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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 - 이홍장의 조선 속방론(屬邦論)과 입약권도책 일청강화기념관

동아시아에서 빚은 미래의 세계정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4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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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혜 · 서울대학교

1. 이홍장의 조선 속방론과 입약권도책

19 세기 말, 조선이 ‘만국공법’의 질서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청의 속방(屬邦)으로서 가지는 지위가 문제시되었다.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삼은 것은 일본이었지만, 일본이 이것을 문제삼을 수 있었던 근거는 조선이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데에 있었다. 청을 법적 대리인으로 세우지 않고 조선이 스스로 조약 체결의 주체가 된 이상,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가 청의 ‘속국’이 아님을 다툴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일본의 도발에 대해, 청은 일관되게 그리고 강력하게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1894 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은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상당수의 군사를 맞파병한 후 조선이 청의 속방인지의 여부를 문제시하며 철군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대가 한성을 에워싸고 “조선이 중국이 보호하는 속방인지 여부를 힐난하며 … 만약 속방을 인정하면 곧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1 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을 핍박하여 중국의 속방을 인정하지 않게 함은 단연코 따라서는 안 된다”2고 지시했다. 조선이 청의 속방인지를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은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배하여 조선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까지 지속되었다.3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이 각국과 통상하도록 설득하고 지도한 것도 이홍장이었고, 청이 대리하지 않고 조선을 직접 통상의 1 광서 20 년(1894) 5 월 26 일: 원세개가 급전을 보내 아뢰기를, “일본이 3,000 여 명을 추가 파병했고, 추가 파병해 상륙시킨 1,000 명이 한성으로 왔습니다. 오오토리는 조선이 중국이 보호하는 속방인지 여부를 힐난하며 며칠 내에 답변하도록 해서 만약 속방을 인정하면 곧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G20-05-165 [『이홍장전집』, 225 쪽].

2 광서 20 년(1894) 5 월 26 일: 저(이홍장)는 답하기를, "전보가 이틀 동안 통하지 않다가 홀연히 급전을 받았는데, 일본의 추가 파병이 확실하지 않다. 조선을 핍박하여 중국의 속방을 인정하지 않게 함은 단연코 따라서는 안 된다. 러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논의가 현재 긴박하니 대략 인내하면 반드시 변통하여 처리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간절하게 조선에 부탁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습니다. G20-05-166 [『이홍장전집』, 226 쪽]

3 청과 일본의 전쟁을 종결짓는 1895 년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 1 조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규정했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 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량치차오, 2013, 207 쪽).”

330 주체로서 세우기로 결정한 것도 이홍장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고자 했던 이홍장이 바로 조선이 청의 속방인지의 여부를 다툴 여지를 만든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이홍장이 조선 속방론을 주장하고 그에 입각하여 행동했다는 사실과 그가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통상하는 주체가 되게끔 인도했다는 사실은 당대인들에게도 모순적인 행보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1 년, 양계초는 이홍장에 대한 평전을 쓰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원칙대로라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기 때문에,

조선의 외교는 중국이 주관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역시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는 사실이다(량치차오, 2013,

160쪽).

처음에 그는 국제법을 이해하지 못해, 조선이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잘못 권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책임이다. 일단 조약이 체결되었으면

조선의 자주독립을 묵인했어야 하는데, 군대를 파견해

조선의 내란에 간섭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책임이다(량치차오, 2013, 183쪽). 331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여기서 양계초는 국제법 상의 ‘속국’ 개념에 의거하여 조선과 청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청과 조선이 전통적으로 맺어온 관계를 국제법에 의거해서 판단해볼 경우 조선은 명백하게 청의 ‘속국’이다. 그런데 이홍장은 이러한 국제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에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권함으로써 조선이 ‘독립국’이 되게끔 인도하는 동시에 조선의 내란에 간섭함으로써 조선을 ‘속국’ 취급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고, 이는 결국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요컨대, 양계초는 이홍장이 조선 속방론을 견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각국과의 통상을 지도했던 까닭을 이홍장의 국제법에 대한 무지에서 찾았다.

사진사진

좌: 이홍장, 우: 양계초

332 그러나 이홍장이 19 세기 후반 조선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속방’과 ‘속국’을 충분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양계초의 이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홍장은 조선이 통상조약을 맺는 국가들에게 종래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주지시킴에 있어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강조했을 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주장한 바 없다. 또한 1880 년대 들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논의하기 시작한 이래로 1895 년 청일전쟁이 종결되던 시점까지 이홍장은 공식적인 문서에서 조선을 ‘속방’ 혹은 ‘속토(屬土)’라고 지칭했을 뿐 ‘속국’이라는 단어로 직접 지시한 바 없다. 실로 청이 조선의 군주로 하여금 타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상대국의 정부나 의회에 따로 조회를 보내 알리게 한 것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속방’이라는 사실이었다.4

