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 규슈 도자기 문화관
동아시아에서 빚은 미래의 세계정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조현희 · 서울대학교
서론: 임진시기 이전의 도자 기술 전파
산업혁명 이전 시기 도자기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핵심적인 교류물 품이자 나아가 동서문화교류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세계 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이다. 과거 도자기는 현재 수공업에 불과한 상품적 가치와는 달리 동아시아 예술사나 문화사, 정치경제사의 맥락 에서 분석될 수 있는 문명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국의 왕조 교 체나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 간 전쟁 등 정치적 사건의 변화는 동아시 아 도자산업의 발전사와 이후 도자 무역구조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다. 16세기 도자 무역에서 대부분 수출되는 도자는 청화백자와 같이 고급의 기술과 원료를 원활히 수급할 수 있어야 되고, 대량으로 생산 이 가능한 생산체계를 갖춰야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자기 기술이란 그 이전 단계의 도자와 다르게 연료와 소성 기술 그리고 이를 위한 가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마 구조에 대한 기술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첨단기술이 었다. 이러한 최첨단 기술 획득은 한 세기 내에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6세기까지는 중국과 조선만이 가지고 있었으 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 국가들이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전근대 시기의 최첨단 기술집약재였다(김유정, 2017, 3).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에 동아시아 도자산업 구조는 변화한다. 후발국이었던 일본이 세계 무역시장에서 등장하여 유럽까지 무역도 자를 수출하게 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자기 기술 을 단시간에 습득한 과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데, 당시 도자기의 도제식으로 전수되는 기술 이전의 특성을 고려하자면 기술 자 이동을 통한 직접적 기술 이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직접적인 계 기는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과 정 유재란에 출전한 일본 다이묘들이 조선 도공들을 강제로 잡아간 사건 에서 비롯된다. 구체적으로 피랍된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자기 기술 을 어떻게 전파했는지에 초점을 둔 연구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한국 과 일본 양국은 임란시기 조선의 자기 기술 도입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에 대해 관련된 기존 연구들을 검토하고 양국의 시각 차이를 분석 하고자 한다.
도자기의 과학기술성
도자기(陶瓷器)라는 말은 도기와 자기를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엄밀하게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120 보통 토기, 도기, 석기, 자기의 네 단계에서 토기를 제외한 나머지 기 물들을 도자라고 하고, 마지막 단계를 자기라고 한다. 네 가지로 분류 하는 기준은 흙과 굽는 온도라고 할 수 있는데, 1,000℃ 이상에서 구 워지는 것은 도기(pottery), 1,200℃ 이상에서 구워지는 것을 석기 (stone ware), 1,300℃ 이상에서 구워지는 것을 자기(porcelain)라고 한다. 또한 도기나 석기는 주로 점토인 반면, 자기는 고령토라는 태토 로 이루어져 있다. 도기가 자기보다 덜 단단하다. 만약 도기를 자기 굽는 가마 속 온도에 넣으면 까맣게 타고 깨져버린다. 따라서. 높은 열을 견디면서 투명한 색의 도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경질백 자보다 더 질 좋은 백토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먼저 새로운 첨단 원료의 발견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원료인 백토에 혼합될 점토와의 배합이 가마 안에서 어떠한 화학적 반응이 낳을지에 대한 계산된 실 험을 거쳐야 높은 온도에서 백자의 형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결과값을 얻을 수 있다. 그 지역 토양에서 발견된 원료를 가지고 화학적 계산과 반복된 연구실험을 통해 과학지식의 발견과 과학 기술의 만남이 이루 어져야 되는 것이다. 특히 도자기의 과학기술성이 집약적으로 드러나 는 지점은 소성 기술에 있다. 자기 단계에서는 1,300℃ 이상의 고온 을 유지할 수 있는 연소기술과 가마기술, 냉각방법 등의 물리적인 측 면뿐만 높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마의 구조와 소성 시 가마 안의 화학적 실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도기 단계까지 는 자국 내에서 획득할 수 있는 수공업 기술이라고 분류할 수 있지만, 자기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과학, 즉 첨단기술의 보유와 기술집 약재의 생산 능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과학기술 영역의 차원인 것이 121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다.
임란시기 이전 중국 도자의 모방 기술과 직접적 기술
전수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자문화권에서 일본 도자 산업은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17세기 이전까지 일본은 일생생활에 필요한 도기를 만드는 전통가마는 존재했지만, 중국과 조선이 가진 높은 소성온도로 굽는 기술과 고령토는 없었다. 일본 도기에서 드러난 중국도자 모방의 한 계는 외형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으로부터 직접적 기 술 유입 없이 중국 도자기 수입으로 청자와 백자를 재현, 모방이 장식 이나 형태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기, 도기 석기까지 단계는 17세기 이전 중국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에 서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나, 자기의 경우에는 중국만이 그 재료와 소송법을 알고 있었다(미스기 다카토시, 2011, 11). 세계 최초로 유약을 바 른 도기는 중국에서 실행되었고, 높은 온도에 굽는 도자기에 사용되 는 유약인 회유도 중국에서 시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가마의 구조에서 중국의 원류로 보이는 요소의 발견을 통해 초기 중국의 연유도기와 같은 유약 기술들이 조 선으로 도입되는 과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당시 고려는 태토의 강도 나 유색과 같은 부분에서 질적으로 우수하지 못했다. 원나라와 명나 라로부터 조선에 중국 도자가 유입된 이후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 선 도자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원료와 기술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122 백자와 청자와 같은 자기는 경덕진 인근 고령산에서 발견된 고령토 즉, 내화도가 높은 백토라는 원료에 점력인 높은 백점토를 혼합함으 로써 더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좋은 원료와 혼합기술을 먼저 보 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918-1392) 시기 제작된 고려청자는 중 국의 모방 기술 수준을 넘어 고려화가 되는 발전 과정을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나타난 조선백자를 보면 한층 더 기술 진보가 일어난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청자와 백자의 소성온도에 있 다. 고려시대 청자가 1200 전후인 것과 달리 백자는 1250℃ 이상의 고온을 견딜 수 있는 더 높은 내화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시기 고려와 달리 일본도자는 고려 도자와 발전 격차를 보이게 되는 데, 그 차이는 모방 기술 수준에 그쳐 있었다는 데서 드 러난다.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의 도기를 보면 중국도자의 모방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모방 기술적 한계가 섬세한 제작기술 측면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그 중 출토된 일본도자 세토요를 보면, 남송(南宋, 1127-1279)과 원대(元代, 1271-1368) 경덕진 청백자 매병과 흡사한 모습이지만 고급자기의 형태가 아니라 중국 기형만 유사할 뿐 유약이나 소성온도, 태도 등에서도 많은 차이 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방병선, 2018, 230). 일본의 경우 고급 자기는 중국제 수입품으로 충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기술 발전의 동력으로 이어지기 어려웠던 것 이기도 했다고 보기도 한다(방병선, 2018, 230). <표1>을 보면 중국 송대 도자와 이를 모방한 일본 세토요이다. 그 옆에는 일본이 중국 도자의 대체로 수입했던 고려도자의 모습이다.
123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표1>
청자환이 흑유인화문환이화병, 청자양이병,
첩화모란문병, 세토요, 14세기, 고려 시대,
용천요, 원 14세기 높 높이 22. 5cm, 높이 24.5cm, 입지름 9.4츠,
이 26cm, 아이치현도자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 이후 일본의 도자 수출의 성공
임진왜란 이전까지도 한자문화권에서 일본 도자 산업은 후발주자 에 불과했다. 17세기 이전까지 일본은 일생생활에 필요한 도기를 만 드는 전통가마는 존재했지만, 중국과 조선이 가진 높은 소성온도로 굽는 기술과 고령토는 없었다. 일본 도기에서 드러난 중국도자 모방 의 한계는 외형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으로부터 직접 적 기술 유입 없이 중국 도자기 수입으로 청자와 백자를 재현, 모방이
124 장식이나 형태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은 16세기에 가장 먼저 도자기 산업의 세계 수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지만 명-청교체 시기 쇄국정책으로 인해 수출용 도자생산이 크게 줄어들면서 동인도 회사의 수요를 맞출 수 없는 지 경에 이른다. 이때 동인도 회사는 일본의 백자 생산 사실을 알고 중국 산 자기의 대용품으로 일본 백자를 선택하게 된다(전충진, 2001, 84-84). 이 계기로 일본에서는 백자 생산에 탄력을 얻게 되고 유럽의 기항지 를 나가사키 앞의 ‘데지마’라는 인공 섬을 만든다. 이때 네덜란드 동 인도회사의 공식 수출이 이마리항을 통해서 이루어져서 일본산 도자 기를 ‘이마리 자기’라고 부른다(와타나베 요시로, 2013, 243-246).
