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 한일교류 박물관
복합의 눈으로 재구성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최다인 ·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서로 근접한 위치에 자리한 두 나라인 한국과 일본은 예전부터 교류가 불가피한 나라로써, 그 관계는 당연히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역사를 되돌아가 현재의 한일관계의 모습 이전 과거의 한일관계는 어떠한 형상을 띄었는지 18 세기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8 세기 한일관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는 한일관계에 대한 동주 이용희의 접근방식을 사용하여 시대구분을 하고자 한다. 동주 이용희는 한일관계를 심리학적인 면에서 접근하였는데, 한일관계의 문헌과 기록을 서로에 대한‘관심’으로 보고, 그 양에 따라 두 나라간의‘태도’ 즉 ‘심상’(image) 을 추출하는 방식을 통해 시대를 구분하였다 (이용희 1970, 292-293). 즉 기록이 많을 수록 서로에 대한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관심도가 높았다는 뜻이고 그 태도와 심상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일관계를 다섯 시기로 나누는데 제 1 기는 상고로부터 기원후 9 세기 말, 제 2 기는 10 세기로부터 여말까지, 제 3 세기는 조선왕조 시대, 제 4 기는 식민지 시대, 그리고 제 5 기는 해방 후 오늘날까지 이르는 때 이다. 그 중 3 기는 전,중,후의 3 개로 나누어 보는데, 전기는 임란 전, 중기는 병자수호조약 때까지, 후기는 일제의 강점 때까지로 끊었다. 1, 2 기 때는 한국 측의 자료의 양으로 봤을 때 일본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여 당시 대일심상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반대로 일본은 그 기록의 양이 방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3 기 중기 때에 들어서면 두 나라 다 서로에 대한 자료가 풍부해지는데, 이때에 비로소 양 국가들 간의 관심이 비등해지며 두 나라 다 서로에 관해 불안정한 심상을 띄기 시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멸시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시에 서로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때인 3 기 중기인 18 세기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통신사 조엄의 해사일기를 통해 당시 대일심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통신사 수행 중 두 나라간 심각한 국교 문제를 일으켰던 최천종 살해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한 조엄의 기록을 봄으로써 당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심상을 넘어 외교적 관계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노력한 그의 노련한 대처를 볼 것이다. 끝으로는 당시 18 세기 통신사와 지식인들의 대일심상을 살펴보고, 조엄은 어떠한 선상 위에 놓여있는지를 볼 것이다.
기존 선행연구
『해사일기』에 대한 기존 연구는 많지 않으며, 주로 다른 해행총재의 기록들과 한 비교 연구가 많다. 특히 최천종 살해 사건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은데,최천종 살해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구는 사건을 통해 통신사가 대마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과, 이 사건을 보다 문화적인 접근에서 다룬 선행 연구가 있다 (민덕기 2004, 75-110; 김문길 2007, 65-77).
그 중 조선통신사 연구 제 20 호 『해사일기』와 「일동장유가」 비교 연구(홍혜정 2015, 67-108)를 보면 해사일기 속 조엄은 (1) 책임자로서의 조심스러운 모습, (2) 통신사 제도 전반에 대한 인식, (3) 애민정신 (4) 예식 • 절차에 대한 관찰과 기술을 보이는데, 먼저는 책임자로서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 대한 태도에 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사행의 임무를 맡기 전 동래 부사와 경상도 감사를 지내며 일본과의 외교와 통상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실무자였기에, 『해사일기』에서는 조엄이 일본에 관해 전반적인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세번째로 일본의 기술들과 작물을 보면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점도 보이는데, 일본의 수차, 물레방아 등의 기술, 고구마를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여올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지에 대한 점을 통해 그의 애민정신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사일기』에서 조엄은 예식과 절차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 현지에서 열린 모든 행사에 반드시 참여하고, 그 행사의 예법과 절차, 제도를 자세히 관찰한 대목에서 드러난다.
