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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 : 팍스 브리타니카와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활동성’” 글로버가든

동아시아에서 빚은 미래의 세계정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4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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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원 · 연세대학교

1. 들어가며

본 답사기가 궁구하고자 하는 연구질문은 “근대 서양의 장(場)에 ‘포섭’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양 자본/자본가의 활동이 미치는 영향”이다. 이는 광대한 주제이다.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근대 / 서양 / 전근대 동아시아 / 근대와의 조우 / 자본과 자본의 역할 등 굵직한 주제들에 관한 선행적인 이해가 요청된다. 이를 피상적으로 짚는다면 체계적이며 유기적인 분석이 결여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는 불명료한 설명으로 귀결될 가능성 또한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증대시킨다. 관견으로 이를 모두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필자는 본 답사기에서 시대 (19 세기), 장소(일본), 인물(T.B. 글로버와 그와 ‘연계’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거대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해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미시적 차원에서 행위자들의 역할 및 그 활동성의 동학을 재고/재평가하고자 했다.

선행연구들은 필자가 선정한 시대/장소/인물들에 대한 적지 않은 정보들을 ‘규명’해왔다. 그렇다면 본 답사기의 연구의의는 무엇인가? 본 답사기는 다음 2 가지 점에서 연구의의를 가진다. 첫째, 무대와 인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이다. 백과사전적 지식은 대형언어모델(LLM)이 정교화되는 현재에는 더욱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기초 자료에 오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라 하겠다. 해당 주제 및 소재들에 대한 2 차 자료를 검토하면서 상이한 주장들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해당 사항들이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다. 나아가 필자는 기존 연구들이 불명료하게 서술했던 사항들에 대해서도 최대한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 둘째, 선행연구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항들에 대한 기여 차원이다. 해당 차원은 기여를 위한 침소봉대(針小棒大)의 문제점이 항시 존재한다. 그럼에도 언급빈도가 적었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서 서술·분석하고자 했다. 답사기는 크게 2 가지 사항들을 중심으로 체계를 구성했다. 첫째,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의 도일(渡日)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배경적 조건인 자딘매디슨(Jardine

264 Matheson & Co.)/이화양행(怡和洋行, 후술할 시 해당명칭을 사용)에 대한 설명이다. 글로버와 그의 글로버 상회(Glover and Co.)는 중국-해협식민지-인도로 이어지는 영 제국 네트워크의 자장 속에서 활동하였다. 그 자장 속에서 핵심적인 중심을 차지하는 존재가 이화양행이다. 후술하겠지만, 동아시아 근대에 미친 이화양행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분석은 경제사 혹은 경영사적 차원에서 접근되었다. 본 답사기는 이화양행의 행위자성과 해당 결과에 대해서 주목한다. 둘째, 글로버의 인적 교류에 대한 재고이다. 기존 연구들을 포함하여 그와 연계된 일본의 역사적 인물들은 조슈번(長州藩)과 연계된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유신 3 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1833-1877)와 조슈 5 걸(長州五傑/Chōshū Five)인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 1909),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837-1917),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1836-1893) 그리고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1843-1910)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의 공수동맹인 삿초동맹 (薩長同盟)의 ‘중개자’였던 도사번(土佐藩)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 1867)도 높은 빈도로 언급된다. 그렇지만, 글로버가 주요하게 접촉했던 또 하나의 세력인 사쓰마번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언급 빈도가 적다. 막부 말기 사쓰마번의 역할과 그 구성원들의 이후 기여도를 생각할 때 이는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같은 갭을 매우고자 사쓰마번이 1865 년 영국으로 파견했던 265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사쓰마번견영사절단(薩摩藩遣英 使節団)에 주목하였다. 1863 년이 조슈 5 걸이라면 1865 년은 19 명의 사쓰마 번사들이다. 사절단의 구성원 중에는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1836-1885),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1832-1893),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 1889) 등 막부 말·메이지 일본에서 중추적인 정치가·관료·사업가들이 적지 않았다. 해당 사절단에 대한 전론이 국내에 부재한 실정이기에 그들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도 부기하였다.

본 답사기는 영일관계사의 한 편린을 상세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영 제국이 구축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가 일본 내 행위자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변용되는지도 살펴보고자 했다. 일본을 ‘개국’시킨 국가는 미합중국이었지만, 19 세기 당대의 국제질서를 주도한 것은 영 제국이었으며, 일본 역시 그 자장에 메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자장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인물 중 하나가 ‘스코틀랜드 사무라이(Scottish Samurai)’ 글로버이다, 그와 만나기에 앞서서 우리가 논의할 무대에 대한 소개가 먼저 요청된다. 본 답사기는 무대/행위자/사건 순으로 서술해 나갈 것이다.

1.1. 무대: 19 세기, 서세동점 그리고 일본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19 세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다. 해당 단어는 밀려오는 파도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응전을 상기시킨다. ‘근대’를 선취한 혹은 해당 개념을 주조한 구미

266 열강에게는 해당 시기가 다르게 기억된다. 단적으로 ‘문명화사명’(civilizing mission)과 같이 ‘선진적’인 자신들의 표준이 주변부 지역으로 전이/전파되는 시기였다(권태억, 2014). 이는 물질적으로는 구미 열강의 세력증대와 더불어 비물질적인 정신/심상(心象) 차원에서는 비서구에 대한 서구의 우월적인 인식론의 토대로 기능했다.

