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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평화의 구조’를 모색하며: 키신저-저우 42시간 대화록 읽기 자금성

사랑의 세계정치를 향하여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4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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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준 · 성균관대학교

들어가며

1950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져 있는 균열의 틈에는 늘 대만이 있어왔다. 22년 간의 단절에서 첫 공동선언으로 나아간 1972년의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은 미국 외교사에서 극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미국 정치권 내에 여전히 남아 있던 반공주의 진영의 반격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중국과 화해에 나설 수 있었던 여건과 전략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와 울림을 준다. 또한 중국을 둘러싼 복수의 안보 불안과 인도차이나 반도 내의 전쟁이 연출한 복합적인 상황, 미-중-러의 삼각 관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작금의 정세와도

33 겹쳐 보이는 점이 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한 정책을 조정하고 대화에 나섰다는 점에서, 그러한 일치가 가능했던 여건을 면밀히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본 보고서는 1972년 상하이 공동선언이 조형된 키신저의 두 차례 방중(1971년 7월과 10월)에 걸친 키신저-저우의 42시간 대화록에 주목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이 추진 및 지속될 수 있었던 동기나 여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미-중 협상 결과를 평가한다.

미국의 대중 정책 조정 과정: 존슨 행정부 시기까지

1972년 닉슨의 방중이 성립하기까지의 과정에 닉슨과 키신저를 포함한 극소수의 인원만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이니셔티브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데도 닉슨의 의중이 주요하게 작용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닉슨이 과감하게 대중국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여건은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무르익어 오고 있었다.

미국 관료 체제가 중국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중국의 내부 상황과 대외 정책 및 여건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이블린 고는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로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로서 소련과 단일한 세력으로 인식하는 ‘붉은 위험 세력(Red Menace)’, 중국이 공격적인 혁명 이념을 가졌다고 보면서도 소련과 중국의 라이벌 34 관계를 인식하는 ‘혁명적 라이벌(Revolutionary Rival)’,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비롯해 경제 개발과 현대화에 좌절을 겪은 중국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불안한 현대화 국가(Troubled Modernizer)’, 중국의 과거의 영광과 수치심에 주목하는 ‘재기하는 세력(Resurgent Power)’까지 4가지로 정리했다. 앞선 두 이미지가 미국의 정통 냉전적 관점을 반영한다면, 뒤의 두 이미지는 변화하는 대내외 여건에 맞춰 부상한 수정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 중국에 대한 수정주의적 이미지로의 전환은 케네디 행정부에서부터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인도 국경 분쟁, 대만 해협 위기, 중국의 핵 무력 개발, 제3세계에서 확장되는 중국의 영향력 등 중국의 점증하는 위협을 경계하면서도,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과 중국의 갈등과 대약진 운동의 실패 등에서 대중국 정책 노선을 수정할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했다. 존슨 행정부가 들어선 1965년에 이르러서는 의회 외교위원회에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고려해 중국과 교류를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한국 전쟁의 비극이 재발할 것을 우려한 존슨 행정부는 이 같은 기류 변화에 빠르게 발맞춰 중국에 관계 개선 신호를 내비췄다. (Xia, 2006) 그러나 같은 시기 중국에서 정점에 달해 있던 문화대혁명이 중국 관료 체제를 와해해 대외정책 추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화해라는 과제는 다음 행정부로 넘어가게 됐다.

미국이 이처럼 대중국 정책을 조정하게 된 배경을

35 요약하면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중국을 향한 동정적인 시선이 생겼다. 둘째, 1965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UN 성원권을 부여하는 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된 점이 시사하듯이, 국제 여론이 점차 미국의 비타협적인 대중국 정책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셋째, 베트남 전쟁이 고조됨에 따라 중국과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으며, 보다 큰 틀에서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공산권을 향한 완화된 정책을 추구하게끔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중-소 갈등이 가시화되고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됨에 따라 변화한 상황에 맞는 대응 방안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

