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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21세기 사랑방, 격동의 동아시아를 준비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0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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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교류박물관 · 김유진 · 고려대학교

들어가며

16~17 세기 동아시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서 조선과 일본의 선택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두 국가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시점은 1592 년 임진왜란 시기였다. 일본은 점차 자주적 인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천하질서관에서의 탈피를 시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반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변화한 힘의 역학관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중화(小中華)’를 추구하며 기존의 천하질서관을 계승하려 하였다. 이처럼 양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다른 길을 걷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낮추어 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지속된 양국의 크고 작은 갈등은 어쩌면 이 시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이렇듯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중재했던 것은 대마도였다. 근대적 개념의 국가 단위로 보면, 일본에 속한 하나의 섬에 불과한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모두로부터 관직을 받고 양국의 교류를 독점적으로 주도한 당시의 통교체제는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영토 개념에는 경계의 안과 밖이라는 양의성(兩義性) 내지 양속성(兩屬性)이 있다. (하우봉 2013, 216) 이때 그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매개자의 존재가 중요한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대마도가 이러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결되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도쿄를 중심으로 한 에도 막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일본의 국가 통합력은 미약하였다. 덕분에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경계 영역에 위치해 조선에게 종속되지 않고, 일본에게도 반독립적인 성격을 띠며 양국의 중재자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에 대한 분석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본 답사보고서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매개적 역할에 관해 탐구해보고자 한다. 우선 대마도라는 매개적 존재를 조선과 일본이 필요로 한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기유약조의 체결에 크게 기여한 대마도의 국서조작 사건에 집중해 조선과 일본이 이를 알고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해관계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기존 연구 검토 및 연구의 필요성

기존 연구에 있어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한일관계사’로 명명되어 근대적 개념의 국가수준에서 양자적 틀을 통해 연구되었다. 이 때문에 근세적 외교체제에서 대마도가 중대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연구는 통신사나 왜관을 중심으로 한 한일관계사 연구로만 이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 (장순순 2013. 16)

조일관계에 있어 대마도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한 연구로는 동북아역사논총 제 41 호에 실린 하우봉, 민덕기, 홍성덕의 논문이 있다. 하우봉(2013)은 고중세 시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대마도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변화를 탐구하였다. 여기서 조선의 대마도 인식은 대마도가 예부터 우리 땅이었다고 믿는 대마고토의식, 대마도가 조선의 동쪽 경계라 여기는 대마변병의식, 대마도를 일본 본토와 다르다고 보는 대마구분의식으로 구분된다. 고려 시기 대마도와의 조공관계와 조선 세종 시기 대마도 정벌은 대마고토의식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이후 대마도가 영토적으로는 일본에 속하나 정치적으로는 조선에 속한다고 보면서 대마변병의식과 대마구분의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강화된 국가통합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외교일원화 조치에 따라 일본 본토와 대마도에 대한 구분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민덕기(2013)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이전, 도중, 이후로 시기를 구분하여 대마도의 조선 교섭 노력에 대해 탐구하였다. 여기서 대마도의 이러한 노력이 일본 본토가 아닌 대마도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을 유지하고 군사를 징발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예측했음에도, 대내적 위신을 지키며 조선에 강화요청을 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다고 보았다.

대마도 국서조작사건의 전개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Toby(1991)와 Lewis(2003)이다. 다만 Toby(1991)의 경우 국서조작의 주체가 대마도주 소 요시토리와 외교자문 겐조라고 상정하였으며, Lewis(2003)의 경우 국서조작의 주체가 대마도주 소씨 가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라고 전제하였다.

또한 조선후기의 조일관계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인지, 국가와 지역의 관계인지를 두고 한국과 일본 학계의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일본 측의 연구자들은 ‘야나가와 잇켄(대마도 국서조작사건)’까지의 대조선외교를 대마도의 독자행동으로 파악하는 반면, 한국 측의 연구자들은 에도막부의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홍성덕 2013. 138)

다만 근본적으로 대마도가 어째서 그런 매개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해당 역할에 바탕한 대마도의 도덕적 해이를 조선와 일본이 어떠한 이해관계를 통해 묵인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본 답사보고서는 대마도의 매개적 역할의 근원을 지리적 이점과 왜구 문제에서 찾고, 대마도 국서조작사건의 처리를 상세히 살펴 이를 보완하고자 한다.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연구 방법 및 자료

본 보고서는 조선 측 핵심 자료인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일본 측 핵심자료인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을 중심으로 대마도 국서조작사건에서 드러난 대마도, 조선, 일본의 인식과 대응을 분석한다. 이때 분석에 있어 이용희의 시대구분상 제 3 기의 조선과 일본의 심상을 참고한다. 또한 G.McCune, R.Toby, J.B.Lewis 등 제 3 자의 시각에서 서술된 2 차 자료들을 참고해 다양한 관점을 다루고자 한다.

