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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의 後進國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立場 河英善

사랑의 세계정치를 향하여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4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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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交學科 67296

目次

Ⅰ. 問題意識의 出發

Ⅱ. 革命과 National Bourgeoisie Ⅲ. Lenin과 毛澤東의 立場 Ⅳ. 兩國의 立場의 變遷過程

Ⅴ. 相異한 立場의 몇 가지 原因들 Ⅵ. 結

* 註와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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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問題意識의 出發

美國에서 始作된 Area Study라는 硏究分野는 그 出發動機가 美國의 對外政策의 보다 效率的인 遂行을 위한 基盤構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韓國이라는 場所위에서 地域硏究가 가지는 意義도 韓國의 對外政策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觀點에서 볼 때, 우리가 一次的으로 硏究對象으로 삼아야 할 것이, 常識的 用語로 極東이라 불리우는 regional complex (美, 蘇, 中, 日, 韓(南, 北)에 의해 形成되는 複合體)이다. 그중에서도, 지나친 ideology의 편협성 때문에 taboo視되는 中·蘇와 韓國의 關係에 대한 철저한 理解가 先行되어야, 現象에 대한 正確한 把握과 妥當性 있는 行動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本 小考에서는 이에 대한 하나의 整地作業으로서 共産圈과 後進地域의 關係에서 核心的인 要素인 「中·蘇의 後進國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立場」을 糾明해 보려는 것이다.

分析方法으로서는, Ⅱ.에서 Marxism의 革命理論에서 national bourgeoisie의 位置를 把握하고, Ⅲ.에서 兩國의 初期의 基本立場으로서, Lenin과 毛澤東의 national bourgeoise의 役割에 對한 立場을 比較하고, 다음 Ⅳ.에서 歷史的 展開過程을, 그리고 마지막 Ⅴ.에서 立場의 相異의 몇 가지 原因을 試論的으로 論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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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革命과 National Bourgeoisie

Marx는 그의 「共産黨宣言」의 結論部分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共産主義者들은 自己의 目的은 다만 모든 現存하여 있는 社會制度를, 暴力的으로 전복하는 方法으로써만 達城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宣言한다」① 당시의 Marx의 눈에 의해 把握된 現存하여 있는 社會制度는 서로 敵對視하고 和解할 수 없는 두 개의 階級으로 分裂되어 있는 資本主義體制였다. 이와 같이 支配階級(資本家)과 被支配階級(勞動者)이 對立되어있는 속에서 眞情한 意味의 自由, 平等, 民主主義란 存在할 수 없으며, 國家權力은 小數支配階級의 道具化되어 「프로레타리아트」에 대한 暴力的 搾取機關의 役割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② 그러면, 勞動階級의 解放은, 이러한 狀況속에서, 어떻게 可能할 것인가? 이에 대한 對答이 그의 「프롤레타리아트」 革命論이다. ③ 그에게 있어서 革命은 階級鬪爭의 不可避한 發展이며, 革命的 變革 없이는 새로운 社會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資本主義社會가 共産主義社會로 넘어가는 過程에서도 被壓迫階級인 「프로레타리아트」의 革命은 不可避한 것이며, 敵對的 對立關係 속에서는 暴力的인 性格을 가질 수밖에 없다. ④ Marx의 이와 같은 proletariat의 暴力革命은 그 成功條件으로서 항상 生産力의

61 發展程度를 前提로 하며, 또한 단순한 非組織的 大衆의 散發的 蜂起를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單一階級으로 結集한 勞動者들의 全國的 蜂起를 뜻하는데, 그에 있어서 「모든 階級鬪爭은 政治鬪爭」인 까닭에 「프로레타리아트」의 階級으로서의 組織은 자연히 政黨의 組織이 된다.⑤ 이 「프로레타리아트」 계급이란 Engels의 定義에 의하면, 近代資本主義의 産物인 「賃金勞動者階級」을 말하며, 無産階級全體, 또는 「부르조아지」에 대립하는 모든 階級을, 이에 포괄시킨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프로레타리아트」 革命論은 뒤에 Lenin의 「國家와 革命」에서 보다 과격하게 展開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⑥

이상으로 미약하나마 Marx의 革命理論을 간단히 考察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理論이 西歐라는 現實 속에서 形成된 것이고, 또한, 西歐에 적용하기 위한 理論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女流革命家 Vera Sassulich의 便紙에 대한 Marx의 答狀이었다. ⑦ 당시(1881年)에 農業國家인 러시아에 있어서 社會主義者들은 Marx의 見解에 따를 경우 어떻게 行動해야 할 것인가를 물은 데 대해, Marx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❶ 나의 資本主義體制의 分析은 西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資本主義가 가는 길의 「歷史的 必然性」은 분명히 西歐諸國에 국한한다. ❷ 身分的인 勞動 위에 입각해 있는 私有財産은 다른 62 사람의 收奪, 賃金에 입각한 資本主義的 私有財産에 의해서 추방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西歐的인 길을 따를 경우 私有財産의 한 形態를 다른 形態의 私有財産으로 變革함이 문제된다. ❸ 러시아 農民의 경우에 있어서는 반대로 그들의 公有財産을 私有財産으로 變革해야 한다.

