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국제정치적 동학: 미국의 관점에서 본 일본과 소련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정명현
설국 속에서 세계를 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 전공 석사 재학
Ⅰ. 들어가며
1945년 8월 9일, 몸집 큰 폭탄을 하나 실은 B-29 폭격기가 먹구 름 사이로 보이는 한 도시, 나가사키를 포착했다. 폭탄 “팻맨”은 투 하 신호와 함께 나가사키 중심부에서 약간 위쪽에 자리한 곳에 떨어 졌다.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구름이 나가사키 상공을 뒤덮었고, 고 열의 열 복사선은 존재하는 것을 모두 녹이고 파괴했다. 이날 실시된 공격으로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폭격 이후 외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기에 실제 인명 피해는 더 컸다. 히 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도 원폭 공격을 당한 일본은 8월 15일 항 복을 선언했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조인하며 태평양 전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림 1] 착륙 전 촬영한 규슈 상공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전의
하늘이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나가사키 원폭이 투하된 자리에는 원폭 투하 지점을 알리는 기념공원과 여러 추모비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이 자리하고 있다. 원폭자료관에서는 원폭 투하 전 나가사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투하 후의 참상을 드러내는 건축물들을 대비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핵무기의 개발 과정과 이로 인한 피해를 담은 전시를 구성하 여 핵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희구하는 마음이 전 세계에 전해 지기를 바라는 일본인들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그림 2] 원폭자료관 전시실 입구에 놓인 시계
시계가 원폭이 투하된 시점에 멈춰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시각에서 나가사키 원폭의 ‘가해자’라고 할 수 있 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오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하나는 관련 자료의 부족 이고, 다른 하나는 수단의 적절성이다. 먼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하기로 한 이유를 상세하게 담은 정부 문서가 남아있지 않다. 상황의 긴박했기에 그러했을 수도 있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 전세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이 문서상으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하다.
또한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반드시 투하했어야 했는지도 의문 이다. 원폭을 투하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만약 미국이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원폭을 투하했다면, 사후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항복을 빨리 받아 내기 위함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일본 정부는 첫 번째 원폭을 맞았음에도 항복할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 도 그러한 목적을 위해 원폭을 투하하여 수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어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일 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는지가 미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바라볼 수 는 없는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양자관계가 아니라 당시 국제정치적 인 동학을 고려한 시각에서 나가사키 원폭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고민에서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투하 결정에 소련의 지분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미국 과 같은 연합국으로서 일본을 상대했으나 전후에는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이 패망시킨 일본을 다시 부흥시켜 소련을 견제 하는 방패로 삼는다. 그러므로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 문제를 논함 에 있어 소련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일본과 소련을 각각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펴본다면 나가사키 원폭 투하 과정에 서 미 정책결정자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관한 국제정치학적 동학을 자세히 분석한 기존 연구는 거의 없다. 나가사키 원폭을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이에 대한 타당성을 논한 연구도 있었으나, 연구자들은 주로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를 같이 묶어 미국의 원폭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했다 (Cummings 1999; Sherwin 2000). 미국과 소련이 일본의 항복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도 있었으나, 이 또한 나가사키 원폭 사건을 집중 적으로 조명하지는 않았다(Alperovitz 1965; Alperovitz 1995; Asada 1998; Bix 2005; Hasegawa 2005; Maddox 1994; Frank 1999). 이에 이 보고서는 이미 진행되었던 미국의 원폭 투하 연구를 보충함과 동 시에 개별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국제정치적 동학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핵무기에 관한 의사 결정이 내려진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논의를 통해 위원 회 참석자들이 일본과 소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살펴 본다. 그런 후 위원회의 주요 참석자들이 일본과 소련에 대해 남긴 다른 기록에 주목하며, 원폭 투하 과정 시 일본과 소련에 관하여 미 정책결정자들이 어떤 부분을 고려했는지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생각이 실제 전쟁 과정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보며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Ⅱ.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
1. 위원회의 결성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해당 결정에 참여했 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 필요가 있다. 원폭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임 시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임시위원회는 당시 전쟁부(Department of War)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만든 위원회였다. 해당 위원회는 전쟁 이후 핵 관리를 담당하는 상설 기관으로 자리를 잡기 전 핵무 기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임시’라는 명칭이 이름에 붙게 되 었다(Nuclear Files 2023).
첫 만남이자 비공식 회의는 1945년 5월 9일에 이루어졌다. 이날 진행된 회의는 위원회의 설립 목적과 기능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모 두발언에서 스팀슨은 핵무기의 전시 통제에 관한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고자 임시위원회를 발족했으며, 위원회에서 논의된 보고와 건의 내용이 자신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될 것임을 밝혔다(Nuclear Files 2023). 이는 위원회가 핵무기의 사용과 관리에 관하여 대통령에 직접 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위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크게 과학계, 외교계, 군사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과학계에는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칼 콤튼(Karl T. Compton), 그리고 제임스 코난트(James B. Conant)가 있었다. 이 들은 모두 미국의 전시 무기 개발을 위해 설립된 과학연구개발국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 혹은 그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부시는 개발국의 총괄을 맡고 있었 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핵무기의 개발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외 교계에는 대통령 특사였던 제임스 번즈(James F. Byrnes)와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클레이튼(William L. Clayton)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 히 전임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정부에서도 요직을 맡아 왔 던 번즈는 포츠담 회담이 있기 전 트루먼의 요청을 승낙하여 국무부 장관을 맡아 트루먼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군사계 에는 스팀슨을 포함하여 해군부 차관 랄프 바드(Ralph A. Bard), 그 리고 전쟁부 장관 특별보좌관이자 위원회의 부의장이었던 조지 해리 슨(George L. Harrison)이 있었다.
후에 임시위원회는 미 육군을 책임졌던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George C. Marshall) 장군,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의 총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장군과 같이 회의 진 행에 필요한 인물들을 초청하며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그렇다 고 과학, 외교, 군사라는 위원회의 기본적인 골격이 바뀌지는 않았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 참석자들은 각자의 시각에서 핵 무기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도출했다.
2. 일본과 소련에 관한 논의
임시위원회의 논의가 대통령의 시각이 형성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 을 담당했으므로, 회의 과정에서 나온 일본과 소련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원폭 사용에 관한 미국의 국제정치적 동학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일본에 관한 논의가 어떠했는지 보자. 일본에 대한 핵무기 사 용을 중점적으로 다룬 회의는 1945년 5월 31일과 6월 1일, 두 차례 진행되었다. 5월 31일 회의는 핵무기 사용에 관한 입장이 최종적으 로 정리된 자리였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모두가 동의 한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이 사전 경고 없이 진행되어야 하며, 원폭을 통해 주민들에 대한 심리적 효과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코 난트 박사는 이에 동의하면서 표적이 군수공장 혹은 공장 노동자들 의 거주지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Nuclear Files 2023).
