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 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복합의 눈으로 재구성한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한이임 · 성균관대학교
들어가며
‘한간’으로서의 이홍장
이홍장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대신으로, 청일전쟁이란 단일한 사건에서는 조선을 두고 일본과 청일전쟁을 벌이고 청일전쟁 강화회담에 파견되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중국의 군사가이자 외교가이다. 군사가로서 그의 지위에 대해, 양계초는 청일전쟁 대패에서 이홍장의 권위의 실추를 확인하였다는 평을 남겼다. 이러한 평가는 청나라의 청일전쟁 대패라는 결과에 비추어 보았을 때 충분히 근거 있는 평가로서 여겨진다. (양계초 2013, 189) 한편 외교가로서 그의 입지는 후세에 논쟁이 분분한 주제이나, 그의 사후 중국에서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한간’이란 부정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한간(漢奸)이란 중국 청나라 때에 한인으로서 만주인과 내통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적과 내통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홍장에게는 사후 매국노라는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는데 이러한 평가에는 그가 청나라 대신으로서 체결한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 영토 할양과 배상금 문제들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한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는 중국이 개혁, 개방을 거침에 따라 이홍장의 양무운동 정신이 재조명받으며 그가 사실은 청나라의 현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한 애국자라는 평가를 통해 일부 상쇄되었다. (신동준 2017, 350) 그러나 이러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청일전쟁 그리고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하나의 사건에서조차 외교가로서 그의 입지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양계초는 외교가로서 이홍장의 실책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홍장의 시대를 사실상 중국이 세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시기이자 대외교섭에서 가장 힘든 시기로 평가하며, 특히 청일전쟁 관련해서는 일본은 중국의 이홍장 하나와 전쟁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양계초 2013, 185-189)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의 전권 대신으로서 이홍장의 협상 과정과 전략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과정을 담은 verbal discussions과 이홍장에게 맞서는 일본 측 대신인 이토총리와 무쓰 무네미쓰의 언동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조약 내용에 대한 이홍장의 선택재량과 외교전략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에 앞서, 체결 당시 청일 관계가 수직적이었는지 수평적이었는지 또는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인지 규명이 필요하다. 즉, 당대 청나라가 일본에 대해 객관적으로 국가적 열세의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이홍장에 주어진 선택재량은 크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에게 공격적인 외교전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는 방어적인 외교전략을 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시모노세키 회담이 진행되기 직전의 전시 상황과 회담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양 국가 중 휴전에 더욱 절박한 국가는 국가적 열세 상황 속에 놓인 것으로 분석할 것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배경
청나라는 조선에서 있었던 전투인 평양 전투, 성환 전투, 황해 해전 그리고 청나라 본토에서 발생한 요동 전투,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 모두 패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계속된 패배는 청나라가 일본에게 먼저 화해를 요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히로시마 회담을 거쳐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이 체결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 과정은 크게 정전(armistice)협정과 평화협정(peace negotiation)을 협의하는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후, 패전국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은 아니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청나라의 휴전 요청에 응하여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조약 체결 당시 양 국의 조약에 미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극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휴전을 제의하는 것과 동시에 청나라는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해왔다는 점에서, 조약 체결에 더욱 절박했던 것은 청나라이며 결국 청나라가 국가적 열세 상황에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처해있다는 것이 추론된다.
충돌과 전략 그리고 충돌
청·일 간 지속된 악연
청일전쟁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발생한 전쟁이나, 그 본질은 조선 반도에 대한 영향력 파이 분쟁의 성격을 가진다. 조선을 속국으로 여겨온 청나라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대해 갖는 전통적인 지위를 지키려 했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반도에 눈을 돌려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가지는 파이를 나누어 차지하고자 하였다.