4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시하는 것은 이홍장이 조선을 대신하여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와 조약의 초안을 작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주요하게 조정 대상이 되었던 일이다. 이홍장은 조약의 제 1 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문제는 종래 모두 자주할 수 있었다(『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3』, 234 쪽)”는 내용을 포함시키고자 했지만, 슈펠트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그 타협점으로써 해당 내용을 조약에 포함시키지 않고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별도로 조회문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조선국이 미국에 보냈던 조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치와 외교는 예전부터 모두 대조선국 군주가 자주해왔습니다. 현재 대조선국과 대미국이 피차 조약을 체결함에 모두 동등하게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대조선국 군주는 조약 내 각 조항을 반드시 자주공례에 따라서 성실하게 그대로 시행할 것임을 밝힙니다. 대조선국이 중국의 333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당대에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자는 주장들이 청 조정에 빗발쳤던 정황을 고려하면,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닌 ‘속방’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홍장의 의식적인 선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주일청국공사 여서창은 “조선 국왕을 폐하고 군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고, 한림원 시독 장패륜은 “조선을 정복하고 조선통상대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다스리게 할 것을 상주하기도 하였다(유바다, 2016, 184 쪽).” 하여장이 총리아문에 올렸던 「主持朝鮮外交論」에서도 이처럼 조선을 확실하게 청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이 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의 형세도 날로

급박해집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오늘날 형세를

논하자면, 몽고나 서장의 예처럼 조선에

주차변사대신을 두고 모든 국내의 정치 및 외국과의

조약을 모두 중국이 주지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책입니다.(『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3』, 99쪽)

속방이라고 하였지만, 그 직분 내에서 응당 시행해야 할 모든 사항은 모두 대미국과 조금도 관련이 없습니다(『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4』, 74-75 쪽).”

334 청이 조선의 외교를 주재하는 방식에 대해 하여장은 명시적으로 조선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상책으로 보고 있다. 이홍장처럼 조선의 대신들에게 은밀하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비공식적으로 조선의 외교를 지도하는 방식은 하여장이 보기에 상책을 시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구할 만한 중책이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처럼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자는 입장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되게 반대 의견을 표하며 조선이 타국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권유하고 그 과정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되 조약 체결을 대리하지는 않는 자신의 방침을 견지하고자 했다. 그는 조선 속국론에 반대하는 이유를 여러 문건에 걸쳐 몇 가지 제시한 바 있는데, 한 가지는 조선을 ‘속국’으로 삼는 것은 청에게 상당한 비용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장패륜의 건의를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는 문건에서 이홍장은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의 외교를 대리하도록 할 경우, “이후 각국과 조선의 교섭 사건에 대해 반드시 오로지 중국에만 책임을 물을 것이니, 아마도 조정과 총리아문이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4』, 285 쪽)”다고 우려한 바 있다. 또한 청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성공적으로 간여할 만큼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내정 간섭을 시도했다가 일이 틀어질 경우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종래의 335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관례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한 바 있다.5 이처럼 이홍장은 외교를 대리하는 일과 내정에 간여하는 일에 대해 비용의 문제와 능력 부족의 문제를 이유로 들어 명백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던 것이다.6

5 “다만 조선의 국내 정치에 대해 중국은 지금껏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은근히 그 권력을 통제하게 되더라도 풍토가 서로 다르고 인재가 미약하여 여러 조치의 성패가 반드시 우리 뜻처럼 다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조선이 앞에서는 받들고 뒤에서는 거스르거나 혹은 남의 선동을 받아 사이가 벌어진다면, 조정은 또한 장차 어떻게 이것을 처리하겠습니까? 이것이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입니다. 제가 거듭 반복하여 생각해보았으나 감히 황급하게 이 방법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군기대신이 총리아문과 함께 전반적으로 논의하여 결론을 내린 다음에 답변 상주를 올리도록 지시해주실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4』, 286 쪽).”

6 내가 언급한 이 동일한 사료에 대한 해석을 개진하며 유바다는 이홍장이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통상을 주관하고 조선 정부의 내정에 간여한다면 청이 조선을 “태서 속국과 같이 삼을 수 있다(與泰西屬國之例相符)”고 주장했음에 대해 “이렇게 되면 조선은 국제법에 따른 청의 속국이 되는 것이며 그 국제법적 지위는 반주지국이 된다”라고 해설했다(유바다, 2019, 181 쪽). 그러나 “與泰西屬國之例相符”는 “태서 속국과 같이 삼을 수 있다”고 번역하는 것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번역처럼 “서양 속국의 사례와도 들어맞습니다”로 옮기는 것이 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보인다. 또한 유바다가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각주 5 의 문장임을 고려할 때, 해당 문단 속에서 이 문장의 의미를 이홍장이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통상을 주관하고 조선 정부의 내정에 간여’함으로써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문맥을 고려하면 여기에서 이홍장은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통상을 주관하고 조선 정부의 내정에 간여’하는 일이 서양의 속국의 예에 부합하는 것이며 그 취지는 좋다고 보지만, 그것이 결국 청의 내정간섭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여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 즉, 이 문건에서 이홍장이 청이 조선을 “속국과 같이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유바다의 해석과 달리, 이홍장은 이