19 세기가 서세동점의 시기라 호명되지만 동아시아 3 개국인 조선·청나라·도쿠가와 막부의 대응과 응전은 상이하였다. 그리고 응전의 상이성은 3 개국 역사 경로를 노정하였다. 통속적으로 비교되는 단적인 사례가 도쿠가와 막부와 조선의 ‘개항’ 시점의 차이가 야기한 양국의 상이한 결과에 대한 논의이다. 1853 년(嘉永 6 年) 매튜 C. 페리의 흑선내항(黒船来航)과 미일화친조약(1854.3.) vs. 1875 년 9 월 운양호사건(雲揚號)과 강화도조약(1876.2.)에 대한 동일차원 에서의 비교가 그 단적인 예이다. 양 ‘국가’가 처해있던 구조와 조건이 유사하다면 최대유사체계분석(Most Similar Systems Design)이 유효할 것이지만, 양국은 최대상이체계분석(Most Different Systems Design)을 채택하는 것이 타당할 정도로 달랐다. 단적으로 조선의 ‘중앙집권형’ 국가와 도쿠가와 막부가 채택한 막번체제 (幕藩体制)는 그 중심을 향한 물질적·비물질적 지향에서 차이가 컸다. 도쿠가와 막부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의 직할지인 어령(御領) 혹은 천령(天領)을 일본 열도의 주요 거점에 267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배치하여, 해당 정치체제를 유지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친족들인 고산케(御三家)·고산쿄(御三卿)·일문(一門)을 포괄하는 신판(親藩), 집권 이전부터 보필했던 가신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후다이(譜代) 그리고 자신들의 집권 이후 복속된 도자마(外様)로 영주/다이묘 (大名)를 구분하여 대우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를 현대 정치학의 기준으로 분석하면 해당 정치체제는 군사 독재(military dictatorship) 이다. 해당 체제는 자신들에 대한 안보를 위협하는 더 강대한 세력이 출현하거나 해당 세력과의 ‘힘’ 차원의 경쟁에서 밀린다면 자신들의 집권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들의 집권이 정당성 기제보다는 물질적인 힘인 ‘폭력’이 주효하였기 때문에, 이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집권 정당성은 빠르게 흔들리고 만다. 도쿠가와 막부 당대에는 자신들의 이러한 힘을 어위광(御威光)으로 표현했다 (와타나베[渡辺], 2023). 그리고 이 어위광은 1853 년 흑선내항 이후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해당 상황이 발생하자 미토번(水戸藩) 등 신판다이묘의 영지에서도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였지만, 격렬한 활동은 도쿠가와 막번체제에서 가장 외곽에 존재하던 도자마다이묘들의 영지에서 촉발되었다. 특히, 웅번(雄藩)이라 불릴정도로 ‘번정개혁’에 성공했던, 조슈, 사쓰마, 도사 그리고 사가(=히젠) 등 4 개의 번이 삿초도히(薩長土肥)로 불리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三谷, 2012; 박훈, 2014; 박훈, 2019; 박훈, 2020).

268

2. 행위자: 영 제국과 상인(商人) 그리고 글로버

2.1. 주역(主役) Ⅰ: 글로버 2.1.1. 연구사

글로버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활동과 그 범위를 조정했다. 우리가 방문할 글로버 정원(Glover Garden/ グラバー園)은 1860 년대 그와 그의 상회의 궤적을 살피는데 유효한 장소이다. 해당 장소에서 발생한 인물들 간 상호작용은 막부 말(幕末) 정치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글로버에 대한 연구를 크게 일본 국내와 일본 국외에서의 연구경향으로 양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일본의 경향이다. 주요한 연구서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해당 연구경향은 그의 개인적인 생애와 함께 그가 영향을 미쳤던 일본의 역사적 사건들에 주목한다.

○ Sugiyama, Shinya. (1984). “Thomas B. Glover: A British

Merchant in Japan, 1861-1870.” Business History 26(2), pp.122- 38.

269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 스기야마(杉山, 1993). 『明治維新とイギリス商人:

トマス・グラバーの生涯(메이지유신과 잉글랜드상인: 토마스 글로버의 생애』.

○ 나이토(内藤, 2001). 『トーマス・B・グラバー始末:

明治建国の洋商(토마스 B. 글로버: 메이지건국의 서양상인)』. ○ 미즈다(水田, 2017).

『幕末明治初期の洋式産業施設とグラバー商会(막부말·메이지초기 서양산업시설과 글로버 상회)』.

다음은 일본 국외에서의 연구 경향이다. 해당 연구경향도 일본의 연구경향과 유사하지만 그의 조건(스코틀랜드人) 등을 부각하는 면모도 존재한다. 주요한 연구서들은 다음과 같다.

○ McKay, Alexander. (1993). Scottish Samurai: The Life of Thomas Blake Glover.

○ Gardiner, Michael. (2007). At the Edge of Empire: The Life of Thomas B. Glover.

McKay(1993)와 Gardiner(2007)/ガーデナ(2012)의 단행본은 글로버의 생애와 그와 연계된 이야기들의 기초적인 토대이다. 해당 저서들은 글로버가 작성한 1 차 자료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의 다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인물연구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1 차

270 자료의 유무에 달려있다. 글로버는 적지 않은 1 차 자료를 남겨주었다. 글로버가 남긴 자료들은 ➀ Glover, Thomas. Uncollected Letters, 1858-1910, ➁ Glover, Thomas. Records of Takashima Colliery, 1869-70 이다. 해당 자료들은 현재 나가사키현립도서관 (長崎県立長崎図書館)에서 이용할 수 있다(Gardiner, 2007; ガーデナ,2012). 활자화되지는 않았지만 『グラバー史談速記 (글로버사담속기)』도 주요 전거자료이다.

