는 청 황제의 초상화 를 살펴볼 수 있다. 청의 황제들은 때로는 한족(漢族) 문인처럼 유교 (儒敎)의 이상적 군자(君子)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수보살(文殊 菩薩)이나 티베트 라마승의 형상으로 표현돼 북방 민족이 숭상하는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서양인의 외양으로 묘사되기 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황제의 모습이 형상화됐다. 이러한 사실은 청이 다양한 민족을 포괄한 다민족 제국이었다는 신청사(New QingHistory) 연구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1)

1) 이은상 2021, 15.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다민족 제국의 수장이 었던 청의 황제는 왜 유교 질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금성(紫禁 城)에 거주하였는가? 자금성은 천상의 자미원(紫微垣)을 지상에 구현 한 공간으로, 유교 사상의 정수(精髓)가 집약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 다. 또한, 청이 유교 경전을 기반으로 한 명(明)나라의 과거제도(科擧 制度)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시행했다는 점도 고민해볼 지점이다.

이 밖에도 의문은 계속된다. 강희제(康熙帝)는 명 태조(太祖) 홍무 제(洪武帝)가 제정한 여섯 가지 교훈을 열여섯 조로 확대하여 『성 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편찬하고, 이를 매일 아침 관청에서 낭독 하게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2) 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 한족 지식인을 달래기 위한 대규모 편찬 사업도 진행하였다.3) 이 는 청이 유교적 질서에 기반하여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한 대표적인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옹정제(雍正帝)는 『성유십육조』에 대한 해설서 인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였으며, 나아가 자신이 유교 정 통을 계승한 군주임을 천명하기 위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집필하고 전국적으로 배포하였다. 건륭제(乾隆帝)의 경우, 방대한 고 전과 문헌을 분류하여 체계화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완성하였 다. 이 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문으로 구성되며, 가장 으뜸인 '경'에는 유교 경전만을 포함 시키는 등 유교 중심적 질 서 체계를 확고히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청의 황제들이 단순히 만주족의 전통을 고 수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 통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내면화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청이 만주족의 고유한 특성을 고집 2) 이시바다 타카오2009, 243. 3) 남철진 2021, 365. 하며 다민족 제국만을 지향했다면, 위와 같은 유교 중심의 정책은 채 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청나라를 어떻게 이해 하고 서술해야 하는가?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청이 점차 한 화(漢化)되어갔다는 ‘한화론(漢化論)’이며, 다른 하나는 만주족 고유의 문화와 정치적 정체성이 끝까지 유지되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후자의 관점은 신청사(New Qing History) 학파를 중심으로 부각 되었으며, 청을 다민족 제국으로서의 특수성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유교의 영향력과 동아시아적 보편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며, 유교적 통치 이념을 만주족 고유의 전략으로 축소 하는 경향이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청 의 통치 이념이 실질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밝 히고자 한다. 특히 유교가 단순히 한족 회유의 수단이 아니라, 청 황 제의 통치 구상 속에 내면화된 실질적 이념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구청사와 신청사 이후, 청나라 역사를 바라보는 제3의 시 선4)에 관하여 정리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는 옹정제가 직접 집필한 『대의각미록』의 상 유(上諭)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은 청 황제가 유교적 정통성을 어떻게 해 석하고 수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로 평가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대 의각미록』을 중심으로 청 통치 이념 속 유교의 위상을 고찰함으로써, 청을 둘러싼 보편성과 특수성의 논쟁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4) Nianqun, Y., 2010.