17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백자 생산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국 도자의 모방 수준도 떨어졌던 일본이 중국의 차선책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백자의 독창성 때문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상인 들이 일본에게 중국의 ‘Kraak war’이라는 청화 백자의 샘플과 똑같 은 것을 주문했다는 것을 미루어봤을 때 일본의 백자 기술의 보유 자 체가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중국 도자의 모방 수준에 그쳐 있던 일본은 임란시기 데려온 조선 도공들을 통해 자기 기술을 체득 하고 대량생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의 시각: 임란시기 조선의 도자 기술이전의 모습
한국의 경우, 동시대 한일 간의 도자기라는 유물을 비교하는 형태 로 기술이전을 보기 위해 한일공동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운 여건이기 도 하지만 조선 도공의 인물 자체나 이들이 일본 도자발전에 대한 기 여라는 애국적 목적 하에 이루어진 것들이 다수를 차지했었다. 도예 125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사적으로 유물을 통한 조선 도공들의 기술 전파를 분석하고 있는 방 병선의 연구들을 제외하면, 일본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임란시기 끌 려간 조선도공들의 납치 경위와 계보를 정리하는 고고학적, 역사적 바탕에서 분석하고 있다. 조선 도공들에 초점을 두고, 임진왜란 시기 를 기점으로 강제 이주한 사람들의 규모, 구성, 일본에서의 정착지, 회귀 여부, 적응 과정 등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 반면, 김유정 (2017) 연구는 첨단 기술이 이동하는 정치경제학적 동기에 주목하고 있다. 단순히 소비 욕구를 넘어 그 행위 자체가 가지는 정치, 사회, 문 화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도자산업의 수요와 공급, 그 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제도문화적 기반과 물질적 기반까지의 다 층적인 면을 포착해야 한다고 한다. 대게, 한정적 자료를 바탕으로 그 ‘자기’라는 당시 최첨단 기술 이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선 도공을 둘러싼 환경적 조건들에 맞추어 우회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 도공들이 이주 전 우월한 자기 기술이 있었다 는 여부와 일본 정착 과정, 정착 후 생업용 도자 활동을 넘어 자기 기 술 발전에 전념할 수 있었던 제도적 보호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검토하는 경향을 가진다.
조선 도공의 기술 전파와 그 조건
임진왜란 시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피로인들은 자기 원료인 고령토(高靈土)’라 하는 백토(白土)와 함께 주로 규슈(九州) 사가현 가라츠항을 통해서 들어오게 된다. 이후 조선 도공들은 규슈 지역을
126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나뉘어 정착한다. 야마구치현의 하기(萩)를 제외하면 다이묘들의 출신지가 많은 규슈 지역이 조선 도공의 정착지가 되는 경우다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방병선, 2003, 32). 그 중 조선 도공들에 의해 지어진 가마를 기준으로 일본 전통 도자가 발전되었다고 보는 지역은 규슈(九州), 사쓰마(薩摩), 하기(萩), 아가노(上野), 아리타(有田), 히라도, 미카와치, 하사미, 이마리, 가라쓰(唐津), 다카도리(高取) 등으로 대부분 규슈 일대의 정착지와 일치한다.
조선 도공들이 가마를 개요했던 시기까지만해도 일본의 도자기 제작기술은 1000도 정도에서 소성되어지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조선은 이미 1200도 이상에서 소성되는 도자기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도 이러한 자기 기술과 같은 우월한 도자 기술을 보유했는가? 방병선 연구에서는 동시대 양국의 유물비교를 통한 근거를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 도공들이 당시 일본 도공보다 훨씬 우월한 도자 기술을 소지했다는 근거로 자기 기술에 핵심인 고온소성기술에 필요한 도공 도구들이나 구조, 형식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방병선, 2017). 구체적으로 16세기 초반 조선계 가마에서 도자기의 기형, 수직굽과 오목굽의 형식, 번조시 굽받침은 자기 수준의 기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이 도제 방식으로 전수되는 도자기 기술이 이전될 수 있는 도공들에 대한 사회제도적 환경을 고려할 수 있다. 일례로 아리타 지역에서는1637년 일본 도공들을 배제하고 조선 도공들을 중심으로 한 13개 가마 127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체재로 재편된다(방병선 2003, 268). 피납인이라는 사회적 지위에도 조선 도공의 도자기 기술의 우월성과 자기 생산의 내재화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배경이 크게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대개 국내 연구에서는 조선 도공과 일본 전통 가마들의 원류를 연결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간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서 5, 6만명에 이르는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요업지를 대략 7개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팔산의 다까도리 가마, 존해의 고다가마, 가라쓰에 있는 도칠의 나카사토 가마, 고려 할머니와 거관의 미카와치 가마, 이라타와 이마리의 이삼평, 이작광과 이경 형제의 후카가와 가마, 심수관, 박평의의 나에시로카와 가마이다(조용준, 2006, 41-50). 박평의와 조선도공들은 가고시마의 ‘사쓰마 도기’에서 각 가마를 의미하는 나에시로가와계, 다테노계, 류몬지계, 니시모치다계, 히라사계, 다네가시마계 6가지 분류 중 ‘나에시로가와계’에 속한다. ‘다테노계’는 도공 김해와 ‘류몬지계’는 도공 변방중의 류몬지가마로 연결짓고 있다. 방병선 연구에서도 지적하듯이 초기 도공들이 사용한 가마는 발굴이 미진해서 유사한 시기 규수 지역의 가마들이 조선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하거나 명확한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방병선, 2011). 다만, 그 중 가고시마 사쓰마 지역들은 박평의나 심당길 등은 비교적 고문서 기록들이 남아 있는 편이다. 나에시로가와 정착 도공들과 도자 제작기반이 취약한 지역으로 조선 도공들이 기술 전술을 위해 이주한 기록들을 통해 도공으로써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정착 초기 단계로 고려해볼 수 있다(방병선, 2003, 119). 반면, 류몬지의
128 경우에는 조선 도공이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도자 유물이 많이 보이는데, 주로 이들 가마들에서 청화백자와 백자를 생산했다고 보는 흔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핵심 기술은 외형이나 형태로 드러지 않기 때문에 상감기법의 도입을 통한 장식기법 수준을 통해서 일본으로 이주 이전 조선 도공들이 이미 우월한 도자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술이전의 전제 조건을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일 간의 청화기법에 대한 이은미의 연구를 보면, 일본청화 제작 이전 과도기에 1620년대 조선풍 청화백자의 형태로 보아 조선 사기장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이은미, 2011). 나아가 방병선 연구에서는 조선계 장인들이 가마로 여겨지는 곳들에서는 주로 청화백자와 백자를 주로 생산했지만 조선만의 독자적인 것이라 볼 수 있는 백태청자 제작의 예나 분청을 제작한 것도 상당히 많다고 밝히고 있다(방병선, 2003). 실제로16세기 중반 조선에서 상감기법이 많이 출토되었고 17세기 초반 궁중 기록에서도 청자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피납장인들 역시 상감기법과 청자 제작의 경험을 갖고 있을 확률이 적지 않다(방병선, 2003, 267). 여기서 출토되는 청자의 유약과 고려청자 유약의 성분특성이 유사하다는 보고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방병선, 2018, 267).
