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 고관상대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유지현 · 연세대학교
들어가며
만남이란 나와 전혀 다른 타자를 만나 소통하는 것으로, 우리는 만남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혹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타자의 영향으로 새롭게 변화된 나를 경험하기도
한다. 만남이란 전혀 다른 두 개 이상의 것이 만나 서로의 것을 나누며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만들어내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그 자체만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개개인의 삶이 무수한 만남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역사 또한 무수한
만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왔다. 누군가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또 누군가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자신의 삶터를 떠나 다른 세상을 탐험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만남들의 성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수많은 역사적 만남들
중에서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단연 의미있게 다루어야 할 만남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진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6 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 세기 초 세계는 포르투갈의 커다란
성장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세계질서는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성되었다. 글로벌 파워로서 세계중심에 선
포르투갈은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활발한 해양 탐험 활동을 벌였고,
그에 따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여러 대륙으로
신항로를 개척하며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Modelski 1978, 219). 신항로의 개척은 세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확대된 해양 교통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선물했고, 이는 식민지 사업과 교역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종교 단체에도 영향을 끼쳐 신대륙 선교사업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16 세기 초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성되고 글로벌
파워의 신항로 개척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교역과 식민지 사업, 선교
사업을 통해 동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동서양의 만남이 성사된
가운데, 그중에서도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역할과
공헌이다. 무역 상인들의 새로운 시장과 돈에 대한 갈망이 동서양
교역의 물꼬를 텄다면, 예수회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단순한 경제적 교류를 넘어서 동서양의 깊이 있는 문화적,
학문적 교류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부터 험난한 항해를
거쳐 미지의 세계인 아시아로 건너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신대륙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다. 선교지 현지인들과 원활히 소통하며
가깝게 지낼 때 비로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선교사들은
먼저는 현지인들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공부하며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두번째로는 현지인들에게 유럽의 문물을 공유하고
가르치는 데 힘썼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라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의 실현을 위해, 그에 대한 발판으로 먼저
문화적, 학문적 교류에 힘썼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여러 크고작은 만남들 중에서도, 유럽
예수회와 한국의 만남은 어떠했을까. 안타깝게도, 유럽 예수회와
한국의 직접적인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를 시작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일찍부터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지만 한국의 경우 중국을 통한 서양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전부였다(신익철 2013, 446). 더군다나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진 한국과
서양의 만남은 조선 사절단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만 성사될 수
있었기에, 만남의 연속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만남의 자체도 굉장히
짧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 만남이
제한적이었다고 해도 그 영향마저 미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18 세기
당시 중국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적 나눔에 힘입어 과학, 수학,
천문학 분야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보며,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서양 학문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북경을 방문할 때면 귀로만 들었던 서양의 문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때문에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단은 의례적으로 천주당을 방문하여 예수회
선교사와 만남을 가졌고, 그 만남 속에서 서양의 예술, 종교, 과학 등의
문물을 접했다. 매해 몇 차례 되지 않는 연행을 통해 만남을 가져왔기에
만남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만남에 대한 기대하는 마음과 자세가
남달랐기에 북경에서 서양과 한국의 만남은 조선 과학과 천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 중국 학계의 경우, 자국과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접점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진행시켜왔다. 물론, 앞의 두 나라의 경우 예수회
선교단과 오랜 기간 직접적인 만남을 가졌기에 한국과 비교하여 연구
소재가 많고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역시 북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예수회 선교사들과 특별한 만남을 가졌고 이는 당대
조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에, 둘의 만남 역시 자세히 연구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18 세기 북경에서
이루어진 예수회 선교 단체와 조선 사절단 간의 만남, 그 중에서도
예수회 선교사 할러슈타인과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의 만남을 살펴보고
그 만남의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두 고인의 만남을 자세히 살펴보기 앞서, 우리나라 18 세기
역사에서 할러슈타인이라는 서양 선교사 인물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에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가졌던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그 능력을 중국 황제로부터