조선의 소중화의식
본격적으로 조엄의 『해사일기』를 보기에 앞서 조선이 어떠한 사상을 바탕으로 대외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의 중심개념은 중화주의적인 화이관 (華夷觀) 이였는데, 이 화(華)의 기준이 유교문화의 수용과 발달 여부를 결정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화이관을 바탕으로 한 국제질서인 사대교린 (事大交隣)을 바탕으로 명(明) 에 대해서는 사대, 주변국인 여진,일본,유구,동남아제국에 대해서는 교린으로써 평화적 대외관계를 구축하였다. 조선은 비록 화이관과 조공 체제에서는 외에 속하지만, 유교문화 면에서는 중국과 동등하다고 자부하며 문화의 정체성을 명과 일체화 및 중심화를 시키며 주변 국가인 일본.여진.유구를 이적으로 취급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소중화의식(朝鮮小中華意識)이며 조선의 대외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우봉, 2006).
17 세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더욱 극단적인 형태를 띄게 되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발발과 명에서 청으로의 왕조 교체는 기존의 존재하던 화이관과 국제질서를 무너트렸을 뿐만 아니라 명이 멸망했음에 따라 조선만이 유일한 화(華)의 계승자로 존재한다는 생각에 소중화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사상은 17 세기 중반 이후 일반화 되어 18 세기 중반까지 한 세기동안 지속되었다.
조선 초기 때도 이 소중화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은 일본을 왜 (倭)로 인식하며 화이관적 유교문화의 낙후성과 외교의례에 관한 무지와 무례를 토대로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의 무력적 위세를 확인한 이후에는 이것이 열등감과 더불어 더욱 심화된 일본이적관(日本 夷 狄 觀 )과 일본소국관(日本 小 國 觀 )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소중화의식, 그리고 일본에 대한 멸시적인 일본이적관이 조선의 3 기 중기를 대표한 주류적 사상이었으며, 이러한 배경 속 1763 년 조엄의 계미통신사가 왕환하였다는 것이다.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그림 1. 조선통신사 행렬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엄의 『해사일기』를 통한 대일심상
미워할 수만은 없는 원수, 일본
조엄(趙曮)은 1752 년(영조 28)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맡았던 자로서 1757 년 (영조 33) 동래부사, 1758 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1763 년 조선통신사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정은 2020, 230). 그는 당시 500 인에 가까운 일행 (국역 사행록 해행총재 10 2008,42) 이 포함된 통신사의 상사로서 이인배, 김상익과 함께 세 사신으로서 원가치 (源家治)가 새로 일본 관백이 된 것을 축하하며 국서를 전하기 위해 영조 39 년 (1763 년)에 떠났다.
조엄의 글에서 크게는 두 가지의 심상을 파악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일본을 이( 夷 ), 또는 왜인이라고 인식하며 멸시하는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이고, 두 번째는, 조선은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도 (善導)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優越感)이다.
글 속에서는 스스럼없이 일본인들을 ‘오랑캐’(위의 책, 73,77,82) 라며 일본의 문화를 야만 (野蠻)으로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인들의 법을 무식하고 해괴스럽다고 하면서 그 풍속(64,189),법제(124),의복(137),음식들이 모두 불교에서 나왔으니‘어떻게 이적( 夷 狄 ), 금수( 禽 獸 )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207) 하며 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문화와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정( 人 情 )을 보이는 면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들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보인다. 그는 비록 ‘왜인들이 지껄이는 언어는 한 가지도 알아들을 수 없으나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와 남녀가 급히 웃는 소리는 우리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으니’라고 하며 다 같이 타고난 천성을 가졌으면서도,‘다만 교양이 마땅함을 잃어 문명과 야만의 구별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64). 일본인들도 조선인들과 같은 윤리를 지키는 천성을 가졌으니,‘윤리와 강상으로 가르치고, 예와 의로 인도한다면’그 천성의 타고난 것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왜에게 조선이 주는 재산에 관해 얘기할 때에는, 우리가 주는 것에 10 분의 1 이라고 비교하며‘잊어버리기 어려운 이들 원수를 먹이는 것이… 참으로 안 될 일이다,’라며 ‘주부자( 朱 夫 子 주자) 같은 분도 통분함을 참고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원통함을 삼키는 마음으로 어찌할 수 없이 오랑캐와 화친한 최하의 방책을 쓴 것이지, 어찌 즐겨서 하였겠는가?’(76) 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게 당한 수모를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동시에 더 우위에 있는 조선이 너그럽게 이해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무조건적으로 왜인의 간교함을 말하는 일행 상하를 꾸짖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의 떳떳한 마음은 다 같이 하늘에서 타고났으니, 거짓이
습속으로 된 중에라도 어찌 진실한 자가 없겠는가? 이제 만약
사람마다 간사하다 하고 일마다 거짓이라고 의심한다면 저들도
사람인데,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다른 나라의 사례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갓 일시 전해들을 것에 의하여 문득 의심을
품는다면 또한 들은 바가 그르지 않고, 본 바가 어긋남이 있지 않음을
어찌 알겠는가?”(111-112).