Ⅱ. 『대의각미록』의 역사적 궤적과 해석의 스펙트럼

1. 『대의각미록』의 등장과 퇴장의 역사

옹정제가 즉위한 지 6년이 되던 어느 날, 천섬총독(川陝總督) 악 종기(岳鍾琪)는 호남성(湖南省)의 유생 증정(曾靜)이 자신에게 거병 을 촉구하였다는 사실을 옹정제에게 즉각 보고하였다. 악종기는 악비 (岳飛)의 후손인데 악비는 금나라와 싸워 크게 이긴 송나라(宋)의 장 군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5)

이에 옹정제는 증정과 그의 제자를 체포한 뒤 직접 심문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남(江南) 지역 한인들이 자신의 황위 계승을 의심하 고 있으며, 화이관(華夷觀)에 근거하여 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옹정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증정을 심문한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편찬하고,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강독하게 하였 다.6) 이 책이 바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다. 책의 제목을 풀 어 살펴보면 의(義)로써 미혹한 자들을 일깨우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반란을 주도한 증정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학식이 깊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여 출사하지 못하고 기근으로 인해 매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모습만 보아도 든든한 배후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7)

그런데도 옹정제는 그를 심문한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는데 그 이유는 이 사건이 강남 지역 한족 지식인, 특히 여류량(呂留良)의 5) 단조 히로시 2023, 345. 6) 조너선 D. 스펜스, 2004, 311. 7) 이동욱 2019, 137. 후손들로 대표되는 사대부층을 견제할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강남 지역의 한인들은 화이분별(華夷分別)에 열을 올리고 있었 다. 이는 청나라 조정의 골칫거리 중에 하나로 반드시 잠재워야 하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증정의 행동으로부터 발 생한 것이다. 옹정제는 자신과 증정의 문답을 반복하고 증정이 자기 를 비판하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방식으로 책을 엮어냈다.8)

그런데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이 책을 전량 회수하고 금서(禁書)로 지정하였다. 이에 대해 후대 학자들은, 옹정 제가 펼쳤던 사상적 대응이 건륭제 때에 와서 필요 없게 되었기 때 문에 해당 책을 수거하였다고 해석하였다.9) 그러나 부황이 직접 편 찬·배포한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장을 전면 부정하는 행위는 청 황제의 황위 계승 정당성을 흔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학자 방조영(方詔英, Fang Chao-ying)은 『대의 각미록』이 황실의 내부 사정을 지나치게 노출한 점을 건륭제가 못마땅 하게 여긴 것으로 보았으며, 이를 이유로 금서로 삼았다고 주장한다.10) 실제로 『대의각미록』은 관찬 문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민감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옹정제의 황위 계승에 대한 논란이다. 이 논란은 옹정제 즉위 직후부터 제기되어 오늘날까지도 지 속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옹정제가 강희제의 임종 시 황위를 정당하게 계승했다는 정통론과 황위를 찬탈했다는 찬탈설이 대립하고 있다.11) 8) 이시바시 다카오 2009, 244. 9) 송인주 2020, 127.

10) Hummel 1943, 749. 11) 다이이 2025, 33. 공식 문서에서는 강희제가 옹정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임종했다 는 내용만이 전해진다. 그러나 『대의각미록』에서는 황위 계승 당시 정황과 관련하여, 융과다(隆科多)가 강희제의 유언을 숨겨 옹정제가 강희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내용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융과다는 강희제의 임종 당시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 혹시 황위 계 승이 다른 황자에게 내려진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되는 지점이 다.12) 실제로 『대의각미록』에는 강희제가 ‘열 넷째에게 물려 준다 (傳十四子)’는 유언을 남겼는데 옹정제가‘넷째에게 물려준다(傳于四 子)’라고 위조하였다는 증정의 주장을 싣고 옹정제가 해명하는 장면 도 나온다.13)

이와 같은 내용은 건륭제로서 매우 부담스러운 기술일 수밖에 없다. 부친의 황위 계승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곧 자신의 황위 계승 정통 성을 흔들 수 있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건륭제가 해당 책을 수거하고 금서로 지정한 배경이 되 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파밀라 카일 크로슬리(Pamela Kyle Crossley 2012)는 옹정제와 건륭제 사이의 견해 차이에 의해 책이 금 서로 지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2. 『대의각미록』의 등장과 퇴장의 역사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건륭제(乾隆帝)에 의해 금서로 지 정되었으나, 옹정제(雍正帝)가 심혈을 기울여 간행하고 배포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텍스트는 청(淸) 황제가 어떠한 정치적 사유를 바탕으로 통치를 구상하였는지를 확인 12) 다이이 2025, 34. 13) 이동욱 2019, 139. 할 수 있는 자료임은 분명하다.