인정받아 중국 황실에서 오랜 시간 일했다. 그는 중국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끼쳐 조선
과학의 발전에도 일조했다. 그의 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소양이
대단하여, 조선 실학자들은 물론 조선왕 영조 역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영조는 조선 사절단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면 할러슈타인과의
만남에 대해 직접 묻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공헌에
비해, 그의 이름은 현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비록 한국땅에
발 디딘 적 한번 없고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 이외에 한국인을 만나
소통해본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이웃나라 중국에서 한국의 선조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바다건너 한국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할러슈타인은 우리가 알아야할 한국 역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역사적 인물의 만남을 재현함에 있어,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이
둘의 만남에 대해 직접 작성하여 남긴 글들을 1 차 사료로 삼고, 그에
더하여 둘의 만남과 관련하여 기존에 이루어진 연구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18 세기 북경에서 서로를 만나기까지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서로 다른 두 인생의 북경에서의 만남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과거의 만남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만남 전: 중국 북경에서 서로를 만나기까지
할러슈타인
할러슈타인은 1703 년 8 월 27 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태어났다. 그는 류블랴나 예수회 대학을 마친
후 1721 년 10 월 26 일 비엔나에서 예수회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한편으로는 인문 교양학(Humaniora), 수학, 신학 등을 공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치며 20 대를
보낸다. 배움과 가르침을 거듭하며 20 대를 보내고 있던 그는 1727 년
10 월 8 일 신대륙 선교활동에 지원하게 되고, 그의 바람은 8 년이 지나
1735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드디어 선교지를
향해 떠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중국으로 가는 여정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했다. 할러슈타인이 몸을 실어야 했던 배는 대개 여객선
전용이 아닌 화물선 혹은 화객선이었다. 배 위에는 많은 짐이
실려있었고, 짐이 차지한 공간을 제외하고 남은 좁은 공간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야 했기 때문에 배 위에서의 생활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배 위에는 늘상 질병이 돌아 안전하지 못했고,
지나가야 하는 항로 부근에 전쟁이 일어날 때면 갈 길을 멈추고 마냥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역경도 할러슈타인의 신대륙 선교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향하는 고된 여정 중에서도 포르투갈어와 천문학을 공부하며
앞으로의 선교활동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Saje
2009, 62-73).
1735 년 9 월 중국 선교에 대한 열망을 품고 유럽을 떠났던
할러슈타인은 3 년이라는 고된 시간 뒤 1738 년 8 월 25 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국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에 도착한 뒤 할러슈타인은
중국어 공부에 열중했고, 중국 관리의 요청에 따라 마카오와 그 주변
지역을 담은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다음해 1739 년 3 월 1 일
할러슈타인은 다른 네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가 북경에 도착했을 당시, 북경에는 3 개의
카톨릭 교회가 존재했고(북천주당의 경우 처음에는 교회로 인식받지
못하다 후에 북당으로 불리며 3 개의 카톨릭 교회와 함께 교회로
인식되었다), 총 34 명의 카톨릭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중
31 명이 유럽 출신이었는데, 해마다 나이 든 선교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그들을 대신해 새로운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전체
선교사의 수와 구성은 해마다 바뀌었다. 새로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수가 많지 않아 1743 년까지 유럽 선교사 수는 22 명으로 줄어들었고,
이후에도 선교사 수는 더 늘지 않아 1766 년 북경에는 할러슈타인을
포함해 16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만이 남아있었다. 유럽 출신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도 소수의 중국인 목사들이 선교활동을 벌였고,
러시아 정교회 단체 또한 1680 년대부터 북경에서 활동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한다(Saje 2009, 73-79). 얼핏 봐도 1700 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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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에 쉽지 않았던
환경이었다.
할러슈타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중국 당국은 선교사들을
의심스러워했다고 한다. 북경 사람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거리낌을
갖고 있었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카톨릭 신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관례는 허용되었지만,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오직 북경과
북경에서 1 시간 내외 거리인 주변부에만 적용되었고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선교활동은 중단되지 않았고, 선교사들과 카톨릭 신자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선교사들은 목숨을 걸어야했고,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은 감금되거나
고문을 통해 카톨릭 믿음을 부정할 것을 강요받았다. 체벌 이외에도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중국에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1749 년에는 중국 여러 지역에서 잡힌 선교사들이 사형에
처해졌고, 할러슈타인은 또다른 선교사 펠릭스 다 로차(Felix da
Rocha)와 함께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 서적과
그림을 배부했다는 혐의를 받아 고발당하기도 했다. 둘은 사법
재판소로 소환됐지만 황제의 중재로 간신히 벌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비단 선교활동에
불리했던 중국의 정치적 상황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던 것은 로마 신도단의 불신과 비난이었다. 로마 신도단은
실제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선교사들을 힐난했고 북경에서 그리스도교의 관례가 엄격히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할러슈타인이 북경에 도착했을 당시
전체적인 상황은 예수회가 선교활동을 이어나가기에 매우 열악했다.
북경의 정치적 상황이 선교활동에 호의적이지 못했던 것은 물론,
자신들의 든든한 지원군이길 바랐던 로마 교황과 신도단으로부터
지지는커녕 비난과 책망을 받았기에, 18 세기 북경에서의 선교활동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Saje 2009, 80-82).