336 이홍장은 조선의 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주선해나감에 있어서 조선을 청의 ‘속국’과 같이 취급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 대리하기를 선택하지 않고 종래의 ‘속방’을 대하는 전례에 의거해서 간접적으로 권유하고 지도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자주(自主)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처신하고자 했다. 이는 청이 당시의 시점까지 간접 지배를 했던 신장, 내몽고 등의 지역을 적극적으로 직할해나감으로써 청의 확실한 ‘속국’으로 위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들에 비추어볼 때, 그 차별성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실로 1870 년대 국방 예산의 향방을 두고 이홍장과 대립하던 좌종당은 신장 지역을 수복하고 그에 대한 청의 직접 지배를 수립해 내는 데에 공헌한 바 있다. “몽고나 서장의 예처럼 조선에 주차변사대신을 두고 모든 국내의 정치 및 외국과의 조약을 모두 중국이 주지”하는 것이 조선에 대해서도 상책이라는 하여장의 주장은 청의 서북부 지역에 취한 공세적 정책들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처럼 이홍장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속방’으로 남기려고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테기 토시오(茂木敏夫, 1987)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서구 국가에 대한 개국에 대해 이홍장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틀”을 존중하며 조선을 대하려 했다. 그는 이처럼 전통적인 속방 자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하여장이 제기한 식민지적 지배에 비해 훨씬 문건을 통해 도리어 서양 속국의 사례처럼 조선을 대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피력했던 s 것이다.

337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지만,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식민지적 지배를 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외국과의 문제를 모두 떠맡아야 했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이 당시 청에게 없었다고 지적한다. 앞서 이홍장이 장패륜의 주장에 반박했던 논리에 비추어보면, 19 세기 후반 청의 입장에 대한 모테기 토시오의 이해는 당시 이홍장의 판단과 공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보건대, 이홍장이 조선을 각국과의 조약 체결의 주체로 세우는 동시에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확실히 하고자 한 일은 양계초의 이해처럼 그가 국제법을 몰라서 저지른 모순이 아니라 그것을 잘 알고 발생시킨 의도된 모순이다. 종래의 청에 대한 조선의 지위가 국제법상의 ‘속국’에 해당한다고 단언해버린 양계초와는 달리, 이홍장은 종래의 ‘속방’ 지위와 국제법적 ‘속국’ 지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세밀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활용해나갔던 것이다. 이홍장은 청 조정을 설득하는 동시에 조선을 대상으로도 이처럼 일견 모순되는 행보를 취하는 것의 장점을 열심히 설득시키고자 했다. 일례로 그는 김윤식과 직접 만나는 자리에서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국공법의 보호와 각국의 세력균형을 이용하는 동시에 청의 속방으로 남음으로써 종래와 같은 청의 보호를 받는 것이 조선에게 이득이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3』, 267-276 쪽). “청과의 자주적 속방 관계를 유지하면서 태서 각국과 만국공법에 따라 조약을 체결할 것을 권고(하영선, 2019, 49 쪽)”하는 김윤식의 양득체제론의

338 배경에는 이처럼 조선 입약권도책과 조선 속방론을 동시에 추진했던 이홍장의 ‘의도된 모순’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홍장은 당시 어떤 고려와 판단에 의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행보-조선 입약권도책과 조선 속방론-를 의도적으로 추진했던 것일까. 본고에서 나는 이홍장의 ‘의도된 모순’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시도로서 그가 조선을 중국의 ‘울타리,’ 즉 ‘번리(藩籬)’로 여겼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1880- 90 년대에 걸쳐 그가 조선에 대해 내렸던 일련의 결정들은 청의 동쪽 울타리를 지켜냄으로써 청의 전통적 안보체제로서의 ‘번리체제’를 견고히 하려고 했던 그의 고민과 노력을 함께 고려할 때 보다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이홍장이 조선의 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지도한 일은 ‘번리체제’를 운영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그 의미가 재조명될 수 있는데, 나는 이를 번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으로 지칭하고 그 구체적 양상을 탐구해 보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 속방론과 입약 권도책이라는 일견 상호 모순적인 이홍장의 행보들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맥락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는 시론적 논의를 본고에서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번리체제와 대륙형 제국의 안보 패러다임

339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이홍장: 다만 조선이 능히 다른 나라와 접촉하고

외교를 하여 스스로 울타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면 곧

천진, 길림, 산동, 직예가 모두 울타리의 보호라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880년 11월 22일]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3』, 111-112쪽)

여서창: 올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온)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해 깜짝 놀라 탄복하면서, 자못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걸치려는 의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마땅히 시급하게 사신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조선을 위한 조약 체결 등의 사무를

처리해주어야 할 듯합니다. 또 반드시 부산, 원산진

등지에서 항구 한 곳을 찾아 군함을 정박시키는 곳으로

삼는다면, 다른 나라의 교활한 음모를 가라앉힐 수

있으니, 이 일은 동쪽에 울타리를 치는 가장 중요한

조치가 될 것입니다. [1882년 모월 모일]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4』, 306쪽)

이홍장과 여서창은 조선이 각국과 통상하도록 청이 지도해야 하는 이유를 중국의 동쪽에 ‘울타리’를 치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서 찾고 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청의 동쪽 ‘울타리’이며, 이 울타리를 보호하는 것이 곧 청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중국과 귀국은 한집안이나 같으며 우리나라의

