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정하민
21세기 사랑방, 격동의 동아시아를 준비하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글로버가든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들어가며
수천년 동안 지속도 왔던 동아시아 내에 천하질서로의 국제 질서는 16 세기 근대시기에 들어서게 되며 서양이라는 새로운 문명 표준에 두드림을 통해 차츰 그 무게를 잃어가게 된다. 17 세기 쇄국정책의 일본은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독점 무역을 통해서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 수신지였던 나가사키 항은 서구 열강의 새로운 무대로 발돋음 하였다. 1850 년대의 개항기와 1860 년대 개화기를 거쳐 새로운 동아시아의 신인으로 자리잡게 된 근대일본은 그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매력적인 서구 열강의 모티브 모델이 필요했을 것이며, 서양의 여러 후보 모델들은 자신들의 매력을 아시아의 발산하기에 여력을 다하였다.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19 세기 국제 무대에서의 서방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국제질서의 각축을 다투고 있었으며 점점 그 여파는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서구의 여러 국가들중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질서 차원에서 대서양과 태평양, 유럽과 아시아 전선의 곳곳에서 치열한 세력싸움을 버렸다. ‘거대 게임’(great game)의 영국과 러시아는 일본과의 밀고 당기는 연애 구도를 만들어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의 협력자로서 양자 택일의 삼각관계 형성구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격변하고 있는 당시 근대 상황에서 일본은 혼돈의 ‘근대 무대’ 속에서 파트너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이에 유럽 대륙에 새롭게 등장했던 두 강국인 영국과 러시아는 끊임 없는 구애를 통해 일본이라는 새로운 동쪽 무대를 갈구하였다. 당시 일본의 국내 상황도 어지러운 정세에 놓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도 시대 말기에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부간 대립이 심화되는 원인 중 하나는 강력한 전함을 앞세워 개항을 강요하는 서구 열강들의 구애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저항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 영국의 글로버와 러시아의 푸탸틴을 통한 영국·일본과 러시아·일본의 만남과 과정 속에서 1902 년 영일동맹과 1904 년 러일전쟁으로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로 인해 아시아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그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고 영국의 모델을 선택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며 아시아의 제국으로서 자리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이 영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배격했던 이유를 찾아보고 그 중심에 니콜라이 황태자(Nikolai Alexandrovich Romanov)를 시해하려 했던 ‘오쓰 사건’의 의의와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 세기 영러일의 삼각관계
1. 글로버로 시작한 영국과 일본
먼저 영국과 일본의 상징적인 만남의 주인공으로는 글로버 가든의 주인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에서 시작된다. 그는 무역상으로서 나카사키에 상륙하여 데지마를 거점으로 무기거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글로버의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본의 사무라이들과의 깊은 유대관계는 일본으로 하여금 대외적 개화와 대내적 개혁에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당시 나가사키에서 가장 큰 외자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기반을 활용하여 막부 세력을 전복하는데 필요한 군함, 소총 등을 제공해줄 수 있었던 글로버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협력 대상으로 다
가 왔 을 것 이 다 .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조슈 5 걸파견은 그들로 하여금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는 당시 영일관계에 큰 사건으로 자리잡게 된다.
2. 푸탸틴으로 시작한 러시아와 일본
한편 19 세기 중반 러시아는 연해주 지방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은 사절 페리를 일본에 보내 개국을 요구하고 나섰다. 러시아도 뒤질 수는 없었다. 사절 예브피미 바실리예비치 푸탸틴(Yevfimy Vasilyevich Putyatin)이 파견되었다. 푸탸틴에 교섭 끝에 1855 년 마침내 러일 통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일본과 국교를 맺었고, 이때 일본과의 국경획정 교섭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할 수 있었다.(와다하루키 2009, 108) 1873 년에 정교의 포교활동을 하던 니콜라이 주교(Ivan Dmitrovich Kasatkin) 가 도쿄에서 러시아어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러시아와 비교해 보면, 표토르 대제의 명으로 이르쿠츠크에 일본어 학교가 설치된 것은 18 세기 일이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에 대한 관심사가 상당히 높았으며, 같은 시기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동양 각국의 언어 및 동양 사정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동양학원이 개설되었다.(와다하루키 2009, 149) 이처럼 러시아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과 동방정책에 대한 구상을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1889 년 3 월 러시아의 재무성 철도 사업국장에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가 임명된 후로 극동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도입하게 된다. 그는 시베리가 극동에 철도를 건설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러시아가 프랑스로부터 자금 도입에 성공하여 시베리아 철도공사에 착공하는 것을 중점으로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선로를 건설하게 된다. 이는 즉, 세계 제일의 육군군인 러시아가 영국의 제해권에 저지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일본까지 직접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었다.