전통적인 패권국인 청나라와 부상하던 국가인 일본 간의 다툼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지속적인 갈등을 촉발시켰다. 1882년 임오군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우세를 점한 청나라는 이후 조선과 서양 열강들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였다. 한편 1884년의 갑신정변은 청나라가 일본의 욕심을 또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양국은 갑신정변 정국으로 인해 출병한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상호 통고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일방의 무력행사를 경계하였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은 이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자 일본은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자국의 군대도 파견하여 조선반도에서 청일은 또다시 대치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에도 주둔하여 조선-청나라 간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이는 양국이 무력 대치하게 되는 상황을 야기시켰고 이는 곧 청일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청·일의 전략적 사고
국가적 열세 상황에 취해있는 청나라에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는 넓지 않았다. 조선에 대한 오랜 대치 상황은 청나라가 청일전쟁의 패배를 앞두고 조선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의 파이를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또한 외견상으로도 청일전쟁은 조선의 내부 분쟁에서 기인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로서는 조선의 자주국 문제를 마무리 짓는 것이 가장 원론적이며 ‘결자해지’적 해결방식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의 전략 상, 상대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영역인 조선의 지위 문제는 제쳐두고 타협의 여지가 있는 배상금 문제를 거론하여 그 액수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영토 할양 문제의 경우, 할양을 거부해보되 거부되지 않는다면 할양 년수 또는 할양 지역을 조정해보는 것을 전략으로 삼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한편 청나라가 먼저 회담을 제시하기 이전에 메이지 27년 11월 6일 동경주재 미국공사인 댄은 미국 정부가 양 국간의 우의적인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중재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이러한 입장은 불안정한 동북아시아 정세를 감지한 미국의 우려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경계해야할 서양의 열강은 미국뿐만이 아니었으며, 일본에게 청나라와 회담을 성공리에 완료한다는 것은 회담 이후와 이전 모두 제 3국의 교섭을 사전에 방지할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쓰 무네미쓰 2020, 235)
청일 전쟁의 계속된 승리는 일본 국내여론을 자극시켰고, 일본 내부에서는 청국이 스스로 항복을 해오며 화의를 청해올 때까지는 진격을 멈추어서는 안된다라는 이른바 대외강경파의 주장이 득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가 회담을 제의하자 이토총리와 무쓰 무네미쓰는 청국이 성실하게 평화를 희망해올 때까지 요구할 조건을 감추어두고, 모든 사태를 일청 양국 사이에만 제한시켜 제 3국이 사전에 어떠한 교섭도 해올 여지를 남기지 않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 담판이 청나라 사신의 전권위임장 조건 불비로 결렬되자 서양 열강은 일본이 이러한 구실로 담판을 거절한 것이 아닌가라며 도리어 일본의 야욕을 의심하였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됨에 따라 일본의 제 3자는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도록 여지를 없앤다는 방침이 위태롭게 되었다. 국외 여론에의 의식으로 열강들의 시각을 일신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이토 총리와 무쓰는 결국 이러한 이유로 시모노세키 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陸奧宗光 2020, 246)
간섭이 필연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시점에서 (후지무라 미치오 1997, 208) 국외 여론에의 의식은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청 양국은 정전 조건을 논의하며 맹렬히 부딪혔는데, 이홍장의 총격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본은 결국 청나라가 원하던, 일본이 원하던 유리한 휴전 조건이 없는 정전 협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홍장은 총격 사건 이후 자신이 흘린 피가 조국을 위한 피라는 것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에는 이홍장의 총격 사건을 ‘쓸데없이 외면적으로만 확대시키려는 데에만 급급하여 우리들의 언행이 허위적인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우리측의 중용적인 태도가 의심받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무쓰 무네미쓰 2020, 260) 즉, 무쓰는 무엇보다 총격 사건으로 통해 마주할 서양 열강의 불온정한 태도를 문제시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국외 여론을 무마할 방법이 일본이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일인, 이홍장이 간청한 휴전을 무조건 허락해주는 것이라고 보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조약 체결 당시의 충돌 쟁점
시모노세키 조약의 verbal discussions와 이홍장과 무쓰 무네미쓰 그리고 이토 총리 간의 문서 교환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되었으며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시모노세키 조약 제 2조(배상금)와 제 4조(영토 할양)의 문제였다. 이홍장은 전자에 대해서는 현재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청나라의 경제적 상황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임을, 후자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지불함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감당해야할 과한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청나라의 국가적 열세 상황에서 이홍장이 이 두가지 충돌 쟁점을 어떠한 전략으로서 설파하려 하였는지, 그리고 그의 노력이 조약 결과에 궁극적으로 반영되었는지 여부를 아래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보겠다.
