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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세기 조선의 중국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미래의 천하질서를 엿보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베이징을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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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가박물관 · 김아영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이번 동아시아연구원 사랑방 16기 중국국가박물관 답사보고서는 중국국가박물관 청조 시대의 그림 ‘남도번회도’를 주제로 명청교체기 조선의 중국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청나라의 <남도번회도>가 조선의 <태평성시도>에 영향을 주고, 미적 요소들이 전파되는 과정을 당시 문명 표준의 궤적을 추적하며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청나라의 <남도번회도>가 어떻게 조선에서는 <태평성시도>라는 그림으로 자리잡게 될 수 있었는가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이 두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문명 표준’의 예로 상업의 발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상업’이라는 요소를 바탕으로 명청교체기 18세기 당시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청나라와 조선에서의 상황을 살펴보면 비슷한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먼저, 청나라에서는 건륭제 통치 아래 영토의 광대한 확장과 인구의 팽창을 겪으면서 경이로운 발전을 이룩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건륭의 통치방식 입니다. 전 왕조인 명으로부터 중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기본 틀을 빌려오는 한족의 요소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정복자 엘리트로서 자신들의 특별한 이익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에 기반한 청, 만주족 특유 방식의 통치를 행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이후, 과거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던 북벌론을 견지하는 입장과 조선의 미래를 위해 청나라의 발전된 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했던 북학파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통치방식의 한족 요소와 만주족 요소의 공존, 조선의 북벌론과 북학파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명청교체기 명나라의 요소와 청나라의 요소가 공존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번 동아시아연구원 사랑방 16기 중국국가박물관 답사보고서를 통해 18세기 중국과 조선의 상황을 각각 보여주며 18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치학을 중국과 한국 시각으로 보고자 하는 바입니다.

<남도번회도>와 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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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도번회도>는 18세기, 건륭제가 청나라를 통치할 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남도번회도>에는 남경 도시의 상업 흥성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측에서부터 좌측으로 가면서 교외-번화가-궁성의 모습이 차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중 중앙 부분의 번화가가 화폭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 묘사 또한 비교적 더 세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줄지어 늘어선 상점가를 배경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의 수는 천 명이 넘고, 백 개 이상의 간판들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어떤 상점에서 무슨 상품을 취급하고 있는지 까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대목에서 명나라 후기부터 쑤저우(Suzhou)를 통한 무역과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되기 시작된 유럽 미적 양식의 영향(Verisimilitude, life-like)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쑤저우(Suzhou)는 오랫동안 부와 학문, 예술 활동의 가장 안정적인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약 60만 명의 도시와 교외 거주자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하나였으며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부와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이 쑤저우를 포함하는 강남지역은 건륭의 가장 중요한 여행지역 이었습니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약 16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강남 지역은 금전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건륭의 시대에 강남은 중화제국에서 전체 농지의 16퍼센트를 차지했지만, 현금으로(은으로 납부) 정부의 토지세 수익의 29퍼센트를, 현물로는(곡식으로 납부) 정부 세수의 38퍼센트를 제공했으며, 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곡식으로 보내지는 공물의 64퍼센트를 감당했습니다. 이외에도 황제의 윤허 아래 강남 상인들이 운용하는 소금의 전매로부터 발생하는 돈이 모든 국가 재정수입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국내시장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시장을 겨냥하여 생산될 정도로 번창하던 중국의 비단산업은 강남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강남의 도시들은 중국 전역으로 이동하는 차, 자기, 목재, 면화를 비롯한 온갖 상품들이 모이는 주요한 집결지 였습니다. 게다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강남의 중요성은 훨씬 더 두드러집니다. 강남지역 출신 인사들의 과거시험 합격 비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았고 이는 곧 권력의 상층부는 강남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전국적인 문화의 배경에서 사원, 수도원, 정원, 호수, 식당, 도서관 등 강남 지역에서 보이는 유명한 장소들의 수는 압도적이었습니다. 800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들이 이들 장소의 경이로움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시와 수필로 찬미했고 항주, 소주, 양주, 남경 같은 강남의 도시와 그 주변에 있는 명소를 방문한 적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문화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서주번화도는 이러한 강남 지역 쑤저우의 웅장한 도시 인프라를 보여주고 주요 상업 공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상업적 문명적으로 번성하는 쑤저우의 배경은 이 도시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동시에 유럽 미적 양식을 통해서 건륭제

시대 궁정의 자존심과 황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기능합니다.

