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중심을 찾다 : 사랑방의 젊은 그들 규슈를 품다
규슈도자문화관 · 강우승 · 서울대학교
들어가며
문화를 둘러싼 담론은 급격한 세계화 및 지구화의 흐름에 따라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국가 및 문화권 사이의 만남은 안보와 경제 분야를 벗어나 문화적인 무대에서도 활발해지고 있고,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문화가 가진 권력(power)과 영향력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 학파의 대표주자인 조지프 나이(Joseph Samuel Nye, Jr.)는 기존의 안보와 경제에 대한 분석과 함께 한 국가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매력, 또는 ‘소프트파워(soft power)’가 국제무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문화 무대는 안보, 경제라는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의 무대와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ISIS 등 특정한 문화권과 종교를 기반으로 한 단체들의 테러행위는 문화갈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문화갈등은 기존의 안보개념에 한계를 드러내며, 안보화(securitization) 담론의 등장과 발전에 기여했다. 즉 문화 무대의 등장은 국제정치학 분야의 연구 대상과 연구 방향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한편, 문화라는 무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다. 많은 학자들이 문화의 무대에 주목하고 있지만, 문화라는 새로운 무대의 등장으로 더욱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세계무대의 현상을 올바르게 분석해내기란 쉽지 않다. 특정한 문화는 누구에 의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에드워드 사이드(2003)의 오리엔탈리즘 주장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탈식민주의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은 현재의 국제정치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topos)와 주체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서구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관점의 보편화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준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보편적 세계규범, 또는 체제(system)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인권 담론에서 문화적 상대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보편적 규범으로서의 인권규범과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특정한 문화적 전통 속에서 전래되어 오는 반인권적 가치관 내지 행태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과 실천의 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주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동아시아지역의 FTA가 지니는 독특한 상향/하향 네트워크의 동학에 대한 이승주(2012)의 정치경제적 분석은 문화적 요인이 세계경제체제의 운용에 있어서도 중요한 차이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각각의 문화 속에서 고유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행위자와 전세계를 단위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체제(system)를 각각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 사이의 상호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의들은 현재 가장 시의성 있는 화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아차리아와 부잔(2019)이 주장하는 지구 국제정치학(Global International Relations) 등장의 필요성은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기반에 의해 서로 다른 메타이론적 입장을 가진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는 다원적 보편주의(Pluralistic universalism)가 변화하는 세계무대를 더욱 적실히 설명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목표임을 주장한다. 다원적 보편주의란 다양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입장들의 통합을 통해 전지구적인 현상들을 적절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 보편적인 국제정치학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들의 주장이 현재의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이전에는 전혀 대두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의식인 것일까?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는 동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양과, 유럽 중심의 서양 사이의 문화적 만남에 대해 고민하였던 인물이다. 현재의 논의에 견주어 보았을 때 선구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의 문화결합에 대한 주장들이 현재의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연구된 사례는 많지 않다. 리치의 노력은 예술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받은 리치가 일본으로 간 이유는 동양 문화를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일본에서 도예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한편, 그는 도자기라는 예술을 통해 동서양의 경계 넘어, 인류가 추구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가치를 모색하고자 했다. 리치는 20세기 동양과 서양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만남이 심화되는 국제정치적 변화 속에서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어 인류 전체의 문화 및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삶의 양식의 발전 방향을 고민하였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특수한 지위 및 그에 부여될 역할을 인식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동서양의 결합(the Marriage of East and West)’이라는 문구는 리치가 자신의 생애 속에서 탐구했던 주된 테마를 함축하고 있다”(Suzuki, 2004). 그는 동양과 서양이 가진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들 사이의 바람직한 결합 방식에 대해 고민하였고, 이러한 그의 고민들은 그의 작품과 저술들 속에 투영되어 있다. 즉 리치는 도자기라는 오브제를 통해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인류 문화의 통합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꿈꾸고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본 글에서는 버나드 리치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의 예술작품을 살펴보며, 그가 이해한 동양과 서양이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두 문화 사이의 어떠한 만남을 그리고 있었는지를 엿보고자 한다. 그리고 리치의 사상이 21세기 문화 담론을 이해함에 있어 제공해줄 수 있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양의 탐구자, 그리고 도예가 리치
리치의 동양과의 만남은 1910년 일본으로의 여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87년 홍콩에서 태어나 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곳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던 리치에게 동양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등한 세계였다.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1850-1904)의 책을 통해 일본의 삶과 문화를 접한 리치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양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0년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리치가 동양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이들은 일본의 젊은 지식인 집단인 시라카바 파(白樺)였다. 영국에서 드로잉과 동판화 등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예술 교육을 받았던 리치는 1910년, 도쿄의 한 갤러리 전시에서 자신의 에칭 판화 작품을 함께 전시하고자 하였는데, 이곳에서 리치는 시라카바파와의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시라카바파는 서양의 철학과 예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추구했던 젊은 지식인 집단으로써, 이들은 잡지 〈시라카바〉를 발간하고, 서양작품들, 특히 후기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서양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그룹이었다. 서양을 알고자 하는 이들과 동양을 알고자 하는 리치와의 만남이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리치는 이들과 함께 예술문화활동을 펼쳐나가면서 동양에 대한 관점을 형성해나갔다. 이후 리치는 시라카바 파와 함께 예술문화활동을 펼쳐나가면서 이들과의 지적 교류를 통해 동양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갔다. 그 중에서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의 교류는 리치가 동양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예운동의 지도자 중 한나로, 종교적 신비주의와 미학을 결합한 독특한 사상을 전개한 지식인이다. 그는 선종 불교를 기반으로 한 불교미학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예술관의 형성 과정에서 리치와 상호 많은 영향력을 주고받았으며, 리치 또한 이러한 야나기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예가로서의 훈련을 지속하는 한편, 리치는 동양 문화 탐구의 일환으로서 예술과 교육, 철학에 대해 깊고 넓은 인식을 가진 지도자를 구하고자 했고,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저술가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알프레드 웨스트하프(Alfred Westharp)의 글을 접하게 되며 큰 감명을 받는다. 이에 리치는 그를 스승삼아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적 고민을 수행하고자 중국으로 향하였다. 웨스트하프 박사와의 지적 교류가 리치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지만, 송대와 당대 생산되었던 청자와 백자 등, 양질의 도자기들을 다수 접한 경험은 그가 도자 미학의 표준을 고민함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행사했다.
