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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중심을 찾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분류
EAI 사랑방 답사기
발행일
2026년 5월 14일

한일교류박물관 · 문예찬 · KDI 국제정책대학원

들어가며

한일관계는 개선을 논하는 관계다.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관계라 할 수 있다. 한일 관계는 갈등과 대립을 지속하며 전개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은 다양한 외교적 문제를 발생시켰는데, 전쟁포로(조선피로인) 문제는 조선과 일본 양국이 논의하는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조선은 왜란 이후 통신사를 파견하여 조선피로인들을 조선으로 데려오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후에 발생한 피로인 쇄환(刷還)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논의되었으며, 몇 명의 조선인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을까? 본 연구는 피로인들의 쇄환과정 중 발생한 제약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조선피로인 개인적 차원에서 조선 본국으로의 쇄환에 관한 자의적, 타의적 거부를 논의하며, 쇄환의 제약요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는 해사록(海槎錄)을 연구범위로 설정하여, 그 안에서 이루어진 피로인 쇄환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해사록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실린 견문록으로써 일본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정식사행 기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문신 경섬은 통신부사로 사행에 참석하였고, 8개월간의 일정을 일기 형태로 기록하였다. 해사록은 선조, 예조참의 등의 서신을 비롯한 공식문서, 개인서신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특히, 쇄환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본 연구는 해사록을 문헌연구하여 그 안에 나타나있는 쇄환과정과 제약요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쇄환은 임진왜란 이후 한일관계 논의에 있어 주요 연구주제로 다루어졌다. 특히, 회답겸쇄환사 파견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손승철(2006)은 회답겸쇄환사의 파견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시대 한일관계를 조망하였으며, 이훈(2014)은 회답겸쇄환사를 중심으로 대일외교전략을 분석하였다. 김정호(2016)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 기 이루어졌던 쇄환교섭을 비교분석하여 정치외교사적 특성을 도출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통신사 외교는 조선시대의 한일관계 분석을 위해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왔다. 조선통신사의 의례에 초점을 맞추어, 통신사의 기록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변화 양상을 분석하였으며(송지원 2011), 통신사 의례와 한일 외교관계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하우봉 2011). 또한, 이재훈(2012)은 통신사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대일관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에 관한 부정적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조선시대 이루어졌던 한일관계를 설명하여, 조선의 사신파견이 양국 외교관계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쇄환과정에서의 제약논의를 활발히 다루지 않았고, 쇄환 자체에 초점을 맞추거나 시기별 논의를 통해 비교분석을 진행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여 해사록을 통해 선조시기 쇄환과정의 제약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기존의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던 쇄환과정을 개인적 차원에서 논의함으로써 새로운 연구기반을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는 쇄환과정 연구에 있어 기존과 다른 접근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임진왜란피로인 문제

해사록은 조선피로인 쇄환과정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인식 역시 알 수 있는 문서이다. 가령 교활한 왜인이라고 표현하며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탐욕, 사나움 등을 통해 일본인들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상기하는 장면 역시 지속적으로 노출되는데, 귀무덤, 임진년 난리 등의 언급을 통해 임진왜란의 비극을 나타내고 있다. 해사록은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 간 인식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의 경우 조선피로인의 쇄환은 일본과의 국교회복의 조건으로 내세우며, 피로인 전원 쇄환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 역시 쇄환을 통해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대마도에 초점을 맞추어 외교, 무역 이익 증대를 모색하였다. 이 외에도 일본은 피로인 쇄환에 관한 원칙을 세우기도 하였다.

<표 1> 조선피로인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구분 조선 일본 쇄환의 국교회복을 위한 선행

조선과의 우호관계 유지 목적 조건

1. 대마도의 독점적 외교를 통한 주요 1. 피로인 전원쇄환을 무역 이익 확보를 목적으로 함 내용 목적으로 함 2. 피로인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다는 원칙 유지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해사록의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다. 경섬 일행은 1607년 1월 12일 한양을 출발하여 2월 29일 부산에서 출항하였고 3월 3일 쓰시마에 도착하였다. 이후 4월 7일에 오사카에 도착했으며, 12일에 교토에 입성하였다. 당시 쇼군이 있던 에도(도쿄)에는 5월 24일 도착하였으며, 6월 6일 국서를 전달하며 조선 피로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사행록에 등장한 회답겸쇄환사는 공식적인 사절이라기 보다는 임시적 성격이 컸다. 일본의 국내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막부정부의 진의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한 성격도 존재하였다.

