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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 원명원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2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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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청조에 태어나 시대의 원림들을 풍미하고, 점차 기울게 된

청조의 자취를 따라 함께 그 모습을 잃어버린 낙원이 있다.

원명원은 중국 땅 안의 이름난 강남(江南)부터 지구 반대편에서

한달음에 건너온 궁전까지 품을 줄 아는 황제의 정원이다. 특히

원명원 내 장춘원에는 유럽식 궁전을 본떠 만든 ‘서양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서양루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청의 궁정화가로서 약 50년 동안

선교를 이어간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청나라 황제 아래라는

제약된 환경 속에서도 선교와 예술 활동에 피력한 인물이었다.

그가 전하는 예수회의 복음은 일방향적 전달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청의 문화예술을 이해하며 그 맥락 속에서 청나라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김지인 2016). 그가 유럽에서 공부했던

미술 기법을 청의 정서와 문화예술과 합치어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두 문화권이 서로 만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일은

두 물감을 짜서 섞는 것과 같이 간단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학에서는 두 문화가 만나서 일으키는 작용을 ‘문화

접변’이라 정의한다. 문화 접변의 결과에는 문화 융합, 문화

병존, 문화 동화 등이 있는데, 이 결과들은 문화 접변의 과정의

영향을 받는다. 문화가 만나는 과정이 자발적인지 혹은

비자발적인지, 두 문화가 일방적인 문화 접변을 경험했는지

혹은 상호적인 문화 접변을 경험했는지, 문화 전파를 통해

들어온 새 문화가 기존 토착 문화와 어떤 관계성을 지니는지

등 다양한 요소가 과정에 자리잡는다. 문화 융합, 문화 병존은

고유의 문화 정체성이 유지되는 반면, 문화 동화는 한쪽의

문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앞의 두 결과와

구별된다(두산백과).

건륭제가 서양루 축조 당시 서양의 건축 기술보다는 건축

예술, 건축 미학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서양루의 탄생을 문화 접변의 맥락 속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회에 안고 들어온 서양의 건축 예술이 중국의 토착

건축 예술과 맞닥뜨렸다. 제2차 아편전쟁의 여파로 원명원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1차자료와 2차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는 원명원의 본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서양루는 기본 골격은 서구식 건축에 기초하면서도 일부 요소는

중국의 전통 재료와 기법을 차용하여 독특한 조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본 글의 뒷부분에서 서양루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나, 이렇게 독특한 조화의 형식은 당시 서양루

건축을 도맡았던 예수회의 선교 방식과 건륭제의 문화 수집

방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위에서 논하였던 문화 접변의 맥락에서

우리는 서양루의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그것도 각자 훌륭히

번성한 두 문화가 만났을 때, 격렬한 저항 없이 두 문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한 사례는 바로 한 세기 전, 그것도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17세기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 중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양의 과학과 기술, 예술과 문화를

전파하던 시절에, 서양 역법이 중국 사회에 – 특히 중국의

천하질서에 – 큰 파장을 일으키자 양광선(楊光先)은

『부득이(不得已)』(1665)라는 제목의 상소를 황제에게 올려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한다(안경덕 외 2013, 16). 이후 반기독교

논쟁에 불씨가 붙어 이를 선교사, 예수회 신부인 천문학자의

반론이 이어졌고, 결국 서양 역법이 정확하다는 것에 밝혀져

양광선은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에서 파직되었다. 이 논쟁 과정은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종식되었으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실 양광선이 처음 쏘아 올린 ‘부득이’라는 제목에

놓여 있다. 양광선은 그의 글 맨 앞 머리말에서 책 제목이

‘부득이’라 쓰여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세상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파에

휩쓸려 온 백성을 사교(邪敎)의 후예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또한 나라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임금 · 어버이 · 스승을

없애고 있으니, 이 (바로잡는) 일은 정말 그만둘 수 없다.

(중략) 이 지경인데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을

그만둔다면 세상에 그만두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나 광선이 부득이하여 나선 까닭이다. 자여(子與)가 한

말과 비교해볼 때, 마음은 더욱 아프고 상황은 더욱 급박하니

이해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을 것이며, 호랑이와 싸우고 강을

건너는 것을 어찌 헛되다 하겠는가! 이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을 ‘부득이不得已’라고 하였다(양광선 1665; 안경덕 외 번역,

40-41).