1916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리치는 본격적으로 도예가로서의 삶에 정진하게 된다. 야나기 무네요시 등 시라카바파와의 교류가 리치의 동양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핵심적인 경험이었다면, 도예가 리치의 성장 과정에서는 도미모토 겐키치(富本憲吉, 1886-1963), 하마다 쇼지(濱田庄司, 1894-1978) 두 인물과의 만남이 핵심적이었다. 시라카바파의 동인들은 주로 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지식인 엘리트 계층의 인물들로, 이들의 활동은 철학과 정치사상, 예술 등에 대한 학술적 탐구와 문화비평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반면 도미모토와 하마다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도미모토는 일본에 방문한 초기 만나게 된 자로, 이후 리치와 도예 활동을 함께하며 예술적 표현의 차원에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도미모토는 리치와 함께 에도 시대의 유명한 도예가 오가타 켄잔의 계승자인 6대 켄잔 우라노 시게키치(浦野繁吉, 1851-1923) 아래에서 도예에 입문하였으며, 리치가 일본에서 살았던 1910년대에 리치와 함께 도자기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많은 의견을 교류하였다.
하마다 쇼지와의 만남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일본 내에서 열린 한 전시회를 통해 리치의 작품을 본 하마다는 리치의 작업장을 찾아왔고, 이 만남을 계기로 하마다는 리치가 1920년 영국으로 귀국하여 도예활동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 리치가 영국으로 귀국하여 콘월(Cornwall) 지역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장을 차릴 때에도 하마다는 함께 하였고, 그곳에서 하마다는 리치의 가마를 짓는데 많은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그는 리치의 작업 초기 많은 작업활동을 함께 하였다. 이후 하마다는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가로 활동하였고, 리치는 높은 숙련도를 지닌 하마다의 작업을 통해 공예품 제작에서의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또는 몰아적(沒我的)인 가치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을 엿볼 수 있다(Leach, 2012).
한국 및 한국 도자기와의 만남 또한 리치의 도예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야나기의 민예관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리치는 야나기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치는 중국 생활 당시 보았던 송대와 당대 도자기와 함께 한국의 도자기를 ‘표준적인 도자기’의 전형 중 하나로 평가하였다. 실용성과 과하지 않은 장식, 귀얄 기법 등을 통한 유약 처리를 통해 드러나는 흙의 자연적인 질감, 선의 강조를 통해 표현되는 한국적인 분위기는 리치가 자신의 저서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도공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표준적인 도자기와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으며, 리치가 조선 및 고려의 도자기에서 받은 인상이 그의 도예의 표준에 대한 생각을 형성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음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Leach, 2012).
‘동서양의 결혼’ - 리치의 도예관과 세계관
1. ‘동서양의 결혼’에 내재된 리치의 도예관과 세계관
동양과의 만남 이후, 영국에 돌아간 리치는 자신의 공방을 설립하고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며 점차 도예분야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드 발(2014)의 주장과 같이, 동양에서의 삶과 도자훈련 경험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리치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내놓았던 도자기의 미적 기준과 장식기법, 생산양식,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미학과 사상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리치가 제시하는 내용적인 부분이 상당한 매력을 지녔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 장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동양과의 만남 속에서 리치가 내적으로 형성하였던 동양과 도자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아가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문화적 만남에 대한 리치의 생각을 분석하여 리치가 당대에 매력있는 존재로서 부상할 수 있었던 지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버나드 리치의 도예활동은 미학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였다. ‘동서양의 결합’은 공예의 동양적 전통에 내재된 관념적 차원의 충만함과 서양의 과학 및 산업 발전을 기반으로 한 물질적 실용주의를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치, 새로운 미적 기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리치는 각각의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지닌 특성을 서로 대립되는 항들로 규정하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대립항들 사이의 이원성이 극복됨으로써 일자(一者)로서의 전 인류의 문화로 통합되어가는 이상향을 설정하였다. 이는 한 문화의 영향력이 다른 지역에 미쳐 해당 지역의 문화를 대체하는 과정이 아니라, 굳건한 전통적 기반 위에 서있는 대등한 두 문화가 상호작용해 나가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문화 간의 만남에 대한 리치의 사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 이것의 실천인 그의 작품활동과 공방 공예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리치의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그리고 결합에 대한 인식 동양과의 만남을 기반으로 서양에서의 도예활동을 통해 추구해나갔던 리치의 세계관은 ‘동서양의 결합’이라는 핵심 어구에서 잘 나타난다. 리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사용하였던 ‘동양(Oriental)’과 ‘서양(Occidental)’이라는 용어가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들 간의 만남 속에 일어나는 특정한 ‘결합(marriage)’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동양에 대한 이해는 서양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의 심화로 이해되는 당대 서양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시작된다. 리치는 20세기 초 동양과 서양에서 서로 다른 발전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느꼈고, 동서양의 만남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는 현실과 그러한 경향이 미래로 갈수록 점차 심화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Leach, 2012).
