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읽기 데지마
동아시아에서 빚은 미래의 세계정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조이언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평화의 요건은 무엇인가? 두 세력 간에, 두 문화 간에, 혹은 두 관점 간에 평화가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609 년이었고 이들이 데지마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1641 년이었다. 그리고 1860 년까지 일본과 네덜란드는 데지마라는 작은 인공섬을 사이에 두고 200 년이 넘도록 관계를 지속하였다. 국제정치사에서 굵고 짧은 우정은 흔한 데 반해 가늘고 긴 우정은 그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국제정치적인 통념은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교섭과 평화, 우정이 역사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견지에서 봤을 때 근세의 일란관계는 정치학적인 해명과 해석을 요청하는 역사적 사건이자 주제이다. 네덜란드 식민제국은 어떤 제국이었으며 도쿠가와 일본의 쇄국은 어떤 쇄국이었기에 이러한 관계가 가능하였던 것인가? 두 나라 간의 관계란 어떤 성격의 것이었으며 두 나라는 어떻게 두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 독특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가? 이 글에서는 데지마로 상징되는 일란관계가 어떠한 내용의 조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조정이 18 세기에 어떻게 유지되고 관리되었는지를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에 대한
221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분석을 바탕으로 추적하고 있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
관한 서지정보
1633년부터 1860년 사이에 일본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 해 작성된 일기와 서신, 공증서 및 회계장부는 거의 전부 현전하고 있 으며 (Massarella, 1988, p. 372) 그 전체 분량은 삼만 오천 페이지에 이른다. (Massarella, 1992, p. 553; van der Velde, 2023, pp. 21- 27)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의 서문을 쓴 일란학회 (日蘭学会)의 회장 Nakashima Nobuyuki에 의하면 동경대학사료편 찬소(東京大学史料編纂所)와 일란학회 산하에 Iwao Seiichi 교수에 의해 설립된 일란교섭사연구회(日蘭交涉史硏究會)에서 각각 데지마 일기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왔다. 하지만 일기의 원본을 전부 번역하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하여 일란학회는 일찌감치 Leonard Blussé 교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 여 데지마 일기의 여백에 쓰인 주(marginalia)를 영역하는 프로젝트 (The Deshima Diaries Source Publication Project)를 추진하였으며 해당 프로젝트는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van der Velde & Bachofner, 1992, p. xi) 데지마 일기의 1년 치 분량은 300페이지 정 도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 당대의 상관장(商館長)1들이 이것을 참고 1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는 네덜란드어opperhoofd로 표기되어 있다. 영어의 chief에 얼추 대응되는 표현이다.
222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컸고2 이에 따라 1673년부터는 본문 의 여백에 쓰인 주들을 별도의 목록으로 옮겨 적어 데지마 일기의 본 문에 대한 목차로서 기능하도록 하였다. 이 목록을 영역하여 출간하 자는 아이디어는 1964년에 데지마 아카이브의 전체 자료목록을 출간 하였던 M. Roessingh 교수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고 그의 동료인 Opstall 교수와 Leiden 대학의 Blussé 교수는 Isaac Alfred Ailion Foundation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1985년에 해당 프로젝트를 출범 시킬 수 있었다. (van der Velde, 2023, p. 21) 영역 프로젝트는 두 차 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A.C.J. Vermeulen 교수에 의해 번 역, 편집된 The Deshima Dagregisters; the Original Tables of Contents라는 제목의 시리즈였고 둘째는 이를 이어받아 Paul van der Velde 교수가 기존 시리즈를 재차 번역, 편집하여 출간한 Deshima Diaries Marginalia 시리즈이다. 첫 번째 시리즈는 기록 보 관상의 도구로 활용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프로젝트였던 반면에 두 번째 시리즈에서는 첫 번째 시리즈가 네덜란드어 능력이 부족하거 나 헤이그의 문서고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사학자들에 의해 사실상의 2 데지마 일기는 본래 매년 교체되었던 상관장들이 일본에서의 생활 및 일본인들과 의 교섭에서 행동 지침 등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으 며, 한 부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를 전송되었다. 데지마 일기가 상관장들에 의해 활용된 양상에 관하여서는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의 소개글인 “A Glimpse behind the Screens: Some Remarks on the Significance of the Deshima Dagregisters for the Study of Tokugawa Japan”를 참조하라.
223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1차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여 ‘그러하였던 이유’, ‘그 주 제에 대한 생각’, ‘회의에서 있었던 일’ ‘그 일의 내막’과 같이 단순히 지시적인 주석들의 많은 부분을 실제 분문의 내용들을 토대로 재구성 한 텍스트로 대체하였다. (van der Velde & Bachofner, 1992, pp. xii-xxiii) Deshima
Diaries Marginalia 시리즈 는 현재까지 세 권의 책으 로 구성되어 있는데 1992 년에 출간된 1700년부터 1740년까지의 일기, 2004 년에 출간된 1740년부터 1800년까지의 일기, 2023 년에 출간된 1641년부터 1660년까지의 일기 중에서 현재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92년에 출간된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하
표지
나뿐이다.
네덜란드의 입장(1):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무역연결망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무역은 네덜란드 식민제국이 17세기 전반에
224 구축한 아시아 내 무역연결망(inter-Asian network of trade links)이 작동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연결고리였다. 이들은 남인도 면직물을 인 도네시아로 운반하고, 타이완에서 가져온 중국 생사(生絲)를 일본에 서 은과 구리로 교환하고, 인도 면직물과 페르시아 생사를 구매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향신료를 인도와 페르시아로 옮기고, 그렇게 구한 면직물과 생사를 유럽 시장에 판매하였다. (Israel, 1995, p. 941) 일 란무역을 촉발시킨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심에는 은이 있었다. 17세기 초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서 행사하는 경제적, 군사적 영 향력은 은의 지속적인 공급에 의하여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네덜란드의 해양 주도권이 팽창하던 1621년에 재개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스페인 측으로부터 들어오는 은의 유통을 크게 장애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독점 무역을 성사시켜 일본의 은을 아시아 시장으로 유출, 유통시킴으로써 아시아에서 상업적으로 나 군사적으로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3 (Israel, 1989, pp. 171-173)
네덜란드의 대일본 무역 전략을 포함한 아시아 무역 전반은 1660년대에 들어 위기에 봉착하였다. 1662년에는 정성공(鄭成功)의 군대에 의해 대만으로부터 구축되었고 1666년에는 그 전부터 네덜란 드의 상행위를 제한하여 오던 청나라가 그 동안 네덜란드에 부여되었 3 당시 일본은 세계 생산량의 1/3에 해당하는 200톤의 은을 매해 생산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출된 은의 가치에 관한 통계는 Dutch Primacy in World Trade 1585-1740의 Table 5.16. 참조하라.