추가적으로 영일경제관계사에 대한 연구서와 더불어 한국의 글로버에 대한 분석도 간접적으로 활용하였다. 한국에서는 필자가 확인하기로는 토마스 B. 글로버에 대한 전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2012 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간행된 『한국의 국제정치학도, 일본 근대화를 만나다: 서울대생들의 규슈와 도쿄이야기』 중 3 장 “19 세기 영·일관계와 토머스 글로버”에서 그를 다룬다. 해당 내용은 그의 개인사, 19 세기 영일관계, 기도 다카요시와 조슈 5 걸과의 만남, 그리고 평가로 나뉜다. 짧은 분량이지만 국문으로 서술된 기초 자료라는 점에서 특기하고자 한다. ○ 스기야마(杉山, 2017). 『日英経済関係史研究: 1860- 1940(일영경제관계사연구: 1860-1940)』.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2012). 『한국의 국제정치학도, 일본 근대화를 만나다: 서울대생들의 규슈와 도쿄이야기』.

271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2.1.2. 생애

해당 전거들의 교차검증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적인 생애와 도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1838 년 6 월 6 일 스코틀랜드 북동부 애버딘셔주(Aberdeenshire) 프레이저버러(Fraserburgh)의 커머스 스트리트 15 번지에서 런던 복스홀(Vauxhall)의 해안경비대 장교였던 토머스 베리 글로버 (Thomas Berry Glover, 1806-1878)와 애버딘셔주 (Aberdeenshire) 포다이스(Fordyce, Banff -shire 교구 출신의 메리 핀들리(Mary Findlay, 1807-1887) 사이에서 8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생애 첫 6 년을 어업과 무역항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프레이저 버러에서 보냈다. 그의 가족은 1844 년 처음에는 그림스비 (Grimsby)의 해안경비대로, 애버딘셔의 콜리스턴(Collieston)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애버딘의 브릿지 오브 돈(Bridge of Don)으로 이사했다. 이때 그의 아버지는 해안경비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어린 토머스는 먼저 프레이저버러에 새로 개교한 교구 학교(parish school) 에서 교육을 받고, 그림스비, 콜리스턴의 초등학교, 마지막으로 올드 애버딘의 학교(Chanonry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 글로버는 무역 회사인 이화양행의 해운 사무원으로 취직했고, 1857 년 상해로 이주했다. 동아시아로의 취업 결정에 대한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었지만 명백한 증거는 없다.

272 1859 년 9 월 19 일 21 세의 나이에 글로버는 상해에서 나가사키로 이주했다. 그의 나가사키행은 그의 상해행과 비교하면 명확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는 동료인 맥켄지(Kenneth Mackenzie)와 더불어 도일하였다. 그의 도일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시점은 1858 년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을 포함한 「안세이 5 개국조약」 (安政 五カ国条約)에서 명시된 나가사키의 개항 시점 직후에 해당한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제 3 조에 따르면 「미일화친조약」에 의해 개항된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館)에 더하여, 가나가와(神奈川) /요코하마(横浜)와 나가사키(長崎)는 1859 년 7 월 4 일, 니가타 (新潟)는 1860 년 1 월 1 일, 그리고 효고(兵庫)는 1863 년 1 월 1 일에 개항하기로 약정되었다. 선행연구에서는 명백히 규명하고 있지 않지만, 요코하마에는 이화양행의 일본 무역거점이 설치될 예정이었기에 글로버와 맥켄지는 요코하마 이외의 항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혹은 나가사키뿐이었다. 더욱이 중국과의 무역망 연계를 생각한다면 나가사키는 실질적인 유일한 선택지였다.

글로버는 처음에는 일본 차(茶)를 구입하여 수출하고 서구의 재화를 무역하는 업무에 주력하였다. 동업자인 맥켄지가 1861 년 일본에서 철수하자 그는 동년 자신의 회사인 글로버 상회를 출범시켰다. 글로버 상회는 1861 년부터 1870 년까지 단기간 존속했지만, 막부 말기 일본 정국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무역 트렌드는 어떠하였을까? 상회가 존속했던 273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기간과 거의 동일한 기간인 1863-70 년 동안 나가사키 항에서의 수·출입 항목들의 액수와 비중에 대한 세관자료가 남아 있다. 차 상인으로 시작한 그의 상인 여정은 1860 년대 중반을 지나며, 무기와 군함을 공급하는 무기 브로커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는 막부 말 정국의 흐름과 긴밀하게 발을 맞춘 양상(洋商)이었다. 하단의 [도표 1]과 [도표 2]는 글로버가 주요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나가사키 항에서의 물품에 대한 수입/수출 비중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는 당대의 시대추세와 ‘동행’한 인물이었다.

[도표 1] 1863-1870 년 나가사키 항으로의 수입

사진

출처: Sugiyama(1984), p.120.

274 주 1: 단위는 %임.

[도표 2] 1863-1870 년 나가사키 항에서의 수출

사진

출처: Sugiyama(1984), p.121. 주 1: 단위는 %임.