이미숙의 연구에서는 도자기 제작의 도구와 원료와 더불어 제작 환 경이 기술전파의 중요한 요건으로 보고 상세한 자료들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이미숙, 2011). 조선에서 익힌 기술로 자기 제작 기술 까지 일본 내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기술 이전의 환경적 조건은 중요 한 단서이지 않을 수 없다. 조선 도공들의 강제 이주 배경은 기술 전 129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쟁이었으며, 일본의 기술 수요에 대한 열망은 일본 내 상류층과 도요 토미 히데요시의 차완이라는 정치문화이었기 때문에 비대칭적 사회 지위적 요건에서 기술 이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 기술의 이전이 지속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기술 이전 대상국의 정치제도 적 환경과 경제적 수요 등의 사회적 여건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 히 국가 간의 기술 이동 형태에서는 생산 활동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 뿐만이 아니라 자기 기술을 일본 내에서 실험 연구할 수 있는 정치제 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자기의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주체가 아니 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 일본이 조선 도공의 일본 내 비대칭적 신분을 어떻게 다뤄왔는 지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유정, 2017, 20). 이들이 어떻게 정착하여 가마를 짓고 도공 활동에 착수할 수 있었던 계기에는 일본 내 도자 기술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우월한 조선 도공들의 도자 기술에 대한 특별한 지원 과 보호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녹봉을 도자로 대신해 납품하는 등의 생계를 위해 도공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조선 도공들 중에 서도 실력이 뛰어나 토지를 받아 가마를 짓도록 하거나 일본 도공들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도자생산에 대 한 지방 차원의 지원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도공들에 의한 자기 원료의 발견과 소성 기술의
발전
130 납치된 조선 도공들은 처음부터 일본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하지는 못했다. 초창기에는 생계나 사정에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주로 분청사기나 조질백자에 가까운 것들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방병선, 2017, 114). 주로 조선식의 완, 사발, 접시, 병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일본에서 유행한 다완으로 사용하기 좋은 그릇들이 주를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방병선, 2017, 115). 청자나 백자의 생산이 일본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이삼평의 백자광 발견이었다. 백자광에서의 백토 발견으로 자기 원료가 처음으로 일본 내에서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토에 혼합원료를 더하게 되면 높은 소성온도에서 형태와 색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원료가 일본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삼평은 이라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자기원료에 적합한 백토를 발견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삼평이 多久家에 제출한 문서의 사본인 『가쿠(覺)』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리타 영주에게 보낸 문서, 그리고 후손들이 기록한 문서들을 통해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이룬 백자광 발견의 업적을 검토하고 있다. 이삼평은 아리타 영주에 의해 가마 제작과 더불어 백자 제작에 몰두할 수 있는 제도적 보호 하에서 도자 실험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일본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주에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졌으며, 자신의 영지에 가마를 만들고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정치적 입지에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도자 기술에 대한 일본 내의 수요가 상류층들의 기호를 넘어 조선 도공들은 규슈와 각 영주들의 특별한 보호와 통제 하에서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구울 수 있었다(우동규, 1987, 198-199). 131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일본의 규슈 3대 도자기 마을인 아리타(有田)와 이마리(伊万里), 가라쓰(唐津)로, 일본에서 1610년대부터 자기(磁器) 생산이 시작된 시점은 이삼평의 아리타 이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삼평이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백자광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가쿠』의 기록에 의하면 히젠 지역의 소영주였던 다쿠나가토 노카미가 이삼평을 데려오고 그 밑에서 도자기를 만들었고, 아리타 지역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원료인 도석(陶石) 일명 백자석(白瓷石)을 발견하고, 이후 18명의 도자기 도공들과 아리타로 옮겨와 1616년 최초로 백자를 제작했다고 한다. 구태훈의 연구에서는 이삼평이 당시 자기 생산을 위해 고령토를 발견하게 되는 경위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구태훈, 2008). 정유재란 때 이삼평도 조선인 도공을 납치를 많이 하는 다이묘들 중 히젠 번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인물에 의해서 15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나오시게는 조선 도공뿐만 아니라 자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흙인 고령토를 배에 싣고 왔으며, 그 양은 조선인 도공들이 수년간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성시홍, 2018, 9). 그러나 7~8년이 지나자 조선에서 싣고 온 고령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나오시게는 이삼평에게 자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흙을 찾도록 명령한다. 이삼평은 20여 년을 백토를 찾다 헤매지만 조선에서 쓰던 것과 같은 양질의 점토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소를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자기의 원료인 백자석을 발견하고 이 지역으로
132 이주한 다음, 가마를 새로 짓고 백토를 이용해 일본에서 조선백자를 재현할 수 있게 된다(구태훈, 2008, 191). 이삼평의 백토발견과 더불어 이루어진 기초작업들이 자기 제작이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삼평이 일본에서 추앙받는 도공의 명성은 백자 기술이 이삼평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리타 지역을 넘어 전수되었다는 데 있기도 하다. 아리타 지역에서는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자기 생산에 종사했다고 했으며, 이삼평에게 백자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도공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이후 1631년 히젠 번은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삼평의 백자 기술 전수와 연관성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조영준과 이미숙 연구에서는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의 백토 발견을 넘어서 자기 생산 기술로 인해 아리타에서 생산 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간접적인 자료로 이 당시 나베시마 영주의 도자 산업에 대한 보호 장려 정책을 언급한다(조영준, 2016; 이미숙, 2013). 당시 나베시마 영주는 자기 생산장려정책을 위하여 1624년 이삼평을 도석채굴장의 관리, 지배 자리를 맡게 하였으며, 채석장의 관리강화와 조선에서 온 사기장을 특별 우대하였다(이미숙, 2018, 2-5-206). 또한 히젠 번 자체에서 자기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아리타에서 생산된 상품을 이마리까지 한정하거나 외부 구입을 금지하는 계획관리가 이루어졌다. 이삼평의 백토 발견이 도자 제작을 넘어서 아리타에서 만든 자기가 12km 떨어진 이마리시에 있는 항구를 통해 수출할 수 있기까지 히젠 번의 제도적 노력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133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그림 1] 일본 나고야 성 박물관의 한일 교류 전시 일부로
이삼평의 자기 기술이 이마리야끼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이삼평에 의한 일본 자기 생성과
오른쪽에는 이삼평 비석 사진과 함께 그의 업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34
[그림 2] 일본 나고야 성 박물관의 한일 교류 전시 일부로 조선
시대(15~16세기)를 대표하는 분청사기가 임진왜란 이후 규슈의
도자기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135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그림 3] 아리타 도자의 자기 기술 생성 이전(왼쪽 도자기)와 자기
생산 이후 히젠 도자의 발전을 시기별로 나열하고 있다.
