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흠천감 · 현혜림 · 고려대학교
들어가며
베이징 남동쪽에 위치한 흠천감은 천문현상을 측정하고 중요한 날 을 가려내기 위해 설치된 천문대입니다. 중국은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을 읽어내는 것은 황제의 정통성과도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일이었습 니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이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흠천감을 차지한 인물들은 바로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는 굉장히 신기한 일인데, 왜냐하면 서양의 기독교 정신 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중 국 황실에서 선교사들을 천문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갖고 있었던 매우 정교한 천문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이 중국의 전통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황실의 주요 행사에 정확한 날을 고르는 것이 당시 중 국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청나라는 수학에 뛰어난 예수회 선교사들을 흠천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흠천감장 중 한 명인 할러스타인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저명한 학자이자 독실한 신도였던 그는 서양의 기독교 와 천문학을 중국에 가져와 동서양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 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는데 이는 그 의 고향인 슬로베니아가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변동기를 거치며 슬로베니아의 역사 연구를 시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서양 세력에 대한 굴욕감으로 중국 역사에서 서양인의 영향력 을 지우고자 하는 중국의 정치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할러스타인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20세기 후반에 들 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할러스타인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도 조금씩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국에서도 주목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이 「유포문답」에 흠천감장 유송 령과의 대담을 기록했는데, 슬로베니아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유 송령이 할러스타인과 동일인임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 대용과 할러스타인과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할러스타 인이 홍대용과의 만남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글에서 잘 드 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그러나 신기한 점은, 홍대용이 그를 만나기 불과 6년 전 동일하게 흠천감을 찾아간 이의용에게는 할러스타인이 많은 관심 과 환대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찾아간 흠천감은 어떤 곳이 었을까요? 서양 사람으로서 중국에 있었던 할러스타인은 흠천감에 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바라본 조선은 어떠했을까 요?
명청시대의 천문대, 흠천감
흠천감은 1442년 명나라 정통제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흠천감은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정확 하게 예측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황제는 천자로 인식되었기 때 문에 중국 통치이념에서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명나라 이전부터 천문대를 꾸준히 갖고 있었습니다. 진나라 시대의 천문대가 수도 남서쪽에 있었으 나 원나라가 세워지고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베이징 남동쪽에 관상대가 설치되었습니다. 관상대에서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공학 자인 곽수경이 중국의 천문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고, 이후 1267년 페르시아 천문학자이자 공학자인 자말 압딘(Jamal ab-Din Buukhari)이 들어오면서 중국의 천문학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습니 다. 그러나 1368년 원나라가 몰락하고 관상대의 기구들은 명나라 수도인 난징으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영락제 시기 수도가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지면서 베이징의 천문대에서 사용될 기구들이 필 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은 정통제에 이르러 새로운 천 문대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정통제는 관상대가 있던 자리에 새로 이 흠천감을 짓고 난징으로 옮겨진 기구들의 복제품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흠천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명말청초, 예수회가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 이후입니다. 예수회는 지역의 문 화에 순응하며 포교활동을 하는 적응주의’ 기치를 들고와 청나라 황실을 위해 일을 하며 흠천감장의 자리를 역임하게 됩니다. 이 때 아담 샬 폰 벨, 페르비스트, 이그나츠 코글러, 할러스타인, 안 톤 등에 의해 더욱 정교한 천문기구를 만들게 됩니다. 1674년 흠 천감에 있는 기구들을 보면, 활과 화살처럼 생긴 육분의와 사분의, 용 머리 위에 얹혀져 있는 일식 혼천의, 1.9m에 달하는 천구의, 용의 등에 올려져 있는 적도식 혼천의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추 가된 몇 개의 기구들까지 더하면 당시 흠천감이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한 기구를 갖추고 있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흠천감은 수난 을 겪게 되는데, 프랑스와 독일의 군대가 천문대의 기구들을 자국 으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이 기구들은 베르사유 조약 에 의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흠천감은 중화민국이 세 워지기 직전에 중앙 천문대(Central Observatory)으로 바뀌게 됩니다.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그러나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며 예수회가 만든 기구들은 대부분 파손되거나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이후 1956년 흠천감은 플라네타 리움을 세우고 선교사들이 만든 기구를 고치거나 복제품을 만들어 박물관으로서 대중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흠천감의 예수회 선교사들
흠천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을 개종시키려한 시도에서 출발합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1549년 처음으로 일본에 발을 디디면서 동아시아를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달리 독자적인 발달된 문명을 갖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포교활동을 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적응주의’였습니다. 적응주의란 선교사들이 동아시아 유교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토착민들에게 접근하고, 토착 선교사를 양성하고, 그들의 언어, 문자, 문서를 통해 포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직적이고 예의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선교사들은 하층민이 아니라 사회 엘리트들에게 접근하고, 국가적으로는 동아시아 문명의 핵심이었던 중국을 공략하는 노선을 취했고, 이러한 노선을 성공시킨 인물이 바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利瑪竇, 1552~1610)였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여러 문서를 남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특히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 동아시아 선교의 핵심임을 파악하고 이를 위해 중국의 과학기술이 서양의 발전정도보다 뒤쳐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양의 과학을 도입시키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는 천문학에 능한 인물을 예수회에 요청했고 그 부름에 응답한 것이 이후 초대 흠천감장을 맡게 되는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탕약망湯若望, 1591~1666)입니다. 그는 티코 브라헤의 우주관을 황제에게 설명해 신임을 사고 1622년에 흠천감장의 직위를 얻었습니다. 티코 브라헤의 우주관이란 간단히 천동설과 지동설을 절충하여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두고 태양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돌지만 나머지 행성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교황청의 입장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었던 관측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받아들이기 적합했을 것입니다.
