쭌이 다시 보기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자의식 형성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사랑의 세계정치를 향하여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조이언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1912년에서 1949년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으며, 이 시기의 역사가 완벽한 체계 속에서 설명된다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립되지 않고 통일되지 않은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광활한 정치적 무대였고, 서로 다른 연극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연기를 펼치며 복합적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성장을 분석함으로써 이 난해한 역사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3 1921년에 창당한 중국공산당의 ‘미약한 시작’이 어떻게 1949년의 대승리로 연결될 수 있었는지, 특히 소련과 코민테른이라는 정치적 후견인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하여 유력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이 글에서는 쭌이회의의 전말과 그 국제정치적 배경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1930년대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당시 소련의 상황과 코민테른-중국공산당 관계와 관련하여 해설하고, 그 다음 1945년 역사결의, 1935년 쭌이문헌, 오토 브라운의 회고를 통해 쭌이회의의 전말과 그 정치적 함의를 밝히도록 하겠다.
1930년대의 국제정치적 상황: (1) 소련의 상황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련은 세계혁명 무대의 혁명 모국으로서의 정체성과,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열강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첩돼 있었다. 두 정체성은 각각 상이한 정치논리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으므로, 소련은 한편으로 각국의 혁명을 지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국(一國)의 정치적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었다. 소련이 처한 이러한 상황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와 일국의 정치적 생존 간의 정치적인 모순과 그에 따른 노선갈등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으므로 트로츠키가 국제주의적 성격의 연속혁명론을 주장함으로써 레닌, 4 스탈린과 갈등을 빚은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레닌의 일국 혁명 이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세계혁명과 러시아의 생존이 양립 가능함을 논쟁하며 그러한 모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1920년대 말 트로츠키의 숙청 이후 공산권내에서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분자 등의 표현은 혁명가들이 소련의 권위에 호소하며 서로를 힐난할 때 남용되는 수사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이유로 공격당하는 혁명노선이 현실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비판과 동시에 러시아의 정치적 이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함께 함의되어 있었다.)
대의와 현실 간의 관계가 으레 그렇듯이 소련의 국제주의적 목적의식과 일국적 국가이성 간 균형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소련을 경제적, 군사적 열강으로 탈바꿈시키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여타 열강들과의 ‘평화적 공존’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스탈린은 소련 외무부를 통해 현실주의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영국 등 기존의 협상국 국가들과, 특히 미국으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아냈으며 각종 외교적, 경제적 협력을 유도하였다. 한편, 소련의 세계혁명에 대한 의무는 각국의 공산당들을 지도하는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에 위탁되어 있었다. 코민테른은 명목상 각국의 공산당들의 협력과 연대를 매개하는 기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실력에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세계혁명과 관련된 소련의
5 외교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서 기능하였다. 스탈린 노선을 채택한 1928년 코민테른 제 6차 대회 이후 이러한 경향성은 노골화되어 코민테른 내 의사결정은 스탈린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대표적으로 같은 해 제 6차 대회에 앞서 개회된 코민테른 제 9차 전체회의에서는 로미나제가 ‘중국에서는 부르주아혁명이 발생할 수 없으므로 즉시 사회주의혁명을 개시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대표부를 이러한 주장이 트로츠키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하였다. (向靑, 1992, pp. 151-154)
1930년대 초 소련 외교의 현실주의적 경향성이 강화된 데는 독일과 일본의 정치적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1931년에는 일본 관동군이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만주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중국의 동북부를 공격하여 소련 입장에서는 극동의 안보 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졌고 1933년에는 독일에서 나치즘이 부상하여 소련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를 기점으로 소련의 안보 불안은 세계혁명에 대한 의무감을 압도하게 되었고 스탈린은 자본주의 세력과 집단 방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는 한편 일본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1930년대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은 이념적인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현실주의적 태도로부터 정립된 것이었다.) 사실상 6 소련에 정치적으로 예속된 코민테른 역시 이러한 일련의 국제정치적 고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Shen, 2020, p. 55)