양광선도 그의 상소가 이해를 따져 쓴 것이 아닌, 당장

위협받고 있는 중국 안의 고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쓴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분명히 기존 중국 질서에의 도전처럼 느껴진

예수회의 물결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는 광선의 일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한 중국 사회 내에서 겪은

멀미를 하루 빨리 잠재우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고, 그는

‘부득이’하게 붓을 든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 충돌은 문화 융합, 문화 병존보다 훨씬

단순한 일차작용이다. 문화 융합 또는 문화 병존은 서로의

문화에 대해 파악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할 때 이룩할 수 있다.

물론 두 문화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 양상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인공적인 토의의 장 없이도 자연스레 두 문화가

합치어질 수 있긴 하다. 다만, 문화 충돌 또는 문화 동화가

야기하는 문화 제국주의의 폐해는 상대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저지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천하의 청을 평정하는 황제로서, 건륭제는 천하밖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황실 안에 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안에서 중국 고유의 건축 미학을 잊지 않으며 서양루를

완성하는 카스틸리오네의 역량은 문화 충돌의 위험을 잊게 한다.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이 위험을 방지할 수 있었을까? ‘선교’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청 황실의 문을 두드린 카스틸리오네는

어떻게 그의 목적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건륭제의 마음을

열었을까? 기존의 문화 질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선교사들을

적극 등용하여 황실 정원에 작은 유럽을 세운 건륭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서양루의 모습에 가려진 그들의 저의를

복원하는 일은 서양루를 복원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미지의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하늘, 미지의 땅, 미지의 사람이 만나 문화 융합을 이룬 초기의

사건은 21세기 세계정치의 판 위 질서 충돌에게 문화적, 예술적,

선교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원명원, 장춘원, 서양루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앞서,

먼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원명원, 그 안의 장춘원, 그

속의 서양루의 미학에 대해 천천히 쌓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은 많이 소실되어 생생하게 그릴 수 없지만, 여러

자료의 묘사와 그림을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원림의 물상을

떠올리는 것이 이번 목차의 목표이다.

본 글에서 칭하는 ‘원명원’은 가장 처음에 지어진 원명원,

장춘원, 기춘원의 세 곳을 모두 합치어 부르고 있다. 가장

처음에 지어진 원명원은 위 ‘원명원’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명원

본원’으로 부르겠다.

원명원 안의 장춘원

원명원은 강희제 때 처음 지어져, 그의 아들 옹정제 때를 지나

건륭제 때 전폭적이고 다채로운 확장을 마치게 된 청나라

최고의 황실 정원이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이 아름다운

원림에서 초기에는 여름 더위를 피하는 피서산장으로

방문하였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들은 일년의 대부분을

원명원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청나라는 전례 없는

번영과 평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원명원은 그 무대가 되는

화려한 황실의 거처로 우리 기억에 남아있다(Li 2-3).

사진

그림 1 (출처: China Heritage Quaterly)

원명원은 ‘둥글 원(圓)’, ‘밝을 명(明)’, ‘동산 원(園)’으로

이루어진 이름으로, ‘원만하게 비추는 원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원명(圓明)’의 개념은 ‘완벽하게 아름다우면 진정으로 선한

경지’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싯다르타 태자를 낳아 기쁜

첫 번째 부인이 태자에게 “모든 지혜를 두루 밝힐(圓明一切智)”

분이라고 말했다 전해진다(왕롱주 2015, 42-43). 강희제와 옹정제가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불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좋은

이름이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원림이 전부

원명원의 면적에 해당한다. 그림 1에 가로 한 줄, 세로 한 줄을

그어 4등분 한다면, 가장 먼저 오른쪽 하단 부분이 기춘원에

해당한다. 그 다음 오른쪽 상단을 약간 차지하게 되는 부분이

장춘원, 나머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곳이 원명원

본원이다.

1749년, 건륭제는 원명원의 건물, 경치를 확장하기 위해

‘장춘원(長春圓)’이라 이름 붙인 원림을 동쪽에 추가했다(Li 13).

건륭제는 중국 각지를 여행하며, 마음에 드는 원림을 발견하면

화가에게 명하여 원림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나서 그

원림의 그림을 그대로 장춘원에 재현했다(이은상 2021, 252-253).

