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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 중국국가박물관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2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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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은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정복왕조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로, 중국 역사상 한대(漢代) 이래 가장 오랫동안 존속된

국가였습니다. 18세기 중반 청나라는 단연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은 중국 본토를 포함하여 최대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복속하여, 만주, 티베트, 몽골, 신강에 걸치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한 다민족국가였습니다(Islamoglu and

Perdu 2009, 21).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1761년

이역의 형상을 자세히 묘사한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를

제작하고 1781년 역사상 최대의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완수하였습니다. 건륭제의 60년 치세 동안 청나라의 경제, 군사,

문화가 전성기를 누리면서 대내외적 위상을 높인 화려한

시기였으나, 속으로는 조금씩 곪아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잦은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대외 원정으로 인한 재정 소모와 황족 및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청나라 쇠퇴의 전주곡을 울렸습니다. 1793년 영국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을 기점으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하락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황청직공도>는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에

포섭된 타자들, 37개의 국가와 264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한 총

301개 도상과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 역사, 독특한 풍습,

그리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국어와 만주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중심의 중화와 주변의 이적의

화이(華夷)관념을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이를

구축하는데 실질적으로 작동한 체제는 조공체제였습니다. 바로

직공(職貢)은 주변의 외번과 외국이 중국의 천자에게 공납하는

의사소통의 상징적 행위로, 이에 동반하는 외교 의례는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함의를 내포하였습니다. 따라서 직공도는 외교

사절들이 입공하는 정황을 그리거나 중국과 각국의 대외관계,

역사, 풍속을 덧붙여 적은 기록화로, 중국 왕조가 주변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 수집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이유만으로 건륭제의 속마음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 건륭제는 영토 확장의 물리적 차원을 넘어

문화적 차원에서 대일통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 우주론과 서구의 물질적 세계와의 충돌

속에 천하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천자로서

그의 고민은 고스란히 황청직공도에 담겼습니다.

본 보고서는 <황청직공도>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18세기의

청과 주변국의 정세 변화를 보여주는 복합 천하질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먼저 각기 다른 시기별 이역에 대한 상상을

그린 도상들을 비교하여 이역에 대한 상상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추적합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 제작된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가

외국 사신들의 조공 장면을 아우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황청직공도>와의 도상적 관련성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몽골-티베트, 조선과 서양에 관한 도상과 묘사를 통해 청

제국의 자기 인식과 대외 인식을 파악하여 복합 천하질서의

관계망을 읽어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비교 분석을 통해

건륭제가 주변국가와 외번의 복색과 풍물에 대한 그림과 기록을

직공도에 담은 숨겨진 목적을 밝히고자 합니다.

기존 연구 검토

기존의 <황청직공도>에 관한 연구는 주로 중국사학과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정은주(2015)는 중국에

현존하는 역대 직공도의 제작배경을 살펴보고 한인 도상에 대한

통시적 분석을 토대로 중국의 인식 변화를 파악합니다.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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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청직공도>는 건륭연간 영토 확장을 정치적으로 현창하려는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국의 위상을 세계로

확장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

정은주(2011, 2014)는 <황청직공도>의 제작 경위를 검토하여

사료적 가치를 정리하고, <만국래조도>와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세부적인 특징과 회화적 변화를 분석합니다. 賴毓芝 또한

<황청직공도>의 제1권에 그려낸 형상이 <만국래조도>의

만국이 내조하는 제도의 이미지임을 논증함으로써, 두 작품

모두 청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황청직공도>의 정치적 목적에 주목하는 연구도

진행되었습니다. 서윤정(2019)은 18세기 청과 조선의

조공관계라는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여 청의 물질문화가

조선에 전해지는 양상과 지식인에 끼친 영향을 검토합니다.

특히 <평정서역전도>와 <평정양금전천도>의 사례에 주목하여

외교 선물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합니다. 송인주(2018)는

<황청직공도>의 비한인 세계에 대한 서술 논리가 청조의 지배

논리와 일치하며, 나아가 근현대 중국의 민족담론까지

연결된다고 주장합니다. 청조가 대일통의 위업을 확정하기 위해

기존 중화왕조의 화이관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중국 내지의

비한인들을 통치하였으며, <황청직공도>를 비롯한 일련의 편찬

산업을 통해 청조가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지배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건륭제가 남긴 수많은 시각적 이미지들을 정치학적

시각에서 포착한 연구로는 이은상이 대표적입니다.

이은상(2021)은 18세기 청나라를 ‘이미지 제국’으로 새롭게

조명하고, 다민족국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건륭제의

시각정치학을 강조합니다. 시각적 이미지는 민족을 회유하고

통치하기 위해 황제의 이미지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확실한 통치 전략이었습니다. 또한 청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지식 정보를 소유함으로써 제국의 통치자는

권력을 성취하고 그들에 대한 지배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건륭제의 제국 이미지 형성과 시각적 이미지 정책에 관한

비슷한 논의로 정석범과 유재빈의 연구가 있습니다.