하지만 원폭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오펜하이 머는 원폭을 동시에 다발로 사용하는 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로브스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방식이 순차적 사용에 비해 폭탄 투하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 것이고, 이러한 작업이 자칫 성급하게 진행되어 비효과적일 수 있으며, 이미 공군이 진행하고 있는 공중폭격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Nuclear Files 2023). 지금까지 개발된 적이 없는 원폭을 다른 무기와 같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은 원폭의 중요성과 파괴력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 이튿날인 6월 1일에서 번즈를 포함한 임시위원회의 참석자들은 일 본에 대한 핵 공격을 ‘하루속히(as soon as possible)’ 진행할 것을 전쟁부에 요구했다(Nuclear Files 2023). 이러한 요구는 핵무기를 보유 하고 사용함으로써 전쟁을 단시간에 끝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이는 6월 16일 임시위원회 과학계 인사들의 성명에서 잘 드러난 다.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한 이들은 스팀슨 장관에게 핵무기를 ‘즉시 (immediate)’ 사용할 것을 건의했는데, 이에 대한 근거로 핵을 사용 함으로써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의무가 있음을 제시했다(Nuclear Files 2023).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치 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자국의 인적·물적 손실이 막대해진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빠르게 끝내기를 원했다. 더하여 개발 중이었던 핵무기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일 본에 대한 핵 공격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번에는 소련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자. 임시위원회에서는 적국인 일본이나 독일뿐만 아니라 연합국인 영국,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도 논의되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위원회가 소련을 다소 경계하고 있 다는 점이다. 5월 31일 회의에서 소련에 대한 위원회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데, 이날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를 보면 소련 문제를 다룬 장을 별도로 두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핵무기 통제 와 국제적 협력의 문제에서 소련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 (paramount concern)’라고 생각했다. 핵 개발에 관한 의견에서는 과 학계와 외교계의 의견이 갈렸다. 오펜하이머는 소련 과학자들과 적극 적으로 교류하며 관련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번 즈는 핵 관련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핵 개발을 서두름으로써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자는 번즈의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이들은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부정하지 는 않으면서도 소련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Nuclear Files 2023).
이후 진행된 회의에서도 소련을 경계하는 임시위원회의 태도를 찾 을 수 있다. 기술 관련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진행된 6월 1일 회의에 서는 소련의 기술 발전 잠재력이 논의되었다(Nuclear Files 2023). 스 팀슨은 소련을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기술력을 얼마나 빠르게 따라 잡을 수 있을지 우려를 표했으며, 초청된 전문가들은 소련이 독일의 자원과 기술자, 그리고 과학자들을 확보한다면 기술 발전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6월 21일 진행된 회의에서는 포츠담 회담에 서 트루먼이 핵무기에 관하여 스탈린(Iosif Stalin)에게 발언할 수위가 논점으로 제시되었다. 위원회는 대통령이 소련의 최고지도자에게 핵 무기의 존재는 알리되, 만약 소련 측에서 핵무기에 대한 세부적인 정 보를 물어본다면 답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의했다. 소련과 협력 관계 를 유지하면서도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소련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 고 싶은 미 당국의 속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임시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을 명시함과 동시에 소 련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향후 전쟁의 전개에서 소련 의 행보는 미국이 전쟁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일본과 더불어 중요하 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였다.
Ⅲ. 미국의 대(對)일본 관점
1. 선정된 표적
본래 미국의 원폭 개발은 독일이 원폭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첩 보에 대한 우려로 시작되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을 적국으로 둔 미국이었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독일의 핵 개발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43년이 되자 독일의 패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은 소련과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후퇴했 고,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점령했으며 이듬해인 1944년에는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하여 전세는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독일의 패 망이 목전에 놓이게 되자 미국은 시선을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돌렸 다. 독일 대신 일본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에 핵무 기의 표적은 독일이 아닌 일본으로 변경되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표적이 일본 본토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 적으로 일본을 향해 원폭을 사용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전쟁의 경과에 따라 표적의 성격은 달라졌다. 1943년 5월 5일 그로브스는 자신의 주재로 군사정책위원회(Military Policy Commitee)를 소집하 여 회의를 진행했다. 해당 위원회에는 임시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부시 와 코난트를 포함해 해군 제독 퍼넬(William R. Purnell), 그리고 육 군 스타이어(Wilhelm D. Styer) 소장이 참여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일본군에 대한 핵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핵무기가 남태평양 추크항(Harbor of Truk)에 위치한 일본 함대 집결지에 투하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당시 미국은 과달카날 전투(1942.8. ~ 1943.2.)로 태평양 전역(戰域)에서 일본에 반격을 가하고 있었지 만, 그렇다고 일본을 직접 공격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이에 태평양 지역에 진주하고 있던 일본 해군을 표적으로 삼아 첫 원폭을 사용하 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1)
1945년 미국은 태평양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고 있었다. 이에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이 본격적으로 논의되 었다. 5월 9일 첫 임시위원회 회의에서 스팀슨은 위원회 구성원들과 함께 그로브스가 4월 23일 전쟁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읽고 논의했 다. 그로브스의 보고서는 핵무기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스팀슨을 통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 었는데, 여기에서 그로브스는 표적이 언제나 일본이었음을 언급했다. 더하여 보고서에서는 독일과 달리 일본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핵무기를 신속히 개발하여 일본에 투하할 수 있다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조속히 끝낼 수도 있었다(Nuclear Files 2023).
