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중심을 찾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청일강화박물관 · 차지윤 · 북경대학교
I. 들어가며
시간을 되돌려 136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일본의 항구도시 시모노세키에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까. 배 위에선 리훙장은 어떤 심정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 보았을까.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이 일본에 패배하고 굴욕적인 청일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을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토 히로부미는 어떠한 꿈을 꾸었고, 요동반도를 드디어 손에 넣었다고 생각 했을 때 일어난 삼국간섭에 그는 요동반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어떤 저울질을 했을까.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에서의 타국 간섭 최소화를 목표로 대외전략을 차근차근 짜고 있었다. 한 예로 동학농민운동 초기엔 일본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청나라와 함께 조선의 내정간섭을 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켄일전쟁의 승리를 얻은 일본은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간섭을 도모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얻고 또 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 받았다. 이렇게 극동지역에서 청일전쟁의 막이 내릴 줄 알았지만 일본은 곧바로 프랑스 러시아 독일(이하 프러독) 삼국간섭이라는 커다란 장애물 앞에 서게 된다.
본문은 삼국간섭을 서구열강이 극동지역에서 국익과 영향력 유지의 수단으로 본다. 동시에 삼국간섭은 청일간 요동반도 할양 문제를 국제화시킨 러시아의 묘책으로 본다. 만일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면 서구열강들이 한반도에서 이익 존재 여부를 따져 봐야 하고 둘째로 간섭 필요 유무도 고려해 봐야 하는거다. 조건이 모두 갖춰졌음에도 간섭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있을텐데 본문에선 19세기말 일본이 극동지역 주역으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전후 요동반도 할양 문제의 국제화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액터(actor) 수를 최소화 시킴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청일전쟁 후 국력이 다소 쇠퇴한 악조건 하 서구열강들과 직접적인 충돌을 면하는 절묘한 줄타기를 한 것 이라고 가정한다.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일본은 교묘히 요동반도에 프러독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삼국의 간섭을 허용함으로써 구미국가의 관심을 요동반도에 두게 했다. 궁극적으로 승전으로 인한 서구열강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와 일본의 대조선 정책노선 조정간에 시너지가 생겨 한반도에서의 액터 수를 최소화시켰다. 그 외에 구미국가들의 직접적인 이익 소재의 요동반도에서 일본이 어느 정도 타협을 봐 조선에서의 삼국간섭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이 보여줬던 태도의 전환, 즉 강경한 입장에서 수용하는 입장으로 바뀐 점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일본이 삼국간섭이라는 "악재" 속에 뒀던 묘수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청일전쟁 후 조선에 러시아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지만 이를 본문에선 러시아의 외교적 실수로 간주하고 일본의 반러 정서를 불 붙임과 동시에 러일전쟁의 시발점으로 본다.
II. 청일전쟁 전후(前後)약사
일본은 페리 제독 흑선(黑船) 사건후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비약적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냈다. 그 사이 일본은 적극적으로 구미국가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배워 오고 국내에선 자본주의의 꽃이 만개하게 되었다.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국내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을 초청해 파티도 열고 회의를 갖는 등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청나라는 19세기 말 청일전쟁 이전 자국 영토가 열강에 의해 나눠 먹혔다. 청은 러시아와 신장(新疆)과 동북지역 영토를 놓고 다툼이 잦았다. 영국은 자신들의 제국에 티벳을 포함시키려 했고 프랑스와의 청프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이였다. 물론 청나라도 자신 나름대로 중체서용(中體西用)론을 내건 양무(洋务)운동으로 부국강병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꿈이였을 뿐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청나라 정부에 실망감이 나날히 커져만 갔다. 리훙장은 일본에 경계심을 갖기 보단 오히려 믿는쪽을 선택했고 19세기 80년대에는 연일방아(联日防俄, 일본과 연합해 러시아를 견제하자)라는 생각조차 하게 된다.
19세기말 한반도에서는 잠깐이나마 권력의 진공상태라는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 사이 한반도에서는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사람들의 삶은 고단했으며 왕실은 국내에서 터진 사건들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이는 훗날 무쓰 무네미쓰(陆奥宗光)가 말했듯이 일본 정부에게 조선을 장악할 수 있는 매우 좋은 핑계거리를 주었다.