이은미의 연구에 따르면, 아리타의 조선 도공들에 의해 소성 기술 전파와 더불어 조선식 가마구조의 변경을 통해 가마의 기술이전이 일어나면서 자기의 대량 생산 체제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이은미, 2011). 이미숙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조선 도공들이 직접 가마운영에 참여하여 일본 도자기 가마를 조선과 같이 유단식 연실등요로 구조를 변경하여 고화도 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이미숙, 2018, 236). 1637년에는 일본인 도공들을 추방하고 조선 도공으로 대체하면서 이삼평의 이마리 가마를 중심으로 하는 도자기 생산 체제로 개편될
136 수 있는 일본 요업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마리 가마 네 군데 전부와 아리타 가마중 일곱 군데를 없애고 아리타의 13곳 가마에 통합하여 이후 아리타 도자기 생산 중심으로 변경되는데, 여기서 소멸한 7곳의 가마는 가라츠 도기를 합쳐 구웠던 가마로 자기 개발 초장기의 가마이다. 아리타 지역에서 이 가라츠 도기는 사라지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체제가 확립되는 것이다(이미숙, 2008, 91). 더불어 가마 구조의 경우에 17세기 이후의 가마들은 조선식 구조로 바뀌어 소성실이 여러 개 이어진 계단식 가마가 축조되었다. 계단식 연실 등요 구조는 미노 가마의 반지상식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열효율이 우수하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그 근거로 아리타 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된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된 받침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흔히 사용하는 내화 빚음 받침과 유사한 형태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다량으로 생산되는 도자기들을 여러 개 겹쳐 구워 한 번의 소성으로 많은 양을 생산해 낼 수 있어 원가를 낮춘 도자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던 방법이기도 하다(이미숙, 2010, 242). 또한 갑발과 도지미 등 가마도구 역시 조선의 양식과 비슷하며 도자기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성형도구들에도 조선의 영향을 받아 1610년경 부터 조선식 연질백자, 상감청자, 인화분청계통의 도기가 제작될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최초의 자기 기술 발생이 조선 도공 이삼평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삼평 인물에 관련한 다양한 설들과 일본 내 문헌들에 주목하고 있는 연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처음 일본이 유럽으로 137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한 이마리 지역의 ‘아리타 자기’는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 자기 원료가 발견되었고, 최초의 백자 생산으로 대량 생산체제로 도자 수출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앞선 연구와 달리 방병선 연구에서는 이삼평이란 인물의 성과가 도자 유물의 양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방병선, 2010). 이삼평이란 인물에 대한 출신지 검토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마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이삼평과 공주 지역의 도자 기법과의 연계 가능성을 주목한다(방병선, 2010, 270). 기술이전의 명확한 인과 관계를 얻기는 어렵지만 조선의 기술 영향과 상관성은 존재한다고 본다. 이와 달리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 가마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조선계 영향 보는 도자들이 시기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영향 관계는 미약하다고 판단하지만, 외형적으로 문양이나 기형에서는 조선계보다 명대의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일본 내 수요 변화의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방병선, 2010, 267). 18세기 이후부터 조선으로부터 수입한 인화 분청이나 상감 분청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고급품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취향은 조선에서 이미 생산이 중단된 이들 그릇이 복고적인 취향을 타고 일본에서 꾸준히 제작되었기 때문에 조선 도공들도 조선과는 백 여년 이상 시차가 있는 도자를 일본 수요와 요구에 맞춰 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청화백자에서도 조선식 문양이나 기형보다 명대 자기의 모방이 주였으며 중국이나 일본풍의 양식을 따르고, 가마구조에서도 조선 도공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어도 중국식이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 연구에서는 양국의 도자 교류사의 관점에서 양국 자기의
138 동 시대 생산 양식을 비교로도 피랍된 조선 도공들이 일본 조선 양식이 아닌 일본 양식 생산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 유물 비교도 단면적인 판단보다 일본 역사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필요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 도공과 사쓰마 지역의 도자기
사쓰마(薩摩) 지역은 조선에서 끌려온 조공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곳이다. 그 만큼 사쓰마 지역 계통의 도자기의 시초가 조선 도공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간 70여명의 조선 도공들은 사쓰마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개요를 했다(신혜원, 2007, 88). 그렇기 때문에 초창기 사쓰마 도자기의 양식에서도 조선식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국내 연구에서도 이들을 잡아온 장수와 조선 도공들의 출신지, 그리고 사쓰마 지역에 개요한 가마와 연결하여 보고 있다. 특히 사쓰마 지역의 도자기 계통 중 일본 문헌이나 기록이 박평의, 심당길이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김해와 타테노나 팔산의 다카토리, 존해의 아가노, 변방중의 류몽지는 구체적인 조선 도공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당시 사쓰마 지역에서는 조선 도공 활동들이 사쓰마 번주에 의해 계획적으로 관리와 지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정부나 각종 문서들을 통해 잘 알려진 박평의, 심당길, 김해와 같은 인물들이 기술 이전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139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임란시기 피랍된 조선도공인 심당길과 박평의 또한 이삼평과 마찬가지로 자기 원료인 백색 도토의 발견으로 자기의 기술 발전을 이어나간다. 대표적으로 신혜원과 방병선은 일본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가고시마현 ‘사쓰마’에 피랍된 조선 도공들의 활동을 추적하면서 자기 기술의 영향을 파악하고 있다(방병선, 2010; 방병선 2007). 그 중 박평의라는 인물은 그의 다이묘에 붙잡혀 쿠시키노시마비라 (串木野島平)에 상륙하고 다음 해 사쓰마 최초의 가마 쿠시키노요를 개요한다. 처음에는 42명의 도공과 함께 일상 생활용 도자기를 주로 제작하는데, 본격적으로 도자 제작에 전념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603년 나에시로가와로 이전 후라고 할 수 있다. 사쓰마에 도착한 조선 도공들은 쿠시키노, 시미피라의 땅에서 도공들이 조선에서 끌려올 때 고향에서 가지고 온 백토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도자기를 제작하였는데, 그것이 히바카리데(火計り手)이다. 히바카리데란 조선의 흙과 기술을 가지고 만들었으며 불만 일본의 것을 빌렸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도공들이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자기의 원료를 구하기 전까지 조선에서 가져온 백토를 표본으로 삼아 찾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기까지는 번주의 비호를 받으며 생계를 위해 일생생활용 도자기를 만들었으며 경영이나 후원의 기회가 적어 타지에 가서 도예기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적었다(신혜원, 2007, 199). 일본에서 고급 자기 기술을 바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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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白釉蓮葉茶碗, 시로몽(白薩摩), 히바카리데(火計り手),
17세기, 지름 14.4cm, 높이 8.9cm, 동경국립박물관.
사쓰마에서 백토를 발견하고 백사쓰마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사쓰마 번주에 의해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사쓰마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의 특징은 번주의 관리하에 도자기가 제작된 쿠로몽(黑薩摩)과 주로 일반인들에게 공급되어진 생활용 도자기 시로몽(白薩摩)으로 나뉜다. 또한 18세기 이후가 되면 검은 사쓰마 도자기와 백사쓰마 도자기로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하게 되는데, 그 중 백사쓰마는 번주의 허가를 받아야만 제작가능한 도자기였다(신혜원, 2007, 201). 백토 발견과 더불어 백사쓰마를 제작한 박평의도 마찬가지로 게이초 3년(1598) 기록을 통해 사쓰마 번주의 보호를 받아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귀화 조선인 박평의 등에게 명하여 히오키군(日置郡) 나에시로가와에 가마를 축조하게 하고, 계속 해서 도자기 제작을 장려할 수 있도록 일본 이름과 직위를 하사했다고 한다(방병선, 2017, 125-126). 번주의 비호 하에 박평의는 나리가와무라
141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成川村)에서, 백사(白砂)는 가세다(加世田)의 봉우리에서 발견하고, 쿠리노(栗野)에서 유약용 참나무를 찾아내어 결국 백도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방병선, 2017, 126).
또한 사쓰마 도자기 계통 중 초대 심당길도 마찬가지로 번주에게 녹봉을 받는 대신 도자기를 제작, 헌납하면서 도공 활동을 이어갔다. 사쓰마 도자기 중 주류로 알려진 나에시로 가와야키는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시마즈군에 의해 붙잡혀 납치된 조선 도공인 초대 심당길으로 이곳에 끌려온 43명의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심당길 또한 화산재 속에서 백색 도토를 발견하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탄생한 사쓰마 지역의 백도자기가 백사쓰마 도자기의 시초가 된다(이상균, 1999, 161).