1930년대의 국제정치적 상황: (2)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관계
1921년에 소련의 지원, 감독 하에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1930년대 전반까지 소련 및 코민테른에 대하여 모든 방면에서 절대적인 의존 상태에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1937년부터 8년간 지속한 중일전쟁을 통해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끝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건국에 성공하기 전까지 중국공산당과 소련-코민테른 간 관계는 국가 간 관계 내지는 파트너적 관계보다는 장군과 병졸의 관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생존 전략에 이리저리 운용될 수 전술 자산과도 같았던 반면에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소련이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때에 따라 오페이푸(吴佩孚)와 같은 군벌, 쑨원 등 ‘민족 부르주아’들과 협력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공산당에 대하여 국공합작을 지시, 종용할 수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코민테른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예속은 명시적이기도 하였는데 중국공산당
7 창당 이후 채택된 <중국공산당의 첫 번째 강령>은 ‘코민테른과 연합할 것’을 규정하고 있고 <중국공산당의 첫 번째 결의>는 ‘당과 코민테른의 연계’를 규정하고 있다. (向靑, 1992, p. 38)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에 대하여 쭌이 이전의 중국공산당 구성원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추적하는 작업은 이 글에서 미처 다 다루기 어렵다. 다만 1927년 여름부터 1930년까지 모스크바 중산대학 유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종의 청당작업은 쭌이 이전에 중국공산당의 자립도에 대한 성원들 간의 의견 차이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예시한다. 코민테른과 미프를 추종하는 ‘왕명 종파집단’과 ‘반왕명집단’간의 투쟁이 발생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반왕명집단’의 주동자들이 당적을 박탈당하고 일부는 체포당하는 등 소련 측에 의한 박해가 있은 것으로 보인다.
왕명집단은 코민테른 제 6차 대회에서 채택된 제 3시기 이론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였는데 나치의 1933년 부상 이후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이론으로 대체된 제 3시기 이론은 일종의 혁명 낙관론으로 1928년의 국제정세에 대해 전세계적 자본주의 경제 실패와 혁명적 조건의 고조의 시기라고 평가하였다. (그런 점에서 1928년부터 1933년 사이의 기간은 소련의 입장에서 생존과 혁명의 이중 연기가 마지막으로 두드러지는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에서는 ‘소련을 수호’하자는 각오나 ‘극동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쟁취’하자는 8 구호 등이 복잡하게 섞여서 운위되었다.) 각국의 혁명이 제 3시기의 세계 혁명과 보초를 맞추어 진행될 것을 다소간 기계적으로 요구하였던 제 3시기 이론은 중국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는 중국에서 ‘혁명의 고조가 임박’하였으므로 중국공산당이 “도시노동자의 폭동과 농촌 홍군의 공격을 서로 결합하여 한개 성이나 수개 성에서 승리를 획득하자”는 이른바 “리리싼 좌경노선”으로 귀결되었다. 즉, 제 3시기 이론이라는 ‘코민테른 좌경노선’이 (이내 왕명 좌경 노선에 의해 대체될) 리리싼 좌경 노선을 발생시킨 것이다. (向靑, 1992, pp. 174-175)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중국공산당이 제 1, 2차 국공합작에 있어서는 상당한 내부 동의가 있었던 데 반해 중국 본토에서 무장폭동을 수행하는 계획, 특히, 도시노동자들의 폭동을 조직하는 일에 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왕명은 본래 리리싼 노선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1930년 이후 드러난 양자 간 입장의 차이란 결국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3시기 이론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등 왕명의 노선이 더 공격적이었다.) 1930년 국공내전의 상황이 악화된 시기를 틈타 왕명은 미프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구와 홍군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초공 시기에 왕명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홍군에 코민테른의 군사전략 지휘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9
쭌이회의의 재구성
왕명이 통제권을 확보하고 중화소비에트가 건립된 이후 중국공산당은 다섯 차례에 걸친 초공작전에 대해 고된 투쟁을 해야 하는 수난기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우여곡절 끝에 1933년 끝내 제4차 초공작전을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 (왕명은 이때까지도 대도시들을 점령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933년 9월 중국 소비에트 주재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李德)이 중국소비에트에 도착했고 이후 중국 본토에서 코민테른의 군사전략에 입각하여 왕명의 후배이자 후계자였던 보구(이들 일파를 ‘28인 볼셰비키’ 그룹이라고 관습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와 함께 홍군을 지휘했다. 왕명과 오토 브라운 등은 제 4차 초공 작전 이후 1933년, 1934년의 중국혁명 형세가 좋다고 주장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제 5차 초공 작전이 전개된 이후에는 일련의 군사적 실패를 겪었다. 결국 1934년 10월 (일찍이 마오가 농민운동을 통해 건설하였던) 장시 소비에트에 피난해 있던 홍군은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고전을 거듭하던 중 1935년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에 걸쳐 쭌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장에서는 마오의 주도하에 채택된 1945년의 역사결의와 마오가 작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935년 쭌이회의 결의, 오토 브라운의 회고를 10 통해 쭌이회의를 재구성하고 그 정치적,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고자 한다.