조선 정부는 결국 청나라에 손을 내밀게 되었고 청이 파병을 하자 일본도 청일 톈진조약의 내용에 의거해 군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에도 일본이 철병 거부하였고 수개월 뒤 일본이 청을 급습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육지와 바다 두 전장에서 수차례의 충돌이 있었고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최종적으로 황해해전에서 청의 대패로 전의를 상실한 청은 3월 9일 일본의 육지전 승리를 끝으로 청일전쟁의 막이 내렸다.
청일전쟁의 본질에 대해 이미 많은 토론과 연구가 이뤄졌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밑거름 삼아 청일전쟁의 본질은 추상적 관습적 역사적인 국가 간 관계를 근대 국제정치에 투영해 제도를 정리하려는 청의 시도와 실제의 힘의 차이에 기반 및 그 차이를 반영한 제도를 구축하려는 일본의 시도 간의 충돌이라고 생각한다. 즉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의 서막인 것이지 조선의 속방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청일전쟁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바이다. 청일전쟁의 주된 목적은 간략하게 발판마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대륙으로의 진출의 꿈을 실현해 대일본제국을 세우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물론 기존 청일전쟁의 연구 중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 무게를 둬 청일전쟁에서 조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존재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실제로 회담 이전부터 일본이 조선의 땅을 욕심냈다는 걸 리훙장은 알고 있었다.1 리훙장 그리고 청에게 있어 조선이 가진 의미는 상당했다. 많은 왕국들이 청의 천하질서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목격해 온 청은 사대관계의 전통을 고수하는 조선에 집착을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883년부터 프랑스에 2차례 연달아 패전한 청나라는 1885년 3월에 일어난 1 “日本欲吞朝鲜已久”(번역: 일본은 조선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싶어했 다.),《李文忠公全集》,《译署函稿》,第1卷,第13页。 영국의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영국이 본래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던 조청의 속방관계를 공개적으로 승인하게끔 했다. 이러한 집착은 청나라의 마지막 몐즈(面子,자존심)으로 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주로 다룰 내용은 앞서 말한 이미 연구가 많이 진행된 청일전쟁에 관한 내용이 아닌 그 후의 일이다. 중국 요동반도에서는 열강들의 이익 다툼이 삼국간섭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만 삼국간섭과 비슷한 맥락의 다툼 또는 서방국가들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가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부분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일본의 대(對)조선 외교정책의 변화가 일본이 조선반도에서 청과 타 서방국가들의 개입을 최소화시켰고 그들의 시선을 요동반도에 집중시킨 결과 조선에서의 장악력을 키워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본문에서 다루는 가설은 총 3가지 부분을 입증해야 설득력이 충분해진다. 첫째로 일본의 대조선 외교정책에 실제로 변화가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하였는지. 둘째로 일본이 청은 물론이고 어떻게 요동반도에는 간섭을 한 서방열강들을 한반도에서는 관심을 못두게 했는지. 마지막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간섭을 도모한 러시아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였고 그 결과가 어떤지가 중요하다.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III. 요동반도에서의 삼국간섭과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
3.1. 삼국간섭과 요동반도가 가진 전략적 의미
삼국간섭이란 1895년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下关条约)에서 인정된 일본의 요동반도(辽东半岛) 영유(领有)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공동간섭이다.
