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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원명원 · 정호승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팔리교 전투

1860년 9월 21일, 지금의 북경 통주 서쪽에 위치한 팔리교(八里橋, Palikao or Eight-mile bridge)에서 다수의 만주 및 몽골 팔기 기병이 소속된 청군은 영프연합군과 대규모 회전을 시도했다. 청군을 지휘하는 것은 제 2차 대구포대 전투를 승리를 경험했던 승격림심(Sengge Rinchen)이었고, 영프 연합군은 명확한 지휘권의 통일은 없었지만 프랑스군은 몽토방이, 영국군은 엘긴이 이끌었다. 청군의 병력규모는 3만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서도 몽골 팔기 소속의 기병이 1만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영프연합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각각 4천 규모였으며, 그 중에서도 전투의 주공을 맡은 것은 프랑스군이었기 때문에 총지휘는 임의로 몽토방이 담당하였다.(de Saint-Amand, 1912)

이와 같은 전력의 차이는 전근대 시기의 군대 간의 싸움에 있어서는 어느 한쪽이 전투 이전에 승리를 담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전근대 군대이든, 심지어 선형전술을 확립시키고 화약으로 무장한 근대적 유럽군대이든 간에 전투에 있어서 기병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회전 전술의 정석임과 동시에 완성인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 2 전술 속에서는 기병이야말로 전투의 판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모루를 맡은 보병들이 서로 대치하거나 전투를 벌일 동안, 양익에서의 전투와 우회기동 그리고 배후에서의 돌격을 담당하여 전장의 판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기병 전력에서 청군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청나라군과 영프연합군이 동일한 수준의 군대였다면 이 전투의 결과가 청군의 승리로 돌아갔을 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팔리교 전투의 결과는 매우 일방적인 것이었다. 2 망치와 모루는 서양 전술사 속에서 확립된 회전 전술의 하나로서, 상대의 시선과 전력을 전선의 정면에 묶어두는 모루에 해당하는 부대와 상대를 우회 또는 그와 유사한 기동을 통해 적의 측면 또는 배후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망치에 해당하는 부대의 2 개의 집단군을 통해 성립되는 방어와 기동 전술을 의미한다.(Gat, Azar. War In Human

Civilis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340)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문제는 그것이 영프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는 점일 것이다. 최소 1200명 이상의 청군이 전장에서 쓰러질 동안 영프연합군에서는 영국군에서 2명의 사망자와 29명의 부상자가, 프랑스군에서 3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나왔을 뿐이었다.( de Saint-Amand, 1912) 어떻게 이와 같은 일방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가?

이는 무기의 수준 차이와 같은 물리적 기술의 차이 뿐만 아니라 전쟁의 기술(Art of War)이라는 수준에서 유럽 강대국들의 군대와 전술이 이미 청군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근대적 군대3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프연합군측의 주공이었던 프랑스군 측의 총지휘관 몽토방은 청군의 기병이 영프연합군이 포격을 뚫고 정면으로 돌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하였고, 전투에 참여했던 영국군 장교들의 증언 역시 청군의 기병이 혼란을 틈타 우발적인 돌격을 감행했다고 말하고 있다.(Wolseley 1862, p.189)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전투에서 청군의 기병은 서구의 명장들이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일궈낸 망치와 모루 전술에 의거한 우회 기동이 아니라 보병과의 공조가 부재한 정면 돌격을 선택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청군의 중핵을 3 물론 다수의 청군도 조총이나 수입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무장상태와 이를 활용하는 전술적 활용 방안이 유럽 군대와는 달리 균일하지도 않았거니와 이를 통해 전술적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 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전근대적 군대라 지칭한다. 담당하고 있던 기병이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청군 보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녹영군의 질이 매우 떨어진다는 현실적 사안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동시에 청군의 2만에 달하는 보병이 반수 이하의 영프연합군을 상대로 모루를 형성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청군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취약성과 기술 및 전술의 차이로 인해서 가지고 있던 유리함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영프연합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팔리교 전투의 결과는 영프연합군으로 대표되는 서양 세력의 전쟁의 기술이 동양의 중심이자 최강국이었던 청 제국을 문제없이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었다. 팔리교 전투는 청군의 주력 팔기군이 소속된 정규군과 서양 군대 사이에 벌어진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회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의 완벽한 승리는 영프연합군이 상징하는 서양 세력의 물리적 힘의 우위를 뜻하는 것이었다. 팔리교 전투의 결과를 전해 듣고 함풍제는 북경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그를 대신해서 북경에 남은 공친왕은 후술할 사절 억류와 살해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영프연합군의 화를 잠재우고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원명원과 영프연합군 그리고 엘긴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원명원은 1707년 강희제 통치 후반기에 친왕 옹(후의 옹정제)을 위해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옹정제와 건륭제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대규모 확장을 거듭한 끝에 현재까지 알려진 파괴되기 이전의 원명원으로서 완성되었다.(Barme, 1996) 원명원의 건축에는 예수회 선교사로서 청에 파견되어 있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미셸 베노이 또한 참여하였으며, 흔적으로나마 넓리 알려진 서구식 정원과 분수가 그들에 의한 작품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과 동양 문화의 합작품으로서 태어난 원명원에게 닥친 불행은 그 위치가 팔리교 전투 이후 북경을 향해 진군하던 영프연합군의 진로상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팔리교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북경 인근의 청군 대부분이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프연합군은 곧바로 북경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영프연합군의 진로가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격림심 휘하의 청군의 산발적인 저항과 동맹의 한 축인 프랑스군의 진군속도 지연까지 악재는 계속해서 겹치고 있었다. 영국군 지휘관이었던 엘긴경의 편지에 따르면 10월 3일에 연합군은 오로지 2마일 가량을 진군했을 뿐이었다.