마치 작은 보물상자에 소중한 보물을 모아두듯, 건륭제는 그가

만나는 아름다운 원림들을 장춘원에 그대로 복제하곤 했다.

이는 강남(江南)의 이름난 원림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창 유럽의 분수에 매료되었던 건륭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유럽식 궁전까지 짓게 한다.

장춘원 속의 서양루

서양루는 장춘원의 북서쪽에서 북단 전체를 꽉 채우며 자리잡고

있다. 이은상(2021)에 의하면, 정확히 “건륭제는 장춘원 북쪽

모퉁이에 있는 길이 320m, 너비 85m의 좁고 길쪽한 땅에

유럽식 궁전인 서양루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 안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의 베르사유’와도 같은 유럽식 궁전부터

유럽풍 설계의 미로 건축물과, 건륭제가 좋아했던 유럽식

분수지도 지어졌다.

‘서양루(西洋樓)’의 ‘누(樓)’는 중국 원림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 양식의 일종이다. 구릉과 호숫가에 지어지며

주로 개방형 창호를 택함으로써 자연 풍경을 최대로 만끽할 수

있는 누는 원명원 건축에 자주 쓰인 건축 양식이다(왕롱주 2015,

66). 탁 트인 서양루에서 즐기는 중국의 자연 풍경은 건륭제의

마음을 제법 사로잡았을 것이다.

건륭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이탈리아의 바로크풍

구조 건물과 분수지 등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선교사들이 참여하였고, 카스틸리오네는 그 중에서

이 작업을 주요하게 도맡았다. 건륭제는 카스틸리오네에게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궁전과 분수 그림을 주문하였고, 그

그림은 원명원 안에 새로운 스타일의 정원, 즉 서양루를

축조하기 위함이었다(Barme 1996, 122-123). 건륭 12년경에 시작된

서양루 축조는 건륭 48년경에 마무리되었다.

서양루는 단순히 유럽풍의 건축물을 그대로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해안당은 분수를 위한 유압

펌프를 가지고 있는 서양루의 가장 큰 구역이 있다. 이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분수에는 놀라운 요소가 숨겨져 있다. 바로 사람의 몸을 하고

동물의 머리를 가진 열두개의 조각상들이다. 둥근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상 속의 조각상들은 동양의 시간을

관장하는 십이지신의 설화에서 기원한 것이다(Siu 75). 그림 2를

참조하면 정 가운데의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수묘한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사진

그림 2 (출처: Yi Lintai)

이외에도 담홍색 벽돌 담장, 빛깔 고운 유리, 중국풍

장식품과 휘장, 태호석과 죽정, 중국식 황색, 남색, 혹은 녹색

기와 등 주요한 건축 요소들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견지하고

있었다(왕롱주 2015, 129-130). 또한, 실제로 서양루를 축조할

당시에는 예수회의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예술가들도

함께 협업하였는데, 그렇기에 원명원은 중국의 예술가들과

서구의 예술가들 사이의 공동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Siu

1988, 77).

건륭제와 원명원

건륭제의 청과 세계 인식

사진

그림 3 (출처: Royal Academy Arts)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 그리고 그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찬란했던 청을 이끌었던 마지막 황제로 알려져 있다. 건륭제

이후의 청은 서구의 세력에 의해 급속도로 멸망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건륭제 시기 확장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원명원은 청의

흥망성쇠와 그 시기를 함께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건륭제의 무대이다.

‘천하사상’, ‘천자’ 개념의 위엄에 압도되어 종종 사람들은

청 황조 역시 그들이 아는 모든 지역의 그들이 손에 넣어

다스려야 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건륭제는 번성한 청을

이끌었고 그의 통치권이 매우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의 경계선은 조금 더 명확했다.

건륭제는 그가 알고 있는 중국 밖 세상에 대하여 그 자신이

지배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

인도, 러시아, 유럽 등 다른 국가들을 중국과 엄연히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 아래 모든 나라가 제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칭기즈칸, 율리우스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다. 건륭제의 시기는 전 세계 국경이 정해지고

있던 시기이며, 건륭제는 “광대한 사해구주에서 중국은 10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 부친의 말을 기억할 만큼 그의 국경

인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Elliott 2010, 277-288).