16세기 이후 서주 지역의 경제가 두드러지게 성장하면서 다수의 서화수장가 집안이 출현하였고 이들이 한정된 서화시장에서 경쟁적으로 서화를 수집하게 되자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안작(贋作: 위조)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흐름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전문화되어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앞선 송대의 청명상하도가 여러 수장가들을 거쳐 당대의 권력가 엄숭의 소장품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보면 쑤저우를 통한 청명상하도의 뜨거운 수장 열기를 반증합니다. 황실수장품이 되었던 청명상하도는 명말 태감 풍보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풍보의 사후 1582년경부터 왕조교체의 혼란기에 다시 한 번 민간에 유전되어서 이후 륙비지(陸費墀: 1731-1790), 필원(畢沅: 1730-1797) 등의 수장을 거쳐 1773년 건륭제의 황실 수장품이 되었습니다. 명청대 청명상하도가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소주에서 다량 제작되었던 데는 소주문인이 중심이 된 수장가들의 수장열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경본 장택단의 청명상하도가 소주의 수장가들에게 수장되고 그 화명이 높아져 경쟁적으로 수장되면서 무명화가들에 의한 소주편 청명상하도와 이에 영향을 받은 서주번화도나 남도번회도와 같은 작품들이 당시 미술시장에 등장하였고 이 같은 사조가 옆 나라 조선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쑤저우를 포함하는 상업적 번성의 메카 강남지역과 장소의 구도, 원근법이나 세밀한 묘사(Verisimilitude, life- like), 명암대비법(chiaroscuro)과 같은 17세기 초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중국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서양화법, 이 두 요소는 중국 청나라 자기 자신의 번성하는 제국과 영토를 이해하고 이러한 영토의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회화적 기술은 당시 건륭제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의 통치를 찬양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청조 건륭의 천하적 통치 체제의 진위를 확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건륭 재임기간(1736-1795)은 청 왕조의 정점이었습니다. 건륭이 권력을 잡은 지 40년이 지나, 삼분한 그의 재위 기간 중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그는 광대한 영토를 포함한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장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기초가 됩니다. 그의 영토는 황해와 인접한 해안가의 부유한 항구 도시에서 고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번화한 도시까지, 폭풍이 휩쓸고 간 동북 지역의 사할린부터 서남부의 눈 덮인 히말라야까지, 열대 밀림 지대인 동남부의 서쌍판납(버마와의 경계지)부터 북쪽에 위치한 몽골의 사막과 초원에까지 이릅니다. 더불어 동일한 중요성을 가졌던 오랜 건륭연간에 발생한 인구의 팽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700년에 1억 5000만 명이었던 중화제국은 1750년에는 2억이 넘어갔고, 1800년에는 3억을 너끈히 넘어섰습니다. 그 성장률은 중국의 인구가 약 4억 1000만의 인구에서 주춤세를 보인 19세기 중반까지 눈에 띄게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해외 무역의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렇게 건륭이 지배한 영토와 인구는 오늘 현대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뿐인 절대군주의 권위 아래 독특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불평등한 방식으로 통합된, 다양한 세력범위와 민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제국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있던 다양한 민족들의 복합체 였으며, 하나의 핵심국가로부터 통제를 받았습니다. 제국 내에는 6부에 의해 관리되는 18성(전통시기 한족의 중국 부분)이 있었고 그것은 전통시기 중국의 군현제의 도, 부, 주, 현 등의 행정체계와 법률, 세금, 호적 등의 제도를 계승했으며, 팔기가 주둔해 지키는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방식으로 관리되었습니다. 건륭의 신민 중 90퍼센트에 해당했던, 2억이 넘는 한족이 가장 부유한 농업지대, 가장 밀집된 상업망과 교통망, 가장 거대한 도시, 가장 분주한 항구, 산업의 중심지, 장인들이 일하는 수많은 공장과 작업장이 있던 본토에 살았습니다. 한편, 만주 몽골 티베트와 운남 귀주 광서와 같은 남부의 성, 그리고 대만은 주변지대로 인구밀도가 매우 낮고 대체로 중국의