대마도의 매개적 역할의 조성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매개하는 통교체제는 ① 교통을 고려한 지리적 이점과 ② 왜구 문제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는 한반도에서 약 49.5km, 일본 본토(규슈)에서 약 82km 떨어져 있다(다만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은 약 47.5km 떨어져 있음). 이러한 대마도의 지리적 이점을 고려할 때, 천하질서의 변경에 위치해 조선을 매개로 중국과 교류하려 노력해 온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과의 교류에도 대마도라는 매개자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중국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직접 사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해왔다는 점에서, 단순히 지리적 이점이 조선으로 하여금 대마도의 매개적 역할을 수용하도록 도왔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려면 육로 교통과 해로 교통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조선통신사 사행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양~닛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는 곳)의 거리는 약 2,000km 로, 이동기간은 편도로 10~12 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동아일보 2014) 반면에 조선과 명·청의 사신들이 오간 한양과 중국 베이징 사이의 거리는 약 1,500km 로, 이동기간은 편도로 3 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울~닛코와 서울~베이징의 거리가 약 1.3 배 차이에 불과함에도 이동기간은 3~4 배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는 해로와 육로의 차이 때문이다. 명이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17 세기 후금에 의해 요동 지역이 막히기 전까지, 명과 조선의 사신은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해로, 강로, 육로를 거쳐야했다. 이때 해로가 육로보다 길었으며, 사행선 침몰, 익사 등의 위험이 컸다. (허경진 2009. 72) 이는 통신사행록 해행총재 중 하나인 김세렴의 해사록에도 잘 드러나 있다.

백여 리를 가니 북풍이 동풍으로 바뀌어, 물마루(水宗)에

이르자 바람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파도가 산처럼

드높아 몹시 흔들리는데, 올라가면 하늘에 오르는 듯하고

내려가면 땅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다른 배를 바라보니,

떠오르면 판자 밑이 드러나고 가라앉으면 돛대 끝이 보일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뿐이다. 배 안의 사람이 모두 어지러워 넘어지며 토하고

격군도 노 사이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중략) 평성춘 등이 물결에 떠돌아 간 곳이 없으므로

왜인들이 근심하였다. 상사가 탄 배의 뱃전이 물결에

꺾이고, 배 안의 소주병ㆍ꿀병이 서로 부딪쳐서 모두

깨졌다. 처음으로 바닷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고약한 바람을

만나 거의 뒤집힐 뻔하다가 언덕에 닿으니, 사람마다 다시

살아났음을 축하하였다.

이처럼 해로이동시 날씨와 파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날씨가 좋지 않으면 정박지에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다른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매개자를 두지 않던 조선의 입장에서도 대마도를 통해 일본과 교류하는 것이 부담을 덜 수 있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대마도가 조일관계의 ‘매개자’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데에는 왜구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대마도가 한반도와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2 세기 후반 고려 시기이다.통일신라가 일본과 가까이 지내던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한반도와 일본 사이 교역이 완전히 끊겼고, 이 영향은 고려 시기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대마도는 한반도와 표류민 교환을 시작으로 교류의 물꼬를 트고, 한반도와 일본 서부 지역 간의

교역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교역을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이라 하는데, 조공무역으로서 외교의례의 형식을 갖춘 공식적인 교역체제였다. 고려와 일본 간에 공식적 국교가 없었는데도 대마도가 진봉선 무역으로 고려와 교역을 이어간 점, 대마도주가 고려 관직을 받았다는 점에서 진봉선 무역은 대마도의 반독립성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우봉 2013, 221)

그러나 원(元)이 고려를 침략해 고려와 원의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하면서, 진봉선 무역체제는 중단되고 만다. 교역통로를 상실한 대마도인은 왜구로 변하였다. 대마도의 경제구조는 적은 인구와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으로 인해 교역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Toby

사진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1991. 26) 왜구는 특정 계절마다 한반도 남부지역을 침략하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고려의 존부를 위협하였다. 고려가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았음에도 왜구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남아있으며, 당시 일본 막부 또한 왜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고려가 멸망하고 들어선 조선은 초기부터 왜구 문제를 관리해 남쪽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대표적으로 1419 년 세종이 왜구 근거지 척결을 위해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한 바 있다. 조선의 적극적인 왜구 관리 정책은 잔인한 해적들을 교역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는 조선의 왜구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82 회에 걸쳐 조선과 통교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마도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하우봉 2013. 225) 즉, 조선과 일본은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자립이 어려운 대마도에게 ‘외교적 매개자’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공동으로 관리하여 골치 아픈 왜구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대마도 국서조작 사건

임진왜란 이전의 대마도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도를 어떻게 희석시켜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실제로 1587 년에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가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물을 진상하였고,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조선을 침략하는 대신 조선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방안을 히데요시에게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히데요시의 침략 결정 유예를 받아냈지만, 조선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이후 교섭도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현재 한일교류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나고야성의 축조를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명령하였다. 1592 년 나고야성에서 16 만의 일본군이 조선으로 출병하면서, 대마도가 막고자 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만다.

임진왜란 이후의 대마도는 단절된 관계를 통신사 파견을 통해 재개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공식적인 일본의 강화교섭 노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8 년 대마도주에게 조선과의 교류를 재개하도록 명령하면서 시작되었다. 대마도는 조선에게 피로인을 송환하며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명의 반대를 핑계로 이를 거부한다.