이와 같이 Marx에게 있어서 당시의 後進國이 러시아에서 社會主義革命은 고려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西歐의 現實dp 입각한 그의 革命理論에 있어서 national bourgeoisie의 役割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Lenin을 주축으로 하는 Bolshevik에 의해 러시아에서 10월革命이 成功하고, 기대되던 독일을 위시한 西歐에서의 革命이 挫折되자 狀況이 달라지게 되었다. 10月革命直前에 나온 Lenin의 「國家와 革命」은 Marx- Engels의 「프로레타리아트」의 暴力革命論에 입각하고 있었으나, 위와 같은 狀況의 變化에 따라 아세아로 視野가 오게 되자, 이제까지의 革命理論의 圖式만으로는 適用이 困難하게 되었다. 당시의 아세아에는 proletariat階級과 bourgoeis階級, 人民大衆과 封建制度, 植民地와 帝國主義, 등의 矛盾이 複合되어 있었고, 또한 革命의 主體가 될 철저한 階級意識으로 무장한 「프로레타리아」의 힘이 미약했으므로, 불가피하게 革命에 있어서 national bourgeoisie의 役割이 重要한 問題로 부각되었다. 한편, 中國은 그들의 革命 수행과정에 있어서 必然的으로 national bourgeoisie의 位置가 問題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63 그들의 체험 속에서 하나의 立場을 形成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 章에서 이 兩國의 national bourgeoisie에 對한 初期의 立場을 Lenin과 毛澤東을 통해서 考察해 보기로 한다.

Ⅲ. Lenin과 毛澤東의 立場

Lenin이 아세아로 눈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전혀 다른 狀況이 存在하고 있었다. 아세아의 中心部인 中國의 境遇에 勞動者들은 質的으로, 量的으로 未成熟段階에 놓여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 家長政治의 思考方式을 가지고 있었고, 血緣關係와 鄕土心이 아주 강했다. 따라서 이들이 手工業勞動者들로부터 産業勞動者로 전환한 후에도, 政治行動의 必要性을 認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①

이러한 現實속에서 量으로서의 農民, 質로서의 nati’l bourgeoisie, 知識人의 革命過程 속에서의 役割이 輕視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西歐와 같은 第四階級의 解放의 問題 이전에, 帝國主義 勢力으로부터의 脫皮, 封建勢力의 破壞와 같은 基本的인 問題에 대한 解決이 必要했기에, Lenin에게 있어서도 첫 段階로서 national-bourgeois革命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여기에서 後進國의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Lenin의 立場을 보다 선명하게 把握하기 위해, 1,920年 64 第二次世界共産黨大會에서 Lenin이 언급한 「民族的 問題와 植民地問題에 關하여(Zur Nationalen und Kolonialen Frage)」의 內容을 槪觀해 보기로 한다. 이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7가지 內容으로 간추려 볼 수 있다. ③

1.) 植民地에는 이미 民族的 自立을 위하여 資本主義에 反對하는 廣範한 運動이 있다. 그러나 소련의 도움없이 이 民族들이 同等權을 爭取하기는 不可能하다.

2.) 自由의 運動들은 土着的인 民族的 bourgeoisie, 勞動者, 農民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많은 階級들의 聯合이다.

3.) 이러한 聯合속에서 土着的인 共産主義者들은 「bourgeois民主的」인 自由의 運動을 支持해야 하며, 그러나 동시에 時代에 뒤진 階級들(聖職者와 地主)과 싸워야 한다. 특히 그들은 土地改革을 관철해야 한다.

4.) 國際共産主義는 植民地와 後進國家들에 있어서의 브르조아民主主義的인 民族運動을, 앞으로 프롤레타리아政黨의 要素들이 이들 國家內에서 규합되어 自己民族內에 있어서의 브르조아民主主義的인 運動에 대한 鬪爭課業이라는 特殊한 임무의 意識 속에서 길러진다는 條件下에서만이 支持하여도 좋다.

5.) 이것은 帝國主義勢力이 政治的으로는 獨立을 認定하나, 經濟的, 財政的, 그리고 軍事的으로 완전히 예속화시킨 곳에서 이러한 政府들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투쟁이다.

65 6.) 그러나 聯盟을 이룬 곳에서는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聯盟」일 것이다. 民族的인 브르조아民主主義的 革命家와 소련權力間의 그와 같은 聯盟속에서 世界帝國主義에 反對하는 새로운 타격의 方向이 成立된다.

7.) 소련의 模型을 따라 後進國들도 소련의 援助와 西歐의 革命的 proletariat의 도움을 받아 資本主義단계를 뛰어넘어 社會主義社會形態를 建設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Lenin의 언급은 그의 後進國의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立場을 分明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그것이 그가 겪은 러시아革命[二月革命(브르조아民主主義者들의 革命)→十月革命共産主義者들의 革命)→(農地改革, 社會化, 非資本主義 模型에 따르는 産業化)→社會主義]에서의 經驗을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注目할 점은 당시 이 these가 採擇될 때 印度共産主義者 M. N. Roy의 反對意見이 있었다는 것이다. ④ 그의 主張이었던 一次的인 局面에서부터, 共産主義者의 主導下에 革命이 進行되어야 한다는 主張은 후의 毛澤東의 主張과 一致하는 것이었다.