<그림 1> The arrival of Czarevitch Nicholas at Shimbashi Station
Courtesy the Kanagawa Museum (출처: Donald Keene. 2002)
1891 년 3 월 31 일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에 참석 전 세계 탐방의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을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러일관계의 큰 여파를 가져오게 된다. 일개 일본 순사 한명이 대러제국의 황태자인 니콜라이를 시해하려 했던 ‘오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급박하게 변동되어 간다.
3. 일본의 대외 정책과 러시아 견제
러시아는 1700 년대 초부터 지시마 열도를 따라 남하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18 세기 중엽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 일본어 학교를 세워 남하 정책을 본격화 한다. 일본은 이때 처음 ‘북방문제’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1780 년대에 하야시 시헤이(Hayashi Shihe)가 러시아의 위협을 거론하며 서양에 대응하기 위해 해국 일본은 국방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이삼성 2009, 202)
일본은 1890 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군주의로 나아가는 기틀을 세웠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태평양 진출을 경계하면서 무력기반과 정치제도적인 체제 정비를 이룩한다. 1889 년 2 월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은 그것을 기초한 이토 히로부미의 말대로 “국권을 강고히 하고 그것을 가장 중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이삼성 2009, 406) 이처럼 일본은 내부 군비확장을 전격화 하였고 육군 편제를 독일식으로 바꾸었다.
당시 유력언론으로 '일본' 이라는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이 신
문 의 주 필 동방정책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1892 년 일본의회는 천황의 칙어를 받들어 해군 확장 7 개년 계획을 승인했다. 일본 정계와 언론 및 학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대외강경파가 형성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이삼성 2009, 406) 1890 년까지 일본의 국가발전전략의 핵심은 개혁이었다. 반면에 1890 년대 초를 기점으로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대외 팽창이 일본의 국가전략으로 되었다고 많은 일본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1894 년 여름은 일본이 과거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마침내 해소함으로써 국제질서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또한 당시 영국과의 조약을 개정한 것이 그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러시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경계를 가지게 된 계기는 시베리아 철도의 착공에서부터이다. 이 구상은 이미 일본에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 이야기가 화자가 된 것은 1887 년 런던 ‘타임스’ 가 그 해 6 월 24 일자 지면에 이때까지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시베리아철도 구상에 관해서 보도했다. 이 기사를 ‘조야신문’이 재빨리 번역해 8 월 2 일자에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이라는 목으로 개제했다. 그리고 8 월 12 일과 13 일에는 ‘시베리아 철도와 동아시아 삼국과의 관계’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와다하루키 2009, 155) 논설의 필자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착공은 군사적으로 일본 청나라 조선에 영향을 강하게 미칠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것이므로 러시아를 대항할 수 있는 방안을 간구해야 한다 라고 단언한다.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이 구체화하기 휠씬 전부터 경계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서 구가 가쓰난이 상정했던 변화의 요인 중 한가지로는 1891 년에 러시아 프랑스로부터 자금도입에 성공하여 시베리아 철도공사에 착공한 것이 거론될 수 있다. 즉,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하나의 선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교통수단의 변화는 지구라는 공간을 보는 시점에서 커다란 전환을 불러 일으킨다. 동시에 그것은 일본이라는 섬나라를 국제정치 지도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계되어 당시 일본 내에서 동방협회 등의 조사단체나 정치결사의 결성을 재촉했다.