(베이징 국가박물관)
11
쭌이회의의 재구성:
(1) 마오의 쭌이-1945년과 1935년
중국공산당은 1945년에 개최된 공산당 6기 중앙위원회 7차 전체회의(6기 7중전회)에서 ‘역사결의’를 채택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사에는 두 차례의 역사결의가 더 있었다. 1981년에는 덩샤오핑이 2차 역사결의를 주도했고 2021년에는 시진핑이 3차 역사결의를 통과시켰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최고위급 지도자들로부터 ‘왕밍 좌경노선’이 오류였다는 합의를 이끌어냈고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당원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인식을 학습시켰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는 고위 당정간부를 중심으로 ‘왕밍 좌경노선’ 등의 노선들을 비판하는 역사 토론이 전개되었고 그 결론으로 1945년 역사결의가 채택되었다. 4년에 걸쳐 전개된 옌안 정풍운동은 산만하고 파란중첩하였던 초기혁명사로부터 마오쩌둥사상이라는 핵심적인 줄기를 분리해내는 역사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인 1945년 역사결의는 중공 초기혁명사에 대한 제일 공식적이고 영향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증류 과정에서 실제로는 훨씬 모호하였던 역사적 경향성들이 몇 개의 서사 요소들을 중심으로 응축되어야 했다. 1945년 역사결의의 스토리텔링은 마오쩌둥사상의 자장 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 요소들을 프로타고니스트로 설정하고 12 좌우의 ‘잘못된’ 노선들을 안타고니스트로 설정하여 전개된다. 한편 역사결의가 ‘좌익노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실제의 역사에서는 단일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한 역사결의의 설명은 왕밍, 리리싼, 보구 등의 ‘좌익 모험주의자’들이 1927년, 1930년, 1934년 세 차례에 걸쳐서 집권했다는 것인데 세 시기는 서로 다른 역사적 경향성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좌익 노선’이 심화되는 선형적인 과정처럼 묘사된다.
1945년의 역사결의는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서론이고 2, 3장이 역사 서술이며, 나머지 장들은 역사에 대한 평가에 해당한다. 2장은 1921-27년 기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고 3장은 1927년 이후의 역사, 즉 1927년의 천두슈 우익 노선의 종식과 좌익 노선의 부상, 앞서 언급한 세 차례에 걸친 좌익 노선의 성장, 그리고 1935년 쭌이회의의 좌익 노선 종식의 혁명사를 서술하고 있다. 4장에서는 좌익노선의 오류를 정치, 군사, 조직, 사상의 네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고 5장은 이런 오류의 원인으로 ‘공산당 밖의 계급투쟁이 당내에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한다. 6장에서는 교육과 사상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고 7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역사결의의 결론을 서술하고 있다. “마오쩌둥 동지의 말이 완전히 옳았다. 오늘 우리 당이 항일전쟁에서 이룩한 위대한 승리와 결정적 역할은 바로 이 올바른 노선의 생생한 증거이다.” “마오쩌둥 동지를 대표로 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이 “중국혁명 승리의 역량“이었으며,
13 “마오쩌둥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는 반드시 중국 혁명을 완전한 승리를 이끌 것이다”.