또한 사쓰마의 영주 요시히로는 조선 도공들을 사쓰마에 데려와 도자기를 생산하게 하고 일본의 다른 지역의 도자기기술을 배워 조선의 도자기 기술과 접목시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이미숙, 2011, 193). 1886년(明治 19) 일본정부가 전국의 府縣에 명하여 작성한 『 府縣陶磁器沿革陶工傳統誌 』에 의하면
“사쓰마 도자기의 역사에 있어서는 우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으뜸으로 하여 조선도공 (김해),
朴平意 (박평의)를 그 다음으로 한다(沈壽官, 1975, 50).” 이미숙 연구에서는 사쓰마 지역의 조선 도공들 활동에 대한 기록을 일본 사료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데, 사쓰마 지역으로 끌려온 조선 도공 중 가장 잘 알려진 김해, 박평의 등의 기록들이 등장하고
142 있다(이미숙, 2011). 도자 기술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김해는 조선 도공들의 활동과 도자 기법 등과 같은 것들은 번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번주의 이동에 따라 새로운 가마를 이전지에 개설하고 도자기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600년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김해가 우토요((宇都窯) 가마를 개요한 것은 1601년~1602년경으로 추정하는데, 영주의 명령에 의해서 1602년 오와리(尾張)의 세토(瀨戶)에 도예기법을 배우기 위하여 갔다 5년 후 다시 돌아와 세토에서 습득한 도법을 더한 도자기를 소성한다(이미숙, 2011, 195). 이런 배경에는 영주의 취향을 반영했다고 알려지는데, 조선의 도자기 제작법 외에도 히젠(肥前), 세토 (瀨戶), 교토(京都) 등의 도자기 제작기법이 접목되어 더욱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이미숙, 2011, 196).
이 이때 만든 것으로 히바카리데(火計り手), 시로사쓰마데 (白蕯摩手),니시키데(錦手)킨란데(金襴手)·청화백자(染付白磁)·靑 磁·유리데(瑠璃手)·소고로쿠데(宋胡錄手)·미쯔시마데(三島手)로 조선 백자 기술에 일본의 기법 등이 더해진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7년간 일본열도 내의 정권 교체 과도기 시기로 인해 조선 도공들은 약 7년여 동안 조선의 도공들을 보호받지 못했다가 이후 생업을 위해 영주의 예우로 녹봉 대신 도자기를 납품하며 일반용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자기 기술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이후 작품성이 뛰어난 지배층용의 도자기를 만들도록 하는 정책과 취향이 요구되자 그제서야 조선의 백토와 비슷한 흙을 찾고 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이미숙, 2011, 160). 일본 143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내에서 보호와 더불어 조선 도공들은 조선에서 가져온 백토를 토대로 비슷한 자기 원료를 일본 각 지역 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다음 조선의 흙이 아닌 일본의 흙과 불을 가지고 원료 배합과 가마 내에서 소성 온도가 유지될 수 있는 실험 연구들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순차적으로 1603년에는 점토나 유약의 원료, 연료의 확보가 이루어졌으며 1605년 가마가 개업하고 1623년이 되어서야 박평의는 백도자기의 제작에 성공한다. 1626년에는 도공들을 파견해 기술 습득을 하게 하는 기술 파견과 같은 행위도 이루어지게 되고 이들이 다시 돌아와 백도자기 생산의 기초를 확립한다(이미숙, 2011, 163). 이삼평의 기록에서 보인 것처럼, 이마리 지역으로 일본 도공들이 도공 기술을 배우러 온 것도 있지만 사쓰마 지역에서는 조선 도공들이 일본의 도자 기법들을 습득하러 파견되는 동화 과정도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균의 연구에서는 사쓰마 지역 조선 도공들의 기술이 일본 살마 도자기나 교토 지역의 도자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이 등장하기도 한다(이상균, 1999). 조선 도공들이 제작한 도자 유물에서도 초창기 출토된 유물과 달리 이후 일본 도법 혼용된 형태로의 변화가 나타난다. 조선에서 가져온 흙과 자기들은 그 제작기술과 소성방법도 순수한 조선의 도법이었다(이미숙, 2011, 164). 그러나 이후의 유물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도자 기법을 혼용하여 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기술 파견 이후 돌아와 김해가 1608년에 축조한 차완 등의 도자기 유물들을 보면 조선 본래의 도법에 일본의 도자 수법을 가미한 형태였다고 보고 있다(이미숙, 2011, 164).
144
일본의 시각: 임란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 도입
일본 연구는 임진왜란 이전시기부터 양국 간 도자 교류가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조선 도자과의 영향 관계를 추정하고 있 다. 일본 도자사에서 ‘도자기 전쟁’이라는 임진왜란이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있기보다 임진왜란 전후로 보았을 때 조 선 도공들의 영향 관계가 유물을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도예사적 측면에서 일본 유물 검토가 자세히 이루어 짐에 따라 임진왜란 기점으로 하여 조선 영향으로 보이는 도자 기법 들이 나타났으며, 특히 1850년대부터는 조선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 는 규슈 사가현의 북서부에 분포한 히젠 도자를 중심으로 조선도자와 의 비교연구에 대한 연구성과가 나타난다. 도예사나 한일관계사적 접 근을 통해 한일 공동연구가 일부 이루어지면서 조선과 일본 도자 간 의 외형적 판단과 더불어 기술 이전의 여부도 소상히 볼 수 있는 기회 가 주어진 것이다. 그 중 片山まび와 本田まび의 연구는 전반적으로 일본 학계에서 조선계 기술의 가능성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에 대 해 유물비교를 통해 재확인하고 조선 도공들의 직접적 기술 이전의 흔적을 분별하여 검토하고 있다(片山まび, 2005; 本田まび, 2003). 따라서 유물을 통해 조선 도공의 직접적인 기술 이전의 형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이삼평의 백자 기술이 일본 내에서 재현되는 과정 을 이마리 일대 지역문헌과 고문헌, 역사자료들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145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도자기 유물비교를 통한 조선 기술의 영향
아직 자기가 생산되지 않았던 임진왜란 이전 히젠 지역과 조선도자 와의 영향 관계를 보면, 대체로 1580년대 나타나기 시작하여 1650년 대 이후에는 사라지는 흐름으로 읽힌다. 히젠 지역의 도자는 임진왜 란 시기 건너온 조선 도공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고, 히젠 지역의 가마 가 발굴된 이후 히젠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규슈 지역의 도기 가마에 도 현저하게 그 영향 관계가 나타난다고 본다(本田まび, 2003, 1). 히젠 도자가 조선의 소성기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데는 가마의 구조와 가마 도구로 보는데, 1650년대 이후에는 중국 복건성 차주 가 마의 기술 및 양식이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 가마 구 조가 대량생산체제에 맞는 형태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1610년대의 가마에서는 거의 조선 도자의 영향을 볼 수 없으며, 1615년부터의 가마에서 조선도자의 영향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1616년의 자기 발생 시점으로 하여, 조선 도자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조선도공들에 의해서 직접적인 기술이전이 일어났을 것이라 추측 할 수 있는 부분은 가마 구조, 성형방법, 그리고 가마 도구와 같은 것 들이다. 이 부분은 기술자가 아니면 모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의 이동을 통한 기술전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片山まび연구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히젠 지역에서 자기가 출토된 것은 조선침략 이후 1610년을 보고 있으며 조선백자와 아주 닮은 유형이나 가마가 나타난다고 본다(本田まび, 2003, 161). 요업 기술
146 중 어려운 기술이다 가마 구조를 변경하는 것으로 당시 16세기 이전 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일본의 전통 가마 구조를 히젠 도자의 가마와 비교했을 때 조선 도공의 영향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本 田まび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 전통 가마는 칸을 만들지 않는 구조임 에도 이 시기 처음 일본에서 칸으로 구분된 가마가 등장한다고 한다 (本田まび, 2003, 160). 이 자체만으로 일본 도자사 자체에 큰 기술 변혁 인 것이다. 당시 일본 상황에서는 내재적 발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술 변혁이 외부 기술 유입에 의해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고려 도기 가마의 유물 비교하여 보면, 한국의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가마요의 구조가 순지리 유적과 같은 조선 왕 조의 도기 가마와 같은 기술이 전해진 가능성이 농후하게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도기 가마의 부속물을 보아 지리적으로 경상도 지방의 도기가마가 히젠도자 가마에 영향을 주었다고 연결하 고 있다. 더불어 本田まび연구에서 가마구조에서 불창시설의 경우에 도 17세기 조선자기요에 보다 가까운 요소로 보인다고 판단하고 있 다(本田まび, 2003, 70). 이후 이 구조는 개량을 거쳐 후대 히젠 도자에 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가마구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마 도구의 경우에도 가마를 축조하는 기술자가 아니면 모방하여 제작하기 어렵다. 本田まび의 연구에서는 도자기를 구울 때 구운 그 릇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기 위해 사용되었던 각종 받침에서 조개받침 이나 태토빚음받침이 조선계라고 본다(本田まび, 2003, 72). 