225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던 약간의 무역 특권마저 박탈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639년에 정점 을 찍은 이후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던 일본과의 무역 상황을 더욱 악 화시켰고 1668년 에도 막부가 은의 수출을 금지함에 따라 일본 무역 은 네덜란드 입장에서 이전만큼 필수적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일란 무역에서는 꿩 대신 닭 격으로 구리가 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대량의 구리를 인도와 페르시아에 판매하는 식으 로 아시아 내 무역을 지속하였다. (Israel, 1989, pp. 254-255)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 는 교섭 장면이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구리의 수출량은 늘 리고 가격을 내려달라고 시시때때로 불평하고 요구하는 장면인 것은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도 226
네덜란드의 입장(2):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세계관
일란무역의 배경과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 있고 그런 정보의 많은 부분이 데지마 아카이브를 토대로 한 연구들에서 비롯하고 있으므로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를 분석 하는 작업은 이러한 사실들을 재확인하는 데 그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제국으로서 입장과 성격이 어 떤 것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비교적 해석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 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식민제국이 과연 제국주 의적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Wesseling은 네덜란드 제국주의의 ‘이상한 역사’를 고찰하면서 국제적인 제국주의 논쟁에서 네덜란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고 (Wesseling, 1988, p. 59) Koekkoek과 그의 동료들은 네덜란드에서 역사적으로 나 역사학적으로나 지배적이었던 자아상, 즉 네덜란드 식민정책의 성 격이 상업적이고 비폭력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비제국주의적이었다 는 관념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논쟁적인 관념이라는 사실을 지성사적 으로 폭로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4 (Koekkoek et al, 2017, p. 83) 여타 유럽 열강들과 비교했을 때 네덜란드 식민제국이 유달리 상 4 이러한 성격의 연구의 한 사례로는 자연법과 자연권에 관한 그로티우스의 이론이 네덜란드 식민정책의 팽창주의와 독점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Martine Julia van Ittersum, “The long goodbye: Hugo Grotius’ justification of Dutch expansion overseas, 1615-1645.“ History of European Ideas 36:4 (2010)를 참조하라.
227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업적인 성격이 강하고 비폭력적이었다는 명제에도 일정한 진리가 있 지만 착취와 폭력, 노예무역과 식민통치의 전적 역시 적지 않다는 것 이다.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성격과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 주의와 같이 그 자체로 논쟁적인 개념에 비추어 그것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는 여러 개별적인 장면들을 통해 총체적인 진상 을 구성해나가는 접근이 요구된다.
네덜란드 식민제국과 관련하여 여러 시각이 공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동인도회사와 아시아 지역들 간의 관계가 지역마다 천차 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타람(Mataram), 반텐(Banten), 마카 사르(Makassar)와 같은 인도네시아 지역들에서 동인도회사가 보인 통제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는 제국주의 세력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었 다. 그러나 이것이 전형적인 경우였던 것은 아니다. 동인도회사가 동 원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군사력을 갖춘 명·청나라, 무굴 제국, 사파비 제국, 아유타야 왕국의 경우에 동인도회사는 이들 지역 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중국과의 관계는 간헐적 이었으며 군사적 충돌5이 때때로 발생할 만큼 우호적이지 못했고 시 암의 아유타야 왕국의 경우 지속적인 관계가 정착되었지만 이는 동인 도회사가 해양봉쇄 압박을 통해 체결한 1664년 네덜란드-시암 조약 5 17세기 전반에 중국과 네덜란드 간의 갈등은 만성적인 것이었으나 1624년 명 함대 에 의해 펭후군도(澎湖群島)로부터 타이완으로 쫓겨난 것과 1662년 정성공에 의해 타이완에서 쫓겨난 사례가 대표적이다.
228 에 기초한 관계였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봤을 때 일란관계에서 동인 도회사가 보인 굴종적인 태도는 전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Clulow et al, 2014, pp. 255-262)
일본의 입장(1): 도쿠가와 막부의 세계관
네덜란드 측에서는 제국주의 논쟁이 전개되는가 하면 일본 측에는 쇄 국사관 논쟁이 존재한다. 쇄국사관은 1630년대 실시된 일련의 ‘쇄국 정책’으로 과거 일본이 외국과의 외교·무역 또는 문화 면에서 국제적 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사관을 가리킨다. (토비, 2013, p. 97) 1630년 대에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였으며 포르투갈인을 추방하고 네덜란드 상인들을 데지마에 가둔 것은 사실 이다. 하지만 쇄국사관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로널드 토비 (Ronald Toby)에 의하면 “이른바 ‘쇄국’이 완성된 것으로 이야기되 는 1630년대 에도 막부에는 스스로의 정책을 ‘쇄국’이라 간주하는 인 식이 없었고, ‘쇄국’이라는 말도 없었다”. (토비, 2013, p. 99) 토비는 쇄국 대신 대군외교나 화이·해금, 네 개의 창구 같은 표현들이 근세 일본의 기본적인 대외자세를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다고 제시한다.6 6 해금(海禁)이라는 표현이 제안되는 이유는 통상 쇄국령이라고 지칭되는 1630년대 에 5회에 걸쳐 내려진 금령이 당대에는 해금, 어금제(御禁制), 어금(御禁) 등으로 불 렸기 때문이고 대군이라는 표현이 제안된 이유는 쇼군의 외교상 칭호가 ‘일본국 대 군’이었기 때문이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이후 아사이 하쿠세키가 일본국왕으로 바꾸 229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토비, 2013, p. 128) 네 개의 창구는 당대에도 사용되었던 표현으로 중국7과 네덜란드와 교역하였던 나가사키, 조선과 교역하였던 쓰시마, 류큐와 교역하였던 사쓰마, 에조(蝦夷)8와 교역하였던 마쓰마에를 가 리킨다. 토비는 네 개의 창구가 쇄국의 예외가 아니라 네 개의 창구 자체가 막부의 방침이었음을 강조한다. (토비, 2013, p. 131)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의 대외 관계를 하나씩 살펴보자면 우선 일본과 중 국의 관계는 나가사키에 출입하는 중국 상인들과의 비공식적9인 사업 거래가 그 관계의 전부였다. 양국 간에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존재 하지 않았으며 서로 간의 관계를 조공책봉관계 따위의 주종 관계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명·청 조정의 입장에서 자국 상인들이 나가사키 에서 벌이는 상행위는 밀수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조선과 도 쿠가와 막부는 1607년에 정식으로 수교하였고 그 이후로 조선은 12 게 하였다.