리치는 이러한 발전 과정 속에서 형성된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을 여러 대립항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서로 다른 ‘극단’ 사이의 만남과 적절한 결합을 통해 이러한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그의 서양에 대한 이해는 산업화의 심화 속에서 발생하였던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리치는 서양의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대량생산체제가 공예품의 질과 아름다움을 실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대량생산체제 속 공예품의 생산과정에서 미의 추구보다 경제적 이윤의 추구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공예품 생산에 있어 훌륭한 형태와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리치는 물질(materials)과 정신(spirits)의 대립항 중, 물질의 영향력이 과도해졌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응하여 리치는 동양에 정신을 대응시킨다. 시라카바파와의 만남 속에서 느낀 정신적 요소의 충만함과 활력, 그리고 중국의 고전(classic)을 중시하는 교육 등 속에서 리치는 동양에 정신적 가치가 충만하게 흘러넘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동양의 문제를 ‘부패(decay)’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동양의 부패는 이성과 사물에 대한 정확한 실용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영적 삶, 이상주의 등의 과잉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Suzuki 2004, 5에서 재인용).
동양과 서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첫 번째 이중성이 물질과 관념의 대립항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이다. 리치는 서양의 과도한 개인주의는 우리의 삶의 원천이자 고귀하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영향력이었던 집단적 요소(communal element)들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인본주의적 가치를 담지해왔던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미적인 기준이란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each, 1951). 현대에 들어 자신의 개성만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미적 기준은 공동체의 합의된 전통적 기반을 상실하고, 독특함과 희귀성으로 대체된다.
리치는 동양에서 전통에 기반한 집단주의적인 특성이 남아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동양문화에 부여되는 집단주의적 특성은 서양의 개인중심주의의 발달로 인한 것이지, 이를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동양만의 특성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동양과 서양은 각각의 서로 다른 전통을 기반으로 존재해왔고, 리치가 이러한 대립항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것은 서양의 전통적 가치의 부활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차원에서 리치는 영국의 전통적 도자 장식 기법이었던 슬립웨어(slip-ware) 기법을 발굴하는 등의 노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즉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라는 이중성의 부여는 서양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중성의 개념을 통해 정의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는 리치에게 있어 우열의 관계가 아닌 다양성의 차원에서 인식되었다. 리치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전통에 기반하여 서로 다른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두 문화는 어느 것에도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동양과 서양이란 서로 다른 극단에 있는 다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극단에 있는 문화의 결합이란 왜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는 상기하였듯, 각각의 극단을 달리고 있는 문화는 그로 인해 각자의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교류가 증대되는 것을 현실이자 필연적인 미래로 보았던 리치는 특정한 결합의 방식을 통해서만 그러한 결합이 상호보완적인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방식이란 무엇인가? 리치가 동양과 서양의 바람직한 ‘만남(meeting)’의 방식을 ‘결합(marriage)’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리치는 불교 사상 속의 ‘이중성(dualism)의 극복을 통한 합일(Oneness)’의 개념에 의거하여 특정한 결합의 방식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야나기가 정립한 불교 미학과 중국에서의 생활 속에서 접했던 공자와 노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치에게 지대한 사상적 영향력을 제공한 야나기는 불교 미학의 차원에서 동양과 서양이 지닌 이중성의 극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같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양성이
반목으로 빠져들지 않으면서 다양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화의 영역이 우리의 진정한 거처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동양에서만 또는 서양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로서 그것은 무엇보다 불행한 결론이기도 하다(야나기, 1989).