대마도의 국서조작은 이렇듯 조일 강화교섭이 교착상태인 상황에서 총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교섭요구를 거부해온 조선은 1606 년 마침내 일본의 국교 재개 요구에 대해 2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일본 국왕’이라고 칭하는 공식적인 정부 문서를 보내 통신사를 요청할 것, 둘째는 성종과 중종 등 왕실 무덤을 도굴한 일본군을 인도할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는 듯한 암시를 줄 수 있고, ‘일본 국왕’이라는 표현은 중국에 의해 책봉된 국왕을 의미하므로 일본이 이들 요건을 수용할 가능성은 낮았다. 이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외교 자문 겐조는 ‘일본 국왕’이라고 적힌 서한을 위조하고 도굴범 대역을 조선에 함께 보낸다. (Toby 1991. 31) 다만 이를 주도한 것이 소씨 가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키라는 주장도 있다. (Lewis 2003)

이로 인해 조선의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을 방문하면서 국서조작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한 차례 더 서한을 위조한다. 원래 조선이 가져온 서한의 내용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한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할 정도지만, 귀국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잘못을 고쳤다고 하니 이렇게 후의에 답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답신을 의미하는 ‘봉복’이라는 표현을 편지를 먼저 보내는 이가 쓰는 ‘봉서’로 수정하고, ‘조선이 화교를 먼저 요청한다’고 고쳐썼다. (동아일보 2015)

이처럼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에 필사적이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대마도의 교역 의존적 경제구조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내 정치적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다이묘들의 권력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만다. 장인의 편에 섰던 요시토시는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자 숙청될 것이 두려워 자신의 부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을 감행하기까지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요시토시는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할 것을 예측하고, 이를 성공시켜 이에야스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실록에도 대마도주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유키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했기 때문에 조선과의 통교를 반드시 성공시키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신하들의 발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평조신(平調信)·평의지(平義智)는 모두 가강의 세력안에 있는

신하로서 속히 우리 나라와 화친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가강에게 환심을 살 터전을 삼기 위해서인데 신축년 이래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애걸도 하고 공갈도 하며 벼라별

작태를 다하다가 평조신이 죽은 뒤에는 더욱 줄기차게 그

흉독을 드러내면서 공갈 협박으로 몰아 부칩니다. 그러니

이는 그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분명하고 일본에서

관여하여 아는 바는 아닐 듯싶습니다.

조선의 좌의정 심희수도 대마도가 부탁과 공갈을 병행하고 국서를 조작해서라도 조선과 일본의 국교를 재개시키려고 하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함이며, 에도 막부의 뜻이 아닐 것이라 짐작하였다.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지 않는 한 조선과 대마도의 교역이 금지되었던 것 또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을 향한 대마도의 노력에 조선은 1604 년 ‘조선에 대한 대마도의 노력이 칭찬할 만하므로 일본과 차별하여 대마도와의 교류를 단절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표명한 바 있다. 이때 부산에서의 교역을 대마도에 허용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 본토에 파견되지 않는 한 이에야스가 대마도의 교역 추진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대마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했다.

조선이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대마도의 국서조작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자신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강화교섭을 하게 되었다. 이는 현행 국제법에서도 조약무효사유 중 ‘기만’에 해당할 수 있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특히 조선의 입장에서 신하라고 여겼던 대마도주가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임진왜란의 선봉에 선데다, 선왕의 묘를 도굴한 범인들을 거짓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대마도를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심상은 국서조작으로 체결된 기유약조에서 대마도의 세견선을 감축하고 서울 상경을 금지하는 징벌을 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은 대마도가 보낸 서한이 명력(明曆)을 사용하고 있는 점, 중화를 거부하지 않는 논조가 담긴 점, 도굴범으로 보내진 대역들이 지나치게 어린 점으로 인해 서한이 위조되었음을 눈치챘다. (Toby 1991. 31)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천하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이러한 단서를 빨리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이은 또다른 침략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고, 대마도를 낮추어 보는 인식에 기반해 대마도의 국서조작 노력을 묵인할 수 있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선조실록에 담긴 이 문제의 처리를 논의하는 선조와 신하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적이 물러가고 강토를 회복한지 이미 8∼9 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사방을 둘러보면 정벌할 준비는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게을리 시간만 허송하는 것이 신묘년

이전보다 더욱 심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마도 적이 우리 나라에 방비가 없음을

엿보아 알고는 더욱 함부로 능모(凌侮)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사세가 이에 이르러 조절하는

권한이 저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으니,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자가 비록 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백성을 위한 계책으로 우선 그들과 통호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중략) 눈물을 흘리며 딸을 오(吳)나라에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시집보내는 계책을 금일에 행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아,

가슴이 아픔니다.