정석범(2009)은 건륭제가 청조의 군사적 위용과 제국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시각적 기념물을 통해 대일통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유재빈(2006)은 건륭제의 초상화에 대한

회화적 접근을 통해 건륭제가 천하의 흩어진 세력을 하나의

제국 아래 통합하고자 했던 그의 통치관을 문화적으로

구현하였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기존 연구에선 <황청직공도>의 정치적 함의와

구체적인 배경 규명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크

맨콜(1968)의 독자적인 지배체제가 결합된 서북 초승달 지역과

조공 관계로 구성된 동남 초승달 지역의 이분법은 청나라의

천하질서가 가지는 복합성을 다소 납작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있습니다. 엄격한 두 가지 틀 안에 질적 세계를 해석한다면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가치들이 퇴색될 수 있습니다.

복합 천하질서를 이루는 또 다른 주인공들을 제국의 역사와

분리시키고 단순히 고정적이고 주변적인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각 지역의 관계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음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내 연구는 청나라와 조선의 대외 관계와 그에 따른

상호 인식에 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지만, 향후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붕괴시켰던 서양과의 만남에 주목하는

연구엔 다소 미흡했습니다. 최근 이유진(2020)의 연구는

<황청직공도>에서 서양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한가운데 서양에 대한 청의 이중적인 인식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Cheng-Hua Wang(2014)도 18세기

청나라의 예술과 시각 문화에 있어 중국과 유럽의 상호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중국 역사의 세계적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선 연구들도 하나의 상대를 미리 정해두고 그에

대한 청나라의 대응 인식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에,

당시 복합적인 맥락이나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답사보고서는 천하질서의 전통적 주인공이었던 중국과 조선,

몽골과 티베트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인공인 서양을 함께 무대에

올려, 서로 다른 여러 관계들 사이의 연계성과 차별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자 합니다.

직공도: 이역에 대한 상상에서 사실로

역사 속 중국은 중심의 중화와 주변의 오랑캐라는 구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였습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역의

형상을 담은 도상들을 여행기, 직공도, 신화/전설로 그렸습니다.

이역에 사는 타자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산해경山海經>입니다. <산해경>에 묘사된 이역인들의 삽화는

대부분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비인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민족의 사람답지 않음과 야만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역의

관찰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과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거자오광 2012). 그 이면에는 이역과 이민족에 대한

천조대국의 비웃음과 배척 그리고 경시와 경멸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직공도 중 가장 오래된 그림은 남조 시기의

<양직공도梁職貢圖>로, 양 무제 즉위 40년만을 맞아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 사신의 용모를 관찰하고 풍속을 물어

제작되었습니다. 중국국가박물관 소장 <양직공도>는 백제를

포함한 12개국이 채색인물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 사신은

세 번째로 등장하며 백색 모자를 머리에 쓰고 깃과 단 소매를

고동색으로 선을 댄 연두색 복삼을 입고 주황색 선을 댄 통이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큰 분홍색 바지와 검은 신발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사진

<그림 1>

백제국 사신 <양직공도>

중국국가박물관

해당 <양직공도>의 인물 묘사는 염립본의

<왕회도王會圖>와 매우 유사합니다. 당 태종은 주 무왕을

전거로 삼아 <왕회도>를 제작하였으며, 우리나라 삼국을

비롯하여 총 24개국 사신이 접견하는 모습을 차례로

담았습니다.

사진

<그림 2> <왕회도> 629년경 대북고궁박물원

명대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인물편은 비현실적인 상상 속

국가의 인물들이 혼재되었으며, 직접 경험을 갖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기존의 전설을 답습하였습니다. 통상 무역과 사신의

교류로 인해 이역에 대한 실측 지식은 점진적으로

축적되었지만, 이역에 대한 묘사는 천하와 사방 오랑캐에 대한

일종의 상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형성됐던 상상적 지식이 고전에 대한 추측과 이해를 토대로,

고대의 상상에 후대의 상상이 덧붙여지고 이야기 위에 다시

이야기가 겹쳐져 역사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1602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제작된

후에야,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점차

새로운 만국의 세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마테오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리치부터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상상으로부터 생겨난 이역에 대한 형상은 사실적 견문에

근접한 사생화로 대체되었습니다.

<황청직공도>는 국가 차원에서 제작된 직공도로,

‘황청(皇淸)’은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높여 말한 것입니다.

전통시기 중국에서는 현재의 태평성세를 현창하고자 할 때면

과거 속에서 그 모델을 찾았습니다. 물리적 영토가 넓어진 만큼

대제국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조화롭게

통합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건륭제도 당 태종의 <왕회도>를 염두에

두고 <황청직공도>를 제작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도움을

주고 다스림을 돕는 거울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황청직공도>는 역대 제작된 직공도의 구도나 체제는

차용하되,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 가장 광범위하고 상세한

정보와 인물의 사실적 묘사에 집중함으로써 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주로 각국 사신을

위주로 그리던 방식에서 민족 고유 의상을 입은 한 쌍의

관인과 민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림 속 인물은 독특한

문화관습을 보여주는 상징물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림 상단에는

민족의 역사와 지역, 음식과 복식, 풍속과 기호, 그리고

청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제1권에

등장하는 외국은 친소 개념과 지리적 거리를 고려하여 조선,

유구, 안남, 섬라, 소록, 남장, 면전, 대서양 등의 순서로

배열하고, 제2권 이후에는 티베트를 포함한 내번과 토사의

소수민족까지 그 범위를 확대되어 풍속지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진

<그림 3> 요문한, 장정언 외 <만국래조도> 1761 북경고궁박물원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만국래조도>는 건륭연간 청 자금성 태화문에서 외국

사신과 외번이 조공을 바치며 조하하는 장면을 하나의 그림에

담은 직공도입니다. 그림 밑에서부터 포르투갈 사신단, 코끼리를

탄 인도 사신단, 그 위로 갓을 쓴 조선 사신단이 보입니다.