무조건적으로 일본인들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난민 (亂民)이 양민으로 변화되기를 다른 나라의 모든 풍속에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라며,‘말이 충성스럽고 미더우면 오랑캐 지방에서도 다닐 수 있다 (충신만맥 忠信蠻貊)라는 성인의 훈계를 기억해야한다고 말한다.
조엄은 오히려 왜인들을 대할 때 더 조심스럽게 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인을 접대하는 도리는 본디 난처스러운 꼬투리가 많이 있으니, 더욱 깊이 헤아리고 두루 생각한 뒤에야 혼단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만일 사세를 알지 못하고 위엄과 공갈로 한다면 성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니, 이는 병가에서 이른바, ‘남을 알고 자기를 안다.’는 어려움이다”(125) 라고 기록한 것은 마도의 태수가 오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고, 굳이 강호 江戶(에도)에 가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너그럽게 대하였다는 것과 같이 기록된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대목들을 보았을 때 조엄은 일본이적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성리학에 바탕한 배움과 이성 (理性)을 가지고 일본인들을 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배경에는 조선이 더 우월하다는 조선소중화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천종 살인사건의 대처
조엄이 이끄는 계미통신사 수행 중 갑신년 4 월 7 일, 통신사 중 한 명으로 행중 집사였던 최천종이 살해 당하였다. 그는 죽기 전 범행을 저지른 자는 분명히 왜인이였다고 증언하였으며, 방 안에 있는 범행에 쓰인 흉기들도 다 왜인의 물건이었다 (283-284). 이 사건에 대해 조엄은 “상사가 되어 밤낮으로 마음을 쓰면서 고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위엄이 왜를 복종시키기에 부족하고 신용이 남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한 탓으로, 통신사가 있어 온 이래 일찍이 없었던 변괴를 만나 부끄럽고도 분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284).조엄에 따르면 최천종은 군무에 밝고 왜인들까지도 순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였으며, 그가 죽자 놀라고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어난 살인 사건은 국가 간의 중대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조엄이 이 사건을 대처하는 자세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사건을 춘추시대의 두 여자의 뽕 다툼 (두 여자의 뽕 다툼: 춘추시대 초의 변방 처녀와 오의 변방 처녀가 국경에 있는 뽕나무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싸우다 결국 두 나라 싸움으로 커졌다는 고사, 291). 으로 비유하며 이 사건을 통해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은 크게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범인이 대마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의 태수를 오히려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듯 보이는데, 이것은 조선의 전체적인 국익으로 봤을 때 대마도의 태수의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며, 이것은 조선과 일본 교린의 모든 일이 다 마도 태수로 인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해치는 것은 ‘변방을 위한 원대한 계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313).