또한 교통수단의 변화는 경제와 사람의 흐름을 바꾸지만 그로 인해 병사나 무기를 보낼 수 있기도 하며, 군사 균형에도 변동을 불러일으킨다. 즉,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에 따라 세계 제일의 육군군인 러시아가 영국의 제해권에 저지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일본으로 직접 군사작전을 전개해 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교통수단의 출현은 단지 일본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정치에도 커다란 변동과 충격을 가져오게 된다. 더군다나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들에게 까지 실질적인 위협이 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구가 가쓰난에 따르면 1891 년에 일어난 이들 일련의 사태는 “모두 국민의 대외심을 고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신이치 야마무로 2005, 55)
이러한 영향으로 반러 감정은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서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쓰 사건’이 있기 1 년전 1890 년 천황의 마차가 의회 방문 후 러시아 공사관을 지나가게 된다. 당시 천황은 정자 곁을 지나다가 공사 부인을 알아보고는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춘다. 그런데 천황이 지나가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러시아 부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고 공사의 한인이 같은 식으로 응수하여 양쪽 진영에 돌팔매가 빗발치듯 날아 들어왔다. 동시에 군중들이 공사관의 철문을 밀고 들어오려 하였으나, 경찰대의 진압으로 질서를 회복 할 수 있었다.
황제 알렉산더 3 세(Alexander III)는 니콜라이의 방일을 앞두고 이 사건을 듣고선 “이와 같은 반외국인적이고 악의적인 행위는 황태자의 일본 방문과 관련해서 짐을 조금 불안하게 한다”라고 기록했다.(와다 하루키 2009, 158) 그리고 그의 걱정대로 자신의 뒤를 이을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화의 시발점 오쓰 사건'(大津事件)
1. 오쓰 사건의 전개 과정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그림 2><니콜라이 황태자 1891 년 인력거 모습>
<Nagasaki Museum of History and Culture>
(출처: А. Н. Мещеряков. 2018)
<그림 3> <오쓰사건>
(출처: Dmitry Mityurin. 2015)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 극동지구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함대를 인솔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도중에 일본을 방문했다. 니콜라이 황태자 일행은 나가사키와 가고시마를 방문한 후, 고베에 상륙해 교토로 향할 계획이었다.
1891 년 5 월 11 일 오후, 교토에서 비와호 당일치기 관광 후 돌아가는 길에 니콜라이 황태자 및 함께 방일하고 있었던 그리스 왕국의 왕자 요르요스(George I of Greece), 다케히토 친왕(Prince Arisugawa Takehito)의 순번으로 인력거를 타고 오쓰 시가를 통과하는 도중에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던 시가현 경찰서 순사 쓰다 산조가 돌연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브르(saber)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니콜라이는 인력거에서 뛰어 내려 옆 골목길로 도망쳤지만,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면서 부상을 입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쓰다는 요르요스 왕자의 대나무 지팡이에 등을 맞고, 니콜라이 황태자를 수행하던 인력차부에게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또한 요르요스 왕자를 수행하던 인력차부는 쓰다가 떨어뜨린 사브르를 휘둘러 쓰다의 목에 상처를 입혔으며, 결국 쓰다 산조는 경비 중이던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두부에 7cm 와 9cm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에게 막혀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상황을 확인한 후에는 이미 쓰다가 잡힌 후였다.
이후 유학과 해외군사시찰 등의 경험을 통해 국제 관계에 정통하고 있던 다케히토 친왕은 즉시 이 사건이 자신의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판단, 수행원에게 명해 전말을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즉시 정리해 도쿄의 메이지 천황에게 전보로 보고하게 하고, 동시에 러시아 제국 측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 천황이 교토로 긴급 행차할 것을 요청했다. 전문을 받은 메이지 천황은 즉시 확인하고, 다케히토 친왕에게 니콜라이 황태자의 신변 경비를 명하는 동시에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Kitashirakawa Yoshihisa)을 문안사로 교토에 파견했다.