불교미학의 관점에서 이중성의 극복을 통한 합일이란 모두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가 되되, 그 속에서 각자의 다름을 유지하고 있는 조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리치 또한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리치는 이러한 합일의 과정을 ‘결혼(marriage)’이라는 단어로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문화 간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부부 간의 만남 속에서 아이가 탄생하는 과정과 같이 이해하는 부분으로 볼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수 있다. 아이는 각 부모의 서로 다른 고유한 특성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새로운 특성을 지닌 존재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리치의 결합에 대한 생각은 《Beyond East and West》의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구에 대한 해석을 통해 비교적 명확해진다. 리치는 그의 저서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내고 있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결합에 대한 미래를 보았고, 시간의 길 저 너머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목소리의 반향을 들었다. 얼마나 더? 얼마나 더(Leach, 2012)?” 이때 ‘시간의 길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와 같은 목소리의 반향’이란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통해 탄생할 조화롭고 합일된 전 인류의 새로운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는 버나드 리치를 의미하는 ‘나’에게 ‘얼마나 더? 얼마나 더?’라는 보채는 듯한 말을 건내고 있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통해 탄생할 미래의 도래를 향한 리치의 열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리치는 그러한 미래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만남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주체로 ‘나’를 설정함으로써 리치는 이러한 결합을 주도할 인물로서 자신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즉 리치에게 있어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결합이란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 문화의 고유성을 견지하면서도 그것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리치는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이러한 만남이 ‘매춘(prostitution)’이나 ‘강혼(mesalience)’이 되어선 안 되며, 결혼(marriage)의 문제여야 한다고 강조한다(Leach, 2012). 이는 결혼이라는 과정, 즉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과정 속에서 두 존재는 동등한 주체로서 마주하여, 서로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결합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외부 문화와의 만남 속에서 도출될 신테제에 대한 자발적인 수용의 의지와 열정, 헌신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 속에서만 동양과 서양은 자신의 서로의 자아를 파괴하는 매춘과, 주체성의 결여와 비대칭성 속의 불행을 낳는 강혼이 아닌, 결혼이라는 관계로서 외부 문화에 대한 성공적인 수용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만남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또 하나의 필요조건은 각각의 문화가 가진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전통 부활의 중요성은 타문화의 영향력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인 동화의 힘(assimilating force)과 연관되어 있다. 동화의 힘은 ‘주체적 수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치에 따르면 예술이나 산업에의 외부 문화로부터의 영향력이 자기 문화권의 성장요소로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조직적인 동화(organic assimilation)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건강한 조직을 필요로 한다. 즉, 결합의 주체로서 동양과 서양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적 가치의 기반을 견고히 갖춰야 한다.
도예활동에 이를 적용해보면, 송(宋)대와 당(唐)대 도자기의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형태와 패턴, 색채와 기술들에 대한 피상적인 모방은 외부 문화가 발현되는 양식들의 모방에 그칠 뿐,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새로운 조합으로부터 새로운 삶이 출현하는 가능성을 배제당한다는 점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진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모방의 과정이란 자신의 문화가 가진 전통적인 도자 양식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바, 미적 기준을 잃는 “끔찍한 혼종(miserable half-mixture)”(Suzuki 2004, 6에서 재인용)을 낳을 뿐이다. 도자기라는 오브제 속에 내재된 송대와 당대의 미적 기반과 전통적 가치 등을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전통적 기반을 잃지 않는 속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만 문화 간 결합의 긍정적 결과가 비로소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수용을 위해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활력있는 사회조직, 즉 전통적 가치의 견고함과 외부문화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기반으로 한 사회조직이 선행되어야 한다.
3. 리치의 도예관과 공방공예운동
리치는 전통을 기반으로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서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양식으로서의 공예 혹은 도예를 연결 짓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이는 도자기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임과 동시에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생활용품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리치는 도자기의 아름다움이란 형태와 패턴, 색채 질감 등을 통해 발현되는 미적 탁월함과 생활 속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모두 갖췄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도자기가 된다는 공예미의 기준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기준이 공동체에 수용되고, 이러한 기준을 통해 도자기가 제작됨으로써 기계식 생산으로 인해 상실된 일상 속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치는 물질주의의 과잉으로 인한 서양의 문제를 동양문화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리치의 공예관 및 세계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리치는 서양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동양과의 결합을 생각하였고, 이를 도예 분야를 중심으로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크게 도자기 1)생산의 주체, 2)사용의 주체, 3)생산 과정, 그리고 4) 형태, 질감, 재료 등 도자 양식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리치는 산업화로 인한 기계식 생산과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비판하고, 생산 과정에서 길드와 같은 집단적 생산방식을 주장하며, 인공적 재료의 사용을 배제시키고, 실용성과 무의도성, 그리고 전통성의 요건을 갖춘 형태 및 표현 양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생활용품으로서의 도자기가 대중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공동체가 미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리치는 도자기 생산의 주체인 도예가를 두 종류로 구분하고, 이들에게 각각 특정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는 야나기의 공예관 및 민예미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다. 야나기는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개인적인 아름다움’이란 ‘개인을 초월하는 아름다움’보다 못하다”(야나기, 1989)고 주장한다. 그는 개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성을 초월하는 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무식한 직인(職人)들’에게서 만들어질 수 있는 이유는 자연과 전통에 순응하는 이들의 태도 속에서 자연과 전통이 이들에게 미를 보장해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주의적인 관점 및 몰아적(沒我的) 관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작가가 아닌 공예품이 아름다움을 품는 존재이기에, 수도 없이 많은 반복과 숙련을 통해 자연과 전통을 도자기에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자연적 재료와 전통적 표현양식에 대한 체화된 이해를 갖춘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예품이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면 야나기에게 있어 ‘개인 작가’들의 가치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무식한 직인들’과 달리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이를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이다.