시모노세키 조약 조항의 검토
충돌과 비충돌
앞서 언급한 시모노세키 조약 내용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을 설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조약 조항이 국가적 열세 상황에 처해있던 청나라가 먼저 제안한 것인지의 여부이다. 만약 조항이 청나라가 제안하여 일본이 이를 수용하여 조약에 반영한 경우 이는 충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먼저 제안한 조항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부적 내용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논쟁을 계속해왔다면 그 조항은 충돌을 빚지 않았다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충돌을 설정하는 두번째 기준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1차 자료인 verbal discussions과 이홍장과 일본측 대신들이 주고받은 문서에서 계속적으로 언급되며 양 국가 간의 입장 차가 현저히 눈에 띄는 경우이다. 청나라는 강화조건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배상금 문제는 조약이 확정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논쟁을 빚는데 반해, 조선 독립국 인정 문제는 verbal discussions에서도, 이홍장의 강화조약에 대한 회답에서도 양 국가간 입장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verbal discussions에서는 평화 협정을 논의하기 시작하며 중국측 대신들이 배상금 문제와 영토 할양 및 군사적 점령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만 안건을 제출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설명에서 중국 측 대신들이 조선 독립국 인정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he Tientsin press 1895, 13) 또한 강화조약에 대한 회답에서 이홍장은 ‘청국은 수개월 전에 조선은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뜻을 언명한 바 있으며, 이번 강화 조약 중에 이를 기재하는 것도 이의가 없다’라며 조선 독립국 인정 조항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시모노세키 제 2조(배상금), 제 4조(영토 할양)를 충돌의 영역으로, 시모노세키 제 1조(조선 독립국 인정)을 비충돌의 영역으로 설정하여 전자에 관해서는 이홍장의 외교전략을 후자에 관해서는 충돌 부존재의 이유를 중심으로 서술해볼 것이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 2조, 제 4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주요 충돌 쟁점이 되었던 배상금과 영토 할양문제를 다투는 회담의 verbal discussions을 읽어보면 이홍장이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게 동 조항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토를 “past-masters in severity”라고 부르는 등 그의 외교적 자비를 촉구하고 (The Tientsin press 1895, 18), 이홍장 본인의 국내적 위신을 이유로 “I must at least save a hair” 즉, 동정을 베풀어달라며 일본을 회유하는데 절박함을 보였다. (The Tientsin press 1895, 18)
그러나 그가 동정만으로 일본을 회유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홍장은 일본이 서양 열강의 간섭을 배제시키는데 최우선적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여 일본의 무리한 요구, 주로 영토 할양, 는 서양 열강들의 관심을 살 수 있으며 그들이 간섭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회담 내내 이토 총리와 이홍장은 자국의 논리가 서구의 국제법, 관습에 더 부합하는가 입증하기 위해 설전을 펼치는데, 이홍장이 비록 마지막 회담에서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 및 관습에 대해 답답함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일본의 논리를 이기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일본이 취하는 서구의 국제법적 논리를 따라야 할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The Tientsin press 1895, 26)
하지만 이홍장의 외교전략은 결국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홍장과 협상하기에 앞서 일본은 이미 서양 열강의 간섭을 예측하여 조항의 내용을 결정한 후였으며, 이홍장이 서구의 논리로서 청나라의 배상금을 감축하고 영토 할양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피력해도 일본은 이미 주어진 조건은 일본 측에서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며 이로 인한 서양의 간섭은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 조약 제 1조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시모노세키 조약 제 1조는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향후 일본의 조선영토 진출해도 기여했는바, 이는 명백히 일본에게 우호적인 성격의 조항인 것이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홍장이 이러한 1조를 수정 요구 및 문제시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데, 이의 답으로는, 첫번째 그가 당대 국제정세에 무지하여 이 조항으로 인해 야기될 미래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하였다는 것 또는, 두번째 이홍장이 조선 독립국 인정문제가 타협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하여 일찌감치 포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첫번째, 이홍장이 당대 국제정세에 무지하여 이 조항으로 인해 야기될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계초는 ‘이홍장 평전’에서 이홍장의 국제법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 저자인 양계초의 관점에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었으나 이홍장의 ‘자주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무지와 그에 따른 조선 수교의 묵인은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할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양계초 2013, 183-185) 또한 양계초는 이홍장이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톈진조약을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체결하면서도 ‘서양의 대국 프랑스도 중국에 먼저 고개를 숙였는데, 동양의 소국 일본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냐’라고 말했던 것을 언급합으로써 그의 국제정세에 대한 오만과 무지를 지적하였다. (양계초 2013, 199)
이러한 비판의 연장선 상에서 이홍장의 시모노세키 조약 1조의 체결은 이홍장이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가 휴전을 제의하면 조건을 보내올 때 무쓰는 이에 대해 ‘이러한 조건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었던 가장 염가의 조건을 골라 보내왔던 것’으로 설명한다. (무쓰 무네미쓰 2020, 217) 즉,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 조선의 지위 문제였으므로 독립국으로 조선을 설정한다는 것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홍장 또한 조선을 독립국으로 설정하는데에서 오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렸을 것이다.