특유의 옹 을 유지해 굽기 위한 삼각형 형태 받침이나 패목가 같은 경우에는 일 147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본 중세 도기에서 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특 히 조개받침의 경우에는 일본 중세는 물론 중국 도자에서도 알려진 바가 없으며 16세기 순지리요에서 조개받침의 예를 찾아볼 수 있어 서 직접 기술도입이 이루어진 가마로 추정한다. 시대적으로 봤을 때 1580~1598년에 순지리요적 타입의 도기가 출토되고 16세기 말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도 추정한다. 즉, 이 시기에 기술자가 건너와 순 지리요적 타입의 가마를 축조한 것이라는 것이다. 태토빚음받침의 경 우, 일본 중세 도기에 전혀 보이지 않는 유형이지만 조선전기의 분청 사기나 백자에 사용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시 기적으로 볼 때 직접적 영향 관계에 대한 여부는 확실치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만, 태토를 빚어 받침을 만든다는 기본적인 착상은 조선 자기 기술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성형방법의 경우에는 일본의 물레 성형을 할 때나 굽을 깎을 때 모두 시계방향으로 했으나 조선에서는 다리로 물레는 둘리는 방법과 같은 회전방향의 형태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조선계 기술로 추정하고 있다 (本田まび, 2003, 95). 양식만이 아니라 片山まび에서도 공통적으로 언 급하고 있는 손 작업으로 구연을 성형하는 기법과 같은 조선 요업 기 술이 일본에서 그대로 구현된 것 같은 흔적이 나타나며, 도공들이 이 주해 제작한 가능성이 클 것이라 보고 있다(本田まび, 2003, 150-151). 즉, 자기를 굽기 위해 필요한 고온의 소성 기술은 가마 구조와 가마 도구와 같은 물리적 기술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작업들은 기존의 일 본 가마의 구조와 다른 형태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도공의 직 접적 기술 이전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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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기 기술과 명대 도자기법의 성행
조선도공의 기술적 영향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 1610년 인 것은 조선 도공이 이주 후 적응 과정을 거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기술 개발에 전념할 수 있었던 기간이 10여년 정도 걸렸던 것으로 추 정한다. 유물과 당시 일본의 도자 시장 수요 변화에 비추어 보았을 때 도, 1610년대가 백자발생의 시점과도 일치한다. 또한 本田まび는 1593~1597년 명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수출된 청화백자가 줄어들면 서 당시 일본에서 청화백자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本田まび, 2003, 161). 명 멸망과 청 성립의 시기 전까지는 청화백자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도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구로카 미 슈텐도의 글에서도 이삼평이 비롯이 일본에서 처음 백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 내의 백자에 대한 기대가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도공의 직접적 기술 이전의 단절보다도 조선 도공들이 일본 수 요에 맞는 형태로 변모하였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1930 년대 이후에는 일본 국내시장에서 중국자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 고 이에 따라 대량생산체제로 변화하면서 조선계 가마의 경우에는 일 본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本田まび는 보고 있 다(本田まび, 2003, 5). 片山まび 역시 대량 생산체계의 변화와 더불어 1650년대 이후 히젠도자에는 조선 백자풍은 완전히 사라져 중국 남 방계의 기술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가 되고 149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있다고 밝히고 있다(片山まび, 2005, 162). 즉, 1650년 이후 히젠도자에 서 조선 자기의 기술은 토축요로 그 모습만 남을 뿐 제품에 있어서 완 전히 영향이 사라진 것이다.
도자의 경우, 유물을 통해서 보았을 때 청화백자로 이행되는 시기 에 조선도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영향 관계는 미약하다고 판단한다. 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1610년대에, 일본에서 전하는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에 이주되었던 조선도공들은 정착하여 크게 가마, 청화백자, 백자 세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생산에 임했다고 보고 있다. 片山まび연구에 서도 마찬가지로 1610~1650년대 백자계 유물의 일부에서 표면적으 로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으로 보고 있는 지점은 연질 백자라 고 유추한다(片山まび, 2005, 163). 한국 남부에서 생산되고 있던 연질 백자의 미약한 영향 관계에 관한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16세기 말 무렵 일본에서 출토되는 연질 백자가 조선 전기의 연질 백자에 가깝 지만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을 확인하기는 어렵고 양식의 모방 정 도는 추정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토의 정제나 소성의 면에서 당시 독자적인 개발이 어려웠던 것을 보아 도자에서 드러나는 자기 기술 영향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片山まび의 글에서 백 자계의 유물 일부는 청화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양식의 도 기가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片山まび, 2005, 166). 따라서 가마 전체의 형태뿐만 아니라 가마의 굽바닥에 내화토빚음받침을 사 용한 점 등에서는 조선도자의 영향을 가늠하고 있다(本田まび, 2003, 54).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1630
150 년대 이후부터 출토된 유물에서는 표면적으로도 조선계 영향을 찾기 어렵게 된다. 이 때 제작된 청화백자는 양식적인 면에서 조선보다 중 국 명대 청화백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갑발의 경우 조선 계 기술이 아니었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1650년 무렵부터는 내화 토빚음받침이 완전히 사라지고 명대 청화백자 양식에 어울리는 ‘하 리’라고 하는 핀으로 받쳐 굽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한다. 구로카미 슈 텐도의 글에도 명의 도자 기술을 도입해 백자를 변형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명나라에서 도자 기술을 배워온 일본 도공에 의해 굵은 고리 모양 받침 기술이 소개된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구로카미 슈텐도, 2015).
그 근거로 本田まび는 태토와 성형기법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태 토에 함유된 칼슘의 경우 명대 백자는 10퍼 이하인데, 히젠 자기는 7~8%이며 조선백자는 10~13% 정도였다고 한다(本田まび, 2003, 187). 즉, 히젠 자기의 성분은 명대 자기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삼 평을 비롯한 기술자들이 자토를 찾아다녔을 때 명의 기술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또한 성형기법에서는 물레의 경우, 청 화백자가 기술적으로 조선계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형틀에서는 명 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일부 내화토빚음받침 사용과 같 은 조선계 기술이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백자 기술은 약 20년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쇠퇴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 이후 조선계 기술로 보이는 받침까지 사라지게 되는데 명대의 청화백자의 양식과 받침이 전혀 맞지 않아 더 이상 이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히젠의 청화백자는 명대기 151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술을 바탕으로 발전되었더라도, 기술자는 조선도공이었다고 판단하 고 있다. 그 바탕에는 1637년 조선장인들의 요청으로 자기를 모방해 서 구운 일본인들이 추방시켜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일본인들이 영업 하였던 가마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결국 청화백자 이후 유물에서 는 조선도공들에 의한 직접적 기술이전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일본 내 의 도자 수요의 변화에 따라 조선 도공들의 기술은 조선계의 방식이 아닌 형태로 이어져갔을 것이라 추정한다.
조선 도공의 도자 활동을 통해 본 기술 전파 양상
일본 학계에서 조선 도공에 대한 출신지, 연행 과정, 도공 활동 등에 대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편이다. 일본 내에서도 관련 문헌자료가 거의 없기도 하지만 고문서를 통해 조선 도공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을 설정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구로카미 슈텐도의 연구에서는 연구기관, 역사사적을 바탕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무대로 한 이삼평과 조선 도공들의 도공 활동들을 구상하고 있다(구로카미 슈텐도, 2015). 특기할 점은 후쿠오카, 구마모토, 나가사키 현의 자료관과 향토사자료관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내 정치 상황과 번주들의 도자 정책들이 어떻게 자기 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을 연결하여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 과정에서 허구적 내용들이 존재하지만 도자 기법이나 기술 측면에서 이삼평과 조선 도공들이 조선에서 익힌 자기 기술을
152 일본에서 구현하기 위해 실험하는 과정이나, 도공들 간에 기술 전수 등은 사실을 바탕에 두고 그리고 있다.