Lenin은 위에 提示된 these와 같은 立場에서부터, 1,922年 中國共産黨에게 國民黨과의 「國共合作」의 指令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 結果는 장개석 軍事獨裁의 出現(1,927年)과 共産黨의 慘敗였다. 그 이후 長征과 같은 쓰라린 체험 속에서 毛澤東은 그 나름의 national bourgeoisie에 對한 立場을 가지게 되었다.

66 그는 그의 최초의 글인 그의 故鄕인 湖南省에 關한 黨에 보내는 報告書에서 bourgeois의 類型을 三分해서, 첫째, 地主와 買辦 bourgeoisie(comparador bourgeoisie)-聯合이 不可能한 革命의 적-, 둘째, national bourgeoisie-이들의 態度는 兩面性을 가진다. 反帝國主義革命에는 同調하나, 無産者革命에는 反對한다. 세째, 小bourgeoisie-自作農, 手工業者, 學生, 下級官僚, 小貿易商 等을 包合하며, 이들은 革命의 여명이 밝아오면 革命에 同調할 것이다-로 나누어서 그 性格을 規定하고 있다. 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毛澤東의 立場에서 볼 때 二重的인 性格을 가진 national bourgeoisie를 效率的으로 利用하기 위해, 그의 獨特한- 함께 革命은 하되 主導權은 共産主義者가 갖는다는-立場이 나오게 된다. 이 立場을 보다 明確히 把握하기 위해 그 후의 그의 理論展開를 보기로 하자. 1,937年 8月에 쓰여진 「矛盾論」에서 主要한 矛盾과 矛盾의 主要한 側面을 說明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⑥ 「複雜한 事物의 發展過程에는, 많은 矛盾이 存在하지만, 그 속에 반드시 하나의 主要한 矛盾이 있고, 그것의 存在와 發展에 依해, 다른 矛盾의 存在와 發展에 影響을 끼친다.」 이러한 理論 밑에서 그가 中國에서 가장 主要한 矛盾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半植民地, 半封建狀態이며, 이것은 人民이 proletariat勢力에 依해 指導되어 被支配者로부터 支配者로 변할 때, 中國社會가 새로운 民主主義의 社會로 변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⑦ 이것은 1,940年에 나온 「新民主主義論」,

67 「中國革命과 中國共産黨」에서 보다 具體的으로 論理가 展開되고 있다. 그는 「新民主主義論」⑧에서 現在의 狀況에서 社會主義의 段階로 가기 위해서는 新民主主義의 段階가 必要하다고 역설하고, 이를 위해서는 첫째, 農民, 둘째, 勞動者, 小bourgeoisie, 知識人, 셋째, national bourgeoisie의 聯合에 의한 獨裁體制의 共和國이 革命을 이끌어야 할 것이라고 主張한다. 그러나 national bourgeoisie의 二重的 性格을 밝히고 主導權은 줄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⑨ 「中國革命과 中國共産黨」 은 前書의 理論的 基盤을 주는 것으로서 唯物史觀에서 본 中國의 歷史와, (여기에서도 아편전쟁 이후의 中國의 半封建, 半植民地로 把握하고 있다.) 新民主主義革命의 性格을 밝히고 있다. 그 性格의 內容을 要約해 보면, 「政治的으로는, 革命的인 여러 階級의 獨裁와 bourgeois 獨裁에 대한 反對이며, 經濟的으로는, 大資本과 企業의 保存, …」 等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bourgeois 獨裁와 社會主義 革命과는 區分된다고 主張하고 있다.

以上에서 본 바와 같이 毛澤東은 Lenin과는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다른 見解를 取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後進國의 封建, 植民狀態로부터의 解放을 위한 革命에서 national bourgeoisie와 손은 잡되 獨自性을 認定하지 않는다. (bourgeois 革命의 否定) 둘째, 革命을 통한 新民主主義의 成立과 더불어, 土地改革, 社會化를 수행하여 他階級을 도태시킴으로써, 社會, 共産主義革命을 同時에 可能케 한다. 셋째, 68 新民主主義革命으로부터 社會主義革命으로의 移行은 위와 같은 改革의 完遂에 따라, 暴力的이 아닌 平和的 手段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毛澤東의 立場은 後進國에 있어서 Lenin의 革命 model과 함께 또 하나의 model을 提供하는 것이다. 따라서는 우리는 다음 章에서 이 두 개의 model이, 또, 이에 따른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두 立場이 具體的인 歷史的 狀況 속에서 어떻게 變化해 갔으며, 얼마나 많은 結實을 맺었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할 必要가 있는 것이다.