2.2. 주역(主役) Ⅱ: 이화양행 2.2.1. 동아시아 근대 레짐의 키플레이어

이화양행은 글로버의 첫 직장임과 동시에 일본 사업에 있어 중요한 파트너였다. 따라서, 이화양행은 글로버의 궤적을 다룸에 있어 반드시 언급되는 회사이다. 그렇지만, 객관적 시각에서 글로버를 275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중심으로 이화양행을 다루는 것은 본말전도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화양행은 동아시아 근대의 출발점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주요한 키플에이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딘매디슨/이화양행에 대한 연구서들은 적지 않다. 본 답사기에서는 Blake, Robert. (1999). Jardine Matheson: Traders of the Far East.와 이시이 (石井, 1984) 『近代日本とイギリス資本:ジャーディン=マセソン商会を中心に(근 대일본과 잉글랜드 자본: 자딘매디슨상회를 중심으로)』를 주요 전거로 삼고자 한다.

19 세기 서세동점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들이 제시되어 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하나의 요인만으로 거대한 귀납적 현실을 설명하는 것은 난망하거나 허망하다. 19 세기 서세동점의 현실 자체를 특정 요인만으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아시아 근대의 출발점이자 서세동점의 시작점으로써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목하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1839-42 년 진행된 제 1 차 아편전쟁이 그것이다.

주요 역사적 사건인만큼 아편전쟁의 원인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기본적으로 영국과 중국의 무역수지 불균형 문제와 더불어 아편(鴉片)이라는 무역물품이 가지는 해악성 등에 대한 지적과 도광제(道光帝, r.1820-50)와 임칙서(林則徐, 1785- 1850)라는 행위자들의 행동과 영국의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며, 전쟁이 발발하였다. 해당 전쟁의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구분해본다면, 제반조건들은 원인 (遠因)들에

276 해당한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근인(近因)은 무엇인가? 우리는 해당 질문에 대한 탐구과정에서 이화양행과 대면하게 된다.

2.2.2. 탄생과 ‘아편’

이화양행의 설립과 번영은 기존 무역레짐의 변경과 함께 찾아왔다. 오랫동안 영국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는 극동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다. 해당 조치는 상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불만을 야기했다. 독점권과 더불어 동인도회사가 사용한 일부 고압적인 방법 역시 문제였다. 해당 독점시장에 진입하여 경쟁을 야기하는 사람은 “해적”과 동일하게 처벌받았다. 때때로 자유 무역업자들이 동인도회사로부터 “국가 무역(country trade)”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지만 일반적으로 거래처가 제약되었다. 그렇다면, 해당 상황을 회피할 방법은 무엇인가? 당대의 사람들은 외국의 영사권(consulship)을 수락하는 방법을 취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원 존 리드(John Reid)가 처음 사용한 이 방법은 윌리엄 자딘(William Jardine, 1784-1843)이 광주(Canton)에서 사업체를 설립할 때 원용되었다.

1834 년 동인도회사의 중국 내 무역독점권이 종료되자 자딘과 제임스 매디슨(James Nicolas Sutherland Matheson, 1796-1878) 그리고 동료/경쟁 잉글랜드 상인들은 동인도회사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이화양행은 동인도회사의 주요 상업 대리점에서 아시아에서 277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가장 큰 무역 회사 중 하나로 변모했다. 자딘은 이제 다른 무역상들에게 ‘대관리자’라는 뜻의 중국 구어체 호칭인 “타이판(Taipan/大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화양행은 소비자 시장에 가장 먼저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여, 시장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이화양행의 단기간 성공에는 아편 무역과 같은 ‘비도덕적’ 요인이 상존했다. 이화양행만이 아편을 공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대중무역에서 아편이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었다. 시기를 앞질러 “1800 년과 1810 년 사이에 중국은 대외무역으로 약 2,600 만 멕시코달러의 흑자를 냈는데, 1828 년과 1836 년 사이에는 약 3,800 만 멕시코달러의 적자”를 냈다(Blake, 2022: 46). 이러한 놀라운 반전은 아편 수출에 따른 결과였다. 기존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를 수입하는 비용을 인도산 생면, 은괴 등의 물품 수출로 충당했지만, 이제는 아편 수출만으로도 해당 무역 역조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아편이 유입된 것일까? 이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나, 금수품 목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추산이 제시되었다. “1800-1821 년 아편 거래는 평균 총 4,500 건/건당 63.5 킬로그램이었지만, 이후로는 폭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1831-32 년에는 19,000 건으로 증가하더니, 1838- 39 년에는 40,000 건에 육박”했다(Blake, 2022: 47).

278 2.2.3. 아편전쟁의 촉진자 & 촉발자

무역 역조의 증대와 함께 무역품인 아편의 파생효과는 청 당국의 행동을 촉발시켰고, 청과 영 제국, 정확히는 영 제국의 상인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도광제는 1838 년 12 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파견하여, 이를 시정하고자 했다. 임칙서는 두 가지 노선으로 아편을 다루고자 하였다. 첫째는, 지역 향신(鄕紳)들의 협조를 통해 아편 사용을 제어하는 방법, 둘째는, 적극적인 화근 제거로서의 접근법이다.

화근은 광저우의 아편 중개상과 아편 운반 쾌속선, 아편 소굴, 창고,

흡연실, 그리고 그 외 눈에 드러나는 부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임칙서가 반드시 시기와 형세를 잘 살펴 아편을

적극적으로 뿌리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Ⅹ, 1978: 185).