또한 <만국래조도>의 1761년 가을에 쓴 건륭제의 어제시와

<황청직공도> 제1권 권두에 쓰인 어제시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제작 배경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직공도를 제작했던 이유는 절대적

우월자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핵심이 직공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직공이라는 행위를 통해 불평등한 관계

속에 타자를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했습니다. 중국 중심의 천하관을 형성한 조공체제는 중국

역대 왕조가 추구한 이상적인 국제관계였습니다. 청나라도

대내적으로 중국 황제로서 정당성과 통치 위엄을 명시하고,

대외적으로 천하의 중심으로서 주변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조공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1760년과 1779년 제작된

<만국래조도>에 조공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배경인 자금성에

입공하는 각국의 사절단과 함께 건륭제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사방에서 주변 타자들이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러 오는 장면을

담아냄으로써 통치자의 권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실제 각국의 조공은 각 국가별로 이루어져서 모든

사신이 자금성 앞에 운집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청나라에 의해 극적으로 연출된 장면으로, 복합

천하질서에 속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위계를 세움으로써

청의 대국적 면모와 황권의 위엄을 극대화시킨 무대를 꾸민

것이었습니다.

태평성세가 누대에 이어져 사해가 봄과 같고,

황청에 조공하는 것은 만방이 균등하네.

문자와 수레의 제도 누가 예외일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 친하지 않은 이 없네.

동서에서 황제를 뵈러 모이고,

남만과 북적이 원단[조회]에 참여하였네.

그림은 황제의 교화를 과시함이 아니라,

안녕을 보위하고 살펴 삼가 위무함이라네.

어제시는 만국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도 황제의 치세 속에

사해가 평화롭게 통일된 태평성대가 지속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건륭제는 물리적 차원 너머의 문화적 차원에서의

대일통을 꿈꿨습니다(엘리엇 2011, 58-67). 청나라가 단순히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제국이 아닌, 제국 안팎의 이민족들이

중국 문화에 교화되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죠. 제국 내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모든 민족에 대한 지배를 주장하기 위해선 표준화된 틀 속에서

문명화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 정의를 내리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황청직공도>는 민족 화합의 증거이자 청

제국의 강성함을 밝히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청사고淸史稿』서문은 순치 연간에 이르러 청나라의 위엄이

국외에까지 진동하였으며, 여러 외국의 먼 지역이 먼저 입공을

청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이것은 그 당시 무의가

빛나서 육지나 바다에서나 한결같이 두려워하여 외국의 먼

지역에서도 어깨를 맞대어 무릎을 꿇은 것이었으니, 의를

사모하고 덕에 감화되어 온 것이지 무력으로 정벌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며 청나라의 매력을 강조하였습니다.

복합천하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축은 바로 황제 그

자신이었습니다. 건륭제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자신의 초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의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부여하고, 동시에 모든 정체성이 황제로서의 자신으로

수렴되기를 원했습니다(Crossley 1999, 133-134). 건륭제는 중국 한족

백성들에겐 천자일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이자

유럽식의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탄 군주의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했습니다(로 2014, 128-130). 두 상반된 모습은 ‘덕’으로

감화시키는 성군이자 ‘힘’으로 굴복시키는 정복자의 복합적

이미지로 천하세계의 모든 범주의 만물을 망라하는

보편군주로서 건륭제가 지향했던 자아상이었습니다.

또한 건륭제는 천하질서의 무대 위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각

대응하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다양한 연기가 복합되는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광대한 천하의 공간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집단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서로

다른 통치방식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건륭제의

야심도 정벌과 회유의 정책을 적절히 운용하여 만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면서도 유교의 예치로서 문화적 통일을

지향하여 제국의 안정을 보장하는데 있었습니다.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유교 제도와 철학을 사용했지만 제국의 다른

지역에선 몽골, 티베트, 투르크의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반영했습니다(Mosca 2014, 103-116).

정벌과 회유: 몽골-티베트 세계

강희제 때부터 추진된 대외 팽창은 건륭제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한

황제였습니다. 건륭 연간 제작된 전쟁 기념화인

<평정양금천전도>, <평정이리회부전도>, <평정준가르도>와

<건륭남순도> 모두 광활한 영토에 분포되어 있는 다양한

민족들이 황제의 통치하에 하나로 통일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한

시각적 이미지였습니다(Reed 2017).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나아가 건륭제는 ‘묘강苗疆’과 ‘금천金川’을 평정한 뒤 1748년

<황청직공도>의 제작을 명했습니다. 제작이 마무리된 1761년은

바로 건륭제가 몽골-티베트 세계의 패권을 다투던 준가르를

평정함으로써 거대한 제국의 판도를 완성한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퍼듀 2012, 316-369). 『청사고』의 서문도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고리처럼 이어져 모두 속국이 되었고, 영토는

규모를 이루고 변방은 튼튼하였으며, 군비는 충실하여 황제의

덕이 끝없이 뻗쳤다. 이것은 진·한 이후 없었던 일이다.”며

자부심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진

<그림 4> <평정준가르도> 중국국가박물관.