Ⅳ. 兩國의 立場의 變遷過程

1. 立場의 成立

Lenin은 1920年에 그가 밝힌 these에 따라 1922년 中國共産黨에게 다음과 같은 指令을 내렸다. ① 「植民地의 共産主義者들이 그들 自身의 階級의 利害를 방어한다는 理由에서 帝國主義의 압제에 대한 (bourgeois 民族主義者들의) 鬪爭에 參與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最惡의 機會主義이다. ……아세아에서 現在 强調되어야 할 슬로건은 (i.e. bourgeois 民族主義와의 協助下」의) 反帝國主義 聯合戰線이다.」

中國共産黨은 이에 充實히 따랐으나, 그 結果는 장개석의 軍事獨裁의 成立이라는 慘憺한 것이었다. 그러나 Lenin의 뒤를 이은 Stalin은 이와 같은 結果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立場을

69 견지해 나갔다. 그 理由로서는 첫째 日本의 領土擴張努力에 대한 방패로서 民族的으로 굳혀진 中國이 必要했었고, 둘째, 당시 國內에서 反對派들이 蔣 政權을 援助한다는 것은 國際共産主義의 目的보다 오히려 소련의 國家政策的 目的을 重視한다는 비난과 對決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Lenin의 立場을 견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Stalin은 이를 革命에도 「숨돌리는 시간(Atempause)」이 必要하며, 소련에서 이룬 成功을 維持하기 위해서는 資本主義와 關係를 갖는 것이 必要하다는 名分을 내세웠으며, 더구나 第一次五個年計劃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西歐를 위시한 資本主義者國과 正常的인 外交關係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例. 1934. 9. 16. League of Nation에 加入) 이에 따라 소련은 「一國社會主義」라는 이름하에 産業化에 主力하게 되고, 이때의 10年 동안 植民地問題는 소련의 視野에서 멀어져 갔다. 이러한 속에서 二次大戰이 일어나게 되자 소련은 植民地를 가진 國家들과 同盟關係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Komintern까지도 포기하게 되었다. 二次大戰이 끝나고 戰勝國이 된 소련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한 擴張政策을 시도해보았으나 實效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中國은 1934年 延安政權의 成立 이후, 毛澤東의 新民主主義理論에 입각하여 national bourgeoisie와 제휴하여 日本帝國主義의 勢力을 몰아내고, 1945年 이후 中國內의 主導權 획득을 위한 투쟁이 展開되어 1949年 10月 中華人民共和國이 70 誕生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新民主主義理論을 人民民主主義獨裁로 바꾸게 되는데, 그 基本構想에 있어서는 大差를 發見할 수 없다. 이를 把握하기 위해 1949年 6月 30日에 나온 毛澤東의 「人民民主主義獨裁에 對해서」라는 論文을 보면 다음과 같은 主張을 하고 있다. ③ 「人民民主主義獨裁의 基礎는 勞動者階級, 農民階級 및 都市 小bourgeoise의 同盟이고, 주로 勞動者와 農民의 同盟이다. 왜냐하면, 이 두 階級은 中國人國의 80%부터 90%를 占하고 있기 때문이다. ……新民主主義로부터 社會主義에 이르는 데에는, 주로 이 두 階級의 同盟에 依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基本的 性格을 밝히고, 이 人民民主主義獨裁는 가장 革命的 性格을 가진 勞動者에 의해 指導되어야만 革命의 成功이 可能하다고 指摘하고 있으며,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해서는, 現在의 强大한 帝國主義 勢力과 對決하고, 또 中國의 뒤떨어진 經濟的 地位의 向上을 위해서, 이들과 유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national bourgeoisie는 革命의 指導者는 될 수 없고, 또 國家權力 內에서 主要한 地位를 占할 수도 없다. 이것은 national bourgeoisie의 社會經濟的 地位가 그들의 軟弱性을 決定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긴 視野를 가지지 못하고, 충분한 勇氣를 가지지 못하여, 그 위에 民衆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④

이와 같은 毛澤東의 立場이, 中共의 成立과, 소련의 植民地에 대한 一時的 소극적 태도와 함께, 世界共産主義에

71 하나의 位置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1950年末의 兩國의 論爭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2. 非植民地過程과 兩國의 立場

二次大戰이 끝나자, 소련과 中共의 예상과 달리, 몇 나라를 除外하고는(例,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알제리아 等), 대부분이 非暴力的으로 獨立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Lenin의 有名한 命題에 따라,⑤ 이러한 植民地의 獨立은 形式上의 獨立에 不過한 것이고, 經濟的, 財政的, 軍事的 예속관계에 의해 새로운 植民地主義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兩國은 guerilla戰의 形態로 「人民解放戰線」을 구축해야 한다는 立場을 兩國은 取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 新生國의 政權은 共産主義를 방어하기 始作하게 되고, 과거의 植民地 母國과 손을 잡게 됨에 따라, 對共産圈의 形成이라는 結果를 招來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兩國의 舊植民地에 대한 政策의 修正이 不可避하게 되었으며, 그 具體的인 例가, 1954年의 中共이 印度와 맺은 Panch- Schilla條約⑥과, 1956年의, 소련이 내놓은 zone of peace 理論⑦이었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圖式化된 理論에서 생겨난 現實 앞에서, 世界革命戰略의 一步後退를 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3. 中·蘇 論爭