7 나가사키의 중국 상인들은 도진야시키(唐人屋敷)에 거류하였다.
8 에조(蝦夷)는 아이누를 포함한 일본 동북부의 종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9 일본에서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있는 대외관계는 통신, 상업·무역 관계만 존재하 는 대외관계는 통상으로 분류하였다.
230
번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쓰시마 의 소씨(宗氏) 가문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부산 지역에 위치하였던 왜 관도 소씨 가문에 의해 설치된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외 교문서는 상호 간에 평등한 관계를 상정하고 있으나 이것이 양국이 서로에 대하여 실지로 어떤 주관을 형성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전부 설명해줄 수 없음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중산(中山) 왕조의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대하여 조공국이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기본 적으로는 비공식적이고 상업적인 종류의 것이었으나 데지마 상관장 231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은 매년 사절단을 꾸려 에도에 가서 쇼군을 알현하여야 했다. (Kazui, 1982, pp. 288-289)
이와 같은 일본의 대외관계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었고 이러한 이탈은 의도된 것이었다. 근래의 연구들 은 도쿠가와 막부가 가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중화’ 라 간주하는 일본형 화이질서를 표방했다는 견해를 주류로 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토비는 도쿠가와 막부가 표방한 화이질서가 대외적으 로 인정되었다기보다는 “일본이 스스로 구축한 관념적 구상(픽션)으 로 이해해야” 하므로 ‘일본형 화이관념(또는 의식)’이라는 표현이 보 다 적절하다고 제시한다. (토비, 2013, pp. 125-128) 일본이 대내적 으로는 조선통신사가 조공 사절이라고 선전하였던 것이나 네덜란드 상인들에 대해서 매해 조공사절10을 보낼 것을 요구한 것은 이러한 맥 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10 Adam Clulow는 The Company and the Shogun에서 이를 조공사절의 한 형태로 보기보다는 다이묘들을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물게 하였던 참근교대(参勤交代)의 변 형된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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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입장(2):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경제와
아라이 하쿠세키
The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기는 상업의 갑작스 러운 확장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이런 시대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여러 화폐정
책과 경제사상이 등장
경제가 처한 위기는 이중 이었는데 첫째는 시장 거래가 급속히 성장하는 데 반해 통화관리의 수준이 열악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거의 대부분이 수입이었던 일란무 역으로 인해 귀금속 보유량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 위기에 대한 막부의 대응은 개주(改鑄)였고 1695년부터 1868년까지 12번의 개주가 있었으나 매번 쇼군에게만 단기 이익을 내주었을 뿐 인플레이션을 촉발하고 금융제도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 즈키, 1989, pp. 30-35)
233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당대 가장 저명한 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11는 당대의 중농주의자들과는 달리 농업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 주장하지 않고 귀금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쿠세키는 금과 은이 “하늘과 땅 에서 만들어”지고 “한 번 없어지면 다시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조심 스럽게 절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쿠세키는 1709년부터 1716년 까지 6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7대 쇼군인 토쿠가와 이에츠 구의 최고고문으로서 정책 제안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무 역 문제와 그에 따른 귀금속 유출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스즈 키, 1989, pp. 30-45) 그는 나가사키 관청에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귀금속 유출에 대하여 나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우리가 케이쵸(慶長) 시대부터 107년 동안 나가사키 부교쇼(長崎奉
行所; 관청)의 정보를 기초로 외국으로 나간 금·은의 총량을 같은 기
간 국내에서 생산된 금·은의 양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금 4분의 1, 은
4분의 3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음 세기에 우리는 금은 절
반, 은은 전량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리는 무역량에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국내 수요에도 부족한 실정
이다.12
11 新井白石 (1657-1725)
12 Ackroyd, Joyce (ed.), Told Round a Brushwood Fire: The Autobiography of Arai Hakuseki,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p. 279. 테사 모리스 스즈키, 박우희 옮김, 『일본의 경제사상』 (솔, 1989), p,35에서 재인용.
234 앞서 언급했듯이 은의 수출은 이미 1668년에 막부에 의해 금지되었 기 때문에 하쿠세키의 시대에는 유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여하간 하 쿠세키는 책과 약재13 수입을 제외하고는 무역을 불필요하고 낭비스 러운 것으로 여겨 무역을 더욱 감축하자고 주장하였고 1715년에는 정덕신례14를 제정하여 청과 네덜란드의 무역 범위와 수출품 항목 등 을 크게 제한하였다. 이러한 그의 조치는 수출을 늘려서 국제수지를 흑자로 만들고자 하기보다는 무역 자체를 해악으로 여겨 감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쿠세키는 통화 문제도 해결하려 했으나 통화 가치와 상품 가치가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며 순환되는 금의 양을 대폭 줄이고 그 질을 상승시키고자 했던 그의 정 책은 금융제대의 미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스즈키, 1989, pp. 36-37) 그는 네덜란드 상인들과도 여러 번 만났는데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1712년 4월 3일 일기에는 상관장 Cornelis Lardijn과의 만남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13 하쿠세키가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기도 하였고 본인도 수입된 약의 덕을 많이 본 것으로 데지마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4 正德新例; 해박호시신례(海舶互市新例), 나가사키 신령(長崎新令)이라고도 부른 다.
235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선물을 포장하는 것을 마치었다. 겐우에몬(源右衛門)15이 아라이 하
쿠세키16의 도착을 알리었다. 하쿠세키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고 나
는 거기서 그를 만났다. 그는 서양인들이 일본식으로 앉으면 고통스
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편한 대로 앉으라고 했다. 그는 그가 호
기심에 찾아왔으며 또한 매우 오래되긴 하였지만 잘 보존된 세계지도
들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말해주었다.
작년에 데지마에서 번역한 지도도 그 중에 있었다. 이어 그는 브레다
의 항복 따위를 묘사한 오래된 네덜란드 인쇄물들 몇 가지와 브라질
해안의 네덜란드 점령지들이 그려진 작은 지도 몇 편을 보여주었다.