사건 다음날인 1891 년 5 월 12 일 아침, 메이지 천황은 신바시 역에서 기차에 올라 같은 날 밤에 교토에 도착했다. 메이지 천황은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태자를 병문안 할 예정이었지만, 나콜라이 황태자측의 요청에 의해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의 형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Arisugawa Taruhito)도 메이지 천황의 뒤를 따라 교토에 도착했다. 5 월 13 일에 메이지 천황은 니콜라이 황태자의 거처였던 교토 호텔로 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병문안하고, 다케히토 친왕과 요시히사 친왕, 타루히토 친왕을 데리고 가 고베까지 배웅했다.
나중에 메이지 천황이 스스로 고베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을 방문할 때, 신하들이 ‘납치될 수 있다’ 라고 반대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요양 중이던 니콜라이 황태자를 다시 병문안 했다. (서현섭 2004, 142)
당시 소국이라 여겼던 일본이 대국인 러시아의 황태자를 부상하게 했다고 하여 ‘러시아가 보복하기 위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학교들은 근신의 뜻을 표하기 위해 휴교를 하고, 신사나 사원,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보내진 문안 전보는 1 만통을 넘어갔고, 야마가타현 (山形縣) 가네야마정 (金山町)에서는 ‘쓰다’(津田)라는 성과 ‘산조’(三藏)라는 이름의 명명을 금지하는 조례를 결의하기도 했다. 또, 1891 년 5 월 20 일에는 하타케야마 유우코(Yuko Hatakeyama)라는 아녀자가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죽음으로 사죄한다”라면서 교토 부청 앞에서 면도기로 자살했다.(서현섭 2004, 142) 외국어에 능통한 게이오 대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사과편지를 작성하기도 하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안함으로써 일본과 러시아간의 외교적인 마찰을 중재하고자 하였다.
2. 오쓰사건 이후
러시아 알렉산더 3 세는 일본 천황을 비롯한 전 국민의 성의 있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오히려 황태자의 부상으로 일본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하면서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일본인들의 과도한 사과 러시아를 감동시킨 것이다. 러시아는 대국적인 아량심을 베풀며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러시아의 관대함으로 한숨을 놓게 된 일본은 쓰다 산조를 형법 제 116 조를 적용하여 처형하려 하였지만, 고지마(Kojima Iken) 대심원장은 외국의 황태자 위해범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며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일반적인 살인 미수범으로 다루어 무기형에 처하도록 한다. 이후 쓰다 산조는 4 개월뒤에 폐렴으로 옥사한다.
러시아 알렉산더 3 세의 관대한 태도에 한숨 돌린 일본의 여론은 러시아와의 사단을 피했다는 자만감에서 인지 범인 쓰다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는 주장이 드높아졌다.
쓰다는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한 우국지사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줄수록 양양이라더니 각지에서 쓰다가 단순한 살인 미수범이 아니라 열사라는 목소리가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일본의 국민성의 일단을 그야말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이었다.