소련은, 平和共存論이 提唱된 20次共産黨大會 이후, national 72 bourgeoisie에 對한 評價에 있어서도 보다 긍정적인 方向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아세아에 대해 專門家로 알려진 Zukov의 글을 통해서 보면,⑧ 「農民들이 數的으로는 壓倒的이지만, 그들은 分散되어 있고, 內的으로 結合力이 不足하므로, 꽉 짜인 힘이 形成될 수 없다. 따라서 勞動階級이 아직 一般的으로 認定된 指導者의 位置를 占하지 못한 아세아나 아프리카에서는 national bourgeoisie들이 半植民地主義 運動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어떠한 植民地의 解體도 資本主義體制를 弱化시키는 것이므로, 共産主義者와 national bourgeoisie와의 相互協助를 强調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련은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評價와 함께, 平和共存理論에 입각해서 軍事的 鬪爭에 의한 勝利보다, 政治, 經濟的 鬪爭에 눈을 돌림으로써, 新生後進國에 대한 立場에도 修正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의 植民地였던 國家에서, 共産主義者들을 外交的, 經濟的 側面後援속에 活動할 수 있게 하며, 그 一次的 目標를 bourgeois의 붕괴 이전에, 강한 共産主義의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고, 帝國主義 블럭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보다 소련의 外交政策的인 次元에서 問題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具體的인 實例가, 國內共産主義를 억압하는 Nasser에 對한 援助, Algeria에 있어서 NLF에 對한 소극적인 態度(불란서와의 關係 때문에)로서 나타난 것이다.

73 이러한 소련의 태도에, 1954年경부터 national bourgeois에 대해 宥和的 態度를 보였으나 거의 實效를 못 거둔 中共은 反撥하기 始作했다. 1959年에 들어서서는, 1956年이래 계속되는 中·蘇論爭의 三段階로서 「人民解放戰線」에 대한 異見이 露骨化되었다. 소련은 反帝國, 反封建鬪爭은 現存政權의 體制內에서 可能하며, 이들 國家의 革命的 딜레마의 마지막 結果는 地方 共産主義者들의 鬪爭뿐만 아니라, 東西間의 平和的 競爭의 過程 속에서 決定된다고 主張하는 데 대해서, 中共은 다음과 같은 主張을 하고 있다. ⑨ 「어느 정도까지는 帝國主義와 封建勢力에 대한 鬪爭에서 bourgeoisie와 협조할 수 있다. 그러나 브르조아는 결국 브르조아인 것이다. 그들이 일단 政權을 잡으면, 그들은 確固한 革命的 路線을 따르지 않고, 흔들리고 協商을 시도한다. 따라서 社會主義革命은 물론 民族的 民主主義革命조차도 不可能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얻은 獨立마저 不安定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兩國은 後進國의 革命에 대해, 그것이 世界共産主義를 위해 必要하다는 것에는 一致하고 있으나, 革命의 速度問題, national bourgeoisie의 役割 等에 대해서는 전혀 相異한 점이 存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兩國의 立場의 差異는 1960年 81個國共産黨大會에서 소련은 「民族的 民主主義前線」⑩을 主張하기에 이르고, 反面에 中共은 60年 黨大會 Moscow 宣言에 서명은 했지만 新民主主義, 74 人民民主主義에서 主張하던 立場을 고수하고, 첫째, 먼저 낡은 國家機構가 破壞되어야 하기 때문에, bourgeois 政府를 거쳐 「勞動者農民政府」에 이른다는 것은 不可能하며, 둘째, 西歐 帝國主義勢力과 실제 鬪爭하지 않는 中立國에 대한 援助는 할 수 없다는 立場에 서 있었다.

1960年代에는 위와 같은 兩國의 立場이 계속 維持, 展開되어 나왔으나, 資料 수집의 不足, 限界 때문에, 이에 대한 詳述은 다음 硏究課題로 삼기로 하고, 다만, 1969年 6月에 열렸던 世界共産黨大會에서 採擇된 「現段階에 있어서 反帝鬪爭의 諸課題 및 全反帝勢力의 行動統一」⑪이라는 基本文書에서 소련의 立場이나, 1965年 9月 3日의 人民日報에 실린 「人民戰爭의 勝利萬歲」(林彪), ⑫ 1966年 8月, 中國共産黨中央委員會 第11回 총회 communique⑬에서 나타나고 있는 中共의 立場은, 대체로 政策의 새로운 變化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Ⅴ. 相異한 立場의 몇 가지 原因들 中共과 소련의 舊植民地였던 新生國에 대한 基本政策에 있어서, 反帝國主義鬪爭에 있어서 聯合은 兩者가 모두 必要하다고 認定하나, 그 遂行 過程에 있어서 national bourgeoisie의 役割에 대한 立場은 一致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75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相異한 立場이 생기게 된 原因이 무엇인가를, 本 小考에서는 하나의 試論으로서 簡略하게 몇 가지 점만을 指摘해 보고자 한다.