건륭제의 금서 지정 때문인지 『대의각미록』에 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2000년 이전까지는 관련 연구가 6편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100편을 상회하는 연구가 발표된 상황이 다.14) 이러한 관심 증대의 배경에는 현대 중국과의 역사적 접점을 모색하려는 학술적 시도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대의각미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존 연구들은 이 문헌을 만주족이 한족 사회에 동화되어 한인을 설득하려는 시도 의 산물로 보았다. 그러나 신청사 연구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크로슬리는 『대의각미록』을 청 황제가 주도하여 편찬한 정치 선 전서로 규정하면서, 청 제국의 정통성과 통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 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여기까지의 해석은 전통적 학자들과 크게 다 르지 않다. 그러나 크로슬리는 이 문헌에서 황제가 유교의 핵심 가치 인 ‘인(仁)’보다는 만주적 개념인 “은(恩, kesi)”과 “성덕(聖德, enduringge erdemu)”을 강조하였다고 분석한다. 또한, 군주는 초월적 덕성을 지닌 존재로, 신민은 보호를 받고 복종해야 하는 의존적 존재 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대의각미록』에는 만주족의 고유한 통치 사 상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15)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유교(儒敎)에서 이상적 인 통치자는 덕치(德治)를 실현하는 군자(君子)이며, 이는 인의예지 (仁義禮智)의 조화를 통해 구체화 된다. 인(仁)과 지(智)는 인간 내 면의 심성과 관련된 가치이며, 의(義)와 예(禮)는 외적으로 구현되는 제도적 측면이다. 이러한 내외적 요소가 함께 아우러질 때 비로소 유 14) 이동욱 2019, 135. 15) Crossley, 2012. 교적 이상인 덕치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대의각미록』에 등장하는 ‘성덕(聖德)’이라는 표현을 단지 만주족의 특수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은(恩)’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황제의 은혜에 감 사한다는 개념은 황제의 특별한 배려, 은전, 시혜(施惠)를 표현하는 공식적이고 존칭적인 어휘다. 황은이라는 용어는 너무 많은 공식 문 헌에 등장하는데 『춘추』 등에도 매우 자주 등장하므로 만주족만의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또한, 군주를 초자연적 덕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하는 방식도 유교 전통과 어긋나지 않는다. 유교에서 천자(天子)는 하늘의 명(命)을 받 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그 자체가 천신(天神)의 속성을 부분적 으로 지닌다. 크로슬리는 이러한 요소를 만주족 고유의 특징으로 간 주하지만, 이는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하는 신화적 구조와 비교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중국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 한국에는 단군왕검(檀君王儉), 일본에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같은 하늘에 서 내려온 족속에 대한 고대의 신화가 있다. 즉 천손강림(天孫降臨) 의 서사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의각미록』에 나 타나는 이러한 신성한 통치자 이미지 역시 만주족에 한정된 특수한 요소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존재한 문화적·신화적 보편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시바시 다카오(石橋崇雄)는 옹정제가 『대의각미록』에서 강조 하고자 한 바는,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중요한 것은 ‘덕(德)의 유무’ 이지, 화(華)와 이(夷)의 구분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혼재한 상태로 구성되어 있었기 에, 단지 이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정통성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는 것이다. 따라서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에서 ‘화이일가(華夷一 家)’의 관념을 천명하였다고 보았다.16) 나아가 그는 이러한 사유가 다민족 통일국가로서의 청(淸) 제국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 고 평가하였다. 히라노 사토시(平野聰)는 더 나아가 옹정제의 중외일 통(中外一統) 사상은 중원뿐만 아니라 북쪽의 영토와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대일통 구조였다고 주장한다.17)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 학자들의 해석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대의각미록』은 화이(華夷)의 분별을 통해 황권(皇權)을 위협하던 강남(江南) 지역의 한인(漢人)을 겨냥하여 작성된 저술로, 몽골이나 티베트와 같은 변방 민족까지 포함한 설득 작업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옹정제(雍正帝)는 민족의 출신 여부보다 천자(天子)가 덕치(德治)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유교적 통치 이념 과 민족 정체성을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민족의 문화와 전 통 등을 중원에서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발언은 상유 부분에 드러나 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선행 연구에서 충분히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Ⅲ. 『대의각미록』에 드러난 청 제국의 정당성 서사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황제가 직접 내린 상유 10편, 증정(曾靜)에 대한 심문 기록 47조, 그리고 증정이 작성한 자기 비판문인 『귀인설(歸認說)』로 이루어져 있다.18) 본 논문은 이 가운데 청 왕조의 정통성에 관한 정치적 입장과 논리가 가장 명 확하게 드러나는 상유(上諭)에 주목하여 분석을 진행하였다.