좌의정 심희수의 말에서 조선이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조선을 ‘능모’하는 행위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의 부족한 군사력과 일본에게 넘어간 ‘조절하는 권한’으로 인해 일본과의 국교 재개가 불가피함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희수의 추론은 전후 대마도가 전쟁을 후회하는 서계와 조선인 포로를 바치며 일본 본토의 뜻이라고 전했음에도 단 하나의 신임장도 없었다는 점에도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심희수는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의심하면서도, 대마도 측에는 중국에 고해 처리하겠다고 시간을 끌며 그들의 반응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대저 이적(夷狄)은 금수라서 제왕(帝王)이 그들을 대함에

있어 늘 그들의 마음을 실망시키지 않는 법인데 이것이

어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한번 화호(和好)를

잃게 되면 사납게 무기를 잡고 나아와 우리의 백만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는 것은 물론 크게는

종묘 사직의 안위에 관계되고 작게는 수십 년 동안 병란이

계속될 것이니, 그 사이의 일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중략) 이제 압송하여 돌려보내고 진범이 아니라고

꾸짖으면서 곧장 노여워하는 빛을 노출한다면 귤지정이

과연 그렇다고 자복(自服)하겠는가, 아니면 태연하게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다른 적을 결박하여 와서 바치겠는가?

반드시 떠들썩하게 일어나 큰소리만 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받아들이지 않고 힐문을 할 경우 그 뒤에는 귤지정을

어떻게 대우할 수도 없고, 회답사 역시 건너갈 수 없을

것이어서 많은 난처함이 있게 될 것이다. 이번에 왜적이

능적을 결박하여 바친다는 것으로 이미 명분을 삼았으니,

금수와 더불어 허실을 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려 죽이기만 하고 헌부례(獻俘禮)는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있어 기만을 당했어도 혐의도 없을

것은 물론 적의한 처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잘 헤아려서

조처해야 될 것이다.

왕릉 도굴범의 처리에 대한 선조의 말을 보면, 대마도와 일본을 오랑캐이자 금수와 같은 존재로 치부하며 조선이 ‘제왕’으로서 이들의 행위를 이해해야 한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이용희의 한일관계사 시기 구분상 제 3 기에 해당되며, 일본과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문화적 멸시와 침략당한 굴욕감이 잘 드러난다. 또한 대마도에게 국서조작에 대해 다그칠 경우 대마도와 일본의 군사적 압박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면서,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대마도의 국서조작과 가짜 도굴범 압송을 조선의 평화 유지를 위한 일종의 명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선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관한 소식을 대마도로부터 듣고 일본 에도막부가 대외 팽창보다는 대내적 안정을 우선시하리라 생각했고, 조선이 국교 재개에 응답한다면 무력갈등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Toby 1991. 27)

일본이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일본 에도막부의 입장에서도 절대 수용할 수 없었던 조건들을 조선에 대해 수용한 것이니 대마도를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또한 대마도 국서조작 사건을 묵인하고 대마도에게 외교적 역할을 한번 더 맡기는, 일견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가 필요했던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조선과의 관계 회복은 히데요시의 실패한 전쟁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자, 일본 내 남아있는 반대세력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보일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야스는 대내적 위신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선에 공식적으로 강화 요청을 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는 기존처럼 대마도가 강화교섭을 중재할 것을 명령했다. 대마도 또한 조선에 강화 요청을 할 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들으니, 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은 일찍이 한 군사도

바다를 건너보내지 않았고, 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소위와는

모든 것을 반대로 한다고 하는 데이겠습니까.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빠르게 알아챈 조선과 달리, 일본은 이후 야나가와 부젠 시게오키가 일본과 조선의 통교에 사도가 있다고 막부에 소송하면서 알게 된다. 1609 년 기유약조로 국교가 재개되고 22 년이 지난 1631 년 일어난 이 소송은 ‘야나가와 잇켄’이라고 불리며, 국서조작을 주도한 소 요시토시의 뒤를 이어 대마도주가 된 소 요시노리와 야나가와 부젠 시게오키 간의 소송이었다. 해당 소송과정은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30 일, 오이노카미(大炊頭)님이 후루카와 우마노스케를 불러서

명하시기를, “이 잇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을 오고가는 배의

도항을 중지하게 되면 조선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니,

양쪽에서 사자를 1 명씩 보내 조선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쇼군의 뜻이다.”라고 하셨다.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일본 에도막부는 조선이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 집권세력이 야나가와 잇켄을 고려해 조선과의 도항을 중지한 것은 대마도 국서조작을 조선에 알리는 것을 주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조선에 양해의 서한을 보낸 것은 국서조작 여부와 관계없이 조선과의 관계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송 과정에서 소 요시나리는 국서 개찬이 자신의 선대인 소 요시토시 시기의 일이며, 자신은 당시에 어린 나이였기에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더불어 가신인 야나가와 가문이 조선과의 통교 실무를 맡았기에 국서조작을 자의적으로 주도하였으리라 주장하였다. 반면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대마도주 소씨 가문이 국서를 위조해 온지 오래되었으며,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Toby(1991)와 Lewis(2003)도 어느 쪽이 국서 조작의 주체였느냐에 대해 다르게 평가하고 있기에, 누가 진범이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소송 자체에서는 요시나리가 승리하고, 시게오키는 처벌받았다. 이는 요시나리가 소송이 끝난 후 조선 측에 보낸 서계에서 잘 드러난다.