그 물건들에 대한 질문들에 내가 답하는 동안 그는 접착지에 메모를
하여 그 물건들에 붙이고 있었다. 우리와의 볼 일을 다 보고나서 그는
감옥에서 시도티 신부17를 만나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시도티 신부는 15 겐우에몬(Gen’eimon)은 통사 이마무라 에이세이(今村 英生; 1671-1736)의 별명 이다. 젊은 시절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를 수행하기도 하였던 겐우에 몬은 에도 시기에 가장 중요한 통사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포르투갈어도 약간 하였 고 라틴어 사전을 가지고 있었다.
16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는 Arai Chikugo라고 표기되어 있다. 17 예수회 소속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시도티(Giovanni Battista Sidotti)는 이탈리아 의 사제로 일본의 마지막 순교 선교자로 알려져 있다. 일기에는 시도티가 처음 체포 되었을 때 괜히 불똥이 튈까 봐 네덜란드 상인들이 염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른바 ‘시도티 사건’을 담당하였던 이가 바로 아라이 하쿠세키였다. 하쿠세키는 시도 티를 심문하면서 얻게 된 지식으로 『서양기문(西洋紀聞)』을 저술하였다. 하쿠세 키는 시도티를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기에서는 Father Joan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236 아직 건강하다고 했다. 하쿠세키가 떠났을 때는 이미 밖이 어두웠고
그는 또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1712년 4월 3일)
1714년에도 일본에서 복무했던 C. Lardijn은 1714년 4월 16일 에도 에서 하쿠세키를 다시 만난다. 정책적으로는 무역에 대하여 매우 부 정적이었던 데 반해 하쿠세키는 외부세계에 대해 공부하는 것과 외국 인과 교류하는 것 자체에는 무척 적극적이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나를 방문하였다. 그는 유럽과 인도, 특히 마닐라
의 풍습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시도티 신부와
그가 한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시도티 신부는 하쿠세키한테
곧 교황이 일본에 대사를 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시도
티 신부는 150년 전에 일본에서 선교하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시신이 지금까지 썩지 않았으며 인도 고아(Goa)에 모시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하쿠세키는 내게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하비에르가 고아에 묻혔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시신에 관한
가톨릭스러운 헛소리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쿠세키와의 대화는 세 시간이나 이어졌다. (1714년 4월 16일) 여기서 네덜란드 상인들의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가 있 다. 이후 Lardijn이 일본을 떠나면서 탑승한 Arion호가 코친차이나 인근에서 난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쿠세키는 유감을 표하며 지원 237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을 약속했다.18 1716년 3월 19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 다.
마치부교 오우카 키요스케는 아직 Arion호의 난파 소식을 막부에 알
리지 않았지만 나는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는 상관
장 Lardijn이 자신의 매우 좋은 친구였다며 그런 소식을 듣게 되어 유
감스럽다고 했다. (1716년 3월 19일)
하쿠세키와 상관장의 일화는 일본인들이 일란무역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감각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 인들은 왜 네덜란드인들과 무역을 200년 넘게 지속하였는가? 하쿠세 키 본인이 비판하였듯이 수입은 일본의 경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키 기도 하였고 그렇다고 해서 꼭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오는 것도 아니 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하는 물건들이 없다고 해서 일본이 크게 아쉬워했을 일도 아니었다. 엥켈베르트 켐퍼는 일본이 네덜란드인들 로부터 한 해 동안 수입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비단과 각종 재료를 일주일 사이에 소비한다고 적고 있다. (잰슨, 2006, p. 1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무역을 지속하였던 이유는 당시 일본 사회에 외부와 의 접촉에 대한 수요가 내재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정식으로 제 18 상관장 Cornelis Lardijn은 난파로 인해 사망했다. Arion호의 난파와 관하여서는 https://mass.cultureelerfgoed.nl/arion을 참고하라.
238 출되었던 화란풍설서를 비롯하여 여러 공식적,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방인과의 만남은 이미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한편으로 하쿠세키와 상관장의 일화에서 하쿠세키가 상관장에 대하여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상황과 인물이 특별하 다는 것을 감안해도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서는 이와 비슷한 다른 예를 찾기 어렵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읽기
(1): 도쿠가와적 질서의 수용
근세의 네덜란드와 일본은 각각 독자적인 세계질서 내지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네덜란드는 신생공화국이자 식 민제국으로서 개성적인 자의식과 세계인식을 지니고 있었고 도쿠가 와 막부는 일본식 화이질서 및 네 개의 창구라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한 두 세계관은 서로 전혀 이질적이면서도 자국 중심적 이라는 데서 불길하게 유사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세계관들이 거칠게 충돌하는 대신에 두 세계 간에 안정적이 고 평화로운 관계가 200년 넘게 유지되었던 것은 문명교류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가능하였던 것은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가 17세기 전반에 일본과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239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일본의 권역 내에서는 전적으로 도쿠가와적 질서를 수용하는 것을 대 일 무역의 기본 지침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19 그리고 네덜란드 동 인도회사가 유독 일본에 대하여 그러한 정책을 취하였던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가 여타 아시아 지역들과는 달리 일본에 대하여 서는 교섭의 우위를 점할 만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면적인 군 사 행동은 물론 해상봉쇄와 같은 간접적인 압박도 일본의 경우에는 불가했다. 1638년 12월 바타비아 총독은 동인도회사의 대일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인들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최
선의 인내력으로 좋은 때와 기회를 노려야 한다. 그들은 말대꾸를 용
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바람으로 사는 작고 겸손하고 얌
전한 상인인 체를 하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수록 그들의 땅에서 우리
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존중은 커진다. 오랜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이
러한 사실을 배웠다.... 일본에는 너무 겸손하다는 건 없다.20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동인도회사의 지도부 19 17세기 전반 일란관계가 확립된 자세한 과정에 관하여서는 Adam Clulow의 The Company and the Shogun을 참고하라.
20 Coolhaas, Generale Missiven, 1:704. Adam Clulow,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p. 260에서 재인용.
240 인 17인 위원회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였다.