∙ ∙ ∙ ∙

중심부보다 훨씬 덜 번성했던 지역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몽골인, 티베트인, 터키인, 묘족처럼 비한족 집단과 같은 다양한 거주민들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경제적으로는 덜 번성했었지만 제국의 안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장소들이었습니다. 이 본토와 주변지대는 각각 관료제도와 준군사적인 행정조직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만주족의 제국은 한(기원전 206~기원후 220), 당(618~907), 송(960~1276), 원(1260~1368), 명 왕조를 계승하는 과거와의 높은 연관성을 인정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 왕조인 명으로부터 중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기본 틀을 빌려왔습니다. 18세기의 중국에서는 이전의 왕조로부터 훌륭한 정부가 되려는 이상을 부여 받았다는 생각이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실험적 비공식적 간접적인 방식으로의 개혁이 진행되었습니다. 정복자 엘리트로서

∙ ∙ 자신들의 특별한 이익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과 교육받은 한족의 지식층을 통치계급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고민했던 건륭을 포함한 청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족의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과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정책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건륭은 이가 청 왕조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청 조정은 모든 한족 남성들에게 복종의 표시로서 만주족의 스타일대로 머리를 깎게 했지만 동시에 관료를 선발하는 방법으로 실효가 입증된 과거제도를 계속 유지해 나가고, 친숙한 유학 위주의 커리큘럼을 고수하는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또 시험 제도를 통해 채용된 한족들이 관료 사회의 하위층과 중간층을 차지하면서도 동시에 최고 의사결정은 만주 정복 엘리트가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태평성시도>와 북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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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태평성시도>를 보면 상업공간, 즉 다양한 상점과 그곳에서 일하는 상인과 손님들의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모습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업활동은 단층이나 2층 건물에 정식으로 점포를 개설하여 영업하는 경우부터 가판을 하거나, 노점을 열어 소규모의 장사를 하는 것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로 점포 앞에 진열하는 물품이 넘쳐서 지붕 밖으로 편평한 지붕을 설치하여 그 아래에 가판을 설치하거나 물건을 진열하는 등 상업활동이 점점 확장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또한 상점 주인과 행인을 비롯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다량의 상품이 풍성하게 묘사되어, 떠들썩하고 붐비는 시장의 분위기를 매우 생생하고 활기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선) 원근법, 생생한 묘사(Verisimilitude, life-like), 명암대비법(Chiaroscuro) 등의 서양화법이 쑤저우의 무역과 선교사를 매개로 청나라를 방문했던 조선 연행사에 의해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한국 회화에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관찰에 의한 사실적 묘사(Verisimilitude, life- like)나 공간감, 거리감(원근법)의 표현 요소 등이 나타나는 것을 파악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많은 화가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회화를 직접 보고 그 영향을 알게 모르게 흡수하였거나 당시 문인(특히 실학파)들의 글에 표현된 서양화의 특징에 관한 정보(흐름)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됩니다. 중국 쑤저우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입된 서양화법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과 실체 서양화의 유입은 당시 조선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조, 시대적 현상을 이룰 만큼 뚜렷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평성시도>를 살펴보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조선시대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명나라를 유교적 이상향이라는 강한 명분적 이념 아래 명나라에 확고한 충성을 보였던 조선, 특히 양반들의 행동을 떠올리면 잘 연결되지 않을 것 입니다. 이들은 조선은 유교적 문화의 중심지인 중국 명나라의 종주국임을 인정, 자부하면서 명나라의 유교 문화에 영향을 받아 상업을 이에 반대되는 것으로 해석, 천시하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는 18세기 북벌론과 연결되는데, 이 시기 청(만주)에 대한 조선의 증오는 두 번의 병자호란 때 겪은 참상과 그에 따른 무거운 조공 요구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조선의 양반들은 전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덜 발달했다고 여겨진 만주족을 멸시했고, 명나라의 위대한 유교 문화의 파괴자로서 만주, 청나라를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 초에 걸쳐 조선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았을 때, 조선의 정치권은 특히 노론파가 지배했는데, 그들의 정치이념적 성향은 유교 해석에 대한 다소 광신적인 믿음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 송시열과 그 노선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양반들이 북벌론으로 표현되는 사상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태평성시도>라는 그림이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보여주듯이, 조선시대에도 상업적 요소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북학파들의 존재를 살펴보기 시작하면 이 그림과의 연결고리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북학파는 조선 후기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일련의 실학자들을 지칭합니다. 명분(명나라, 이념)보다 실리(청나라, 상업)를 주장한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북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업을 중시했으며 대외무역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북학파 내에서도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존재했고 이 차이는 상업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종래 주자학을 숭봉하는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실학파 학자들도 농업을 중요시하고 상업은 말리라 하여 천시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박제가는 상업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했습니다. 그는 1778년(정조 2년) 사은사 체재공을 수행하여 처음으로 연행에 동참하였었고 귀국 후의 체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했던 ‘북학의’ 에서 상업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장사를 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거기서는 장사꾼으로 나서도 그 사람의 풍류와 명예는 제대로