이러한 건륭제의 국경 인식을 고려하였을 때, 건륭제가

보여주는 서양루 축조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는 유럽을 중국

세계에 편입하고자 장춘원에 복제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왜 그는 중국 국경 밖의 세계, “외국”의

건축물을 황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거처인 원명원에 복제했을까?

오늘날의 21세기처럼 세계화가 완연하게 진행되지 않은 17-

18세기의 무게를 생각했을 때, 단순히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청 황제가 바다 건너 먼 유럽의 문화를 숙고 없이 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건륭제가 중국 영토 안의 원림을 복제하는

것에 나아가 서양의 정원까지 탐낸 이유는 다음 차례에서 바로

이어지는 건륭제의 ‘문화 수집가’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 수집가, 건륭제

건륭제는 단순히 정치에만 몰두하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청

황조 후기에 가장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거나 후원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Sommer, 136). 그는 굉장히 선명하고

화려한 수집품을 가득 수집하였는데, ‘건륭풍’이라는 말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디자인의 물건을 가리킬 정도이니 그의

수집 스타일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수집

철학에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수집하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확실히 수집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대의 유물들은

오늘날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오늘날 만들어진

것들이 고대의 골동품보다 더욱 화려하다. 그러나 화려한

장식보다 소박함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누가 비판할 수

있겠는가?”(건륭제)

건륭제가 남긴 위와 같은 말을 통해 우리는 수집 자체에

대한 건륭제의 진심을 알 수 있다. 그가 이토록 온세상의 보물,

작품, 거기에서 나아가 건축물까지 남김없이 모은 이유는 그의

미적 감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화려한 미학은 건륭제의

청 황제로서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즉 건륭제가

그의 수집품을 단순히 ‘아름다워서’ 열심히 모은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건륭제가 그토록 세계의 보물에 눈독을 들인

이유를 그의 지위, 출신,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치어 만들어진

그의 독특한 아비투스(habitus)의 측면에서 차례대로 분석해보겠다.

첫째, 그는 ‘황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강희제,

옹정제도 그러하였고, 사실상 중국의 역사에 기록된 ‘황제’라면

모두 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건륭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황제의 지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택하는 ‘문무(文武)의 겸비’를 중요시 여겼다. 강희제

역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을 기름과 동시에 말 타기와 사냥을

좋아하는 황제였고, 옹정제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황실 업무에

몰두하는 행정적인 지도자였다(Li 5). 건륭제는 정치학,

군사학뿐만 아니라 시, 예술,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지식에

통달하여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력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둘째, 건륭제는 ‘만주족’ 출신의 황제였다. 만주족 출신이

세운 청 나라는 이전 중국의 왕조들과는 그 근본을 달리했다.

여러 민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이기에, 다양한 민족에 대한

이해와 문화에 대한 섭렵이 필요했다. 건륭제는 그를 둘러싼

여러 소수 민족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그 스스로 적극

체험하고 수용하는 황제였다. 장춘원 내에 이름난 원림을

복제하는 것 역시 소수 민족 문화 수용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만주족 출신의 황제로서 그가 지니게 된

독특한 아비투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건륭제는

다민족국가를 안고 있는 강력한 황제였다. 세계의 다양하고

진귀한 물품에 관심이 많았고 또 그것을 손에 넣을 능력을

갖춘 건륭제는 국내 예술에 제한된 채로 아비투스를 형성하게

된 일반 평민과는 확연히 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건륭제는 동양에서 볼 수 없었던 서양식 회화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식 회화는 동양식 회화와 다르게

피사체의 진실성을 강조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적인

색채, 원근법, 음영 등 동양의 예술에서 선물받지 못한

진실성의 매력을 건륭제는 일찍이 알게 되었다(Elliott 2010, 255).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이외에도 유럽의 궁전과 분수를 알게 되어 그것들에 매료되거나,

유럽의 시계 기술에 푹 빠져 원명원에 시계공들을 들일 만큼,

건륭제가 자란 배경은 건륭제가 왜 서양루 축조를 바라게

되었는지 짐작가게 해준다. 그의 취향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복잡하고 다각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건륭제는 서양루를 그렸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명원은 건륭제의 미적 정취를

구현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미학은 아름다움 자체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알고 아우르는 황제의 세계정치적인