우리는 상관들에게 이 오만하고 웅장하고 까다로운 민족을 모든 방면
에서 만족시키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지시도 내릴 수 없다.21
그리하여 확립된 쇼군과 동인도회사의 관계는 주군과 봉신 간의 관계 내지는 종주국와 조공국의 관계와 유비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동 인도회사는 봉신 내지는 조공국의 의무들을 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첩보 활동을 포함한 직간접적인 군사적 지원, 해상 군사 활동 금지, 쇼군의 법적 권위 인정 등이 포함되었다. (Clulow, 2014, p. 261) 네 덜란드 상인들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겸손과 굴종은 이들이 쇼군을 알 현하면서 견뎌야 했던 수모를 묘사한 장면들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 타난다. 엥켈베르트 켐퍼의 유명한 묘사22만큼 자세히는 아니지만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도 네덜란드 상인들이 겪 은 굴욕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1702년 3월 26일의 기록이다.
드디어 우리는 쇼군에게 데려가졌다.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페이스 21 Mijer, Verzameling van Instructiën, Ordonnanciën en Reglementen, 99. Adam Clulow,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p. 261에서 재인용.
22 이는 마리우스 B. 잰슨, 김우영 외 옮김, 『현대일본을 찾아서 1』 (이산, 2006), pp. 136-138에서 확인할 수 있다.
241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트리가 차려져 있었다. 남은 것은 종이로 싸여 있었다. 세 명의 신하
들을 통해 쇼군은 우리에게 코트를 벗고 회의를 하는 연기를 해보라
고, 또, 절을 하고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울어보라는 요구에 대해
서는 그것은 계집 같은 짓이며 상관장의 아들이 장애로 춤을 출 수 없
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702년 3월 26일)
네덜란드 상인들은 왕왕 코트를 벗어볼 것, 걸어 다녀볼 것, 노래 부 르고 춤춰볼 것, 일본어를 해볼 것, 펜싱을 해볼 것, 회의하는 모습을 연기해볼 것 등등 갖은 무례한 요구들을 받았고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가 도쿠가와적 질서를 수용하였다는 것은 일본의 권역 내에서 자신들의 해양세력으로서의 군사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 의 권력 구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정치적인 관점에서 이는 자신들의 세계관을 주장하지 않고 일본의 화이관념에 협조하였 음을 함의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일본의 화이관념이 객관적인 의미 에서의 일본의 대외관계와 불일치한다는 점이 상기될 필요가 있다. 류큐와 에조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화이관념과 객관적인 대외관계가 일치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조선과 청나라의 경우 그러하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은 공식적으로 상호 간에 평등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 으나 일본의 화이관념에 따르자면 조선은 일본의 조공국이 되어야 했 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우 양국 간에는 비공식적인 통상의 관계만이 존재하였거니와 이마저도 일본에서는 막부가 중국 상인들을 직접 관
242 리하고 있었던 데 반해 청나라의 경우 일본과의 상행위를 승인한 적 이 없었다는 데서 인식의 불일치가 존재했다. 더욱이 일본의 화이관 념이 청나라의 천하질서에 대하여 대항적인 세계관이었음을 생각하 면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더한 불일치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 본은 단순히 청의 천하질서를 부인한 것을 넘어 만주족을 북적(北狄) 취급하여 스스로 중화라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네덜란드는 일본의 화이관념을 어느 한도까지 수용 하였는가? 우선 네덜란드 상인들부터가 스스로 오랑캐 취급을 받는 것을 감수하고 있었으므로 일란관계가 화이관념에 의해 규정되는 것 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청일 관계에 관하여서도 네덜란드가 청 나라의 천하질서에 구속을 받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일본의 대 청 인식이 거슬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네덜란 드 동인도회사와 중국 조정 간의 관계는 우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었고 중국 상인들과는 아시아 무역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관계였다. 이러한 경쟁적인 관계는 나가사키에서도 재현되었는데 나 가사키 시장에 판매자가 둘뿐이고 일본에서 판매하는 품목이 서로 간 에 상당 부분 일치하였기 때문에 경쟁과 견제는 만성적이었다. 실상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는 일종의 ‘중국인 감시 일 지’라 해도 될 만큼 감시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를테면 1703년 3월에 부상관장이 작성한 일기에는 상관장이 에도로 떠난 동 안 중국인을 감시한 내역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243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정크선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크선의 숫자가 작년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703년 3월 3일)
매일 정크선이 도착하고 있다. 한 정크선은 사쓰마에서부터 견인되어
왔다. (1703년 3월 11일)
겐우에몬에 의하면 중국인들이 가루 백설탕보다 사탕수수 원당[무스
코바도]을 더 많이 가져왔다고 한다. (1703년 3월 18일)
정크선들의 화물에 대한 정보가 아직도 없다. 작년 정보도 없다. 일본
인들은 그들이 심하게 감시당하고 있으며 최근에 한 명이 금지당했다
고 말했다.23 네 척의 정크선들이 견인되어 들어왔다. (1703년 3월 20
일)
모든 감정가들이 도진시야키에서 선물들을 바삐 정리하고 있었다.
(1703년 3월 25일)
중국인들이 사쓰마에서 무제한한 활동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많은 정
크선들이 그곳에 ‘강제로’ 정박해야 했고 검사 없이 상품을 운송할 수
있었다. / 한 달 동안 38석의 정크선들이 도착했다. (1703년 3월 31
일)
이런 식으로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정크선의 개수, 중 국인들이 판매하는 상품의 품목과 가격, 거래규모를 최대한 알아낼 23 맥락상 네덜란드인들에 협력하였던 일본인들이 도진야시키에서 정보 수집을 하다 가 그 중 한 명이 출입 금지를 당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244 수 있는 만큼 기록하였다. 이 외에도 중국 상인들이 벌인 잦은 밀수와 폭동, 일본인들과의 갈등에 관한 내용 역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조선과 일본의 관계와 관련하여 조선이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서 조선이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주장은 주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siks, seecon, sicq, sick, 혹은 cataber라고 표기한 날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이는 모두 음력 5월 5일인 단오를 의미한다. cataber는 카타비 라(帷子)라는 일본의 여름 옷을 가리키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단오에 카타비라를 입고 축제를 즐겼다 한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의 편집자들은 용어사전에서 siks, seecon, sicq, sick의 의 미가 불분명하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일본에서 단오를 이르는 말인 단 고노셋쿠(端午の節句)에서 셋쿠(節句; 절구)를 들리는 대로 적은 것 으로 추정된다.24 절구는 명절이라는 뜻으로 주로 3월 3일이나 5월 5 일을 일컫는다.