이에 대한 서양 상인들의 대응을 협조 노선과 대립 노선으로 양분할 수 있다. 이화양행은 청에 대한 강경 대립 노선을 취했다. 그들은 1757 년부터 시작된 광주에서의 ‘제한무역’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들은 광동무역체제(Canton System)를 타개하여 자신들의 이익확대 를 도모했다.

279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청과의 무력분쟁이 시작된[제 1 차 천비해전(穿鼻海戰)] 시점인 1839 년 12 월 19 일 자딘은 매디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원정 계획과 향후 성취해야할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제 충고는 중국의 만리장성 이남부터 전성[지명]에 이르기까지,

혹은 북위 20 도에서 40 도에 이르는 중국 해안을 봉쇄할 해군력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 해군력은 두 척의 전함, 두 척의 프리깃함,

강을 운행할 수 있는 두 척의 바닥이 평평한 증기선으로 구성하되

6,000-7,000 명의 해군을 실을 수 있는 충분한 운송선을 포함해야

합니다. 해군은 베이징 인근까지 진격해 모욕에 대한 사과, 포기한

아편에 대한 보상, 공평한 무역 협정,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문,

복주, 영파, 상해, 교주 등의 북부 항구와 무역할 수 있는 자유를

황제에게 직접 요구해야 합니다(Blake, 2022:158).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현실태로 발현되었을까? 한 상회의 요청이 영 제국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실질적으로 이를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때 이화양행의 영향을 ‘증명’해주는 자료를 만날 수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증인은 파머스턴 경이다. 제 1 차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 전쟁 중 외무장관이었지만 당시는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있던 파머스턴 경 헨리 템플(Henry John Temple, 1784-1865)이 이화양행의 런던 대리인 스미스(John Abel Smith)에게 다음과 같은 문건을 발송했다.

280 1842 년 11 월 28 일

우리가 중국 내 군사적 외교적 업무와 관련해 이처럼 성공적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모든 지시를 자세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귀하[스미스]와 자딘씨가 너무나 훌륭하게 우리에게 도움과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1839 년 가을 귀하와 우리가 만난

다양한 인사들로부터 얻은 정보는 1840 년 2 월 우리가 내린 지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너무도 정확하고 완벽해 우리의 후임자들이

지시 내용을 조금이라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훗날의 결과가 증명했듯이, 결정적인

군사작전이 양쯔강에서 실행되었고, 이는 우리가 일찍이 1840 년

2 월 해군 사령관에게 제안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약의

조건들은 우리가 전권대신인 엘리엇과 포팅거에게 확보하라고

충고한 조건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이번 사건은 분명 영국에 상업적 이익에 있어 가장

큰 이점을 가져다줄 것입니다(Blake, 2022:178).

하나의 단편적인 문건이 실상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영 제국 외교정책결정권자인 파머스턴 경의 해당 발언을 통해 이화양행이 제 1 차 아편전쟁 준비·진행·결과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 1 차 아편전쟁은 281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동아시아 서세동점의 상징적인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이화양행이 존재했다.

이화양행의 행동을 염두해둔다면, 영 제국 상인들의 동아시아 국가들에서의 활동과 영향력은 무역 분야로만 제약될 수 없었다. 그들은 영국의 해군력과 자신들의 자금력을 접목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보·확대하고자 했다. 해당 관점의 연장에서 약관의 젊은 혹은 어린 나이에 도일하여 일본에서 자리잡은 글로버와 그 상회의 활동 및 영향력에 대해서도 재고할 수 있다. 글로버 개인의 역량과 비전을 넘어서서 팍스 브리타니카라는 국제정치적 조건은 그의 활동범위와 영향력의 기반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영 제국 네트워크 속 상인들의 활동과 영향력은 영국의 세계전략의 향방과 국가 이익에 따라 매개되었다.

3. 사건

3.1. 사쓰마번사들과의 조우(遭遇) [사진 1] UCL 내 1863 년 1865 년 ‘일본’ 유학생 기념비

282

사진

기존 연구들은 글로버와 일본 지사(志士)들의 만남과 그 상호작용에 주목해왔다. 다수는 조슈번 번사들과의 교류에 주목했다. 기도 다카요시, 조슈 5 걸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 등은 학술적·대중적 글에서도 낭만적 분위기와 함께 재론된다. 필자 역시도 조슈번 혹은 조슈번과 연계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글을 재구성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다음 사진을 보고 필자는 다른 이야기의 보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위 사진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설립된 기념비이다. UCL 과 인연을 맺었던 일본인 24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63 년 UCL 에 당도했던 조슈 5 걸 말고 1865 년 UCL 에 ‘당도한’한 나머지 19 명은 어떤 283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군상들인가? 해당 19 명은 사쓰마번견영사절단 (薩摩藩遣英使節団)의 이름으로 영국으로 출국한 사쓰마 번사들 이었다. 정확히는 17 명은 사쓰마 번사들이었고, 2 명은 타번 사람들이었다. 역할을 구분하면 인솔자와 안내역은 3 명, 통역 1 명, 유학생은 15 명이었다. 아래는 [표 1]는 총원 19 명의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표 1] 사쓰마번견영사절단(薩摩藩遣英使節団) 명단 성명 연령 비고