그러나 이와 같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가장 먼저는 선교사들의 뛰어난
과학적 소양 덕분이었고, 두번째로는 이를 알아본 중국 황제의 안목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건륭제는 유럽인들이 황궁에서만큼은 쓸모있다는 아버지의
조언을 새겨들어 예수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곁에 두고자 했고(Saje
2009, 80), 이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17 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은 물리적 세계와 실용과학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특히나 학문적 역량이 부족했던 천문학에 집중되었다. 때마침
북경으로 건너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비단 천문학 뿐만 아니라 수학,
음악, 미술, 기계학, 건설, 의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그들의 강점은 선교활동을 위한 도구로서 빛을 발했던
것이다(Saje 2009, 83). 중국 황제는 물론 고위 관직자들 역시 종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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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외면하면서도, 선교사들이 가진
학문적 소양에는 큰 관심을 가졌기에, 할러슈타인을 포함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에 앞서 그들로부터 먼저 신임을 얻기 위해
학문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었다.
실제로 1644 년부터 1775 년까지 청나라 조정에서 천문, 역산을
담당한 흠천감 감정은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역임되었다(신익철
2013, 453). 할러슈타인 역시 중국 황실로부터 유송령(劉松齡)이라는
중국 이름을 부여받고 1743 년 12 월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안드레
페레이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황궁의 흠천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1746 년 5 월 6 일 흠천감의 총 책임자였던
이그나티우스 코글러(Ignatius Kogler)가 세상을 떠나면서 할러슈타인은
그를 대신해 관아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황궁
흠천감의 총책임을 역임했던 것은 한편으론 선교사들에게 중국
현지인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얻고 그들과 학문적으로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치 않게 현지
관직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경계심을 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국인 관직자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오랜 기간 황궁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졌고, 선교사들의 학문적
소양이 황궁 흠천감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지해주기보다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황궁 밖으로 쫓아내고자
했다. 할러슈타인 역시 중국인 관직자들의 질투심 가득한 모략에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의 존재는 단순한
모략에 의해 위태로울 만큼 가볍지 않았다. 그들이 중국 학문에 끼치고
있는 영향은 지대했고, 그만큼 그들을 향한 황제의 신임은 두터웠다.
할러슈타인 역시 다른 흠천감 책임을 맡았던 선교사들과 같이 중국
황제의 총애 아래 중국 천문학과 과학의 발전을 위해 일하다 1774 년
10 월 29 일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홍대용
담헌 홍대용은 영조 7 년 1731 년 봄 음력 3 월 초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아버지 홍역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세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고, 1742 년 열두살이 되던 해에는 석실서원에 들어가
스승 김원행 밑에서 수학하기 시작했다. 대대로 벼슬을 지내온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홍대용 역시 당연히 관직에 올라 나랏일을 돌볼
것으로 생각됐지만 그는 여느 양반댁 자제와는 다른 뜻을 품었다.
벼슬을 목표로 장구(章句)나 외우는 과거공부보다는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경학공부에 매진하고자 했다. 그렇게 홍대용은 고학공부에
정진하며 자신의 10 대, 20 대 시절을 보내다 1759 년 29 세가 되던
해부터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과학 발명품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홍대용은 당시 나주 목사로 일하고 계시던 아버지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실학자 나경적을 알게 되고, 그의 인격과
과학지식에 큰 감명을 받아 그와 함께 혼천의와 자명종 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아버지 홍역의 재정적 도움을 바탕으로 나경적과 함께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3 년 뒤 1762 년에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했고 홍대용은
이것들을 자신의 고향인 수촌 부락에 설치한 후 농수각이라
이름지었다(김태준, 1988).
어려서부터 벼슬자리를 위한 과거공부를 외면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고학공부와 과학공부에 정진했던 홍대용은 30 대 중반에
북경 여행이라는 인생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1765 년 6 월 숙부인
홍억(洪檍)이 중국 북경 연행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면서,
홍대용은 숙부의 보좌관 자격으로 북경 연행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과거공부를 포기한
홍대용에게 북경 연행이란 어쩌면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기회였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과 함께 놀고 훗날 자라서는 학문에 대한 생각을
공유했던 홍억이 자신을 자제군관으로 추천하면서 북경 연행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절단에 합류하게 된 홍대용은 1765 년
10 월 12 일에 수촌을 떠나 3 일 뒤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달 11 월 2 일
서울을 떠나 12 월 27 일에 북경에 도착했다. 1766 년 3 월 1 일까지
대략 60 일간 북경에 머물렀고 1766 년 4 월 27 일 서울에
돌아왔다(Kim 2017, 505). 두달간 북경에 머무는 동안 홍대용은
남천주당을 여러번 찾아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했고, 북경 시내를
구경하다 유리창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의 중국 선비들을 만나
우정을 쌓기도 했다.