340 동삼성(東三省)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니 … 귀국의 근심이 곧 중국의 근심”7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들의 인식에 따르면 동쪽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는 일은 청의 안보 문제와 직결되기에 중요하다. 청이 조선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동쪽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안위는 청의 안보라는 맥락 속에서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이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은 바로 이 동쪽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치는 구체적인 하나의 방법으로서 거론되고 있다. 실로 여서창은 조선의 외교 사무를 지도하는 일을 조선에의 군함 파견이라는 또 다른 울타리 보호 정책과 병치하고 있다. 이홍장도 조선이 청의 지도를 받아 능히 다른 나라와 외교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청의 동쪽 울타리가 강고해지는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울타리를 튼튼하게 유지함으로써 청의 안보를 구축한다는 이해는 이홍장이나 여서창 등 특정 고위 대신들의 특수한 의견이기보다 청의 정치엘리트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했던 것이다. 일례로 1881 년 청이 베트남을 보호할 필요성을 논하며 류장우는 다음과 같이 울타리의 안보적 중요성을 정식화한 바 있다. “邊省이라는 것은 중국의 문호이고 外藩이라는 것은 중국의 藩籬입니다. 藩籬가 무너지면 문호가 위험에 빠지고 문호가 7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보낸 편지, 『고종실록』 16 권, 고종 16 년 7 월 9 일 신사 1 번째기사

341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위험하면 堂室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8 또한 청이 주변 소국을 ‘울타리’로 삼는 것이 비단 조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청은 베트남도 청의 ‘울타리’로 여겼으며, 그 울타리의 안위가 프랑스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에서 군대를 파병해서 베트남을 보호하고자 했다. 청이 조선을 보호해야 하는 필요성은 동쪽의 울타리를 방비하는 맥락에서 논의되었다면, 베트남의 통킹 지역이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청이 군대를 파병해서 베트남을 보호해야 하는 필요성은 남쪽의 울타리를 방비하는 맥락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9

이처럼 청은 주변의 울타리들을 방비하기 위해 해당 소국에 군대를 파병하거나 외교를 주선하고자 했다. 청이 조선과 베트남과 같은 소국에 대해 ‘보호’를 자청했던 한 가지 주요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청의 안보적 고려에서 연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이 울타리를 방비하지 못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청에게 어떠한 안보 위협을 제기했던 것일까? 한 가지 단서는 베트남과 조선의 지리적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1882 년 장수성은 베트남이 중국의 버퍼존(buffer zone)이 되는 지리적 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베트남 통칭 각성과 운남과 양광 지역은 서로 맞닿아 8 『淸史稿』 卷 527 「屬國」「越南」; 홍성화(2019, 476 쪽)에서 재인용.

9 장수성: 베트남의 국력은 매우 약하니 만약 프랑스인들의 뜻이 (베트남의) 병탄에 있다면 이 나라는 스스로 보전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번속의 의의를 논한다면, 중국은 즉각 파병하여 구원하여야 하는데, … [1882 년 3 월] (『淸光緖實錄』 卷 144 「光緖 8 年 3 月 辛亥」; 홍성화(2019, 480 쪽)에서 재인용)

342 있으므로 만약 프랑스가 통킹 지역(‘北圻’)을 점령한다면, 국경의 울타리가 모두 철거 된 뒤이니 후환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10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청의 입장에서 베트남이라는 국가 전체의 안위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의 북부의 통킹 지역의 안위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청의 국경과 접한 지역의 영토가 청의 잠재적 적국에 의해 점령되거나 그 간접적인 관할권 하에 종속되는 상황이 청에게 안보 위협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하여장: 지금 러시아의 해군제독 레소프스키가

군함 10여 척을 거느리고 훈춘 부근에 정박하고

있는데, 날이 추워지고 얼음이 얼면 반드시 남하할

것입니다. 만약 불행하게도 조선을 침범하여 차지하는

등 해악을 끼치려 한다면 조선은 반드시 땅을 나누어

주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침대 옆에 남이

누워서 코를 골며 자도록 놔두어서는 후환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만약 다행스럽게 이러한 일이

없더라도,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조선 백성의 힘을 빌려

개척하고 조선의 쌀을 옮겨 나르고자 할 것이며, 이러한

뜻을 품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 무릇

아시아의 여러 소국은 쇠미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10 『淸光緖實錄』 卷 144 「光緖 8 年 3 月 辛亥」; 홍성화(2019, 480 쪽)에서 재인용.

343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월남은 이미 프랑스와 땅을 나누었고, 버마는 다시

영국의 통제를 받습니다. 천행으로 조선은 간신히

영토를 보전하고 있으나, 구습을 굳게 지키고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면서 여러 차례 권해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1880년 10월 16일]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3』, 101쪽)