<황청직공도> 제1권에 건륭제가 직접 붙인 표제

‘라도식랑蘿圖式廊’은 ‘강역이 확장되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제1권은 외국뿐만 아니라 외국이었다가 새롭게 내국이 된

지역인 티베트와 신강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지역과 관련하여

‘평정하다(平定)’와 ‘귀복하다(歸誠, 向化, 投誠, 內屬)’라는 단어가

강조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나름의 내재적 논리를 지닌 제1권의 배치는 확장하는 제국의

시선이 관철되어 있습니다.

청나라는 내속외번(內屬外藩)의 비한족 민족들을 상대로

무조건적인 한화보다는 그들의 관습과 종교를 존중하는 회유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로스키 2010, 27-28). 황제의 현명하고

자애로운 통치가 강력한 매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청나라는

몽골을 완전히 제압하자, 티베트불교를 매개로 내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티베트는 청나라 서쪽

국경의 완충 지대로서 전략적 거점일 뿐만 아니라 내륙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불교세계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몽골-티베트 세계는 명의 지배가 미치지 않았던 장소로 청의

존재 또한 종교적 판도에서 이해되었습니다(Farquhar, 1978).

따라서 청에 대한 관념은 중화 문명과 가치가 아닌 대부분

티베트불교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유목군주에서 출발한 청

황제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자 전륜성왕으로 윤색되었습니다(김성수

2009, 61-63).

열하는 청나라가 만리장성 밖 몽골-티베트 세계의 지배자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제2의 수도로 부상하였습니다. 1703년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강희제가 피서산장을 건축한 이래 황제는 매년 여름 이곳을

방문하여 몽골-티베트 세계의 왕공들을 불러 모아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행사를 갖고 티베트불교의 라마들을 초대하여 종교

활동을 도왔습니다. 건륭제는 1780년 8월 13일 칠순을 맞아

황금으로 치장한 건물 ‘찰십륜포(札什倫布)’를 지었습니다. 이

화려한 건물은 티베트불교의 2인자인 판첸라마의 거처였습니다.

건륭제에게 칠순 만수절은 중국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치세에

이룩한 제국의 표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이 아닌 열하를

선택한데는 판첸라마의 방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판첸라마는 가마를 탄 채 황제의 침전까지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조공사절과 달리 황제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Hevia

1995, 46-47). 그는 황제의 정통성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열하에 왔던 것입니다(차혜원 2010, 332). 이에

건륭제는 서쪽 변방의 안보를 확보하고 티베트를 회유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 따라 파격적인 환대를 화답하였습니다.

앞선 1744년 건륭제는 옹정제의 잠저이자 건륭제 본인의

탄생지인 옹화궁(雍和宮)을 개축하였습니다. 모든 티베트불교

신도들과 라마들의 눈길을 북경으로 유인할 뿐만 아니라, 라싸

포탈라궁에 필적할 만한 종교 성지로 삼아 황권의 신성화를

기대하였습니다. 또한 북경에 머무는 주경라마를 임명하여

청나라 중심의 불교네트워크를 형성하였습니다(Sperling, 1998).

옹화궁은 몽골-티베트 세계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티베트불교 지도자들은 황제가 손수 북경에 대규모 사원을

세우고 불교 수행에 정진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습니다(안윤아, 조병학 2019, 124). 오랜 기간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불교는 실력 있는 세속의 권력자가

필요했고, 때로는 불교의 발전을 위해 청나라가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용했습니다. 내륙아시아 지역질서에 진입하고

싶었던 청나라의 요구가 접점을 찾은 것입니다.

사진

<그림 5>

<건륭문수보살도>

1758 북경고궁박물관

한편 건륭제는 몽골, 티베트, 청해, 신강에 ‘암반Amban’으로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알려진 고관을 파견하여 정교이도(政敎二道)를 상례화하고, 기존의

활불전승제도에 금병제첨제도를 도입하여 티베트를 견제하는

고도의 통제 전략으로 활용하였습니다(Oidtmann 2014). 또한 그는

지방 통치제도와 비슷하게 이리와 금천으로 라마를 파견하여

황제의 시야 아래 이 지역에 대한 주권적 지배를

강화하였습니다. 이는 몽골과 티베트의 지배층을 제약하여

이곳의 형세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일찍부터

티베트불교와 신앙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청 황실은 몽골

제국의 유산을 민족적 뿌리를 함께 융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Millward 2004, 96-98). 이를 위해 건륭제는 1773년

만문대장경 편찬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주족의 언어와 민족적

정체성이 사라지는 위기 속에서 만주족의 위상과 정체성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입니다(박서연 2015).