근년 부젠이 불의(不義)를 획책하고 주종(主從)의 도(道)를 어겼으며

게다가 조선통교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를 상신했습니다. (중략)

에도 성에서 재판한 결과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섬(대마도)에 대한 지배권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조선통교를 관장하는 일도 예전대로

수행하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부젠은 조선과 관련해서

제멋대로 저지른 잘못이 많아, 멀리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중략) 엄밀하게 조사하여 시종일관 잘 마무리되었고, 조선과

관련된 사안도 변한 것이 없어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례에 따라 사송선(使送船)을 보내서 일본·조선의 통교를 전처럼

추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향후 조선도 성신(誠信)의 도(道)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사에 경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결과적으로 대마도주 소씨 가문은 조선과 에도막부 사이의 외교를 담당하는 특수한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에 관련자들을 대질심문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대마도주 가문이 국서조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만큼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고려할 때 야나가와 잇켄의 결과는 일본 집권세력의 정치적 결정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에도막부는 교토의 승려들을 대마도에 보내 조선과 에도막부 사이의 외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도록 하였다. (Lewis 2003. 22) 국서조작 사건으로부터 이미 20 년가량이 지나 조선과의 관계가 안정화된 상황에서 이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 조선과의 국교를 담당해 전문성을 갖춘 소씨 가문의 필요성을 높게 산 것으로 보인다. 패소해 국서조작의 책임을 모두 지게 된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시게오키가 중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복자살이 아닌 유배형을 받게된 것 또한 잇켄이 정치적 고려 하에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한다.

다만 에도막부가 조선과의 안정된 통교를 원했던 것이 조선의 의도대로 천하질서에 순응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잇켄 이후 조선에 다녀온 사절이 쇼군과의 질의응답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된 구상서에 따르면, 일본의 자주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여럿 있다.

조선이 “일본의 쇼군을 이번 서한에 ‘대군(大君)’이라고 칭한

것은 이름(御名)을 의미하는가? 직위(御位)를 의미하는가?

예전에 듣지 못한 것 같다.”고 하면, 대군(大君)에 관해서는

듣지 못했고, 이전에 어떠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일본의 쇼군을

대군이라고 쓰시마노카미가 쓰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쓰시마노카미가 무지하기는 하나, 국서를 작성하는 승려들이

그런 것을 틀리게 기재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아시는

대로 귀국과의 통교에서 야나가와 부젠이 중간에 쓰시마노카미

모르게 사사롭게 처리한 일이 많았는데, 국서 담당자들과

부하들도 이번에는 쓰시마노카미가 특별히 신경 썼으니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전과 달리 서계에 연호(年號)를 기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무슨 연유인가”라고 하면, 전에 연호를 기재한 건

쓰시마노카미가 생각하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 일본은

중국의 부하가 아닙니다. 일본에도 천자(天子)가 있고, 관위·이름·연호도

그대로여서 이국(異國)의 연호를 적지 않습니다. 설령 조선과

쓰시마노카미가 통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의 도(道)에 어긋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질의응답 내용은 국서조작사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기존에 원했던 ‘대군’이라는 호칭을 고집하고, 명의 연호가 아닌 일본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천하질서의 변경에 있던 일본이 점차 천하질서의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조선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조선은 일본 측에 자신들이 대마도의 국서조작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양국의 관계에 수정이 있더라도 이를 수용할 의지가 있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잇켄의 결과가 대마도주의 가문에 유리하게 나온 것에 대해서도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을 보이며 막부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조선에서 무슨 일인지 모르는 채 부젠이 사사롭게 언급하여

행한 것이 여러 번 있다고 한다. 그런 일에 관해 조선에서도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부젠이 모든 일을 쓰시마노카미에게 알리지 않고 수년간

사사롭게 처리했음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전 일을

현재의 쓰시마노카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여 수정하여도

조선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중략) 단 말하기를, “천하에 주인을 적으로 삼고 부모에게

불효한 자에게 좋은 일은 없다. 쓰시마노카미의 부하가

야나가와라는 것은 이국도 알고 있다. 주인을 죽이려고

거짓말을 했다. 부젠이 이처럼 되는 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보초로에 관해서는 “부젠에 동의했으므로 이

또한 도리에 어긋났다.”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선과 일본은 서로가 천하질서에의 순응과 탈피라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졌음을 인식했음에도 실리를 위해 국교를 이어가기를 택한 것이었다. 이렇듯 대마도 국서조작사건의 처리에 대한 양국의 우호적인 분위기 하에, 빠르게 통신사의 일본 왕래를 위한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작년에 로주께서 서한을 보내, 조선에 보내는 서계를

이번에는 우선 쓰시마노카미가 조처하라고 하시어 막부의

뜻을 받들어 행하였다. 이번 답서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 이것을 말씀드리고서 통신사를 요청해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전하면 통신사가 지체될 터이니 서둘러 요청한다.

통신사를 요청하는 사신에 관해 만약 질문하시면 “순풍을

기다려 도해할 것입니다.”

덕분에 1636 년 조선 통신사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의 주로 피로인 송환을 위한 사절들이 방문하였으나, 이 시기부터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정례화 되어 1811 년 순조 시기까지 총 9 번의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는 기나긴 임진왜란 전후 처리과정의 종결이기도 하였다.