고지마 대심원장은 살인 미수범으로 다루어 무기형에 처하도록 했다. 5 월 29 일 이와 같은 언도에 대해 재판소 방청석을 꽉 메운 사람들이 '제국만세' , '나라만세'를 절규하자 재판소 밖에 군집해 있던 무리들도 덩달아 '일본만세'를 외쳐 댔다. 고지마 대심원장은 개선장군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낸 '법의 귀신'으로 오늘날까지 칭송이 대단하다. (서현섭 2004, 144)
오쓰 사건과 러일전쟁
1. 오쓰 사건의 동기
당시의 ‘오쓰사건’을 가지고 여러가지의 추측과 의견이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할 만한 자료도 많이 없을뿐더러 니콜라이 일기의 회상 또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쓰사건’이 러일전쟁의 최초의 시발점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먼저 쓰다 산조의 범행동기에 대해서 그가 진술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범임 쓰다는 재판 과정에서 니콜라이가 일본땅에 도착하면 우선 천황을 예방해야 하는데도 무례하게 유람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횡설수설했다. 또한 그는 니콜라이가 관광을 핑계로 일본 정탐에 나서고 있어서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강변하였다. (서현섭 2004, 145)
<그림3> <사이고 타카모리의 풍설>
(출처: Shin, Peter Yong-Shik. 1989)
학자들에 의해 추측되는 쓰다의 범행 동기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번째로는 니콜라이 방일이 일본 침공을 위한 시찰이라는 풍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하여 세이난 전쟁에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지 않고 니콜라이와 함께 돌아온다는 풍설도 만연하였다. 세이난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쓰다는 이러한 소문을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면 당시 일본이 러시아의 극동 진출에 예민했는지를 알 수 있다. 두번째로는 진술 그대로인 광적 충성심에서 비롯된 범행 동기이다. 니콜라이가 천황을 만나러 도쿄가 아닌 나고시마를 가서 관광을 즐긴 것은 천황에 대한 모욕이었고 관광 중 사원 경내에 세워진 전쟁 기념비에 대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소수의 견해이긴 하지만 러시아를 견제했던 일본 정부 내부에서 범행을 계획적으로 이행 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 한 것이 단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일본 내부적으로 정치적 변동의 혼란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강한 반감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국제관계의 갈등을 구체화 하여 개인의 삶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겉으로는 러시아의 관대한 태도로 잘 수습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국제 무대를 바라보는 일본과 러시아의 다른 심상 속에 결국 공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사건으로 생각된다.
2. 전지적 러시아 시점
‘오쓰사건’을 두고 몇몇 역사가들과 대중적인 전기 작가들은 일본에 대한 니콜라이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고 일부는 ‘러일전쟁의 시발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10 년 동안 니콜라이의 재무장관이자 수석 보좌간인 비테도 비슷한 의견을 냈는데, 그는 회고록에서 마지막 황제가 ‘극동 모험’에 개입 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일본에 대한 자연스러운 적대감과 그의 삶에 대한 시해가 있었던 곳”으로 인식 되고 있지 않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더 분명한 것은 일본 과의 전쟁 후 러시아 외무 장관 알렉산더 이스볼스키는(Alexander Isvolsky) “그의 생명에 대한 시도는… 니콜라이 2 세 편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과 심지어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믿었고, 러일전쟁의 애필로그인 그의 극동정책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 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추론은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사건에 대해 조명한 일은 많지 않다. 분명한 것은 황세자의 눈에 눈에 띄는 흉터를 남겼고, 죽을 때까지 두통에 시달렸으며 이는 그 부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로뎀 코우너 1998)
도널드 킨(Donald Keene 2002) 또한 비테가 적은 회고록을 통해 ‘오쓰사건’은 러일 전쟁에 중요한 발걸음으로 보고 있다. 그는 “적대감과 경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니콜라이의 표현에 대하여 비테가 편견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으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당시 ‘오쓰사건’은 결과로 정부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암살 미수로 인해 니콜라이가 반일적 편견을 형성하여 13 년 후 러일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로뎀 코우너(Rotem kowner 1998)는 니콜라이의 일기 속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비난이라던가 어떠한 분개심도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느껴지지는 않는 부분을 주목한다. 