『해사일기』에는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한일관계를 구축해나가려는 조엄의 노력이 보인다. 일본에 대한 심상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도인에게는, “마도인은 배은망덕하다고 할 수 있다. 천리가 있으니, 반드시 그들의 종묘사직을 뒤엎을 것이다 (289),” 라고 까지 말하지만, 동시에 그 심상이 한일 외교관계에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조엄이 같이 온 통신사 수행원들에게 당부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는 감정의 배제성을 강조하는데, “타국에서의 사정이 있고 피아의 형세가 다르니, 요컨대 오랫도록 버티고 동요하지 않는 것으로 주를 삼아야 했다” 라고 하며 중관이나 하관 무리가 분통해하고 사람을 욕 해봤자 ‘일 처리에는 무익하며, 트집거리가 생길 우려’가 있어 그런 행위들을 금하였다고 기록했다 (293). 조사가 계속 늦춰지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하고 또 다시 일본에 대한 멸시를 나타내면서도, 겁에 질리거나 놀라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들을 꾸짖으며 범인을 찾아 법으로 처벌하기 전까지는 배에 절대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290).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조정에서 특별 전교를 내려 살해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신단에게 접대는 관례대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조엄은 감사함을 표현하면서도, 조정의 처벌과 그 죄명이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공포되어 일본이 조정의 법의 엄숙함을 느끼도록 대처했어야 한다며, 사신들이 죄를 받았다는 것을 왜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지시한 것을 볼 수 있다 (392). 이런 면에서 조엄은 일본에게 조선의 그 위엄과 법을 보여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던 것을 볼 수 있다.
17 세기때 굳혀진 대일심상인 일본이적관(日本 夷 狄 觀 )과 조선소중화의식에서 비롯된 우월감(優越感)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 했지만, 조엄은 한일외교 관계를 보다 실무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최천종 살해사건을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 볼 수 있다.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18 세기 조선시대 지식층의 일본심상
18 세기 통신사
17 세기 조선의 통신사는 일본으로의 왕환을 통해 일본의 번영과 무역, 즉 경제적 수준이 일본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일본의 문물 제도를 조선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설물이나 가옥의 치장들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였다 (김문식 2009, 191).
18 세기 중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발달 된 문물 제도를 수용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1747 년 (영조 23) 영조가 통신사에 포함된 일본의 산천과 도로, 무예의 장단, 인식과 습속 (풍속)을 잘 관찰하고 오도록 명령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1764 년 통신사에 파견된 조엄은 실제로 주의 깊게 일본의 문물을 관찰하고, 또 실제로 적용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대마도에서 대마도 지도와 일본 지도를 구입하고, 요도우라에서 수차를 보고 군관과 화사를 시켜 그 제도와 모양을 자세히 살폈다가 조선에 돌아가 논에 물 댈 때 사용하게 했으며, 사도가와의 주교(배다리)제도를 조선의 서남해 제언 댐)에 응용하면 크게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다 (위의 책, 192).
그러나 공식적으로 파견된 통신사가 조엄의 1764 년 계미통신사가 마지막이였고, 그 이후로는 두 나라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끊기며 더 이상 일본의 기술을 수용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은 양국에게 외교적인 행위보다는 정치적인 효과가 더 컸는데, 조선 정부에게는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또 막부 정권에게는 통신사의 방문 행사를 통해 관백의 권위를 더 높이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정의 지출이 많은 소모성 행사였기에 계미통신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적인 왕환은 없었고, 그에 따라 직접적인 교류도 없어 문물을 관찰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없어졌다 (위의 책,193-194).
그러나 통신사행원들이 일본에 다녀와서 쓴 견문, 일본사행록은, 일본의 사회상과 문화를 조선에 알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고, 이것은 결국 18 세기 실학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 세기 실학파
18 세기 실학파에는 크게 두 학파가 존재하였는데, 하나는 노론계 북학파이고, 하나는 남인계 실학파이다. 노론계 북학파는 청이적관을 벗어나 청의 문물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남인계 실학파는 이익의 명나라에 대한 비판 (숭명반청의 반대),기존의 북벌론의 비현실성, 청이적관을 거세게 비판하며 현실에 맞는 대외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또 서학 연구를 주도하는데, 이것을 통해 17 세기에 뿌리 깊이 존재하던 전통적 화이관과 소중화 인식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우봉 2006,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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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는 주로 청 연구에 집중하였기에 일본에 대해서는 남인계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실학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나 일본을 실용적으로 바라보려는 관점은 당시 박제가의 북학의 (北學 議 )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의 일본이적관을 비판하며 이용후생적인 (백성들을 위한) 관점에서 일본의 제도나 기술 등에 주목하였다. 특히 일본의 해외무역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며, 일본이 다른 제국들과 활발한 통상을 하듯이 조선도 이와 같이 중국과의 교역을 더욱 확대하고, 더 나아가 해외통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책, 63).