첫째, 「10月 革命은 首都의 武裝된 러시아 勞動階級의 蜂起로서 始作되었다. 그 發展過程은 먼저 都市에서부터 占領해서 農村으로 擴大되어갔다. 그런, 1927年 中國共産黨의 獨立的인 指導하에 始作된 中國革命戰爭은 먼저 農民革命을 基盤으로 農村地域의 일부에서 成功하여, 그것이 점차 擴大되어 결국 都市에서까지 成功할 수 있었다.」①

위와 같이 1960年 「紅旗」에서 比較하고 있는 것과 같이 中國과 소련에 있어서 革命에 대한 體驗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련에 있어서는 그것이 짧은 期間 동안에 guerilla戰 같은 것에 의하지 않고 都市의 勞動者들로부터 始作되었기 때문에, 그 過程에서 national bourgeoisie와 심각한 關係같은 것은 存在하지 않았다. 반면에, 中國에서는 20여년에 걸쳐 農民勢力의 도움을 얻어 guerilla戰을 통해 農村에서부터 出發하여 都市를 포위하는 方法으로 革命을 遂行했기 때문에 national bourgeoisie의 조종은 重要한 일이었고, 特히 1927年 一次國共合作의 失敗가 中國의 獨自的인 모델을 設定하는 데 깊은 影響을 주었던 것이다.② 따라서 中國은 그들의 체험 속에서 反帝, 反封建의 鬪爭에 있어서 共産黨 指導下에 national bourgeoisie와의 提携의 立場을 취했고, 소련은 그들의 76 革命過程에 따른 bourgeois 革命→proletariat 革命→社會主義의 model에 따라 後進國에 있어서도 national bourgeois에 의한 bourgeois 혁명을 一段階의 過程으로 提示했던 것이다.

둘째, 兩國의 立場의 變化나 決定은, Zagoria의 表現을 빌린다면,③ 革命의 利害(revolutionary interest)에 많은 影響을 받는다. 「소련과 中共의 展望」으로는, 世界는 革命的 激動 속에 있고, 결국 共産化될 運命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過程을 追求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선되어야할 것, 地方主義, 타이밍의 相異點들이 생격난다.④ 즉, 그들의 革命의 利害關係가 相異點을 決定짓는 경우가 많은데, 소련은 先進 西歐帝國들이 우선적 目標이고, 그들의 弱化시키기 위해서는 後進地域에 대한 立場에 보다 큰 유연성이 필요하게 된다. 반면에, 中共은 西歐는 소련에 맡기고, 주로 그들의 革命을 이끌어 나가기 원하는 後進地域에서 革命的 路線이 불붙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兩國의 革命的 利害關係는 Stalin이 죽기까지는 크게 충돌하지 않았으나, Khrushchev時代 이후, 後進地域에 대해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하게 되고, 이것이 中共과의 사이에 많은 말썽을 빚어내게 했던 것이다.

셋째, 中共과 소련의 經濟的 水準의 差異, 軍事力의 優劣이 또 하나의 重要한 原因을 이룬다.⑤ 中共은 그동안 많은 努力을 기울여 왔으나, 아직까지 「have not」의 國家들의 영역에 속하고, 한편, 소련은 50年 동안 비약적인 經濟發展을 통해

77 産業國家로서 成長하여, 「have」 國家群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점차 外交, 經濟的인 側面에서 後進地域의 反帝運動을 支援하려 하고, 中共은 보다 積極的 態度를 취해, 經濟的 弱點을 補充하려는 意圖도 內在해 있는 것이다. 軍事的인 面에서도 소련은 美國과 優劣을 다투는 最大强國으로서 登場하고 있고, 中共은 아직까지는 第二의 잠재강국으로서 存在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은 보다 신중한 態度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中共은 持久戰論, 反唯武器論의 主張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은 世界大戰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軍事的인 側面에서의 직접적인 世界共産化를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있으나, 中共은 아직까지는 革命에 의한 資本主義體制의 國家形態의 變革을 통한 世界共産主義化를 主張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兩國의 立場의 相異가 생기는 몇 가지 原因을 試論的으로 서술했으나, 보다 根本的으로 兩國의 世界戰爭에 대한 깊은 硏究가 행해져야, 보다 次元 높게 이 問題를 解明할 수 있으나, 現在의 筆者의 水準으로는 이 정도에서 일단 머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Ⅵ. 結

後進國의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中·蘇의 立場을 첫 章에서 提示한 方法에 따라 分析을 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 첫째, marxism의 革命理論에 있어서 national bourgeoisie가 問題된 78 것은, 러시아革命의 成功 이후 기대되던 西歐의 연속적 革命이 좌절된 후 아세아가 視野에 들어온 이후부터라는 것, 둘째, Lenin과 毛澤東의 근본적 差異點은 그들 나름의 後進國에 있어서의 革命model의 相異에 따라서 누가 初期革命過程에서 主導權을 잡아야 하는가에 있었다는 것. 셋째, Lenin과 毛澤東의 立場이 그 이후의 狀況의 變化에도 불구하고, 兩國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 넷째, 이와 같은 立場의 相異는 歷史的 體驗, 國力, 革命의 利害 等에서 原因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와 같은 解答이 우리에게 어떠한 問題를 던져주고 있는가 하는 것은, 筆者 자신이 보다 具體的으로 中·蘇와 韓國과의 關係에 대한 硏究를 한 이후에 취급하기로 하고, 本 小考에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삭제)

이상의 考察을 통해 中·蘇 양국의 後進國 national bourgeoisie에 대한 立場을 歷史的으로 把握하였고, 이것이 오늘날의 중쏘분쟁의 重要한 issue 중의 하나를 이루어 왔던 것이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중쏘분쟁이 국제 다원화의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79 註 Ⅱ. 革命과 National Bourgeoisie

① K. Marx, The Communist Manifesto, (Man & The State, The Political Philosophers에서 引用, p.532)

② V. I.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Chap.Ⅰ,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5)

이 冊에서 Lenin은 Marx보다 더 proletariat 獨裁의 政治體制의 暴力的 性格을 强調한다.