예치: 조선에 대한 파격적 대우의 이면

<황청직공도>는 청나라가 인식하고 있는 타자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서술로 해당 국가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조선은 제1권의 첫 번째에 등장합니다. 역대

직공도에서 백제나 조선 사신이 거의 마지막에 등장한 것과

정반대의 순서였습니다. <만국래조도>의 외국 사신의 배열순서는

<황청직공도>와 거의 일치하며, 각국 사신들과 번부의 구성과

모습도 유사하게 그려졌습니다. 여기서도 조선 사절단은 각국

행렬의 선두에 배치되어 문명국으로 대우받았습니다. 또한

직공도는 조선의 지리적 규모, 왕과 관리들의 관복제도,

여인들의 복식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 인물은

조선국 이관과 이부, 민인과 민인을 기록하였습니다. 다른

국가와 민족의 경우, 이민족 남자(夷人)와 여자(夷婦)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조선만 유일하게 백성 남자(民人)와 백성

여자(民婦)로 표기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청나라가 조선을

이적이 아닌 중화 문명국가의 백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진

<그림 6>

조선국 관리와 부인

<황청직공도>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이어서 직공도는 조선에 관하여 기자조선부터 고구려와

고려를 거쳐 조선 건국의 역사와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조공관계가 성립된 역사적 내력을 기술하며 중원 왕조와의

관계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조공은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참여를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진

<그림 7>

조선국 백성과 부인

<황청직공도>

속인도 문자를 알아 독서를 좋아하고 음식은 변두에

놓는다. 관리는 우아하며 위의를 갖추었고, 여인의

치마와 저고리에는 가장자리 장식을 더했으며, 관복은

모두 비단에 금은으로 수를 놓아 장식했다.

이는 조선을 문을 숭상하고 유교적 예를 갖춘 국가이자

문명의 기준에 부합하는 타자로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박원호 2007).

사진

<그림 8>

조선 사절단

1761 <만국래조도>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청사고』의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도 청과 조선의 관계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1627 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요청으로

화의를 맺고 형제지국이 되었지만, 조선은 청의 요구에 거의

응하지 않았고 청은 조선이 맹약을 깨뜨렸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조선의 여러 차례 청나라의 군대에 항거하였으나, 1637 년

병자호란 이후 청에 항복하고 인질을 보내어 영원한 신복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화이의 역전이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감내하며 청나라에 적대감을 가진 채 조공을 바치는

군신관계에 있었습니다.

강희 연간에 이르러 조선과 청은 조공체제를 한층

강화하였습니다. 청은 정기적으로 강하 지역에서 호시(互市)를

열어 무역을 관리하였고, 조선도 청나라의 국가 행사나 의식

때마다 사신을 보내 조하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조선은 북경과의

거리가 3천 여리나 되어 공사의 왕래가 어려우므로 이후 모든

사은과 장소는 성수·동지·원단 삼대절의 표와 동시에 가지고

오도록 하여 반드시 사신을 별도로 파견하지 않도록 하되, 이를

법령으로 삼으라.”고 유시하였습니다.

이는 건륭 연간에도 이어져 건륭 원년 만수절의 표문과

공물도 연공과 함께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건륭제가

선양에 방문했을 때, 그리고 칠순만수와 천수연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렸고, 건륭제는 어필 편액과

어제시를 하사하고 연회에 참석시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특히

건륭제는 정조가 “학문을 좋아하고 시에 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송판을 모방한 오경 전질과 필묵 등을 상으로”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청사고』는 주로 황제가 조선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던 이야기를 강조하면서도, 조선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강희] 45년(A.D.1706; 조선 숙종 32) 10월,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조선국왕은 우리 조정을 받들어 섬김에

성심성의를 다해 공경하며 정중하다 [...] 태종께서

조선을 평정하신 뒤 그 나라에서 주둔하였던 곳에 비를

세워 덕을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명나라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잘 섬겨 배반을 하였던

일이 일찍이 없었으니 실로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이므로 더욱 취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건륭] 23년(A.D.1758; 조선 영조 34) 4월 대학사가

상주하기를, “조선은 오랫동안 속국이 되어 예절과

언어·문자가 모두 아담하고 세련되었으니 설치된

통사관의 인원을 8명으로 고치기 바랍니다.”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20대의 젊은 왕 정조는 무조건적인 반청보다 호의적인

태도로 실리적 현실 외교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외교

노선의 배경에는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의 안정이 조선의

안민과 보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대외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허태구 2020). 실제 조선은 청나라에 매년 정기적인

사행뿐만 아니라 건륭제의 70세 생일과 즉위 50주년과 관련하여

자발적인 진하와 사은행을 특파하여 상대적으로 빈번한 조공을

하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와 달리 우대하였습니다(구범진 2014).

조선은 비단, 종이, 모시를 비롯한 인삼, 가죽 등 토산품이나

금, 은, 쌀을 세폐로 청나라에 진헌하였습니다(서호수 2017; 홍선이

2014). 정조의 전례 없는 성의와 건륭제의 파격적 우대 속에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청직공도> 곳곳에선 타자를

‘야만’으로 바라보는 ‘문명’의 시선이 드러납니다. 직공이라는

불평등한 관계 맺기를 통해 타자를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간주해온 중국의 일관된 정체성이었죠. 특히 주변은 문명의

중심인 ‘중화’라는 주체에 의해 ‘번’으로 타자화되었습니다.