민중예술이 퇴보하는 오늘날, 무엇이 아름다움의 목표인가를
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개인작가이다. 모두가 제각각인
오늘날의 우리는 작품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올바르게
감상하고 인색해낼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공예분야는 이러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며, 개인작가는 다음의 시대가 다시 민예의
시대로 되기 위한 매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치는 작품보다도 오히려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능력, 즉 사상적
기여로서 의의를 가진다(야나기, 1989).
리치의 도예가에 대한 분류법 또한 이러한 야나기의 분류법을 따르고 있다. 리치가 일본에서 만난 도예가들은 6대 켄잔, 농촌 및 도자 마을의 도공집단과 같이 도제관계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는 이들이거나 집단적 작업을 통해 이러한 전통을 계승해나가는 ‘무식한 직인’, 또는 리치의 표현으로 ‘직인 도예가(craftsman-potter, 또는 artisan-potter)’였다. 이들은 현대에 등장한 ‘개인작가’, 또는 리치식 표현의 ‘예술가적 도예가(artist-potter)’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세대를 거치며 전통의 보호의식 속에서 작업을 수행한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몰아적인 상태에서 타력적(他力的) 힘이 발휘되는 결과였다.
그러나 서양의 문제점은 수작업 공예를 행하는 이들이 더 이상 일본에서 보았던 이러한 소박한 소작농들(peasants)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제 서양, 또는 영국에서는 예술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자의식을 가진(self-conscious) 예술 학생들이 도자 제작을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리치는 “과거에는 전통이 자신의 온건한 기질을 발휘하였겠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것들이 발휘되지 않으며 많은 낭비를 피할 수 없게 됨”(Leach, 1951)을 지적한다.
그러나 리치는 야나기와 같이 현실적 변화의 수용 속에서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예술가적 도예가가 수행해야 할 규범적 역할을 제안한다. 리치는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적 도예가들이 전통에 대한 충분한 이해 속에서 이러한 전통이 발전해나갈 수 있는 활력(vitality)을 유지해나가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활력이란 예술가들의 영혼과 문화의 표현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활력을 통해 공예품이 지니는 인본주의적, 심미적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는데, 결국 전통을 기반으로 한 집단적인 미적 기준의 수용을 통해서만이 심미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될 수 있는 예술가들의 인간적 표현이 작품 속에 녹아들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치는 현대의 도예 시스템에 있어 중세의 길드 시스템과 같은 집단적인 작업 시스템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리치는 자신의 작업장인 리치 포테리에서 이러한 작업 형태를 시도한다. 집단적 작업 속에서 도예가들은 미적 기준을 공유하고, 이를 체화할 수 있게 된다. 즉 개인중심주의의 만연 속에서 사라졌던 공통의 미의 기준을 집단적 작업형태를 통해 부활시키고, 이를 작업자들로 하여금 내재화할 수 있는 작업방식을 고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야나기와 차별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리치는 자신의 작업장에 있는 예술가적 도예가들 각각이 지니고 있는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치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란 과거의 최고의 기준들을 현재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에 기반을 두어야”(Leach, 2012) 한다고 보았다. 미적 기준이 전통에 의거하여 판단되어야 하는 한편, 이러한 기준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개인의 창조성을 통해 변화해나가야 한다. 즉 이러한 집단적인 공예시스템을 통해서 리치가 추구한 것은 전통에 대한 적절한 이해 내지는 내재화를 기반으로 하여, 개인의 의식적 영역의 발휘를 통한 창조성의 건강한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공동체적 요소의 상실로 말미암아 독특함과 희귀성으로 대체되어버린 미의 기준을 창조적으로 변화하는 전통에 의거한 공동체적 미적 기준으로 다시금 회복시키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사용의 주체의 차원에서 이러한 생산주체의 역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품은 공예품은 소수의 애호가들이 아닌 인민(people) 전체에 의해 사용될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대한 리치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문구 속에서 잘 드러난다:
콘월(Conrwall)에서 우리는 집단작업을 통해 공동의
이상으로부터 추동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시작하였고, 개인과
인민(people)의 요구를 결합시켰다고 믿는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예시로 들 수 있는 것은 (구성원들에 의해)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작곡가-지휘자 아래의 소규모 오케스트라일 것이다. 집단 작업은
리더십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강압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순수하게 기술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다. 또한 저급한 미학이
가치를 타협하도록 하는 민주주의 위원회도 아닐 것이다(Leach,
2012).