북경 여행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여행담을 기록한 담헌연기를
썼고, 중국 선비들과의 교류도 계속 이어나갔다. 여전히 벼슬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홍대용은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정철조 등의
실학자를 만나 얘기하는 것을 즐겼고, 동시에 의산문답, 주해수용 등의
철학소설과 수학책을 지었다. 40 대 후반에 가까워서는 벼슬을 얻어
지내다 1783 년 53 세가 되던 해 중풍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만남의 성사: 세 차례의 만남
이렇게 서양과 동양이라는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인물은
북경이라는 접점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1765 년 12 월
홍대용이 북경에 도착한 이후, 두 사람은 1766 년 1 월과 2 월을 거쳐
세 차례의 만남을 가졌다. 북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홍대용은
할러슈타인과의 세 차례의 만남을 연행록에 자세히 기록했고,
할러슈타인은 유럽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홍대용에 대해
말하고 있는듯한 글을 남겼다. 둘이 살아 생전에 남겨놓은 글을
바탕으로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진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세 차례의
만남을 재현해보고자 한다.
만남이 성사된 장소: 북경 남천주당
홍대용과 할러슈타인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북경 남천주당으로,
18 세기 조선 연행사가 북경을 방문할 때면 의례적으로 들렸던 장소
중의 하나이다. 남당은 연행사가 머물렀던 옥하관(玉河館)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천주당이었으며, 숙소와 가까웠던 것만큼 조선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사신단의 방문이 집중되었다고 한다. 홍대용이 북경을 방문하였을
당시 남천주당에는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이 살고 있었고, 그렇게
둘의 만남은 손님과 집주인의 관계로 시작되었다.
북경 남천주당은 명나라 황제 신종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위해 17 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10 년 북경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당시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여러가지 서양
물품을 진상했다. 그 중에는 지도, 성상, 양금, 자명종 등이 있었는데,
선종은 특히나 자명종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선물받은
자명종이 고장나는 일이 발생하였고, 황제는 자명종을 처음에 선물한
서양 선교사들을 불러다가 수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길로 황제는
또다시 자명종이 고장날 경우를 대비하여, 북경에 서양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고 그들을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당시
신종황제가 마테오 리치와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하사했던 거처가
바로 오늘날의 남천주당이다. 1644 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남당은 여전히 예수회 선교사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을 귀하게 여겼던 청황제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마테오 리치가 살던 남당과 함께 그 주변을 하사하였고,
아담 샬 선교사는 비어있는 공간을 활용하여 큰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Goodnews, 2015). 17 세기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경
남천주당은 훼손되고 재건축되는 과정을 거듭 거쳐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성당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림 1. 북경 남천주당 (출처: Christians in China)
1766 년 1 월 9 일 첫번째 만남
대부분의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남천주당을 찾은
것처럼, 홍대용 역시 북경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천주당을
찾았다. 1766 년 1 월 9 일 관상감(觀象監)의 추길관(諏吉官) 이덕성과
통역관 홍명보와 함께 남천주당을 찾은 홍대용은 먼저 천주당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내외부의 이국적인 모습에 신비로움과 기이함을 느꼈다. 건물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서는 남천주당의 주인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을
만났고, 그들은 황실이 하사한 중국 이름을 사용하여 각각 유송령과
포우관이라 했다. 두 서양 선교사를 처음 만나는 것은 물론 서양 사람
자체를 처음 본 홍대용은 자신의 연행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이것은 할러슈타인의 인물에 대한 유일한 기록으로 할러슈타인을
연구하는 슬로베니아 학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유송령의 나이는 62, 포우관의 나이는 64 인데, 비록 수염과 머리털은
희었지만 건강한 얼굴빛은 어린애 같았고, 깊숙이 들어간 눈에
눈동자의 광채는 사람을 쏘는 듯하였으니, 벽화 속에서 보던 인물과
꼭 같았다. 모두 머리를 깎았으며, 의복과 모자는 청국 제도로서
유송령은 양람정(亮藍頂)을 쓰고, 포우관은 암백정(暗白頂)을 썼다.