역사결의의 서론은 중국공산당의 역사가 제 1차 대혁명(1921-1927)과 그 실패, 잇따른 토지혁명(1927-1937), 항일전쟁(1937-1945)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토지혁명이라는 다소 모호한 명칭의 역사 시기는 제 1차 국공합작(“제 1차 대혁명”)과 제 2차 국공합작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1945년 역사결의는 바로 이 시기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1945년 중국공산당의 관점에서 그 10년간의 행적들을 정리하고 해명하는 14 작업이 왜 중요하였는가? 중국공산당은 토지혁명 10년의 시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27년 혁명이 실패하고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10년 동안 중국공산당은, 오직 중국공산당만이, 반反혁명적이고
흉악한 공포 통치 아래 전체가 단결하여 반反제국주의와
반反봉건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노동자, 농민, 군인, 혁명적
지식인 및 기타 혁명적 대중을 이끌어 정치·군사·사상의 영역에서
위대한 전투를 치렀다. (...) 이 모든 것이 없었더라면 항일전쟁도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며, 설사 실현됐더라도 인민전쟁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중국공산당의 중추가 없었더라면 항일 전쟁을
지속하고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27년부터 1937년에 이르는 10년은 중국공산당에 있어 1927년의 실패로부터 딛고 일어나는 정치적, 군사적, 사상적 발전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결의의 주제의식은 잇따르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점은, 그 10년 동안 우리 당은
위대한 성취를 거뒀을 뿐만 아니라 몇몇 시기에는 잘못도
범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1931년 1월 제6기
15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6기 4중전회)에서 1935년 1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쭌이회의)에 이르는 시기에 범한 정치노선,
군사노선, 조직노선에 있어서의 '좌경' 오류였다. (...) 중국 혁명의
역사적 교훈을 학습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실패를 벌해 이후에
삼가며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한편, 앞의 차가 뒤집히면
뒤의 차로 하여금 그것을 교훈 삼도록 해야 한다. (...) 중국공산당
제 6기 중앙위원회 확대 제 7차 전체회의는 이 10년 간의 몇
가지 당의 역사적 문제와, 그 중에서도 특히 6기 4중전회에서
쭌이회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있었던 중앙의 영도 노선 문제에
관해 공식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유용하고 또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하는 표현은 정치, 군사, 조직의 삼분법이다. 리리싼, 왕명, 보구의 좌경노선이 정치, 군사, 조직의 세 개 차원에서 모두 오류를 범했다거나 쭌이회의에서 마오가 세 개 차원의 오류를 시정하였다는 표현은 역사결의의 본문에서 수십 번 반복 등장하고 있다. (사상이라는 범주도 등장하는데, 주로 맑스- 레닌주의의 도입과 발전에 관련되며, 역사결의에서는 논쟁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각각이 역사의 어떤 부분들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맥락상 ‘정치’는 혁명 이론상의 문제, 즉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관계나 지방 농민봉기와 도시 무장파업의 관계 등 중국혁명을 수행함에 있어 16 중국공산당이 내려야 했을 정치적 결단들에 관련된다는 것을, ‘군사’는 홍군의 전략전술 문제, ‘조직’은 당내 갈등과 협동에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중전회 이래의 좌경노선에 대한 역사결의적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좌경노선은 군사적으로 잘못된 전략을 취하여 제 5차 초공 작전으로 인한 위태로움을 초래했으며, 조직적으로는 종파주의를 야기하여 당내 갈등을 일으켰다. 정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 혁명 성격을 이른바 (민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혼동한)
“부단혁명(영구혁명)”으로, 중국 혁명의 형세를 이른바 (1927년
혁명의 실패를 부인하는) “끊이지 않는 고조高調”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질서 있는 후퇴를 조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의 강력함과 혁명 실패 이후 민중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소수의 당원과 소수의 민중에게 승리할 가망이
전혀 없는 지방 봉기를 전국적으로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역사결의의 결론은 마오가 쭌이회의를 기점으로 이러한 잘못들을 완전히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쭌이회의 이후 마오쩌둥 동지가 영도하는 당중앙이 채택한 정치노선은 완전히 옳았다. 좌익노선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조직적으로 점차 극복되었다. 1942년 이래로 마오쩌둥 동지가 지도하는 전당의 정풍운동과 당사연구는 주관주의, 종파주의, 고정관념적인 역사서술을