We have moved about two miles, and are now lodged in a mosque—a

nice building, a good deal ornamented—which is for the nonce turned

to profane uses. The army was to have advanced to attack Sang-ko-lin- sin's force to-morrow, but now I am told the French are not ready. …

These delays give the Chinese fresh heart, and they are beginning to

send people to fire on our convoys, &c., coming up from

Tientsin.(Elgin, 186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긴이 원명원의 소식을 접한 것은 10월 7일 일요일에 이른 뒤였다. 문제는 이 소식을 그가 원명원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선행하고 있던 프랑스군 및 그들과 동행하고 있던 영국군 기병대로부터 보고받았다는 점에 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엘긴이 말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때 그가 오후에 원명원을 직접 보기 위해 도착했을 때는 이미 1차적인 약탈이 이루어진 뒤였던 것으로 보인다.

We hear this morning that the French and our cavalry have captured

the Summer Palace of the Emperor. All the big-wigs have fled, nothing

remains but a portion of the household. We are told that the prisoners

are all in Pekin. … Five P.M.—I have just returned from the Summer

Palace. It is really a fine thing, like an English park—numberless

buildings with handsome rooms, and filled with Chinese curios, and

handsome clocks, bronzes, &c. But, alas! such a scene of

desolation.(Elgin, 1860)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편지에서 엘긴이 원명원을 본 감상은 하찮은 것을 대하는 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원명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그 정원에 대해 남은 기록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와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한다. 엘긴은 원명원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미 청조의 주요인사들이 대부분 도망가고 건물들 밖에 남지 않았다는 보고에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오후에 이를 직접 보고 돌아와서는 원명원이 마치 ‘중국풍의 장식물들로 꾸며진 영국식 정원’과도 같다는 감상을 편지에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원명원의 인상적인 정원에 대한 기록은 엘긴 뿐만 아니라 당시 원명원을 방문했던 다른 영국군 장교들 또한 남기고 있다.(Wolseley 1862, M.Ghee 1862)하지만 동시에 그는 궁전을 관리해야 할 인원들이 대부분 도망치는 바람에 방치된 데 더해서 이미 프랑스군에 의해 상당 부분이 약탈당하는 바람에 황폐화된 궁전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4 이러한 안타까운 감정은 편지의 말미에 더 잘 드러나고 있다.