유송령은 3 품(品), 포우관은 6 품으로서 모두 흠천감(欽天監)의
관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중국에 들어온 지 벌써 26 년이
되었으며, 수만 리의 먼 길을 항해(航海)하여, 복건(福建)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육지에 내렸다 한다(유포문답, 1974).
서른넷의 홍대용이 예순둘의 유송령을 보고 어린애와 같이 건강한
얼굴빛과 사람을 쏘는 듯한 광채의 눈동자를 지녔다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 홍대용의 눈에 유송령은 지긋한 나이에도 자기관리에 성실하고
생각과 마음이 깨어있는 사람으로 비춰졌음을 알 수 있다. 유송령과
포우관의 용모를 보고 천주당 벽 곳곳에 걸려있는 벽화 속 서양
사람들과 꼭 같다고 한 홍대용의 말로 미루어 보아, 유송령과 포우관은
서국적인 용모에 중국황실의 법도에 따라 청나라 조정의 의복을 갖춰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홍대용이 북경에서 돌아와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의
인물을 묘사하는 글을 남겼듯이, 할러슈타인 역시 유럽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홍대용과 이덕성, 홍명복을 묘사한 듯한
글을 남겼다.
… They are strong, muscular, well-built people, and good soldiers.
They dress according to ancient Chinese customs, now in robes of
peace, now in those of war(Saje 2009, 347).
홍대용은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의 인물에 대해 비교적 긴 글을
남긴 반면, 할러슈타인은 조선 사람들에 대해 위와 같이 짧은 두 문장을
남겼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은 근육질 몸에 체격이 다부진 좋은
군인들로 비춰졌다.
홍대용이 천주당 안을 둘러보고 싶다는 말에 유송령은 직접
안내를 맡아 천주당 안을 구경시켜주었다. 묘당과 천주당 벽 곳곳에
붙어 있는 화상들 그리고 유럽에서 건너온 여러가지 물건들을 보고
홍대용은 서양 문물의 기이함과 신비로움에 사로잡혔다. 구경 중에
할러슈타인은 홍대용에게 책상 위에 진열되어 있던 책 한권을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펼쳐보라고 건네주었는데, 황제와 후비의 복록을 축원하는 글이 담겨
있었다. 홍대용은 이를 아첨하는 행동이라 생각했고, 도리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행동을 오히려 자랑하는 할러슈타인의 모습에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송령은 비록 나이가 많고 천문 역상에 소견이 높았으나, 이렇듯
도리에 어긋나고 아첨하는 일을 스스로 나타내 외국 사람에게
자랑하고자 하니, 극히 비루하고 용속하여 먼 나라 이적의 풍속을
벗지 못한 일이다(홍대용 2020, 352).
홍대용은 할러슈타인이 천문학에 뛰어난 견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천주당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에 분명 좋은 인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러슈타인이 이처럼
호감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도리에 맞지 않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홍대용은 그에게 큰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한 수 배워보고자 찾아간 사람이 기대와는 다르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듯이, 홍대용 또한 이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할러슈타인에 대한 홍대용의
실망감과는 별개로 또다르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홍대용은
할러슈타인의 아첨하는 듯한 태도를 보고 그것을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적의 풍속과 연결지어
비판했다. 이는 홍대용 자신만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고 하기보다
당대 동아시아에 만연했던 시대적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과거부터 오랜 시간 중국의 천하질서에 예속되어 중국과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신하국가로서 중국에 충성을 다하며
중화사상을 깊이 받아들였고,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그 나머지
주변부는 오랑캐로 간주하며 중국의 선진문명을 전해 가르치고
계몽시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오랜 시간 조선땅 깊이 스며든
중화사상은 16 세기 명의 도움을 받아 왜군을 물리치면서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홍대용이 자신이 보기에 달갑지 않은 할러슈타인의 특정한
모습을 개인적인 성향이 아닌 서양 전체와 연결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중화사상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할러슈타인을 바라보는
홍대용의 속내는 한마디로 말해, 그의 학문적 소양은 인정하고 우러러
보면서도 그가 뿌리를 두고 있는 서양의 문화는 역시 오랑캐의 문화로
하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첫날 홍대용은 묘당과 벽에 붙은 여러 화상들을 제외하고도
파이프 오르간과 자명종을 구경했다. 홍대용과 다른 두 조선 사신들은
하나를 보고나면 또다른 것을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할러슈타인은
어떤 것들은 보여주기 어렵다며 사신들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거절의 의사표현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를 끊임없이 부탁했다. 이에 대해 할러슈타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탁하는 홍대용과 두
사신들의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침실을 보여달라는 조선 사신들의 부탁은 끝까지 들어주지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않았다. 홍대용과 두 조선 사신들의 거듭되는 요청과 가끔은 무례한
부탁에 불편하고 언짢기도 했겠지만 할러슈타인은 끝까지 예의를 갖춰
그들을 대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의 연행기에도 나타나 있듯이,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은 첫만남 이후 숙소로 돌아가는 홍대용과 두
사신을 마지막까지 예를 갖춰 배웅했다고 한다.