하여장의 논의는 청이 ‘울타리’로서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청의 속국인 조선, 베트남 등의 정치체가 아니라 청이 상상하는 스스로의 외연과 맞닿아 있는 지역의 ‘영토’였다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1880 년대 이래 청이 이전과는 달리 조선의 ‘영토’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청이 전통적 제국에서 근대적 제국으로 자신을 변모시켜 가는 양상, 그리하여 자주적 속방이었던 조선을 종속적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의도와 관련되어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위 사료에서 보듯이, 청이 주변 소국들의 영토에 관심을 가졌던 까닭은 바로 해당 영토가 타국의 직접적인 관할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청의 ‘울타리’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청이 소국들의 영토가 타국의 관할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자 했던 까닭은 해당 영토를 청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야심의 발로가 아니라 해당 영토를 청의 울타리로 존속시키기 위한 안보적 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344 속방의 영토에 대한 청의 이러한 인식은 베트남에 대한 이홍장의 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불전쟁 발발 직전인 1883 년, 이홍장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써 베트남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 사신 트리코(Tricou)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트남의 “모든 땅은 중국의 屬土이나 본래부터 그 영토로 이익을 볼 생각은 없다. … 오늘날 의논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이 베트남을 보호하는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내 토지는 여전히 베트남이 소유한다. 다만 (베트남 경내에서) 土匪가 소요를 일으킨다면, 중국은 파병을 해서 소탕할 수 있게 한다.” 11 이러한 점에서 조공책봉체제에서 속방의 자주성은 제국이 ‘허용’해주었다고 보기보다 제국의 안보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사안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속방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하지 못해서 영토 내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거나 타국에 영토를 빼앗기는 상황은 해당 영토를 자신의 울타리로 삼고 있던 제국의 입장에서 안보 체제에 비상불이 들어온 상황인 동시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안보 비용을 증대시켜야 하는 문제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선이나 베트남과 같은 속방들의 안위가 중요한 맥락은 어디까지나 그 속방들이 해당 ‘영토’를 직접 지키고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의 주체라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속방들이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청의 울타리가 되는 11 [1883 년 8 월 25 일] 『李鴻章全集』, 권 33, 273 쪽; 홍성화(2019, 484 쪽)에서 재인용.

345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영토를 타국에 넘기거나(“조선은 반드시 땅을 나누어 주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월남은 이미 프랑스와 땅을 나누었고”) 영토에 대한 관할권을 상당 부분 포기하는 상황(“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조선 백성의 힘을 빌려 개척하고 조선의 쌀을 옮겨 나르고자 할 것이며,” “버마는 영국의 통제를 받습니다.”)에서는 속방의 보전이나 안위 그 자체는 더 이상 청의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청은 자신의 울타리인 영토를 지키기 위해 속국의 멸망을 방관하거나 주도하기도 한다. 실로 청과 같은 조공책봉체제를 운영했던 명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울타리가 되는 영토를 지키고자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에게 조선 이남을 할양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타협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류성룡을 위시한 조선의 정치 엘리트 다수는 이 전쟁이 ‘번리지전(藩籬之戰), ’즉 울타리 전쟁이며 명의 목표가 조선이라는 정치체의 존속이 아니라 조선의 북쪽 지역을 명의 울타리로 삼는 데에 있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송복, 2014).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청이 울타리로 삼는 ‘영토’는 청과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일례로 류큐의 경우,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청의 ‘속방’이라는 명칭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일본이 류큐 병합에 나섰을 때 청은 고심 끝에 류큐를 포기하는 결정을 하는 데에 이르렀다. 류큐 또한 오랜 기간 청의 조공국이었지만 청이 안보의 관점에서 수선하고 지켜내야 할 ‘울타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로 일본이 류큐를 병탄하려는 사태에

346 대해 여서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류큐의 존망은 중국의 득실에 그리 큰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줄어드는 것은 중국의 체면일 뿐입니다(『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4』, 306 쪽).” 여서창의 의견이 당시 청의 정치 엘리트들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지에 대해서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여서창의 이러한 발언은 조선에 대해서는 조선을 직접 다스리자는 주장이 있었을지언정 조선을 버리자는 직접적인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던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이로써 보건대, 류큐에 대한 청의 종주권 주장이야말로 안보적 고려가 크게 매개되지 않은 상징적 차원의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은 류큐가 일본에 장악되는 상황을 위협으로 인지했지만 해당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이나 조선에 대해서처럼 많은 자원을 쏟지 않았다.12 조선이나 베트남과 달리, 류큐는 청의 실질적인 ‘울타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청의 12 그런 의미에서 후마 스스무(2019)가 류큐에 대한 청의 종주권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청의 조공-책봉 체제의 허구성을 비판한 것은 재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류큐가 오랜 기간 청과 일본과 동시에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 왔으며 청은 이를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근거해서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 질서라는 것의 허구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청과 같은 대륙형 제국의 ‘울타리 ’안보 체제를 고려하면, 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류큐는 해당 안보 체제 내에서 원래부터 그 안보적 중요성이 크지 않았던 존재였던 것이다. 비록 중국 주변의 소국들이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이름은 공유했더라도, 해당 소국들이 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중국의 ‘울타리’로 간주되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중국이 해당 소국들과 맺는 관계의 양상은 달랐던 것이다.

347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입장에서는 안보 위기가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버릴 수 있는 카드였던 것이다. 이처럼 청이 류큐에 대한 관할권을 버리는 결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청이 스스로를 상상함에 있어 정치체의 외연이 육지를 통해서만 연장될 수 있다고 여겼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외연이 바다를 통해 확장될 수 있다고 상상했던 영국을 위시한 해상 제국들의 상상과는 상이하다. 이를 고려하면 청이 운영하고자 했던 울타리 체제는 어디까지나 대륙형 제국-즉 육지를 통해서만 자신을 확장하는 제국-의 안보 패러다임이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홍장의 주도로 청이 조선과 각국의 통상을 지도했던 일은 청이 이러한 울타리 체제 속에서 동쪽 울타리를 보수하고자 했던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348

사진

청의 행정구역 지도

이제 이처럼 ‘번리’를 지키려는 안보적 고려를 맥락으로 삼아, 이홍장의 조선 속방론과 입약 권도책을 사료를 통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이홍장: 조선이 전에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때,

중국은 곁에서 완곡히 권유한 데 지나지 않아, 결코 349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관원을 파견하여 주지하지 않았습니다. 조약문에서도

또한 “중국정부의 명을 받든다”라는 문구가 없습니다.