Plundering and devastating a place like this is bad enough, but what is

much worse is the waste and breakage. Out of 1,000,000 l. worth of 4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엘긴은 약탈을 막고 있었으며 이는 전리품을 정확하게 나누어 가지기 위함이었다는 프랑스 장군의 말과 그의 자군에 대한 통제력을 매우 불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property, I daresay 50,000 l. will not be realised. French soldiers were

destroying in every way the most beautiful silks, breaking the jade

ornaments and porcelain, &c. War is a hateful business. The more one

sees of it, the more one detests it.(Elgin, 1860)

이렇듯, 엘긴의 원명원에 대한 감상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처한 환경에 대한 탄식이면 탄식이었지, 원명원에 대한 비하나 파괴의 의도를 처음부터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명원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원명원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 영프연합군과 청 제국 정부 사이에서 벌어진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다. 엘긴이 남긴 기록 상으로 그는 10월 9일에서 10월 12일 사이에야 청 제국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갔던 파크스(Harry S. Parkes) 일행의 운명과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평화 교섭을 위해 파견되었던 이 사절들은 청 황실의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실상 투옥당한 채 가혹한 환경 속에 놓여있었으며, 몇몇 사절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처형당한 이들도 있었다.

엘긴은 사절단에 닥친 이와 같은 불행한 운명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매우 중대한 전쟁 범죄라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상태에서 도망친 중국 황제에 대해서는 마땅히 응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원명원 파괴의 결정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즉 엘긴의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원명원에 대한 인식과 그의 원명원 파괴에 대한 결정의 시간순서를 명확히 할 경우, 그의 원명원 파괴가 결코 그가 원명원을 별볼일 없는 장소로 취급했기 때문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점은 엘긴이 원명원 파괴를 황제 개인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As almost all the valuables had already been taken from the palace, the

army would go there, not to pillage, but to mark, by a solemn act of

retribution, the horror and indignation with which we were inspired by

the perpetration of a great crime. The punishment was one which

would fall, not on the people, who may be comparatively innocent, but

exclusively on the Emperor, whose direct personal responsibility for

the crime committed is established, not only by the treatment of the

prisoners at Yuen-ming-yuen, but also by the edict, in which he offered

a pecuniary reward for the heads of the foreigners, adding, that he was

ready to expend all his treasure in these wages of assassination.(Elgin,

1860)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엘긴의 원명원에 대한 인식은 이를 청 황제의 개인적 사유물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원명원 파괴를 ‘solemn act of retribution’이라고 매우 단정적인 태도로 말하고 있다. 엘긴에게 있어서 원명원은 비록 그에게 고향의 정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지만, 동시에 북경 시내에 진입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약조한 이상 그에게 황제에 대한 정당한 징벌을 내리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덜 불쾌한 수단은 원명원 파괴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Barme Geremie는 원명원 파괴 당시 엘긴이 처한 상황을 ‘아이러니’라고 일컬으며 엘긴의 이러한 결정이 그가 중국의 비교적 무고한 인민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황제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고 서술한다. 바로 위의 엘긴 개인의 기록을 보아도 엘긴의 원명원 파괴에 대한 인식이 추가적인 인명 피해 없이 황제의 사적인 보물을 파괴한다는 투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원명원의 파괴를 원하지 않았다는 언급을 뒤에 남기고 있다. 이듬해 그가 고국에 돌아와서 왕립 아카데미 만찬회에서 남긴 발언에서 그는 자신이 원명원에서 행한 파괴를 매우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황제가 행한 범죄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벌을 내릴 수단이 원명원의 파괴 외에는 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I hope that I may be allowed to take one step more in the same

direction, and to assure you that no one regretted more sincerely than I

did the destruction of that collection of summer-houses…… But when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I had satisfied myself that in no other way, except, indeed, by

inflicting on this country and on China the calamity of another year of

war…… I felt that the time had come when I must choose between the

indulgence of a not unnatural sensibility and the performance of a

painful duty.(Elgin, 1861)

또 누가 보았는가

원명원 파괴 당시 현장에 있던 유럽측 인사들 중 기록을 남긴 이는 엘긴 외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한 인사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후대에 ‘General Gordon’ 혹은 ‘Chinese Gordon’이라고도 불리는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일 것이다. 그는 제 2차 아편전쟁에서 영프연합군의 원정 당시 영국군 왕립 공병대 소속의 대위로 임관하고 있었다. 그의 기록 속에서도 영국군이 9월에 대규모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중순까지도 영국군이 북경 시내에 대한 직접적인 진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동시에 영국군의 원명원 방화 사건이 단순히 북경에 대한 직접적인 파괴 혹은 약탈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을 그는 남기고 있다.