니콜라이는 일본과 전쟁을 추진하지도 않았고, 복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본인에 대한 그의 진정한 태도는 오리엔탈리스트에 대한 호의와 인종적 증오가 혼합된 것이었고, 이는 점차 그들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과소 평가로 발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니콜라이의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가 방문하는 동안 본본 것 전후에 노출된 고정 관념으로 인해 일본인을 여성적이고 나약하며 열등 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연한 복수심 보다 이러한 견해가 러시아가 일본 국민성과 군사를 평가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코우너 또한 비테의 회고록을 주목한다. 세르게이 비테에 따르면 이 사건은 특히 부상의 결과로 두통이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를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에 대한 황태자의 급격히 부정적인 태도를 증명했다.(로뎀 코우너 1998) 일본에서의 용문신이 그 사건을 계속 살아나게 했다. 그리고 그의 참모 비테의 표현에 의하면 이사건 이후로 그는 일본 천황을 ‘원숭이’라 불렀다. 이런 일본을 무시하는 발언들과 자세들은 러시아가 일본을 만만하게 보기에 적절한 예시로 들 수 있다. 더군다나 그는 여행 내내 일본 게이샤와 밤새 놀음을 하며 도쿄에서는 ‘도쿄창녀’를 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도널드 킨 2002)
실제로 러일전쟁에 대한 쿠로파트킨(Aleksey Kuropatkin)의 회고록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가장 큰 요인이 일본에 대한 사전지식 부족과 과소평가를 꼽고 있다. 쿠로파트킨 회고록에서 그는 “1900 년 페이츠리 성에서 우리 군대 편에서 싸웠던 일본군에게서 관찰된 행동은 무척 내 마음에 들었으며 그들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었다... 25 년 만에 일본인들이 모든 분야에서 성장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든 분야에 걸쳐 거대한 움직임을 볼 수 있었고 근면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의 국가에 대해 대단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첫눈에 느낄 수 있었다"(쿠로파트킨 2007)
요컨대 러시아는 황제를 포함하여 전쟁을 원하지 않고 협살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결의와 준비 상황에 대한 무지로 인해 협상에서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협상을 망쳤고,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반성이었다.
3. 전지적 일본 시점
앞서 언급한 두 주장 모두 러시아의 입장에서 심상을 읽었을 경우 가능한 추측이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테의 회고록은 러시아에서 벌어진 ‘개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일념으로 완성된 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적으로 비테 본인에게도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그 책임을 최고 책임자 황제에게 넘기고자 했던 마음도 염두 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비테의 주장과는 다르게 저자가 읽은 니콜라이 본인의 일기에는 그다지 일본에 대한 적대심을 극명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의 심상을 참고하여 일본에 입장에서 해석해본 입장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신영식(Shin, Peter Yong-Shik 1989)은 ‘오쓰 사건’은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단순히 광신도 한 명이 일으킨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 당시 일본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정치적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첫번째로 외부적인 요소로서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 즉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를 재정의한 1890 년에 발표된 야마가타(Yamagata Aritomo)의 새로운 대외정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Shin, Peter Yong-Shik, 1989) 단호하게 말해서,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건을 재검토하면 ‘오쓰 사건’은 일본의 군사력에 의존한 팽창주의인 외교의 발현이 된다.
이 사건은 근대 일본사에서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유럽 강대국을 대상으로 시도된 최초의 팽창주의였다. 성공적인 결과는 특히 일본 지도자들에게 큰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로, 근대 일본사를 조명하는 3 대(오쓰사건, 삼국간섭, 러일전쟁)의 첫 번째 사건이다. 한편 이번 행사는 국내에서 천황을 비롯한 일반 민중을 성공적으로 동원한 국권숙기의 첫 번째 민족운동으로서 정부가 정한 방향에 따라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두번째로는 니콜라이에 방문 여정에 대해 일본 정부에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먼저 나가사키에 도착한 니콜라이와 그의 일행은 즉시 상륙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항구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부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이미 니콜라이의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차질이 생겼고 소문이 안 좋았다. 이후 그는 가고시마로 바로 향했는데 가고시마는 유신 운동과 메이지 정부 수립을 위한 많은 저명한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사쓰마 지도자들은 이미 니콜라이 재위 당시 실제로 정부를 장악했던 제슈번 지도자들에게 정치권력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후 훗카이도 방문은 일본 정부에도 예민한 문제였다. 