16) 이시바시 다카오 2009, 247. 17) 히라노 사토시 2004.

18) 이시바시 다카오 2009, 245. 1. 『대의각미록』에 나타난 옹정제의 정통성 담론

옹정제(雍正帝)는 천명(天命)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림은 덕(德)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덕치를 실현하는 자가 곧 천자(天子)임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한다. 『대의각미록』의 상유(上諭)에는 “백성을 생육(生育)하는 도(道)는 덕이 있는 자에게 있다”, “하늘의 황제가 사랑하는 이는 오직 덕이 있는 자다”, “하늘은 덕이 있는 자를 천하 의 군주로 삼는다”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아가 “제왕이 존재한 이래로, 군주의 기준은 오직 위대한 덕을 갖추었는지의 여부 에 있을 뿐, 다른 기준은 없다”는 진술도 제시된다. 이를 통해 옹정 제는 청 황제가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성군(聖君)이라는 점을 정 당화하고자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하늘이 군주를 선택함에 있어 출신 지역이나 혈통이 아니라 ‘덕’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하늘이 특정 지 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군주로 삼는다는 이야기 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중원을 통치하는 자는 화이(華夷)의 구분이 아니라 덕의 유무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이는 곧 통치 정당성의 기준이 민족적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덕 성(德性)의 구현 여부에 있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예로 그는 순(舜)과 문왕(文王)을 언급한다. 순임금은 동이(東夷)의 출신이며, 문왕은 서이(西夷)의 출신이지만, 그들이 이 적(夷狄)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덕을 훼손하거나 그 통치의 정당성 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통치 정당성의 기준이 화이(華夷)의 구별이 아니라 덕성(德 性)의 구현에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한 뒤, 화이의 구분은 절대적 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지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개념임 을 설명한다.

옹정제는 과거 중원을 지배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현재 중원의 영 토가 훨씬 더 광범위해진 점을 언급하는데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과거의 많은 지역이 이적(夷狄)에 해당하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화와 이를 단순히 지리적 기준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도 꼬집는다.

옹정제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맹자(孟子)를 인용하며, 문화와 제도의 창출이 곧 중화(中華)의 조건이지, 지역이나 종족적 요소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화란 민족적 정체성이 아니라 문화적 실천과 유교 질서 구현 여부에 따라 형성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화는 문명이고 이는 비문명이 므로 문명 안에 들어온 족속은 모두 화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상유에는 이러한 내용이 다양한 인 용과 사례를 바꾸어가며 반복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옹정제가 전달 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2. 『대의각미록』과 다민족 제국의 논리

중국의 장단단(張丹丹)과 한둥위(韓東育), 일본의 히라노 사토시(平野聰) 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논의를 다민족 통합국가론으로까지 확장 하여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은 『대의각미록』에 등장하는 화이일가(華 夷一家), 중외일통(中外一統), 천하일통(天下一統) 등의 개념에 기반한다.