면모를 내포하고 있다. 이 면모를 조금 더 깊게 분석한다면,

건륭제의 이러한 ‘문화 수집’의 경향은 역사 속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먼저, 크로슬리(Pamela Kyle Crossely)가 분석한 흥미로운

분석 도구를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유라시아에 걸친

보편제국의 군주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행위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백과사전, 원림 또는 ‘호기심의 방(curiosity cabinet)’ 등 세계를

축소화하여 그들의 손아귀에 표현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Crossely 1999; 이은상 2017, 29) . 건륭제의 원명원, 특히

장춘원의 내부가 그러했다. 이름난 원림을 복제하여 그는 그의

손아귀에 미니어처 정원을 모을 수 있었고, 서양루 역시 그러한

수집품 중 하나였다. 이 수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세계를 손

안에 넣은 군주’, ‘원한다면 언제든지 유명한 건축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군주’ 등 권력과 직결되는 군주의 강력함이다.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문화 수집’의 개념을

통해 수집가가 구축하는 자기, 문화, 진정의 배치 전략을

설명한다.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가득 모으듯이,

이러한 수집은 한 사람이 소유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라는 이야기다(Clifford 1988, 218).

이은상(2017)은 크로슬리뿐만 아니라 클리포드의 ‘문화 수집’

개념을 통해 건륭제의 장춘원을 분석한다. 이은상은

“문화상징물들을 수집하여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통치자는

복제하여 재현한 대상들이 표상하는 지역들에 대한 지배를

공포하게 된다”는 결론으로 건륭제의 문화 수집을 이해한다.

카스틸리오네와 원명원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예술선교

카스틸리오네의 청나라 궁정화가 생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카스틸리오네가 어째서 선교사로서 청나라까지 당도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수회의 선교사로서 청을

방문한 카스틸리오네의 배경은 그가 보여주는 예술 선교의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중요한 성격을 설명하며, 이 설명은 서양루 축조에 크게

기여하였던 카스틸리오네의 심상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회는 16세기에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지키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도전받은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돌려놓자는

목적을 위해 설립된 수도회 조직이었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예수회는 그 어떤 수도회 조직보다도 선교에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성지로 모일 것이 아닌 세계로 뻗어나가는

원심적인 선교를 바탕으로, 예수회는 반종교개혁과 트렌트

공의회의 종교 미학을 잘 활용하여 선교의 도구로써 활용했다.

예수회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아시아 지역까지 뻗어나갔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유럽의 종교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복음을 전하고자 아시아로

왔고, 바로크 양식이 내포하는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상징을

선교지에서 중요한 선교의 아이콘으로 사용하였다(김상근 외 2009,

206-212).

이렇게 예수회가 아시아에서 펼친 근대적 선교 방식을

‘적응주의’, ‘문화순응’, ‘토착화’ 등으로 부르는데, 이 용어들은

모두 지역 문화에 복음을 침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김혜경 197).

글의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카스틸리오네 역시 청의 토착

예술을 이해하고 공부하여 문화 예술의 맥락 속에서 청나라

사람들을 이해했다. 이러한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선교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선교 지역에 알맞게 적용하여

전하는 것, 예수회의 선교 방식이 지구 반대편의 아시아

땅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은 이와 같은 예술 선교를 청나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실천하기에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카스틸리오네의 궁정화가 생활

카스틸리오네는 청에 당도한 궁정화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우수한 화가였다. 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

강희제와 달리 건륭제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개인적으로

절친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런 황제와 가까이 친분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카스틸리오네가 유력할

정도이다(Elliott 2010, 289).

카스틸리오네는 그가 유럽에서 공부했던 서양화법과

서양식 회화 기법을 청 황제들에게 선사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기하학적 사실성에

초점을 두어, 현실적인 색채와 원근법, 음영법을 적용한

실감나는 그림은 청나라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예술이었다. 그러나, 카스틸리오네는 서양화법을 그대로 그림에

적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림에 적절하게 동양적

요소를 섞어, 어딘가 신비롭고 색다른 느낌을 주는 동서양의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조화를 카스틸리오네가 그려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 4는 카스틸리오네가 그려 낸 그림이다. 아이들과

하인들에게 둘러싸인 건륭제의 모습을 서양화법과 동양적

요소를 조화시켜 화려하게 그려 내고 있다. 건륭제와 사람들의

모습은 원근법과 사실적 채색을 활용하여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반면, 주위를 채우고 있는 자연물의 표현은

동양의 산수화법을 담아내 친숙한 느낌을 준다.