지금 조선이 서양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드시

중국정부의 명을 받들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조선은

기꺼이 따르겠지만 서양 국가가 반드시 기꺼이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 하여장은 조선이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 결하고 다른 나라들이 모두 그

자주를 인정하면 중국의 속방이라는 명분이 돌연

제거될 것이라 우려하는데, 본디 견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선이 능히 다른 나라와 접 촉하고

외교를 하여 스스로 울타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면 곧

천진, 길림, 산동, 직예가 모두 울타리의 보호라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선이 우리에게 공손히

대해온 예절을 보건대, 서양 국가와의 조약 체결 때문에

조선의 태도가 즉시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

중국이 내정을 정비하고 외적을 몰아내며, 군대를

조련하고 해안을 방어하여 나날이 자강을 도모하면

조선이 비록 약소하다고 (중국을) 감히 무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구 대국 또한 (중국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자강의

대책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끝내 자립을 할 수 없을까

우려되는데, 이 또한 어찌 속방이 우리말을 따르는지의

여부와 상관이 있겠습니까? 재삼 헤아려보면

총리아문의 지시처럼 단지 은밀하게 도우며 보호하는

것만 가능할 듯합니다. [1880년 11월 22일] (『국역

청계 중일한관계사료 3』, 111-112쪽)

350 위의 사료에서 이홍장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명분’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의 자립을 통해 청의 울타리를 보호하는 이익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자강 노력 그 자체이다. 두 가지 모두 청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이홍장이 보기에, 하여장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명분을 중시하는 까닭은 “속방이 우리말을 따르는지의 여부,” 즉 중국의 권위와 체면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이홍장은 속방에 대한 중국의 권위와 체면은 중국의 자강과 자립 문제, 즉 안보의 문제와 상관이 없다고 본다. 이홍장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의 안보이고, 중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튼튼하게 만 드는 일이고, 이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명분’은 포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또한 사료를 통해 보건대, 이홍장은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게 하는 것을 조선의 자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는 청의 안보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여장은 조선에 청의 관리를 직접 파견하거나 혹은 최소한 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자고 제안했다. 그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조약을 맺게 하면, 여러 국가들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식하고 청의 속방으로 인식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즉 속방이라는 명분이 사라 지게 될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두 가지 조치가 모두 조선이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게 만드는 일에 351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방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그에 반대했다. 대신에 그는 조선의 주요 대신에게 편지를 보내 외교를 권하고 지도함으로써 “단지 은밀하게 도우며 보호하는” 방식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여장: 서양의 통례를 살펴보면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다른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 을 지키고

한 쪽을 도울 수 없지만 속국만은 예외입니다. 지금

조선을 러시아가 삼키려 하는 위급함에서 구하려면,

부득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서로 버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이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게

하면 다른 나라들은 모두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식하여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름은 홀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다급한 일을 구하자고 근심을

뒷날까지 남기게 되니, 역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80년 10월 16일]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3』, 100쪽)

그러나 하여장이 실제 구사했던 논리는 이홍장이 이해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여장이 조선에 청 관리를 파견하거나 적어도 조약에 관련 문구를 써넣음으로써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까닭은 각국과의 통상을 통한 조선의 자립이라는 청의 안보 정책이 가지는 딜레마에서 연유했다. 하여장이 보기에, 러시아의 조선 침략 혹은 서북 변경 소요라는 다급한 사태를

352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타국들의 이해관계를 끌어들여 세력균형의 형세를 만드는 일은 청의 단기적 안보 정책에 해당한다. 그리고 막상 조선에서 진짜로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청이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일은 청의 장기적 안보 정책에 해당한다. 문제는 단기적 안보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게 만들면 향후 청이 장기적 안보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기존에 동아시아 각국 간의 관계에서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은 도덕적 정벌론의 논리로 정당화되었지만, 서양 각국 간의 관계에서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은 만국공법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장은 향후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비단 동아시아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각국도 그러한 파병을 문제시할 수 없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하여장도 이홍장과 같이 조선의 외교를 지도하는 문제를 청의 안보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고, 다만 그 안보 정책이 발생시킬 수 있는 장기적 문제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명분’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하여장에게도 조선이 청의 속방/속국인지의 이슈는 어디까지나 청의 안보를 구축하는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 었던 것이다.

이홍장은 1880 년 겨울의 시점에서 하여장의 이러한 논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이홍장은 하여장의 논리를 수용했는데, 1882 년 2 월 10 일 이홍장이 353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총리아문에 조미조약 초안에 대한 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슈펠트가 보내온 조미조약 초안에) 중국의 속방이라는 구절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저희 쪽에서 이 문제에 간여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각국이 이를 본받고 시간이 지나면 조선이 우리의 속토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후환은 더욱 커집니다. (만일 속방이라는 구절을 넣는다면) 만국공법에서는 무릇 자주할 수 없는 부용소국 은 다른 큰 나라들과 조약을 맺기도 불편하므로, 양쪽 다 문제가 있습니다(『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3』, 230 쪽).”