아담 샬은 청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법을 바치는 등 여러 직무를 수행했지만 서양의 문화와 사상이 중국의 정통성을 위협할 것을 우려한 양광선은 「부득이」라는 상소를 통해 그를 탄핵하게 됩니다. 이후 양광선이 흠천감장 자리를 대신했지만 실제 천문운행과 정확히 맞지 않는 회회법을 사용해 황제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또 다른 예수회 선교사인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남회인南懷仁, 1623~1688)가 다음 흠천감장을 맡게 됩니다. 페르비스트는 역법을 고치고 새로운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기구들을 만드는 등 흠천감에서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더욱이 강희제에게 천문학 등을 가르치며 그의 신임을 얻고 기독교 포교를 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게 됩니다.
이후 흠천감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선교사는 이그나츠 코글러(Ignatius Kogler, 대진현戴進賢, 1680~1746)입니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역시 흠천감장의 자리에서 많은 임무를 수행합니다. 특히 그의 말년인 1744년에 강희제는 적도식 혼천의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그가 매우 노쇠하였기 때문에 그를 도우러 왔던 할러스타인이 대부분의 일을 맡았습니다. 코글러가 1746년에 사망하자 할러스타인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할러스타인(Ferdinand Augustin Haller von Hallerstein, 유송령劉松齡, 1703~1774)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에서 태어나 1721년 예수회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을 경유하여 1738년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하고, 그의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당시 흠천감장이었던 이그나츠 코글러를 도우라는 명을 받게 됩니다. 그의 사후, 자리를 이어받게 된 할러스타인은 적도식 혼천의를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영향은 천문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거의 최초로 정확하게 중국의 인구를 계산했을 뿐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등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했고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아카데미와도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은 다양한 학술서적과 그의 형제자매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당시 서신이 오가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기 때문에 많지는 않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과 그의 심경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예수회 역시 세력이 줄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회는 유럽에서 여러 정치적 곤란을 겪다가 1773년에 마침내 해산하게 되는데, 할러스타인은 바로 그 다음 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의용과 할러스타인
이제 조선과 할러스타인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 연행사들이 흠천감을 찾아간 기록은 꽤 많습니다. 흠천감과 서양의 천주당은 조선인들에게 흥미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분량의 적고 많음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얼마나 서양 건물과 그림에 매료되었는지는 자주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북원록』은 할러스타인과의 대담이 길게 나와 있는 연행록 중 하나입니다. 이의봉(1733~1801)은 1760년 부친 이휘중을 따라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북원록』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이어 한글본인 『셔원녹』도 같이 남겼습니다. 『북원록』을 보면 20대 중반의 나이로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접하는 그의 진지하고 젊은 열정이 잘 보이는 듯 합니다.
이의봉은 1761년 1월 8일,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바로 천주당으로 달려갑니다. 그 역시 서양식 건물의 화려함에 매료되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묘사와 같이 서술하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설명은 그가 『직방외기』 등 선교사들이 저술한 서적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좋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후 27일에 다시 서천주당으로 가 드디어 할러스타인을 만납니다. 할러스타인은 그를 ‘둥근 계란떡’과 같은 맛있는 다과로 맞이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천문대의 여러 기구들과, 이를 통해 태양을 보여주고, 오르간 연주를 들려주는 등 흠천감을 구경시켜줍니다.
이 다음 여러 차례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할러스타인은 이의봉과 친근한 대화를 나눕니다. 천문학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서양과 서양의 풍습 등을 나누며 할러스타인은 그에게 “대인께서 며칠 머무는 동안에 여러 차례 볼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하며 호감을 표시합니다.
그의 이런 호감은 어떻게 보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57년 그가 남동생 Weichard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조선 사람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조선인은 매년 오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조선인은 맑은 날에
일본의 산을 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일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사실 그들은 천하에 그들이 가장 교활한 사람인
것처럼 말해주지 않는 것에 더 가깝다. 그들은 만나는 시간 내내 질문을 하지만 답변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거처를
방문할 때, 그리고 북경에 오자마자 방문할 때, 그들은 잉크와
서예도구를 요구한다. 그들 중에 중국어를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필담을 이용한다. 우리는 하인을 통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한다. 그들은 천문학에 대해 좋은 질문들을 많이
한다. 만약 그들에게 질문들을 남기면 답변해줄 것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절대 하나의 글자도 남기지 않고 보통 가져가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강하고, 건장하며, 튼튼한 좋은 군인들이다.