사진

그림 4 (출처: The Palace Museum)

비교적 자유롭게 원명원을 드나들며 동양 미술과 서양

미술의 조화를 탐구하는 카스틸리오네였지만, 청나라 황제

아래에서 일하는 궁정화가라는 점이 오히려 동서양 미술 조화에

제약을 두기도 하였다. 프랑스 예수회 화가이자 청나라에

선교사 역할로 오게 된 장 드니 아티레(Jean Denis Attiret)는 그가

유럽으로 쓴 편지 ‘A Particular Account of the Emperor of China’s

Gardens near Pekin’에서 궁정화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적어 두었다. 한번 궁정화가로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다시 청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Attiret 1742, 66). 이는 청나라

내부의 국가적 기밀이 바깥으로 누설될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청나라 황실 안에서 생활하였으며,

일반 남자 하인들은 출입이 불가했던 원명원에도 드나들 수

있었다(Thomas 2009).

또한, 서양화법은 황제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적용할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그릴 때, 본디 중국은 황제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카스틸리오네는 그림자를

지우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야만 했다(Musillo 2006, 173).

왜 카스틸리오네는 서양루를 그렸나?

카스틸리오네가 확실히 유능한 궁정화가였던 것은 맞지만, 그의

실력만큼 그의 화가 생활이 안락하고 쉬웠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온 궁정화가들은 공식적인 봉급을 받지 않기 때문에

중국 화가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화가 생활에의 제약이

패널티가 적었지만, 카스틸리오네 정도의 지위라면 그의

작품으로 황제를 만족시킬 줄 알아야 하는 정도의 책임은

지니고 있었다. 선교를 위하여 청나라에 온 카스틸리오네의

선교사 생활이 잘못된 그림 한 폭에 해고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Musillo 2006, 31-32). 물론 카스틸리오네는 청에서 명예롭게

선교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청나라 황제

아래에서 그리는 그림은 결코 쉬이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정화가 생활을 지속하던 그에게

건륭제는 서양루 축조라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맡겼다.

카스틸리오네는 실력 있는 화가였지만 건축 분야에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궁전화가로서 거역할 수 없는 황제의

명이기에 카스틸리오네는 수십년을 걸쳐 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희대의 정원을 축조했다.

그것도 동양과 서양의 요소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독특한 인상의

황실 정원을 말이다. 나는 가능성의 열쇠를 청 황제 아래라는

하드-파워적 영향력과 예술신학의 소프트-파워적 영향력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려 한다.

카스틸리오네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출신 궁정화가들은

제약적인 환경 아래에서도 자신의 소명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서양화법의 성격이 그러했다(김지인 2016). 이 영광을

위해 궁정화가들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예수회에서 배운 예술

지식을 잊지 않으며 청나라의 토착 미술과 적절히 조화까지

이루는 적응주의 선교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서양루

축조는 화가로서 청나라로 향한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과제였다.

그들은 건축 아마추어였으며,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이 상상하고

그린 유럽풍 궁전의 모습을 하나하나 실현하며 여러 기술자와

함께 서양루를 완성했다. 이렇게 완성된 서양루가 건륭제의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문화 수집에서 나아가 선교사들이 바라는 선교의 효과까지

이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건륭제는 오로지

유럽풍 궁전의 외형을 수집하고 싶어 했으며, 사실 그 궁전을

움직이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는 큰 방점을 두지 않았다. 이는

건륭제가 과학 기술을 등한시했다기보다, 어쩌면 17세기 중국

내 반기독교 논쟁의 기억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일수도

있다. 건륭제는 예수회 사람들이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중국인들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믿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Lettre edifiantes, 22 (Etat

de la relogion en 1783): 219f.; 김지인의 번역 참고).