이후 청이 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국의 속방 문제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 이홍장은 이처럼 청이 속방에 파병할 수 있는 명분을 지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례로 청불전쟁 발발 직전인 1883 년, 이홍장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써 베트남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 사신 트리코(Tricou)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트남은 본래 우리의 속국이고 그 모든 땅은 중국의 屬土이나 본래부터 그 영토로 이익을 볼 생각은 없다. ... 오늘날 의논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이 베트남을 보호하는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내 토지는 여전히 베트남이 소유한다. 다만 (베트남 경내에서) 土匪가 소요를 일으킨다면, 중국은 파병을 해서 소탕할 수 있게 한다.”13 이홍장이 베트남이 청의 13 『李鴻章全集』, 권 33, 273 쪽; 홍성화(2019, 484 쪽)에서 재인용.

354 속국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베트남에 대한 청의 파병 권리를 지키는 데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서양 각국에 주지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이홍장은 줄곧 하여장과 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다만, 그것을 주지시키는 방식에 있어서는 하여장이 제안한 것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일례로 이홍장은 미국 대신 슈펠트가 조선이 청의 속국 이라는 문구를 조약에 포함시키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하자 각국에 속방 조회를 보내는 것으로 타협한 바 있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인해 사태가 급박해지기 이전까지 이홍장은 조선에 외교 사무를 지도할 청의 관리를 파견하는 문제에 있어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히려 통상 조약의 지도를 위해 청의 관리 파견을 누차 비밀리에 요청한 측은 조선의 왕실 측근 세력이었으며, 이홍장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마건충을 파견했을 때 마건충의 천진으로의 복귀를 늦추어달라고 요청했던 것도 조선 측이었다. 조선 측에서 통상 조약 체결을 도와줄 청의 관리를 파병해줄 것을 먼저 공식적으로 요청을 보내옴으로써 속방이 도움을 요청하면 청은 속방에게 도움을 베푼다는 종래의 전례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이홍장은 관리 파견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던 것이다. 정리하면, 이처럼 번리체제의 운용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홍장의 조선 속방론과 입약 권도책은 일관된 일련의 안보정책들로 이해될 수 있다.

355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3. 번리체제의 양무적 운용

번리체제가 이홍장의 고유한 발명품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규정해온 하나의 맥락이었다면, 당시 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권하는 이홍장의 제안에 대해 조선 내에서 저항이 거세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조선이 각국과 통상할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려 한 편지와 그에 대한 조선 내의 저항을 살펴보면, 이홍장의 조선 통상 지도가 어떤 점에서 전통적인 번리체제 운용의 프레임 내에 있으면서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홍장: 귀국에서도 어떻게 진실로 방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이 겁을 내고 있는 것이

서양입니다.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을 제압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서양과 통상하면서 일본을 견제한다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서양의 일반

관례로는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대체로 각 나라들이 서로 통상을 하면 그 사이에

공법(公法)이 자연히 실행되게 됩니다. 작년에 터키가

러시아의 침범을 당하여 사태가 매우 위험하였을 때에

영국, 이탈리아와 같은 여러 나라에서 나서서

쟁론(爭論)하자 비로소 러시아는 군사를 거느리고

356 물러났습니다. 저번에 터키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면 러시아인들이 벌써 제

욕심을 채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구라파의 벨기에와

덴마크도 다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자체로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자 함부로 침략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하면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남의 나라를

뛰어넘어서 먼 곳을 치려 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려운

일로 여겼습니다. 서양의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은 귀국과 수만리 떨어져 있고 본래 다른

요구가 없으며 그 목적은 통상을 하자는 것뿐이고

귀국의 경내를 지나다니는 배들을 보호하자는

것뿐입니다. …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관계를 가진다면 비단 일본만 견제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 아울러 막아낼 수

있습니다. 러시아도 반드시 뒤따라서 강화를 하고

통상을 할 것입니다. [1879년]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보낸 편지,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7월 9일

신사 1번째기사)

이홍장이 제시하는 조선이 각국과 통상해야 하는 이유는 서양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는 일이 서양 각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는 세력 균형의 형세를 만들기 위한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라는 데에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홍장은 만국공법이라는 명분을 활용할 것과 해상 함대의 상호 견제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 357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이홍장은 서양의 만국공법은 나라들이 이유 없이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통상을 할 경우 이러한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이홍장이 만국공법을 현실의 힘의 논리를 대체할 수 있는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만국공법을 강조하는 까닭은 그것이 서양 국가들에게는 세력균형의 명분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있다. 만국공법은 러시아가 터키를 멸망시키려고 들었을 때 다른 강국들로 하여금 이에 대해 “쟁론”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쟁론으로 인해 러시아의 침탈 의지가 저지되었던 것은 터키가 “고립무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 터키가 여러 강국들의 상호 견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홍장의 요지는 터키가 만국공법에 의해 구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터키에 대해 서양 각국의 상호 견제가 작동하기 위한 명분을 만국공법이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침탈 의지를 서양의 다른 각국이 견제하고자 하더라도 조선이 만국공법의 질서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들에게는 러시아의 의지에 간섭할 명분이 없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에게 서양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음으로써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는 국가가 되어 서양 각국을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 활용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358 이유원: 한 가지 어리둥절하여 의심이 가면서

석연치 않는 점이 있습니다. … 벨기에와 덴마크는

사마귀만 한 작은 나라로서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강자와 약자가 서로 견제함으로써 지탱되는데

유구왕은 수 백 년의 오랜 나라로서 그대로 지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지역이 따로 떨어져 있고 여러

나라들과 격리되어 있어서 공법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기구하게도

지구의 맨 끄트머리에 놓여 있어 터키, 유구국, 벨기에,

덴마크와 같은 작은 나라들보다도 더 가난하고

약소합니다. 게다가 서양과의 거리도 아주 멉니다.