인정받는다. 그렇게 때문에 유생이 서사에 직접 출입하며, 혹은

재상들도 친히 융복사 시장에 가서 골동품을 사기도 한다. 지체

높은 사람이 물건을 사러 융복사에 온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는 것을 모두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니다. 지금 청국의 이

풍속은 어제 오늘 비롯된 것이 아니다. 벌써 명, 송 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치레만 알고 뒤돌아보며

꺼리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는 놀고먹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없다.

사대부로서 가난하다고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 없고,

짧은 바지에다 대나무 껍질 갓을 쓰고 저자에서 물건을

매매하거나 자와 먹통, 칼과 끌을 가지고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면 그를 위해서 부끄러워하고 우습게 여겨서 혼인길마저 끊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집에 비록 한 푼의 돈이 없는

자라도 높다란 갓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으로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입는 옷이며 먹는 양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들은 권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이 열리고 청탁하는 버릇이 생겼으니, 시정의 장사치도

그들이 먹던 나머지를 더럽다 할 것이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이

장사하는 것보다 못함이 분명하다. (p. 106)

박제가는 이 대목에서 장사(상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나라 사대부는 겉치레에만 신경 쓰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기만 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 민생이 날로 곤궁해지고 재용(재물의 용도)이 날로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궁핍해지는데 사대부, 즉 양반은 팔짱만 낀 채 구원하지 않으려 하고 옛 것에만 의존하여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이를 모르는 것이냐며 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또다른 북학파의 일원이었던 연암 박지원의 책 ‘열하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 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도강록 中 6월 28일 을해일)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은 바다 저 한 편 구석에서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도록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는, 반딧불처럼 나부끼고 버섯처럼 말라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詩篇)으로써 큰 나라의

책에 실리게 됨은 실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나, 우물에

떨어진 모수(毛遂)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하던

진공(陳公)이 있다는 것은 불행히도 너무 지나친가 봅니다.

(태학유관록 中 가을 8월 9일 을묘)

이 둘은 우리나라 선비, 즉 양반들의 어리석음과 편협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양반들은 세계의 한 구석에서 탄생한 존재이므로 선천적으로 한편으로 치우치는 기질을 타고 났다고 했습니다. 발로는 한 번도 중국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으로는 중국 사람을 보지도 못한 채, 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이 나라 영토(조선)을 떠날 기회가 없이 마치 우물 안 개구리나 나뭇가지 하나에만 둥우리를 트는 뱁새에 비유하는 그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박제가의 책 ‘북학의’나 ‘북학파’라는 단어에서 이 ‘북학’이란 단어는 『맹자(孟子)』에 나온 말로, 중국, 당시 청나라를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북벌론’으로 알 수 있듯이 당시 시대 풍조로 보아 박제가가 주장한 것처럼 청나라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혁명적이고 극단적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외정책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와 사대의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풍조가 대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제가는 이러한 시대 풍조에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받게 될 박해도 무릅쓰고 구국 구빈(救貧)의 길이 오직 북학밖에 없음을 역설했습니다. 이는 그가 당시 사회에 멸시 받던 서얼 출신이었기에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혀 있었던 배경을 알면 더욱 이해가 갑니다. 그는 지금 현재, 즉 청나라 당시 중국 사람들은 깎은 머리에다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 풍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결과적으로 하, 은, 주 3대 이래 한, 당 송, 명을 거친 중화이며 한, 당, 송, 명의 옛 법과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북학의 정당화 논리를 북벌론과 함께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학을 통해 힘을 기른 다음에 북벌을 도모하자는, 북벌을 위해서는 북학을 통한 이용후생을 통해 조선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알리고 싶은 바는 진실로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려면, 즉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진실로 스승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의 국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는 스스로 주나라이며, 이적은 스스로 이적이다. 대저