닉슨 행정부와 중국의 첫 접촉까지

1968년, 닉슨과 넬슨 록펠러가 공화당 경선 후보로 경쟁하던 무렵, 닉슨과 (록펠러의 캠프에 있던) 키신저 모두 중국 봉쇄를 포기하고 관계 개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둘의 접근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닉슨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중국에 대한 봉쇄 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됐음을 거론하며, 아시아 내 동맹국들의 안보에 ‘자기 책임의 원칙’을 내세웠다면, 키신저는 그가 작성한 연설에서 “닉슨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새로운 세력 균형 정책 틀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중국을 향해 36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야” 함을 밝혔다. (Tudda, 2013, p.3) 키신저 또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기 이전부터 미-중-소 삼각 외교와 세력 균형의 견지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키신저의 접근법에 감명받은 닉슨은 경선 승리 몇 주 후에 키신저를 차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영입했다.

닉슨이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대립의 시기”에서 “협상의 시대”로 나아갈 것을 선언하며 대외정책의 변화를 시사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1972년의 “중국을 향한 개방”과 같은 형태로 중국 정책을 구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존슨 행정부 시기 NSC 중국 전문가 알프레드 젠킨스는 중-소 갈등이 중국이 미국과 대화에 나설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중국이 미국과 “근본적인” 관계 개선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의심했고, 이러한 회의적 시각은 미국이 화해에 나서기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이 같은 회의적 시각은 닉슨 행정부에도 이어져, 국무부 내 관료 모두 중국 지도부와의 협상 가능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2 2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의 틀이 어디에서 마련됐는지를 두고 투다와 고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다는 무게 중심을 닉슨에 두고 1972 년 정상회담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반면, 고는 닉슨- 키신저의 협상 전략과 정책 틀이 국무부를 비롯한 관료 체제 내에서 먼저 제시된 것으로 본다. 본 보고서는 고의 관점을 주로 참고했다.

37 1969년 2월, (중국이 회담 이틀 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에 관해 논의하는 문서에서는 대만에 주둔한 미군 병력 문제에 관해 재검토할 의향을 중국에 보여줄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당시 국무부 장관 로저스와 키신저에 의해 기각됐다. 이처럼 닉슨의 취임 초기 미국의 중국 정책은 ‘탐색 국면’에 머물러 있었다. (Goh, 2004, p.130)

닉슨 행정부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3월에 중-소 국경 분쟁이 격화됨에 따라 변화했다. 소련에서 보이는 미국과 중국의 밀착에 대한 불안감에서 힌트를 얻은 닉슨과 키신저는, 1969년 중순을 기점으로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NSC 회의에서 키신저는 “역사는 적대적인 두 세력 중에서 더 약한 편에 설 것”을 제시한다며, 세력 균형 정책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의지를 보였다. (Xia, 2006, p.141에서 재인용) 같은 해 9월, 닉슨과 키신저는 주폴란드 대사 스토셀에게 중국 측 인사에게 바르샤바 대사급 회담을 재개하자는 요청을 전하라고 지시하면서, 닉슨 행정부 시기 중국과의 첫 접촉이 이뤄졌다.

두 번의 바르샤바 회담, 백악관과 국무부의 교차와

분기

닉슨은 대통령 취임 이후 키신저와 함께 외교 정책의 38 주도권을 국무부에서 백악관과 그 산하의 NSC로 옮기기 위한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특히 키신저의 관료 체제를 향한 불신과 괄시는 저우언라이와의 대화록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농담에서도 여러 차례 드러난다. 닉슨과 키신저의 관료 불신 탓인지,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은 닉슨 행정부 시기 중국과의 세 번째 바르샤바 회담 결렬 이후 파키스탄과 루마니아를 통한 ‘비밀 채널’을 중심으로 극소수의 인원에 의해 추진된다. 그러나 키신저가 여러 곳에서 국무부를 대중국 정책의 걸림돌처럼 묘사한 것과 달리, 두 차례 바르샤바 회담 과정에서 국무부가 스토셀에게 제공한 가이드라인에 제시된 내용은 이후 키신저와 저우의 협상에서도 상당 부분 반영됐다.