[1879년] (이유원이 이홍장에게 보낸 답서,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 7월 9일 신사

1번째기사)

이만손 외: 진실로 황준헌의 말처럼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힘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해도 만 리 밖의 구원을 앉아 기다리면서

혼자서 가까이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 옛적에

6국六國이 연합하여 진秦을 물리친 것은 모두 영토가

서로 연접하여 있고 풍속이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이옵니다. 일찍이 겹겹이 막혀 있는 국경을 넘어

만리 바다를 건너서 순치脣齒의 외교를 맺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나이다. [1881년]

(『사의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영남만인소) 359 8. 번리(藩籬)체제의 양무(洋務)적 운용_일청강화기념관

조선은 이홍장의 제언을 정확하게 세력 균형론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서양 각국과 통상을 함으로써 그들을 러시아에 대한 세력 균형의 형세를 만드는 데에 끌어들이라는 이홍장의 제언에 대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동의하지 못했던 것은 서양 각국을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의 형세를 만드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의 효용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바다를 건너서 존재하는 국가들을 동아시아 대륙의 상호 견제에 동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군대를 파병해서 조선까지 오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홍장이 사례로 든 벨기에와 덴마크 같은 소국들은 강국들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거리도 매우 가까웠다. 강국들이 소국에 대해 상호 견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처럼 군대를 움직여 서로를 위협할 수 있을 만큼 각국간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이 류큐를 침략했을 때 서양의 어떤 나라도 제 시간 내에 움직일 수 없었던 까닭은 류큐가 서양 각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나 일본이 조선에 침략하게 된다면, 서양 각국이 군사적 지원을 보내는 데에는 너무 오래 걸리고, 이미 멸망한 국가에 대해서는 공법이 시행되지 않는다.14 그렇다면 조선이 서양 각국과 통상을 하더라도 14 이유원은 해당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물은 바 있다. “터키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준 것으로 보아서는 공법이 믿을 만한데, 멸망한 유구국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공법이 그 무슨 실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까?”

360 이홍장이 기대한 것과 같은 세력균형의 형세를 만드는 데에는 실익이 없다.

그렇다면 이홍장은 바다 건너 있는 국가들을 세력균형의 형세에 동원하는 일이 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조선 지식인들은 보지 못하고 이홍장은 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함대의 운용이었다. 앞선 편지에서 이홍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귀국의 경내를 지나다니는 배들을 보호하자는 것뿐입니다.” 이홍장이 의도했던 바는 각국의 함대 간의 형세가 상호 견제를 이루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그간 관계를 맺었던 명나라와 청나라는 오랜 기간 대륙형 제국으로 남기를 자처해왔으며 해상에서의 병력 운용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 나가지 않았다. 이에 조선은 상호의 군사력을 사용해서 세력 균형의 형세를 만든다는 이홍장의 방침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 군사력의 범위에 먼 나라의 함대 운용이 포함된다는 이홍장의 인식은 쉽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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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양함대 정원호

나는 이홍장이 이처럼 번리체제의 패러다임 속에서 조선 문제를 처리해나감에 있어 함대의 운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는 사실을 그가 번리체제를 ‘양무’적으로 운용했다고 지칭하는 것으로 본고의 시론적 논의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양계초가 이홍장에 대한 평전을 쓰던 시점까지 “‘양무’란 말은 명사가 되지 못했다(량치차오, 2013, 137 쪽).” 다만 양계초는 “이름은 주인이 지은 대로 부른다는 원칙에 따라 ‘양무’라는 말을 사용해 그(이홍장)의 20 여 년간의 활동을 정리(량치차오, 2013, 137 쪽)”하면서, 이홍장이 했던 ‘양무’ 사업들을 표(139 쪽)로 열거한다. 해당 표에 열거된 일들 중 절반 이상이 함대의 건설과 운용, 그리고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행정 정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실로 ‘양무’는 서양의 군사 기술을 도입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조명되어

362 왔지만, 이때 이홍장이 종사했던 ‘양무’의 상당 부분은 함대의 건설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을 ‘양무’의 의미를 음미함에 있어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양무’의 개념사는 별도의 연구를 요청하지만, 양계초가 ‘서양’에 방점을 찍어 ‘양무’를 개념화했던 것과 달리 ‘바다’에 방점을 찍어 ‘양무’를 개념화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실로 새방론자 좌종당과 대립했던 이홍장의 입장은 ‘해방론(海防論)’으로 당대에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조선 입약 권도책에 있어 이홍장이 각국의 함대 운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전통적인 세력 균형의 논리를 보강해나가고 있었던 면모들을 “번리체제의 양무적 운용”이라 명명함으로써 향후 탐구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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