그들은 옛 중국인의 복식을 하는데, 지금은 평화의 복식을 하고,
지금은 전쟁의 예복을 입는다. 그들은 절대 굴복시킬 수 없지만
매년 부과되는 세금을 피할 수도 없다.
이 편지에 나타난 조선인의 인식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예수회의 중국 선교의 목적이 일본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선은 일본과 가까운 나라로서 흥미가 있지만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 “가장 교활하”다는 평가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의봉이 할러스타인의 환심을 산 것을 보면, 이는 국적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의봉의 개인적인 인품과 매력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예로 이의봉은 할러스타인과의 대담에서 할러스타인의 묻는 바에 충실히 대답합니다.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귀국에서도 배를 타고 중국에 이르는 것입니까?”
“단지 압록강 한 줄기가 있는데 조그만 거룻배로도 건널 수
있습니다. 서양은 해로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
“대략 오륙만 리 됩니다. 압록강은 바다로 나가는 입구에
있습니까?”
“백두산 꼭대기에서 발원합니다.”
“사방이 대부분 바다일 텐데,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나가는
수로를 알려줄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를 두르고 있는 것은 모두 바다입니다. 의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길만이 왼편으로 발해를 끼고 곧장 육지로 오게
되어 있는데, 오직 옷의 띠처럼 좁은 강 한 줄기가 있을
뿐입니다.”
할러스타인이 조선의 지리에 대해 묻는 것을 보면 그가 조선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 을 고려해 그의 질문을 생각해봅시다. 1750년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역대 황제들이 예수회 선교사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순치제와 강희제에 대한 평가는 친과학, 친예 수회로 내리고 있습니다. 페르비스트가 강희제에게 얻었던 신임을 보면 이 군주들이 학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선교사들에게도 얼 마나 호의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옹정제에서는 이 태도가 변합니다. 그는 서양의 발 달한 천문학은 인정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전에 비해 신앙적 열정을 억눌러야 했다고 할러스타인은 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이 반기독교적 태도가 더욱 강 화되고 과학에 대한 존중마저도 많이 사라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할러스타인은 건륭제가 선교사들을 오로지 정확한 날짜를 알기 위 해 두고 있다고 할 정도로 선교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할 러스타인에게 점차 기독교에게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선교에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752년 포르투갈 왕실에서 보낸 대표단을 할러스타 인이 직접 맞이하면서 그의 입지가 다져집니다. 포르투갈은 직접 할러스타인을 통해 황제를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할러스 타인은 이들을 적절하게 대접함으로써 황제를 만족시켰습니다. 황 제가 포르투갈 대표단에게 유례 없이 호화로운 접대를 하고 많은 선물을 한 것은 그가 서양 왕실과의 접촉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 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한편으로 건륭제는 이듬해 1753년부터 1757년까지 주변을 토벌하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준가르 족을 토벌하고 러시아와의 갈등을 만들면서까지 시베리아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등 중국 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새로 정벌한 지역의 지도를 만들 기 위해 그는 선교사 Felix de Rocha와 Jose d’Espinha를 데리고 갔습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니다. 그들이 측지술을 사용하지 않고 지도를 만들어 바쳤음에도 황제가 만족했다고 할러스타인은 쓰고 있는데, 여기서 당시 예수 회 선교사들이 건륭제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뿐더러 과 학을 모른다는 무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조선의 인식은 변방의 나라이고, 일 본으로 건너가는 나라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766년에 홍대용이 할러스타인을 찾아가 나눈 대화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대마도와 부산이 조선의 어느 현에 있으며, 근년에 왜국 사람과
서로 통합니까?”
“일본에도 또한 자명종이 있습니까?”
이 질문들은 할러스타인의 관심이 조선이 아니라 일본에 있 음을 보여줍니다. 대마도와 부산은 일본의 무역을 알아보기 위함 이고, 또 일본의 자명종은 일본의 기술력이 얼마만큼 올라왔고 또 서양과 어느 정도로 교류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할러스타인의 이런 질문은 중국에서의 선교가 힘들어지고 있고, 또 예수회가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일 본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정 세에 한 발짝 늦은 조선은 크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아쉬 운 부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홍대용은 할러스타인의 냉대를 받았 지만 이것은 그의 잘못으로 보기만은 어려울 것입니다.
마치며
할러스타인과 홍대용의 만남은 이미 몇 개의 연구가 진행되었습니 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1750년대에서 얼마 지나 지 않은 1761년의 이의봉과 할러스타인의 만남은 상대적으로 알 려지지 않았습니다. 둘의 짧지만 깊었던 교감은 둘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서학과 서교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가 있 는 이의봉은 그와의 대담에서 더 발전된 서양의 학문을 배웠을 것 입니다. 할러스타인 역시 비록 조선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안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중국의 동서남 북으로의 확장 속에서도 정복되지 않지만 사대를 다하는 조선이라 는 나라는 독특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 을 보았고, 서양은 중국을 통해서 조선을 본 셈입니다.
참고문헌 홍대용. 『홍대용 담헌서』, 「유포문답」 이의봉. 『북원록』 3. 흠천감에서 만난 서양과 조선_흠천감 김혜경. 2012.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역사와 의미』, 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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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50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