이제 중요한 것은 정확한 투하 지점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표적 선별을 위한 작업을 표적위원회(Target Committee)에 맡겼다. 1945년 4월 27일 첫 회의를 시작한 표적위원회는 그로브스가 주도하 여 진행되었으며, 각 군의 장군들과 과학계 인사들이 총 세 차례에 걸쳐 표적에 관한 논의를 이어갔다. 표적의 선정은 두 번째 회의였던 5월 12일 모임에서 이루어졌다. 지름 3마일 이상의 중요한 도시이며, 한 번의 공격으로 확실하게 파괴될 수 있고, 8월 이전까지 공격받지 1) 해당 회의에서는 독일을 표적으로 삼는 것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지 않
았다. 일본에 대한 공격이 더 긴요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로이
(Sean Malloy)에는 만약 미국이 원폭을 독일에 투하할 경우 기술력이
좋은 독일이 핵 관련 기술을 얻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않는 지역이라는 세 가지 선정 기준을 만족한 도시는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그리고 고쿠라였다. 여기서 교토와 히로시마는 가장 중요한 “AA” 표적으로, 요코하마와 고쿠라는 그 다음인 “A” 표적으로 분류 되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표적위원회는 핵무기 사용에 있어 심리적 효과를 중시했다. 위원들 은 선정한 네 개의 표적과 더불어 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황거(皇居) 까지도 표적 후보로 검토했는데, 이는 핵무기를 사용할 때 심리적 효 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미국은 단 한 차례의 원폭 공격으로 일본의 전쟁 의지가 꺾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심리적 충격에 대한 언급은 앞에서 보았듯 임시위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2. 인도적 대우
하지만 핵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일본을 재기할 수 없는 불 구의 상태로 만들고자 함은 아니었다. 전쟁이 속히 종결되는 것과 일 본을 파괴하는 것은 미국에게 별개의 문제였다. 미국은 전후 일본이 온전한 국가로 남기를 바랐다. 일례로 육군 작전과(Operations Department)에서 전략과 정책을 담당하던 링컨(George A. Lincoln) 은 당시 육군 부참모총장이었던 헐(John E. Hull)에게 제출한 보고 서에서 일본이 극동에서 ‘비중 있는 국가(a nation of some weight)’ 로 남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맥클로이(John J. McCloy) 전쟁 부 차관보 또한 본인의 보고서에서 일본에 대한 완전한 파괴가 이루 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일본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국의 의중은 일본의 항복을 논 의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미국이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 구한 것은 맞으나, 일본의 항복이 열도 전체의 무력화로 이어지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5년 6월 28일 임시위원회의 위원이었던 해리슨은 바드 차관에게 일본에 핵을 투하하기 전 사전 경고가 필요 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는 5월 31일 임시위원회에서 결의된 내 용과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었는데,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펼친 이유 는 ‘위대한 인도적 국가(a great humanitarian nation)’로서의 미국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임시위 원회의 결정을 번복하면서까지 해리슨이 사전 경고의 필요성을 언급 한 것, 그리고 미국의 도덕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져야만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게 한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인도적 태도는 천황제에 관한 논의에서도 드 러난다. 해리슨의 보고서가 전달된 지 하루가 지난 6월 29일, 맥클로 이 차관보는 스팀슨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미국이 일본에 항복 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때 천황제의 유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부분이 가장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 만, 천황제가 유지되지 않으면 일본이 항복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 고 했다. 스팀슨은 맥클로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포츠담 회담 중이 었던 7월 24일 스팀슨이 남긴 일기를 보면 그는 맥클로이가 이야기 했던 내용, 곧 일본에 대한 사전 경고문에 천황제 유지를 포함하자는 것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달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비록 스팀슨의 요구가 포츠담 선언문에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전후에 미국이 천황제를 폐지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 의 국혼(國魂)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서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인도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으로서 포고된 이 선언 문에는 전쟁 책임자에 대한 단죄, 영토 제한, 군대의 무장 해제 등 패전국으로서 감당해야 할 내용들도 담겨 있지만,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 측이 일본을 완전히 파괴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 다. 연합국은 선언문에서 일본을 노예화된 민족으로 전락시키거나 일 본이라는 국가를 파괴할 의도가 없다는 문구를 명시했으며, 재무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자국의 경제를 지탱할 수 있는 산업 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는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에 강제되었던 조건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기 하루 전이었던 8월 8일, 스팀슨은 트 루먼과의 담화에서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며 일본에 대한 처벌이 조심 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이처럼 미국이 일본을 독일과 같이 가혹하게 다루지 않고 (비 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국가로서 남기고자 했던 이유는 무 엇일까? 하나는 방금 언급한 대로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교 훈을 얻었을 수 있다. 독일을 완전히 무력화하려 했던 프랑스의 의도 는 독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조건들을 수용하도록 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치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항복의 수용선(受容線, redline)을 완화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이 항복의 자리로 빠르게 나올 수 있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당시 독일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참상을 고 려했을 수 있다.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피해가 보고되었다. 특히 소련은 미국과 비교했을 때 독일과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을 더 가혹하게 대했다. 소련군은 동부 독일에서 민 간인에 대한 약탈과 처형, 성폭력을 자행했으며 이는 수도 베를린에 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벌이며 수천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에 소련의 복수심이 분출될 수는 있었지만, 소련의 공세적인 동진(東進)은 미국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었을까? 소련에 대한 미국의 관점을 검토해야 하는 이유이다.
Ⅳ. 미국의 대(對)소련 관점
1. 참전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인 1941년 4월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었다. 이에 소련은 미국과 같은 연합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미국의 적국인 일본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이 전쟁에 참여 한다면 일본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소련의 참전 문제 는 1945년 2월 얄타에서 진행된 회담을 통해 확정되었고, 소련은 유 럽에서의 전쟁이 마무리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트루먼 정부에서도 소련의 참전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큰 변수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계속 제기되었다. 1945년 6월 18일, 트루먼과 스팀슨 장관, 맥클로이 차관보, 육·해군의 해군 장성 등 전쟁 관련 정책결정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향후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논의가 오갔다. 규슈 상륙 작전의 전망과 타당성에 관한 이야 기가 오간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상륙전에서 소련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들은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이미 희망을 잃은 일본에게 소련의 참전 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에 있어 ‘결정적인 행위(decisive action)’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도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며 다가오는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도움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임을 밝혔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6월 29일 대통령에게 올라간 보고서에서도 일본의 항복 시점과 소 련의 참전이 관련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해당 보고서에서 는 일본에 항복 요구를 전달할 때 고려해야 할 다섯 가지 요소 중 하 나로 소련의 참전이 지목되었으며, 구체적인 시점을 소련의 참전 직 후라고 명시했다. (불확실하지만 링컨으로 추정되는) 보고서의 작성자 는 비록 일본이 전쟁 초반 소련의 공세를 일시적으로 막아낼 수는 있 겠지만, 소련의 공격으로 점차 뒤로 밀리게 된다면 미국의 항복 요구 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더하여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폭격 작전(bombardment operations)’ 직전의 시점이 소련의 참전과 맞아떨어지면 좋겠다는 내 용도 들어 있었는데, 해당 문구 옆 공란에 수기로 “S1”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S1”은 당시 개발 중이었던 원폭을 지칭하던 용어였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이라는 국제정치적 요소와 더불어 원폭이라는 기 술적 요소를 동시에 사용하여 일본을 잡고자 했다.
이처럼 미국은 소련의 참전이 전쟁의 향배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 한 요소라고 보았다. 원폭과 함께 소련의 참전을 잘만 이용한다면 일 본과의 전쟁을 단시간에 끝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 는 소련이 미국의 기대 내에서 움직여야만 가능한 시나리오였지만 말 이다. 미국은 소련을 완전히 신뢰할 만한 우군으로 생각하지는 않았 기에, 소련발(發) 위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만주
미국이 소련과 관련하여 가장 우려하던 점은 만주 문제였다.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하는 대가로 뤼순항(Port Arthur) 이용과 만주 철도 지배권 등 만주에 대한 소련의 이권을 일 부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만주에는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인 만주국 이 들어서 있었다. 만약 소련이 대일전 참전을 선언한다면 자국과 국 경을 맞대고 있던 일본의 영역인 만주국으로 진공할 수 있었으며, 이 는 미국의 또 다른 우방이었던 장제스의 중국에 소련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함을 의미했다. 이에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만주에 대한 소련의 태도를 경계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4일, 헐 육군 부참모총장에게 제출된 보고서에서 링컨 은 스팀슨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고 적었다.