17 반대하고 당역사의 이념적 뿌리에서 비롯된 좌우의 편향을 바로잡아왔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1985년 쭌이회의 문헌 공개 이전까지 쭌이회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진술이었고, 50년 동안 비판적인 서구 학자들마저도 마오의 부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쭌이의 신화’를 그대로 인용하는 상황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1985년에 공개된 1935년 문헌들은 마오의 정치적 탄생설화 속 ‘플롯화’된 쭌이와는 사뭇 다른 톤의 쭌이를 보여주고 있다. 쭌이회의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건은 다음의 세 개가 현전하고 있는데, 1985년에 중국공산당이 편찬한 ‘준의회의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이 세 편의 문서들은 Chen과 Yang에 의해 번역, 해설된 바 있다.1
1 쭌이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가운데 세 편의 에피소드가 여전히 두드러진다. 1969 년에 Jerome Chen 이 The China Quarterly 를 통해 ‘쭌이회의결의’를 번역, 해설하였고, 1986 년에는 Benjamin Yang 이 ‘쭌이회의결의 개요’, ‘쭌이회의 메모’를 번역, 해설하였다. 1989 년에는 Thomas Kampen 이 Yang 의 1986 년 해설을 비판하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화두는 ‘마오의 부상’이었다. Yang 이 문헌 검토를 통해 공식 공산당사가 극화한 쭌이의 서사를 해체하면서도 쭌이가 마오의 정치적 부상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임을 인정하고 있다면, Kampen 은 양대노선이라는 노선투쟁 서사의 전제 자체에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강조하며 쭌이가 마오의 정치적 부상에 있어 그저 한 단계에 불과했다고 역설한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연구와 논의들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쭌이의 진실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길 꺼리는 상황 속에서 쭌이를 고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태도가 비판적인 것이므로 18 1. Resolutions of the Centre of the CCP Adopted by the Conference
of the Politburo, Tsunyi, 8 January 1935 [총결의]
2. The Outline Resolution of the Enlarged Politburo Conference on
Summing up Experiences and Lessons in Smashing the Fifth
“Encirclement” Campaign (The Secretariat of the Central
Committee, 8 February 1935) [결의요강]
3. Notes for Communicating the Enlarged Politburo Conference at
Zunyi (By Chen Yun, February-March 1935) [전보]
세 개 문헌들의 내용이 대동소이한 가운데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중에서 결의요강은 쭌이회의를 즈음하여 (쭌이에서의 입장 발표를 위하여) 마오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결의요강과 역사결의를 비교하여 1935년의 마오와 1945년의 마오가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결의요강’은 11개 요점들로 구성돼 있고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5차 초공작전에 관한 당의 전반적인 정치적 노선은 옳았다. 잘못된 것은 군사 노선이었다. (2) 국민당의 장기전에 대하여 ‘적극적 방어’ ‘공격적 방어’ 노선으로 대응했어야 연구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보다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지 밝히는 데 치중해있다.
19 한다. (3) (4) (5) 홍군의 순수(소극적) 방어 노선은 국민혁명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6) (7) 국민혁명군의 장기전을 구사한다면 홍군은 기동전 노선을 통해서만이 군사적 성과를 이룰 수 있다. (8) 반동세력 내 갈등을 홍군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9) 핵심적인 실패 요인은 소비에트 철수 이후 벌어진 혼란과 패닉을 수습하지 못한 것과 철수 이후에도 노선 변경을 하지 못한 것이다. (10) 순수방어노선은 우익 기회주의 노선의 잔재다.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보다도 보구에 지워져야 한다. (11) 철수한 소비에트 지역들에서는 게릴라전이 지속되어야 하며 새로운 소비에트 건설을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1935년 쭌이에서의 논의는 그 내용과 언어가 1945년 역사결의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1945년의 역사결의가 쭌이 이전에 당권을 잡고 있던 좌익노선의 결정들이 정치, 군사, 조직, 사상의 모든 측면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데 반해, 1935년의 결의요강에서는 제5차 초공작전 당시 당의 결정이 정치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5차 초공작전 당시 당의 전반적인 정치노선은 옳았고 위초를
돌파하는 데 실패를 본질적으로 초래한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요인들이었다. 달리 말해, 군사 지휘에 있어
중국 내전의 기본 전략과 전술 법칙에 어긋나는 순수 방어 전선의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인 것이다.