대만 문제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중국 관계를 22년 간 단절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으며, 134번에 걸쳐 진행된 바르샤바 회담이 줄곧 정체되게 만든 문제이기도 했다. 닉슨 행정부 시기 두 차례 바르샤바 회담의 주된 안건도 대만 문제였다. 첫 번째 바르샤바 회담에서 스토셀에게 국무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는 대만 문제에 관한 세 가지 새로운 입안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입안에는 “미국은 베이징과 타이페이에 의한 대만 상황의 평화적인 안착에 개입하지 않을 것(would not stand in the way)”과 “대만의 본토를 향한 공격적인 군사 행위를 지원하지 않을 것”, “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이 정착됨에 따라 대만에 주둔한 미군 병력을 감축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담겨

39 있었다. 여기에 더해 국무부는 중국 측에 중국 대표단이 워싱턴에, 혹은 미국 대표단이 베이징에 가 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는데, 중국 쪽 참여자인 레이 양 또한 ‘고위급 회담’을 제안했다. 양쪽이 첫 바르샤바 회담에서 동시에 관계 진전 의지를 보이면서, 키신저는 닉슨에게 중국과 관계 개선에서 미국이 무엇을 취하고 중국에 무엇을 내줄지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Accinelli, 2006, p.14에서 재인용)

두 번째 회담 준비 과정에서 국무부는 대만 문제를 정치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으로 나눠 협상 전략을 제시한다. 특히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대만에 배치된 미군이 증가된 점을 거론하며, 국무부는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대만 배치 병력 감축을 연계시키는 전략을 제시하는데, 이 같은 아이디어는 이후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할 때도 그대로 반영된다. 반면 정치적 측면에서의 대만에 관한 입장 표명은 국무부가 제시한 안이 이후 키신저가 저우에게 밝히는 미국의 입장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국무부의 전략 문서에서는 대만 문제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모호하게 해 양쪽(미국과 중국) 모두가 각자가 원하는 바를 계속할 수 있도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래에 미국은 대만의 상황이 “미결정(Undeterminded)”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무부 전략 문서는 이 같은 입장이 미국이 대만의 안보를 계속해서 보장하는 데 유리하다며, 중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대만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닉슨은 고위급 회담 40 추진 의사를 더 강하게 밝힐 것을 주문하면서도, 전반적으로 국무부의 전략에 만족했다. (Accinelli, 2006, p.16)

미군의 캄보디아 진입으로 인해 결렬된 세 번째 바르샤바 회담 준비 과정에서 국무부는 고위급 회담의 6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한다.

(1) 대만과 관련된 분쟁은 본토와 대만의 직접적으로 관계된

당사자들 간에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2) 미국은 그러한 합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3) 지역 내의 긴장이 감소함에 따라, 대만 내 주둔한 미군은

점차적으로 축소해 나갈 것이다.

(4)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평화적 협상으로 해결할 것이다.

(5) 양측의 관점에서 상호 접촉과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평화적 공존의 (다섯 가지) 원칙은 앞선 원칙들과 일관된다.

세 번째 회담 결렬은 백악관이 중국 정책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질 기회를 만들었다. 국무부가 바르샤바 회담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틀은 앞서 언급했듯 이후의 중국과의 협상에서도 유지된다. 그러나 대만 문제에 있어 대만이 “미결정” 상태라는 입장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국무부가 닉슨과 키신저보다

41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키신저는 저우와의 첫 번째 대화에서 해당 입장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재빨리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더해 국무부는 백악관보다 고위급 회담으로의 진전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며, 중국의 의도를 더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키신저는 중국이 처한 안보 불안이 미국과의 근본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기에 충분한 동기를 부여한다고 판단했다. 대만에 관한 미묘한 태도 차이와 정책 속도에 있어서의 이견은 닉슨-키신저가 독자적으로 중국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이 됐다.

키신저-저우 42시간 대화 읽기 (1) 성급한 양보?