결론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 있어 대마도의 국서조작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물릴 듯 맞물리지 않던 상황에서 대마도의 국서조작이 훌륭한 명분이자 돌파구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마도의 매개적 역할은 해로교통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과 왜구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일본의 합의 5. 조선-일본 관계에 있어 대마도의 역할 하에 주어진 것이었다. 대마도 또한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로 인해 매개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 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대마도의 국서조작은 일본과의 무력갈등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주었으며, 군자의 나라로서 오랑캐를 포용한다는 정신적 승리의 역할도 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마도의 국서조작은 대내적 경쟁을 거쳐 수립된 에도막부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대내적 위신은 손상되지 않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즉, 대마도 국서조작 사건의 묵인은 대마도, 조선, 일본의 이해관계의 합치에 따른 결과였다. 특히 조선과 일본은 서로가 천하질서에의 순응과 탈피라는 정반대의 목적을 가졌음을 파악했음에도 조선의 경우 대외적 안정, 일본의 경우 대내적 안정이라는 실리를 위해 국교를 이어가기를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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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Sino-Japanese Treaty Memorial Hall

Jongeun Seong

The University of Sydney

Table of Contents

1. Introduction

2. The Great Qing Empire’s Perspectives on Li Hongzhang’s Psyche

2.1: Qing China’s 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Issued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in Li Hongzhang quan ji (李鸿章全集)

2.2: Liang Qichao’s Assessment of Li Hongzhang’s Lifetime in

Li Hongzhang chuan (李鸿章传)

3. Li Hongzhang’s Psyche from the Eyes of Japan: the Innermost Ambitions

of the Japanese Empire

3.1: Bilateral Peace Summit Between Ito Hirobumi and Li Hongzhang

in Shimonoseki, Japan

3.2: Mutsu Munemitsu’s memoir of Li Hongzhang in Kenkenroku (蹇蹇錄) 4. Conclusion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I. Introduction

Albeit the Great Qing Empire’s hegemony in East Asia started to diminish due to the Treaty of Nanjing in 1842, Qing China maintained its traditional tribute affiliation(朝贡关系) with its periphery states such as Joseon. However, from the 1870s, as an imperative step of the Self- Strengthening Movement(洋务运动), Qing China started to modernize its naval powers under the leadership of the then Grand Secretary Li Hongzhang. Li Hongzhang sent several Chinese officers abroad to Europe and North America to adopt a more advanced military system in Qing China. In addition, Li Hongzhang formed the Beiyang Fleet, the Nanyang Fleet, and the Fujian Fleet in an effort to strengthen the naval powers of Qing China. Notwithstanding Li Hongzhang’s execution of the self-strengthening movement for several decades, Qing China was devastated by Japan’s meticulously modernized naval powers during the Meiji Restoration. As a matter of fact, Japan was fully prepared to utilize its westernized military capabilities under the leadership of Emperor Meiji, unlike the Qing imperial court’s outmoded national defence strategy.

Until the early 2000s, Chinese academics did not progress a significant amount of research on the Sino-Japanese War because many Chinese people shamefully perceived the Great Qing Empire’s defeat by a mere “barbarian,” non-western state like Japan based on the traditional concept of the Sino-barbarian dichotomy(华夷之辨). Hence, scrutinizing the “psyche” of Li Hongzhang, a protagonist of the Sino-Japanese War, will be a meaningful attempt to figure out how the Sino-Japanese War changed the course of East Asia’s regional order in the late 1800s and its implications for contemporary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East Asian region. Furthermore, successful analyses of a statesman’s “psyche” makes it possible to prospect the innermost intentions of states; for instance, by analyzing Chairman Kim Jong-un’s “psyche,” International Relations scholars are able to anticipate North Korea’s actual intentions in the U.S.-DPRK peace summits in Singapore and Hanoi.

This research paper will therefore delve into Li Hongzhang’s psyche before, during,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from the perspectives of both the Qing and the Japanese Empires for the aforementioned reasons. Since official government documents do not necessarily represent a statesman’s psyche, a diverse range of primary and secondary sources were used for this research paper. The first part of this research paper will examine the Great Qing Empire’s perspectives on Li Hongzhang’s psyche by observing two primary sources: 1) the 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that Qing China issued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in Li Hongzhang quan ji (李鸿章全集) and 2) a critical assessment of Li Hongzhang’s life, Li Hongzhang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chuan (李鸿章传), which was written by Liang Qichao. The second part of this research paper will analyze the Japanese Empire’s perspectives on Li Hongzhang’s psyche and determine what Japan genuinely wanted to achieve at the time period. In order to do so, the then-Japanese Foreign Minister Mutsu Munemitsu’s Kenkenroku(蹇蹇錄) and the dialogue between Ito Hirobumi and Li Hongzhang during the Shimonoseki Treaty will be scrutinized in detail.