주나라와 이적은 반드시 분간이 있었다. 이적이 화하를 어지럽게

했다 하여 오래된 주나라마저 배척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 청나라가 이미 천하를 차지한 지가 백여 년이 되었으나, 그 지역은 옛날 화하(중국) 사람들의 자녀와 예의가 난 그곳이며, 궁실, 주거, 경종하는 방법과 최, 노, 왕, 사와 같은 사대부의 씨족이 그대로 있다. 그 사람들마저 덮어놓고 이적이라 하고 그 법마저 함께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우면 그 법이 바로 이적한테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이 장차 취할 것이다. 하물며 본래부터의 중국 법이야 말해 무엇 하랴. 지금의 중국 법이 배울 만한 것이라고 말하면 여러 사람이∙∙∙들고 일어나서 비웃는다. 필부도 원수를 갚으려고 할 때는 원수가 차고 있는 예리한 칼을 빼앗으려고 생각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당당한 천승의 나라로서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면서도 중국 법을 한 가지도 배우지 않으며 중국 선비를 한 사람도 사귀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 백성들만 괴롭게 했다. 그러나 아무 공도 없었으며 곤궁과 기아에 빠져 스스로 중지했던 것이다. 백 배나 되는 이로움을 버리고 실행하지 않으니 중국의 오랑캐를 물리칠 겨를이 없이 동국의 오랑캐 같은 풍속도 다 변화시키지 못할까 나는 염려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하면 누가 오랑캐인지를 알아야 하며, 중국을 숭상하려면 그들이 남긴 법을 다 행하는 것이 더욱 숭상하는 것이 된다. 대저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으려면 이십여 년을 힘써 중국을 배운 뒤에 함께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p. 284)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연암 박지원도 박제가의 논리처럼 청나라의 법과 제도가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본받아야 하고, 더욱이 지금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는 삼대(하 은 주) 이래 제왕들의 법도와 역대 국가들이 가졌던 옛 것이고 떳떳한 것이므로 이를 배울 필요성이

∙ ∙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수많은 형제들의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도강록

中 7월 초5일 신사일)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聖帝)ㆍ명왕(明王)과 한ㆍ당ㆍ송ㆍ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적(固有的)인 옛것인들 어떨쏘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서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ㆍ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일신수필 中 7월 15일 신묘일)

더 나아가 박지원도 ‘허생전’을 통해 북벌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폭로하며 동시에 박제가처럼 북벌을 위한 북학의 논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허생은,‘이것두 어렵구 저것두 못한다 하니 그러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가장 쉬운 일 하나 있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한다. 이공은, ‘듣고자 원하옵니다.’ 했다.

허생은, ‘대체로 대의(大義)를 온 천하에 외치고자 한다면, 첫째

천하의 호걸을 먼저 사귀어 맺어야 할 것이요, 남의 나라를

치고자 한다면 먼저 간첩(間諜)을 쓰지 않고서는 이룩하지

못하는 법이야. 이제 만주(滿洲 청(淸))가 갑자기 천하를 맡아서

제 아직 중국 사람과는 친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판 아닌가.