만약 우리가 극동(極東)에서 선언된 전쟁 목적을 수행한
다면 우리는 일본을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
게 함으로써 우리는 극동에 존재하는, 러시아를 효과적으
로 견제할 수 있는 수를 제거하게 되며, 결국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지배하도록 한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앞서 미국 정책결정자들이 일본에 대하여 다소 인도적인 태도를 보 이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일본에 대한 유화적 태도와 소련에 대한 경계가 연결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스팀슨의 생각에 대해 링 컨은 이렇게 의견을 덧붙였다. 우리는 러시아를 국가가 경제체제를 독점하는 국가이자,
의문의 여지 없이 유럽에서 가장 지배적인 국가가 되도록
했다. … 우리는 러시아가 병합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주와
중국의 거대한 지역을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쉽사리
차지하도록 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미국은 전쟁이 끝난 유럽에서 이미 지배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한 소 련이 극동에서까지 자국의 영향력을 펼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 았다. 그렇기에 보고서 말미에는 일본의 항복에 관한 조건을 설정할 때 만주에 대한 이권을 제공하겠다는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과 더불 어 ‘소련의 욕망(Russian desires)’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소련이 만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긴요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미국은 소련이 만주에 대한 이권을 차지하는 것조차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6월 6일 스팀슨은 대통령과의 담화가 담긴 보고서를 남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트루먼은 이미 번즈를 통해 원폭 에 관한 핵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5월 31일 임시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트루먼은 뤼순과 다롄을 제외한 만주를 중국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스탈린의 약속을 받아냈다고 했지만, 스팀 슨은 약속대로 소련이 만주에서 철도 통제권의 절반을 가지게 된다 면 이곳에서 소련의 우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5월 31일 임시위원회 회의에서 소련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팀슨은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주에 대한 소련의 이권 차지는 군에서도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6월 14일 마셜 참모총장은 전쟁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이 만주 를 차지하지 않는 한,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는 일이 소련의 동의를 구해야 가능함을 적시했다. 그는 만주에서 소련이 정치적, 경제적, 그 리고 군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말하며 미국의 만주 점령을 위한 ‘군사 작전(military operations)’을 언급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만주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투사가 아직 불필요하다고 답하기는 했으나, 마셜의 보고는 미국이 만주에서 만분지일로 발생할 수 있는 소련과의 대결까지도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국은 소련이 만주에서 자국의 세력 확대를 노리는 것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대일전에 참전한다면 미국으로서는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소련이 얄타 회담에서 합의한 수준을 넘지 않는지 소련의 행 보를 계속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소련이 선을 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강구해야 했다.
3. 문호개방정책
소련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이라는 패를 제시했다. 문호개방정책은 1899년과 1900 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존 헤이(John Hay)가 두 차례에 걸쳐 발표 한 대(對)중국 정책으로, 2차 대전까지 미국이 중국을 대함에 있어 근 간이 되는 정책이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필리핀을 얻고 중국으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었으 며, 이러한 경향은 청일전쟁에서 청(淸)이 패배한 후 가속화되었다.
이에 1899년 9월 헤이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그리고 일본 에 “문호개방서신(Open Door Note)”을 보내 중국에서 활동하는 상 인들이 국적을 막론하고 최혜국 대우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한 무역 기회를 보장받게 할 것을 요구했다. 이듬해인 1900년 청 왕조를 도 와 서양 세력을 멸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의화단 운동이 발생 하여 각국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헤이는 진압군 을 파견한 국가들에 두 번째 서신을 보내 중국의 영토적, 행정적 권 한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은 1922년 워싱턴 회의에 참여한 국가들이 9개국 조약(Nine Power Treaty)을 체결하며 재확인되었다.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에 대한 이권을 노리는 미국이 특정 국가가 중국에서 독점적으로 세를 키우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제시한 정 책이었다. 만약 어떤 국가가 미국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을 취한다면 이는 미국이 설정한 허용선(레드라인)을 넘게 되는 것이었다. 문호개 방서신의 수신국이자 9개국 조약의 당사자였던 일본은 이미 1931년 만주를 침공하고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시작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섰다. 일본에 의해 자국의 대중국정 책이 일그러진 미국은 또 다른 도전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일본에 이어 만주를 노리는 소련의 태도는 미국이 좌시할 수 없었다.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던 1945년 7월 16일, 스팀슨 은 본인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번즈 국무장관과 공유한다. 대 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은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회담의 당사국이었던 소련에 관하여 스팀슨은 먼저 일본 이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 협상에 임할 것을 대비해 일본에 대한 최 후통첩이 빠르게 이루어져야 함을 언급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미국은 일본의 암호문을 모두 해독하여 일본이 소련에 접근했 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보고서에서 스팀슨은 소련과 2월에 맺은 얄타 협정, 그리고 포츠담 에서 소련과 합의할 사항이 ‘우리의 전통적인 대중국 정책(our traditional policy toward China)’과 합치하는 한 문제가 없을 것이 라고 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전통적인 대중국 정책은 ‘문호개방정 책과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 인정(the Open Door Policy and the recognition of Chinese sovereignty over Manchuria)’이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이 소련에 요구한 것은 간명했다. 곧 소련이 만주를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처럼 다 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의도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미국이기에 포츠담에서 미국이 소련에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은 얄타보 다 넓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팀슨의 말은 미국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가 얄타 협정에서 합의한 사항이며, 소련이 이를 준수 하지 않을 시 미국은 특단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회담에 들어가기 전 미국은 만주에 관하여 소련에 제시할 내용을 재확인했다. 스팀슨은 얄타 협정에 따라 소련이 뤼순을 제한된 기간 에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지만, “러시아가 다롄 혹 은 만주에 있는 다른 상업항구를 통해 무역을 통제하거나 제한하도 록 허용하는 그 어떠한 특권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해당 부분은 보고서의 본문에서 유 일하게 밑줄이 쳐져 있는 대목으로, 이는 만주에 대한 소련의 이권 침탈을 미국이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국은 소련이 넘지 말아야 할 확고한 허용선을 설정했다. 만약 소련이 미국이 제시한 허용선을 넘는다면 미국은 소련의 남진 (南進)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었다. 이제 관건은 소련이 포츠담 에서 어떠한 자세로 나오는지였다.