구로카미 슈텐도의 글에 나온 조선 도공들의 도공 활동과 자기 기술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규슈 지역 사가현 이마리시에 위치한 오카와노라는 마을에 처음 정착한 조선 도공들은 1593년 도자기 만들기가 성행하여 번주에 의해 몇 개의 가마소를 형성하고 나름대로 생활 잡기들을 구울 수 있게 된다. 이후, 영지 몰수된 사건으로 조선 도공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된다. 이 시기 일본 상류층들의 문화의 상징이 된 다도회와 도쿠가와에게 헌상하는 전국 모든 다이묘들 간의 경쟁으로 번지는 국내 정치적 상황으로 도공들은 각 지역에서 도자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조선 도공이 나베시마 다이묘에게 지역 고유의 차 도구 개발이라는 제안을 하면서 가마소를 만들 수 있는 토지를 받게 되고,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도자기 흙이 풍부한 후지노카와치 지역에 조선 도공들은 가마소를 만들게 되고, 이후 상감과 철화 장식 기법과 두 종류의 유약을 나눠 칠하는 기법 등 생산 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삼평이 오코노시 가마에서 초기에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기존에 해오던 일본 도자 방식과는 다른 조선식 도자 기술을 재현하고자 한다. 가마 근처에서 도자기 흙을 발견하고, 유약을 조합하는데 기존에 짚과 나무껍질 재만을 사용하는 유약과 달리 흙의 재를 가지고 섞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삼평은 ‘환원염 불 때기’ 방식으로 가마 속 온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이 때 필요한 장작의 양을 153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자세하게 지시하고 가마 내 번조실이 식지 않도록 개폐와 장작을 추가로 넣는 역할을 분담하여 이루어진다. 이삼평의 고령토 발견은 이러한 실험 과정을 반복하면서 찾아낸 문제의식 하에서 흙과 유약을 다시 찾아내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삼평은 연질의 가마소 남쪽 산림을 답사하는 도중 연질의 도자기 흙과 유약으로 깨트리기 쉬운 바위광맥을 찾아낸다. 앞선 연구에서 1610년부터 조선 연질백자가 등장했던 것이 규슈 도자의 특징이라는 지점과 비슷하게 이 연질의 흙과 유약이 이삼평이 직접 찾은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초기 흙과 유약이 기존의 일본 도자와는 달랐다는 것을 반영한 듯하다.
이미 임진왜란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량의 다완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그 후에도 일본으로부터의 다완 주문이 계속되었으며 일본 내에서도 피랍된 조선 도공들이 고려다완을 모방 제작하면서 더욱 퍼지게 되었다. 1602년경부터는 조선 도공들의 ‘조선 가라쓰’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데, 정치세력들의 경쟁이 ‘고려자기’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도요토미를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로 이어지는 무가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다도회가 중요했으며, 도요토미파의 무장들은 도쿠가와에 바쳐서 그 관계 회복을 하기 위해 ‘고려자기’의 다기를 경쟁하듯이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삼평이 구운 조선에서 구웠던 ‘분청사기’가 일본에서 ‘조선 가라쓰’로 소개되고, 조선 도자 기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이삼평은 성으로부터 ‘조선 가라쓰’와 더불어 ‘백자’에 대한 요청을 받게 된다. 함안 사기장들이 만든 ‘철화자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백자를 원했던 것이다. 이삼평은 백자와 청자를 남원
154 만복사에서 구워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도석을 찾아다녔다. 이삼평은 백토를 찾기 위해 쌀과 도자기를 조공으로 하는 조건으로 이주 허가를 얻고 양산과 구포 출신의 조선 도공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이들은 이삼평에게 굽는 온도를 높일 수 있는 번조실을 계단 모양의 가마 구조를 알려준다.
이삼평만은 백자를 구운 경험으로 백자도석을 발견한 후 암석을 잘게 부술 방법을 고안한다. 조선에 남원 만복사 도자기 가마소에서 구웠던 백자도석은 깨지기 쉬운 흙덩어리였던 것과 달리 단단한 바위였기 때문에 물레방아를 사용해 분쇄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처음 이삼평이 구운 백자는 눈같이 하얗게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종류의 유약을 더 실험해보고자 짚 재와 나무껍질 재, 진흙 재나 잿물 등의 조합을 몇 번 시도한다. 이삼평은 시험 삼아 구운 백자 도석을 본격적으로 굽기로 결정하고, 아리타 마을로 이주한다.
아리타에 도착한 이삼평은 장작, 유약용 흙을 구하기 위해 조선 도공들과 함께 답사를 나가며, 고온에서 도자가 견딜 수 있는 실험을 계속한다. 마침내 1616년 6월 1일 백자도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자기생산을 지원하는 체제를 갖추어 자기생산에 장벽인 도석을 분쇄하는 일들이 한쪽에서는 진행되었다. 이제는 철과 동 성분이 있는 진한 빛깔의 유약을 줄이고 짚과 나무를 태운 재와 백자도석을 분쇄하여 녹인 거의 투명한 유약을 바른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삼평은 유약의 원료를 더 하얀 돌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더욱 하얗게 나오는 백자를 연구한다. 이에 따라 백자 소식을 듣고 이삼평이 있는 덴구다니 가마소를 찾아오는 이주자들이 증가했는데, 155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이삼평은 사기장들에게 자기를 굽기 위한 가마의 구조와 도석으로 흙을 만드는 방법, 유약의 조합까지 모두 가르쳐 주었다. 이 시기 번주는 야나카 마을을 중심으로 ‘자기 산지 만들기’를 단행하기 위해 도자기산지 정리가 이루어졌는데, 조선에서 건너온 사기장과 가족에 한하여 도자기를 계속 굽는 것을 허가하고 그 이외의 자는 추방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 추방명령은 일본인 사기장을 아리타 전 지역에서 추방한다는 것이었다. 즉, 가마소로 할 구역을 정하고 아리타 지역에서는 7개소 가마고를 언급하며 가마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부분 조선인만 남은 아리타 지역에서 명청 교체기 이마리 지역은 명 대신 수출하는 계획 하에 아리타 내산의 각 가마에서 무역품을 중심으로 한 생산체계를 정비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삼평의 백자 생산에 대한 공이 아리타야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럽 수출을 염두에 둔 채 대량생산체제를 지방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묘사하고 있다.
156 [그림 4] 왼쪽은 초기 이마리, 나라 大和文華館 소장, 1630~40년대. 오른쪽은 이마리, 1650~70년대 제작,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 소장. 기술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서 청화 자기의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5] 일본 규슈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코발드 안료가 사용되어 색이 다채롭게 들어간 이마리 도자기. 본격적으로 자기가 유럽으로 수출한 이후의 아리타 양식을 더한 이마리 도자기라고 볼 수 있다.