마치다 히사나리

27 제국박물관 초대관장 (町田久成)

마치다 다케히코

20 (町田猛彦)

마치다 신시로

18 (町田申四郎)

마치다 세이죠

14 (町田清蔵)

하타케야마

이와쿠라 사절단 참가

요시나리 23

개성학교교장(開成学校校長) (畠山義成)

284 사메시마 나오노부

23 영불대리공사(英仏代理公使) (鮫島尚信)

나가자와 카나에 “미일친선의 조상”

13

(長澤鼎) (日米交流の祖) 모리 아리노리 중국대사

18

(森有礼) 초대 문부대신 마츠무라 준조

23 미 해군사관학교 유학 (松村淳蔵)

요시다 기요나리 이와쿠라 사절단 참가

20

(吉田清成) 미국대사

무라하시 히사나리 개척사 맥주양조소 개설에

23

(村橋久成) 관여

다카미 야이치

34 (高見弥市)

도고 아이노신

25? (東郷愛之進)

나고시 헤이마

20 (名越平馬)

다나카 세이슈

23 (田中静洲)

285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나카무라 히로나시 마르세유 영사 & 덴마크

21

(中村博愛) 대사 귀족원의원

니이로 츄조

33 인솔자 (新納中三)

안내역

데라시마 무네노리

33 외무경 / 문부경 / (寺島宗則)

참의(参議)

고다이 도모아쓰 안내역

29

(五代友厚) 귀국 후 실업계에 투신 호리 다카유키 통역

21

(堀孝之) 나가사키 출신 출처: 犬塚(1974)를 바탕으로 저자재구성.

주 1: 연령은 1865 년 기준

그 중 기존에 알고 있던 인물은 초대 문부대신을 역임했던 모리 아리노리와 문부경을 역임했던 데라시마 무네노리밖에 없었다. 필자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졌고, 어떤 목적으로 도영(渡英)했는지, 이후 그들의 행적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찾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과 글로버의 관계는 어떻게 접점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탐구하였다. 일본 및 서구 자료에서도 19 명 모두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었다. 사절단 이후 개인별 성취와

286 개개인의 행로에 따라서 역사적 위상이 상이해졌기 때문이다. 본 답사기에서는 이누즈카(犬塚, 1974)의 『薩摩藩英国留学生(사쓰마번영국유학생)』 및 이누즈카 (犬塚, 2001) 『密航留学生たちの明治維新: 井上馨と幕末藩士 (밀항유학생들과 메이지유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막발번사)』를 주요 전거로 삼았다.

필자는 해당 인원 중에서 이채로운 이력과 글로버와 다양한 접점을 가진 고다이 도모아쓰란 인물에 주목하고자 한다. 해당 인물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에 대해 탐구할수록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소환된다. “동쪽의 시부사와, 서쪽의 고다이”가 그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는 관료이자 근대 일본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실업가이다. 고다이는 근대 오사카의 산업 및 실업계에 주춧돌이었다.

3.2. ‘팔색조’ 고다이 3.2.1. 삶의 전반기

그의 삶의 전기에 관해서는 다츠키(田付, 2018)의 평전인 『五代友厚:富国強兵は「地球上の道理」(고다이도모아쓰: 부국 강병은 ‘지구상의 도리’)』에 기반하여, 후술할 내용들을 서술하고자 287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한다. 그는 1836 년(天保 6 年) 『삼국명승도회(三国名勝図会)』의 저자이자 기록관인 고다이 나오자에몬 히데다카 (五代直左 衛門秀尭)의 차남으로 사쓰마국 가고시마성에서 태어났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사츠마의 기풍 속에서 자랐으며, 8 세 때 아동원학숙 (児童院の学塾)에 다니다가 12 세 때 성당(聖堂)에 진학해 문무를 겸비한 학문을 습득했다.

덴포 년간(天保, 1831-45)에 태어난 동시대인들과 같이 고다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1853 년 흑선내항과 이어진 막말 15 년 격동기라 하겠다. 1854 년(安政元年) 페리가 우라가 앞바다에 다시 나타나자 전국이 요동쳤다. 이때 고다이는 “소년의 뜻을 세우는 것은 바로 이 때”라고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1855 년(安政 2 年), 사쓰마번의 군방서역조(郡方書役助)가 된다. 그의 형이 쇄국주의자임 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국론자의 입장에 선다. 이듬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長崎海軍伝習所)에 번의 전습생(藩伝習生)으로 파견 되어 네덜란드 사관에게 항해술을 배운다. 이것이 고다이가 본격적으로 근대 학문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2 년(文久 2 年), 그는 번의 증기선 구입 계약을 맺기 위해 뱃사람(水夫)으로 막부 소유의 센자이마루(千歳丸)에 승선해 상해로 건너갔다.

1863 년(文久 3 年) 8 월, 1862 년 9 월 나마무기사건 (生麦事件)으로 발생한 영국-사쓰마 전쟁(薩英戦争)에서 영국군은 사쓰마의 증기선 3 척을 압수하는데, 그때 고다이와 데라시마 무네노리는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다. 고다이는 통역 시미즈

288 우사부로(清水卯三郎)의 계략을 통해 요코하마에서 작은 배를 통해 영국 함선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번내에서는 그가 영국군의 포로가 된 것에 따른 오명이 높아져 있었다. 즉시 사쓰마로 귀번하지 못하던 그는 나가사키에서 체류하게 되었고, 나가사키에서 만난 사쓰마 번사 노무라 모리히데(野村盛秀)의 주선으로 귀번을 허락받게 된다.