해사록에는 피로인에 관한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에도에 가는 기록에서는 피로인에 관한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조선 피로인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다루어졌으며, 통신사 행령을 바라보는 조선 출신 여인의 눈물을 통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위치한 조선 피로인들은 귀국을 희망하기도 했으나, 다양한 요인으로 제약 받았다.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는 피로인들도 있었고, 일본 사람들과 결혼을 하며 배우자의 허락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록에는 다양한 제약 요인을 피해 귀국행렬의 합류하는 피로인들의 모습 역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은 대부분의 피로인들이 노예의 상태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한편, 피로인들의 소재 파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들을 숨겨놓은 경우가 많았으며, 피로인들의 귀국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다만, 일부 다이묘들은 조선 피로인들의 쇄환에 도움을 주며 수십 명씩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사행록에 나타난 임진왜란 피로인 문제는 일반적으로 쇄환 제약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되었다. 조선 피로인의 귀국을 위해서는 피로인들의 감시와 억류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으며 한 번에 통신사 활동으로는 다양한 요인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존재하였다.

조선 피로인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며 쇄환을 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1607년의 회답겸쇄환사는 다양한 제약요인 속에서 총 1,418명을 쇄환시켰다. 해사록에서는 이러한 수치에 대해 ‘지금 쇄환해 오는 수는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도 못된다.’고 말하며, 조선 피로인 문제에 관한 다양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쇄환과정에서 나타난 제약요인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입장 차이로 실제 진행 과정에서 나타났다. 특히, 국가적 차원의 논의가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조선 본국으로의 쇄환이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조선피로인의 경우, 일본 궁중에서 소임을 맡기도 하였으며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잡아 쇄환 요청을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거부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여 배우자의 반대로 쇄환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표 2> 쇄환의 거부 요인

구분 주요내용

1. 일본에서 삶의 터전 마련

자의적 거부

2. 조선 쇄환에 관한 의지 부재

타의적 거부 1. 일본인과의 혼례, 배우자의 쇄환 거부

쇄환외교의 한계

해사록에 나타난 쇄환외교는 다양한 한계를 직면하였다. 우선 피로인들의 소재 파악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에 흩어져 있는 피로인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피로인들의 귀국 의사 파악 역시 일일이 진행하기에는 시간적 제약이 존재하였다. 더욱이 피로인들의 의사에 따라 귀국을 허용하는 일본 관백의 명령과 피로인 쇄환의 원칙이 존재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지켜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노예의 모습을 하고 있던 조선 피로인들은 그 주인들이 피로인들을 숨기며 쇄환을 거부하였고, 일부 피로인들은 일본에서의 삶을 편히 느끼며 돌아오려 하지 않기도 하였다. 쇄환외교의 한계는 피로인들의 내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에 따른 외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선 내부적 요인의 경우, 조선 피로인들의 삶과 직결되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인들은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조선 귀국을 위해서는 일본인의 허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었다. 비록, 일본 관백에서는 피로인들의 의사에 따른 쇄환 여부 결정이라는 원칙을 세웠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개인의 노예관계에 까지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과 일본의 쇄환외교에는 임진왜란으로 기인하는 다양한 정치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일본의 쇄환 과정 및 의지에 관한 조선의 불신일 자리잡고 있었다. 전쟁포로가 된 피로인들을 다시 조선으로 쇄환하려는 선조 및 조선 조정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피로인의 쇄환을 국교회복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우면서, 그 어떤 요건 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양국의 불신은 쇄환교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사행록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 이루어진 쇄환외교를 기술하면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가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보여준 한계 역시 전달하고 있다. 우선, 사행록에서는 지속적으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쇄환의지에 관한 부정적 인식이 표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통신사들은 비교적 협조적인 쓰시마와 에도의 관리들을 만나며 쇄환의 가능성을 높게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쇄환외교의 성과는 전체 피로인의 수에 대비하여 가시적이지 않았다. 1,500여명을 쇄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전체 피로인에 비해 매우 적은 수치였다. 이러한 결과는 이후 전개되었던 통신사 행령을 통해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사행록이 기술한 1607년 당시에 쇄환외교는 왜란 이후의 최초의 양국 외교라는 점에서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행록 이후 해행총재에 기록된 쇄환교섭은 일본의 적극적인 쇄환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1607년에 나타났던 일본 관리의 협조적 모습과 피로인 쇄환에 관한 적극적인 조치 및 원칙 역시 옅어졌다. 일본의 쇄환교섭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지가 약화되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 통신사들의 불신 강화로 이어졌다. 사행록에 나타난 쇄환외교 교섭은 최초의 쇄환교섭이라는 특성 덕분에 쇄환외교의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후 나타난 쇄환교섭에서는 일본의 소극적인 외교적 태도로 쇄환교섭의 한계를 직면하였다.