③ H. Arendt, On Revolutio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5) 이 冊의 Chap.Ⅰ. The meaning of revolution은 本 小考와 直接的 關係는 없으나 近代革命의 性格을 理解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Marx의 革命論의 義味는 p56-p61.

④ Marx와 Engels는 革命에 대한 信念을 포기한 일은 없지만, 末期에 가서는 Europe 大陸에 국한해서 暴力革命論을 主張했다. Marx-Engels, Aus geuählte Briefe, Berlin, 1953. S. 307. [梁好民, Marx·Lenin主義(理論批判篇)에서 再引用]

⑤ K. Marx, op. cit. Chap Ⅱ.

⑥ V. I. Lenin, op. cit. Chap Ⅰ, Ⅴ

⑦ E. Boettcher, Politische Begründung und Methoden Kommunistischer Entwicklungspolitik, in: Entwicklungstheorie und Endwicklungspolitik, hrsg, von Eric Boettchen, Tübingen, 1964, 80 p.103 Ⅲ. Lenin과 毛澤東의 立場

① Ch’en Tu-hsiu, quoted in Schwatz, Communism, p.48 [Klaus Mehnert, Peking and Moscow, (N.Y.A Mentor Book, 1964) p157- 158에서 再引用]

② K. Mehnert, Peking and Moscow, (N.Y.A Mentor Book, 1964)에서 Chap.Ⅵ With or Without the Bourgeoisie?를 참조할 것.

③ E. Boettcher, op. cit. p126에서 再引用

④ E. Boettcher, op. cit. p129에 있는 註27 참조

이 論爭에 관해서는 Allen. S. Whiting, Soviet Policies in China 1917-1924, (New York, 1954) 및 E. H.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23, Bd. 3, (London, 1953) 참조

⑤ Mao Tse-Tung, Selected Works (London and New York), Vol. Ⅰ, pp13-20. [K. Mehnent, Peking and Moscow, p174에서 再引用] 이 報告書는 毛澤東이 1926年 그의 故鄕인 湖南省에 파견돼서 32日間 체류한 후, 黨에 보낸 것으로 農民들의 革命過程에 있어서의 重要性을 强調하고 있다.

⑥ 毛澤東, 矛盾論 (東京, 平凡社의 世界敎養全集15, 1968) p215. ⑦ 毛澤東, 上揭書 p218

⑧ 毛澤東, 新民主主義論 (1940. 1. 19)

81 여기에서는 Robert Payne의 Mao Tse-Yung의 Eight, Five Books라는 章에 발췌 요약된 것에서 再引用 pp185-190

⑨ 毛澤東, The Chinese Revolution and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1940) [Robert Payne, op.cit. p191-196에서 再引用]

Ⅳ. 兩國의 立場의 變遷過程

① Degras, Communist International, Vol, pp. 389 f. ② E. Boettchen, op. cit. p 129

③ 毛澤東, 人民民主主義独裁について- 中国共産党二十八周年を記念して- 本 小考에서는 堀田善衛의 編集·解說로 된 現代人の 思想시리즈 17인 民族の 獨立(東京, 平凡社, 1968) 中에서 引甲 p324.

④ 毛澤東, 上揭書 p.325

⑤ E. Boettcher, op. cit. p126

이 命題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 例로서, 具島兼三郞, 現代の植民地主義(東京, 岩波新書, 1969, 12刷)나 최근에 岩波新書로 번역이 나온 Harry Magoloff의 The Age of Imperialism (N.Y. Monthly Review Press, 1969)等을 들 수 있다. ⑥ 1954年 4月에 中共과 印度 사이에 맺어진 協定으로서 그 內容은 첫째, 領土保存과 主權의 相互존중, 둘째, 不可侵, 셋째, 相互의 國內問題에 대한 不간섭, 네째, 平等과 相互利益의 基盤 위에 國際關係의 改善, 다섯째, 平和共存과 經濟協力이다. (W. W. 82 Kulski, Peaceful Co-Existence 參考)

⑦ 1956年 20次 黨大會에서 提唱된 것으로 Europe과 아세아의 社會主義國家와 非社會主義 平和愛護國家(主로 植民地에서 獨立한 新生國)을 포함해서 平和의 地域이라 설정하고, 이들이 함께 追求해야 한다는 理論이다. (W. W. Kulski의 Peaceful Co- Existence 참조)