20 (The general political line of the Party in the Fifth “Encirclement”
was correct, and what essentially caused the failure in breaking the
encirclement were subjective factors and not objective ones. In
other words, it was because we had committed the mistake of a
pure defence line in military command in discordance with the basic
strategic and tactical laws of the Chinese civil war.)
1935년의 결의요강에서는 전적으로 군사적인 차원의 논의만 펼치고 있는데 정작 역사결의에서는 정치, 군사, 조직 중에서 정치의 오류를 가장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실패가 아니라 군사적인 실패였다는 것이 보구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마오는 당시의 상황이 ‘객관적’인 조건(가령, 절대적인 군사력 차이)에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판단과 전략, 즉 ‘주관적’ 오류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한다.) 또한 1935년 결의요강에서는 보구의 ‘부분적이면서 심각한(partial and serious)’ 군사 실패를 좌경노선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순수방어노선을 우익 기회주의 노선의 잔재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1935년의 상황이 1945년에 결의된 역사보다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순에 관련해서는 몇 개 설명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홍군 지도부의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대장정이
21 시작되기 직전 장시 소비에트에서 십만여 농민들을 동원한 사례 등은 혁명역량을 십분 발휘한 정치적 성과로 볼 수 있으므로, 장시 소비에트를 일궈낸 마오가 장시를 떠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정치적 오류’를 운운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둘째로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 속에서 설명이 찾아질 수 있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관계는 불균형한 것이었고, 코민테른은 왕명, 보구 등 중산 대학 출신의 유소파들과 오토 브라운과 같은 코민테른 고문들을 통해 중국공산당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1927년의 중산 대학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와 관련한 불만은 전부터 중국공산당 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이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자립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보다 독립적인 사유를 품은 중국공산당원들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으므로 그런 불만을 어떠한 정치적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대장정으로 인해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간 소통이 1921년 이후 처음으로 단절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급하게 도주하는 과정에서 무거운 통신 기기를 버리고 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고립 상황은 마오에게 중대한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는데, 절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매우 명백한 책임 소재와 책임자들(즉,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훼방 놓을 수 있는 후견자의 간섭(즉, 코민테른의 개입)의 22 부재라는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식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불과 14년 전 코민테른과 소련의 철저한 감독 속에 (마오를 포함한) 십수 명의 중국 젊은이들의 결사에서 출발한 중국공산당에 있어서는 꽤나 의미 있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쭌이는 마오에게 손쉬운 승리였다. 죽을 고생을 하는 중에 홍군 지도부 중 오토 브라운과 보구의 편을 들 자는 누구도 없었고 통신 단절로 코민테른 역시 개입할 수 없었으니 간단한 비판 연설 하나만으로도 이들을 탄핵하고 지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에) 언젠가는 코민테른에 상황 보고를 하게 될 오토 브라운이 참석한 상황에서 굳이 왕명, 리리싼 등을 거론하며 정치노선의 당부당을 논하는 것은 소련 및 코민테른 측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불필요한 액션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마오는 1935년 쭌이에서 가장 확실한 비판만을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945년 역사결의의 쭌이 재해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85년 이후 학자들이 고루 지적하듯이 1935년 문헌들에 비친 쭌이는 역사결의 속 쭌이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렇다면 마오가 사후적으로 권력 강화를 위해 쭌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지로 정풍운동은 마오의 권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지만) 오히려 1945년 역사결의는 마치 1935년의 마오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23 뒤늦게 쏟아내고 있는 듯한, 가령 쭌이보다 더 오래된 불만을 토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쭌이회의의 재구성:
(2) 오트 브라운의 쭌이-1960년대의 회고
마지막으로 오토 브라운의 1960년대 회고가 앞서 제시한 설명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1960년대까지 그 정체조차 숨겨져 있던 오토 브라운은 마오에 대한 원한이 심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회고에서 그런 감정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이 쭌이를 기억하기로 한 방식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가한다. 독일 출신으로 어린 나이부터 세계혁명의 대의에 참여한 오토 브라운의 입장에서 쭌이는 정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토 브라운의 회고는 1935년에 이미 중국공산당 내 독자적 정치의식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홍군을 지휘했던, 회의 내내 담배만 태우며 침묵하였다고 전해지는 오토 브라운의 입장에서 대장정 시기 정치적으로 고립된 중국공산당 내부의 풍경은 낯설고 과연 “이상(peculiar)”한 것이었을 것이다. 브라운은 쭌이가 두 가지 측면에서 비정상적이었다고 회고하는데, 첫째는 마오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다수결주의가 도입됐다는 것이고 둘째는 쭌이회의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24 자본주의 세계의 모순, 국제적 상황 및 대소련관계’ 등 “혁명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오직 군사적인 주제만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상한 점은 마치 미리 짜놓은 것처럼 긴히 결의를
요하는 혁명의 기본 문제들, 가령,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세계의 기본적 모순,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국제 정세나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관계,
심지어는 국민당 점령 지역들에서의 공산당 투쟁조차도 논해지지
않았다. 항일 투쟁의 미래, 당과 혁명정부의 구호마저도
무시되었다. 의제로 유일하게 허락된 문제는 장개석의 제 5차
초공 작전에 대한 투쟁과 대장정의 첫 번째 단계였다. 그 회의의
구성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주제 선정은 마오의 반동적 기획에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전반적인 노선을
공격하지 않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굴었다. 대신 그는 간략하게
노선이 옳았다고 선언하고 “부분적 우경 기회주의 오류”를
언급했을 뿐이다. 그는 나중에 똑같은 “오류들”을 “제 3차
좌경오류”라고 비난했다. 그의 주된 비판은 중앙 홍군의 전략
전술, 즉 군사적 문제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25
나가며
쭌이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쭌이회의는 단순히 당내 노선 투쟁으로 보기보다는 당대의 국제정치적 상황, 특히 코민테른-중국공산당 관계와 관련하여 고찰되었을 때 더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태생적으로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속적인 지시와 간섭, 친소·유소파의 호가호위가 불가피한 가운데 이와 관련된 중국혁명가들의 불만이 축적되고 있었고 대장정은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간 통신을 단절시킴으로써 중국혁명가들로 하여금 창당 이래 처음으로 온전히 독립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하였다.
둘째, 이런 국제정치적인 접근은 1945년 역사결의의 설명과 1935년 쭌이문헌에 드러난 현장의 언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1935년에는 오류가 아니었던 것이 어째서 1945년이 오류이게 되었는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아직 중국공산당의 역량이 코민테른 및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정치적으로 독립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1935년의 조건 속에서 코민테른 고문 오토 브라운과 유소파 보구 등에 대해 마오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더욱이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고 대장정 혁명가들 간 암묵적 동의가 형성된 상황에서 이들(오토 브라운 및 보구)의 여러 오류 중 가장 명백한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만 지적해도 이들을 26 정치적으로 탄핵하는 데 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십 년이 지나 역사결의를 통해 쭌이 이전의 좌경노선의 정치적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였는데 이로부터 1935년 쭌이에서는 비록 ‘군사’에 대한 비판만 있었을지언정 그들의 정치적인 불만이 군사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60년대까지도 마오의 결정에 대한 반대 견해를 견지하여 온 오토 브라운의 쭌이에 관한 회고는 이러한 국제정치적 배경의 실재성에 설득력을 더한다.
27 참고문헌 1. 1차 문헌 (1) 1935년 쭌이문헌
Ch'En, Jerome. "Resolutions of the Tsunyi Conference." The China
Quarterly 40 (1969): 1-38.