한편, 이 외에도 조선 정부가 취한 피로인들의 귀국 이후 조치는 지속가능한 쇄환교섭 구축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 정부가 귀국한 피로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과 관련 조치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열흘 분의 식량을 주었다는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의 삶을 모두 내려놓고 돌아온 피로인들을 위한 장기적인 정책과 관련 제도적 기반은 구축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피로인들의 고향에 돌아가 다시 삶의 터전을 만들고 정착할 수 있는 지원 역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 선조 및 조선 조정이 지닌 한계이며, 조선 내부적으로도 피로인들을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피해에 따른 국가 재건을 위한 노력을 먼저 진행하기 보다는, 조선 피로인 쇄환에 더욱 초점을 맞추면서, 피로인들을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대책 없이 지속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쇄환교섭을 전개하였다.

쇄환외교의 한계는 조선 피로인의 내부적요인과 일본과 조선 외교 관계의 외부적요인, 그리고 조선 정부 차원의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은 지속적으로 쇄환에 관한 의지를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외교사적 특성은 향후 한일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맺는말

지금까지 해사록을 살펴보며 1607년 조선시대 쇄환교섭의 전개과정과 한계를 논의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수 많은 피로인들이 생겨났고, 일본으로 건나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선조는 왜란 이후 발생한 피로인 쇄환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며 국교회복을 위한 주요 조건으로 내세운다. 이를 위해 1607년 조선통신사가 파견되고 쇄환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쇄환 과정에서는 여러 제약 요인이 발견되었다. 조선피로인 개인의 의사에 따른 내부적 요인 역시 작용하였고,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관계, 조선 내부의 정치적 상황 역시 피로인 쇄환에 여러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쇄환 과정은 현재의 한일관계에서도 함의하는 바가 크며, 양국은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나갈 필요가 있다.

쇄환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던 것은 서로에 관한 불신과 양면성에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강한 쇄환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역시 비교적 협력적 자세를 보였지만, 이후 쇄환교섭에서는 소극적 모습을 보이며 양면적 자세를 취했다. 양국의 불신과 양면성은 쇄환교섭의 가시적 성과를 달성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으며, 양국 간 관계 개선과 국교 회복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행록과 조선과 일본의 쇄환교섭은 현재 한일관계게 있어 양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말해준다. 아직까지도 한일 양국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양면성을 보일 때가 많다. 형식적인 외교관계는 가시적인 관계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한일관계는 여전히 갈등 속에 놓여있다.

불신을 넘어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필요하다.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속가능한 관계 개선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 지향적 관계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양국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과거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문제부터 논의한다면, 한일관계는 교착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민주주의, 인권 등을 골자로 하는 가치외교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으며, 미국은 북핵 문제 역시 한미일 공조체계로 해결하고자 한다. 한일관계의 구조적 개선 없이는 한미일 공조는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한일관계 개선은 서로에 대한 신뢰 확보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에 얽매이게 되면 불신만 강화될 뿐이다. 새로운 의제를 중심으로 한일 대화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이든 행정부와 가치외교의 등장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한국과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 기후변화, 9. 조선통신사의 임진왜란 피로인 쇄환외교: <해사록>을 중심으로_한일교류박물관 한반도 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필요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한일관계의 불신을 넘어 신뢰와 협력의 한일관계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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