그럴 즈음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솔선적(率先的)으로

항복하였은즉 저편에서는 가장 우리를 믿어 줄 만한 사정이

아닌가. 이제 곧 그들에게 청하기를, 우리 자제들을 귀국에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보내어 학문도 배우려니와 벼슬도 하여 옛날 당(唐)ㆍ원(元)의

고사(故事)를 본받고, 나아가 장사치들의 출입까지도 금하지

말아 달라 하면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친절을 달콤하게 여겨서

환영할 테니 그제야 국내의 자제를 가려 뽑아서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지식층(知識層)은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세민(細民)들은 멀리 강남(江南)에 장사로 스며들어

그들의 모든 허실(虛實)을 엿보며, 그들의 호걸(豪傑)을

체결(締結)하고선 그제야 천하의 일을 꾀함직 하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러고는 임금을 세우되 주씨(朱氏)를

물색(物色)해도 나서지 않는다면 천하의 제후(諸侯)들을 거느려

사람을 하늘에 추천한다면, 우리나라는 잘되면 대국(大國)의

스승 노릇을 할 것이요, 그렇지 못할지라도 백구(伯舅)의 나라는

무난할 게 아냐.’ 한다.

이공은 무연(憮然)히, ‘요즘 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들 삼가

예법(禮法)을 지키는 판이어서 누가 과감하게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겠습니까.’ 했다.

허생은 목소리를 높여, ‘이놈, 소위 사대부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이(彛)ㆍ맥(貊)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느냐. 바지나 저고리를 온통 희게만

하니 이는 실로 상인(喪人)의 차림이요, 머리털을 한 데 묶어서

송곳같이 찌는 것은 곧 남만(南蠻)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니,

무엇이 예법(禮法)이니 아니니 하고 뽐낼 게 있으랴. 옛날 번오기(樊於期)는 사사로운 원망을 갚기 위하여 머리 잘리기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자기의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호복(胡服) 입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거늘, 이제

너희들은 대명(大明)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끼며, 또 앞으로 장차

말달리기ㆍ칼치기ㆍ창찌르기ㆍ활 튀기기ㆍ돌팔매 던지기 등에

종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서 제

딴은 이게 예법이라 한단 말이냐. 내가 평생 처음으로 세 가지의

꾀를 가르쳤으되, 너는 그 중 한 가지도 하지 못하면서 네 딴에

신임받는 신하라 하니, 소위 신임 받는 신하가 겨우 이렇단

말이냐. 이런 놈은 베어 버려야 하겠군.’ 하고는,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옥갑야화)

∙∙∙

또다른 조선 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이 지은 자연관 및 과학사상서인 ‘의산문답’에서도 북학파 학자들의 이용후생(상업)의 강조와 중국(명나라) 중심의 천하사상으로부터의 탈피와 관련된 중국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是以古人之澤民御世, 未嘗不資法於物。君臣之儀, 盖取諸蜂,

兵陣之法, 盖取諸蟻, 禮節之制, 盖取諸拱鼠, 網罟之設,

盖取諸蜘蛛, 故曰聖人師萬物。今爾曷不以天視物,

而猶以人視物也?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이런 까닭에 옛사람들은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제로 만물에서 배워 본받았다. 임금과 신하의

예의는 대개 벌들에게서 취했고, 군대의 진법은 대체로

개미들에게서 취했으며, 예절의 법도는 다람쥐에게서 취하고,

그물을 치는 것은 거미에게서 취했다. 그래서 성인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어찌 하늘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가? (p. 38)

너희들은 이(理)를 말하며 성(性)을 논하면서 툭하면 하늘을

∙일∙∙ 컬으나, 하늘이 명(命)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仁)으로써 논한다면 범과 메뚜기ㆍ누에ㆍ벌ㆍ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요, 또 그

선악으로써 따진다면 뻔뻔스레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하의 큰 도(盜)가 아니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큰 적(賊)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글을 읽어

본즉, 말이 많이들 이치에 어긋나서 저 거∙협∙∙ (胠篋)ㆍ도척(盜跖)과

뜻이 같다. 그러나 온 천하의 뜻있는 선비가 어찌 하룬들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청(淸)이 천하의 주인이 된 지 겨우 네

대째건마는 그들은 모두 문무가 겸전하고 수고(壽考)를 길이

누렸으며, 승평을 노래한 지 백 년 동안에 온 누리가 고요하니, 이는 한(漢)ㆍ당(唐) 때에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편안히 터를 닦고 모든 건설하는 뜻을 볼 때에 이 또한 하느님의 배치(配置)한 명리(命吏 제왕을 일컬음)가 아닐 수 없겠다.