요동반도에는 뤼순항는 물론 다롄항등 매우 좋은 부동항들이 있었고 중국은 물론 다른 국가와 교역을하기 위해 서방국가들은 그 항구들을 거의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요동반도를 점유하는게 제일 효과적이였고 프러독 삼국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3국간섭은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에도 청국을 분할하는 단서를 열어주어, 1898년 3월에는 독일군이 교주만(胶州湾)에 상륙하였고,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요동반도를 조차하였다. 그만큼 요동반도를 점유하고자 하는 열강들이 많았고 그 중 일본이 선수를 쳤지만 삼국간섭으로 인해 잃어버리게 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회담에서 일본 측은 요동반도의 영유를 희망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구화 조약이 담긴 내용 총 10조을 리훙장에게 전달했는데 그 중 제1조이 조선의 자주독립이고 총10조중 4조가 요동반도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일본 측의 이러한 요구를 리훙장은 일본이 “조선의 자주,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 배상, 항구도시 개방을 추가적으로 원하다”고 정리해 청나라에 전보를 보냈다. 4일 뒤 리훙장은 요동반도 지역은 할양이 어렵다고 제시했다. 일본 측에서 계속해서 양보를 못 한다고 어필하자 요동반도 전부는 어렵고 부분적인 할양은 가능하다고 한 발짝 물러서는 듯했다. 2 일본의 입장이 얼마나 강경한지 이토 히로부미는 마지막 담화였던 5번째 회동 때 마지막으로 조약 내용을 검토할 때 리훙장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체결 즉시 바로 인원을 보내 할양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3 청은 마지막까지 요동반도를 잃는걸 두려워 했고 이는 수도 경사(京师, 현 북경)에 바로 침입을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독일에 있어서 요동반도 반환은 자국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여서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을 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판단은 경제와 무역에 있어 자국에 불이익이 있을 거라 판단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 근거는 일본 주미 공사 쿠리노 신이치로(栗野 慎一郎)가 주영국 공사 가토 다카아키에게 보낸 편지인데 편지에는 일 번이 받은 삼국 항의서의 요약본과 함께 일본의 대응 방안이 담겨 있다. 첫째는 2 《马关议和中之伊李问答 (戊戌前后的痛与梦)》 '第三次问答节略' 3 《马关议和中之伊李问答 (戊戌前后的痛与梦)》“‘第五次问答节略’, 换 约后,立即派人前往。”(번역: 조약 교환 후에 바로 사람을 보내겠다.)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러시아의 우려가 담긴 ‘조선국의 독립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였고 둘째는 ‘유럽의 통상무역에 있어 해를 가한다’이다. 셋째는 ‘중국의 수도를 위협할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극동지역의 평화가 위험해진다’였다.
프랑스에 있어 무역도 중요했지만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러 불 동맹이 존재했기에 러시아 편에 서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였다. 또한 청을 도와줌으로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 독일 또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극동지역에서의 자국 거점을 얻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과 더불어 러시아가 신경을 극동지역에 쓰게 함으로 유럽의 위협을 줄이는데 일조할 거라 생각했던 거다.
삼국 간섭은 러시아가 주도한 만큼 실제로 항의서에 담긴 내용 중 제 2항만 빼고 나머진 다 러시아의 이익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는 극동 진출을 위해 항구가 특히 부동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를 희망했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문 보도를 보면 알 수 가 있다. 비엔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러시아에게 부동항 한 곳을 주길 희망한다는 내용이였다(《马关议和中之伊李问答》pp.152). 그 당시 러시아제국 신문은 일제히 일본이 요동반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며 거센 비판을 했다. 물론 3년 뒤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조차 했을때 일본 국내에선 반러정서가극에 달았다고 하니 일본이 느낀 배신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3.2. 전후 일본에 대한 각국 인식의 변화
청일 전쟁의 결과는 일본에 대한 서방 열강의 인식의 변화였다. 혹자는 옛 중국, 신 일본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Old China, New Japan) 벤자민 엘만은 Rise of Japan, Fall of China이라고 요약하며 청일 전쟁을 신구(新旧) 질서 간의 충돌(the clash of two orders)로 봤다.
청일간 해상전투능력의 차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 졌는데 그 당시 청일간 작전 수행 능력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과 실제 보유하고 있는 함정의 질과 양에서도 차이를 보여 청의 패전은 필연적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刘致 2014,628-676; 李玉生 2014, 677-714). 물론 일본의 승리가 운적 요소가 녹아 있다는 연구 또한 중국 연구자 측에서 거론되고 있지만(费志杰 2014, 779-789) 이는 주류가 아니다.
그만큼 현재 이루어진 연구들은 수많은 정보와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을 두어 승패에 대해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19세기 말에는 그만큼 정보가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쟁의 승패에 대한 예측은 매우 주관적인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므로 당시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패전 소식을 접했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왜소한 체격의 사무라이가 중국 복장을 한 거인을 쓰러트린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모습의 그림이 그려질 정도였다.4
한 국가에 대한 인식이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일본은 적극적으로 외교에 참여했고 30년이란 시간 동안 근대화를 일궈내 공업 생산능력이 매우 발달한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만 해도 서구 열강들은 일제히 중국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대반전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자 일본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열강들이 일본을 적어도 극동지역에서는 명실상부 강대국이라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 예로 1902년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게 된다.