이익의 주도하에 있던 남인계 실학파는 이익이 조선이 유일한 화(華)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서학연구를 통해 중국중심의 천하사상을 부정하고 모든 나라의 독자성을 인정하였으며, 청과 서양에 대한 이적관을 극복하며 일본에 대해서도 재인식 할 것을 말하였다 (위의 책, 51). 17 세기 지식인들의 조선소중화의식( 朝 鮮 小 中 華 意 識 )을 비판하며 보다 현실적인 대외관계를 제시하는 이익을 따라 정약용도 보다 개방적인 화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문화 중심의 화이론’을 제시하며 다른 국가들도 중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러하여 일본도 중화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였다 (김문식 2009, 353-354). 정약용은 일본이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용후생의 발전과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그렇기에 조선도 일본의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사일기 중 신유한의 해유록을 읽고 일본 기물의 정교함, 군대 조련법, 선박 제도 등을 제대로 관찰해오지 못 한 것을 개탄하며 조선도 이러한 기술들을 본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1811-1812 년에 홍경래와 우군칙 등이 지도 하에 서북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을 경험하며 조선의 군대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 이런 상태에서는 외국 나라들과 대치하게 되는 상황 때에 위험할 것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조선의 현실을 깨닫고 일본이나 청의 발달된 문물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시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 제안하였다 (위의 책, 362-363).
이와 같이 18 세기의 실학파 지식인들은 17 세기와 조선통신사의 대일심상보다 한층 더 개방적인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보았으며,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고 그 제도와 기술들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가며
17 세기 조선의 중심 개념은 청과 일본을 멸시하고 명의 화이관을 계승한 조선소중화의식(朝鮮小中華意識)이 뿌리 깊게 박힌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 일본을 오랑캐 취급하는 일본이적관(日本 夷 狄 觀 )과 일본소국관(日本 小 國 觀 )으로 나타났다.
『해사일기』속 18 세기 조엄의 글을 읽으면 일본에 대한 그의 8. 18 세기 한국의 대일심상: 애증의 일본_한일교류 박물관 심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17 세기 조선소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이고, 과 일본을 가르치고자 하는 ( 善 導 )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 優 越 感 )이다. 그는 17 세기의 조선을 중심하는 화이관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 했으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 이것은 특히 최천종 살해사건을 대처하는 그의 방식에서 뚜렷이 보이는데, 일본을 교활한 왜놈이라고 칭하면서도, 원만한 한일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또한 일본 문물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이용후생을 위해서라도 발달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조선에도 적용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일본을 이적시하면서도 일본의 막강한 무력과 부를 인정해 우수한 것을 수용하겠다라는 의지를 비추었다 (김문식 2009, 195). 18 세기 실학파와 같이 일본을 재인식 하려고 시도는 하지 않았으나, 적용할 수 있는 일본문물의 장점은 배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엄은 17 세기 조선의 조선소중화의식(朝鮮小中華意 識 )과 18 세기 실학파의 개방적인 화이론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18 세기 실학파와 같이 일본이적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으나, 17 세기 지식인들보다는 실용적인 면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을 오랑캐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무조건적으로 원수시 할 수 없는 그 마음은, 애증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참고문헌 《국역 사행록 해행총재》10. 2008. 민족문화추진회.
김문식.《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새문사, 2009. 민덕기. "최천종 살해사건으로 본 19 세기 중반 通信使의 대마도
인식." 한일관계사연구21(2004): 75-110.
이용희. "한일관계의 정신사적 문제: 변경문화 의식의 갈등에
대하여." 《정치사상과 한국민족주의》. 연암서가, 1970. 이정은. "범어사 간행 『영사단지』의 성격과 조엄" 대각사상
no.33(2020) : 227-253.doi:
10.35768/taegak.2020..33.007
임형택.《18 세기 한일문화교류의 양상》. 태학사, 2007. 하우봉.《조선시대 한국인의 일본 인식》. 혜안, 2006. 홍혜정.《해사일기》와 《일동장유가》 비교 연구.
조선통신사연구 20 (2015):6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