‘문명對야만’의 프레임 속에 문명의 제어를 벗어난 힘과

길들이기 어려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멸시로 표출되었습니다.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야만의 상태에 있는 민족은 ‘생(生)’,

중국화되어 더 문명화된 민족은 ‘숙(熟)’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청의 조선에 대한 인식도 청나라에 복종한 타자이자

제어하기 쉬운 타자에 불과했습니다. 18세기 후반 안정기를 맞은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였고 별다른

문제없이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외교 사절들이

바치는 예물은 그들의 종속적 지위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조공품으로 개념화되었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천하질서에 순응하는 조선의 모범적인 태도를

칭찬하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황제의 어필이나 어제시,

궁정간해 고서와 필묵을 하사하였습니다. 특기할 만한 물품은

1789년 자광각의 세초연에 참가한 이성원 일행에게 하사한

<평정양금천도>와 <평정서역전도>가 있습니다. 이는 청의

강력한 힘과 서양의 기술을 결합한 선진 문화에 대한 과시이자,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세력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서윤정 2019, 142-143).

한편 청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선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완전히 성격이 다른 두

갈래의 손님을 초청하고, 주자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신들에게 판첸라마 접견을 명하였습니다(구범진 2013). 건륭제는

판첸라마에게 티베트불교의 영향권이 아닌 천하질서의 또

다른 영역을 소개하였습니다. 북경에 찾아온 외국 사신과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모아 대일통세계를

확장시키고 복합 천하질서를 한 눈에 보여주고 싶었던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이루어진 판첸라마와의 어색한 만남과

삼궤구고의 예법 요구는 조선 사절단에게 굴욕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대의 대상이 명에서 청으로 전환되었지만, 양국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예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권선홍

2014, 159-160). 무엇보다 중화문명을 보편으로 간주하는

대명의리(對明義理)를 향한 당대 조선인의 이념이 여전히

굳건했습니다. 이 가운데 연암은 조공-책봉 관계의

예치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요소들이 복합 천하질서 안에

운용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황제는

법사(판첸라마)를 모셔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것이 청나라가 주변나라는

제어하는 책략”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하질서의 바깥 서양

<황청직공도>에 담긴 색다른 존재는 ‘서양’입니다. 제1권은

중국 역대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은 국가들뿐만 아니라, 새로이

중국의 지리 지식에 포함된 서양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18세기는 제국의 주변 지역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유럽 같은

중국의 천하질서의 외부와의 접촉이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의 세계 지도 제작과 서양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도 직공도 제작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존재에 대한 단순 인지와, 그것의 수용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중국 스스로 서양을 알려는 동기 없이 서양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에 어떠한 균열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모든 서양 국가들은 ‘이인(夷人)’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제국의

시선에서 서양은 중화의 문명에 미치지 못하는 야만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양에 대한 경계심도 드러납니다.

분명히 그들은 기존 이적과는 다른 ‘이인(異人)’이었습니다.

서양은 중화 문명과는 다른 독자적 문명을 소유한 부강한

존재였습니다. 서양 사절단의 선물 중 망원경과 같은 최신

과학기계와 무기가 건륭제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과달루피 2004).

<황청직공도>는 그들이 지닌 병탄과 겸병, 큰 배와 대포를

언급하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횡포하며 무기에 정통하다 또는

네덜란드가 대만을 침략했다는 등 무력행사에 관련된 내용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양은 제국의 강역에서 해상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독자적으로 속국을 거느린 부강한 존재였습니다.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사진

<그림 9> 영길리국(영국) <황청직공도>

하란(네덜란드)은 홍모번이라고도 하는데, 위치는

불랑기(포르투갈)와 가깝다. 명 만력 연간에 큰 배를 몰아

향산 오문(마카오)에 정박하고서 공시를 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자, 복건으로 들어와 팽호를 점거하고 대만을

침략하였다. 청 순치 10 년(1653)에 비로소 광동을 통하여

조공하였다. 강희 초에 청군을 도와 대만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그 이후 조공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조공

노선을 바꿔 복건을 통하여 조공하도록 했다. 하란 영토로

가라파(인도네시아 자카르타)가 있는데 남양(동남아 일대)의

도회지이다. (하란의) 속국으로 또 서(스웨덴)와

영길리(영국)라는 나라가 있다.

실제 서양 국가와 청 제국과 관계 맺는 방식은 통시(通市)

또는 호시(互市)로 ‘조공’이 아닌 ‘무역’이었습니다. 무역은 국가

간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 조공과 같이 황제가

은혜를 베푸는 시혜에 불과했습니다(김상조 2004, 363-364). 외국

상인은 광동과 마카오 등지에서 ‘광동 13행’이라고 하는

공행상인들과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청나라 당국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위한

문화적 측면과 교역 확대를 위한 제한된 경제교류만이 허용될

뿐이었습니다(Fairbank 1969). 이처럼 건륭제는 조공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서양을 인식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유지하였습니다. <황청직공도>의 대서양의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은 조공을 하러 왔다고 기록하였으며, 사실 확인 없이

영국과 스웨덴이 네덜란드의 속국이라는 잘못된 정보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결국 직공도는 서양의 부상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사진

<그림 10> James Gillray 1792

The reception of the diplomatique & his suite, at the court of Pekin

The British Museum

<황청직공도>에서 감지된 서양 세력의 확장은 직공도가

제작된 지 30여 년이 지나면서 점차 본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1793년 건륭제의 83세 만수절을 즈음해 각국에서 축하 사절이

도착했고, 이 가운데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도

있었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물결을 타고 이미 동아시아로

진출한 유럽세력의 진정한 목적은 무역시장의 확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외 무역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고 서양 물품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국

정부와 동인도회사는 매카트니 사절단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조지 3세는 친필로 장문의 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의 번영을 칭찬하며 주권 평등의 관계에서 우호적인 교류를

맺는 위대한 문명국들의 형제애를 강조하였습니다. 실제 주권

평등 관계를 확립하고 국제무역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첫째,

양국 간의 무역에 대한 규제 완화. 둘째, 북경에 영국 대사

상주. 셋째, 영국 상인들의 안전한 거주지역 요청. 넷째,

광저우의 관세인하 등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습니다.