IV. 청일전쟁 후 일본의 적극적인 대(对)조선 외교
노선 수정
앞서 얘기한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의 대조선 외교정책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책이 필요했고 蹇蹇録(켄켄로쿠)를 선택하게 되었다. 켄켄로쿠는 陆奥宗光(무쓰 무네미쓰)가 훗날 집필한 청일전쟁에 관한 서적이다. 그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 과정에 직접 참여한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4 Author: Anonymous, Punch,29 September 1894, Cartoon on the First Sino- Japanese War. 정리한 일본 외교 문서집 또한 참고 서적으로 정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의 정책 변화와 실제 행동에 대응하는 청의 입장 변화를 알 수 있는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담 내용을 자세히 고찰했다. 상술 서적들을 참고함으로 청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에 안겨준 외교적 의미와 더불어 일본의 승리로 얻게 된 요동반도와 한반도에서의 저울질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4.1. 청일전쟁 전 대(対)조선 외교노선
기존 연구들은 일본이 우발적으로 청일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함과 동시에 조선 문제와 더불어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잡기 위해 매우 계획적으로 접근했다고 논증한다(戚俊杰 2014, 493-515; 王贤钟 2014: 516-532). 우발적이진 않았지만 일본은 매우 조심스러지만 초조한 입장을 고수했다는 걸 1895년 이전 청과 맺은 조약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분명 1876년에 같은 독립국 지위를 소지한 국가 대 국가로서 일조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부단히 국제사회에서 중국과 조선 사이의 종속관계를 각인시키고 국제법적으로도 확정시키려고 한다는 것은 이제 막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다질려는 일본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청은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조차 ‘유럽은 유럽의 방식대로, 아시아는 아시아의 방식대로’라며 일본을 형제라 칭하며 청의 ‘천하’ 논리를 고집했다. 일본은 조선과 독립국 지위를 소지한 국가 대 국가로서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일조 수호조약을 체결하였기에 사실 청나라와 조선 간의 애매모호한 종주국-속방 관계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추후에 분명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생김을 앎에 더 마음이 급하지 않았나 싶다.
하물며 천진조약에서는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는 조항이 없었기에 일본에겐 청나라가 순순히 받아 들이게 하는 확실한 ‘한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에 파병 전에 일본에 알려야 하는 천진조약의 조항이 조선에서의 청일 권리의 균형추 잡아주었다면 청나라가 1894년에 파병한 사건이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청나라가 과연 천진 조약을 잘 준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첫 사건이었을 것이다. 즉 쌍방 다 균등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일본 측에선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지하고 청나라 측에선 조선은 속방을 인지하며, 일본이 청나라의 통보 중 “속방을 보호하는 건 청나라의 오래된 관습”이라고 주장한 점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청일전쟁의 진정한 발화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논리를 약간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속방과 독립국대 독립국으로서 조선수호조규를 맺었는데 조청간에 조공-책봉의 관계가 남아있다면 이건 추후 일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우려와 다르게 회담의 과정을 들여다 보면 사실상 1895년에 이르렀을 때 청은 조선의 명운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청은 자국의 손익을 따졌다. 이는 청나라가 당장 자신의 땅도 할양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조선의 명운까지 고려하는가에서 출발한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은 조약 내용에 관해 타협을 하기 위해 총 6차례 공식 만남을 가졌다. 앞서 만남을 가지기 전부터 리훙장은 일본측으로 부터 그들이 조약에 포함시킬 내용을 전달받았다 한들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공공연히 인정한다는 것은 청의 마지막 자존심인 몐즈를 짓밟는거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권리를 위임받은 전권대신 리훙장이라고 한 지어라도 조정에서 지시를 받기 이전인 4월 5일에 일본의 10가지 요구 사항 중 제 1조인 조선의 자주독립을 최종적으로 시인한다고 답한 시점으로 부터 리훙장은 이미 청의 몰락을, 일본의 부상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얼마나 굴욕적이고 비참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4.2. 전후 대(対)조선 외교노선