Resolutions of the Tsunyi Conference (Translated in 1969 with a
Commentary by Jerome Chen)
The Outline Resolution of the Enlarged Politburo Conference on
Summing up Experiences and Lessons in Smashing the Fifth
“Encirclement” Campaign (The Secretariat of the Central
Committee, 8 February 1935) (Translated in 1986 by Benjamin
Yang)
Notes for Communicating the Enlarged Politburo Conference at
Zunyi (By Chen Yun, February-March 1935) (Translated in
1986 by Benjamin Yang)
(2) 역사결의 1945년 역사결의 (关于若干历史问题的决议)
(https://www.12371.cn/2021/11/09/ARTI163645573220114 28 9.shtml)
1981년 역사결의 (Resolution on Certain Questions in the History
of Our Party since the Foundin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resolution
-certain-questions-hist ory-our-party-founding-peoples-
republic-china)
2021년 역사결의 (Resolution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On the Major Achievements and
Historical Experience of the Party Over the Past Century)
(https://yizhiyoudao.kuaizhan.com/85/75/p85870037710de9) (3) 오토 브라운 회고록
Braun, Otto. A Comintern Agent in China 1932–1939.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Jeanne Moor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2.
2. 2차 문헌
이시카와 요시히로. 손승회 옮김, 『중국근현대사. 3,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삼천리, 2013.
보걸, 에즈라. 김규태 옮김, 『중국과 일본』 까치, 2019.
向靑. 임상범 옮김, 『코민테른과 中國革命關係史』고려원, 1992.
29 이시카와 요시히로, 강진아 옮김,『중국공산당, 그 100년』
투비북스, 2024.
조영남. "중국공산당의 세 개의 ‘역사 결의’비교
분석." 중국사회과학논총 4.1 (2022): 4-30.
Ch'En, Jerome. "Resolutions of the Tsunyi Conference." The China
Quarterly 40 (1969): 1-38.
———"Reflections on the Long March." The China Quarterly 111
(1987): 450-465.
Kampen, Thomas. "The Zunyi Conference and Further Steps in
Mao's Rise to Power." The China Quarterly 117 (1989): 118-
134.
———"Wang Jiaxiang, Mao Zedong and the ‘Triumph of Mao
Zedong-Thought’(1935–1945)." Modern Asian Studies 23.4
(1989): 705-727.
———Mao Zedong, Zhou Enlai and the evolu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leadership. NIAS Press, 2000.
Kocho-Williams, Alstair. Russian and Soviet Diplomacy, 1900-39.
Palgrave Macmillan, 2012.
Litten, Frederick S. "Otto Braun's Curriculum Vitae—Translation
and Commentary." Twentieth-Century China 23.1 (1997):
31-61.
———“The Myth of the "Turning-Point" ‒ Towards a New 30 Understanding of the Long March”; in: Bochumer Jahrbuch
zur Ostasienforschung, Band 25, 2001, S. 3-44
Saich, Tony. "Writing or rewriting history? The construction of the
Maoist resolution on party history." New Perspectives on the
Chinese Revolution. Routledge, 2015. 299-338.
———"Where Does Correct Party History Come From? The
Construction of a Maoist Party History." Critical Readings on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4 Vols. Set). Brill, 2017. 101-
141.
———From rebel to ruler: One hundred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Harvard University Press, 2021.
Saich, Tony, and Benjamin Yang. The rise to power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ocuments and analysis. Routledge, 2016. Shen, Zhihua. A Short History of Sino-Soviet Relations, 1917-
1991. Palgrave Macmillan, 2020.
Yang, Benjamin. "The Zunyi Conference as one step in Mao's rise
to power: a survey of historical studie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e China Quarterly 106 (1986): 235-271. ———From Revolution to Politics: Chinese Communists on the
Long March. Routledge, 2021.
Mao, Zedong, and Stuart Schram. Mao's Road to Power:
Revolutionary Writings, 1912-49: v. 5: Toward the Second
31 United Front, January 1935-July 1937: Revolutionary
Writings, 1912-49. Routledge, 2017.
Schram, Stuart Reynolds. The thought of Mao Tse-tu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