일본인에 의하면 카타비라(帷子)날은 제국의 모든 곳에서 기념되고
있다. 이 날에 일본인들은 조선이 일본이 조공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념한다. (1703년 6월 18일)
24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의 편집자들에 의하면 네덜란드 상인들 이 이런 식으로 일본어 단어들과 이름들을 자의적으로 표기한 것이 번역 작업을 어 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245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데지마 하인들의 대다수가 절구(節句)와 관련하여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 날은 일본의 조선 정복을 기념한다. (1704년 6월 6일)
절구(節句). 대부분의 하인들은 그들의 절구와 관련하여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 날의 축제는 조선을 자신들의 조공국으로 만든 승
리를 기념한다. 이 날은 일본인들이 카타비라를 입기 시작하는 여름
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하인들은 하루종일 맘껏 즐길 거라며 마을로
떠났다. (1712년 6월 8일)
내일은 백 년 전 조선이 스스로, 혹은 그보다는 강제로 일본에 복속된
사실이 기념될 것이다. (1715년 6월 5일)
네덜란드 상인들이 조선통신사를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가 다루고 있는 시기 동안에 조선통 신사의 방문은 1711년-1712년, 1719년-1720년 이렇게 총 두 번이 있었다. 1711년-1712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 종사관 이방언이, 1719년-1720년에 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정사 홍치중, 부사 황 선, 종사관 이명언이 에도를 방문했다. 1719년-1720년의 방문에 관 하여서는 일기에 언급이 없지만 1711년-1712년 통신사에 관하여서 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1712년 에도로 향하던 상관장의 사절
246 단이 에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조선통신사와 시모노세키 에서 마주친 것이다.
우리는 조선 왕의 세 대사들이 쇼군의 즉위를 축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무리는 660명에 달하였다. 약 백 년 전에 태합(太
閤)25이 그들을 정복하고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 막부는 모든 다이묘
들에게 이들을 최고의 격식과 호화로운 선물들로 맞이할 것을 명했다.
조선인들의 선물은 인삼과 모피로 이루어져 있었다. (1712년 2월 28
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조선인들이 가득 탄 작은 배들이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우리 쪽 호위대는 급하게 우리를 여관
으로 안내하고 문들을 닫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선인들은 담장을
기어올라 우리 통사들을 경악하게 했다. 통사들은 조선 쪽 호위대에
게 조선인들을 말리라고 부탁했지만 몇몇 조선인들이 해칠 의도가 없
었다며 완벽한 일본어로 대답하여 통사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하들에게 실내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조
선인들은 우리가 모두 외국인들이니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서로의 본국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 좋겠다고 중국어로 계
속 소리쳤다. 시간이 지나자 소리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식사를 하
고 나서 우리는 여관을 몰래 빠져나와 배로 가서 조선들에게 시달리 25 Taiko로 표기되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킨다. 247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지 않기 위해 거기서 잠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1712년 2월 29일)
담수가 부족해 항해할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다시 우리와 접촉하려
시도하였으나 우리 쪽 호위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1712년 3월 1일) 조선을 일본의 조공국 내지는 그 유사한 지위에 있는 나라로 여긴 네 덜란드의 대조선 인식은 17세기 초부터 존재하여온 것이다. 일본과 통상을 시작한 이후 동인도회사는 조선 무역을 시도하였는데 1609년 에 당시 네덜란드의 최고지도자(stadtholder)였던 마우리츠(Maurits) 왕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각하의 은혜와 원 조에 의해 코레(Coree)와의 무역을 향수하고” 싶다는 표현이나 “고려 국에도 어쩌면 가고 싶다고 말씀드릴 때는 허락(朱印)을 지시하여 내 려주실 것을 삼가 부탁”드린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당시 네덜란 드는 조선과의 무역에 관하여 일본의 답을 듣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동인도회사는 여러 번 조선 무역을 고민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다가 하멜 사건 이후 다시 적극적으로 그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하지만 종 국에는 조선무역을 포기하였으니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이 “시나 인과 일본인 양쪽의 신하”여서 중국과 일본이 조선과 “무역거래를 행 해는 것을 방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동규, 2003, pp. 78-104)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는 이러한 대 조선 인식이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종합하자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란관계, 청일관계, 조일관 계 등의 국제적 관계들에 관한 일본의 입장과 주장에 대하여 거의 아
248 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일 란관계에 대해서는 감내하여야 헸고 청일관계에 대해서는 동의하였 으며 조일관계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 읽기
(2): 통제된 갈등26
네덜란드가 도쿠가와적 질서를 수용함에 따라 일란관계의 형식에 대 하여서는 양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그 내용에 관하여서 는 갈등의 요소가 상존하였다. 양국 간에 무역을 하는 상황에서 무역 량과 가격이 일본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니 이윤을 남겨야 하 는 네덜란드 측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 대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란무역은 하쿠세키가 지적하듯이 산 26 Adam Clulow는 The Company and the Shogun: The Dutch Encounter with Tokugawa Japan에서 근대 초기의 아시아-유럽 관계와 관련하여 학계 내에 존재하 는 경쟁하는 두 개념적 틀로서 파트너십의 시대(age of partnership)와 통제된 갈등 의 시대(age of contained conflict)를 소개하고 있다. Clulow는 통제된 갈등 (contained conflict)이라는 개념적 틀을 취해 17세기 초에 일란관계가 탄생한 과정 을 분석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에 나타나 는 통제된 갈등의 양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Clulow가 관계 초기 탐색과 조정 단계에 서 갈등이 통제된 양상을 고찰하였다면, 이 절에서는 탐색과 조정이 이루어진 이후에 발생한 갈등이 관리된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249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품(産品)을 귀금속과 바꾸는 무역이었기 때문에 규제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698년에 설치되어 나가사키 무역을 총괄적으로 관리, 규제하였던 나가사키 회소(長崎会所)27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수수료와 관세를 부과하였고 구리 가격을 규제하였다. 이는 네덜란드 상인들 입장에서 달가울 수 없는 일이었고 회소가 설치된 지 얼마 지 나지 않아 상관장 Dijkman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통사들과 다른 일본인들이 감찰관28들에 대한 선물과 담수를 가져오
는 동안 범선들을 견인하였던 부교의 하인들에 대한 지불에 관한 우
리의 답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이미 가
격이 높고 이 감찰관들이 쇼군의 사적인 하인들이며 우리가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고 이들이 어떠한 선물도 받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
에 바타비아 총독부가 감찰관들에게 선물을 줄 의향은 없다고 답했다.