무쓰 무네미쓰의 말을 빌려 얘기하자면 일본은 그 당시 “이미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 간 기울어진 권리관계”가 존재했다고 믿었고 또 결과적으로 동학당의 난을 제압하지 못해 조선이 중앙정부로서의 능력 부족을 핑계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다른 서방 국가들을 조선에서 배제시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대조선 정책은 가히 치밀하고 신속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요구했을 정도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키우는 게 청일전쟁의 다양한 목적중 하나였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조정 내에 각기 다른 분파가 존재해 엘리트들이 구미 국가와의 교섭을 통해 구미 국가의 영향력을 키워왔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우려해 메이지27년과 28년에 약 2년에 걸쳐(1894-1895년) 조선에서의 정책을 수정하는 방침을 세운다. 특히 이노우에 카오루이 보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시피,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라는 명목으로 조선왕조가 한반도에서의 실질적 통치권을 상실하게 만들 정책을 제안하게 된다. 그는 일본에게 조선 내정 간섭에 타당한 명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5 그래도 강행하기로 한다. 그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의 리훙장과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에 관해 의견차를 좁혀 나가던 상황이었고, 4월5일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한다는 답변을 받은 직후 8일에 바로 조선의 내정간섭을 도모하는 정책 토의를 가졌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1. 일본군 주둔 2. 조선에서의 철도와 통신 건설계획 3. 일본을 통한 내정 개혁이다.6
5 <日淸平和後ニ於ケル對韓方針ヲ定ムル義ニ付井上伯具申>p. 630 “我ハ表 面朝鮮ノ独立ヲ唱フレドモ,其實之レヲ屬隶トスル野心アリトノ疑心ヲ懐カシ メ、我ガ宣言ト事嶪ト相矛盾セリトノ擬論ヲ受クルヲ免レザル可シ。"(번역: 우리는 겉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내세우지만 실제론 속국으로 삼으려는 야심이 있다고 의심을 살만하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선전과 하 는 짓에 모순되어 의론을 받게 될 것이다.)
6 <日淸平和後ニ於ケル對韓方針ヲ定ムル義ニ付井上伯具申> pp. 631-632 특히 일본은 일본만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고 또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이 필요 했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재정적 문제와 국내 문제를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능력 부족을 문제 삼았고 또 내정개혁에 관해선 조선과 외국의 연락을 차단해 일본을 거쳐가게 하는 정책을 구상했다.7
일본은 조선 왕실 내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함으로 ‘내실’을 다지는 한편 적극적인 서신 외교를 펼쳐 외부로 부터 일본의 이익에 충돌됨을 최소화시켰다.
대표적으로 켄켄로쿠를 보면 무쓰 무네요쓰는 서구 열강의 관심을 요동반도에만 놓게 하려고 이토 히로부미를 설득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돌려 얘기했지만 의도는 확실했다. “만일 삼국간섭을 국제회의를 열어 해결하려 한다면 분명 다른 국가들도 참여하려고 하며 그 회의는 분명 요동반도 반환 외 다른 의제(예: 조선의 자주독립을 어떻게 보장하는가)도 제기 될게 뻔하며 이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실패로 몰아갈 것이고 유럽대국의 새로운 간섭을 끌어 들이는것이다”8 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곧바로 주일 러시아공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조선 독립 문제에 관해 러시아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한반도에서의 액터 수를 최소화시키는 데에 공을 들인 데는 일본 나름의 논리가 있다. 청나라의 7 <韓廷ト歐米使臣トノ關係並ニ之ニ處スル方策日置益> pp. 668 8 陆奥宗光, 《 蹇蹇録 》 pp. 167-168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관리들이 일본과 접촉하면 할수록 일본의 욕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예로 1879년 6월 중국 관리 정일창(丁日昌)은 황제께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욕심이 있고, 태서(구미국가)들은 조선과 무역을 하고 싶으니 조선에게 태서(구미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걸 권해도 괜찮을 듯싶다"고 말씀을 올렸다.