그림 2.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림 3. 홍대용 초상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위 그림 2 와 3 은 18 세기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삽입한 인물 초상화이다. 할러슈타인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은 찾아볼 수 없어, 그의 초상화 대신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요한 아담 샬 본 벨의 초상화를 삽입했다. 할러슈타인과 아담 샬
두 사람 모두 중국에 머무는 동안 흠천감에서 일했던 예수회 선교사로
자세한 얼굴 생김새는 달랐을지라도 중국황실의 의복을 입은 모습은
비슷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림 3 은 홍대용의 초상화로, 청나라 선비
엄성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1766 년 1 월 19 일 두번째 만남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두번째 만남은 첫만남 이후 10 여일이 지난
19 일에 이루어졌다. 사실 홍대용은 첫만남 이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3 일에 이덕성과 함께 남천주당을 재방문했다. 그러나 그 날
할러슈타인은 일로 인해 흠천감에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고가이슬은 남천주당을 방문한 재상 대인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홍대용과 이덕성은 다음 만남에 대한 약속만 잡은 채 발길을
돌려 천주당을 빠져나와야 했다.
이후 19 일에 이루어진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두번째 만남은
첫만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처음 홍대용과 이덕성,
홍명복이 남천주당을 방문했을 때 할러슈타인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두번째 만남에서는 사전에 약속되었던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남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지기로부터 19 일 조선 사신들의 재방문이 예정되어 있음을
전해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은 당일
남천주당을 찾은 홍대용과 이덕성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홍대용과
이덕성이 두번째 만남을 위해 남천주당을 방문했을 때 문지기는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이 지난밤 밤새도록 천상을 관찰하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어 여전히 잠에게 깨어나지 못했다고 전했다.
홍대용과 이덕성은 하는 수 없이 대인들이 침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폐백의 목록을 작성하여
문지기를 시켜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대인들은 앞전에 받은 폐백에
대해서도 답례를 못했으니 또다른 폐백을 받을 수 없고, 오늘은 몸이
피곤하여 만날 수 없으니 다음에 다시 찾아올 것을 부탁했다. 홍대용이
문지기를 통해 다시 한번 만남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늘은
만날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홍대용은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적어 문지기에게 대인들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들은 높은 덕을 흠모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정성이 있거늘, 두
번째 문병에 나왔지만 보지 못하고 무슨 죄를 얻은 듯하여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길이 하직을 고하고
나아오지 않으려 하니 헤아려 용서함을 바랍니다(홍대용 2020, 446)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쪽지를 받아든 할러슈타인은 마음을 바꾸고 홍대용과 이덕성을
만나고자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내당에 마주앉은 홍대용과
할러슈타인은 둘 다 중국어가 편하지 못해 천주당에 머물고 있던 한
선비의 도움을 받아 글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둘은 천주학과
천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홍대용은 천주교가 숭상하는 바에
대해 질문했고, 할러슈타인은 이에 “천주의 학문은 사람을 가르쳐
천주를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홍대용 2020, 447). 이어서 홍대용은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혼천의(渾天儀)를 모방하여 만들었지만 문제점이 많았다며
북경에 있는 의기(儀器)들을 살펴볼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할러슈타인은 관상대에 여러가지 의기들이 있지만 출입통제가
엄격하여 외부인은 출입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천주당에
있는 혼천의와 망원경을 보여주며 하나라도 더 배워가고자 하는
홍대용의 열의에 답했다. 날이 저물어 홍대용과 이덕성은 가져온
폐백을 남기며 떠나기 전 할러슈타인과 다음 만남을 또다시
기약하고자 했다. 할러슈타인은 이번달 1 월에는 더 이상 한가한 날이
없으니 다음 달에 방문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렇게 남천주당을
떠나오며 이덕성은 홍대용에게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해
속상한 마음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이전에는 천주당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가장 반겨하며
대접하는 음식이 극히 풍비하고 혹 서양국 소산으로 남폐하는 선물이
적지 아니하더니, 근래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보챔을 괴로이 여겨
대접이 이리 낙락하니 통분합니다(홍대용 2020, 453).