⑧ Yu. Zukhov, “Znamenatel’nyi Faktor Nashegs Vremeni” (Prava, 1960. 8. 26) [D. S. Zagoria, The Sino-Soviet Conflict 1956-1961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62) pp254-255에서 再引用] ⑨ Whang Chia-hsiang, in Ten Glorious Years, 1954-1959 (Peking, Foreign Language Press, 1960) p. 4, D. S. Zagoria의 上揭書 pp276-279에서 再引用

⑩ 1960. 12月 Moscow에서 열린 81個國共産黨大會에서 採擇된 것으로, 그 內容을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民族的 民主主義國家의 政治的 基盤은 완전한 民族的 獨立을 위하여, 포괄적인 民主主義를 위하여 反帝, 半封建的인 民主主義革命의 完遂를 위하여 투쟁하는 모든 進步的인 愛國主義세력의 bloc이다. (...) 共産主義者의 目的은 民族의 最高의 利害關係와 一致한다. (...)」 (E. Boettchen의 上揭書에서)

⑪ 朝日新聞, 1969. 6. 19.

⑫ 林彪, “人民戰爭の勝利萬歲” (東京, 共同通信社의 世界年鑑, 1967) p99-101

83 林彪는 1965年 9月 3日 人民日報에 이 글을 發表했는데, 中共成立까지의 毛澤東의 人民戰爭을 격찬하고, 나아가서 그의 오늘날의 世界革命은 世界의 都市를 포위하는 方式에 의해서 행해져야 하므로, Asia, Africa, Latin America에서의 人民의 革命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⑬ 이 communique의 要旨는 「첫째, 米帝國主義勢力은 보기에는 强하나 實際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둘째, 소련공산당의 新指導部는 Khurshchev 없는 Khurshchev 修正主義를 推進, 米國을 필두로 하는 帝國主義, 各國反動派와 聯合해서 反共, 反人民, 反中共의 新神聖同盟을 結成하고 있다. 셋째, 따라서 帝國主義에 反對하기 위해서는 現代修正主義에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Marx-Lenin主義와 現代修正主義와의 투쟁에는, 결코 중간의 길은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Ⅴ. 相異한 立場의 몇 가지 原因들

① Red Flag, No. 20-21, 1960. From text released by NCNA, November 2, 1960. “A Basic Summing up of Experience Gained in the Victory of the Chinese People’s Revolution” G. F. Hudson, R Lowenthal & R. MacFarguhan가 編集, 分析한 The Sino-Soviet Dispute (The China Quarterly, 1961) pp. 162-163에서 再引用 ② Donald. S. Zagoria, op. cit. p16

③ Donald. S. Zagoria, op. cit. p19 84 Zagoria는 革命의 利害(revolutionary interest)는 國家利益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世界革命의 次元을 넘어서고 있다고 說明하고 있다.

④ Donald. S. Zagoria, op. cit. p19 ⑤ Donald. S. Zagoria, op. cit. pp18-19

85 參考文獻 K. Marx, The Communist Manifesto, (Man & the State, The

Political Philosophers에 있는 版)

V. I. Lenin, The State and Revolution,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5)

毛澤東, 矛盾論, (東京, 平凡社, 1968) ———“人民民主主義獨裁について”

———“中國共産黨全國宣傳工作會議における講話” (東京, 平凡社,

1968)

林彪, “人民戰爭の 勝利萬歲” (東京, 世界年鑑, 1967)

G. F. Hudson, R. Lowenthal & R. MacFarguhan, The Sino-Sov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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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年鑑, 1967, (東京, 公同通信社)

朝日新聞 1969.

人権宣言集 (東京, 岩波文庫, 1968, 14刷)

H. Arendt, On Revolution (N. Y. The Viking Press, 1965)

K. Mehnent, Peking and Moscow (N. Y. A Mentor Book, 1964) A. Fremantle, Mao Tse-tung (N. Y. A Mentor Book)

R. Payne, Mao Tse-Tung (N. Y. A Pyramid Book, 1966)

D. S. Zagoria, The Sino-Soviet Conflict, 1956-1961 (Princeton,

Princeton Univ. 1962)

86 金相浹, 毛澤東思想 (서울, 知文閣, 1964)

具島兼三郞, 現代の植民地主義(東京, 岩波新書, 1969, 12刷) W. W. Kulski, Peaceful Co-Existence

永井陽之助, 平和の 代償(東京, 中央公論社,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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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Boettchen, Politisch Begründung und Methoden

kommunistischen Entwicklungspolitik, in:

Entwicklungstheorie und Entwicklungspolitik, hrsg, von Eric

Boettchen, Tübingen,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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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 교수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2 학년 재학 당시 작성한 “中·蘇의
하영선 교수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2 학년 재학 당시 작성한 “中·蘇의

後進國 National Bourgeoisie 에 대한 立場”

표지 뒤에 적힌 노재봉 교수의 피드백: “A. 대체로 좋았으나 자료에
표지 뒤에 적힌 노재봉 교수의 피드백: “A. 대체로 좋았으나 자료에

중요한 것이 빠진 것이 없지 않다. 특히 Asiatic Characteristics of Society 와 관련된 논쟁이 별로 상세히 취급되지 못했다.“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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