3.2.2. 스코틀랜드 사무라이와의 만남

1863-64 년 잠복기간 중 고다이와 글로버는 나가사키에서 교류하게 된다. 해당 기간 이전에는 양자의 만남이 성사되기 어렵거나 우호적인 상황에서 만나기 어려웠다. 1862 년 9 월 나마무기사건 이후 영국과 사쓰마, 사쓰마와 막부 간 관계는 해당 사건의 해결 및 ‘타협’ 건으로 이지러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1863 년 8 월의 ‘전쟁’은 그 상황을 종결시키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영국과 사쓰마가 무력분쟁을 벌였지만, ‘전쟁’ 이후 영 제국에게는 사쓰마와의 관계 진전 모색 및 막부와의 관계 재고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쓰마측에게는 해당 ‘전쟁’이 양이(攘夷)의 비현실성을 깨닫게 하는데 주효했다.

주목할 점은 영국-사쓰마 ‘전쟁’ 이후 글로버가 서남지역의 웅번에 대한 ‘조력’ 활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조율’된 타이밍에 고다이와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는 만나게 된 것이다. 289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그렇지만, 고다이의 제반여건은 제약되어 있었다. 고다이와 데라지마 무네노리는 전쟁 중 영국 측에 ‘투항’했기 때문에 막부 관리와 외국인 배제를 지지하는 양이파의 눈을 피해 은신해야 했다. 두 ‘도망자’는 사쓰마 가문과 도쿠가와 막부 모두에서 반역자로 의심받는 형국이었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다이는 나가사키에서 은신하면서 글로버와 교분을 쌓게되었다.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고다이는 세계 정세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기했다.

그 ‘이해’의 연장에서 1864 년 6 월경, 고다이는 사쓰마번에 일본 근대화 개혁에 관한 상서(上書)를 제출했다. 고다이가 제출한 상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포함되었다. 1) 최첨단 기계를 구입하여 사쓰마 가문의 산업을 현대화할 것 2) 근대 기술을 배우고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학생들을 해외에 파견할 것 3) 외국 기술자를 고용할 것 4) 해당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것(상하이와의 무역 등 구체적인 내용 포함). 그는 사람들이 해외에 유학하여 서양의 기술을 배워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시대에 뒤처질 것이기에. 군사력 강화에 힘쓰고 있던 사쓰마번은 그의 진언 내용을 채택해 3+1 명으로 구성된 시찰단과 함께 15 명의 학생들을 영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865 년(慶応元年) 4 월, 번의 명령에 따라 고다이는 데라시마 무네노리, 모리 아리노리 등과 함께 사쓰마번의 사절단으로 영국으로 출발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했다.

290 사쓰마번의 사절단의 파견에 있어 글로버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고다이의 상서를 촉발시킨 점과 더불어 글로버는 실질적으로도 해당 사업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사절단은 1865 년 4 월 17 일 사쓰마국 쿠시기노하시마(現 가고시마현 이치키 쿠시기노시)에서 글로버가 주선한 증기선인 오스트레일리아호 (オースタライエン号)를 타고 영국으로 출항 했다. 고다이는 5 월 영국에 도착하였고, 7 월에는 벨기에, 9 월에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를 경유하여 프랑스를 방문한다. 고다이는 1866 년(慶応 2 年) 2 월 귀국/귀번 후 승진 (御小納戸奉公格)하여 사쓰마번의 상사(商事)를 총괄하는 회계 담당에 취임한다. 그는 해당 시기 글로버와 합작으로 나가사키 고스게(長崎小菅)에 부두를 개설하는등 사업가의 실력을 발휘 하기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두란 속칭 주판 부두 (そろばんドック)라고 불리는 것으로 현존하고 있다. [小菅修船場跡].

3.2.3. 유신 이후

1868 년(慶応 4 年), 보신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하자 고다이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함께 막부 타도에 활약했다. 그 결과 1868 년(明治元年)에 메이지 신정부의 참여직외국사무괘[参与職外国事務掛]를 맡았다.

291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외무관권판사(外国官権判事), 오사카부권판사 겸직으로 오사카에 부임하여 사카이 사건(堺事件), 영국 공사 파크스 습격 사건(イギリス公使パークス襲撃事件) 등의 외교적 사안의 처리에 임했다. 외교 사안에 대한 처리와 함께 고다이는 오사카에 조폐료를 유치했다. 나아가, 초대 오사카 세관장이 되어 오사카 세관 역사의 막을 열었다. 1869 년(明治 2 年) 관직 퇴임 후에는 모토키 쇼조(本木昌造)와의 협력으로 영일사전을 간행하고, 동전에 대한 신용을 높이기 위해 금은분석소를 설립했다. 방직업, 광업, 제염업, 제염업 등의 제분야 산업발전에도 힘썼다.