키신저와 저우의 첫 회담 장면 (National Security Archive)
키신저와 저우의 첫 회담 장면 (National Security Archive)

42 본 보고서는 주지하듯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과 중국이 1972년 2월 데탕트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키신저-저우의 대화록을 읽으면서 답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은 미국의 데탕트 정책이 어떻게 추진 및 유지될 수 있었는지, 최종적으로 ‘상하이 공동선언’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미국의 대내외적 여건과 의지는 무엇이었는지에 관한다. 키신저가 첫 번째 비밀 방중에 앞서 키신저가 직접 작성했을 ‘POLO I’ 브리핑북에는 키신저가 설정한 방중 및 데탕트 정책 전반을 추진하는 목적이 적혀 있다. 그가 밝히는 목적은:

① 북베트남이 베트남 전쟁의 평화적이고 수용 가능한 합의를

향해 움직이도록 중국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이라는 보장이라고 볼 수 있는 충분히 견고한

조짐(Indication firm enough to be taken as assurances)

② 미국이 대만과의 외교적 관계와 상호방위조약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관계를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대만 문제에 관한 미-중의 협의(modus vivendi)

③ 미국 대표단을 베이징에 보내 정상회담의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것을 포함해, (군비 통제, 무역과 관광 확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긴장 완화 같은) 상호 이해에

관한 사안을 논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연락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미-중 관계를 지속하는 것

43 ④ 중국이 세계 정세에서 소련의 역할을 어떻게 보는지와

이것이 소련의 군사 능력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

까지 총 네 가지다. 두 번째 방중에 앞서서도 같은 형태의 ‘POLO II’ 브리핑북이 준비된 것으로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인터넷을 통해 접근 가능한 자료는 POLO I 브리핑북에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에 대한 전망은 달라졌을지라도, 데탕트 전반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지됐기 때문에, 위의 네 가지 목표에 기초해 키신저의 42시간의 협상 기록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가지 목표 중에서도 닉슨과 키신저에게 있어 가장 우선시된 것은 베트남 전쟁을 수용 가능한 형태로 종결하기 위해 중국의 영향력을 빌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저우는 키신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미국의 평화 협상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직관적으로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설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동기에 균열을 낼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소련, 인도, 일본, 미국으로부터) 전방위에서 극심한 안보 위협을 받던 상황에서, 협상은 미국 쪽에 레버리지가 있었다고 봐야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후대의 미-중 관계에서 대만 문제에 관해 협상의 폭을 크게 위축시킬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44 데탕트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질문해봄직 하다.

42시간의 대화는 키신저와 저우가 “실질적인 문제(substantive matter)”로 표현한 대만, 베트남 전쟁, 한반도, 일본과 소련을 포함한 “주요 세력과의 관계(great power relation)”, 인도-파키스탄 분쟁에 관한 의견 교환 및 협상과 닉슨의 중국 방문을 위한 “기술적인 문제(technical matters)”에 관한 논의로 이뤄진다. 실질적인 문제는 다시 양국의 관계 진전을 위해 논쟁과 협상을 벌인 “근본적인 문제(fundamental issues)”와 논쟁적인 성격이 없이 양국이 각종 의제에 관해 가진 입장(특히 중국의 안보 불안을 불식하기 위한 미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의견 교환, 그리고 차후 관계 개선 프로세스를 원활히 하기 위한 소통에 관한 문제(정부 공식 논평이나 워싱턴-베이징 “핫-라인” 설치 등)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양국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비공식적 의견 교류를 나누는 한편, 닉슨의 중국 방문을 통해 양측의 입장을 어떤 형태로 어느 수준까지 공식화할지에 관한 합의를 진행했다. 본 보고서에서는 근본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의제를 대만과 베트남 전쟁 두 가지로 보고 각 의제를 둘러싼 대화에 중점을 두고 대화록을 살펴보려 한다.

1971년 7월 9일, 저우와의 첫 만남에서 키신저는 대만 의제를 “정치적 진전”에 관한 사안과 “병력 철수”에 관한 사안으로 나눠 접근할 것을 제시하면서, 정치적 진전은

45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저우는 중국에게 있어 대만이 국내적 문제라며, 해외 세력인 미국이 자국 영토 내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일이 “정치적 진전”과 분리될 수 없다고 키신저의 접근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비친다. 저우는 대만으로부터 병력 철수는 적어도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주권을 가진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정치적 선언과 같다고 본 것이다. 키신저의 접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저우는 곧 대만 문제에 관한 합의와 공식적 발표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저우와 그의 뒤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을 마오는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는 것이 최종적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전제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를 1972년에 있을 닉슨의 방중을 위한 전제로 내걸지는 않았다. 마오와 저우가 대만 문제 해결에 시간적 여유를 보인 덕분에, 양국의 대만에 관한 협상은 상호 간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반영한 논쟁이 아닌, “정치적 단계의 타이밍(the timing of political steps)”에 관한 협상으로 국한될 수 있었다.