영토 분쟁을 야기 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오모리에서 일주일을 더 보내기로 하는데 이는 전략적 측면에서 일본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아오모리와 하코다테 사이의 좁은 해협이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일반적으로 미래의 침략에 대한 조건 조사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이에 그는 일본정부는 당시 이미 극동의 국제정치에 관해 반러 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국과 조약개정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그 동안 국회에 대규모 군사비 충당을 요구했다.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1891 년 2 월초 황실 접수 이원회가 조직되면서 정부의 경계태도가 보이기 시작했고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가와카미 소로쿠(Kawakami Soroku)장군이 선출되었는데, 전술가로 유명했던 가와카미는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정보 수집에 극도로 관심을 가졌으며 1892 년까지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10 년이내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기 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Shin, Peter Yong-Shik 1989)
세번째로는 언론을 통해 국민들의 대외심을 고무시킨 점을 지적한다. 당시 준관영 신문인 ‘도쿄 니치니치’는 수상한 니콜라이의 방문에 대한 기사를 3 월 7 일에 실었다. “지리적 조건을 조사하고 또한 미래 침략 계획에 따른 군사 준비 상황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들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Shin, Peter Yong-Shik 1989) 이는 대중의 오해를 방지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썼다지만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이유로 신문 ‘도쿄 니치니치’는 경찰뿐만 아니라 정부가 통제하는 뉴스 매체였다. 두번째로는 이 신문 기사는 국회회의가 끝난 후 다른 신문이 아닌 ‘도쿄 니치니치’에 의해 기제되었다. 셋째 기사가 상대적으로 큰주제로 제시되어 있었고 “Suspicious Eyes” 이 제목이었다.(Shin, Peter Yong-Shik 1989) 넷째로는 니콜라이의 여정에 있어 이미 일본 정부는 의심을 하고 있었던 정황이 있다. 그리고 도쿄니치니치의 이 기사는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기사가 나온 직후 대중에게 엄청난 여향을 미쳤고 니콜라이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지방과 수도권 신문에서 모두 발행 되었으며 니콜라이가 일본에 도착할때까지 계속해서 발행되었고 이에 대해 국민 노토모(The Nation's Friends) 는 니콜라이의 일본 방문이 일본 국민의 게으른 눈을 깨우는데 일조했다는 냉소적인 논평을 4 월 4 일 114 호에 기재했다.(Shin, Peter Yong-Shik 1989) 더하여 당시 오쓰현에 경찰청장과 평소에 니콜라이의 방한에 불만을 품었던 순사 산조의 배치와 쓰다 산조의 재판을 진행했던 고지마 재판장에 대한 의심 또한 증거로 채택한다.
그는 나아가 쓰다 산조에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점을 가지는데 ‘오쓰사건’에 대하여 당시 일본의 정치가와 지식인 해외활동가 중 그 누구도 ‘오쓰사건’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쓰다 산조에 대한 기록은 포르투갈 영사 웬체슬라우 드 모라에스(wenceslao de moraes) 만이 츠다에 대해 회고하면서 불행한 애국자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또한 5 월 20 일 하타케야마 유코는 사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에게는 추도식이나 회합이 있었고 전기도 쓰여졌다. 그러나 쓰다 산조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기에 쓰다 산조가 폐렴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추측에 의견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에 의한 확실한 문서로서의 단서가 없는 것이 단점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일본 정부와 당시 언론은 국민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두려움과 경계심을 고무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여 동아시아내 패권을 잡으려 했던 러시아의 속내 또한 너무나도 극명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패권 다툼에 불을 지핀 것 또한 확연하다. 이러한 국내적 심상과 국제적 물상이 결합되어 드러난 사건이 ‘오쓰사건’이라 생각된다. 이는 서방제국과 아시아제국의 첫 격돌이 될 수 있었던 트리거 포인트이자 근대에 들어서 아시아제국과 서방제국의 갈등의 세계질서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발현된 첫 사건이다.
맺음말
오쓰사건은 당시 국제관계속 일촉측발에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러시아로서는 일본을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곧 러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던 첫번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에게는 극한의 전쟁에 대한 공포와 제국으로서의 발돋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를 두고 러일전쟁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시발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본에게는 서방을 군사적으로 경계하며 동아시아의 유일 제국으로서의 불가피 하다면 서방과의 전쟁을 서슴지 않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해석된다.