관직에서 은퇴하였지만, 삿초번벌 정부와의 연계가 강해 1875 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요정에 모여 의견을 교환한 오사카 회의(大阪会議, 1875.2.11)나 구로다 기요타카가 비판을 받은 개척사 관유물 불하사건 (開拓使官 有物払下げ事件)에도 관여되어 있는 등 미쓰비시의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 1835-1885)와 같은 정상(政商)의 면모를 보였다. 그 밖에도 오사카 재계인 다나카 이치베(田中市兵衛, 1838- 1910) 등과 함께 오사카 증권거래소, 오사카상업회의소, 오사카 상업강습소, 오사카 청동회사, 간사이무역사, 공동운수회사, 고베 부두, 오사카 상선, 오사카상선, 한카이 철도 등을 설립했다. 이른바 “근대 오사카 경제의 아버지”라 명명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행보였다. 3.2.4. 만남의 연쇄

292 한 인물의 일생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관측점이 존재할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가장 저점의 순간과 고점의 순간이 그 관측점들 중 하나라고 판단한다. 특히, 가장 저점의 순간에서 한 인물이 취하는 행동은 그의 본질적인 모습과 대면할 수 있는 순간이라 하겠다. 고다이의 일생을 반추한다면, 1863-64 년이 부침이 가장 심각한 시점이었다. 그는 사쓰마번의 ‘근대화’의 주요 기수로써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다. 그러나, 1863 년 영국- 사쓰마 ‘전쟁’은 그에게 재난과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 그는 번에서도 막부에서도 주목 받는 ‘기피’인물이 되었다. 단기간의 급격한 ‘전락’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해당 기간 나가사키에서 ‘은신’하였는데, 위기과 기회로 전변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글로버와의 만남 및 교류를 통해 사고의 심화와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단순한 사람 간 만남을 넘어서서 고다이와 글로버의 만남은 긍정적인 연쇄과정으로 지속되었다. 1865 년 사쓰마번의 유학생 파견 및 사쓰마번(고다이)과 글로버의 공동사업 진행 등으로 확대·발전해 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고다이의 인생을 서술함에 있어 필자는 광산업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유신 이후 글로버의 주요 활동 무대가 광산/탄광업이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양자의 관계는 긴히 이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로버는 왜 고다이와 같은 젊은 지사(志士)들과 ‘공명’하였는가? 선행연구는 글로버의 막부 말 현실에 대한 ‘개입’의 293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동기를 1) 자신의 이윤 추구, 2) 이상(理想) 지향, 3) 제국주의적 시선 등으로 정리한다. 이 동기들은 상호배타적 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어떠한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글로버에 대해서는 글로버 자신의 발언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로버는 자기자신을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반역자 중 제일의 반역자”(McKay, 1993)로 표현했다. 그가 도쿠가와 막부의 어떤 측면에 부정적인 인식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그는 막부의 권력에 강력히 저항하려는 강한 유인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나아가, 글로버는 말년에 1866 년 주일영국공사인 해리 S. 파크스(Harry Smith Parkes, 1828-1885)의 사쓰마행에 있어 수행한 중개 역할을 높게 평가했다. 1866 년 파크스는 해당 만남을 통해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 및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 사이고 다카모리, 데라지마 무네노리 등과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은 역사적인 만남 혹은 교섭의 장이었다.

글로버의 ‘회고’는 단순한 중개자의 역할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중개 행위가 야기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글로버에게 있어서 사쓰마의 주요 소통 대상으로써 고다이 도모아쓰가 있었다. 우발적인 조우로 사그라들 수 있었던 양자의 ‘만남’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넘어서 기능했다. 사쓰마와 글로버 상회 그리고 영 제국을 매개하는 하나의 파이프라인이었다. 그리고 그 파이프라인은 다른 파이프라인과 연계되며, ‘혁명’적 변화를 추동하는 기초가 되었다.

294

4. 나가며

본 답사기는 이화양행, 토머스 글로버 그리고 고다이 도모아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시대/장소/인물을 유기적으로 엮어서 답사기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그 구상이 최초의 목표대로 달성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개별적인 요소들의 연쇄작용에 일면을 포착하고자 시도했으나, 연쇄작용의 연쇄는 필자가 상정한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 답사기에서는 다음 3 가지 차원에 주목하여 논지를 전개했다.

첫째, 19 세기 동아시아 서세동점의 시기에 있어 이화양행 등 서구상인들의 역할에 대한 재고이다. 자본은 모든 역사적 사건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 조건이지만, 19 세기 동아시아에서는 토대를 구성함과 동시에 그 근본적인 활동동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토머스 글로버라는 개인의 활동성에 대한 재고이다. 그의 개인적인 성품과 의도를 넘어서서 그는 19 세기 영 제국의 세계적인 네트워크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그 역시도 그 네트워크의 일부로써 기능하였다. 이와 같은 연계는 그의 활동범위와 영향력의 토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막부 말기 일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들’ 중 하나로 부상했다. 셋째, 고다이 도모아쓰 등 사쓰마 번사들의 활동성에 대한 재고이다. 기존 연구들도 막부 295 6.19 세기 일본, 영 제국과 조우하다_글로버 가든 말기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 등 사쓰마번사들의 역할에 대해서 중요 하게 다루었지만, 본 답사기에 다루는 토머스 글로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다루었다. 필자는 사쓰마번견영사절단 (薩摩藩 遣英使節団)과 그 중심인물인 고다이 도모아쓰와 글로버의 연계에 주목하였고, 그 의의와 영향을 서술하였다.

본 답사기를 저술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파편적인 지식들의 연쇄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함께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을 유기적으로 종합하여 서사를 구축하는 것의 지난함을 동시에 알게 되었다. 난망하지만 그에 대한 시도는 다른 연구에서 지속될 것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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