키신저 역시 중국에 맞춰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앞서 살펴봤듯이 바르샤바 회담 단계에서 미국은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미국이 방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상태를 향해 대만 해협 양측이 합의하는 것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진일보한 입장이면서도, 여전히 46 대만이 “미결정” 상태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에서 키신저는 처음부터 기존 미국의 입장에서 한 발짝 나간 상태로 협상을 시작한다. 7월 9일 첫번째 대화에서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대만이 “미결정” 상태라는 발표를 한 것을 저우가 키신저에게 지적하자, 키신저는 그가 같은 입장을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반발한다(뒤이어 중국 측에서 조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웃음이 나온다). 같은 문제에 관해 다음 날 두 번째 대화에서 저우가 국무부 대변인이 입장을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한 게 맞냐고 재확인하자 키신저는 “실수로 한 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저우는 두 번째 대화에서 (아마 전날 대화를 마오에게 보고하고 함께 상의한 뒤) 중국과의 관계 진전을 위한 조건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할

것.

-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할 것.

- 미국이 두 개의 중국 혹은 한 개의 중국, 한 개의 대만

원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것.

- 대만 독립 운동을 지지하지 않을 것.

여기에 “국무부 대변인은 자신이 말한 바를, 즉 대만이 미결정

47 상태라는 입장을 되풀이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이 덧붙여져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키신저는 관계 진전을 위한 조건 중 “대통령은 분명 두 개의 중국 해결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총리님의 두 번째 지점, 즉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점에 관해서는 바로 그 점이 나머지 세 가지 지점도 모두 해소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즉, 키신저가 정리한 중국 측의 첫 번째 조건을 제외하면 나머지 네 가지 조건은 모두 이미 비공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거(다음 미국 대선) 이후까지 남겨둬야 하는

유일한 문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방향은 명확합니다.

앞서 소개한 키신저의 목표에 따르면, 키신저는 대만 문제에 관해 대만과의 외교적 관계와 방위 조약을 유지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 목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선에서 지켜질 수 있다. 중화민국 정부를 대표성과 정당성이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중화민국 정부를 조약에 조인할 자격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신저는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단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앞으로 일 년 반(닉슨의 첫 번째 임기 끝) 동안 우리가 48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습니다”라고 밝힌다. 키신저는 이 점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대답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발전(political evolution)”은 두 번째 임기부터 가능하다는 입장만 되풀이한다. “두 개의 중국, 혹은 한 개의 중국, 한 개의 대만 원칙을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입장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입장 사이에 어떤 중간 단계가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키신저가 말한 “정치적인 발전”은 결국 중국과 외교 관계 확립을 위해 저우의 첫 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키신저는 처음부터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승인하는 동시에 중화민국 정부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려놓았다고 봐야 한다. 키신저가 설정한 목표는 닉슨의 첫 임기 동안에만 유효한 단기적인 목표였을 것이다.

키신저가 한반도의 주한미군 의제를 논할 때는 적극적으로 사용한 ‘일본 카드’는 대만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저우는 대만에서 미군이 철수했을 때 장개석이 일본이나 소련과 결탁할 가능성에 관해 진지한 우려를 여러 차례 드러낸다.

저우: (…) 반면 지금은, (대만에서) 병력 철수는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미국은 또한 우리와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49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대만을 잃지 않을,

혹은 일본이 대만의 일에 손을 대고 간섭하지 않도록 할,

대만에서 독립 운동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려를 표하는 저우의 발언은 대화록 곳곳에 등장한다. 키신저는 그때마다 간단하게 “우리는 일본이 대만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며 간단하게 대답한다. 키신저의 10월 두 번째 방중에서 이뤄진 대화의 한 부분에서는 “우리는 일본이 대만에 병력을 배치하거나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응당 반대할 것이고, 또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의 정도만큼 일본이 대만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할 것입니다”라며 일본에 직접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것을 시사한다.