2. The Great Qing Empire’s Perspectives on Li Hongzhang’s

Psyche

2.1 Qing China’s 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Issued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in Li Hongzhang quan ji

(李鸿章全集)

Li Hongzhang quan ji(李鸿章全集) is an invaluable primary source to analyze Li Hongzhang’s psyche since it consists of Qing China’s official diplomatic documents, confidential government documents, Li Hongzhang’s diaries, letters exchanged between Li Hongzhang and the Guangxu Emperor, and Li Hongzhang’s letters to Japanese government officials. After Qing China was defeated by the Japanese in the Battle of Weihaiwei, the Qing Court reluctantly decided to send envoys to Japan for a peace summit. Qing’s government document that was issued during the twenty-first year of the Guangxu Emperor’s reign shows Li Hongzhang’s feelings before he left Beijing for a bilateral summit with Japan. The document was called “恭谢天恩并陈交卸起程日期折,” meaning Li Hongzhang’s gratitude towards the Guangxu Emperor and his report about the departure date to Japan. Li Hongzhang described that Japan demanded the Qing imperial court send one of the highest- ranking government officials as a plenipotentiary( 全 权 大 使 ). Li Hongzhang added that the “behaviors of Japan are extremely rude, and it is likely that Japan is hiding something that they want.” Li Hongzhang also remarked that “it is entirely this servant(臣)’s fault to let his Imperial Majesty be concerned about this issue…However, I cannot hold back my tears for his Imperial Majesty’s decision to entrust me with such a heavy responsibility(重任).” Based on the letter to the Guangxu Emperor, it is apparent that Li Hongzhang held himself accountable for Qing China’s defeat in the Sino-Japanese War, and he bluntly showed his anxiety regarding the treaty with Japan. What caused Li Hongzhang’s anxiety was that he was uncertain what the Japanese would demand Qing China to reimburse for the Sino-Japanese War and what it meant for the future of Qing China.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The then-Grand Councilor(军机大臣)’s letter to the Guangxu Emperor in the February of 1895 also shows Li Hongzhang’s anxiety. The Grand Councilor wrote, “Since this servant(臣) cannot determine the current enemy’s situations(敌情), we are in a state of emergency…I am worried that the Japanese(倭人) might provoke our soldiers and threaten Beijing. This servant(臣) is pretty sure that the Japanese will demand the cession of certain territories. If we do not allow a cession of certain territories, the Japanese will, of course, threaten our capital. Since it is important for us Qing to determine what the Japanese actually want, please allow Li Hongzhang to deal with a cession of Qing’s territories as soon as possible.”

The overall tone of both documents in Li Hongzhang quan ji(李 鸿章全集) clearly shows that Li Hongzhang was extremely anxious about the future of Qing China because he was burdened with heavy responsibilities to negotiate with Japan. For instance, whenever Li Hongzhang sent a letter to the Guangxu Emperor, he constantly self- criticized by stating that it was his “fault” for letting the Emperor be concerned about diplomatic affairs. Furthermore, the Grand Councilor(军机大臣)’s letter to the Guangxu Emperor shows that Li Hongzhang was the one who was qualified, which makes Li Hongzhang more anxious about the potential results of the Sino-Japanese summit even before he left Beijing.

2.2 Liang Qichao’s Assessment of Li Hongzhang’s Lifetime

in Li Hongzhang chuan (李鸿章传)

The author of Li Hongzhang chuan(李鸿章传), Liang Qichao, was the Republic of China’s former Minister of Justice and Minister of Finance. Moreover, Liang Qichao was also well-known as a political opponent of Li Hongzhang, which makes Li Hongzhang chuan(李鸿章传) a significant primary source to objectively assess Li Hongzhang’s psyche. Liang Qichao even stated in the beginning of Li Hongzhang chuan(李鸿章传) that he tried to write about Li Hongzhang’s life as objectively as possible because “historians must have an unbiased mindset” although Li Hongzhang was his political opponent.

In the eighth chapter of Li Hongzhang chuan(李鸿章传), “第八章: 外交家之李鸿章上,” when Li Hongzhang was coming back from the third round of summit with Japan, he was shot by a far-right terrorist named Koyama Toyotaro. Li Hongzhang almost lost his life as the bullet deeply penetrated his left cheekbone. Astounded by the attempted assassination, Japanese Prime Minister Ito Hirobumi and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Mutsu Munemitsu paid Li Hongzhang a visit to the hospital to console him. Japanese Emperor Meiji himself even sent court physicians and medical officers to assist with Li Hongzhang’s treatment.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Li Hongzhang bluntly showed the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sincerity of Li Hongzhang’s patriotism towards Qing China. When a Japanese physician told Li Hongzhang that he must take a rest for a while after they got rid of the bullet, Li Hongzhang furiously answered: “When our nation is in grave danger, we cannot postpone our plans to achieve peace. How can I delay such a critical issue? I will not get rid of the bullet and would rather die!” On the following day, when someone saw Li Hongzhang’s clothing stained with blood, he said, “this is blood shed for the country.” With tears in his eyes, Li Hongzhang answered, “I can gladly die if my death benefits my motherland.” Li Hongzhang’s remarks show that his loyalty towards Qing China was sincere even at the edge of death, and that he was ready to risk his life for Qing’s national interests.