거기에 더해 바타비아는 부교의 하인들에게 지불하는 것을 원하지 않
는데 이는 나쁜 무역 조건과 도시가 나가사키 회소를 통하여 하는 무
역의 이윤 때문이다. (1701년 8월 9일)
중국인들에 대한 감시 내용과 더불어 나가사키 회소, 미야코(교토) 시 27 나가사키 카이쇼(nagasaki kaisho)라고 발음되며 일기에는 geldkamer라고 표기되 어 있다.
28 Metsuke(目付)를 의미하며, dwarskijker로 표기된다.
250 장의 가격표, 구리 가격, 사절 비용 절감 등 이윤과 관련된 사항들이 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은 많은 부분 미야코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인들에 의해 결정되었 고 구리 가격은 나가사키 회소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미야코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과 구리 가격을 내려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상인들로서는 중요한 임무에 속하는 일이었다.
일란관계에서 갈등이 통제되어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 네 덜란드 상인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여기저기에 부탁하고 요구하는 것에 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측이 이러한 요구에 매우 소극적으로 응하였으며 무역에 대한 규제가 확대되고 무 역 자체는 감소됨에 따라 때때로 동인도회사의 불만은 일본과의 무역 을 포기하는 것을 고민하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하쿠세키의 정덕신례 가 제정된 이듬해인 171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울러 (통사 겐우에몬과 고헤이에게) 나는 Arion호의 동료들과 관
련한 우리의 요청이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어떤 결정들
이 내려졌는지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또한 만약 동인도회사가 일본을
떠난다면 남은 상품들과 우리 배들에 의해 구매된 상품들을 팔고 떠
나는 것이 허용될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만큼 많은 구리를 구
매하는 것이 허용될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 /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만약 동인도회사가 일본을 떠난다면 우정의 연이 끊
어질 것이고 과거에 동인도회사가 거둔 커다란 이윤을 생각한다면 손 251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
된 것이 없다. (1716년 3월 15일)
일본인들은 우리가 떠나든지 남든지 신경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
이 우리의 존재로부터 득을 보는 게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
다. (1716년 3월 19일)
하치재몬29과 고헤이30가 새 상관장이 임명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위
원들이 어떻게 결정하였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그들은 우리가 분명히
내년에도 일본에서 교역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716년 5월 24일)
우리는 오우카 키요스케의 거주지로 갔다. 그는 무역에 관한 새 명령
들[정덕신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부하도 똑같이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 정덕신례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는 이것이 동인도회사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며 이 문제에 관해 자유로이 질문할 것을 청했다.. 오우카
키요스케31가 그런 뜻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를 믿기를
주저했다. 음식을 제외하고는 그가 검사하기 전에 섬에 들어올 수 있 29 Namura Hachizaemon. 네덜란드어에 유달리 능통한 상급 통사였으며 겐우에몬 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통사 중의 한 명이었다.
30 Namura Gohei. 일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견습 통사로 무능력하고 네덜란드어를 못한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31 오우카 키요스케(Ōoka Kiyosuke)는 당시 무역에 관하여 자세하게 분석하여 이를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보고했다. 오우카 키요스케의 보고서는 정덕신례가 제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52 는 것은 없다. (1716년 5월 26일) 1716년 9월 1일 Ternissen호와 Rijxdorff호가 정덕신례 수용 및 무역 지속 여부에 관한 상부의 결정과 함께 도착한다. 결론은 정덕신례를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쿠세키는 네덜란드와 교 역을 중단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러므로 무역의 규모를 규제하면서도 네덜란드가 교역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이윤은 남기게끔 규제를 설 계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도 손해가 되는 장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역을 지속할 정도의 이윤은 남길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 이후 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정덕신례에 관한 상부의 결정을 일본인들에게 전달했다. 우리
는 정덕신례를 따를 것이다. 통사들은 우리 상품들의 가격이 작년보
다 훨씬 낮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마치부교는 우리 상부의 답을 에
도로 전했다. (1716년 9월 4일)
마치부교의 거주지에서 정덕신례가 선포되었다. (1) 일본인 하인들은
더 이상 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2) 우리 측 배가 직접 물을 가지러
와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일본 배들이 물을 공급하여 줄 것이고 비용
은 마치부교가 치를 것이다. (3) 섬에서 돈을 소지해서는 안 된다. /
모든 지불은 나가사키 회소를 통하여 송금되어야 한다. (4) 앞으로 모
든 것은 검사될 것이다. 식량은 창고에 보관될 것이다. (5) 네덜란드 253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인과 일본인 모두 검문될 수 있는 새로운 경비실이 지어질 것이다.
(6) 매달 새로운 식량 가격표를 받을 것이다. (7) 일본을 떠나는 모든
물건은 부교의 하인들에 의해 포장될 것이다. 우리는 매 조항마다 일
본어로 ‘카시아마타(Casiamatta)’32라고 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을 표
시해야 했다. (1716년 9월 19일)
1730년대에는 비슷한 패턴의 사건이 더 높은 수위로 발생했다. 후쿠 다 로쿠재몬(Fukuda Rokuzaemon)은 나가사키의 연기(年寄)33였는 데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마뜩찮게 생각한 인물로 무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네덜란드 상인들이 배 세 척으로 무역할 수 있게 허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또 다른 연기인 도카사와 사크베(Tokasawa Sacbe)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논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연기 로쿠재몬과 사크베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나가사키 주민들의
가난을 고려하여 사크베는 우리에게 우리가 조정으로부터 배 세 척으
로 무역할 허가를 받았으며 충분한 구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
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로쿠재몬은 이에 반대했다. 그들은 싸우고
자 했으나 이는 저지되었다. 그들은 서로 감정이 매우 좋지 못하다. 32 편집자들은 각주에서 Casiamatta [Kashikomatta]: Very well, Sir라고 풀이하고 있다.