완공된 서양루의 얼굴

서양루의 초상

건륭의 문화 수집가적 성향과 예수회의 문화 선교 방식 간의

적절한 궁합은 어쩌면 원명원 내 서양루 뿐만 아니라, 건륭이

관심을 보이는 문화 수집품이라면 무엇이든지 원명원 안으로

들였을 것이다. 그 문화 수집품들 중 한 가지가 유럽식 분수와

궁전이었던 것이고, 궁정화가 카스틸리오네와 천문학자 미셸

브누아, 그리고 많은 협업가들이 서양루를 완성했다.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가 각자의 연유와 사정으로 완성해

낸 서양루는 지금도 그 잔해에서 어렴풋이 볼 수 있듯, 동양과

서양의 건축적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아티레의 편지에서도 읽을 수 있었듯이, 건륭제는

카스틸리오네와 예수회 궁정화가들의 실력을 높이 샀지만

그것이 청에서 고수해온 중국의 문화 유산을 해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양루 축조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럽식 궁전과 분수를 원명원에 복제한다 하여도, 그것이 청의

황제인 자신과 원명원을 드나들 수 있는 신하들의 눈에 쏙

들도록 이리저리 손을 볼 수밖에 없었을 거란 말이다.

카스틸리오네와 설계가들이 이러한 건륭제의 성격을

몰랐을까? 건륭이 아끼던 궁정화가 카스틸리오네는 건륭의

취향도, 그리고 청의 문화 예술적 미학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카스틸리오네와 예술회의 문화 선교

방식은 일방적 문화 전달이 아닌, 토착 예술과의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건륭 아래에서 카스틸리오네와

설계가들이 동양과 서양의 건축 미학을 적절히 혼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래의 그림 5, 그림 6은 각각 서양루 내에서 동양과

서양의 요소가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그림 5는

대수법(大水法)으로, 서양루 내에서 주요한 분수 경관을 이루고

있다. 앞쪽에는 국화 모양을 한 분수가 있는데, 그 안에는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사냥개가 동양의 노루를 쫓는 모습을 하고 있는 분수대가 놓여

있다.

사진

그림 5 (출처: 원명원 웹사이트)

사진

그림 6 (출처: 원명원 웹사이트)

그림 6은 서양루에서 그나마 현대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황화진(黃花阵)이다. 황화진의 앞의 미로를 지나 중앙부에

들어서면 동양과 서양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한 정자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있다. 마치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더위를 식히는

석조 파빌리온을 닮기도 했고, 뾰족하게 팔각형의 지붕을 씌워

고즈넉한 정자만의 매력을 사수하는 동양의 미감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외에도 앞의 그림 2에서 보여준 해안당의 십이간지

동상 등 서양루 곳곳에서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당시 그려진 서양루의 완공 모습과

오늘날 남아 있는 서양루의 잔해를 감상하면,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외로페엔느리(Européenerie)의 신비로운

감각이 오묘한 건축의 묘미를 보여준다.

건륭제는 완공된 서양루에서 휴식, 업무, 연회 등 다양한

일상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게 완공된 서양루도

건륭제가 즉위부터 당장 마음먹었던 일은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건륭제는 서양루는 고사하고 원명원에 새로운

건축물을 더하거나 원명원을 변형할 계획을 딱히 품고 있지

않았다. 원명원에 대한 건륭제의 시각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자료들 중 하나인 “Later Record of the Garden of Round

Brightness”(1770)에 의하면, 건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원명원의 가치를 훼손하게 될까 봐 종종

두려움에 휩싸였고, 초기에 새로운 정원을 건축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건륭제는 거절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오래된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정원에서 머무르던 중, 그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황제에겐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라는 점을 말이다.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 주는, 아버지의 것이 아닌 황제 자신의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Zou 2005, 55).

건륭제의 서양루는 단순히 그의 문화 수집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선조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그만의 프라이드(pride)를 거친다. 그는

원명원을 놀고 쉬는 피서산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의

선조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원명원을 잘 관리하고 싶어했다.