리훙장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에게 비슷한 내용이 담긴 서한을 보냈다. 그때부터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서방국가 세력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국제화시킴에 따라 가령 일본이 한반도에 혹심을 품어 점유하려고 할 시 일본과 서구 국가 간 이익 충돌을 기대하는 "이이제이" 정책을 고안했다. 나중엔 심지어 조선을 벨기에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은 삼국간섭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요동반도에서 삼국간섭의 여파가 조선까지 미치지 않도록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요구에 응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한편으론 “(요동반도 반환 문제를 제외한) 청과 맺은 기타 조약들은 청나라가 완전히 이행한 후에야 금주반도(요동반도)를 반환한다”며 최소한 다른 국가들이 한반도에 간섭 하는걸 꺼려 한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천명했다.
4.3. 완전히 포기한 청과 그 반대인 러시아 청나라는 이에 완전히 포기했다. 우선 청일전쟁은 청의 양무운동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일종의 시험대와 같은 것이었다. 30년에 가까운 청의 부국강병 계획은 등세창이 이끄는 북양함대 치원호가 황해해전에서의 패전을 끝으로 씁쓸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자주'(自主) 했고 '독립'(独立) 했지만 그 어느때 보다 약했고 의지할 곳 하나 없었다.
사실 청과 조선의 조공-책봉의 종속 관계는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을 때 부터 이미 근간이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다. 1885년 양국이 천진조약을 맺음으로 팽팽했던 재조선(在朝鲜) 권리의 저울이 일본측으로 확실히 기울어지기 시작한건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후 부터였다. 이는 리훙장이 전권대신으로 방국(邦国)과 주고 받았던 서한을 보면 알 수 있는데 1895년 청일강화조약을 맺기 이전 조선 주재 대신들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내부와도 서한을 주고 받았었다.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칭하는 문서들도 광서21년(光绪二十一年, 1895년)까지만 존재했고 1899년엔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서 대한국 대청국 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이 맺어진다. 여담으로 1899년에 리훙장이 청나라 주 대한제국 공사 서수붕에게 보낸 편지 안엔 '조그만 나라가 강대국에게 둘러 싸였다'라고 대한제국의 미래에 안쓰러움을 표했다. 어떻든 간에 이 조약은 한국과 중국의 통일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체결한 근대적 평등조약이란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크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청나라와 관심을 끈 서구국가들과 달리 러시아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청일전쟁 초기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자국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러시아는 직접적 개입은 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는 소극 정책이었다. 그러나 애초 청국의 승리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이 승리하고 요동반도의 여순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개입을 결정하고 적극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러시아는 청일 양국의 강화회의 교섭 내용을 주시하다가 마침내 삼국간섭을 주도하여 일본의 전쟁 승리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따라서 한반도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나아가 대륙 진출을 의도하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청일전쟁기의 러시아의 조선 정책은 삼국간섭을 계기로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또는 기다리며 관망하는 자세에서 주도적 자세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바, 그것은 조선의 자주 와 독립을 전제로 한 현상 유지책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앞서 말한 대로 육지는 넓지만 좋은 항구가 없어서 극동지역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극동지역의 땅과 항구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9 바다로 9 1860년 러시아은 중국과 ‘북경조약’을 체결해 극동지역 사할린섬을 얻 나가는 길을 비롯해 항구를 둘러싼 러시아와 다른 나라 간의 잡음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논리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항로를 보유하고 있을뿐더러 한반도는 러시아에게 있어 지정학적 완충지대’의 의미가 컸다고 한 연구자는 힘줘 말한다(张智 从地缘政治角度看日本发动甲午战争). 러시아는 일본군이 청일 강화가 이루어지고 삼국간섭의 성과로 요동반도를 통해 러시아를 위협할 발판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한반도 주요 도시에 일본군을 주둔하는 것에 경계심을 가졌다. 19세기 중순부터 러시아는 동시베리아 지역으로 부단히 확장을 해왔다. 그러기에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건 러시아가 극동지역에서 중국으로 부터 얻은 중국 동북지역의 땅을 잃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즉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러시아에게 있어 양날의 칼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두 곳이 러시아가 다른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반대로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으로도 사용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었다.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V. 나아가며
"Angriff ist die beste Verteidigung" 라는 말이 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전쟁론에 쓰여있는 글귀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뜻이다. 일본은 항상 19세기말 20세기 초 무리한 확장을 할때마다 선제공격을 해왔다. 그리고 일본이 얻은 전리품들을 수호하기 위해 꼼꼼히 전략 전술을 짰다.