On the 11th October we were sent down in a great hurry to throw up works and batteries against the town, as the Chinese refused to give up

the gate we required them to surrender before we would treat with

them…… the Chinese were given until twelve on the 13th to give up

the gate. We made a lot of batteries, and everything was ready for the

assault of the wall, which is battlemented, and forty feet high, but of

inferior masonry.(Hake 1884, p.31)

이러한 고든의 기록은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였기 때문에 자세한 군사적 배치 상황을 남기지 못했던 엘긴의 기록을 보충해 준다. 영국군이 북경 외곽에서 시내를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을만한 포병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은 팔리교에서의 패배 이후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을지언정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서 영프연합군에게 도전할 여력이 북경의 청 제국정부에게는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즉 영국군이 북경에 대한 직접적인 약탈 시도를 할 경우 청군은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북경 약탈이라는 사건이 정치적으로 미칠 악영향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엘긴이 북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대신에 원명원을 파괴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다.

한편 고든은 원명원의 아름다움과 그 파괴에 대한 직접적인 감상 또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동시에 고든의 기록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말을 아낀 엘긴과는 달리 원명원에 대한 극심한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The General ordered it to be destroyed, and stuck up proclamations to

say why it was ordered. We accordingly went out, and, after pillaging

it, burned the whole place, destroying in a Vandal-like manner most

valuable property, which could no be replaced for four millions.(Hake

1884, p.33)

물론 고든 역시 약탈의 주범이 프랑스군이었다는 점을 빼먹지 않고 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엘긴과 동일하다. 또한 고든은 엘긴에 비해서도 원명원 방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고든이 원명원의 찬란함에 대해 느낀 감상평의 수준과 동시에 놓고 볼 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You would scarcely conceive the magnificence of this residence, or the

tremendous devastation the French have committed. The throne and

room were lined with ebony, carved in a marvellous way…… as much

splendour and civilization as you would see at Windsor.(Hake 1884,

p.33) 고든의 이러한 원명원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동시에 이를 파괴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슬픔과 자기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그가 남긴 기록에서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You can scarcely imagine the beauty and magnificence of the places

we burnt. It made one’s heart sore to burn them; in fact, these palaces

were so large, and we were so pressed for time…… It was wretchedly

demoralizing work for an army.(Hake 1884, p.33)

이와 같은 고든의 태도는 일견 매우 고상한 것으로도 비치는 동시에, 그가 원명원과 그 파괴를 엘긴과는 달리 예술이나 문명의 파괴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고든 또한 사절단이 처한 운명에 대해 매우 큰 슬픔을 드러냈으며, 그에 맞서기 위해 어떠한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엘긴과 고든의 인식 차이는 결국 양자가 당시 군대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지위와 개인적 경험 양자 모두가 적용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다만 고든이 원명원 파괴 당시를 기록하면서 사용한 ‘Demoralizing’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우리가 살펴본 엘긴과 고든의 인식은 물론 그들의 개인적 기록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두 인물 모두 당시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기준으로 상당한 지식인임과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던 인물이거나 혹은 나중에 그럴 필요가 있는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볼 때 여기서 고든이 사용하고 있는 Demoralizing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원명원 파괴 사건에 대한 인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기를 꺽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실제로 고든이 이러한 의미로 사용했다고 해석하더라도 문맥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를 도덕적인 타락이라는 용법으로 연결할 경우에는 고든이 원명원의 파괴를 일종의 정신적으로 불쾌한, 또는 하등한 행위였다고 인식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굳이 이러한 해석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전자의 용법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고든이 인식하는 사기의 꺽인 군대에 대한 서술과 실제 당시 영국군의 상황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90 경보병 연대 소속이었던 가넷 조셉 울슬리(Garnett Joseph Wolseley) 중령은 원명원 파괴 당시를 전쟁 직후에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It was the stamp which gave an unmistakeable reality to our work of

vengeance, proving that Lord Elgin's last letter was no idle threat, and

warning them of what they might expect in the capital itself, unless they accepted our proffered terms. The Imperial palace within the city

still remained untouched, and if they wished to save that last

remaining palace for their master, it behoved them to lose no time. I

feel convinced that the burning of Yuen-ming-yuen considerably

hastened the final settlement of affairs, and strengthened our

ambassador's position.(Wolseley 1862, p.279)