Ⅴ. 포츠담부터 나가사키까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 회담은 2차 대 전 중 연합국 정상들이 공식적으로 만난 마지막 자리였다. 회담에서 는 이미 패망한 독일과 전후 유럽 재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논 의되었고,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공동선언(포츠담 선언)이 발 표되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회담을 통해 일본과의 전쟁을 순조롭게 끝내기를 원했지만, 이미 가지고 있던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좁혀지지 않은 미소 양국의 거리는 이후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원폭과 관련이 있 었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에 대한 실마리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 소련과의 결별
미국, 소련, 그리고 영국이 참여한 회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7월 26일에 나왔다. 그런데 선언문에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화민 국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소련이 선언에서 빠진 것이다. 소련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이미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었기에 일본에 대 한 전쟁 선포가 어려웠을 수 있다. 하지만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유 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 했다. 그렇기에 독일의 항복선언일로부터 3개월이 되기까지 2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소련이 일본에 대한 전쟁 선언을 하지 않은 것 은 미국 입장에서 소련의 진의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회담을 통해 미국과 소련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회담 내내 트루먼과 그의 참모들은 소련과 의견이 좁혀지지 않음을 여러 번 언급하며 미소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스팀슨은 트루먼과 함께 포츠담으로 건너가 트루먼을 옆에서 보좌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회담 중 남긴 일기에서는 소련과의 대담에서 나온 이야기들,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생각이 잘 드 러난다. 회담 이전부터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표명했던 그는 회담 중에도 일관되게 소련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회담 첫날이었던 7월 17일 아침 스팀슨은 그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을 수행했던 번즈에게 문호개방정책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문호 개방정책이 스탈린이 만주에서의 상업적 권리를 노리는 것을 저지하 는 좋은 명분이 되리라고 생각했으며, 소련에게 그러한 독점적 권리 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스팀슨의 생각은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었고, 같은 날 저녁 트루먼은 당일 스탈린과의 회의에서 그에 게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못 박았다(clinch)’고 스팀슨 에게 말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하지만 스탈린은 트루먼의 엄포에도 자신의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번즈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월터 브라운(Walter Brown)이 남긴 일기 에 따르면, 소련은 다롄과 만주철도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를 원했으 며 이를 번즈는 우려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특히 다 롄 문제가 미국으로서는 골치가 아팠다. 소련은 다롄을 공동으로 관 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는데, 이는 스팀슨 이 주장했던 미국의 허용선과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이에 스팀슨은 19일 미국과 소련의 정치지도자들이 협력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름을 언급하며 협력이 어려울 것이라고 일기 에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과 소련을 대비하여 소련의 정치체제 를 비난함과 동시에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처럼 표현의 자유와 다른 모든 면에서의 자유 위에
세워진 국가가, 표현이 엄격히 제한되고 정부가 압제적인
비밀경찰을 사용하는 국가와 영원히 잘 지낼 수 없다는
점이 더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이 문제는 현재 매우 중요
하며, S-1의 개발이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워싱
턴에서 이 주제로 모이고 해당 주제에 대해 러시아와 관
련하여 개방된 소통을 시작했던 우리의 위원회가 진공 상
태에서 생각되고 있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여기서 말한 ‘위원회’에서 핵무기와 소련에 관한 논의가 있었음을 고 려할 때, 스팀슨이 말한 위원회는 임시위원회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5월 31일 회의에서 임시위원회 위원들은 소련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해당 회의에서는 소련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이 나왔다. 미국은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이 어떤 의도 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예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츠담 회담에서 소 련과 직접 대면한 이후 스팀슨은 자신들의 논의가 ‘진공 상태’와 같았 다고 말했다. 이는 소련과의 입장 차가 예상보다 크며 미국이 소련을 더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소련과 협력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 는 일에 도움이 되는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일기를 보 면 7월 20일 번즈가 소련의 ‘허를 찔러야(outmaneuver)’ 한다고 결 심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는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회담 중에 나오 기를 바랐으나, 소련과 미국의 견해 차이가 줄어들지 않자 소련의 참 전 전에 일본이 항복할 것 같다는 말을 쑹쯔원(宋子文) 중화민국 행 정원장에게 전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소련을 압도할 수 있는 수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 있는 발 언이었다.
그렇다면 번즈는 어떻게 소련의 ‘허를 찌를’ 수 있다고 판단했는 가? 답은 원폭이었다. 7월 18일 번즈는 원폭 사용이 2주 후에 가능 하다고 언급했다. 이틀 전인 16일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 되었기에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이 성공 소식은 21일 트루먼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제 미국은 소련을 배제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단독으로 끝낼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군에서도 소련과의 협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대두되었 다. 스팀슨에 따르면 23일 마셜 참모총장이 포츠담에 도착했다. 당일 아침에 트루먼은 대일전 수행 시 소련의 도움이 필요한지 의견을 구 하고자 했고, 스팀슨은 마셜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애초 미국 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한다면 만주에서 일본군을 ‘방해 해주기 (holding up)’를 바랐다. 하지만 만주에 대한 소련의 욕심이 확고하 다고 보았기에 미국은 소련과의 군사적 협력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셜은 스팀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우리가 러시아 없이 전쟁에서 앞서가고 일본이 우리
의 조건에 따라 항복하도록 강요하더라도, 이것이 러시아
가 어떻게든 만주로 진격하고 만주를 공격하는 것을 막지
는 못할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들이 항복 조건에서 원했
던 것을 사실상 허용하게 됩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마셜의 의견은 이튿날인 24일 스팀슨을 통해 트루먼에게 전달되었 다. 그의 보고를 대신 전해 들은 트루먼은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한 표적 중 하나를 삭제하자는 스팀슨의 의견에 동감했다.
이처럼 스팀슨이 앞서 살펴보았듯 일본에 대한 인도적 태도를 보 인 것은 소련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일본과의 전쟁을 빠 르게 끝내야 함은 분명했으나, 극동에서 소련과의 협력을 논하는 것 이 불가능해졌기에 일본에 가해지는 피해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스팀슨은 트루먼에게 말한 표적 삭제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삭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무자비한 행위
로 인해 야기될 비통함이 긴 전후(戰後) 시기에 일본이
차라리 러시아와 화해할지언정, 우리가 일본과 화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는 우리의 정책이 요구하는 것, 곧 러시아가
만주를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일본을 미국에 호의적으로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스팀슨은 만약 미국이 전쟁을 빠르게 끝내기 위해 일본에 원폭을 다 량으로 투하한다면 전쟁 이후 일본이 미국보다 소련과 가까워져 극 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일본과 소련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소련이 남하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격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되 소련의 입 김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7월 25일, 참모들로부터 원폭에 대한 의견을 계속 수렴해 온 트루먼은 첫 번째 폭탄의 사용을 최종 승인했다. 전쟁성을 통해 올라 온 계획에 따르면 첫 공격은 8월 1일에서 10일 사이에 이루어지며, 첫 폭격 이후 순차적으로 다른 지역에도 원폭이 사용될 예정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던 무기였지만 트루먼의 마음 은 편하지 않았다. 그는 본인의 일기에서 결정을 내린 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폭탄(원자폭탄)을 발견
했다. 이는 노아와 그의 방주 이후에 있었던 유프라테스
계곡의 시대에 예언된 불의 파괴일지도 모른다. … 나는
전쟁부 장관인 스팀슨에게 군사적 목표와 군인, 그리고
해군이 표적이지 여성과 아이가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 했다. 비록 일본놈들이 야만인이고, 가차 없으며 무자
비하고 미쳐 있다고 하더라도, 공동의 안녕을 위하는 세
계의 지도자인 우리가 이 끔찍한 폭탄을 옛 수도(교토)나
새로운 수도(도쿄)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일본에 대한 트루먼의 동정심에는 원폭이 인류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만약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지 않 는다면 미국은 한 발의 핵무기를 더 떨어뜨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그 렇게 되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는데, 만약 일본 이 미국에 원한을 품고 소련과의 강화 협상에 임한다면 미국의 수는 도덕과 권력 모두를 잃는 최악의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트루 먼은 그러한 순간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26일 포츠담 선언은 소련이 제외된 채 선언되었다. 회담장에서 소 련이 보인 태도나 요구한 내용은 미국으로서 수용하기 어려웠기에, 미국은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과의 결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과의 전쟁에서 소련과의 협력이 어렵다고 본 미국은 원폭을 통해 전 쟁을 끝냄으로써 미국인의 추가적인 희생을 방지하고 소련의 ‘흑심’ 을 저지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항복이 소련의 선전포고보다 앞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은 채 소련이 전쟁 에 참여한다면 만주가 소련에 넘어갈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에게 일본과의 전쟁 종결 문제는 소련의 만주 진출 문제와 서로 엮여 있었다.