3. Li Hongzhang’s Psyche from the Eyes of Japan: the

Innermost Ambitions of the Japanese Empire

3.2 Bilateral Peace Summit Between Ito Hirobumi and Li

Hongzhang in Shimonoseki, Japan

Before Japan and Qing China started their bilateral peace summit, Japan intentionally selected a sashimi restaurant to host the meeting. Inviting a high-ranking statesman like Li Hongzhang to a sashimi restaurant for a bilateral summit was unconventional; however, Japan intentionally chose the place to humiliate Li Hongzhang. When Ito Hirobumi first met Li Hongzhang, he remarked that “this small town does not contain any building worthy of one of Your Excellency’s high rank. We are quite ashamed that we have nothing better to offer you.” Although Ito Hirobumi outwardly apologized to Li Hongzhang, he knew that Japan’s choice of a sashimi restaurant for a bilateral summit was against diplomatic etiquette. As Japan intended, Li Hongzhang might have felt shameful as a plenipotentiary from the Great Qing Empire.

Aside from Japan’s choice of a sashimi restaurant, Qing China and Japan had to have several rounds of summit discussions due to discordance in each other’s conditions for negotiation. Although Li Hongzhang constantly requested an armistice, Ito Hirobumi refused to withdraw the Japanese troops from Qing China’s provinces. Li Hongzhang pleaded, “As China and Japan are like brothers in the family of nations, the terms of the armistice are much too severe. Have you nothing better to offer?” Moreover, Li Hongzhang bluntly showed his embarrassed feelings during the peace negotiations. Li Hongzhang beseeched Ito Hirobumi, “I am Viceroy of the province of Chihli, and these places are my jurisdiction. My personal reputation is at stake. Let me ask, Count Ito, how you would feel under these embarrassing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circumstances?” Based on Li Hongzhang’s statements, it is clear that he felt extremely embarrassed by Japan’s occupation of Chinese provinces; Li Hongzhang continuously begged for Ito Hirobumi’s sympathy, which

사진

even worsened Qing China’s position in bilateral summit discussions. Li Hongzhang’s submissive attitude towards Ito Hirobumi is also shown in several parts of the bilateral discussion. For instance, when Ito Hirobumi told Li Hongzhang that he was born in Shimonoseki, Li Hongzhang repeatedly flattered that Shimonoseki “is a birthplace of famous men.” Li Hongzhang’s attitude shows how desperate he was to achieve armistice with the Japanese; however, Ito Hirobumi did not give an inch and refused to withdraw Japanese troops for Japan’s imperialistic desires.

3.2 Mutsu Munemitsu’s Memoir of Li Hongzhang in

Kenkenroku (蹇蹇錄)

During the Shimonoseki Treaty, Japanese Foreign Minister Mutsu Munemitsu was the one who accompanied Japanese Prime Minister Ito Hirobumi.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Mutsu Munemitsu wrote a memoir of his diplomatic experience, which is called Kenkenroku(蹇蹇錄). Although Kenkenroku(蹇蹇錄) might be relatively biased, it still remains a meaningful primary source to assess Li Hongzhang’s psyche from the eyes of the Japanese empire. Mutsu Munemitsu reminisced that Li Hongzhang was self-critical when he requested for an armistice with Japan. Li Hongzhang remarked that Qing China could not achieve reformation due to his incompetence, but he praised Ito Hirobumi’s successful reformation projects. Li Hongzhang added that many Chinese people were grateful for Japan’s advanced military capabilities because it proves that the “yellow people” can do as good as “white people.” However, Mutsu Munemitsu assessed that Li Hongzhang’s such comments sounded pathetic. Mutsu 6. Li Hongzhang’s Psyche Throughout the Sino-Japanese War Munemitsu stated, “The old man’s effort to hide his embarrassment and to arouse Japan’s sympathy was adorable.” After the third round of summit discussions when Li Hongzhang was shot by Koyama Toyotaro, Japanese Emperor Meiji eventually allowed an armistice with Qing China. Mutsu Munemitsu reminisced that Li Hongzhang’s face was wrapped with bandage but he expressed his sincere gratitude with his eyes. Based on Mutsu Munemitsu’s memoir, Li Hongzhang seemed like a shameless, flattering person. However, it might have been Li Hongzhang’s strategy to achieve Qing’s armistice with the Japanese as soon as possible despite his embarrassment.

4. Conclusion

In conclusion, explaining Li Hongzhang’s psyche before, during,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in a single word is difficult. Nonetheless, based on Li Hongzhang quan ji(李鸿章全集) and Liang Qichao’s Li Hongzhang chuan(李鸿章传), Qing’s perspectives on Li Hongzhang’s psyche is that he was truly loyal to his motherland even at the edge of death. On the contrary, based on the bilateral peace summit record and Mutsu Munemitsu’s Kenkenroku(蹇蹇錄), Japan’s perspective on Li Hongzhang’s psyche was that he was a cunning person who tried to arouse sympathy from Japan. Further scrutiny is required to understand what Japan truly wanted to gain from the Shimonoseki Treaty. Hence, it can be speculated that Japan’s intention was to propagandize to the western world the fall of the Great Qing Empire and the rise of the new hegemon in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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