반면 청나라의 입장에서 천하에는 단 하나의 천자만

존재하며, 그 천자를 알현하러 오는 모든 사절단을 조공을

바치기 위한 사신이었습니다(최소자 2002, 108). 외국은 조공을

통해서만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이 요구하는 외교적 의례를 둘러싼 갈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Peyrefitte 1993; Hevia 1995). 흥미로운

점은 해당 사건을 중국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차마 조공 사절단이 천자에게 불복종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수는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건륭제가 조지 3세에게 보낸 두 개의 서한은 청나라의 제국

주권과 영국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줍니다.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황청직공도>에 담긴 서양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권 평등은 천하질서와는 양립 불가능한 이단아였습니다. 그는

영국을 먼 황야에 위치해 있고 많은 바다로 분리되어 4대양의

모든 것을 통치하는 천조의 정책과 사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며 불쾌감을 표시합니다.

공물을 바치는 사절을 어떻게 흠차(钦差)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들의 통사가 천제국에서 공식

직함을 모방하여 사신을 격상시키려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매한 짓은 용서할 수 있지만, 우리 정부

관리들이 무지와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무감각함 때문에

이 특사를 흠차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입니다. 따라서 정루이는 영국 사절과 그의

부관 모두 정해진 관용에 따라 공시(贡使)로 표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Wang 2020, 325).

어설프게 번역된 편지들은 건륭제가 원하는 겸손한 복종과

경건한 경외심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영국의

요구사항도 멀리서 온 이방인을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모든

관용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중국이야말로 하늘

아래 모든 만물을 풍족하게 소유하고 있는 반면 유럽의 물건은

무용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중화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서양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길 거부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목표는 단 하나, 즉 완벽한 통치를

유지하고 국가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고

값비싼 물건에 관심이 없습니다 [...] 우리 왕조의 위엄은

천하만국에 스며들었고 만국의 왕들은 육지와 바다로

값비싼 조공을 바쳤습니다. 대사가 직접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하거나

기발한 물건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당신 나라의

제조품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건륭제는 무역을 마카오로 한정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서양에 있는 중국의

다른 많은 교역 국가들로부터 유사한 요청이 쏟아질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영국의 개인적인 요구를 맞추기 위해 한 세기

이상 확립된 모든 절차와 규정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청 제국이 생산하는 차, 비단, 도자기는 유럽 국가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도리어 무역은 천자가

멀리 있는 이에게 주는 은혜와 보살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무수한 인종을 휘젓고 있는 우리 왕조는 모든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사람들에게 똑같은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국은 광저우에서 무역을 하는 유일한 국가가 아닙니다.

나의 수도는 세계의 모든 지역이 회전하는 중심입니다.

그곳의 법령은 대부분 엄숙하고 법은 극도로 엄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매카트니 사절단이 떠나자 건륭제는

영국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위협을

대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연안 지방 당국에 서한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영국인들에게 군사 행동에 대한 구실을

제공하지 않도록 지시했습니다(Harrison 2017, 684-685).

<황청직공도>에서 엿볼 수 있는 서양 세력의 확장이 머지않은

훗날 건륭제의 우려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교도였습니다. 중국은 황제가 첫 번째

섬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천주교의 신봉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건륭제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화가들을 황궁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국제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은혜는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건륭제의

답장에도 종교 문제에 관한 경계심이 느껴집니다. 청의 전통

관습과 법도를 따르지도 않는 종교의 유입이 그와 그의

선조들이 영광스럽게 이루어 낸 것들을 약화시키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조국이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

의 종교와 똑같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황제들과

현자들은 중국에 도덕 체계를 부여하고 규범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예로부터 나의 수많은 신하들이

종교적으로 지켜온 것입니다. 이단적인 교리에 대한

갈망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내 수도에 있는 유럽

선교사들도 중국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정된 거주지의 범위 내에서 제한되며

그들의 종교를 전파할 수 없습니다. 중국인과 야만인의

구별은 매우 엄격합니다. 야만인에게 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라는 대사의 요청은 완전히

비합리적입니다.

나가며: 중국 신형국제관계의 미래

건륭제는 수많은 자명종 컬렉션 가운데 1770년 영국이

건륭제에게 선물한 자명종을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유럽인의

차림새를 한 정자 안의 남자는 붓글씨로 ‘팔방향화(八方向化),

구토래왕(九土來王)’을 정성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이는 “팔방에서

임금의 어진 정치에 감화하여 구주의 백성들이 왕에게로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온다”는 뜻입니다. 이 여덟 글자는 건륭제가 평생토록 이루고

싶었던 꿈이었습니다(이은상 2021, 5-6).