2. 소련의 참전과 나가사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트루 먼은 라디오를 통한 대국민담화에서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 원폭을 투하했으며, 만약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따라 항복하지 않으 면 공중에서 ‘파멸의 비(a rain of ruin)’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 다(Atomic Herritage Foundation 2022). 그만큼 미국은 원폭 투하가 일 본의 항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일 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일본 군부는 원폭의 피해 상황을 자세 히 조사해야 한다며 항복 선언을 미루었다. 이대로라면 미국은 경고 한 대로 추가적인 핵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이제 관건은 두 번째 원 폭을 떨어뜨릴 날을 언제로 할지였다.
그런데 모스크바 기준으로 8월 8일 17시, 소련이 일본에 대한 전 쟁을 선포했다.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소련이 예상했 던 참전 시점보다 더 빨리 전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포츠담 회담 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을 8월 15일 전에 움직이기 어렵다고 트루먼에 게 말했다. 이에 소련의 참전은 8월 15일 혹은 그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일주일이나 앞서 대일전에 뛰어든 것이다. 소련의 이른 참전은 소련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적절 한 참전 시점을 기다렸음을 보여준다. 주소련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해리먼(William A. Harriman)을 옆에서 보좌한 로버트 메이클레존 (Robert P. Meiklejohn)이 남긴 일기에 따르면 스탈린은 5월 28일 해리먼에게 소련이 8월 8일에는 군을 움직일 준비가 될 것이라고 했 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이는 포츠담에서 스탈린이 언급한 날짜보다 1주일 빨랐으며 소련이 선전포고를 한 바로 그날이었다.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해리먼과 트루먼에게 다른 말을 했는지 기 록상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는 사실을 안 소련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미국에 의해 본토에 큰 타격을 받은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까지도 신 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그전까지 확정하 지 않았던 참전 날짜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튿날인 8월 7일에 확 정했다. 그리고 참전이 선포된 지 하루가 지난 8월 9일에 소련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고려할 때, 소련은 이미 진격을 위한 만반의 준 비를 해두었음이 분명하다.
미국은 일본이 원폭을 맞았음에도 항복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일본 과 전쟁에 들어간 이중고에 빠졌다. 일본 본토에 상륙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건의가 군 수뇌부에서 나와 대통령에게 전달되기도 했으며, 외교계에서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소련의 전쟁 참여를 앞당겼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과 소련 양국 모두를 고려 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빠르게 끝내야 했다. 전쟁을 매듭짓지 않으면 일본과의 전투에서 더 많은 자국민이 희생되며 소련의 진격을 막을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더하여 미국은 전후 일본이 소련에 가 까워지는 것도 막아야 했기에, 여러 조건을 고려하며 최선의 수를 찾 아야 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계산을 만족하려면 빠른 시일 내에, 원폭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인들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면서도 일본의 존망 을 흔들지 않을 장소에 원폭을 사용해야 했다. 히로시마 다음으로 선 정된 표적은 고쿠라였다. 중공업이 발달했으며 일본 서부인 규슈에 위치하여 미군의 폭격을 받지 않은 고쿠라를 향해 8월 9일, B-29 폭 격기는 플루토늄 폭탄을 실은 채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원폭은 고쿠라보다 남쪽에 위치한 나가사키에 떨어졌 다. 규모 면에서 고쿠라에 비해 작긴 하나 나가사키도 규슈에서 큰 도시였던 만큼 일본이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다.
우연적 요소가 덧붙여졌지만, 미국은 나가사키 원폭으로 소기의 성 과를 거두었다.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일본 현지 시간으 로 8월 10일 오전 2시 30분, 히로히토 천황은 지금 일본의 역량으로 는 연합국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다며 전쟁을 더는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미국에도 전해져 같은 날 트루먼이 자리 한 미국의 내각 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일본의 서신 이 낭독되었다. 이 자리에서 트루먼은 원폭을 더는 사용하지 않겠다 는 의사를 밝혔다. 폭탄으로 인해 이미 수십만의 목숨이 사라진 상황 에서 그러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끔찍하다(horrible)’고 밝혔다 (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하지만 미국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지는 못했다. 일본과의 전 쟁을 매듭짓는 것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소련의 진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스크바 기준 8월 9일 0시를 기해 소련은 만주의 세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Transbaikal Front)에서는 소련군이 외몽골을 거쳐 서쪽에서, 제1극동 전선(1st Far East Front)과 제2극동 전선(2nd Far East Front)에서는 각각 동쪽과 북쪽에서 만주로 진입했다. 미국은 소련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10일 미국 의 내각 회의에서 트루먼은 “소련이 만주로 너무 깊숙이 밀고 들어 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스팀슨도 소련 의 진격을 우려하며 종전이 빠르게 오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소련이 이 틈을 타 만주로 할 수 있는 최대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소련의 진격이 만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주를 이미 침공하기 시작한 러시아가 일본 본토에 다다
르기 전에 항복을 최대한 빨리 받아내는 것이 해야 할 일
이다. 나는 러시아가 본토를 점령하고 통치할 실질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본토를 우리 손에 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National Security Archive 2020).
이미 만주 곳곳으로 나아가고 있던 소련의 계획이 어디까지 뻗어 있 을지 미국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스팀슨의 우려처럼 소련은 원 한다면 일본 본토까지도 점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소련의 진격을 멈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 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련의 만주 공세는 8월 15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계속되다가 20일이 되어서야 끝났 다. 나가사키 원폭에서 미국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원폭 투하 전까지 미국의 의도는 일본의 항복과 소련의 만주 진공 억제를 하나로 엮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두 사건은 상호 독립이었다. 마셜 의 말처럼 소련의 만주 진격은 미국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 니었다.
Ⅵ. 나가며
정책결정자들이 남긴 기록을 검토하며 나가사키 원폭의 실마리를 추적했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분 명 국제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두 번째 원폭을 사용하 기 전 일본과 소련을 모두 고려하며 핵무기의 사용을 결정했다. 근본 적인 동기는 전쟁의 신속한 종결이었으나, 양국을 향한 미국의 동기 는 각각 달랐다. 일본에 대해서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무고한 미국인 의 희생이 더는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었다. 소련에 대해서는 극동으로의 진출을 막고자 했던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둘 중 어느 요소가 미국의 의사결정에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 으나, 두 요인은 서로 얽혀 있었다.