키신저의 두 번째 방중에서 양측은 대만 문제에 관해 7월 대화에서 나눴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대만 의제를 일단락 짓는다. 향후 공동선언에서 미국이 대만에 관한 입장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치열한 줄다리기가 오간다. 다만 이는 대만에 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반영한 것이 아닌, “정치적인 발전”의 속도 조절에 관한 설왕설래에 해당한다.

키신저-저우 42시간 대화 읽기 (2) 단호한 거절과

여전한 기대

50 1971년 5월 2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곧 있을 미국과 중국의 고위급 회담에 관해 논의하면서 미-중 대화를 통해 중국의 의도가 미국에 분명히 전달된다면, 베트남의 저항이나 파리 평화 회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같은 해 7월 5일, 키신저의 방중으로부터 4일 남은 시점에 저우는 인도차이나 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비-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고 호주 노동당 대표와의 대화에서 밝혔다. 이처럼 인도차이나 반도 문제를 이른 시일 내에 평화적으로 종결하려는 의지는 중국과 미국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Danhui, 2006, p.190) 닉슨과 키신저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인도차이나 문제 역시 중국에게 안보 불안으로 여겨졌던 상황에서 중국이 지역의 안정을 바랄 것이라는 계산은 충분히 가능하다.

42시간의 대화에서 인도차이나에 관한 입장을 피력할 때, 키신저는 베트남과의 협상 과정에서 겪고 있는 난항과 미국의 진정성 있는 철군 의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키신저는 키신저가 저우로부터 베트남과의 협상에 필요한 조언을 기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신저가 어려움을 토로하면 저우는 장광설로 받아치는 모습이 여러 차례 연출된다.

키신저: 북베트남은 지나치게 의심이 많고, 우리가 자신들은

51 속이려 한다고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저들은 우리 제안에서

함정을 찾아내거나, 찾아내지 못할 경우 찾아낼 때까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할 것입니다. 저들은 우리 머릿속이 온통 자신들을

교묘하게 조종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

키신저는 두 번의 방중 모두에서 중국이 베트남과의 협상에 도움을 줄 것을 여러 차레 정중히 부탁한다.

키신저: 만약 우리의 친구 중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원치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들(베트남)이 일정한 정치적 발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끔 그들의 관점에 도움을

준다면, 전쟁은 급격하게 종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우는 키신저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대답하지 않거나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내비친다.

저우: 우리 두 국가(중국과 미국) 간의 관계는 여러 해 동안

단절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사하는 어휘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뜻을 강요하는 일을

벌어지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뜻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마오

주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

52 저우는 또한 키신저가 사격 중지와 철수의 시점에 관해 논할 것을 제안하자 “우리는 베트남인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베트남인들과 논의해야 합니다. 그들의 이해에 관한 일을 우리와 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중국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또 두 번째 방문에서 레 득 토의 9개 평화 제안에 대한 답으로 미국이 제시한 8개 제안을 키신저가 소개하면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제안이라고 주장하자, 자신이 그 제안을 직접 들여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하기 어렵다며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저우는 때로 “미국이 먼저 어긴 제네바 협약을 베트남인들에게 지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등 베트남의 감정이나 관점을 변호하고 키신저에게 조언을 건네면서도, 중국이 직접적인 참여자가 되는 일은 매우 경계한다. 그러나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평화 협상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는 저우의 덕담은 진심이었던 듯하다. 키신저는 “협상이 없더라도, 우리는 결국 일방적으로 철수할 테지만, 이는 더 오래 걸릴 것이고 그동안 사이공 정부는 더 많은 장비로 강화될 것”이라며 협상이 지연될수록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도, 종전도 멀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전략은 저우에게 유효했는지 7월 13일, 저우는 베트남에게 미국과의 첫 고위급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미국이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을 무너트릴 것을 주장하지 말고 베트남에서 미군의

53 철수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설득한다. (Danhui, 2006, p.193)