이제 나는 감히 묻노니, “하느님께선 모든 실천과 사실로써 ∙그∙∙ 의 의사를 표시하실진대, 저 오랑캐의 제도로써 중국의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은 천하의 커다란 모욕인만큼 저 인민들의 원통함이 그 어떠하며,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들의 닦은 덕(德)에 따라 다른 것이니, 백신(百神)은 그 어떤 냄새를 응감할 것인가.요컨대, 사람으로서 보면 중화(中華)와 이적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마는 하늘로서 본다면 은(殷)의 우관(冔冠)이나 주(周)의 면류(冕旒)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하였거니, 어찌 반드시 청인(淸人)들의 홍모(紅帽)만을 의심하리오 (관내정사 中 호질)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 대들이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ㆍ말ㆍ닭ㆍ개 같은 것에나 맞는 이치다. 하늘이 이를 준 것이 반드시 구부려서 무엇을 씹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면 코끼리에게는 쓸데없는 어금니를 주어서 입을 땅에 닿으려고 하면 이가 먼저 땅에 걸리니 물건을 씹는 데도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대체로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에 ∙있∙∙ 어 모를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도 만 배나 복잡함에랴.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그러므로 성인이 《역경》을 지을 때 코끼리 상(象) 자를 따서

지은 것도 이 코끼리 같은 형상을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연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산장잡기 中 상기)

유학에서는 천지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로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의 처지에서 보면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자연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연암의 ‘호질’이 북벌론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보다 근본적 시각에서 인간 중심의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산장잡기의 ‘상기’에서도 하늘을 인격적 창조주로 보고 매사를 이로 해석하려는 경직된 주자학적 사유 체계를 비판하고, 개방적 사유로 만물의 무궁한 변화를 탐구해야 한다는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간 중심의 문명론 해체는 중국(명나라) 중심의 천하관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나가며

<남도번회도>의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이 통치하며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인구의 팽창을 경험하며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다양한 세력범위와 민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영토를 독특한 청조의 통치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이전 왕조인 명으로부터 중국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기본 틀을 빌려오면서도 만주족만의 통치방식도 이용하여 정복자 엘리트로서 자신들의 특별한 이익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과 교육받은 한족의 지식층을 통치계급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만주족의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과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정책 사이의 균형점을 찾고자 했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은 <태평성시도>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국제정치학적으로는 북벌과 북학의 대립이 팽팽한 상태였습니다. 청 이전 왕조인 명에 대한 유교적 명분의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론과 청(만주족)의 발전된 문명을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우자라고 주장하는 북학파의 대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박제가의 북학의, 홍대용의 의산문답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북학파의 사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기존 명나라 중심의 중국관을 거부합니다. 신분적으로 양반가 자제였던 홍대용과 박지원은 유학에서의 인간 중심적 사상을 거부합니다.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와 박지원은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 조선의 미래를 위해 배울 점은 배우자라는 태도와 기존 양반의 행태와 그들이 주장하는 북벌론의 모순을 다소 신랄하게 지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상업과 관련된 이용후생의 측면이 2. 청의 <남도번회도>와 조선의 <태평성시도>: 18 세기 조선의 중국관_중국국가박물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통치방식에서의 한족(명)과 만주족(청)요소의 공존과 조선에서의 북벌론(명)과 북학파(청)의 대립은 같은 시기 다른 공간에서 명나라의 요소와 청나라의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비슷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청의 <남도번회도>에서 출발하여 조선의 <태평성시도>로 이어지는 ‘상업’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문명 표준의 전파를 고찰하는 작업은 쑤저우를 통한 유럽 미적양식의 전파과정을 살펴보며 18세기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학의 중심국이었던 중국과 그 옆에 있던 작은 나라 한국의 나름 비슷했던 국제정치의 흐름을 초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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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祥馥, 4종의 繪畵로 살핀 16-17세기 中日 도시축제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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