<황청직공도>는 객관적인 천하질서의 물상적 배분 상태를

축소시킴으로써 건륭제가 세계를 바라보는 꿈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실제 만주족 왕조는 중국 전통 자원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한화되었지만, 여기에 구속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예치, 회유, 기미, 정벌을 복합적으로 운용하였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방대한 판도를 통치하기 위해 황제는 복합

천하질서 무대 위의 하나의 거대한 주인공으로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다면적 인물로

변신하였습니다. 제국의 팽창도 단순히 영토를 정복하는 것을

넘어 중심과 주변이 유연하게 상호작용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이

수반되었습니다.

청나라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 이룩한 몽골-티베트 세계에선

회유를 통한 새로운 종교적 확장으로 천하질서의 주인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했습니다. 티베트불교는 청나라가 내륙아시아를

통합하는데 필요한 연결점이었습니다. 특히 열하는 몽골-티베트

세계의 수도로서 정복과 회유의 연기를 함께 수행하는

장소였습니다. 나아가 건륭제는 티베트불교를 하나의 정치

제도로서 중앙집권화하여 몽골-티베트 세계를 견제하고 황제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다른 주변국과 달리 문명국으로

인정하였던 이유는 가장 충실하게 사대자소 질서를 따르고

중국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조는 청에

대한 실리 외교를 시행하였고, 유례 없는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긍정적 시선에는 이렇듯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있었습니다. 조선은 천하질서의 전통적

일원으로 예치로서 대우받았지만, 때로는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는 손쉬운 타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역시

청나라의 매력에 사로잡혔다기보다 청나라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종종 말을 듣지 않는 금쪽이처럼 행동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청나라에게 서양은 부국강병의 새로운 문명 표준을

가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적에 불과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다른

문명을 수용할 자세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스스로의

잣대를 세워 자기 기준에서 굴절된 인식으로 서양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서양에 대한 소극적인 무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건륭제는 역대 그 어떤 황제보다도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도구적 차원에서 활용했던 인물이었으나, 서양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청직공도>에서 서양의 비중이 두드러진 이유 역시

천하제일의 제국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건륭제가 서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황청직공도> 곳곳에서 서양에 대한 경계심과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침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사절단과의 갈등은 두 제국 사이의 충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Liu 2006). 서양은 청 제국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존재라기보다 기존 오랑캐와는 분명히 다른 제국이 경계해야 할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세계질서 비전에 상대를

복종시키기 위한 경쟁 속에 주권 국가들 사이의 평등에 대한

영국의 믿음과 중국의 위계적 사대자소 질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서쪽으로 준가르부터 북쪽으로 티베트, 그리고 동쪽으로

조선까지 이르는 드넓은 지평의 제국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륭제 시기가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의 시선에는 변화의 파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오판과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게 하는 오만이 있었습니다. 건륭제의

복합 천하질서 역시 수천 년을 이어온 천하질서의 무대 위에

매우 자의적으로 건축된 질서였습니다. 청나라의 대외 인식은

복합질서로 가는 길목에 도달했지만, 어떠한 새로운 존재라

할지라도 흡수해버릴 만큼 강력한 천하질서의 틀 속에 고여

있었습니다.

특히 서구의 부국강병이 가져올 위험을 경계하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천하질서의 또 다른 일원으로 길들이고자

하였습니다. 천자의 권좌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타자는

복잡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인식을

중층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건륭제가

꿈꾸는 천하는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고 냉혹한

현실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양한 주인공들을

천하질서에 복합하는 것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이들을 어떻게

품어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는데 있어 시대적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 역사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제의 사망 뒤 불과

41년 만에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근대 국제질서와의 뼈아픈

충돌은 중국에게 주권 평등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화평굴기를 강조하던 중국은 이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과 2050 ‘아름다운 사회주의

건설’을 거침없이 표방하고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중국은 과거의

영광으로 사라진 것만 같았던 만국내조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편전쟁 이후의 능욕을 언급하며 어떤 나라도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중국의 ‘신형국제관계’는 건륭제의 복합

천하질서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건륭제는 준가르 제국을

‘정복’했고, 티베트에 대해서는 ‘회유’책을 통해 매력공세를

1. 황청직공도: 청의 마지막 복합 천하질서_중국국가박물관

펼치는 동시에 한국과는 전형적인 조공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했습니다. 반면 새로운 문명 표준을 내세우며 근대

국제질서를 짜고 있는 서양 강대국과의 만남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신형대국관계에는 “분쟁 혹은 전쟁

방지(不冲突, 不对抗)”, “상호존중(相互尊重)”, “상호 윈-윈을 위한

협력(合作共赢)”에 따라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을 회피하고

경쟁과 협력의 경제관계에 주력합니다. 신형주변외교는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의 가치를 기반으로 3대 핵심이익을 쉽사리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의

국제정치와 함께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이의 국제정치,

‘인류운명공동체’와 같은 의의 국제정치를 강조함으로써 중국의

부상을 평화롭게 설득하기 위한 매력 공세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은 21세기 복합력의 한계 때문에 미국과

세계질서를 공동으로 주도해 나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이 아시아-태평양 신질서 건축의 중심

역할을 하려면 성장과 복지의 조화, 21세기형 정치체제 구축,

지역화와 지구화 추진의 딜레마를 먼저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시진핑이 변화의 파도를 주도적으로 읽어내고 강력한

매력을 키워 건륭제의 복합 천하질서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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