니콜라이는 1891 년과 1892 년을 자신의 암흑기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니콜라이 1923) ‘오쓰 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부들의 죽음과 무엇보다 1892 년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인생의 내리막길의 시작점이었던 ‘오쓰 사건’은 죽을 때까지 상처부위에 두통을 야기하였으며, 일본에서 하게 되었던 용문신은 계속해서 그 아픈 상처를 상기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은연중에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심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비테의 회고록에도 쓰여 있듯이 니콜라이는 일본 천황을 ‘원숭이’로 묘사한다. 이는 일본 여행에서 보여줬던 긍정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아직 일본을 제국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라는 반증이며, 특히 ‘오쓰 사건’이후에 일본인들에 사과의 태도는 당사자들에게는 마땅하다고 생각될지라도 러시아 인들에게는 본인의 생각 이상의 굴욕적이며 야만적 사과로 다가왔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알렉산더 3 세의 관용과 니콜라이 황태자의 관대함은 일본인들을 자신들의 수준보다 낫게 평가 함에서 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는 곧 러일전쟁을 앞둔 러시아인들에게 상대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며 과소평가 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 됐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갓 20 년을 넘긴 일본국민과 정부의 심상에는 국제질서를 대하는 두 가지 극명한 태도가 있었다. 하나는 서방의 열강을 두려워하고 예(禮)를 지켜 전쟁을 피하려 했던 유신 이전의 보수주의적 성향과 아시아의 근대화를 가장 먼저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이룩한 근대국가로서의 자신감과 제국으로서의 열강에 오르고자 했던 팽창주의적 성향이다.
이는 1889 년 메이지헌법(‘大日本帝國憲法’)의 공포와 이듬해의 국회 개원으로 메이지 일본은 대내적으로는 건국 이래의 어지러운 정치 항쟁이 고정된 하나의 헌정 질서의 테두리 속에 틀이 잡히게 되고, 대외적으로는 ‘불평등조약’체제의 수정을 서양제국에 요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서부터 시작된다.(박영재 1994)
더하여 ‘오쓰사건’에 배후에는 일본의 극 진보의 가담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지 일개 순사 한명이 본인의 광적인 충성심에서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사건의 규모가 전쟁으로 커질 수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러시아라는 나라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을 것이다. 실제로 니콜라이와 함께 일본에 방
문 했 던 에 스 퍼 우 크 톰 스
) 러시아 외교관은 범인을 움직인 동기에 대해 "오쓰 의 이상한 결론적으로 ‘오쓰사건’은 당시 심각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잔잔하게 마무리 되었으며, 더군다나 제국의 황태자를 시해하려 했던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알려진 바가 많이 없었다. 일본의 과한 대처와 그로 인해 감명받은 러시아의 관대함이 사건을 무마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 사건은 아시아와 서방의 첫 격돌을 앞당길 수 도 있는 사건이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청나라 구도의 팽창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저자는 이 사건을 일본에게는 제국 열강에 반열에 오르기 위한 첫 시도이자 서구 제국들에 대한 경고에 의의를 두고 있으며, 동서간의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1904 년 러일전쟁이라는 동서양 제국의 첫 격돌로 이어졌으며, 러시아의 패배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영일 관계는 글로버라는 청년으로부터 시작하여 1901 년 영일동맹이라는 공생의 관계로 이어졌다. 일본 답사에서 보았던 글로버 가든은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고 광활하였다. 타지의 땅에 영국의 한 청년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그 터를 보며 승자의 역사는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실패한 역사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구나를 느꼈다. 그렇게 러시아와 일본의 공생의 노력들이 ‘오쓰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 러일전쟁으로 파국에 달아 현재까지도 영토분쟁을 2. 러일 관계 불화의 시작 오쓰 사건(大津事件)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러시아와 일본간 화친조약이 맺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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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future Emperor Nicholas II of
eRussia in the town of Otsu, Japan, May 11, 1891 and its
eimplication for historical analysis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 –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