세 번째로, 생산의 과정에 있어 리치는 수공예의 방식을 주장한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에 대한 비판과 맞물리는 부분이다. 리치에게 있어 수공예란 인간성의 표현이다. 인간의 손으로 전통과 자연에 의해 부여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의 손을 대체한 공장식 대량생산체제는 인간성이 표현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고, 이는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Leach, 1951). 그러나 한편으로 모든 인민이 이러한 공예품을 사용하기 위해선 생산량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리치가 채택한 집단작업 방식은 분업화를 통해 충분한 생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도자기의 조형과 장식, 재료에 관해 리치는 자연주의적 태도와 실용성의 덕목을 강조한다. 작품의 재료가 지닌 자연적 특성을 극대화시키는 질감과 형태, 그리고 실용성을 함께 겸비한 적절한 균형을 통해 도자기는 활력(vitality)을 가질 수 있게 된다(Leach, 1951). 공예품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용성을 잃은 채 순수예술과 같은 장식적 효과만이 부각된다면 이는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또한 도자기의 형태와 질감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리치는 소성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에 의한 간섭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리치에게 있어 의도되지 않은 균열과 유약의 발색, 불균형 등은 인간에게 우발적인 것(accidental to human)일지 모르나, 자연에게 있어서 그것은 의도적이고 자연스러운(incidental to nature) 결과이다. 그리고 리치는 기계식 생산과정에서 추구되는 과도한 정밀함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이러한 도자기에서 더욱 큰 활력을 느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그의 공방 공예 시스템에서 수공예를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버나드 리치의 ‘동양’에 대한 이해– Orientalism?
1. 버나드 리치에 대한 비판적 평가
버나드 리치의 활약은 서양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명성을 얻은 20세기동안 도예계에서의 주된 논쟁은 ‘리치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정도였으며, 그 외에 화학적 기술을 이용한 유약의 개발과 같은 의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de Waal, 2014).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리치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리치가 도예계와 공예의 미적 기준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과 그 성과를 인정하는 한편, 리치의 동양 및 서양에 대한 인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버나드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리치, 야나기 무네요시 등 동양과 서양의 매개자(interlocuter) 역할을 자처했던 이들이 수행한 민예운동, 공방 공예 운동은 과연 동양과 서양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치에 대한 비판은 주로 리치의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에 관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리치의 동양에 대한 경험이 편파적이고 제한적이진 않았는가? 리치가 이해한 동양 문화의 특성이란 진정 동양 문화의 특성이 맞는가? 리치는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정의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비판들은 리치의 개인사적 차원, 리치 사상의 메타이론적 차원, 사상의 내용과 사회적 실천 사이의 모순 등 전방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드 발(2014)은 리치의 업적이 제국주의적 관점에서의 피상적인 동양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였다. 리치가 접했던 일본이란 시라카바파 등과 같이 예술을 사랑했던 소수 지식인 그룹을 통해서만 보았던 일본의 모습이었으며, 야나기를 비롯해 리치가 교류해던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사회경제적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리치의 동양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고 중재된(mediated), 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드 발은 지적하고 있다.
또한 드 발(1997)은 리치와 야나기가 영국 및 서양의 산업화를 ‘타락(lapsarian)’으로 규정하고, ‘자연적인’, ‘직접적인’, ‘진정성 있는’, ‘배우지 않은’ 등 타락 이전의 것들을 묘사하는 용어들을 자신들의 미학의 내용으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일본 시골 지역의 직인들은 이러한 ‘타락’ 이전의 것들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호모 오리엔탈리스(Homo Orientalis)’로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이미지가 야나기와 리치를 통해 전달된 동양에 대한 이미지라고 거세게 비판을 가한다. 리치는 오로지 훈련과 반복을 통해서만 거슬리는 자아의 존재가 지워진 전통적인 직인의 순수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시골의, 글을 읽지 못하는, 겸손한, 때묻지 않은, 그렇지 않으면 ‘하이 칼라’적 사고에 의해 망쳐지는 존재들로서 이들을 단정지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유코 키쿠치(2004)는 리치와의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던 야나기의 동양과 서양에 대한 이해를 ‘동양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 Orientalism)’으로 규정한다. 키쿠치는 야나기가 자신의 민예관을 형성함에 있어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 등 서양의 산업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가진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야나기의 민예관이 고유성(originality)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또한 야나기의 불교 미학은 서양을 정의하기 위해 동양을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며, 그러한 동양에 대한 인식 속에서 일본을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동양의 선구자적 지위로서 위치시키기 위해 일본 외 동양 지역을 다시 한 번 타자화하는 이중 타자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야나기의 불교 미학과 공예에 대한 정의는 이중의 타자화를 거쳐 만들어진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다.