예컨대, “지금 역적 무리는 천하가 일통(一統)되고 화이가 일가(一 家)를 이루게 된 시대임에도, 함부로 중외(中外)를 구분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분노를 조장했다”라는 상유의 구절은, 청 제국이 이미 다 양한 민족을 하나의 질서 안에 통합한 상태임을 강조한 표현으로 해 석된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가 다양한 민족을 포섭한 통합 제국으로 기능했으며, 『대의각미록』 이 그 이념적 정당성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대의각미록』의 집필 목적과 당시의 역사 적 맥락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이 문헌은 본래 강남 지역의 한인(漢 人)들이 화이(華夷)를 구별하여 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된 정치 문서이다. 『대의각미록』에서 ‘화(華)’는 주로 한족을, ‘이(夷)’는 만주족을 지칭하며, 문헌의 중심 논의는 바로 만한(滿漢) 간의 갈등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에 초점 이 맞춰져 있다.

즉, 이 문헌은 몽골·티베트·준가르 등 북방의 여타 이민족을 어떻 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통치 청사진이나 포섭 전략을 제시하지 않으 며, 다민족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 이념서로 보기에는 한계가 존 재한다. 따라서 『대의각미록』을 다민족 통합국가론의 핵심 텍스트 로 간주하는 시각은, 그 집필 목적과 실제 담론의 범위를 벗어난 과 도한 확장 해석일 수 있다.

Ⅳ. 결론

청(淸) 제국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향후에도 명확한 합의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교(儒敎)가 반드시 한족(漢族) 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 사상과 중원(中原)을 한족이 독점한 것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 문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박차고 나오지 않는 한, 청나라의 정체성 에 관한 연구는 일정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또한, 만주족에 대한 고정된 인식 역시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 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이어지는 한, 만주족 황제가 천자(天子)이자 대칸(Khan of Khans), 차크라바르틴(轉輪聖王)으로 기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에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공통 기반을 지닌 공동체에 대해 형식적 평 등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과거 중원의 정치·사상적 구조를 살펴보면, 오히려 사상의 위계질서가 분명히 존 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고전서(四庫全 書)』이다. 이 편찬 작업은 유교 경전을 최상위에 두고, 그 아래에 역사서(史), 그다음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 마지막으로 나머 지 저술을 배열함으로써 명확한 가치 위계를 설정하였다. 이는 당시 황권이 유교적 질서를 가장 핵심적인 통치 기반으로 인식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음으로써, 청 황제가 유교를 경 시하고 만주적 특성만을 강조하였다는 오해가 유포되었고, 유목민족을 포섭하기 위해 불교 등의 종교적 사상을 활용한 통치 전략마저도 정 통 유교적 통치와는 배치되는 행위로 간주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결국, 이와 같은 주장들은 중국 북부와 남부, 즉 다층적인 지역적· 문화적 현실을 삭제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실재했던 복합적 구조를 마 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전제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살펴보면, 옹정제는 황제가 반드시 한족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는 예로부터 중원을 통치하는 자는 덕(德)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군신 간의 대의(大義)를 지키는 자였으므로 단순히 화(華)와 이(夷) 의 구분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이적을 적대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중원의 통치 권위는 민족적 정체 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정치 이상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 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며, 어떠한 민족이든 유교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곧바로 ‘다민족 제국의 보편 군주’라는 개념 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유교적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자 가 황제가 되어 중원을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과, 모든 민족을 하나 의 제국 질서로 통합한다는 논리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의 위계와 화이(華夷)의 구분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 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청 나라를 고찰할 때,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청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청 조정이 유교와 불교 등 다양한 이 념과 종교를 활용하여 어떠한 전략을 구사했는지를 입체적으로 분석 하게 된다면 청 제국의 통치 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 을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1. 단행본 남철진. 2021. 『중국의 역사와 문화지식』. 경산: 열린시선·영남대학 교 출판부.

다이이 지음, 박연옥 옮김, 김승일 감수. 2025. 『청나라 흥망사의 수수께끼』. 서울: 경지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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