1766 년 2 월 2 일 세번째 만남
이덕성과 함께 다시 남천주당을 찾은 홍대용은 할러슈타인과 또다시
내당에 마주앉았다. 이번에도 역시 중간에서 소통을 도와줄 선비를
불렀고 그가 내당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러슈타인은
홍대용에게 조선에 대해 질문했다. 대마도와 부산의 위치에 대해
물었고, 조선과 일본에도 자명종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선비가
내당에 도착하고 나서는 이덕성과 책력 만드는 법에 대해 짧은 논의를
나누었다. 이후에 홍대용은 할러슈타인에게 부탁하여 서양의
수학책과 붓, 자명종, 나침반을 구경했다. 날이 저물고 홍대용과
이덕성은 돌아갈 채비를 하며 이제 곧 귀국하여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 전했다. 할러슈타인은 조금의 서운한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지난번에 받은 폐백에 대한 보답으로 서양에서 건너온 물건들을
홍대용과 이덕성에게 나누어주었다. 최근 서양과 왕래가 적어
약소하게나마 보답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덕성은 왕의 명령을 받아
역법을 자세히 배우고 의기와 서책을 구해 조선으로 가져가고자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했는데, 협조적이지 못한 할러슈타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빈 손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 4. 17 세기 벨기에 출신 예수회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리비스트(Ferdinand Verbiest)가 그린 고관상대 (출처: UNESCO
Astronomy and World Heritage Webportal)
만남에 대한 평가
앞서 할러슈타인과의 세 차례의 만남을 자세히 기록해놓은 홍대용의
연행기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떠한 만남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홍대용의 글에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듯이, 두 사람의 만남은 유쾌한 만남이었다기보다
서운함과 불편함으로 가득한 만남이었다. 남천주당이라는 한 공간에
함께하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끝으로 갈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불편함과 서운함이 가득했다. 애초에 남천주당을
방문한 홍대용의 무리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에 대한
가능한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자 했다. 특히나, 그들은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나라 조정의 흠천감에서 총 책임을
맡고 있던 할러슈타인과 가능한 한 잦은 만남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할러슈타인의 마음은 그들과 같지 못했다.
그들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 많은 가르침을 전달해주기에 할러슈타인은
청나라 조정일과 남천주당을 방문하는 끊임없는 방문객의 발길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할러슈타인이 애초에 홍대용과
다른 조선 사신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고 꺼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유럽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 역시 한번도
방문해보지 못한 조선과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홍대용
무리에게 조선과 일본에 대해 적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할러슈타인 개인만의 관심사였을 뿐 홍대용과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나머지 사신단들과 함께 공유했던 관심사는 당연히 아니었다. 조선과
일본에 대해 궁금해하는 할러슈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자국과
이웃나라에 대해 친절히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도 있었지만 홍대용과
그의 무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자신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바빴다. 다음은 할러슈타인이 북경에서 유럽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으로, 홍대용을 포함한 조선 사신들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져 있다.
Your Eminence also asks what news we have from Japan of the
Christian faith. I answer that we have none at all. Although Japan is
very close, here there reigns such silence about it as if it did not even
exist. Delegates arrive from Siam, Cochinchina, Vietnam, and from
Liuqiu (or Riukiu), that is, islands between the Philipines and Japan.
Koreans arrive each year, but no one has ever come here from Japan.
The Koreans say that on a clear day they can see the Japanese
mountains, though they know nothing about Japan; nearer to the truth
is that they do not wish to say anything, as they are the craftiest people
under the sun. Though they will pose questions for an entire hour, they
never answer a single one. When they visit our house, and they always
visit it immediately when they come to Peking, they first demand ink
and a writing instrument. Because none among them knows how to
speak Chinese, they communicate in writing. We answer them through
a servant. They often pose well-founded questions about astronomy. If
I tell them to leave their questions that I will respond to them via
express courier, they do not want to leave a single written character,
and often prefer to return. They are strong, muscular, well-built
people, and good soldiers. They dress according to ancient Chinese
customs, now in robes of peace, now in those of war. It was never
possible to subjugate them, yet neither could they unburden
themselves of yearly taxes. I would write more if I did not fear
interruption by the courier demanding the letter. In Peking, October 6,
1757, at midnight(Saje 2009, 347).