미국에게 나가사키 원폭은 반쪽짜리 성공이자, 반쪽짜리 실패였다. 일본에 대한 수는 먹혀들었지만 소련에 대한 수는 그렇지 않았다. 소 련은 두 번째 원폭으로부터 항복선언일까지의 기간에도 만주를 향해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의미 없는 가정일 수도 있지만, 만약 미국이 (반드시 원폭이 아니더라도) 일본에 대해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 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을 더 빨리 끌어내 고 소련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일본이 항복 의사를 타진한 상황에서 또다시 일본을 공 격하는 것은 명분이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미국 정책결정자들이 우려 한 대로 일본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 있었다. 일본이 미 국이 아닌 소련의 편에 서게 된다면 미국은 만주를 지키려다가 일본 까지도 빼앗길 수 있었다. 또한 거듭 말한 것처럼 미국의 군사적 조 치가 소련의 진군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련을 저지할 수 있 는 것은 소련 자신 말고는 없었다.
나가사키 원폭을 기점으로 미국과 소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 넜다.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두 개의 뿔이 충돌 직전에 있었다. 토크 빌(Alexis de Tocqueville)은 한 세기 전 《아메리카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 이 예견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는 두 민족이 있다. 바로
러시아인들과 영국계 아메리카인들이다. … 이 두 민족은
갑자기 선두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세계가 거의 동시에
이들의 출현과 위대성을 알아차렸다. … 이 두 나라의 출
발점은 서로 다르며 가는 길도 다르다. 하지만 이 두 나
라는 언젠가 세상 반쪽의 운명을 각자의 손에 넣도록 하
늘의 계시를 받은 듯하다(Tocqueville 2020, 707-708).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던 두 나라는 결국 동아시아에서, 만주 에서, 일본에서 만났다. 국제정치의 새로운 시대가 막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순간에, 나가사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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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win, Martin. 1975. A World Destroyed: The Atomic Bomb and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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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국가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는가?
핵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상이한 인식을 중심으로
(미국)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
(일본)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 나가사키 평화 공원
고하은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대외관계 전공 석사 졸업
Ⅰ. 사랑방 23기를 마무리하며
동아시아연구원(East Asia Institute, EAI) 2024년 가을 학기 사랑 방 23기는 2024년 8월 29일(목) 예비모임을 시작으로, 2024년 9월 6일(금)-11월 29일(금)의 13주 수업과 2025년 1월 7일(화)-9일(목) 2박 3일의 일본 답사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EAI 사랑방 23기의 수업을 되돌아보며 1주차에서 13주차에 이르 기까지 하영선 교수님께서 제시해 주시는 토픽의 역사적·시간적 흐름 에 따라 서구의 IR과 IRT vs 비서구의 IR과 IRT, 동아시아의 IR 그 리고 한국의 IR에 대해 냉전-탈냉전-신냉전, 역사 vs 과학, 보편성 vs 특수성,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배우고 고민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하교수님의 제안에 따라 답사보고서와 더불어 “북핵”이 라는 관심 연구 분야와 관련하여, 첫째, 2024년 7월 여름 방학에 방 문한 미국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과 둘째, 2025년 1월 겨울 방학에 방문한 일본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 나가사키 평 화공원에 대해 비교하는 기행 성격의 글을 작성해 보고자 한다.
먼저 미국의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과 일본의 나 가사키 원폭 자료관 및 평화공원은 각각 핵무기와 그 사용에 대한 다 른 관점을 토대로 핵무기의 역사와 그 피해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의 박물관은 핵 과학과 기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반 면, 일본의 자료관은 핵무기가 인류에게 끼친 피해를 중심으로 전시하 고 있으며, 평화공원은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장소 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인류 역사의 발전과 관련하여 핵은 어떤 의 미를 지니는가? 미국이 바라보는 핵에 대한 인식과 일본이 바라보는 핵에 대한 인식은 각국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큰 차이 를 보이며, 현재 2025년 시점에서 양국의 핵 정책과 국제적 역할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따라서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 물관과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및 평화공원이라는 두 개 장소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Ⅱ. 미국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 : 발전
의 역사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위치한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 관(National Museum of Nuclear Science & History)은 핵무기 개 발과 관련된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의 핵 과학과 원자력 기 술의 발전에 관한 다양한 전시와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밝은 분위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특히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지이자 미국이 최초로 핵무기를 개발한 장소 였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와 의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곳으로 핵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파악하고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 유용했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은 주로 미국의 핵무기 개발 역사 및 핵 실험의 과학적, 기술적 측면, 핵 과학의 발전과 원자력 기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가능성에 대해 다루고 있었고, 핵무기와 그 영 향에 대한 교육적 측면과 핵무기의 위험성과 그에 대한 경고도 포함 되어 있었다. 2024년 7월 방문 당시 많은 미국의 학생들이 박물관에 단체 방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용에 대한 설명의 전시 형 식뿐만 아니라 방문객이 직접 핵과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째, 박물관은 핵 과학의 기초부터 시작하여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개발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를 제공했는데,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에 따른 핵무기 개발의 역 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핵의 과학적, 기술적 발전을 이해하는 것에 있 어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오펜하이머와 관 련된 내용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 던 것 같다.
둘째, 박물관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와의 근접성을 토대로 맨해튼 프로젝트와 핵무기 개발연구소에서 이루어진 핵 실험과 관련된 중요 한 자료와 과학적 발견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 국이 초기에 핵무기를 어떻게 개발하고 발전시켰는지 핵 과학자들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시청각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 주었다. 셋째, 박물관은 핵의 군사적 사용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핵 에너지가 원 자력 발전소나 의료용 방사선 등과학 및 산업 분야에서 어떻게 사용 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는 핵이 군사적 용도가 아닌 평화 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핵무기의 위협성에 대해 동시에 설 명하여 핵 과학의 양면성(복합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박물관은 핵무기의 개발과 사용에 있어 핵의 파괴적인 힘과 그로 인한 국제적, 정치적, 도덕적 논란 등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설명 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 핵무기의 사용,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에 대한 전시를 통해 핵의 영향과 파급력에 대해 국제관계의 측면에 서 다룬 내용이 있어서 현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 방문해서 느낀 점은 미국의 핵 과학의 발전, 핵무기 개발 의 역사, 핵에너지의 평화적 활용 등을 중심으로 핵 기술에 대한 전시 에 대해 직접 본 후, 현지에서 영상물 시청, 퀴즈 맞추기 게임, 기타 체험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미국이 핵이라는 토픽에 있어 “발전의 역사”의 관점에서 핵 과학 및 기술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Ⅲ. 일본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 평화공원 : 피해와 아픔
의 역사
일본 나가사키에 위치한 원폭 자료관(Nagasaki Atomic Bomb Museum)과 평화공원(Nagasaki Peace Park)은 1945년 8월 9일 일 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를 기억하고 핵무기의 참혹한 피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소로서, 엄숙한 분위기로 구성되 어 있었으며 미국 박물관과는 대조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선적으로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를 중심으로 한 장소로, 핵무기 피해에 대한 증언, 원자폭탄 투하 가 일본인에게 준 영향과 관련 역사적 사실, 핵무기 사용으로 인간적 고통과 피해, 평화의 중요성과 핵무기 사용에 대한 경고, 원자폭탄 투 하의 결과와 일본에서의 회복, 그리고 일본 내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 기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특히, 박물관은 그 당시 원폭으로 인 한 당시의 사진 및 유물, 피해자의 증언 등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실제 자세한 이야기와 함께 핵무기의 파괴적인 영향을 직접 보고 나니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유리병과 사람의 뼈가 붙어있는 전시물은 충격적이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째, 자료관은 나가사키와 히로시 마의 원폭 투하가 이루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단계와 관련된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둘째, 자료관은 원폭이 투하된 후의 피해 상황을 상세히 전시하고 폭발의 순간과 그로 인한 인간적인 고 통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사망자 및 피해를 겪은 생존자 등 의 다양하고 자세한 인터뷰, 사진, 증언이 전시되어 있었다. 셋째, 자 료관은 원폭 투하가 일으킨 도덕적, 인도적 논란과 핵무기의 사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며 핵무기 없는 세계를 목표로 하는 메 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가사키 평화공원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점 근처에 위 치한 공원으로 일본의 원폭 피해 기념과 반핵 평화 운동의 중심지로 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이다. 공원은 원폭의 폭심지, 평화의 조형 물 및 기념비, 평화의 종 등의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핵무 기의 피해와 위험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료관과 평화공원에 방문해서 느낀 점은 일본의 원폭 피해 경험 을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피해와 여파를 기록하고 설명하는 전시 물들과 핵무기 없는 세상과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이 핵이라는 토픽에 있어서 “피해와 아픔의 역사”의 관점에서 핵무기 사용의 비극적 결과로 인해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료관은 정보 제공과 교육에 목적이 있고 평화공원은 기념의 공간으로서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되어 상호보완적인 장소라 고 생각되었다.