33 도시의 원로로서 막부의 벼슬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254 언젠가 스카베의 관점이 이기길 바란다. (1729년 6월 3일) 1732년 9월 가격 결정 과정에서 가격이 너무 낮게 제시되자 상관장 Boockesteijn은 통사들에게 가격 수준을 1725년 수준으로 올려달라 고 요청해달라고 했으나 통사들이 거절하자 그렇다면 1727년 수준으 로 요청해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겐우에몬이 1731년의 가격 수준이면 만족하겠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들이 가격 수준을 1725년으로 올릴 것을 요청해야 한다고 반복하
여 말했다. 나아가 내가 직접 이나바와 로쿠재몬과 이 문제를 논의하
고 싶다고 제안했다. 겐우에몬은 두 제안 모두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 그래서 나는 가격 수준을 1727년 수준으로 올려달라고 요청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통사 무리에 의해 거부당했다. 겐우에
몬은 우리가 무역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물었다. 나는 그가 누구
를 대변하여 그렇게 말하는지 되물었다. 그는 자신으로서 한 말이라
고 답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라 답하고 요청해
달라고 다시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겐우에몬은
저녁에 우리의 결정을 들으러 다시 온다고 말했다. / 다시 돌아오자
겐우에몬은 요청이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렇다 해도 계속 무
역을 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이 모호한 질문에 대해 나는 중도책으
로 가격 수준을 1729년 수준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 나는 동인
도회사의 위원들이 우리가 이따위 취급을 받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255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반응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위원들이 아마도 일본과의 무역
을 중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이 주장은 다른 주장들처럼 통사 무
리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끝내 열한 시가 다 되어서 겐우에몬
은 그들이 가격 수준을 1729년 수준으로 올릴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
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로쿠재몬이 이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네 번째 호가(呼價)는 마치부교들이
겨우 납부하고 있는 쇼군에게 바치는 세금이 제하여진 가격이었기 때
문이다. 그들이 쇼군에게 세금을 납부하느라 쩔쩔매고 있다고 했다.
겐우에몬은 배들이 떠나고 나면 자신은 해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는 여생을 평화롭게 보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1732년 9월 29일)
겐우에몬은 요청을 제출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 로쿠재몬은 우리
말이 맞다며 그 역시 일본과의 우리의 거래가 더 이상 수익성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상품에 대해 더
높은 값을 치를 수 없다고 했다. (1732년 9월 30일)
이후에도 타협은 쉬이 내려지지 않았다. 1729년 수준으로 올려달라 는 요청이 거절당하자 상관장은 장뇌(camphor)와 구리를 원하는 만 큼 많이 살 수 있다는 조건으로 1730년 가격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해 달라고 했지만 겐우아몬은 1731년 수준으로 올려달라는 요청을 제출 했고 로쿠재몬은 쇼군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이유로 이마저도 거절 했다. 결국 겐우에몬이 다섯 번째 호가를 전달하고 네덜란드 상인들 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1732년의 무역은 힘겹게 성사되었다. 이듬해
256 로쿠재몬이 전보다 강력한 무역 규제를 선포하자 네덜란드의 불만은 더욱 심해졌고 급기야 1734년에는 바타비아 총독이 쇼군에게 보내는 편지가 데지마에 도착했으나 쇼군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일본인들의 만류에 전달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갈등 양상은 1730년대 내내 지속되지만 무역이 실제로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18세기의 갈등 국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네덜란드 입 장에서 본다면 대일본전략의 요체는 자신들이 일본인에 대하여 정치 적 충성을 바치면 일본 무역에서의 흑자수지를 통해 아시아 무역에서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굴종을 팔 아 은과 구리를 사는 장사였다. 그런데 17세기 중반부터는 은의 수출 을 금지하더니 1715년에는 정덕신례로 인해 배도 두 척밖에 운용하 지 못하게 되고 1733년에 로쿠재몬이 규제를 더욱 강화하니 거래의 공정한 균형이 깨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의 입장에서는, 하쿠세키의 예가 가장 잘 보여주듯이, 일란무역의 경제 적인 이익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흔 히 강조되듯이 서양과의 교역이 가지는 대체 불가능한 효용도 있었으 나 경제적으로 비대한 식민제국과의 교역에는 위험과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역이 끝내 중단되지 않 았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는 일본과 네덜란드 양 방에 있어 일란무역이 가지는 가치가 경제적인 것에 제한되지 않았다 는 것이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다는 사실 257 5. 굽히는 제국과 열린 쇄국_데지마 자체가 가지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적은 이윤만으로도 무역 은 유지할 가치가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일란무역이 가지는 문 화적, 정치적, 전략적 가치는 그 경제적 가치의 양가성에 의해 흐려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둘째는 일란관계가 매우 강력한, 18세기의 경우에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무역갈등을 억누르는 수준의 경로의존 성을 띠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초의 일란관계는 벌써 백 년 가까이 유 지되어 온 상황이었다. 이 사실은 특히 일본 측에서 일란무역을 포기 하지 않았던 까닭에 대하여 설명력을 가진다. 일본 입장에서는 안전 하고 검증된, ‘고분고분한’ 서양 세력이라는 메리트가 작지 않았을뿐 더러 이미 백여 년 넘게 서양과 교류하여 온 상황에서 서양과의 교역 을 쉽사리 일체 중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로쿠재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내에서도 일란무역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 였으며 이는 당시 일본 사회 내의 정치적 갈등과 얽매이기도 하였다. 18세기에는 주로 무역에 부정적인 견해에 더 많은 힘이 실어지는 경 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무역에 대한 각종 규제 등으로 표현되었다.
나가며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1740는 역사적으로는 이백 년 관 계사의 한 가운데에서, 정치적으로는 네덜란드 측에서 데지마의 국제 정치를 살아내는 동시에 존속시켰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 다. 이 시기에는 일란무역의 경제적 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일본과 쇠
258 퇴하는 식민제국 사이에서 일찍이 17세기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 해관계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현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통제된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교역은 지속하였다. 일란무역의 전성기 에 비하면 18세기 전반은 침체와 불화가 잦은 시대였으나 100년의 우정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데지마의 국제정치가 보여주는 것은 평화의 내막은 실로 고 요하지 않으며 평화적인 관계는 역동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유지된다 는 것이다. 데지마는 두 국가 간의, 혹은 두 세계 간의 합의에 의해 설 치된 교섭의 장치였지만, 그 합의가 200년에 걸쳐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데지마의 인간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가장 이질적인 두 세계 사 이에서 그 조정과 타협을 매개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긴장된 평화 와 통제된 갈등을 요체로 하는 데지마의 국제정치는 데지마를 둘러싼 거시적, 미시적 현실을 아울러 고찰했을 때 그 온전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Deshima Diaries Marginalia 1700- 1740는 동과 서, 미시와 거시의 접점에 서 있는 개인들의 살아진 경 험을 증언하고 있다. 데지마의 국제정치가 가지는 함의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저자들인 네덜란드 상인들이 의도하였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진 실이 진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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