Verbal discussions을 살펴본다면 조선의 문제는 대만 할양 문제와 함께 거론되어 한번 언급된다. 이토 총리는 조선인은 일을 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으나 대만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We are about to attack Formosa” 즉, 대만 영토에 대한 욕심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The Tientsin press 1895, 10) 대만 영토에 관한 계속된 마찰은 청나라가 조선보다는 영토 문제에 더 심각성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것도 이홍장의 실책에 관한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다. 두번째,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일본이 포기하지 않을 vital interest에 포함되어 이홍장이 협상을 포기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반도에 대한 청일 간에 발생한 첫번째 갈등이 아니었다. 조선반도를 둘러싼 청일 간의 오랜 분쟁과 청나라의 국가적 열세 상황은 이홍장이 당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협상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전통적 지위를와 영향력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즉, 배상금 문제에서는 청나라의 경제가, 영토 할양 문제에서는 청나라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선의 지위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이홍장이 당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그가 일본과 회담을 진행하기에 앞서 영국과 러시아에 중재를 요청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전쟁 후 일본에 사절로 가기 전에 먼저 각국 공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는 서양을 끌어들여 청나라가 처한 국가적 열세 상황을 극복, 또는 이로 인해 야기된 결과를 무마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려진다. 또한 시모노세키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홍장은 일본을 넘어서 서양의 세력들에 대한 분석도 늦추지 않았는데, 이는 병상에 누워있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일본 측의 태도에 대해 “일본 관민이 나의 조난에 대해 통석의 뜻을 표하는 것은 외면을 치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입증된다. (신동준 2017, 345-351)
양계초는 이홍장의 외교전략에 대해 주로 다른 국가와 연합하여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또 다른 국가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양계초 2013, p23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제 3국을 끌어들여 당장 청일 양국의 회담에서는 조선반도를 포기하되, 일본의 야욕을 경계하는 서양을 자극함으로써 청일 간의 충돌 없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후 삼국 간섭은 현실화되었고 일본은 할양된 산둥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주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는 이홍장의 통찰력이 일정 부분 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가며
청나라가 패퇴하기 일보직전인 청일전쟁의 전시상황은 객관적으로 청나라가 일본에 대해 국가적 열세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배상금 문제 등을 거론하여 휴전회담을 먼저 요청한 청나라의 모습은,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국가적 열세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여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시모노세키 회담의 청나라 측 전권대신이었던 이홍장에게 이러한 상황은 충분히 공유되었을 것이다.
위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 조항을 충돌과 비충돌도 분류하여 각각의 조항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결정되게 되었는지 분석하였다. 국가적 열세 상황 속에서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는 조항에서만큼은 일본의 이해를 구하여 수정을 가하고 제 3국으로 하여금 일본이 과한 이득을 쟁취하는 것을 경계토록 한다라는 전략을 세운 청나라와, 제 3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은 일본 간에는 청나라가 이의를 제기한 조항에만 한하여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충돌’에 해당하는 문제는 배상금, 영토할양 문제로, 이홍장은 일본의 ‘대원칙’을 파악하여 적절한 외교전략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청일전쟁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며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반도를 둘러싼 오랜 패권 다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계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주독립국이란 용어에 대한 이홍장의 무지와 청나라 국력에 대한 그의 오만은 한반도 문제를 다룬 시모노세키 제 1조가 충돌없이 체결되는 원인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이홍장이 서양 열강들이 이권침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일본이 가장 경계하는 제 3국을 이 사건에 포함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하더라도 청나라의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배상금 영토할양 조항은 타협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설명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홍장은 국가적 열세 상황에서 청나라의 외교전략의 폭이 상당히 감소한 것을 인지하고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는 조항에서만큼은 타협하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홍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통해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국가적 열세라는 상황이 그의 외교전략으로 타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홍장보다 100배나 좋은 외교술이 좋은 외교가가 있다하더라도 당시 청나라가 처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우며, ‘한간’이란 그의 사후 평가는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사건에서도 재고의 가치가 있다. 5. 일본 이홍장, 해악연하(海岳煙霞)에 맞서다_시모노세키 일청 강화기념관 참고문헌 양계초. 2013. 리훙장 평전. 박희성, 문세나 역. 프리스마. 무쓰 무네미쓰. 2020. 김승일 역. 종합출판범우.
신동준. 2017.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인간사랑 후지무라 미치오. 1997. 청일전쟁. 허남린 역. 소화
The Tientsin Press. 1895. “VERBAL DISCUSSION DURING
PEACE NEGOTIATION BETWEEN THE CHINESE
PLENIPLOTENTIARY VICERY LI HUNG-CHANG
AND THE JAPANESE PLENIPOTENTIARIES COUNT
ITO AND VISCOUNT MUTSU AT SHIMONOSEKI,
JAPAN.” The peking and Tientsin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