상술 내용을 종합하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다른 서방 열강들의 이익이 너무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걸 우려했다. 추후 조선을 식민지화 할때 문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초반부터 매우 계획적으로 다른 서방국가들의 개입을 차단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이익 최대화하기 위해 한반도에 벌어지는 사건에 개입하는 액터 수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청일전쟁 후 러시아 외에는 별 다른 국가들이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목적 달성을 위해 조선 조정 내부와 외국과의 소통을 끊으려 했고 또 일본은 다른 국가와의 서신교류를 통해 일본의 의도를 '보호'라는 명분 하에 포장해 알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성공했고 추후 러시아로 들어가는 발판을 지켜내 전쟁에서 더욱 순탄하게 승리를 거머쥐지 않았나 생각든다.
일몰은 천천히 시작해 단숨에 끝난다. 시모노세키에서 천천히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리훙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리훙장은 일본을 보면서 과거 휘황했던 청의 과거를 떠오르지 않았을까. 청일 강화 박물관에 한달음에 달려 가고픈 심정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1. Compiled by Jukichi Inouye. 1895. "A Concise history of the war
between Japan and China".
2. S. C. M. Paine. 2005.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Perceptions, Power, and Prim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Benjamin Elman. 2013. "The 'Rise' of Japan and the 'Fall of China'
after 1895." Chapt. 5 in The Chinese Chameleon Revisited:
From the Jesuits to Zhang Yimou.
4. 李鸿章. 2008.《李鸿章全集 36 (信函八)》顾廷龙, 戴逸编. 安
徽教育出版社.
5. 广西师范大学出版社编. 2008. 《马关议和中之伊李问答(戊戌前
后的痛与梦)》. 广西师范大学出版社.
6. 李鸿章. 1965. 《李文忠公全集》. 第1卷, 《译署函稿》. 吴汝纶选
编. 文海书局, 据光绪三十一年(1905) 刊本影印.
7. 郭阳 王记华主编. 2018. 《甲午战争与东亚近代历史120周年
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8. [日] 原田敬一. 2007. 《日清、日露戰爭》, 岩波書店. 5. 왜 삼국간섭이 한반도에선 일어나지 않았나?_청일강화박물관 9. [日] 陆奥宗光. 2018. 《蹇蹇録:甲午战争外交秘录》. 赵戈
非, 王宗瑜译. 三联书店.
10. 伊藤博文 編[他]. 1936. 《秘書類纂 朝鮮交渉資料 (上, 中,
下)》. 秘書類纂刊行会.
11. 伊藤博文 編[他]. 1933. 《秘書類纂 第1巻 日清事件》. 秘
書類纂刊行会.
논문
1. 김원수. 2015. “청일전쟁 및 삼국간섭과 러시아의 조선 정책.”
〈한국 정치 외교사 논총〉, 36, 2: 37-65.
2. 구선희. 2006. “청일전쟁의 의미 : 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37: 92-125.
3. 권무혁. 2006. “청일전쟁 시기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
〈중소연구〉, 30, 1: 151-184.
4. 【韩】 王贤钟. 2018. “2014 中日甲午战争期间朝鲜政府的协助
战争行为及对日依附问题.” 《甲午战争与东亚近代历史
120周年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516-532.
5.权赫秀. 2014. "《马关条约》第一款有关朝鲜问题内容的形成过
程研究." 《抗日战争研究》, 2014年 第4期.
6.戚俊杰. 2018. "日本挑起甲午战争的前因后果." 《甲午战争与东
亚近代历史120周年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会科学文 献出版社, 493-515.
7.刘致. 2018. "甲午战争中日鱼雷艇部队之比较." 《甲午战争与东
亚近代历史120周年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会科学文
献出版社. 628-676.
8.李玉生. 2018. "甲午战争时期海军观瞄射控技术及中日舰队炮战
运动.” 《甲午战争与东亚近代历史120周年国际学术研讨
会文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677-714.
9.费志杰. 2018. "甲午战争中日本获胜的侥幸因素分析甲午战争中
日本获胜的侥幸因素探析." 《甲午战争与东亚近代历史
120周年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771-779.
10.张双智. 2018. "从地缘政治角度看日本发动甲午战争." 《甲午
战争与东亚近代历史120周年国际学术研讨会文集》. 社
会科学文献出版社, 169-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