이와 같은 인식은 엘긴의 인식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같은 방향성을 띄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올슬리에 의하면 당시 영국군은 사절단의 인질화 및 살해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었으며, 원명원 파괴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쟁을 빨리 끝내고 영국군이 가지는 우위를 각인시킬 수 있는 행위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원명원 파괴 이전에 이미 원명원에서 얻은 약탈품들을 옥션을 통해 분배함으로서 병사들과 장교들 역시 자신들이 얻은 전리품에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5 이러한 모습은 고든이 말하는 일반적인 영국군의 사기 저하와는 상반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원명원 방화 자체는 영국군이 자국 사절에게 닥친 비극에 대한 복수이며 동시에 다시금 사기를 재충전하는 행위였다고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5 물론 프랑스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전리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분노했지만 말이다.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또한 올슬리는 원명원 방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Our allies, who had looted all and destroyed some of the buildings of

that place, objected to our putting the coup de grace to their work. It

was averred that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palaces would be a

Gothlike act of barbarism. It seems strange that this idea did not occur

to the generally quick perceptions of our Gallic allies before they had

shorn the place of all its beauty and ornament, by the removal or

reckless destruction of everything that was valuable within its

precincts, leaving us, indeed, little more than the bare shell of the

buildings on which to wreak our vengeance for the cruelties practised

therein upon our ill-fated countrymen.(Wolseley 1862, pp.279-280)

여기서 올슬리는 원명원 방화가 프랑스군이 이미 원명원에 행한 대규모 약탈 행위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특히나 그가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행위를 Gothlike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상대방을 Gallic allies라고 부르는 부분은 위트마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올슬리가 프랑스군의 약탈행위와 자신들의 방화 행위를 동일한 파괴 행위라고 지적하더라도 그것이 영국군의 방화에 면죄부를 부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원명원에 일찍 도착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약탈행위를 벌이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경우 영국군이 원명원을 불태우며 주장한 사절단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복수와 징벌이라는 구호는 자신들의 약탈 행위를 숨기기 위한 면피성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가적으로 원명원에 입성한 영국군의 기록 중 재미난 기록이 하나 있다. 로버트 제임스 레슬리 맥기(Rober James Leslie M.Ghee)는 북경 인근에서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위치에 있던 인물인데, 바로 그가 영국군에 소속해 있었지만 정식적 군인 신분이 아닌 종군 목사였다는 점이다. 그는 영국군의 원명원에 입성하는 모습과 불태우는 모습 모두를 지켜보았으며, 올슬리와 마찬가지로 전쟁 직후에 기록을 남겼다. 그의 원명원에 대한 기록 속에는 동양과 서양이 합작한 건축물로서의 원명원에 대한 묘사가 매우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Here were some exquisite boudoirs, fitted up with the perfection of

Eastern luxury and taste; and a spiral staircase, the only on in the

building, led to a similar suite of apartments overhead, a great part of

whose ornament consisted in the most rare and costly of Chinese

works of art, with a few, French in manufacture as in design and

taste.(M.Ghee 1862, p.209)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물론 그는 원명원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원명원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서구적 양식의 물건이나 건물들을 대부분 프랑스 양식인지 혹은 영국 선교사가 지난 세기에 놔둔 것인지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명원의 모습이 그가 판단하기에 일반적인 ‘동양’의 궁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것임에는 분명하다. 심지어 그는 원명원의 일부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의 원명원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여기에서 소개된 목격자들 중에서도 가장 자세한 편에 속하면서도 그가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가장 감정적인 묘사와 감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맥기의 원명원 방화에 대한 감상은 고든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원명원이 가진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인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슬픔을 기록하는데 상당한 기록을 할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Yes, a good work, I repeat it, though I write it with regret, with sorrow;

stern and dire was the need that a blow should be struck which should

be felt at the very heart’s core of the Government of China, and it was

done. It was a sacrifice of all that was most ancient and most beautiful,

but it was offered to the manes of the true, the honest, and the valiant,

and it as no too costly, oh no! one of such lives was worth it all. It is gone, but I do not know how to tear myself from it.(M.Ghee 1862, p.289)

이 감정적인 수사로 가득찬 맥기의 한탄은 동시에 그의 원명원 방화 사건과 관련된 독특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결국 원인은 영국이라는 정의를 무시한 중국 정부의 책임이고, 원명원은 이러한 영국이 세계에서 가지는 책임감과 정의를 무시한 중국을 좋은 방향으로 지도하기 위한 희생 제물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원명원 파괴를 통해 중국 정부가 제정신을 차리고 태평천국 운동과 같은 시도가 성과를 거둬서6 중국 내부에 기독교의 전파가 활성화될 수 있기를 빈다는, 비군인인 동시에 목사라는 그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으로 원명원 방화 사건에 대한 감상을 끝마치고 있다.