키쿠치(2004)는 이를 탈근대주의 담론이 가진 비본질주의적 특성(anti-essentialism)을 갖지 못한 채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도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분법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기반 하에서 혼합(hybridization)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의 한계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야나기의 불교 미학 및 이를 기반으로 한 민예운동의 전지구적 수용은 서양에 의해 세워진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에 대한 정의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과, ‘오리엔탈리즘 속에서 나타나는 알지 못하는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느낌’이 예술과 종교를 동일시하는 야나기의 신비주의적인 사상적 기반이 맞물리게 되며 가능하게 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또한, 키쿠치에 따르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와 러스킨 등에 의해 서양에서 미술공예운동이 이미 한 차례 진행되고 있었던 역사적 배경 또한 야나기의 민예운동의 수용을 원활하게 한 요인이다. 즉, 야나기의 사상은 서양 근대의 사상적 영향력을 받은 결과로서 탄생한 것이기도 하며, 이것이 동양적인 것, 또는 일본적인 것으로 재명명되었으나, 결국 그 근본이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과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었기에 쉽게 수용이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내용적인 차원에서 드 발(1997)과 키쿠치(2004)가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비판 지점은 이들의 사상 속에서 드러나는 신비주의적 측면(mysticism)에 대한 비판이다. 키쿠치는 전통을 중시하는 관점 그들의 관점과 몰아적 특징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사상이 실제 그들의 도예 활동 및 작품에 대한 평가 행태와 모순을 띠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Kikuchi, 2004). 사상적 경향성과 실제 도예활동 사이의 이러한 모호성은 리치와 야나기의 공예에 대한 생각과 미적 판단의 기준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도록 만들고, 그 결과 이를 교조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어 이들의 계보를 잇는 이들이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드 발은 보다 강한 어조의 비판을 수행한다. 그는 라프카디오 헌과 휘슬러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동양에 대한 이국적이고 맬랑콜리한 느낌으로 점철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리치는 동양, 그리고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신비로운’ 대상으로 존재지웠고, 이러한 동양에 대한 관점이 야나기에게 굉장히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고 주장한다(de Waal, 1997). 이는 야나기의 사회경제적 배경과도 연결된다. 드 발은 “야나기 자신과 일본 시골 지역의 관계는 민족지학자들과 같은 것이었다”(de Waal, 1997)고 주장한다. 시골의 도예가 등 직인들은 리치에게만큼이나 야나기에게도 이국적인 존재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드 발은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야나기가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신비주의 관점을 일본 및 동양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하였으며, 야나기의 사상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상적 발전을 이루어나갔던 리치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어보인다.
2. 버나드 리치의 꿈 – Marriage of Cultures
동양과 서양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결합을 꿈꾸며, 그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자임하려 했던 리치와 야나기가 사실상 동양에 대한 피상적 수준의, 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위와 같은 비판들에 따르면 그들이 추구했던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결합이란 또 다른 왜곡과 타자화를 낳는 과정이 되어버린다.
드 발과 키쿠치 등의 비판적 연구는 리치와 야나기가 처해있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촉발되는 한계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 보이기도 하다. 리치가 동양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20세기 초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과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또한 동양과 서양에 대한 본격적인 교류가 막 시작되던 당시, 국제적인 삶의 시작과 함께 서양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최초로 시도한 일본은 동양에 대한 이미지를 점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어린 시절 동양에서의 삶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던 리치가 동양을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일본행을 결정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개인사적인 흐름 속에서 리치와 야나기가 동양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대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 속에서 이러한 한계는 그들이 극복해내기 힘든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비판적 평가가 오히려 리치가 추구했던 문화결합이라는 목표와 이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리치는 자신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특수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이를 목표로 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나갔지만, 그가 자신을 동양과 서양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결합방식을 온전히 깨우친 이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동양에 대한 애착과 동양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서양이 동양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기본위적이고 피상적인 관점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리치는 서양이 동양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양을 알기 위한 보다 높은 수준의 노력을 수행해야 함을 지적하였으며, 그의 온 생애 또한 동양을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었다(Suzuki, 2004).
또한 어린 시절부터 동양 문화에 노출되었던 그에게 동양과 서양이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문화들의 다양성을 대변하는 말이었”(Suzuki, 2004)다. 즉 리치는 동양과 서양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이는 그가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방식이 그가 표현하는 결혼이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는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부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중성의 극복이라는 사상적 구조 하에서 따라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특성을 여러 대립항을 통해 설명해낸 부분은 내용적인 부분에서 논란의 여지를 피할 수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그의 타문화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태도는 타문화를 타자화하는 서양중심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리치에게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 있어 두 문화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자발적인 만남과 소통, 화해를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리치의 문화 탐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리치는 시대의 변화로 말미암은 문화 간 결합의 필연성과 함께 그것의 어려움 또한 온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리치는 동양과 서양을 그저 다른 것이 아닌, 이중성의 개념 하에서 서로 다른 두 극단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두 극단 사이의 조화란 굉장히 어려운 것임에도 그러한 어려움은 곧 이러한 결합의 시도가 더욱 큰 결실을 가져올 것임을 반증하는 증거였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는 처음으로 극단들 사이의 진정한 혼합,
또는 섞임이, 그것이 삶에서든 예술에서든 간에, 우리가
실현하기 위해 분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목표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ai no ko”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따라오는 경멸의 어조란 동서양이 만남에 따라 결혼뿐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오게 될 끔찍한 혼종의 결과에
대한 정당한 경멸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라는 점 또한
명확해졌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나는 일본과 영미권 사이의
결혼이란 그 자식에 대한 순전한 잘못이라고 믿었다. 설령
그것이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두 극단이 온전히
새로운 전체로서의 하나가 됨은 두 극단 사이의 차이에 따라 그
어려움과 가치가 함께 증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Suzuki
2004, 6-7에서 재인용).