Ⅳ.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 미국과 일본의 핵에 대한 인식
분석
북한학을 토대로 “북핵” 관련 이슈를 연구하길 희망하는 학생으로 서, 미국의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과 일본의 나가사 키 원폭 자료관 및 평화공원이라는 장소는 핵에 대한 미국과 일본 양 국의 서로 다른 인식을 토대로 정보를 습득하고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원폭이 떨어졌던 1945년을 기준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서로 달랐는지, 과거 1945년이 아닌 2025년 현재의 한국과 미국, 일본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국제관계 및 외교관 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2024년 7월 여름 방학에 방문한 미국과 2025년 1월 겨울 방학에 방문한 일본을 통해서 핵에 대한 각국의 인식이 어떻게 상이한지 직 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며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미국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은 핵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 중에서도 핵무기의 개발과 실험, 그 과정에서의 과학적 발견과 원 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포함한 기술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이에, 박물관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원자력 발전, 핵무기 개발의 기술적 과정을 중심으로 한 전시물이 많았다. 반면, 일본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핵무기 사용의 피해에 초점을 맞추고, 1945년 나가사키 원폭의 역사적 사건과 그것이 미친 인간적 고통과 피해를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자료관은 원폭 투하로 인한 일본 피해의 참혹함과 피해자의 증언, 사진, 물품을 중심으로 한 전시물이 많았다. 아울러, 일본 나가사키 평화공원은 원폭 피해자들을 기리는 것을 핵심으로 일본 내에서 핵무기 폐기를 위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 달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평화공원은 기념 조각상, 평화의 상징물들이 중심이 되는 장소로, 직접적 전시물보다는 기억과 기념을 중심으로 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또한, 미국 앨버커키 박물관 은 미국의 핵 개발 역사와 과학적, 기술적 관점에서 시작되는 반면, 일본 나가사키 자료관과 평화공원은 일본의 핵무기 피해와 그로 인 한 평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는가? 미국은 핵에 대해 “발전의 역 사”를, 일본은 핵에 대해 “피해와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은 박물관, 자료관, 평화공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핵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1945년 일본 식민지로서의 한국은 핵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과거와 현재의 관점에서 한 국, 미국, 일본 3국의 상황을 보면, 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과 핵무기의 사용이 있었던 상황과 2025년의 북핵 위협에 대응하여 한미일 동맹 강화를 추구하는 상황이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과거 1945년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며 일본에 큰 피해를 주었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큰 고통을 겪었다.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8월 6 일)와 나가사키(8월 9일) 두 도시를 원자폭탄으로 공격하였고, 일본은 핵폭탄 투하 이후 원폭의 피해자로서 고통과 상처를 지속적으로 경험 했다. 또한 일본은 일제 강점기 한국에 대해 인권 침해, 강제 노동,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고통을 주며 착취 를 감행하였으며, 한국은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한 피해 그리고 이후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지속적인 배상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즉, 한미일 3국은 각자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상이한 가해자 (Perpetrator)와 피해자(Victim)의 역할을 경험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도 이어지는 외교적 긴장과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현 재-미래의 한미일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미국 앨버커키 국립 원자력 과학 역사 박물관> 방문 현장 사진
<일본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 평화공원> 방문 현장 사진
< 사랑방 23기 일본 규슈 답사 단체사진 >
참여자 : 하영선, 박한수, 고하은, 이원주, 이해린, 정명현 (6인)
< 다음 기수를 위한 사랑방 23기의 답사 준비 꿀팁 > ● 밴/버스 대절 관련 팁
- 3일 일정 모두를 밴 혹은 버스를 대절하여 움직이게 되면 답사 비
용이 상당히 많이 들 수 있습니다. 이 경우 2일차와 3일차만 차량
을 대절하여 움직이는 것이 경제적일 수 있습니다. (답사 전 구성
원들과 비용 계산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 밴 대절 업체 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land180.com/korean_japan_bus/%eb%8c%80%ed%98 %95%eb%b0%b4/.
● 나가사키행 버스 예약 관련 팁
- 밴/버스 대절에 따른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서 나가사키로 가는 교통편은 고속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답사 인원
이 적을 경우 첫날 일정은 나가사키까지 고속버스로 이동한 뒤 시
내에서 택시 또는 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 고속버스는 다음의 사이트를 통해 예매할 수 있습니다.
https://www.highwaybus.com/gp/index. 다만 언어를 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설정하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버스 노
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로 표기
되는 화면에서 예매를 진행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 답사 전에는 12시 2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하여 이동하기로 했
었습니다. 하지만 후쿠오카 공항에서 입국 수속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현장에서 11시 7분발 버스로 승차권을 교환했습니다. 예매할
때는 12시 2분발 버스를 선택하되, 공항 도착 후 시간이 여유롭다 면 승차권을 교환하여 나가사키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방법입니
다.
● 그 외 답사 관련 팁
- 규슈 도자기문화관 화장실이 아름다우니 꼭 가보시면 좋을 것 같
습니다.
- 규슈 국립박물관에서 대학생 할인을 받으려면 학생증이 필요합니
다. 답사 시 학생증을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 1월의 규슈는 날씨가 변화무쌍하니, 우산을 가지고 다니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일본의 경우 1월 1일부터 짧게는 3일, 길게는 7일까지 신년 연휴
로 명소나 음식점이 휴업하기도 합니다. 일정 확정 시 이 점 고려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다같이 사진을 많이 찍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