구로카미 슈텐도의 글에서 보이는 조선 기술 전파 양상의 특징은 이삼평을 비롯된 조선 도공들의 출신지로 추정하는 남원이나 함안의 기술이 규슈 사가현에 각기 영향 관계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구로카미 슈텐도, 2015). 실제로 스에야마 신사 위에 ‘사기장 157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이삼평의 비’에 쓰여진 ‘충청도 금강 사람이다’라는 비문과 달리 1990년 한국도자문화진흥협회 보고서를 통해 충청남도 공주시 학봉리를 도자 기술의 근원으로 설정한다. 또한 남원, 함안, 조선 도공 김해 사기장이 익혀온 도자 기술 등이 서로 기술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을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김해 사기장이 옮긴 구마야마 산에서 조선 사기장들 간에 도자기 흙을 찾는 과정에서 유약을 조합하는 나무재 그리고 흙의 분량과 같은 조합 방식이 차이가 난다는 지점을 들고 있다. 남원에서 온 이삼평과 함안에서 온 조선 도공들도 유약 방식이나 유약을 입히는 방법, 가마재임 작업 등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을 서로 발견한다. 함안의 가마재임 방식은 아래 여섯 칸의 번조실에 왕겨를 깔고 그릇과 그릇 사이에 경단처럼 만든 태토를 놓는 방식인 반면, 남원 출신인 이삼평은 위 두 칸의 번조실에 모래를 깔고 그릇과 그릇 사이에 경단 모양의 태토를 사용하지 않고 거친 모래를 조금 사용한다고 언급한다. 가타야마 마비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사가현의 우치노야마나 가고시마현 사쓰마가 김해와 연관성이 있다는 설들을 그 지역에 출토된 가마터 유물로 확인하고 있다(가타야마 마비, 2018, 6). 즉,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통해 온 조선 도공들 중 김해와 발음이 비슷한 ‘신카이’라는 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들을 들어 김해에서 출토된 유물비교를 통해 연관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기술 관련성은 없지만 백자 유물의 가능성이나 산청 지역과의 연관성들도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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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양국 연구의 차이
임란시기 피랍된 조선 도공들의 기술 이전에 연구는 각 국가의 연구목적에 따라 접근법도 상이하게 나타난다. 한국 연구는 일본 규슈 지역의 도자 발전에 조선 도공들의 기여에 초점을 맞추고 있거나 조선 도공들의 조선의 정체성에 의거해 출신지, 연행 과정, 정착 이후의 삶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동기를 가진다. 반면, 일본 ‘규슈 도자의 원류가 조선이다’라는 정설에 근거해 한국의 어떤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영향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이주해 온 조선 도공들의 자기 기술이 일본에 도입되는 과정보다 동시대 출토된 유물비교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연구는 일본 도자 발전에 기록되고 있는 조선계 도공들의 후손들을 역추적하거나 전설을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지만 기술 이전을 추론할 수 있는 조건들을 유기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들을 바탕으로 16세기 조선이 보유했던 자기 기술들을 조선 도공들도 가지고 일본으로 이주하였다는 것과 일본 내에서도 일본 도공들보다 우월적인 도자 기술을 가졌다는 기록과 정황들을 먼저 파악한다. 조선 도공들이 처음 축조한 가마소에서 이들이 어떻게 도공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는 지, 나아가 생업용 도자 활동을 넘어 자기 기술 발전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에 주목하고 있다.
반면 일본 연구에서는 동시대 양국에서 출토된 도자 유물을 바탕으로 조선 도공들의 직접적인 기술 이전이라 볼 수 있는 가마 159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도구나 가마 구조 등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다만, 확실히 한국 특정 지역과의 연관성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계 영향 관계 정도로 보고 있다. 대부분 조선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히젠도자를 중점으로 보고 있으며, 유물을 통해서 기술적 영향력은 1610부터 대략 20년 동안 아주 짧게 드러나고 이후 표면적인 흔적들도 1650년대 이후에는 완전히 중국의 영향력으로 대체한다고 보고 있다. 이 공백에 대한 설명은 유물을 통해 드러나는 기술 변화들을 일본 도자사나 당시 국내 수요에 참고하여 외부적 원인들을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명들이 조선 도공들에 의한 유약 조합이나 소성 기술과 같은 핵심 기술의 도입 여부를 말해주지고 있지는 않다. 결국, 도자 교류의 큰 틀에서 조선 도자의 영향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술력 이전에 대한 파악은 조선이 아닌 중국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둔 것이다.
한국 연구가 훨씬 조선 도공들의 기술 업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일본 도자사나 한일 교류의 관점에서도 자기 기술의 도입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규슈 도자기 문화관이나 한일 교류 박물관(나고야 성 박물관)에서는 이삼평에 의한 자기의 기술이 아리타 도자의 원천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다만, 일본 도자학계의 관점에서 유물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는 조선 도공의 도자 기술 전파를 충분히 판단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오히려 중국과의 영향 관계 속 조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자기 기술의 유입 경로가 조선을 통해 직접적으로 들어왔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물이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써 일본과 한국
160 연구 각각 우리에게 두 가지의 물음을 던지고 되었다. 유물이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진실과 조선 도공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물음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으로 조선 도공들에 의해 자기 기술이 이전되어진 공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이마리 일대 지역문헌, 고문헌, 그리고 역사자료와 같은 향토사적 시각에서 당시 도자 기술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사건들이 일어난 공간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마리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다완 정치’라는 핵심 사건과 그 무대 위의 자기 기술을 가진 이삼평 인물은 단순한 도자공의 역할만을 수행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백자 기술적 완성에 대한 도공의 집착이 녹봉 대신의 가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자기에 대한 집착과 이를 두고 다이묘들 간의 정치 경쟁을 여실히 보여주는 ‘다도회’에서 조선 도공들은 알력 다툼에서의 생존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차 도구 개발이라는 제안을 통해 자신의 도자 기술력 가치를 입증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가마소를 만들 수 있는 토지 공간을 받음으로써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도자사 발전에 있어서 조선 도자 기술 전파의 영향력과 같이 조선도 조선백자의 기술 도약의 배경에 중국으로부터 기술 적 영향이 뿌리 깊이 존재한다. 조선백자는 세종시기 중국 황제로부터 환관 윤봉이 8년간 중국으로부터 고급도자를 가져오게 되면서 기술 도약의 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백자는 세종의 원료와 기술의 자체적 생산을 명하면서 명 황제나 사신이 탐하고 조공품으로 요구받을 만큼 고려백자와는 전혀 다른 백자로 진일보한 것이었다고 161 3. 임진왜란 시기 조선 도자기 기술의 일본 전파: 한국과 일본의 두 시각_규슈 도자기 문화관 한다. 아마 기술 이전을 체득해 내재화하기 전까지는 도자 기술자의 유입과 이들의 대우가 상당했을 것이라 예측된다. 이처럼 일본에 피랍된 조선 도공들의 기술적 대우는 당시 상류층의 문화 소비뿐 아니라 이를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 도자 수입을 의존하는 비대칭적 무역 구조를 감수해야 했던 것, 나아가 이것이 일본 내 도자 생산을 두고 정치 권력 경쟁으로 비화된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당시 조선도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북학파의 선민 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더불어 중국과의 대외 관계나 중국 내란으로 인해 도자 교역도 불안정했기 때문에 점차 왕실에서 새로운 사회계층까지 커지는 수요층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이다. 국가 성장 단계에서 부가 커지는 상류층들만의 문화 수요가 기폭제가 되었던 것도 있지만, 도자 기술사 측면에서는 명 황제와 조선 왕조 간의 답례품으로 왕실 고급 도자들이 오고 갔던 동아시아 전통의 조공 관계 속에서 기술 발전의 촉발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본의 기술 전파는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요소로 인해 전쟁이라는 기회를 통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던 형태라는 점에서 조선과는 양상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건 하에서 이루어진 조선 도공들의 기술 전파가 일본 내에서 가능했던 것을 고려하면, 조선 도공들에 대한 비호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녹봉대신의 가치 이상이었을 것이다. 후쿠오카, 구마모토 나가사키 현의 향토자료와 같은 일본 연구 자료 바탕으로 조선 도공을 둘러싼 도자 정책을 보면, 도자 기술 경쟁은 정치권력 경쟁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이주 후 조선
162 도공의 기술적 예우는 정치적 예우의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결국, 이러한 삼국의 정치경제 흐름에서 보았을 때, 중국 경덕진을 일대로 벌어졌던 도자 기술의 전파가 중국을 넘어 조선,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도자 기술 자체로 볼 때는 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더욱이 일본의 시각에서는 자기 기술 이전의 목적이 일본 내 자체 생산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도공들의 기술이 온전히 보전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백자 생산 직후 바로 등장하는 ‘이마리야끼’와 같이 일본화하는 과정까지 기술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따라서 양국의 연구를 통해서 자기 기술 도입의 형태가 유물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한자문화권 세계의 정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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