10월 방중 이후 키신저가 닉슨에게 방중 결과를 설명하는 문서에서는 키신저가 중국이 베트남을 설득하는 역할을 해줄 것임을 기대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키신저는 주요 의제에 관한 논의 결과를 요약하면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해 “베이징은 제한된 수준에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식, 비공식 대화 모두에서 중국인들은 협상이 꼭 타결되기를 희망하고 이 점을 하노이에 말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라고 닉슨에게 보고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우가 여러 차례 협상이 원만하게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기는 했어도, 그 사실을 베트남에 전달할 것이라는 대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가며

‘붉은 위험 세력’이 ‘암묵적 동맹(tacit ally)’로 이행할 만큼 상황이 무르익는 데는 수많은 사건과 관료 내에서의 중국 정책 재평가, 국내외 여론의 변화 등이 동반됐다. 1970년대 초와 현재는 각국의 국력의 수준 등 중요한 지점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과거에 빗댄 단순한 비교는 도리어 잘못된 지침만 줄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양쪽의 소수 리더십에 의해 추진된 데탕트와 그 속의 협상 과정에서 천칭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는지, 기울어졌다면 거기에는 어떤 요인이 있는지, 무엇을 시도해볼 수 있었고 무엇이 54 필연적이었는지 구분하는 작업은 세계 정세의 중심 위치에 놓인 국가로서 주요 세력 간의 타협과 대결의 국면 전환을 기민하게 예측∙감지∙대응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미-중 데탕트 과정에서 대만이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한국도 마찬가지로 외피상에 드러나는 제한적인 문헌으로 주요 세력들의 대화를 연상해내는 역량이 무척 긴요하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키신저가 그의 회고록에서 주장한 것처럼, 미-중 데탕트는 양쪽에 어떤 지도자가 앉아 있었더라도 결국에는 일어날 사건이었다. 미국의 대중 정책 조정 과정을 통해 알아봤듯, “중국을 향한 개방” 정책은 닉슨의 독단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에 가까웠다. 42시간의 대화록을 이루는 논의를 살펴보더라도, 미-중 관계를 단절시킨 가장 주된 요인이었던 대만 문제에 있어서 조차 극복해야 할 만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대화의 전제 조건(베트남 전쟁 종결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정당성 인정)을 걷어내고 미국이 전향적인 양보를 한 결과, 바르샤바 회담의 종료에서부터 1972년 닉슨에 방중에 이르는 길은 양국의 필요에 따라 비교적 순탄하게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닉슨-키신저가 중국에 취한 접근법과 비밀 외교 전략, 관계 개선의 속도까지 역사적 필연으로 환원하는 설명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고,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다. 미국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 종결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였기는 했으나, 그것이 별다른 논쟁도 없이 사실상 처음부터 중국이 내건

55 조건(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수용할 만큼 급박했는지는 대화록만으로 알기 어렵다. 아시아 전역에 걸친 국제정치적 문제에 관한 양국의 관점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는 대화록은 여전히 귀중한 사료이자 다양한 연구 주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번 보고서가 앞으로의 공부에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하며 보고서를 마친다.

56 참고문헌 1. 1차 문헌 National Security Archive.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66: Henry Kissinger’s Secret Trip to China:

The Beijing-Washington Back-Channel, September 1970-

July 1971”. 2002.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70:

Negotiating U.S.-Chinese Rapprochement: New American

and Chinese Documentation Leading up to Nixon’s 1972

Trip”. 2002.

POLO I, “Briefing Book for the President” (Taiwan), July 1971, box 1032, NSCF.

2. 2차 문헌 Accinelli, Robert. “In Pursuit of a Modus Vivendi: The Taiwan Issue and Sino-American Rapprochement, 1969–1972”. In Kirby, William C., Robert S. Ross, and Gong Li,

eds. Normalization of US-China Relations: An

International History. Vol. 254. BRILL, 2020.

57 Goh, E. (2004). Constructing the US Rapprochement with China,

1961–1974: From'Red Menace'to'Tacit Ally'.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cMillan, Margaret. Nixon and Mao: The Week That Changed

the World. New York: Random House. 2007.

Tudda, Chris. A Cold War Turning Point: Nixon and China, 1969- 1972. LSU Press, 2012.

Xia, Yafeng. Negotiating with the enemy: US-China talks during

the Cold War, 1949-1972.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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