나가며

제 2차 아편전쟁의 전개과정에서 벌어진 연명원 방화사건은 당시에도 유럽의 지식인들로부터 비난받았으며, 그 비난은 현대로 올수록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빅토르 6 다만 맥기가 남긴 기록을 보건데 그는 이 ‘rebel’들에 대한 깊은 이해도나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잘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태평천국이 주장하는 바가 기독교와 유사하다는 정도의 인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위고의 영프연합군을 도둑에 빗대는 표현을 통한 비난으로부터 현대에 와서 에릭 링마르가 지칭한 ‘자유주의자 야만인’이라는 호칭까지 영국군이 원명원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는 야만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Erik 2013)

하지만 본 글에서 보다시피 원명원 방화 사건은 원명원의 예술적 가치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사건도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계획된 야만적인 약탈과 파괴의 현장도 아니었다. 원명원 방화사건이라는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일으킨 영국군이라는 행위자의 심상을 먼저 파악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영국 원정군에 소속된 다양한 행위자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건 현장을 보다 행위자의 입장에서 이해해보고자 시도하였다.

다양한 행위자들의 기록이 공통적으로 원명원 방화사건에서 지적하는 것은 이 사건이 바로 징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살펴본 행위자들 중 찰스 조지 고든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원명원 방화 사건이 전쟁 범죄를 일으킨 황제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전쟁 참여자라는 현장 행위자의 심상 속에서 파악해야만 더 크게 다가오는 문제일 것이다. 제 2차 아편전쟁의 정당성 문제와는 별개로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던 행위자들의 입장에서 평화교섭을 위해 파견된 사절단을 황제가 잔혹한 방식으로 다룬 데다가 전쟁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을 석방하고 도주하였다는 사실은 전쟁의 종결을 지연시키는 행위이자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범죄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로 행위자들의 인식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원명원이란 대상의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를 황제의 사유물로서 취급하였다는 부분이다. 이러한 인식은 앞서 서술한 황제에 대한 징벌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엮여서 원명원 파괴에 대한 정당성을 영국군이 획득했다고 믿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게다가 빅토르 위고를 위시한 당시로부터 이어지는 원명원 파괴에 대한 비난의 이면에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비판 속에는 유럽 군대가 야만인과 마찬가지인 일을 함으로서 문명인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자조적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이는 이면에서는 스스로가 문명인임을 자각하고 그러한 저열한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는 자부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이미 ‘civilization’과 ‘barbarian’을 구분하는 시점에서 스스로의 문명적 우월성에 대한 전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원명원 방화 사건의 영국군의 입장에 공감하고 이를 옹호할 필요는 없다. 본문에서 영국군 중령 올슬리가 말하는 프랑스군의 약탈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보면 통렬한 자기 비판으로 되돌아오는 대목이다. 프랑스군의 4. 그들은 불타는 원명원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_원명원 약탈 행위와 영국군의 방화 행위가 동일한 맥락에서 반달리즘의 형태를 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명원 방화는 이러한 행위자의 심상 연구를 통해서 포장하더라도 결국 상대방의 범죄에 대한 현장에서의 1차적 보복에 지나지 않는 행위였다. 본 연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1차적 심상 연구를 통해 과거의 사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상을 통해 사건을 단면적으로 이해하는 행위가 가지는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사건 당사자에 대한 통찰을 토대로 우리는 역사를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가보자. 전쟁의 기술에서의 우위는 소위 문명적 우위 또한 의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원명원 방화와 같은 일대 사건을 되돌이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참고문헌 Allgood, George (1901), China War 1860: Letters and 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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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ke, Alfred Egmont (1884). The Story of Chinese Gordon. vol. 1 (3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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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aign in China of 1860. London: Richard Bentley. Ringmar, Erik. (2015). Liberal Barbarism: The European De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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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seley, Garnett Joseph (1862). Narrative of the war with China in

1860; to which is added the account of a short res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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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ce to Hankow (1862). London, Longman, Green,

Longman, and Roberts.

Project Gutenberg, Letters and Journals of James, Eighth Earl of El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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