강남의 이름 난 원림을 모아 둔 작은 축소판인 원명원에

유럽식 정원을 데려다 놓은 것은, 선조들이 열지 못한 원명원

내지는 청의 다음 차원을 열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서양루의 잔상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의 신비로운 합작을 모든 이들이 기분

좋게 감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건륭제의 명을 받들어 서양루를

디자인한 카스틸리오네의 활동을 ‘유럽의 형태를 중국의 제국적

취향에 맞추어 변형’해주는 행위로 보는 편견의 눈총들도

있었다. 이탈리아, 고딕, 중국이 모두 섞인 혼종이라고 조롱하는

등이 바로 그 예시였다(Finlay 2007, 184). 서양루를 실제로 보았건

보지 않았건, 새로운 건축물에 대한 당대의 이런 보수적인

비판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유럽의 건축물을 중국

현지의 문화와 조화롭게 구성하여 어느 정도 변형한 것도

사실이고, 이것이 새로운 심미적 균형을 발견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사실 건륭제에게만 유일하게 맡겨졌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유럽인들은 자신의 국가에서 탄생한 건축 양식에

십이간지, 국화, 노루를 얹은 도전을 충분히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루는 18세기부터 21세기

지금까지도 원명원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이자, 꼭

방문해야 하는 관광의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은 소실된 이 건축물을 왜 그렇게 찾느냐면, 그것이 단지

‘동양에 있는 서양식 건축물’ 또는 ‘동양적 요소를 담고 있는

서양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축의 조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건륭제의 시기에도

그러하였듯, 고도의 심미적 우수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구 반대편 세상의 건축물을 마법처럼 옮겨 놓은 서양루가

신비로울 뿐이다.

또한, 서양루는 청 시기 건륭제 집권의 원명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카스틸리오네가 대표하는 예수회가 남긴

복음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카스틸리오네는 청 황제 밑에서

궁정화가로 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경과 과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는 선교사였다. 그림도,

건축도 건륭제의 요구에 맞게 잘 완성한다고 한들 당장 눈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앞에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술이라는 능력을 하나님의 소명처럼 여겨,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는 미지의 땅에서 그 뜻을 묵묵히 전하는

것뿐이었다.

나가며

건륭제의 청과 카스틸리오네의 예수회가 보여준 문화 조화의

양상은 21세기 우리의 세계정치에 친숙한 본보기가 되어준다.

특히 날로 심화되는 중국과 서구권의 첨예한 갈등 속에서,

서양루는 중국의 영토에 정갈하게 자리잡은 서구의 문화를

찬란하게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그 찬란한 서양루는 21세기에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을 잃어갔다. 그것도 18세기에는 다정하게

복음을 전하던 그 유럽의 사람들에 의해서 서양루는 그 모습을

잃어갔다.

서양루의 물상, 그리고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의 심상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21세기의 주요한 과제로 떠오르는 ‘화해’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륭제 이전의 17세기

중국에서는 기독교과 반기독교 논쟁이 있었으며, 뜨거운 논쟁

이후 18세기의 중국은 새로운 국면의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용은 기독교 자체를 종교로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천하질서를 어지럽히고 중국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는 선교라면 건륭제는 언제든지 불호령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다만, 서양루의 미학은 천자의 마음도 훔친 매력을

품은 채 장춘원의 북단에 당당히 자리잡았다.

서양루를 완공한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은

복잡한 설계도로 짜였다고 설명하긴 어렵다. 오히려 각자의

명확한 목표를 지닌 채, 그 목표를 관철하려는 두 사람의

궁합이 잘 맞아떨어진 것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건륭제는

원명원을 잘 확장하여 그의 문화 수집가적 리더십을 활용하고

싶어 했고,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선교 활동을 이어 나가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

앞에 서양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풍문처럼 돌아다녔고, 그

모습에 반한 건륭제가 운을 띄우자 카스틸리오네는 평소와 같이

최선을 다한 것이다. 물론 이 순간이 오기까지 두 사람의

배경에는 예수회의 지역 적응주의적 선교, 건륭제의 예수회

예술 활동 간섭 등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 요소들의

축적되어 세워진 결과가 동양의 미학에도 걸맞고 서양의 골조를

잘 살린 서양루의 탄생이었다.

본 글에서 나아가, 카스틸리오네와 예수회가 청에 전한

새로운 복음에 대해 중국 사람들의 반응을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예수회 예술에 관한 중국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Pagani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나,

4. 건륭과 카스틸리오네의 건축학개론_원명원

선교 지역이 겪은 선교의 결과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는 그 선교의 방식이 ‘지역에의 적응’에

있다는 측면에서, 위 연구를 추가한다면 건륭제와

카스틸리오네가 그려 낸 수묘한 건축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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