홍대용과 그의 무리가 할러슈타인으로부터 서양의 발달된 천문 지식을
배우고자 했다면, 할러슈타인은 그들을 통해 일본에 대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길 바랐다. 편지 발췌의 첫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예수회의 선교사업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7 세기 초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철저한
감시로 인해 모든 종교 의식과 포교 활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1635 년에 들어서는 외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사코쿠 칙령이 내려지면서 일본과 서양 간의 왕래는 거의 단절되었고,
그로 인해 밖에서는 일본 선교사업에 대해 전해들을 길이 만무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선교사업 역시 순항을 달리고 있었던 것은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아니었지만 일본의 선교 상황과 비교해 비교적 자유롭고 서양과의
왕래도 여전히 유지되었기에, 유럽 예수회는 북경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통해 일본 선교 상황에 대한 작은 소식이나마 들을 수
있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어도
할러슈타인 역시 신대륙의 전도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일본
상황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홍대용과 다른
조선 사신들을 만났을 때 일본에 대한 소식을 물어 전해듣고자 했지만
편지에 나타나 있듯이 그들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들에 대해서는 한시간 동안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할러슈타인이 묻는 질문에는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러슈타인은 이러한 조선 사신들의
태도에 기분이 많이 상했었는지 그들을 하늘 아래 가장 교활한
사람들로 표현하기도 했다.
홍대용과 그의 무리들이 할러슈타인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고의적인 의도가 따로 있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서양 문물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듣고 배워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덕성의 경우 관상감 일관으로 서양의 발달된
천문학에 대해 배워 돌아가야 할 임무가 있었고 홍대용은 비록 관상감
관직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 둘 다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앞섰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슈타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궁금증 해결에만
집중하다 결국 할러슈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할러슈타인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자신들의 마음도 상한 채 만남을 종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홍대용의 글을 살펴보면 할러슈타인은 만남 내내 끊임없는 조선
사신들의 요구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청을 완강히 거부하는 모습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홍대용과 이덕성이 가진
천문학적 지식을 칭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홍대용과
이덕성이 할러슈타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공감해주었다면
이들의 세 차례의 만남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 않았을까. 청나라
조정일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홍대용과 무리가 마음에 들었다면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그들에게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을 전해주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은 서로 다른 곳에
관심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서로 헤아려 공감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만남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며
경이롭다라는 형용사보다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북경에서의 만남을
더 잘 표현해낼 수 있는 형용사는 없을 것이다. 머나먼 슬로베니아
땅에서 태어나 바다 건너 산 넘어 북경에 도착한 할러슈타인과 일찍이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자신만의 공부를 하다 숙부 덕에 북경 연행에
3.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_고관상대
오르게 된 홍대용, 이 두사람의 만남은 기이하다.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이면 몰라도 먼 옛날 18 세기에 슬로베니아 사람과
한국인이 제 3 의 나라 중국에서 만났다는 것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이 아니었기에
둘의 만남은 굉장히 귀했지만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았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한명은 선교에 다른 한명은 천문학에 관심을 두어 둘의 만남
속에는 공감과 즐거움보다는 불편함과 서운함이 더 많았다. 홍대용이
유리창에서 마음 맞는 중국 선비들을 만나 조선에 돌아와서도 그들과
계속 연을 이어갔던 것처럼, 만약 할러슈타인과도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천주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물론 조선에 돌아와서도 그
인연이 계속 지속되었다면 둘의 만남은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어쩌면 18 세기 우리나라 역사에도 서양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흔적이 남게 되지 않았을까.
한 개인의 인생이 무수한 만남들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듯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국제사회 또한 무수한 만남들의
연속으로 형성되었다.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만남들 중에는 협력과 평화를 이끌어낸 만남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움과 전쟁을 부추기는 만남들로
있었다. 나와 다른 타자를 만나 소통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무수한 만남들이 결국 끝에 가서는 전혀 다른 결실을 맺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은 아마도 만남에 참여한 나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함은 물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둘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일 것이다. 18 세기 이루어진
할러슈타인과 홍대용의 만남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들이 많았지만 이
만남을 참고삼아 앞으로 한국은 서양은 물론 국제사회 안의 다른
타자들과 더 좋은 만남과 인연을 만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상대는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조금 더
집중한다면 그들과 한층 더 나은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가톨릭인터넷굿뉴스. 2015. “GOODNEWS 자료실 - [순교] 북경의
남천주당과 우리나라.”
http://pds.catholic.or.kr/pdsm/bbs_view.asp?num=84&id=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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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2003. “동양에서 처음 地轉說 주장한 홍대용.”
신익철. 2013. “18 세기 연행사와 서양 선교사의 만남.”
<한국학문학회> (51): 445-486.
온누리 2000 선교본부 외. 2015. 《와이미션?》. 서울: 사단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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