결국 요약해보면, 설령 내용적으로 그의 동양 문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의 부단한 철학적 고민과 실천적 삶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속에서 보편적인 인본주의 가치를 향한 그의 열망의 표현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삶과 예술이란 20세기의 역동적인 문화적 교류의 주목할만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문화의 이해와 갈등이라는 문제가 21세기에 접어들며 핵심적인 화두로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점은 리치의 직관적 통찰이 적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삶이란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본 채, 하나의 보편 인류의 달성이라는 원대하고 대담한 사회적 기획을 위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방법론적인 고민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실천의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연속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리치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 비판점을 제시하고 있는 드 발과 키쿠치의 주장은 동서양의 주체적 상호 이해를 원했던 리치의 사상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맺으며
리치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 아름다움 등의 진리는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성이란 “직관적 깨달음을 돕는 훌륭한 조수”(Leach, 1951)였다. 이는 20세기 지성사에 큰 충격을 주었던 토마스 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지식의 발전이 더욱 뛰어난 미학적 가치를 지닌 패러다임의 대체과정을 통해 수행된다는 그의 말은 이성적 도구의 충분한 활용 속에서, 결국 세상에 대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직관적 통찰이 지식의 진보를 궁극적으로 추동하게 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즉 인류의 지식이란 이성에 기반한 합리주의적 차원의 것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봤을 때, 리치를 둘러싼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재고해볼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문화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서양 문화로부터의 영향이 시라카바파와 야나기의 동양에 대한 이해를 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면, 동양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동양인이라는 존재론적 특성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이들만이 자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이러한 개인의 존재론적 특성들이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주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탈아(脫我)적 과정, 즉 나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문화적 현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현상의 이면으로 들어가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근원을 마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마주한 문화의 근원의 지평과 나 자신의 지평 사이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내’가 그 ‘문화’를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버나드 리치가 동양에 대한 직관적 통찰을 추구했던 과정은 이러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본에서의 삶 속에서 마주한 경험들 속에 내재된 문화적 특성들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주체적 수용의 과정 속에서 리치는 동양을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주체적인 수용과 만남의 과정을 문화권 사이의 만남의 과정으로 확장시키려 시도한다. 그는 주로 도자기라는 문화적 표현물을 통해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도자기와 인간의 본질을 동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도자기의 본질과 공예미에 대한 탐구는 간결성(parsimony)과 설명력(explanatory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power)을 갖춘 미적 기준에 대한 아름다운 주장을 도출해내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양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나아가 통합 인류의 문화적 기반이 되는 새로운 인본주의적 가치가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던 리치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는 이성중심적인 서양적 사고에서 벗어나, 문화를 이해하는 적절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 정치학자 샹탈 무페의 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은 리치의 사상과 실천이 지니는 적절성과 중요성을 대변해준다.
『경합들』에서 나는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실천들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만약 예술적 실천이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적 반응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자원들의
사용 속에서 예술적 실천들이 인간존재의 감정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같은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가능성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이것이 예술이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는 지점이다(Mouffe, 2018).
문화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아름다움이 반영된 수공예 도자기는 리치에게 있어 무페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규범적 의미를 지니는 예술적 실천이었다. 동서양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조화롭게 투영해낸 도자기와 그것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의 대중화와 일상화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롭게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리치의 상정적 모티프인 ‘생명의 나무’ 모티프는 이러한 지적 고민의 결과를 담아내는 예술적 표현이다. 인류라는 하나의 뿌리 위에서 갈라져나온 서로 다른 문화는 나무의 줄기들로 표현된다. 좌우로 뻗은 두 개의 가지는 각각 동양과 서양을 암시한다. 가지들은 얽히는 형태로 끊임없이 겹쳐지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각각의 문화들 사이의 만남을 뜻한다. 나뭇가지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은 각각의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로서, 리치가 추구하고자 한 이상화된 예술가의 형상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변부에는 리치가 초기부터 즐겨 사용하던 물고기의 형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동양의 장식적 특징을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표현 기법은 영국의 전통적인 기법인 슬립웨어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통합적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그림1] 버나드 리치, <생명의 나무>, 1923, 슬립웨어, 43cm, V&A 소장
현재 국제정치학계에서 등장하고 있는 절충주의(eclecticism)의 흐름은 리치가 추구했던 결합의 시도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결합, 합일은 리치에게 있어선 삶의 최상의 목표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의 복합성의 증대되고, 국제정치학 분야의 성숙과 함께 보다 복합적으로 세계를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증대되는 것에서 기인한다. 아차리아와 부잔(2019)의 지구 국제정치학(Global IR) 주장, 자연과학의 복잡계 이론(complexity theory)을 국제정치학에 적용하려는 시도, 영국 학파(English School)의 국제사회론 등이 모두 그러한 시도와 맥을 함께 한다. 이러한 학문적 조류의 형성은 리치의 사상과 실천이 예술계를 넘어 인류의 지적 탐구 과정의 전반 속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치에 대한 탐구는 문화의 무대가 대두되는 현재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화 간 결합이라는 전인류적 목표의 선구자가 되기를 자처했던 그의 모습은 그가 만년에 제작한 도자에 순례자의 모습으로 자화상처럼 투영되어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듯하다.
[그림2] 버나드 리치, <순례자>, 1968, 스톤웨어, 33cm, Bonhams 소장 4. 흙을 통해 동서양의 삶을 빚어내다: 버나드 리치의 ‘동서양의 결혼’_규슈도자문화관 참고문헌 <1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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